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자치권 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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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volution in the United Kingdom, UK Devolution
1. 개요
2. 아일랜드
3. 스코틀랜드
4. 웨일스
5. 북아일랜드
6. 잉글랜드
6.1. 주민투표를 통한 광역 자치의회 신설 시도
6.1.1. 그레이터런던
6.1.2. 노스이스트 잉글랜드
6.2. 현재
6.3. 여론조사
7. 토니 블레어의 입장
8. 기타
9. 참고 자료
10. 참고 문서


1. 개요[편집]


The Union will be strengthened and the threat of separatism removed.

(자치권 이양으로 인해) 연합은 보다 튼튼해질 것이며 분리주의의 위협은 사라질 것입니다.

노동당의 1997년 총선 매니페스토 중에서

영국의 자치권 이양에 대해 설명하는 문서.

시작은 아일랜드 지역의 민심 달래기였으나, 현재는 영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구성국으로서의 정체성 문제로 옮겨갔다. 특히 잉글랜드의 자치권 문제는 토니 블레어 내각에서 실패를 경험한 이후 직접 건드리기 어려운 역린 같은 존재가 되었다.

2. 아일랜드[편집]






아일랜드는 왜 둘로 갈라졌는가?
1830년에 다니엘 오코넬이라고 하는 아일랜드 정치인폐지협회라는 아일랜드 민족주의 정당을 창당한 후, 연합왕국 수립의 근거가 된 1800년 연합법폐지하여 아일랜드 왕국을 부활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1870년에는 아이작 버트라는 아일랜드 정치인[1]자치정부 위원회라는 단체를 만들었고 이후 자치동맹으로 재편된 뒤 1874년 총선에서 60명의 의원이 당선된 뒤 아일랜드 의회당(IPP)이 되었다.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총리가 1886년 아일랜드 정부법을 상정했으나 자유당 연합주의자들의 반대로 93표가 빠져나가서 찬성 313표 반대 343표로 부결되었다. 글래드스턴 4기 내각에서 1893년 아일랜드 정부법이 하원 통과되었지만 상원 부결되었다.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총리 재임기에는 1914년 아일랜드 정부법이 상정되었으나,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연기법을 통과시켜 자치권 이양을 연기했다. 이 과정에서 아일랜드 공화국 형제단을 중심으로 1916년에 부활절 봉기가 일어났고 영국이 주동자를 처형하고 주동자가 아닌 신 페인을 의심하는 바람에 아일랜드 독립 여론에 불을 질렀다. 그 결과 1918년 총선에서 신 페인이 아일랜드 의석 대부분을 쓸면서 독립선언을 하고 아일랜드 독립전쟁으로 이어진다.

1920년에 영국은 북아일랜드와 남아일랜드를 분할하여 자치권을 주는 1920년 아일랜드 정부법을 통과시켰다. 남아일랜드는 영국-아일랜드 조약, 아일랜드 내전으로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사실상 독립한 뒤 아일랜드로 국호를 고쳤고 북아일랜드는 영국에 남았다.

아일랜드의 자치권 논의는 영국 정치사에 있어서 거대한 나비효과를 불러왔는데 그 이유는 아일랜드의 자치권 논의를 보고 역차별을 느낀 스코틀랜드의 일부 정치인들이 1894년에 자치 위원회를 세워 자치권 이양을 촉구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2] 이 작은 몸부림이 2차 세계대전 후 두 번의 자치권 이양 주민 투표를 거쳐 자치정부와 의회를 받았지만 자치운동으로 인해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던 스코틀랜드 민족주의가 사라지지 않아서 오늘날의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으로 이어진다. 웨일스 또한 스코틀랜드와 비슷한 시기에 자치권을 이양 받았다.

3. 스코틀랜드[편집]


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스코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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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이양(devolution)이란?, 권력 이양 합의

스코틀랜드로의 권한 이양 과정의 시작은 19세기 아일랜드 자치운동의 영향을 받고 일어난 스코틀랜드 자치운동을 뿌리로 보고 있으며, 그로부터 수십년이 걸려 많은 권한을 이양 받았으나 영국 정부의 미숙한 지방 분권 정책으로 인해 생긴 구성국간 갈등을 수습하지 못하여 오늘날까지 독립여론이 식지 않고 있다.

스코틀랜드가 이양 받은 권한은 연방의 주 정도 되지만, 스코틀랜드가 영국의 중앙 정부에서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 적기 때문에 내부에서 불만이 많다. 이는 자치권을 던져주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판단했던 토니 블레어 내각과 노동당의 실책에서 기인한다.[3] 그 결과 지방 행정, 의회는 스코틀랜드가 대부분을 행사 하는데 외교권, 하원 의회 등은 여전히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한 영국이 행사하고 있어서 브렉시트 투표를 막지 못했고 이후 독립의 불씨가 살아나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스코틀랜드로의 권한 이양에 대한 문제점은 다른 구성국의 문제점과 공유한다.

3.1. 1978년 이전[편집]


아일랜드 자치권 논의 과정에서 스코틀랜드 자치운동이 일어나 이를 반영하여 영국 의회에서 스코틀랜드 자치의회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당시 추세로는 이대로 계속 가기만 하면 자치권 이양을 할 수 있었지만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모든 것이 멈췄다. 당시에는 자유당이 스코틀랜드 자치권 이양에 호의적이었다.

3.2. 1979년 스코틀랜드 자치권 이양 주민투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1979년 스코틀랜드 자치권 이양 주민투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양차대전 이후 1967년 스코틀랜드 해밀턴 보궐 선거에서 SNP가 승리한 것을 시작으로 1974년 10월 영국 총선에서 SNP가 11석을 획득하는 바람에 자치권 논의가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여기에 1974년 킬브랜던 위원회(헌법 위원회)가 자치권 이양을 권장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상당수의 스코틀랜드 주민이 권한 이양에 찬성하고는 있었지만 압도적인 다수가 아니었고 자치권 이양으로 인해 독립운동을 부채질 할 것이라고 믿었던 노동당의 반대파들에 의해 총 유권자의 40%이상이 찬성할 시에 가결한다는 조건을 추가해버렸다. 결국 이 투표는 조건 미달로 부결되었고 원내 SNP의원 전원은 이후 제임스 캘러헌불신임 결의안에 찬성투표하여 제임스 캘러헌 내각을 실각시켰다. 이후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하여 마거릿 대처 내각이 집권했다.

3.3. 1997년 스코틀랜드 자치권 이양 주민투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1997년 스코틀랜드 자치권 이양 주민투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보수당 내각 시기에는 자치권 이양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지지파들이 이를 촉구하는 캠페인을 열었다. 1997년 총선을 앞두고 토니 블레어 전 노동당 대표가 스코틀랜드 정부와 의회를 신설하는 주민투표를 공약으로 내걸었고 418석을 얻어 토니 블레어 내각이 집권했다.
투표는 정부와 의회 신설, 조세권 이양으로 용지가 두장이었고 자치정부와 의회 신설 여론은 지난 투표보다 높았다. 투표결과 정부 및 의회 신설은 찬성 74.3%, 반대 25.7%, 조세권 이양은 찬성 63.5%, 반대 36.5%로 가결되었다.
1998년 스코틀랜드법에 의해 1999년에 1885년부터 존재했던 스코틀랜드 사무국을 폐지하고 스코틀랜드 정부와 의회를 신설했다.

3.4. 2014년 스코틀랜드 독립 투표[편집]


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투표



더 가디언의 설명
토니 블레어를 포함한 당시 노동당의 권한 이양파 정치인들은 자치권 이양을 하면 독립파들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스코틀랜드 노동당의 지지층을 흡수한 SNP가 스코틀랜드 의회의 의석을 채워가고 있었으며 2010년대에는 절반 이상의 의석을 확보했다. 투표를 통한 독립 운동을 목표로 했던 SNP와, 당시의 높은 반대여론을 바탕[4]으로 독립여론을 잠재우고자 했던 캐머런 내각의 계산에 의해 2014년 9월 18일에 독립투표를 진행하였다. 투표는 찬성 44.7% 반대 55.3%로 부결되었으며 보수당 내각은 당시 독립 여론을 잠재울 조건을 내걸었던 추가적인 권한 이양을 해야 했다.


3.5. 브렉시트와 독립 투표 재추진[편집]


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브렉시트


독립투표 부결로 독립여론이 한동안 잠잠해질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2016년 6월 23일 브렉시트 투표에서 찬성 51.89%, 반대 48.11%로 가결되었다. 다수의 스코틀랜드인들은 잔류에 투표했기 때문에 독립운동의 불씨가 살아났으며 이를 바탕으로 SNP가 2차 독립투표를 추진할 준비를 하고 있다.

2022년 12월 6일, 노동당이 차기 총선에서 여당이 될 경우 스코틀랜드로의 자치권 이양에 변화가 있을 것을 예고했다. 그러나 SNP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4. 웨일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웨일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웨일스 출신 BBC 앵커 휴 에드워즈의 웨일스 자치권 강연
웨일스는 스코틀랜드와 비슷한 시기에 자치권을 이양받았으나 그 권한은 스코틀랜드에 비해 적었다. 이후 2011년도에 추가 자치권 이양 주민투표가 있었고 다수가 찬성하여 추가적인 자치권을 이양 받았다. 따라서 현재는 의회가 Parliament로 승격되었고 정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처럼 총리와 장관을 두고 있다.

5. 북아일랜드[편집]


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북아일랜드

1929년대부터 1970년도까지 자치가 존재했다가 북아일랜드 분쟁으로 소멸했다. 이후 벨파스트 협정으로 북아일랜드 분쟁을 봉합하고 1999년에 부활한 자치의회는 90석의 의원을 선출하는 단원제 의회이다. 선거는 의회해산이 없다는 가정 하에 5년마다 치러지며, 북아일랜드 전역에서 소선거구제권역별 비례대표제를 통해 선출된다. 원내 모든 의원들은 본인이 영국 연합주의자(Unionist, U)인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Nationalist, N)인지 기타(Other, O)인지 등록해야 하며, 이 때 가장 많은 의석을 가진 진영에서 총리(First Minister)를, 두 번째로 많은 의석을 가진 진영에서 부총리(deputy First Minister)를 지명하고 영국 국왕이 형식적으로 이를 임명한다.

6. 잉글랜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웨스트 로디언 질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잉글랜드 국기.svg잉글랜드의 자치 문제
웨스트 로디언 질의
그레이터런던 의회 신설 주민투표(1998)
노스이스트 잉글랜드 의회 신설 주민투표(2004)
EVEL
영국의 자치권 이양



2000년대 후반~2010년대부터 잉글랜드 주민들 사이에서 역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에는 토니 블레어 내각이 지역별 권한이양 계획 하에 그레이터런던부터 차근차근 진행하기로 했으나 두번째 투표였던 노스이스트 잉글랜드 주민투표에서 부결되자 계획을 무기한 연기했다. 이후에는 자발적으로 뭉친 광역권에 자치권을 일부 이양하는 식으로 전략을 틀었다. 역차별 여론이 일었던 당시 영국 의회에서 잉글랜드 자치정부 및 자치의회, EVEL, 지역별 권한이양과 같은 대안을 제시했으나 2015년에 EVEL이 채택됐다가 2021년에 폐기된 것 외에는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없다. 잉글랜드로의 자치권 이양 사례가 여럿 있긴 하지만 나머지 구성국들에 비하면 지방자치를 강화한 수준이다.

6.1. 주민투표를 통한 광역 자치의회 신설 시도[편집]


[...]overwhelming rejection killed the idea (of regional devolution) dead.

압도적인 거부가 (지역단위 자치권 이양) 발상을 죽여버렸다.

제임스 미첼, 영국의 자치권 이양, 맨체스터: 맨체스터 대학 출판, 2009, p210[5]

잉글랜드의 자치권 이양 주민투표는 그레이터런던과 노스이스트 잉글랜드 두지역에만 실시했으며, 이 중 그레이터런던만 가결되어 의회가 신설되었다.

6.1.1. 그레이터런던[편집]


1963년 런던 정부법에 의해 만들어졌다가 1985년 런던 정부법에 의해 의회가 소멸한 뒤, 1998년 주민투표에서 다수의 동의로 가결되어 2000년에 그레이터런던 지역으로서 자치의회가 만들어졌다. 그레이터런던은 잉글랜드에서 유일하게 자치지역으로서 자치권을 이양받은 곳이다.

6.1.2. 노스이스트 잉글랜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노스이스트 잉글랜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북부 잉글랜드는 남부 잉글랜드와 다른 지역색이 있는 곳이며, 특히 이 지역은 노동당 텃밭인 지역이다. 그레이터런던 주민투표가 가결되어 탄력을 받은 토니 블레어 내각은 2004년에 이 지역에서 주민투표가 다수의 반대로 부결된 뒤 원래 진행하려고 했던 계획을 무기한 연기했다.

6.2. 현재[편집]


2004년 노스이스트 잉글랜드 주민투표 부결로 이후 계획이 좌절된 이후 자발적으로 연합한 행정구역에 자치권을 이양하는 형식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주민투표를 통해 지역으로서 이양받은 그레이터런던과 2015년에 자치권을 이양받은 콘월을 제외하면 9개의 연합 기구(Combined authority)가 신설됐다.[6]
아래는 그레이터런던을 제외하고 2004년 이후 자치권을 이양 받은 행정구역들이다.

아래는 시장이 없는 연합 기구다

6.3. 여론조사[편집]


영국 사회적 태도 조사(2021) 27쪽 중에서

2020
2018
2015
현상유지
55%
52%
50%
의회(Assembly)[7]
20%
18%
23%
의회(Parliament)[8]
22%
22%
20%
그 외 자료
전체적으로는 증가세이다. 스코틀랜드 수준의 자치의회(Parliament)를 잉글랜드 단일 지역에 세우느냐 런던 수준의 자치의회(Assembly)를 잉글랜드 내의 여러 지역에 세울 것이냐를 두고 여론이 갈리고 있다.

7. 토니 블레어의 입장[편집]


토니 블레어의 자치권 이양 이후 당시 집권당이었던 노동당의 예상과 달리 분리주의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자극하는 역효과를 낳았기 때문에 강성 연합 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실패한 정책이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당시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는 몇가지 인터뷰를 통해 당시와 이후의 생각을 남긴 적이 있었다.

"I was never a passionate devolutionist," "It is a dangerous game to play." "However, though not passionate about it, I thought it inevitable."

저는 열광적인 자치권 이양 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자치권 이양은 위험한 게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지향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토니 블레어의 회상: 저는 자치권 이양을 확신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위험했습니다. - Scotsman(2010)

당시 알려진 행적과 달리 실제로는 토니 블레어 자신도 자치권 이양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확신이 없었고 그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특별히 자치권 이양을 이념적으로 지향하거나 하진 않았다고 한다. 다만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추진했다는 것이다. 이후 자신의 자치권 이양 정책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인터뷰를 몇번 남겼는데 그 중 2021년도에 itv와 한 인터뷰에 의하면 자신의 자치권 이양의 실수를 인정하면서 아래와 같은 말을 남겼다.

"If the Labour Party hadn’t implemented its manifesto commitment to do devolution in 1997, the union would already be in tatters."

노동당이 1997년에 마니페스토대로 자치권을 이양하지 않았다면 영국은 진작에 누더기가 됐을겁니다.

토니 블레어가 독립의 불씨를 살린 자치권 이양의 취약점을 인정하다 - itv(2021)

이미 영국은 아일랜드의 자치권을 수차례 연기해오다가 전쟁 후 (남부 한정이긴 하지만) 독립해줘야 했던 과거가 있었다. 이후에도 스코틀랜드의 자치권 이양 요구를 연기 혹은 부결시키거나 묵살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1997년에도 그랬다면 그때대로 무슨 일이 생길 지는 예상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I do think one of the weaknesses in the way we approached devolution was not to build real cultural ties and emphasise the enormous things that the different countries in the United Kingdom have in common."

"우리가 권한 이양에 대해 접근했던 방식에 대한 한가지 약점은 진정한 문화적 유대 구축과 영국의 구성국들이 가진 많은 공통점을 강조하는데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토니 블레어가 독립의 불씨를 살린 자치권 이양의 취약점을 인정하다 - itv(2021)[9]

그러나 그저 권한을 던져주고 뒤는 생각하지 않은 듯이 마무리 된 것은 사실이었고 같은 인터뷰에서 이를 인정하였다. 즉, 자치권 이양 자체는 시대의 흐름상 피할 수 없는 문제였지만 자신이 잘못한 부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8. 기타[편집]


1997년에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는 다우닝가 10번지로부터 벨기에식 연방제는 "비용이 많이들어서 비효율적"이라며 피해야 할 정치체제라는 조언을 들었다.[10] 그런데 그가 추진했던 자치권 이양 정책은 (결과적으로는) 영국의 구성국간 지역갈등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1999년 이후의 지방분권 체제의 뼈대는 토니 블레어의 자치권 이양 정책을 기반으로 조금씩 바꾼 것인데 자치권 이양 자체의 장단점을 떠나서 그가 추진했던 정책은 토니 블레어 본인조차 미숙함이 있었다고 인정할 정도로 문제가 있었다.

9. 참고 자료[편집]


영국 관련
스코틀랜드 관련
잉글랜드 관련

10. 참고 문서[편집]


  • 구성국
  • 웨스트 로디언 질의[11]
  • 지방자치, 지방분권
  • 지역주의
  • 영국 연합주의
  • 영국/정치
  • 제임스 캘러헌[12]
  • 마거릿 대처[13]
  • 토니 블레어[14]
  • 데이비드 캐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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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로 하는 일은 변호사였는데 생계 문제로 겸직을 하여 의정활동을 많이 하지 못하는 등의 이유로 당 내 영향력이 그렇게 높지 않았다. 아이작 버트는 연방주의자였기 때문에 아일랜드가 고도의 자치권을 갖되 영국에 남기를 원했다.[2] 당시에는 20세기 만큼 자치운동이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를 두고 아이리시 타임즈가 스코틀랜드의 자치운동은 아일랜드보다 적극적이지 않았다라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3] 당시 스코틀랜드 국민당은 자치권 이양을 독립운동의 절차 중 하나로 보고 있었고 노동당은 스코틀랜드로 자치권을 이양하면 문제가 해결되어 독립세력이 알아서 사라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4] 투표 직전의 여론은 근소하게 높은 수준으로 좁혀졌다.[5] Introduction to devolution in the United Kingdom - UK Parliament를 재인용.[6] 노스이스트 광역권은 형성은 됐는데 장(Mayor)이 없다.[7] 런던 수준의 지방자치[8] 스코틀랜드 수준의 지방자치[9] 전체 인터뷰[10] 벨기에의 연방제는 국가의 분열을 막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에 가깝기 때문에 정치위기와 같이 그에 따른 비효율을 감수할 수 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도입을 피해야 한다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니다. 문제는 영국의 정치구조가 단순히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에 자치권만 던져준다고 해결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토니 블레어도 바보는 아니라서 잉글랜드 지역단위 자치권 이양을 추진하려 했지만 노스이스트 잉글랜드의 자치권 이양 투표가 압도적인 다수로 부결된 이후 그레이터 런던을 끝으로 지역단위 자치권 이양을 포기해야 했다. 현재는 자발적으로 뭉치는 방식으로 자치권을 이양하고 있지만, 웨스트 로디언 질의를 해결하기에는 잉글랜드로의 자치권 이양 속도가 지나치게 느리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지역단위 자치권 이양 계획이 파기되었기 때문에 현재로서 영국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것 밖에 없다. 즉, 영국 정부도 벨기에를 보고 뭐라할 처지가 아니게 되었다.[지역제한] 지역제한이 걸려있음.[11] 웨스트 로디언 지역구 하원의원이 웨스트민스터에 던진 잉글랜드 자치에 대한 질문이다. 영국인과 잉글랜드의 정체성에 관한 중대한 해결과제지만 인구 구성비율과 통일되지 않은 여론 등으로 인해 현재까지 해결되지 못했다.[12] 1979년 스코틀랜드 자치권 이양 주민투표를 노동당 강성 연합주의자들의 이상한 조항으로 인해 부결시킨 책임으로 SNP 의원 전원이 불신임 결의안에 동의하는 바람에 의원을 해산해야만 했다.[13] 스코틀랜드 자치권 요구를 철저하게 무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알렉스 새먼드 전 SNP 당수는 이를 두고 비의도적으로 자치권 요구를 자극시켰다고 평했다.[14]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에 처음으로 자치권을 이양했다. 그러나 내각의 미숙함으로 인해 그의 자치권 이양 정책에 대해 논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