염기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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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여담
4.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인.

2. 생애[편집]


1935년 출생으로 알려져 있으며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했다. 현성일의 증언에 따르면 혁명 유자녀 2세대 출신으로, 만경대혁명학원도 졸업했으며 자연스럽게 김정일의 만경대학원-김일성대 라인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1960년대부터 조직지도부에서 사업하면서 김정일의 측근이 되었으며 그의 유일사상지도체계 확립에 큰 공을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1973년에 조직지도부 부부장에 임명되면서 당시 조직지도부에 있던 김정일의 측근이 되었다.

1977년 12월, 강원도당 책임비서에 임명되었으며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이후 1986년 2월, 조선로동당 6기 11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1988년 10월 량강도당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90년 5월, 량강도 인민위원장 자격으로 9기 1차 최고인민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당시 모스크바대학에 유학 중이던 사위 김재건이 말썽을 피우자 자기 손으로 혁명화를 보내버려 김정일의 칭찬을 받은 일이 있다고 한다.

1991년 12월, 리길송에게 량강도당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 자리를 물려주고 중앙으로 올라와 조직지도부 부부장이 되었으며 1992년 4월,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아 이중수훈자가 되었다. 더 이상 인민위원장이 아닌 관계로 1992년 4월, 최고인민회의 9기 3차 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에서 소환되었다. 1994년 6월,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에 이르렀으며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8년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이후 두문불출하고 있다. 1996년 프룬제 사건에 아들이 처형되면서 염기순도 독극물을 먹고 자살했다는 풍문도 있는데 1998년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명단에 염기순이 있다는 점, 그리고 2003년 보도에서 북한이 염기순에 대해 언급했다는 점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러다가 2003년 염기순의 아들 염진철이 길재경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는 뉴스가 나오면서 다시 화제가 되긴 했는데 구라로 드러나면서 개망신으로 끝났다. 조선중앙통신은 2003년 5월 19일 보도를 통해 "이것은 전혀 근거 없는 새빨간 거짓말로서 반공화국모략에 이골이 난 자들이 꾸며 낸 또 하나의 황당한 날조극에 지나지 않는다. (...) 염기순의 아들문제도 다를바 없다.그는 지금 정상적인 자기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만약 모략가들이 떠드는것처럼 염진철이 현재 망명지에 있다면 그는 진짜 염진철이 아니라 그 어떤 불순한 정치적목적을 위해 꾸며 낸 유령인물일것이다."라고 정면 반박에 나섰다. 이를 보면 염기순의 실종은 적어도 숙청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추론이 가능하다. 현성일은 염기순이 병환으로 사망했다고 언급했으나 애국렬사릉에 묻혀있다거나 하는 것이 확인된 적은 없다.

3. 여담[편집]


렴기순이 아니라 염기순이 맞으며 북한에서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염기순의 장남 염재평은 정무원 해운부 당위원회 부비서를 지냈다고 한다.

4. 참고문헌[편집]


  • 김현식, 손광주, 다큐멘터리 김정일(서울: 천지미디어, 1997)
  • 현성일, 북한의 국가전략과 파워엘리트: 간부정책을 중심으로(서울: 선인, 2007).
  • 통일부 정보분석국, 2000 북한 주요 인물 자료집(서울: 통일부,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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