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제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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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제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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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40px-Imperial_seal_of_Ming_dynasty.svg.png
명의 연왕
신규 책봉

초대 주체

황제 즉위로 인해 폐지




명 제3대 황제
성조 영락제 | 成祖 永樂帝

출생
1360년 5월 2일
응천(應天)
사망
1424년 8월 12일
유목천(楡木川) 진중
(현 내몽골 자치구 시린궈러(錫林郭勒) 맹(盟)[1] 둬룬(多倫) 현)
(63세)
연호
영락(永樂)
재위
1402년 7월 17일 ~ 1424년 8월 12일
(22년 26일)
{{{#800000 묘호}}}
태종(太宗) → 성조(成祖)[2]
{{{#800000 시호}}}
계천홍도고명조운성무신공순인지효문황제
(啓天弘道高明肇運聖武神功純仁至孝文皇帝)
{{{#800000 능호}}}
장릉(長陵)
{{{#800000 }}}
주(朱)
{{{#800000 }}}
체(棣)
{{{#800000 }}}
국서(國瑞)
{{{#800000 황후}}}
인효문황후(仁孝文皇后)
{{{#800000 부황}}}
홍무제
{{{#800000 모후}}}
효자고황후

1. 개요
2. 생애
2.1. 연왕 시절
2.3. 대내적 업적
2.4. 대외적 업적
3. 평가
3.1. 비판
4. 조선과의 관계
5. 일화
6. 출생의 비밀
7. 현대 매체
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明太宗.jpg

명나라 제3대 황제. 묘호는 처음에는 태종(太宗), 나중에는 성조(成祖), 시호는 계천홍도고명조운성무신공순인지효문황제(啓天弘道高明肇運聖武神功純仁至孝文皇帝). 휘는 주체(朱棣). 태조 주원장의 4남. 중화 역사에서 손꼽히는 정복군주이자 명 왕조의 전성기를 연 황제이지만 신료들에 대한 지나치게 “불필요”하고 “잔혹한” 숙청 때문에 비판도 많이 받는 인물이다. 환관들을 이용한 측근 정치를 과도하게 하였다는 비판도 있다. 한편 부황 홍무제의 정책 중 상당수를 뒤집었기 때문에 학자들은 영락제의 즉위 및 통치를 명의 제2의 건국으로 보는 데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고 한다.[3]


2. 생애[편집]



2.1. 연왕 시절[편집]


1370년 11세 때 연왕(燕王)에 봉해져 지금의 북경 일대의 제후가 되었으나 바로 이때 북쪽으로 간 것은 아니었고, 진짜로 북경 지역으로 간 것은 1380년, 21세 때였다. 이후로 그 지역의 정치와 군사를 총괄했다. 당시로써는 명나라의 최북방 지역으로[4] 주원장의 북진으로 인해 북방으로 물러간 몽골족의 침입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이를 막아냈다.[5]

그런만큼 무골로 성장했고 성품도 대단히 호방하고 목표 의식이 뚜렷했다. 이런 능력 때문에 주원장은 그를 내심 후계자로 염두에 두기도 했으나 장자 우선 원칙에 따라 장남 주표를 황태자로 삼았고, 주표가 일찍 죽자 그 아들인 주윤문을 황태손으로 삼았다.[6][7]


2.2. 정난의 변[편집]


1398년, 홍무제가 죽고, 건문제가 즉위했는데, 건문제와 그 측근들은 숙부 주체를 비롯한 다른 숙부들이 막강한 군권을 지니고 있는 것을 황제권을 유린할 수 있는 것으로 우려하여 다섯 번왕을 없애는 등 각지의 번왕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펼치자 주체는 조카와 그 측근들이 자신을 노리는 것을 알아채고 북경에서 거병, 건문제와 내전을 벌였다. 비록 주체의 전력은 건문제에 비해 훨씬 열세였으나 주체 본인의 기량과 건문제의 우유부단함이 결정적으로 작용해 승기를 잡은 정난군은 파죽지세로 수도 남경까지 몰아쳤고 건문제는 궁에 불을 지른 후 행방불명. 결국 남경은 함락되었고 주체는 황제에 등극했다.(정난의 변)

중국의 많은 황제들 중 영락제의 개성적인 점은 일신의 무용과 관련한 기록이 유난히 많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이 기록들이 야사나 설화가 아니라 명나라 정사에 기록이 되어 있다. 정난의 변 때 스스로 난전에서 말을 갈아타고 화살이 떨어지면 직접 칼을 휘두르며 처절하게 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다름 아닌 연왕의 신분이었는데도 직접 진두에 서서 시석이 쏟아지는 중에도 앞장서서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가히 중국 역사상 몇 안 되는 무인 황제 중 한 명. 특히 정난의 변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때 영락제의 무인적 기질과 군사적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2.3. 대내적 업적[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90px-Yongle_Emperor.png}}}
장릉 능은전에 있는 영락제 동상.

우선 정치적으로는 수도를 남경에서 자신의 세력 기반이었던 북경으로 옮겼다. 본래 남경은 건문제의 세력 기반이었는데 북방에서 들어온 영락제로서는 찜찜했고, 아직 북방에서 몽골족의 침입이 계속되던 상황이다 보니 중간쯤에 위치한 곳으로 수도를 옮긴 것. 그리고 원나라가 버리고 간 도성 위에 아예 새로운 궁성을 축조했는데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자금성이다. 이후 북경은 지금까지도 중국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고 있다.

또한 문화 사업에도 힘을 쏟아 <영락대전>을 대표로 하는 많은 학술 서적을 편찬했으며, 이를 통해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황제 독재권을 강화하기 위해 번왕 제도를 폐지하고 전국에 어사를 파견해 지방까지도 효과적으로 황제의 권한이 미치도록 했다. 경제 발전에도 힘을 쏟아 효과적인 농사를 위해 수리 시설도 보완했으며 대운하를 개수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2.4. 대외적 업적[편집]


이런 내정적인 면도 뛰어났지만, 외정적인 업적은 정말 화려하다.[8] 연왕 시절부터 전장을 누빈 무인이었던 만큼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펼쳐 1410년 고비 사막을 넘어 친정한 이후 재위 기간 동안 무려 다섯 차례나 몽골을 친정했다. 역대 중국 황제 중 고비 사막을 넘어 친정한 황제는 북위태무제, 명의 영락제, 강희제 세 명뿐인데 그나마도 태무제는 북방 선비족[9] 출신이었고 강희제는 만주족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영락제는 막북 친정을 감행한 유일한 한족(漢族) 황제라고 할 수 있다.[10]

하지만 막북 친정은 여러가지로 문제가 많았는데 영락제는 영락 8년에서 22년까지 전후 5차례에 걸쳐 대군을 이끌고 막북에 출정했다. 그 중 네 차례가 달단[11]과 올량합('우량카이')를 대상으로 삼았고, 한 차례는 와자[12]를 작전 대상으로 삼았다. 그의 친정은 앞서 세 차례가 규모면에서 컸고, 그 작전 지역도 알난하(현 몽골 악눈하)·홀란홀실온(현 몽골국 오란파탁 이남)·활란해자(현 내몽골 호륜호)와 굴렬인하(현 내몽골 내의 도하 지류인 귀류하) 등지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 후의 두 차례 친정은 모두 타타르의 아룩타이(Aruqtai)나 오이라트의 마흐무드(Mahmud)가 곧바로 도주함으로써 직접 교전을 하지 못하고 귀환하게 되었다.

이렇게 영락제는 막대한 병력과 거액의 군비를 들여 15년간에 다섯 차례나 친정을 하였다. 물론 이 친정으로 북변 몽골 초원 각 부족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달단, 즉 북원과 와자, 즉 오이라트의 명제국에 대한 위협을 제거했다는 효과도 있었으나, 다섯 차례에 걸친 장기간의 친정으로 말미암아 인력, 물자, 재정 등의 낭비를 가져오게 되었으니, 이후 인종·선종 양조의 정치에도 후유증을 남겨 주었다. 무엇보다 원정에 대한 노력과 투여된 재정을 고려한다면, 결과적으로 얻은 성과는 별로 없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몽골부족 중 어느 부족도 확실히 격파하거나 명나라 영향권 내에 편입시키지 못했고 영락제가 죽고 불과 25년 뒤에 중국 역사상 치욕스런 패전중의 하나인 토목의 변을 당하게 되어 예방효과도 없었다. 과거 한무제 역시 흉노원정에 엄청난 물자와 인력을 소비했지만 그만큼 보람이 있어 중국은 5호16국 때까지 흉노의 위협에서 수백년간 안전했던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13] 더욱이 영락제가 최후의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유목천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친정의 목적이 몽골 부족을 제압하는 데 있었다고 한다면,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북방 민족에 조종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다섯 차례의 친정 가운데 실제 전투가 일어난 것은 영락 8년의 제1차 원정과 12년의 제2차 원정뿐으로, 제3차 이후는 거의 직접적인 전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십만명의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사막을 행군한데 그쳤으니 영락제의 친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는 정도에 그쳤다고 할 수 있다. 영락제의 외정과 정치적 의의

이외에도 영락제는 베트남을 영토화시키기 위해 원정군을 파견하여 호왕조 베트남을 정복하기도 했으며 명나라 해안에 자주 쳐들어오던 왜구를 엄중히 단속하기 위해 조선의 태종[14]과 협력하여 대마도 정벌[15]을 추진하였다. 또한 왜구 관리를 위해 일본무로마치 막부와 협력하기도 했다. 특히 건문제 시절 일본 국왕에 봉한 무로마치 막부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츠일본국왕으로 봉하고 감합 무역을 실시했으며, 요시미츠가 죽자 그에게 '공헌'이라는 시호를 내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많은 외정 중에서도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바로 정화의 원정이다.[16] 1405년에 첫 함대가 파견된 이후 1433년 선덕제 치세까지 무려 7회나 대함대를 파견하면서 동남아시아, 인도양, 심지어 동아프리카케냐 해안까지 명의 함대가 진출, 나라의 위세를 크게 떨치고 많은 나라의 조공을 받았다.[17] 하지만 선덕제 재위 시기의 항해를 마지막으로 더이상의 해상 원정은 없었고 이후 명은 해금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내정과 외정 양면으로 명나라를 대제국으로 끌어올린 인물로 그의 치세는 영락성세(永樂盛世)라 불리며 후임 군주들인 홍희제선덕제인선지치(仁宣之治)와 더불어 나라의 전성기로 불린다. 이런 일세의 호걸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1424년 5번째 몽골 원정에 직접 나섰다가 병을 얻었고[18] 결국 진중에서 죽음을 맞았다. 향년 64세. 영락제가 죽자 국정의 혼란을 우려한 신하들은 마치 황제가 살아 있는 것처럼 식사를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홍희제가 워낙 순한 나머지 영락제의 죽음이 홍희제의 동생들에게 알려지면[19] 국정에 혼란이 올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영락제 본인의 원정은 아니지만, 서쪽 티무르 제국의 영웅 티무르 바를라스가 영락제가 다스리던 명나라 침공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20] 다만 티무르가 명으로 진군해 오던 도중에 죽어서 무산된다. 이걸로 인해 당대 최강대국의 정복군주였던 둘의 싸움이 꽤 큰 떡밥으로 남았다.


3. 평가[편집]


혈족과의 권력 다툼과 그 끝에 황제의 자리에 올라 나라를 번영시킨 명군의 반열에 올랐고, 숙청을 통해 권력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조선세조와 비슷한 점이 많은 인물이다.[21]

반란을 일으켜 조카를 폐위하고 즉위한 부분은 거의 판박이다. 환관들의 도움으로 황제가 됐다는 이유로 환관들의 세력을 키워 나라의 국운을 약화시킨 것도 세조가 계유정난의 공신들을 토사구팽하지 않고 우대해 나라에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한 것과 비슷하다. 영락제의 차남인 주고후도 비만이었던 형 주고치에 비해 부황의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훗날 조카 선덕제를 폐위시키고 황제가 되려다 발각되어 본인과 그 가족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몰살당했다.


3.1. 비판[편집]


대체적으로는 훌륭한 황제 중 한 명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만, 실책을 많이 저질렀고 비판점도 많이 존재한다.

일단 영락제의 숙청은 당시 기준으로 봐도 지나치게 잔혹했다.[22] 게다가 그 대부분이 아버지 주원장처럼 어느 면에서는 그보다 더 심하게 안 해도 되는 불필요한 숙청을 한 것이라 더욱 문제다.[23] 특히 방효유 일족에 대한 처형은 (이게 사실이었다는 전제하에서)[24] 악명이 높은데 물론 방효유 본인이 대놓고 연적 찬위[25] 등의 글을 쓰는 등 도전한 이상 죽이는 것까지야 전제 군주제인 명나라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일가족, 친척, 친구, 마지막에는 거주하던 마을 전체 주민(주민들은 방효유랑 같은 지역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아침에 일어나 끌려와 그 자리에서 칼을 맞고 즉사했다.)들을 끌어와 방효유 앞에서 차례대로 죽인 것은 명백한 잔혹행위에다 학살이라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 물론 중국에서는 황제에게 거역했다는 이유로 가족들을 연좌하는 일이 흔했지만 진짜 반역이 아니면 당사자만 처벌하는 게 보통이고 가족은 기껏해야 추방만 했으며, 반역을 했다고 쳐도 영락제 수준으로 마구잡이로 잡아죽이는 경우만큼은 거의 없었음을 감안하면 얼마나 잔혹했을 지가 답이 나온다. 물론 이런 짓을 통해 저항 세력을 억누르고 통치를 안정적으로 하긴 했지만 그건 영락제가 능력이 있으니까 가능했던 거고 그 밑으로 즉위하는 황제들도 그럴 거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 치명적이었다.[26] 어쨌건 목숨을 걸고 바른 말 하면 진짜로 목숨을 거두어가는 바람에 명나라에는 충언하는 사람이 잘 나오지 않게 되었고, 그 대가는 명나라와 주씨 황족들이 치르게 되었다.

또한 영락제의 지나친 대외 활동은 딱히 실속은 없는데 국가의 재정은 악화되었고 이는 후대 황제들의 부담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주요한 주장이다. 위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그는 한평생 몽골 원정에 매진했고 정화의 대항해 또한 그의 시대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대외 활동은 겉보기에는 화려해 보일지 모르지만 원정을 통한 실익은 거의 없었고 결국엔 나라 재정과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게 된다. 특히 정화의 항해 같은 경우는 명나라 스스로도 너무나 실익이 없어서 그 후로 두번 다시 같은 짓을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몽골 원정 역시 몽골부족들을 명나라 영향권 아래에 복속시킨다던가, 몽골족을 몰살하여 오랫동안 국경을 안전하게 만든다던가 하는 구체적 성과 자체가 그닥 없다. 명나라의 최전성기라 불리는 영락제의 치세지만 당시에 명나라는 결코 부유하거나 평온하지 않았다. 당시 명나라는 내부적으로 기근과 흉년, 천재지변, 전염병이 계속되었고 영락제가 일으킨 잦은 전쟁으로 인한 징병과 높은 세금을 견디다 못한[27] 농민들의 폭동과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 물론 영락제는 이 반란들을 잔혹하게 진압했는데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28] 즉, 영락제 시대의 발전된 것처럼 보인 모습은 빛좋은 개살구였다는 것. 이러한 모순의 심화가 정강의 변과 함께 한족 왕조의 2대 치욕으로 평가받는 토목의 변이 일어나는 간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지적한다.[29]

또한 황제 독재권의 강화를 위하여 환관들에게 지나치게 큰 권한을 주었는데 이로 인해 후대의 환관들이 전횡을 부릴수 있는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 또한 강하다. 처음 태조 주원장은 환관들이 권력을 가지거나 요직을 맡지 못하게 했다. 또한 환관들이 글을 알지 못하게 만들었고 이미 글을 아는 환관들도 가차없이 내치거나 죽였다. 이는 잔혹하지만 그래도 환관들을 글자 그대로 황제의 손발로 만들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건문제 때까지 환관들의 업무는 황제를 보좌하는 것이 아니라 황제를 따라다니면서 이런저런 잡다한 일이나 해주는 심부름꾼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정난의 변'으로 철폐되는데 조카를 몰아내고 즉위한 영락제에 대한 사대부들의 비판과 저항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때 명의 많은 사대부들이 영락제에 협력하기를 거부했고, 방효유와 같이 끝까지 영락제를 비판하다가 십족이 처형된 사례도 있었다. 그래서 영락제는 이러한 사대부들에 대한 불신으로 인하여 사대부(=못 믿을 놈)들이 장악한 조정을 통해 나라를 통치하는 대신 자신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환관들을 통해 나라를 통치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거기다 영락제는 건문제 축출과 정적들의 감시와 제거, 사대부와 군부, 관리 등의 신하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환관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 소련KGB 비슷한 성격의 동창이라는 비밀경찰 제도를 활용하였다.[30] 이는 환관들이 명 왕조 멸망 때까지 권력을 전횡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주었고, 실제로 명 왕조는 후한, 당과 함께 환관들의 전횡이 가장 심했던 왕조 중 하나였는데, 명나라의 멸망에 일조한 유근, 왕진, 위충현 등은 모두 환관 출신이다. 환관의 권한이 얼마나 컸는지, 그리고 그 부작용이 얼마나 심각했었는지 알 수 있다. 결국에는 명나라를 멸망시킨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될 정도로 그 폐해가 심각해졌다.[31] 이들은 자국에서만 욕심을 채우는 걸로는 부족했는지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선으로 가서 은 내놓으라며 깽판을 쳤고, 조선에서는 명나라 환관이라면 이를 갈았다.

또한 명 제국의 수도가 북경으로 옮겨진 점도 비판이 있다. 이유야 당연히 영락제 본인의 본거지로 세력을 옮기는 편이 그에게 더 나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북방의 유목민족들에게 적극적인 대외원정을 자주 했던 영락제의 입장에서는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기에도 북경이 남경보다 훨씬 나은 곳이었다. 그러나 북경의 수도로서의 지정학적 위치는 유목민계 정복왕조 입장에선 훌륭하지만 한족왕조 입장에서는 그다지 좋지않다. 실제로 북경이 수도가 된 역사는 금,원,청 등 정복왕조일때 였고 한족왕조는 단 한번도 수도로 삼지 않았다가 명나라가 최초사례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최전방에 수도를 두는 것 자체가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중국이 강력해서 유목세력에 공세를 퍼붓는다면 몰라도 쇠약해질때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는데 북방의 몽골만주족 등이 세력을 떨치면서 명은 수도가 적군의 근거지와 너무 가까워서 무방비로 노출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32]

한마디로 훗날 명나라의 멸망을 부른 무능한 황제들의 막장 행태로 대표되는 국가 막장 테크의 발단이 이미 영락제 시절부터 있었던 것이다. 즉 영락제는 명나라세조라고 할 수 있다. 세조와는 매우 유사한 점이 많은데 집권 과정은 물론이고 서로의 손자인 선덕제성종(조선)이 명군이며 증손자인 정통제연산군이 폭군이다. 군사적 업적이 많고 국가 체제를 완성시켰다는 점까지 보면 거의 도플갱어 수준이다. 그나마 조선의 세조보다는 나은 점이 있는데 일단 영락제의 외정 업적은 중국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크다.[33] 또한 영락제는 환관에게 힘을 실어주었을망정 세조처럼 자신의 정치력만 믿고 유력한 공신들을 방조하지는 않았다.[34] 물론 집권 과정의 부당함과 무자비함, 저지른 실책은 세조랑 닮고 스케일에서는 더 심해서 욕을 먹는다.


4. 조선과의 관계[편집]


그의 치세는 조선태종[35](1400년 ~ 1418년) 시대와 거의 겹치며 세종(1418년 ~ 1450년)의 재위 초반과 겹친다. 영락제는 태종과 직접 만난 적도 있었다. 태종이 왕자 시절 명에 사신으로 갔을 때 연왕으로 있던 영락제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조선에 돌아와서 태종은 "연왕은 왕에만 머무를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태종이 간파한대로 황제가 되었는데 태종도 정변으로 즉위했고 영락제 본인도 정변으로 즉위해서 그랬는지, 태종을 완전한 조선 국왕으로 인정해 준 것도 영락제였다.[36]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이 둘은 참 궁합이 잘 맞았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서는 태종이 직접 영락제에게 보낼 말을 골랐는데 사람들이 보기엔 그저 평범해보이는 말을 골라서 바치라고 하니 영문을 모른채 영락제 앞에 보냈더니 영락제가 매우 기뻐하면서 조선 왕이 최고의 명마를 바쳤다고 기뻐했다는 기록도 있다.

명나라로 건너간 공녀들은 각각 첩지를 받아 후궁이 되었다. 현인비 권씨[37], 여미인[38], 강혜장숙여비 한씨[39], 임 순비, 이 소의, 최 미인, 정비, 송비, 황비. 그중 한 명인 권씨가 현인비로 봉해졌고, 한확의 누나인 한씨는 여비로 봉해서 총애를 받았다. 이 중 현인비 권씨는 상당히 이례적인 대우를 받았는데, 당시 영락제의 황후 서씨가 죽고 없어서 후궁의 관할을 조선에서 온 지 얼마 안 되는 권씨에게 맡기기도 했다.

그러나 권씨는 얼마 안 되어 병사했는데, 독살로 밝혀지자 한바탕 난리가 난 끝에 같이 조선에서 온 여 강비(여 미인, 이후 여 첩여로 추존)가 범인으로 몰려 고문 끝에 사망했다. 헌데 나중에 실은 한족 출신인 여 장비가 독살범이고 그 죄를 여 미인에 뒤집어 씌운 것이라고 밝혀졌으며 여기에서 그치지 잃고 여 장비가 다른 궁녀인 어씨랑 공모한 것도 모자라서 함께 환관과 간통까지 했다는 사실도 드러나서 분노한 영락제가 폭발[40], 관련자 2,800여 명이 죽었다. 여기에 얽힌 조선인 후궁 황씨와 이씨는 참형, 임씨와 정씨는 고문을 못 견뎌 결국 자살. 관련자를 처형하던 도중 어떤 이가 이왕 죽는 거 이판사판 격으로 영락제에게 일갈했는데, 그 내용이 "네 양기가 쇠해서 환관과 간통을 한 것인데 누굴 혼내냐"는 엄청난 독설이었다. 이야기의 출처는 엉뚱하게도 조선왕조실록 중 세종 실록 26권, 세종 6년 10월 17일 무오 2번째 기사로, 같이 갔던 공녀가 용케도 살아남아 영락제 사후 조선으로 귀환해 증언한 것. 이 일화는 MBC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소개되기도 했다.[41]

한편 여비 한씨의 경우, 같이 갔던 황하신의 딸 황씨가 처녀가 아니라는 이유로 대국을 우습게 본 거냐고 노발대발하는 영락제를 한씨가 여염의 일을 국왕이 어떻게 알았겠냐고 말렸다.[42] 그 말에 감동한 영락제가 황씨에 대한 처벌을 그녀에게 맡기자 한씨는 황씨의 뺨을 때리는 처벌을 내렸다고 한다. 이 한씨는 영락제 사후 불과 24세의 나이로 궁인 30명과 함께 순장당하고 말았다. 죽기 전 한씨는 유언으로 공녀로서 같이 왔던 자신의 유모인 김흑(金黑)을 조선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명 인종(홍희제)에게 부탁했다. 홍희제는 이를 들어주려 했으나 궁녀들이 위에 언급한 독살 사건 이야기를 조선에 알릴 수 있다며 반대해서 결국 들어주지 않았다. 김흑은 이후 홍희제에게 공인(恭人)이란 작호를 받고 태황태후를 모시는 일을 하다가 세종 17년에 홍희제의 황후 장씨가 김흑을 비롯한 공녀들을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위에 언급한 독살 사건을 증언한 공녀가 이 김흑이다.

넘어간 조선 여인들이 하나같이 고초를 겪어 조선에서 말이 많았지만 그와는 별개로 태종이 겉으로라도 명나라에 대해 저자세로 나온 대가로 조선에 엄청난 무역 특혜를 제공했다.[43] 황제국은 조공을 바치는 제후국들에게 조공의 물량보다 더 많은 회사(回賜)를 내리는데, 태종은 이를 철저히 이용해 실리를 챙겼다. 본래 명나라는 조선과 대월(베트남), 시암(태국)은 3년에 1회, 일본과는 10년에 1회, 류큐 왕국과는 2년에 1회 조공 무역을 하였다. 그런데 아직 몽골 세력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태종 이방원이 친명 노선을 천명하자 명 측이 1년에 3회씩이나 조공 무역을 허용하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 줬다. 이후 명나라는 손해가 컸는지 수시로 조공 무역을 줄이자는 얘기를 꺼냈지만 조선은 강하게 거부.[44] 태종이 명나라에 호의적인 정권이기도 했지만 태종이나 영락제나 모두 머리가 비상한 명군들이었고 무엇이 두 나라 관계에 도움이 되는것인지 알았기 때문에 조명 관계는 정도전이 버티고 있고 매우 꼬장꼬장했던 태조 이성계 시기에 비해 매우 우호적으로 변하였다.

태종이 연부(燕府)를 지날 때는 연왕(燕王)【즉 성조 황제.】 이 친히 대해 보았는데, 곁에 시위하는 군사가 없고 다만 한 사람이 모시고 서 있었다. 온순한 말과 예절로 후하게 대접하고, 모시고 선 사람을 시켜서 술과 음식을 내오게 하였는데, 극히 풍성하고 깨끗하였다. 태종이 연부를 떠나서 도중에 있을 때, 연왕이 서울 〈금릉〉에 조회하기 위하여 편안한 연(轝)을 타고 말을 몰아서 빨리 달려갔다. 태종이 말 위에서 내려 길가에서 인사하니, 연왕이 수레를 멈추고 재빨리 연의 휘장을 열고서 오래도록 온순한 말로 서로 이야기하다가 지나갔다.

태종이 명나라 황제의 우대를 받고 돌아오다.#


그리고 태종과는 위의 일화처럼 연왕 시절 개인적으로 만난 적도 있었고, 태종이 정도전을 숙청하면서 조명 관계가 개선되었기 때문에 개인적 친분과 정치적 이해를 같이 한다는 점도 꽤나 작용했을 것이다. 여하튼 두 나라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명나라의 멸망까지 지속되어서 명이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섰음에도 지속적으로 명을 찾는 목소리가 많았을 정도였다.

그리고 태종은 영토만큼은 지킨다는 방침을 세워 재위 내내 이 방침을 고수했다. 명나라가 조선의 동북 지역에까지 살고 있던 여진족을 직할로 통치하겠다는 소식을 듣자 태종은 즉시 관련 역사 자료를 수집하여 이를 토대로 명나라의 주장을 반박했으며 심지어는 마지막에 "폐하 아버지께서도 이건 인정하신 거니까 태클 걸지 마셈."이라는 말까지 덧붙여 결국 동북 지역 여진족을 계속 조선이 관리하라는 말을 받아냈다. 물론 입만 살진 않고 유사시를 대비하여 북방 경비에도 힘을 기울였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그저 저자세로만 나가지는 않은 것이다. 이러한 방침은 영락제 치세를 살았던 세종대왕 대에도 더욱 강력한 대 여진 정책과 함께 그대로 유지된다.

이런 태종도 영락제가 베트남을 정복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는 '사대의 예'를 게을리하다간 조선도 베트남처럼 명나라에게 침공의 빌미를 줄 수 있다고 말하며 100여명이 넘는 문신들을 모아놓고 영락제의 베트남 정벌을 축하함을 주제로 글을 쓰게 하고 태종이 직접 심사를 하였다고 한다.#

또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일찍이 무과(武科)에 합격한 자는 항상 스스로 병서(兵書)를 숙독(熟讀)하는가? 숙독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들으니, 황제(皇帝)가 안남(安南)을 정벌할 때에 안남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임을 당했고 대적할 자가 없었다 한다." 하니,

공조 판서(工曹判書) 이내(李來)가 대답하기를, "천하(天下)의 군사로 이 조그마한 나라를 정벌하니, 누가 감히 대적할 자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군사는 정(精)한 데에 있지 많은 데에 있지 않다. 어찌 한 가지만 가지고 말할 수 있는가? 또 안남 국왕(安南國王)이 황제에게 달려가서 고(告)하였으니, 황제의 거사(擧事)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황제가 본래 큰 것을 좋아하고 공(功)을 기뻐하니, 만일 우리 나라가 조금이라도 사대(事大)의 예(禮)를 잃는다면, 황제는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죄(罪)를 물을 것이다. 나는 생각하기를 한편으로는 지성(至誠)으로 섬기고, 한편으로는 성(城)을 튼튼히 하고 군량(軍糧)을 저축하는 것이 가장 오늘날의 급무(急務)라고 여긴다."

편전에서 병조 판서 윤저 등과 궁방 대책에 관해 의논하다. #


하지만 한편으로는 태종은 신료들이 영락제가 침공하면 대적 할 자가 없다고 두려워하자 "그렇지 아니하다. 군사는 정(精)한 데에 있지, 많은 데에 있지 않다.[45] 어찌 한 가지만 가지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반박하며 명의 침공에 대비해 성(城)을 튼튼히 하고 군량(軍糧)을 저축하는 것이 가장 오늘날의 급무(急務)라고 주장하면서 명과의 전쟁에 철저히 대비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태종은 여진족 관련 문제로 영락제의 명과 충돌한적도 있었다. 조선 초기엔 여진 부족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조선과 명나라의 대립이 있었는데 당시 두만강 인근 변경 지역의 여진 부족은 조선의 지배를 받기로 했는데, 이 소식을 접한 명나라는 사신 '왕교화적'을 보내 여진족을 회유하였다. 그러나 그곳 여진족들은 조선을 섬기기로 회맹하며 맹약을 맺었다. 하지만 명나라는 이들 여진 부족에 대한 강력한 압력을 행사하였고, 결국 힘이 없는 약소한 여진 부족들은 대부분 조선의 질서에서 벗어나 명나라의 초유를 받아들였다.

이에 분노한 조선 태종은 곧바로 '보복 공격'에 나섰다. 길주도찰리사 조연이 이끈 1천여 명의 조선군 기병 부대는 올량합 부족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가옥과 논밭을 불태웠고, 수백여 명의 부족민을 참수, 이어 무기로 무장한 여진족 군사 160여 명을 포로로 잡아 또 참수하였다. 그러나 이는 명나라의 사전 동의를 받지 않은 조선군의 일방적인 토벌이었고, 태종도 이를 의식했는지 신하들과 대처 방안을 논의했다. 당시 태종은 자신의 상국인 명나라 황제를 속이기로 작정했고, 태종의 계책은 성공해서 외교적 문제로까지는 비화되지는 않았다.

한편 태종은 양녕대군을 영락제의 딸과 혼인시키기 위해 조선에 단골 사신으로 오던 황엄에게 타전하여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기도 했지만 이후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흐지부지되었다. 실제로 명 황실과의 통혼이 성사되었다면 양녕대군의 폐위는 어렵게 되어 양녕대군이 조선의 4대 왕으로 즉위했을 가능성이 크며 세종의 치세 또한 존재하지 못했을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영락제가 고려 시대에 세워진 거대 사찰인 흥왕사의 금탑을 탐내어 사신을 보내 달라고 요구하자, 조선에서 논쟁 끝에 결국 주었다는 이야기가 한국 인터넷상에 떠돌아다니는데, 정작 조선왕조실록이나[46] 명사 조선열전에서는 아무리 검색을 해도 전혀 찾을 수 없는 내용이라 신빙성이 의심된다.


5. 일화[편집]


베이징에서 약 44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역대 명나라 황제들의 무덤인 명십삼릉(밍스싼링: 明十三陵)이라고 부르는데,[47] 그중 영락제의 능인 장릉이 가장 규모가 크며 유명하다. 장릉보다 더 큰 능을 만드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고 한다. 장릉의 전각인 능은전(裬恩殿)은 자금성의 태화전에 맞먹는 규모이며, 태화전과 함께 중국 최대의 목조 건축이다. 만력제의 정릉 발굴을 주도했던 베이징 부시장 우한은 장릉 발굴을 추가적으로 준비하며 40만 위안의 예산을 국무원에 요청했으나 저우언라이 총리는 "나는 죽은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라고 이를 거절했다. 이는 돈이 너무 드는 것도 문제였지만 당시 중국의 고고학 기술이 미비해서 유물 보전이 어렵기 때문에 추가적인 발굴을 하면 안된다는 고고학계의 탄원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기린(Giraffe)이 동양권에 알려지게 된 시기 또한 영락제 때. 그 기린 덕분에 정치적인 안정을 가져오는 효과도 있었다.[48]

십족을 멸한다는 말을 만든 장본인으로 정난의 변 과정에서 방효유의 십족을 멸족시킨 적이 있다. 원래 구족[49]이라는 개념은 있어도 십족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그런데 건문제의 측근으로서 연왕(즉 영락제)를 제거하려 한 방효유를 회유하여 즉위 조서를 쓰라고 했을 때 방효유가 이를 거부하며 오히려 연적찬위(燕賊纂位 : 연나라의 역적이 제위를 찬탈하다)라고 쓰자 화가 난 영락제가 "너의 죄가 구족에 미치더라도 계속 고집을 부리겠는가?"라고 했고, 이에 방효유가 "구족이 아닌 십족을 멸족시킨다고 해도 내 뜻을 꺾을 수는 없다!"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전무후무한 십족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졌다. 이는 구족에 친구와 문하생을 포함시킨 것. 방효유의 '십족'으로서 총 847명이 처형되었다고 하며, 이들은 모두 방효유의 눈앞에서 처형되었다고 한다.

또한 서쪽을 정복한 티무르가 명과의 결전을 준비한 것이 1404년의 일로 영락제는 1402년에 찬탈하고 황제로 즉위했으니 막 자신의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한 영락제와 정복의 막바지에 이른 티무르의 군세가 격돌할 위험이었으나 티무르는 1405년 병사, 당대 최강을 다투는 양 제국의 드림매치 대결전은 성사되지 않았다. 영락제가 조공이 7년이나 밀렸다고 꼽질하자 티무르는 직접(!) 갖다주겠다고 패기를 부렸다. 흔한 세계사의 티키타카 출처 하지만 잔혹도를 보면 티무르가 영락제보다 더 심하다.


6. 출생의 비밀[편집]


정사(正史)명사(明史)와 명실록에는 홍무제와 마황후의 4남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가 죽고 얼마 난 된 때부터 영락제가 적자가 아니라 서자라는 기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것은 영락제가 본래 원혜종의 서자이나 대도(오늘날의 베이징)를 함락시킨 홍무제가 입양했다는 것인데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학자는 없다. 애초에 대도는 1368년에 함락됐고, 영락제는 1360년생이다! 다만 현 황제가 사실은 한족이 아니라 몽골인이라는 유언비어가 나돌 만큼 명초 지식인들 사이에서 조카 건문제를 내쫓은(사실상 살해한) 영락제에 대한 반감이 컸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영락제 서자설의 근거가 되는 문헌은 황실종묘의 제사를 책임지는 부서인 '태상시'에서 발간한 '남경태상시지'이다. 이 책은 현존하지 않지만 청나라 초기까지 존재했고 그 일부분이 여러 책에 인용되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영락제와 그의 남동생 주숙은 마황후의 자식이 아니라 후궁인 공비의 자식이다. 다른 곳도 아닌 황실의 제사를 관장하는 관청에서 남긴 기록이기에 학계에서도 영락제 서자설이 정설로 여겨진다. 게다가 조선인이라서 비교적 황실의 검열에서 자유롭고 실제로 연왕 시절 영락제를 배알한 적도 있는 권근의 저서 '봉사록'에서는 영락제 '생모'의 기일이 7월 15일로 적혀 있는데 마황후는 8월 10일에 죽었다. 이러한 기록을 신뢰하는 학자들은 조카를 몰아내고 황위를 찬탈한 영락제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실록을 조작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영락제는 황위에 오른 후 공식적으로 태조실록을 수정하라고 두 차례나 명령하였고 이 과정에서 자신이 홍무제와 마황후의 4자라고 강조했다.

7. 현대 매체[편집]


코에이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4에서 명나라 세력에 포진. 전투치가 무려 96이며 다른 능력치도 준수한 동아시아 문화권 전무장중 최강의 먼치킨이다. 더욱이 기병 적성치도 S에다가 혈연 무장이라는 메리트가 있어서 병사를 더 많이 이끌 수 있으니 가히 야전에서는 적수가 없다. 특히 등장 시점에서 연령 10세[50]라 10대 초반부터 세계정복에 나설 수 있다. 패왕초딩 명을 컴퓨터에게 맡겨놓으면 시간이 지난 후 정난의 변 이벤트가 발생하는데, 이걸 보고 나면 이름이 본명인 '주체'에서 '영락제'로 개명된다.

Europa Universalis IV에서는 시대상 등장하지는 않으나 게임 종료시 이전 군주의 능력치로 등장하며 정치 5, 외교 6, 군사 6으로 손꼽히는 상위 능력치 군주이다.

허영만에서는 황제가 되기 전에는 풍채가 별로였는데 크고 아름다운 수염을 기른 후부터는 관상이 바뀌어 저 초상화처럼 상당히 후덕하고 호방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무협지에 가장 많이 배경으로 쓰이는 시간대가 바로 영락제 때이며 영락제 자신도 무협지에 자주 등장하곤 한다. 보통 무공이 강하고 매우 호전적이며 유능한 군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인지 한백무림서에서는 영락제가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한백무림서에서 무림의 균형은 사패, 팔황, 구파와 황실이 지키는데 이 황실의 수장이 바로 영락제. 한백 무림서의 핵심 인물인 진천의 장인이기도 하고 무당마검에선 친정을 하여 챠이와 맞대하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전작들에선 어째서인지 평범 이하의 스탯을 받았지만, 평가가 일신된 Europa Universalis IV에서의 영락제는 군주 능력치 5 6 6으로, 최고 능력치가 6 6 6임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보통 도합 능력치가 14를 넘어야 최고급 군주라고 불러주는데, 명나라에서는 14를 넘는 군주가 영락제와 6 4 6인 홍무제뿐이다. 동시기 왕조인 조선은 유일하게 4대 군주가 6 5 5로 이 기준을 만족한다.

어쌔신 크리드의 페이스북 판인 Assassin's Creed: Discover Your Legacy에서는 성전기사단의 일원으로 등장. 방효유와 리 통의 부모를 비롯한 암살단 용의자들을 잡아다 모조리 처형[51]하지만 결국은 1424년 리 통에게 암살당한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연왕일 때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온 이방원을 만나는 역할로 나온다. 문종원 씨가 연기했다. 쩌렁쩌렁한 발성과 남성적 포스가 넘치는 영락제 상을 연출해 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사를 한국어로 한다. 작중에선 유모가 고려 출신이어서 조선말을 할 줄 안다는 설명이 나온다. 다만 첫 등장 당시에는 명나라 말로 말하고, 이방원의 조선말은 하륜이 통역해주다가 사실 연왕이 조선말을 할 수 있었기에 조선말로 대화하는 것으로 연출된다. 그래서인지 조선말을 쓰는 건 대부분 이방원과 대화할 때이다. 마지막 등장은 조선으로 돌아가는 이방원을 배웅할 때인데, 이때 서로의 무운을 빌어줬다. 이후 두 사람은 각각 옥좌에 오르게 된다.

용의 눈물에서도 등장해서 양녕대군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유명한 십족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태조 왕건에서 전이갑 역으로 유명한 중견배우 강만희 씨가 연기하여 짧은 시간이었지만 과연 황제다운 위엄 있는 모습을 선보였다.

2009년 중국 드라마 정화하서양(국내명 정화의 대항해)에서는 전반부의 페이크 주인공 급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정화의 영원한 주군이자 절대 권력과 부를 지닌 스폰서로 등장한다. 황제 즉위 후 엄청난 재정을 사용하여 지속적으로 정화를 믿고 아끼면서 지원한다. 그러나 홍무제의 유지(해상 무역 금지)와 대항해 정책을 반대하는 보수 관료 세력과 타협하면서 싸우고 아들들의 권력 투쟁과 문헌 편찬, 전국 각지의 천재지변, 티무르의 준동, 대운하 보수, 베이징 건설, 자금성 건설, 장성 축조, 황릉 건설, 몽골 원정[52], 정화의 항해 비용, 항해 때 팔아야할 물건 구입, 외국 사신의 선물 비용, 부선장(정난의 변 때 영락제 편을 들고 이후 항해하면서 한족 해적과 같이 정화를 죽여 함대를 장악하려고 했고 조난 당할 때 '정화 제독은 죽었다. 내가 관할한다.'고 하다 정화가 살아 돌아오자 그대로 항복하는 등 지속적으로 찌질하게 하극상을 하다 죽는다.)의 정화의 모함 등을 해결하느라 고생고생하며 자금성과 베이징 공역이 끝나고 항해를 멈추고 민간에게 맡기고 해외에서 자체적으로 오게 하려하자 정화가 겁을 먹으나[53] 머잖아 정화가 프랑스 이탈리아 사람을 데려오는데 극진히 대접하지만 대화를 하면서 중국와 달리 유럽이 해상 진출적극적이면서도 무력적이고 욕심이 없으면서 무기성능이 뛰어난 것도 있는등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경계하고 내심 항해에 대해 생각을 하다 결국 몽골 원정길에 죽는 그날까지 지속적으로 정화와 대항해를 지원한다.
배우는 마오쩌둥 전문배우로 유명한 원로 배우 당국강이 맡았다. 제갈량이나 옹정제를 연기하던 40대의 젊은 시절이 아닌 50대 중후반의 적지 않은 나이로 맡은 배역임에도 30대 후반부터 장~노년기의 모습까지 소화하며 어항의 금붕어를 생으로 뜯어먹는등 광기어린 열연과 수많은 액션씬을 선보였다. 특히 정난의 변 전후로는 역사적 고증을 살리려면 연출이 조금만 엇나가도 어린 조카 건문제만 불쌍해보이기 일쑤임에도 성깔 화끈하지만 감정기복도 심한 '아직 덜 다듬어진' 간웅이 완전체로 진화해나가는 과정을 묘사하는데, 가히 중국 드라마의 숱한 역적(...)들 중 손꼽히는 카리스마를 선보인다. 정난의 변 전후 줄거리는 그야말로 공훈배우 당국강의 연기력이 폭발하는 호연의 연속인데, 이런 주체의 강렬한 캐릭터 때문에 꿋꿋하게 살아남는 잡초 같은 서사를 부여받은 정화의 존재감이 흐려진다는 지적이 잠시 나왔을 정도였다.

2019년 드라마 대명풍화에서 중국의 베테랑 배우인 왕학기(왕쉐치)가[54] 맡아 열연했으며 남자주인공인 선덕제의 할아버지로 등장한다. 조카의 황위를 빼앗은 것에 죄책감이 심해 홍무제에게 꾸중을 듣는 악몽을 자주 꾼다. 무인 출신답게 호전적인 성격의 황제로 정치보다는 군대와 전쟁을 매우 좋아한다. 특히 작중에서 용포보다는 갑주를 입는것을 좋아하며 직접 전쟁에 나서는 일이 많으며 문관보다는 무관을 더 우대해주어 무관들에게 신망을 받는다. 하지만 이로 인해 황태자에게만 국정을 맡기고 아예 소홀히 하고 있으며 그가 벌이는 전쟁으로 피해를 입는 백성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는데도 전쟁을 좋아하고 계속 나서는터라 황태자와 신하들이 우려한다.

가족과 관련되어서 자식들때문에 속을 썩이는데 인자한 성격의 장남을 아끼나 장남은 병약하고 차남은 포악한 성격의 깡패에다 삼남은 야심만만해서 차남과 삼남이 황위를 찬탈할까봐 우려한다. 특히 차남인 주고후의 능력은 인정하나 그가 걸핏하면 폭력을 일삼아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다보니 속을 썩는다. 그러던 도중 손자인 주첨기가 뛰어난 능력을 보이자 장남이 오래 살지 못하더라도 손자가 잘해낼것이라 믿고 손자를 아끼며 곁에 두고 제왕학을 가르키며 사실상 후계자로 삼는다. 몽골군이 대규모로 침공했을때 50만의 원정군을 이끌고 가서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나 이미 과로로 인해 건강이 악화된 상황이라서 나중에가면 영락제도 후사를 결정해야하는데 역사와 다르게 황태자는 오래 못살것이니 원정을 나가있는 차남을 황제로 정하며 밀지를 몰래 써서 양사기에게 전한다. 임종때는 주첨기를 부르며 황태자와 왕조를 잘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다. 사후 황태자의 꿈에서 등장하는데 황태자에게 내가 그동안 너무 많은 전쟁을 벌여 너와 신하들,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어싸다며 사과하고 네가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어라는 말을 남기며 말을 타고 사라진다.

2020년에 방영하는 중국 드라마 산하월명(山河月明)에서는 배우 풍소봉(영화 초한지-천하대전에서 항우를 연기했다.)이 주체 역을 맡았다.

2022년 드라마 상식에선 삼국지에서 관우를 맡았던 우영광이 영락제를 맡았다. 1화부터 영락 20년이라 영락제 분량이 적다. 승마도 못할 정도로 뚱뚱한 태자를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다. 엄청난 무예를 지닌 태손에 대해서는 매우 흡족해한다.

도미네이션즈에서 영락제의 꽃병이 유물로 등장한다.


8. 둘러보기[편집]


명사(明史)

[ 본기(本紀) ]
1·2·3권 「태조기(高祖紀)」
4권 「공민제기(恭閔帝紀)」
5·6·7권 「성조기(成祖紀)」
주원장
주윤문
주체
8권 「인종기(仁宗紀)」
9권 「선종기(宣宗紀)」
10·11·12권 「영종·경제기(英宗景帝紀)」
주고치
주첨기
주기진 · 주기옥
13·14권 「헌종기(憲宗紀)」
15권 「효종기(孝宗紀)」
16권 「무종기(武宗紀)」
주견심
주우탱
주후조
17·18권 「세종기(世宗紀)」
19권 「목종기(穆宗紀)」
20·21권 「신종·광종기(神宗光宗紀)」
주후총
주재후
주익균 · 주상락
22권 「희종기(熹宗紀)」
23·24권 「장렬제기(莊烈帝紀)」
주유교
주유검
113·114권 「후비전(后妃傳)」
효자고황후 · 손귀비 · 이숙비 · 곽영비 · 효민양황후 · 인효문황후 · 소헌귀비 · 공헌현비 · 성효소황후 · 선묘현비 · 곽애 · 선묘현비 · 공양장황후 · 효장예황후
효숙황후 · 정혜경황후 · 오폐후 · 효정순황후 · 효목황후 기씨 · 효혜황후 · 공숙귀비 · 효강경황후 · 효정의황후 · 효결숙황후 · 장폐후 · 효열황후 · 효각황태후
효의장황후 · 효안황후 · 효정황후 · 효단현황후 · 효정황황후 · 공각귀비 · 효원정황후 · 효화황태후 · 효순황태후 · 이강비 · 효안황후 · 장유비 · 장열민황후
공숙귀비
※ 25권 ~ 99권은 志에 해당. 100권 ~ 112권은 表에 해당. 명사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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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115권 「종실전(宗室傳)」
주표 · 주우원
116·117·118·119·120권 「제왕전(諸王傳)」
주상 · 주강 · 주숙 · 주정 · 주부 · 주재 · 주기 · 주단 · 주춘 · 주백 · 주계 · 주영(朱楧) · 주식 · 주전(朱㮵) · 주권 · 주폐 · 주혜 · 주모 · 주영(朱楹) · 주경(朱桱) · 주동 · 주이 · 주남 · 주웅영 · 주윤통 · 주윤견 · 주윤희 · 주문규(朱文奎) · 주문규(朱文圭) · 주고후 · 주고수 · 주첨용 · 주첨선 · 주첨점 · 주첨은 · 주첨오 · 주섬강 · 주첨개 · 주첨게 · 주첨연 · 주견린 · 주견순 · 주견주 · 주견택 · 주견준 · 주견치 · 주견패 · 주견제 · 주우극 · 주우륜 · 주우빈 · 주우휘 · 주우운 · 주우저 · 주우팽 · 주우순 · 주우추 · 주우해 · 주후위 · 주재기 · 주재수 · 주재로 · 주재려 · 주재궤 · 주재숙 · 주익익 · 주익령 · 주익류 · 주상서 · 주상순 · 주상치 · 주상호 · 주상윤 · 주상영 · 주상부 · 주유학 · 주유즙 · 주유모 · 주유허 · 주유전 · 주자연 · 주자육 · 주자경 · 주자랑 · 주자훤 · 주자형 · 주자소 · 주자환 · 주자찬
121권 「공주전(公主傳)」
태원장공주 · 조국장공주 · 임안공주 · 영국공주 · 숭녕공주 · 안경공주 · 여령공주 · 회경공주 · 대명공주 · 복청공주 · 수춘공주 · 남강공주 · 영가공주 · 함산공주 · 여양공주 · 보경공주 · 복성공주 · 경양공주 · 강도공주 · 남평군주 · 영안공주 · 영평공주 · 안성공주 · 함녕공주 · 상녕공주 · 가흥공주 · 경도공주 · 청하공주 · 진정공주 · 덕안공주 · 연평공주 · 덕경공주 · 순덕공주 · 상덕공주 · 중경공주 · 가선공주 · 순안공주 · 숭덕공주 · 광덕공주 · 의흥공주 · 융경공주 · 가상공주 · 고안공주 · 인화공주 · 영강공주 · 덕청공주 · 장태공주 · 선유공주 · 태강공주 · 영복공주 · 영순공주 · 장녕공주 · 선화공주 · 상안공주 · 사유공주 · 영안공주 · 귀선공주 · 가선공주 · 봉래공주 · 태화공주 · 수양공주 · 영령공주 · 서안공주 · 연경공주 · 영창공주 · 수녕공주 · 정락공주 · 운화공주 · 운몽공주 · 영구공주 · 선거공주 · 태순공주 · 향산공주 · 천대공주 · 회숙공주 · 영덕공주 · 수평공주 · 낙안공주 · 곤의공주 · 장평공주 · 소인공주
122권 「곽자흥등전(郭子興等傳)」
123권 「진우량등전(陳友諒等傳)」
124권 「확곽첩목아등전(擴廓帖木兒等傳)」
곽자흥 · 한림아
진우량 · 장사성 · 방국진 · 명옥진
확곽첩목아 · 진우정 · 파잡라와이밀
125권 「서달등전(徐達等傳)」
126권 「이문충등전(李文忠等傳)」
127권 「이선장등전(李善長等傳)」
서달 · 상우춘
이문충 · 등유 · 탕화 · 목영
이선장 · 왕광양
128권 「유기등전(劉基等傳)」
129권 「풍승등전(馮勝等傳)」
유기 · 송렴 · 엽침 · 장일
풍승 · 부우덕 · 요영충 · 양경 · 호미
130권 「오량등전(吳良等傳)」
오량 · 강무재 · 정덕흥 · 경병문 · 곽영 · 화운룡 · 한정 · 구성 · 장룡 · 오복 · 호해 · 장혁 · 화고 · 장전 · 하진
131권 「고시등전(顧時等傳)」
고시 · 오정 · 설현 · 곽흥 · 진덕 · 왕지 · 매사조 · 김조흥 · 당승종 · 육중형 · 비취 · 육취 · 정우춘 · 황빈 · 엽승
132권 「주량조등전(朱亮祖等傳)」
주량조 · 주덕흥 · 왕필 · 남옥 · 사성 · 이신
133권 「요영안등전(廖永安等傳)」
요영안 · 유통해 · 호대해 · 경재성 · 장덕승 · 조덕승 · 상세걸 · 모성 · 호심 · 손흥조 · 조량신 · 복영
134권 「하문휘등전(何文輝等傳)」
하문휘 · 엽왕 · 무대형 · 채천 · 왕명 · 영정 · 김흥왕 · 화무 · 정옥 · 곽운
135권 「진우등전(陳遇等傳)」
136권 「도안등전(陶安等傳)」
진우 · 엽태 · 범상 · 송사안 · 곽경상 · 양원호 · 원홍도 · 공극인
도안 · 첨동 · 주승 · 최량 · 도개 · 증로 · 임앙 · 이원명 · 악소봉
137권 「유삼오등전(劉三吾等傳)」
유삼오 · 안연 · 오백종 · 오침 · 계언량 · 송눌 · 조숙 · 이숙정 · 유숭 · 나복인 · 손여경
138권 「진수등전(陳修等傳)」
진수(陳修) · 양사의 · 주정 · 양정(楊靖) · 단안인 · 설상 · 당탁 · 개제
139권 「전당등전(錢唐等傳)」
전당 · 한의가 · 소기 · 풍견 · 여태소 · 이사로 · 엽백거 · 정사리 · 주경심 · 왕박 · 장형
140권 「전당등전(錢唐等傳)」
위관 · 도후중 · 유사훤 · 왕종현 · 여문수 · 왕관 · 도동 · 노희 · 청문승
141권 「제태등전(齊泰等傳)」
제태 · 황자징 · 방효유 · 연자녕 · 유대방 · 탁경 · 진적 · 경청 · 호윤 · 왕도(王度)
142권 「철현등전(鐵鉉等傳)」
철현 · 포소 · 진성선 · 장병 · 송충 · 마선 · 구능 · 장륜(張倫) · 안백위 · 왕성 · 요선 · 진언회
143권 「왕간등전(王艮等傳)」
왕간 · 요승 · 주시수 · 정본립 · 황관 · 왕숙영 · 황월 · 왕량 · 진사현 · 정통 · 고외 · 고현녕 · 왕진(王璡) · 주진 · 우경선
144권 「성용등전(盛庸等傳)」
145권 「요광효등전(姚廣孝等傳)」
성용 · 평안 · 하복 · 고성
요광효 · 장옥 · 주능 · 구복 · 담연 · 왕진(王真) · 진형
146권 「장무등전(張武等傳)」
장무(張武) · 진규 · 맹선 · 정형 · 서충 · 곽량 · 조이 · 장신 · 서상 · 이준 · 손암 · 진욱 · 진현 · 장흥 · 진지 · 왕우
147권 「해진등전(解縉等傳)」
148권 「양사기등전(楊士奇等傳)」
149권 「건의등전(蹇義等傳)」
해진 · 황회 · 호광 · 김유자 · 호엄
양사기 · 양영 · 양부
건의 · 하원길
150권 「욱신등전(郁新等傳)」
욱신 · 조공 · 김충 · 이경 · 사규 · 고박 · 진수(陳壽) · 유계호 · 유진 · 양지 · 우겸(虞謙) · 여승 · 탕종
151권 「여상등전(茹瑺等傳)」
여상 · 엄진직 · 장담 · 왕둔 · 정사 · 곽자 · 여진 · 이지강 · 방빈 · 오중 · 유관
152권 「동륜등전(董倫等傳)」
동륜 · 의지 · 추제 · 주술 · 진제 · 왕영 · 전습례 · 주서(周敍) · 가잠 · 공공순
153권 「송례전(宋禮等傳)」
154권 「장보등전(張輔等傳)」
송례 · 진선 · 주침
장보 · 황복 · 유준(劉儁) · 여의 · 진흡 · 이빈 · 유승 · 양명 · 왕통
155권 「송성등전(宋晟等傳)」
송성 · 설록 · 유영 · 주영(朱榮) · 비환 · 담광 · 진회(陳懷) · 장귀 · 임례 · 조안 · 조보 · 유취
156권 「오윤성등전(吳允誠等傳)」
오윤성 · 설빈 · 오성(吳成) · 김충 · 이영 · 모승 · 초례 · 모충 · 화용 · 나병충
157권 「김순등전(金純等傳)」
김순 · 장본 · 곽돈 · 곽진 · 정진 · 시차 · 유중부 · 장봉 · 주선 · 양정(楊鼎) · 황호 · 호공진 · 진준 · 임악 · 반영 · 하시정
158권 「황종재등전(黃宗載等傳)」
황종재 · 고좌 · 단민 · 장창(章敞) · 오눌 · 위기 · 노목 · 경구주 · 헌예 · 황공소
159권 「웅개등전(熊概等傳)」
웅개 · 진일 · 이의 · 진일 · 이당 · 가전 · 왕우 · 최공 · 유자(劉孜) · 이간 · 원걸 · 팽의 · 모봉 · 하훈 · 고명 · 양계종
160권 「왕창등전(王彰等傳)」
왕창 · 위원(魏源) · 김렴 · 석박 · 나통 · 나기 · 장선 · 장붕 · 이유
161권 「주신등전(周新等傳)」
주신 · 이창기 · 진사계 · 응이평 · 임석 · 황종 · 진본심 · 팽욱 · 하시 · 황윤옥 · 양찬 · 유실 · 진선 · 하인 · 진장 · 장병 · 송단의
162권 「윤창륭등전(尹昌隆等傳)」
윤창륭 · 경통 · 대륜 · 진조 · 유구 · 진감 · 종동 · 장륜 · 요장 · 예경 · 양선(楊瑄)
163권 「이시면등전(李時勉等傳)」
164권 「추집등전(鄒緝等傳)」
이시면 · 진경종 · 유현(劉鉉) · 형양 · 임한 · 사탁 · 노탁
추집 · 익겸 · 황택 · 범제 · 요양 · 좌정 · 조개 · 유위 · 단우 · 장소 · 고요
165권 「도성등전(陶成等傳)」
166권 「한관등전(韓觀等傳)」
도성 · 진민 · 정선 · 왕득인 · 엽정 · 오기 · 모길 · 임금 · 곽서 · 강앙
한관 · 산운 · 소수 · 방영 · 이진 · 왕신 · 팽륜 · 구반 · 장우
167권 「조내등전(曹鼐等傳)」
168권 「진순등전(陳循等傳)」
조내 · 광야 · 왕좌 · 손상 · 원빈
진순 · 왕문 · 강연 · 진문 · 만안 · 유후 · 유길 · 윤직
169권 「고곡등전(高穀等傳)」
170권 「우겸전(于謙傳)」
171권 「왕기등전(王驥等傳)」
고곡 · 호영 · 왕직
우겸
왕기(王驥) · 서유정 · 양선(楊善) · 왕월
172권 「나형신등전(羅亨信等傳)」
나형신 · 후진 · 양녕 · 왕래 · 손원정 · 주감 · 양신민 · 장기 · 마근 · 정신 · 백규 · 장찬 · 공용 · 등정찬 · 왕식 · 유병
173권 「양홍등전(楊洪等傳)」
양녕 · 석정 · 곽등 · 주겸 · 손당 · 범광
174권 「사소등전(史昭等傳)」
사소 · 무개 · 허귀 · 주현 · 구신 · 왕새 · 노감 · 유녕 · 팽청 · 강한 · 안국 · 항웅
175권 「위청등전(衞靑等傳)」
위청 · 동흥 · 하홍 · 유옥 · 구월 · 신영 · 조웅 · 풍정 · 장준 · 양예
176권 「이현등전(李賢等傳)」
177권 「왕고등전(王翱等傳)」
이현 · 여원 · 악정 · 팽시 · 상로 · 유정지
왕고(王翱) · 연부 · 왕횡 · 이병 · 요기(姚夔) · 왕복 · 임총 · 엽성
178권 「항충등전(項忠等傳)」
179권 「나륜등전(羅倫等傳)」
항충 · 한옹 · 여자준 · 주영(朱英) · 진굉
나륜 · 장무 · 황중소 · 장창(莊昶) · 추지 · 서분
180권 「장녕등전(張寧等傳)」
장녕 · 왕휘 · 모홍 · 구홍 · 이삼 · 위원(魏元) · 강진 · 왕서(王瑞) · 이준 · 왕규 · 탕내 · 강관 · 강홍 · 조린 · 팽정 · 방반 · 여헌 · 엽신 · 호헌 · 장홍지 · 굴신 · 왕헌신
181권 「서부등전(徐溥等傳)」
182권 「왕서등전(王恕等傳)」
서부 · 구준 · 유건 · 사천 · 이동양 · 왕오 · 유충
왕서(王恕) · 마문승 · 유대하
183권 「하교신등전(何喬新等傳)」
하교신 · 팽소 · 주경(周經) · 경유 · 예악 · 민규 · 대산
184권 「주홍모등전(周洪謨等傳)」
주홍모 · 양수진 · 장원정 · 부한 · 장승 · 완성 · 부규 · 유춘 · 오엄 · 고청 · 유서
185권 「이민등전(李敏等傳)」
이민 · 가준 · 황불 · 장열 · 사종 · 증감 · 양경 · 서각 · 이개 · 황가 · 왕홍유 · 총란 · 오세충
186권 「한문등전(韓文等傳)」
한문 · 장부화 · 양수수 · 허진 · 옹태 · 진수(陳壽) · 번형 · 웅수 · 반번 · 호부 · 장태 · 장내 · 왕경(王璟) · 주흠
187권 「하감등전(何鑒等傳)」
하감 · 마중석 · 육완 · 홍종 · 진금(陳金) · 유간 · 주남 · 마호
188권 「유천등전(劉蒨等傳)」
유천 · 여충 · 조우 · 대선 · 육곤 · 장흠(蔣欽) · 주새 · 탕예경 · 허천석 · 장사륭 · 장문명 · 범로 · 장흠(張欽) · 주광 · 석천주
189권 「이문상등전(李文祥等傳)」
이문상 · 손반 · 호관 · 나교 · 엽쇠 · 대관 · 황공 · 육진 · 하양승 · 하준
190권 「양정화등전(楊廷和等傳)」
191권 「모징등전(毛澄等傳)」
양정화 · 양저 · 장면 · 모기 · 정이
모징 · 왕준(汪俊) · 오일붕 · 주희주 · 하맹춘 · 풍희 · 서문화 · 설혜
192권 「양신등전(楊愼等傳)」
양신 · 왕사 · 장충 · 유제 · 안반 · 장한경 · 장원 · 모옥 · 왕시가 · 정본공 · 장왈도 · 양회 · 장찬 · 곽남
193권 「비굉등전(費宏等傳)」
비굉 · 적란 · 이시 · 고정신 · 엄눌 · 이춘방 · 진이근 · 조정길 · 고의
194권 「교우등전(喬宇等傳)」
교우 · 손교 · 임준 · 김헌민 · 진금(秦金) · 조황 · 추문성 · 양재 · 유린 · 장요(蔣瑤) · 왕정상
195권 「왕수인전(王守仁傳)」
196권 「장총등전(張璁等傳)」
왕수인
장총 · 계악 · 방헌부 · 하언
197권 「석서등전(席書等傳)」
198권 「양일청등전(楊一淸等傳)」
석서 · 곽도 · 웅협 · 황종명 · 황관
양일청 · 왕경(王瓊) · 팽택 · 모백온 · 옹만달
199권 「이월등전(李鉞等傳)」
이월 · 왕헌 · 호세녕 · 이승훈 · 왕이기 · 범총 · 왕방서 · 정효
200권 「요막등전(姚鏌等傳)」
요막 · 장정 · 오문정 · 채천우 · 첨영 · 유천화 · 양수례 · 장악 · 곽종고 · 조시춘
201권 「도염등전(陶琰等傳)」
도염 · 왕진(王縝) · 이충사 · 오정거 · 방양영 · 왕광 · 왕월 · 서문 · 장방기 · 한방기 · 주금 · 오악
202권 「요기등전(廖紀等傳)」
요기(廖紀) · 왕시중 · 주기옹 · 당룡 · 왕고(王杲) · 주용 · 문연 · 유인 · 손응규 · 섭표 · 이묵 · 주연 · 가응춘 · 장영명 · 호송 · 조병연
203권 「정악등전(鄭岳等傳)」
정악 · 유옥 · 왕원석 · 구천서 · 당주 · 반진 · 이중 · 구양탁 · 도해 · 반훈 · 여경 · 구양중 · 주상(朱裳) · 진찰 · 손무 · 왕의(王儀) · 증균
204권 「진구주등전(陳九疇等傳)」
205권 「주환등전(朱紈等傳)」
진구주 · 적붕 · 손계로 · 증선 · 정여기 · 양수겸 · 상대절 · 해일귀 · 양선(楊選)
주환 · 장경 · 호종헌 · 조방보 · 이수 · 당순지
206권 「마록등전(馬錄等傳)」
마록 · 정계충 · 장규 · 정일붕 · 당추 · 두란 · 엽응총 · 해일귀 · 육찬 · 소경방 · 유세양 · 위양필
207권 「등계증등전(鄧繼曾等傳)」
등계증 · 주제 · 양언 · 유안 · 설간 · 양명(楊名) · 곽홍화 · 유세룡 · 장선 · 포절 · 사정천 · 왕여령 · 양사충
208권 「장근등전(張芹等傳)」
장근 · 왕응진 · 소명봉 · 제지란 · 원종유 · 허상경 · 고제 · 장교 · 여산 · 위상신 · 여관 · 팽여실 · 정자벽 · 척현 · 유회 · 전미 · 홍원 · 주사겸 · 안경
209권 「양최등전(楊最等傳)」
양최 · 풍은 · 양작 · 주이 · 유괴 · 심속 · 심연 · 양계성 · 양윤승
210권 「상교등전(桑喬等傳)」
상교 · 사유 · 하유백 · 서학시 · 여여진 · 왕종무 · 주면 · 조금 · 오시래 · 장충 · 동전책 · 추응룡 · 임윤
211권 「마영등전(馬永等傳)」
212권 「유대유등전(俞大猷等傳)」
마영 · 양진 · 왕효 · 주상문 · 마방 · 하경 · 심희의 · 석방헌
유대유 · 척계광 · 유현(劉顯) · 이석 · 장원훈
213권 「서개등전(徐階等傳)」
214권 「양박등전(楊博等傳)」
서계 · 고공 · 장거정
양박 · 마림 · 유례건 · 왕정(王廷) · 갈수례 · 근학안
215권 「왕치등전(王治等傳)」
왕치 · 구양일경 · 주홍조 · 첨앙비 · 낙문례 · 정이순 · 진오덕 · 왕문휘 · 유분용
216권 「오산등전(吳山等傳)」
오산 · 육수성 · 구경순 · 전일준 · 황봉상 · 여계등 · 풍기 · 왕도(王圖) · 옹정춘 · 유응추 · 당문헌 · 이등방 · 채의중 · 공내 · 나유의 · 요희맹 · 허사유 · 고석주
217권 「왕가병등전(王家屏等傳)」
218권 「신시행등전(申時行等傳)」
219권 「장사유등전(張四維等傳)」
왕가병 · 진우폐 · 심리 · 우신행 · 이정기 · 오도남
신시행 · 왕석작 · 심일관 · 방종철 · 심확
장사유 · 마자강 · 허국 · 조지고 · 장위 · 주갱
220권 「만사화등전(萬士和等傳)」
만사화 · 왕지고 · 오백붕 · 유응절 · 왕린 · 필장 · 서화 · 이세달 · 증동형 · 신자수 · 온순 · 조세경 · 이여화
221권 「원홍유등전(袁洪愈等傳)」
원홍유 · 왕정첨 · 곽응빙 · 경정향 · 왕초 · 위시양 · 학걸 · 조참로 · 장맹남 · 이정 · 정빈
222권 「만사화등전(萬士和等傳)」
만사화 · 왕지고 · 오백붕 · 유응절 · 왕린 · 필장 · 서화 · 이세달 · 증동형 · 신자수 · 온순 · 조세경 · 이여화
223권 「성응기등전(盛應期等傳)」
224권 「엄청등전(嚴清等傳)」
성응기 · 주형 · 반계순 · 만공 · 오계방 · 왕종목 · 유동성 · 서정명
엄청 · 송훈 · 육광조 · 손농 · 진유년 · 손비양 · 채국진 · 양시교
225권 「장한등전(張瀚等傳)」
226권 「해서등전(海瑞等傳)」
장한 · 왕국광 · 양몽룡 · 양외· 이재(李戴) · 조환 · 정계지
해서 · 구순 · 여곤 · 곽정역
227권 「방상붕등전(龐尚鵬等傳)」
방상붕 · 송의망 · 장악 · 이재(李材) · 육수덕 · 소름 · 가삼근 · 이이 · 주홍모 · 소언 · 손유성 · 사걸 · 곽유현 · 만상춘 · 종화민 · 오달가
228권 「위학증등전(魏學曾等傳)」
229권 「유대등전(劉臺等傳)」
위학증 · 이화룡
유대 · 부응정 · 왕용급 · 오중행 · 조용현 · 애목 · 심사효
230권 「채시정등전(蔡時鼎等傳)」
231권 「고헌성등전(顧憲成等傳)」
채시정 · 만국흠 · 요신 · 탕현조 · 녹중립 · 양순 · 강사창 · 마맹정 · 왕약림
고헌성 · 고윤성 · 전일본 · 우공겸 · 사맹린 · 설부교 · 안희범 · 유원진 · 엽무재
232권 「위윤정등전(魏允貞等傳)」
위윤정 · 왕국 · 여무형 · 이삼재
233권 「강응린등전(姜應麟等傳)」
강응린 · 진등운 · 나대굉 · 이헌가 · 맹양호 · 주유경 · 왕여견 · 왕학증 · 장정관 · 번옥형 · 사정찬 · 양천민 · 하선
234권 「노홍춘등전(盧洪春等傳)」
235권 「왕여훈등전(王汝訓等傳)」
노홍춘 · 이무회 · 이기(李沂) · 낙우인 · 마경륜 · 유강 · 대사형 · 조학정 · 옹헌상 · 서대상
왕여훈 · 여무학 · 장양몽 · 맹일맥 · 하사진 · 왕덕완 · 장윤의 · 추유연
236권 「이식등전(李植等傳)」
237권 「부호례등전(傅好禮等傳)」
이식 · 강동지 · 탕조경 · 김사형 · 왕원한 · 손진기 · 정원천 · 이박 · 하가우
부호례 · 강지례 · 포견첩 · 전대익 · 풍응경 · 오종요 · 오보수 · 화옥
238권 「이성량등전(李成梁等傳)」
239권 「장신등전(張臣等傳)」
이성량 · 마귀
장신 · 동일원 · 두동 · 소여훈 · 달운 · 관충병 · 시국주 · 진백우
240권 「엽향고등전(葉向高等傳)」
241권 「주가모등전(周嘉謨等傳)」
엽향고 · 유일경 · 한광 · 주국조 · 하종언 · 손여유
주가모 · 장문달 · 왕응교 · 왕기(王紀) · 손위 · 종우정 · 진도형
242권 「진방첨등전(陳邦瞻等傳)」
진방첨 · 필강무 · 소근고 · 백유 · 정소 · 적봉충 · 홍문형 · 진백우 · 동응거 · 임재 · 주오필 · 장광전
243권 「조남성등전(趙南星等傳)」
244권 「양련등전(楊漣等傳)」
조남성 · 추원표 · 손신행 · 고반룡 · 풍종오
양련 · 좌광두 · 위대중 · 주조서 · 원화중 · 고대장 · 왕지채
245권 「주기원등전(周起元等傳)」
246권 「만조천등전(滿朝薦等傳)」
주기원 · 요창기 · 주순창 · 주종건 · 황존소 · 이응승 · 만경
만조천 · 강병담 · 후진양 · 왕윤성
247권 「유정등전(劉綎等傳)」
248권 「매지환등전(梅之煥等傳)」
유정 · 이응상 · 진린 · 등자룡 · 마공영
매지환 · 유책 · 이약성 · 경여기 · 안계조 · 이계정 · 방진유 · 서종치
249권 「이표등전(李標等傳)」
250권 「손승종전(孫承宗傳)」
주섭원 · 이운 · 왕삼선 · 채복일
손승종
251권 「이표등전(李標等傳)」
252권 「양사창등전(楊嗣昌等傳)」
이표 · 유홍훈 · 전용석 · 성기명 · 하여총 · 서광계 · 문진맹 · 장덕경 · 방악공
양사창 · 오성(吳甡)
253권 「왕응웅등전(王應熊等傳)」
254권 「교윤승등전(喬允升等傳)」
왕응웅 · 장지발 · 설국관 · 정국상 · 진연 · 위조덕
교윤승 · 조우변 · 손거상 · 조광 · 진우정 · 정삼준 · 이일선 · 장위
255권 「유종주등전(劉宗周等傳)」
256권 「최경영등전(崔景榮等傳)」
유종주 · 황도주
최경영 · 황극찬 · 필자엄 · 이장경 · 유지봉
257권 「장학명등전(張鶴鳴等傳)」
장학명 · 동한유 · 조언 · 왕흡 · 양정동 · 웅명우 · 장봉익 · 진신갑 · 풍원표
258권 「허예경등전(許譽卿等傳)」
허예경 · 화윤성 · 위정윤 · 모우건 · 오집어 · 장정신 · 황소걸 · 부조우 · 강채 · 웅개원 · 첨이선 · 탕개원 · 성용 · 진룡정
259권 「양호등전(楊鎬等傳)」
양호 · 원응태 · 웅정필 · 원숭환 · 조광변
260권 「양학등전(楊鶴等傳)」
양학 · 진기유 · 웅문찬 · 연국사 · 정계예 · 정숭검 · 소첩춘 · 여응계 · 고두추 · 장임학
261권 「노상승등전(盧象昇等傳)」
262권 「부종룡전(傅宗龍等傳)」
노상승 · 유지륜 · 구민앙
부종룡 · 왕교년 · 양문악 · 손전정
263권 「송일학등전(宋一鶴等傳)」
송일학 · 풍사공 · 임일서 · 채무덕 · 위경원 · 주지풍 · 진사기 · 용문광 · 유가인 · 유지발
264권 「하봉성등전(賀逢聖等傳)」
하봉성 · 남거익 · 주사박 · 여유기 · 왕가정 · 초원부 · 이몽진 · 송사양 · 마희 · 왕도순 · 전시진
265권 「범경문등전(范景文等傳)」
범경문 · 예원로 · 이방화 · 왕가언 · 맹조상 · 시방요 · 능의거
266권 「마세기등전(馬世奇等傳)」
마세기 · 오인징 · 주봉상 · 유이순 · 왕위(汪偉) · 오감래 · 왕장 · 진량모 · 진순덕 · 신가윤 · 성덕 · 허직 · 김현
267권 「마종빙등전(馬從聘等傳)」
268권 「조문조등전(曹文詔等傳)」
마종빙 · 장백경 · 송공 · 범숙태 · 고명형 · 서견 · 녹선계
조문조 · 주우길 · 황득공
269권 「애만년등전(艾萬年等傳)」
애만년 · 이비 · 양구주 · 진우왕 · 후량계 · 장령 · 맹여호 · 호대위 · 손응원 · 강명무 · 우세위 · 후세록 · 유국능
270권 「마세룡등전(馬世龍等傳)」
271권 「하세현등전(賀世賢等傳)」
마세룡 · 하호신 · 심유용 · 장가대 · 노흠 · 진양옥 · 용재전
하세현 · 동중규 · 나일관 · 만계 · 조솔교 · 관유현 · 하가강 · 황룡 · 김일관
272권 「김국봉전(金國鳳等傳)」
273권 「좌양옥등전(左良玉等傳)」
김국봉 · 조변교 · 유조기
좌양옥 · 고걸 · 조관
274권 「사가법등전(史可法等傳)」
275권 「장신언등전(張愼言等傳)」
사가법 · 고홍도 · 강왈광
장신언 · 서석기 · 해학룡 · 고탁 · 좌무제 · 기표가
276권 「주대전등전(朱大典等傳)」
주대전 · 장국유 · 장긍당 · 증앵 · 주계조 · 여황 · 왕서전 · 노진비 · 하개 · 웅여림 · 전숙락 · 심진전
277권 「원계함등전(袁繼鹹等傳)」
원계함 · 김성 · 구조덕 · 심유룡 · 진자룡 · 후동증 · 양문총 · 진잠부 · 심정양 · 임여저 · 정위홍
278권 「양정린등전(楊廷麟等傳)」
양정린 · 만원길 · 곽유경 · 첨조항 · 진태래 · 왕양정 · 증형응 · 게중희 · 진자장 · 장가옥 · 진방언 · 소관생
279권 「여대기등전(呂大器等傳)」
여대기 · 문안지 · 번일형 · 오병 · 왕석곤 · 도윤석 · 엄기항 · 주천린 · 장효기 · 양외지 · 오정육
280권 「하등교등전(何騰蛟等傳)」
하등교 · 구식사
281권 「순리전(循吏傳)」
진관 · 방극근 · 오리 · 요흠 · 고두남 · 여언성 · 사성조 · 오상 · 사자양 · 황신중 · 하승 · 패병이 · 유맹옹 · 만관 · 엽종인 · 왕원 · 적부복 · 이신규 · 손호 · 장종련 · 이기(李驥) · 왕영 · 이상 · 조예 · 조등 · 증천 · 범충 · 주제 · 범희정 · 유강 · 단견 · 용사언 · 정적 · 전탁 · 당간 · 탕소은 · 서구사 · 방숭 · 장순 · 진유학
282·283·284권 「유림전(儒林傳)」
범조간 · 사응방 · 왕극관 · 양인(梁寅) · 조방 · 진모 · 설선 · 호거인 · 채청 · 나흠순 · 조단 · 오여필 · 진진성 · 여남 · 소보 · 양렴 · 유관 · 마리 · 위교 · 주영(周瑛) · 반부 · 최선 · 하당 · 당백원 · 황순요 · 진헌장 · 누량 · 하흠 · 진무열 · 담약수 · 추수익 · 전덕홍 · 왕기(王畿) · 구양덕 · 나홍선 · 오제 · 하정인 · 왕시괴 · 허부원 · 우시희 · 등이찬 · 맹화리 · 내여덕 · 등원석 · 공희학 · 안희혜 · 증질수 · 공문례 · 맹희문 · 중어폐 · 주면 · 정접도 · 정극인 · 장문운 · 소계조 · 주천 · 주서(朱墅)
285·286·287·288권 「문원전(文苑傳)」
양유정 · 호한 · 소백형 · 왕면 · 대량 · 위소 · 장이녕 · 조훈 · 서일기 · 조총겸 · 도종의 · 원개 · 고계 · 왕행 · 손분 · 왕몽 · 임홍 · 왕불 · 심도 · 섭대년 · 유부 · 장필 · 장태 · 정민정 · 나기 · 저권 · 이몽양 · 하경명 · 서정경 · 변공 · 고린 · 정선부 · 육심 · 왕정진 · 이렴 · 문징명 · 황좌 · 가유기 · 왕신중 · 고숙사 · 진속 · 전여성 · 황보효 · 모곤 · 사진 · 이반룡 · 왕세정 · 귀유광 · 이유정 · 서위 · 도륭 · 왕치등 · 구구사 · 당시승 · 초횡 · 황휘 · 진인석 · 동기창 · 원굉도 · 왕유검 · 조학전 · 왕지견 · 애남영 · 장부
289·290·291·292·293·294·295권 「충의전(忠義傳)」
화운 · 왕개 · 손염 · 모로 · 왕강 · 왕의(王禕) · 웅정 · 역소종 · 금팽 · 황보빈 · 장영(張瑛) · 왕정 · 만침 · 주헌 · 양충 · 오경 · 곽은 · 손수 · 허규 · 황굉 · 송이방 · 왕면 · 진문시 · 왕부 · 전순 · 주부 · 손당 · 두괴 · 황천 · 왕덕 · 왕일중 · 소몽양 · 장진덕 · 동진륜 · 공만록 · 관양상 · 서조강 · 희문윤 · 주만년 · 장요(張瑤) · 하천구 · 반종안 · 장전 · 하정괴 · 고방좌 · 최유수 · 정국창 · 당환순 · 이헌명 · 장춘 · 염생두 · 왕조곤 · 손사미 · 교약문 · 장병문 · 언윤소 · 길공가 · 형국새 · 장진수 · 등번석 · 장혼방 · 장윤등 · 장광규 · 이중정 · 방국유 · 하승광 · 방유 · 윤몽오 · 노겸 · 공원상 · 왕신 · 사기언 · 양지인 · 왕국훈 · 여홍업 · 장소등 · 왕도(王燾) · 장가징 · 서상경 · 완지전 · 학경춘 · 장극검 · 서세순 · 무대열 · 전조징 · 성이항 · 안일유 · 반홍 · 진예포 · 유진지 · 이승운 · 관영걸 · 장유세 · 왕세수 · 허영희 · 이정좌 · 노세임 · 유인 · 하섭 · 조흥기 · 하통춘 · 진미 · 심길신 · 노학고 · 진만책 · 허문기 · 곽이중 · 최문영 · 서학안 · 풍로운 · 채도헌 · 장붕익 · 유희조 · 왕손란 · 정양주 · 황세청 · 양훤 · 당시명 · 단복흥 · 간인서 · 사오교 · 도임 · 축만령 · 진빈 · 왕징준 · 정태운 · 하복 · 장나준 · 김육동 · 탕문경 · 허담 · 왕교동 · 장계맹 · 유사두 · 왕여정 · 윤신 · 고기훈 · 장요(張耀) · 미수도 · 경정록 · 석상진 · 서도흥 · 유정표
296·297권 「효의전(孝義傳)」
정렴 · 서윤양 · 전영 · 요비 · 구탁 · 최민 · 주완 · 오홍 · 주후 · 유근(劉謹) · 이덕성 · 심덕사 · 사정가 · 권근 · 조신 · 국상 · 왕준(王俊) · 석내 · 사오상 · 주오 · 정영 · 부즙 · 양성장 · 사용 · 하경 · 왕원(王原) · 황새 · 귀월 · 하린 · 손청 · 유헌 · 용사언 · 유자(兪孜) · 최감 · 당엄 · 구서 · 장균 · 왕재복 · 하자효 · 아기 · 조중화 · 왕세명 · 이문영 · 공금 · 양통조 · 장청아
298권 「은일전(隱逸傳)」
장개복 · 예찬 · 서방 · 양항 · 진회(陳洄) · 양인(楊引) · 오해 · 유민 · 양보 · 손일원 · 심주 · 진계유
299권 「방기전(方伎傳)」
활수 · 갈건손 · 여복 · 예유덕 · 주한경 · 왕리 · 주전(周顚) · 장중 · 장삼봉 · 원공 · 대사공 · 성인 · 황보중화 · 동인 · 오걸 · 능운 · 이시진 · 주술학 · 장정상 ,유연연,
300권 「외척전(外戚傳)」
진공 · 마공 · 여본 · 마전 · 장기(張麒) · 호영(胡榮) · 손충 · 오안 · 전귀 · 왕천 · 주능 · 왕진(王鎭) · 만귀 · 소희 · 하유 · 진만언 · 방예 · 진경행 · 이위 · 왕위(王偉) · 정승헌 · 왕승 · 유문병 · 장국기 · 주규
301·302·303권 「열녀전(列女傳)」
정월아 · 제아 · 정금노 · 노가랑 · 탕혜신 · 묘총 · 만의전 · 왕묘봉 · 당귀매 · 양태노 · 정은아 · 두묘선 · 초낭맹 · 호귀정 · 오길고 · 서아장 · 양옥영 · 우봉랑 · 예미옥 · 고형와 · 항숙미
304·305권 「환관전(宦官傳)」
정화 · 김영 · 왕진(王振) · 조길상 · 회은 · 왕직(汪直) · 양방 · 하정 · 이광 · 장종 · 유근 · 장영(張永) · 곡대용 · 이방 · 풍보 · 장경 · 진증 · 진구 · 왕안 · 위충현 · 왕체건 · 최문승 · 장이헌 · 고기잠 · 왕승은 · 방정화
306권 「엄관전(閹黨傳)」
초방 · 장채 · 고병겸 · 최정수 · 유지선 · 조흠정 · 왕소휘 · 곽유화 · 염명태 · 가계춘 · 전이경
307권 「영행전(佞倖傳)」
기강 · 문달 · 이매성 · 계요 · 강빈 · 육병 · 소원절 · 도중문 · 단조용 · 공가패 · 호대순 · 전옥 · 왕금 · 고가학 · 성단명 · 주융희
308권 「간신전(奸臣傳)」
309권 「유적전(流賊傳)」
호유용 · 진녕 · 진영 · 엄숭 · 주연유 · 온체인 · 마사영
이자성 · 장헌충
310권 「호광토사전(湖廣土司傳)」

311·312권 「사천토사전(四川土司傳)」

313·314·315권 「운남토사전(雲南土司傳)」

316권 「귀주토사전(貴州土司傳)」

317·318·319권 「광서토사전(廣西土司傳)」

320·321·322·323·324·325·326·327·328권 「외국전(外國傳)」
조선(← 고려) · 안남(대우후여조막조후여조) · 일본 · 유구(삼산유구) · 여송 · 합묘리 · 미락거 · 사요 · 계롱 · 파라 · 마엽옹 · 고마랄랑 · 풍가시란 · 문랑마신 · 점성 · 진랍 · 섬라 · 과왜 · 삼불제 · 발니 · 만랄가 · 소문답랄(팔석아제) · 수문달나 · 소록 · 서양쇄리 · 람방 · 담파 · 백화 · 팽형 · 나고아 · 여벌 · 남발리 · 아노 · 유불 · 정기의 · 파나서 · 불랑기 · 화란 · 고리리 · 가지 · 소갈란 · 대갈란 · 석란산 · 방갈랄 · 소납박아 · 조법인 · 목골도속 · 불랄왜 · 죽보 · 아단 · 알살 · 마림 · 홀로모사 · 유산 · 비날 · 남무리 · 가이륵 · 감파리 · 급란단 · 사리만니 · 저리 · 천리달 · 실랄비 · 고리반졸 · 알니 · 하랄비 · 기랄니 · 굴찰니 · 사랄제 · 팽가나 · 팔가의 · 오사랄척 · 감파 · 아왜 · 타회 · 백갈달 · 흑갈달 · 불름 · 의대리아 · 달단(북원) · 와랄 · 올량합
329·330·331·332권 「서역전(西域傳)」
합밀위 · 유성 · 화주 · 토로번 · 안정위 · 아단위 · 곡선위 · 적근몽고위 · 사주위 · 한동위 · 한동좌위 · 합매리 · 서번제위 · 오사장 · 아난공덕국 · 니팔랄국 · 타감오사장행도지휘사사 · 장하서어통영원산위사 · 동복한호선위사 · 살마아한 · 사록아해 · 달실간 · 새람 · 양이 · 갈석 · 질리미 · 복화아 · 별실리팔 · 합열 · 엄도회 · 팔답흑상 · 우전 · 실자사 · 엄적간 · 합실합아 · 역사불한 · 화랄차 · 걸력마아 · 백송호아 · 답아밀 · 납실자한 · 매진 · 일락 · 미석아 · 흑루 · 토래사 · 아속 · 사합로 · 천방 · 묵덕나 · 곤성 · 합삼등29부 · 노미


대월 복속기의 역대 군주
호한창(대월)

영락 주체

홍희 주고치
[1] 내몽골자치구에만 있는 행정구역 단위다.[2] 원래 묘호태종(太宗)이었으나, 가정제 시대에 들어 묘호가 성조(成祖)로 개정되었다. 이에 따라 영락제 재위기간에 대해 기록한 명실록의 제목은 그대로 태종실록으로 되어 있다. 강건성세의 청나라가 편찬한 명사에는 개정 후의 묘호인 <성조본기>로 올라있다. 헌데 이게 명목상으로는 종에서 조로 올린 격상이지만, 따져보면 오히려 강등을 염두에 둔 측면이 엿보인다. 태종은 그 자체로 종이고 조고 다 쌈싸먹는 "태조에 버금가는 군주인 동시에 태조의 정통 후계자"라는 비창업군주로서는 최고의 묘호인데, 聖이 아닌 成자를 쓰는 성조는 그냥 "나라를 흥성하게 한 중시조" 정도의 의미이기 때문. 애초 聖祖 묘호는 추존 황제들, 혹은 천년에 한 번 나올 성군에게 붙여진 묘호다. 중시조가 제2의 시조, 제2의 태조라고는 하나 태종처럼 유일무이한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태조의 정통 후계자'란 의미가 제거된 이상 정난의 변으로 즉위한 영락제의 정통성을 깎아먹는 것일 수밖에 없다. 추측으로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방계로 즉위한 가정제가 제2의 영락제가 나오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설이 있다.[3] 영어 위키백과 House of Zhu 중, 'Having overthrown his nephew, Zhu Di seized the throne and became known as the Yongle Emperor (r. 1402–1424); his reign is universally viewed by scholars as a "second founding" of the Ming dynasty since he reversed many of his father's policies.'[4] 명이 처음 건국했을 때 명의 수도는 남경이었다.[5] 명나라 개국 공신으로 무공 제일이라던 서달상우춘도 가끔 패하기까지 한 몽골군 상대로 공격이면 공격, 방어면 방어, 중원 특유 화려한 인해전술로 몽골의 일파들을 전부 격파하는 등 모두 전승(全勝)을 거두었다. 그래서 주원장은 "북방에 연왕이 있으니 짐이 편안하다"고 칭찬할 정도였다.[6] 주윤문을 황태손으로 삼는 대신 주체를 황태자로 삼을 경우, 주체의 두 형이 반발하여 내분이 일어날 위험이 있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7] 연(燕)은 춘추시대부터 오늘날의 허베이, 랴오닝 성 일대를 포함하는 지역을 부르는 이름이었으며,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에서 비롯되어 남북조시대 미천왕 시절부터 광개토대왕까지 고구려와 다투었던 전연, 후연의 국호이기도 했다. 삼국지에서 장비가 "연인(燕人) 장비가 왔다!" 하고 언급하는 부분이 이 지역을 의미한다.[8] 실제로 명나라의 군사력이 정점에 달한 시기가 영락제 시기이다.[9] 선비족 귀족한족 귀족의 연합체인 관롱집단 출신이다. 순수한 선비족은 아니다.[10] 그 외에 한족 황제가 북방으로 멀리 친정을 했던 사례중에는 한고조 유방이 흉노를 제압하기 위해 친정한 사례가 있으나 백등산 포위전에서 대패하고 간신히 화친하여 귀환한 바 있다.[11] '타타르', 이는 멸칭이었다. 주로 칭기즈 칸의 후예인 동몽골의 북원을 일컬었다.[12] '오이라트', 서몽골의 오이라트 4부 연합을 일컬었다. 동몽골 북원의 숙적이었다.[13] 물론 흉노가 완전히 근절된건 아니어서 한무제 이후로도 계속 약탈과 교전이 있었다. 하지만 토목의 변처럼 나라가 휘청거릴 정도의 대규모 위협은 다시는 가하지 못했다[14] 당대는 세종대왕 재임 시절이었으나 태종 이방원이 실권을 쥔 채 아들 세종 위에 상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다.[15] 그 유명한 이종무 장군의 쓰시마 정벌이다.[16] 전근대 시절 중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항해로 많은 재정이 소모되었다.[17] 이 원정이 왜 행해졌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가설이 거론된다. 일반적으로 영락제가 재위 내내 공들인 중화 제국 중심의 세계질서 건설의 일환으로 여겨지지만 심지어는 행방불명된 건문제를 수색하기 위한 항해였다는 설도 있는 등 그 동기는 여전히 불분명하다.[18] 영락제 본인이 워낙 업무를 일 중독 수준으로 과로를 하였고 이로 인해 병을 얻게 된다.[19] 특히 한왕 주고후는 가장 영락제를 닮은 아들로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뒤는...선덕제 문서 참고.[20] 티무르 제국의 역사서인 《승전기》에는 영락제가 "너 7년 동안 나한테 한 번도 조공 안 바쳤더라? 죽을래?"라고 어그로를 끌자 티무르는 "밀린 7년치 내가 직접 갖다줄게"라고 받아쳤다고 한다.#[21] 조선 태종과 비슷한 부분도 있지만 태종은 본인이 일으킨 반정에 의한 부작용이 생기지 않도록 공신을 숙청하는 등 뒷수습을 잘했지만 영락제는 그러지 못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쪽 내용 참조. [22] 일례로 영락제가 자신이 숙청한 정적들의 딸들을 강제로 기방에 보냈고, 그녀들이 남자들에게 겁탈을 당해 임신했다는 보고를 받았을때 웃으면서 "어린 것들이 크면 좋은 돈벌이가 되겠구나."라고 말할 만큼 냉혹한 인물이었다. 출처: 중국인은 한국인보다 무엇이 부족한가/ 장홍지에 지음/ 정광훈 번역/ 북폴리오[23] 당장 주원장 때 숙청된 남옥, 호유용 등 공신들에 대한 평가는 어쨌건 안타깝지만 불가피했다는 주장이 우세하지만 영락제 때 숙청된 관료들에 대해서는 동정론이 압도적이었다.[24] 정난의 변 문서 중 결말 부분 참조.[25] 그냥 영락제가 군주라는 것을 부정한 수준이 아니라 영락제 면전에서 쓰기 싫다며 붓과 종이를 내던졌고, 억지로 쓸 때 연나라 도적놈이 제위를 찬탈했다고 쓴 것이다. 대놓고 모욕하는 것은 물론 역쿠데타를 선동한 셈인데 이 정도면 영락제가 아니라 어느 사람 좋은 군주라고 해도 처형할 수밖에 없었다.[26] 조선세도정치도 마찬가지다. 사실 조선 왕실의 독재 체제 자체는 숙종 때부터 싹수가 보였는데 이 숙종영조, 정조는 그래도 정치적 역량이 탁월했기에 그냥 자신의 마음대로 이끌어갈 수 있었지만 그 후손들이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이는 나중에 세도정치로 변질되어 조선이 국가 막장 테크를 본격적으로 밟게 되는 계기가 된다.[27] 이 당시 명나라 농민들은 식량이 부족하여 초근목피로 연명해야했고 세금과 징병을 견디지 못하고 도주하여 유랑하는 유랑민이 되거나 처자식을 파는 사례가 빈번할 정도로 삶이 매우 어려웠다.[28] 영락제의 말년에 일어난 반란 중 가장 큰 민란은 산동 지방에서 일어난 당새아의 난인데 이 당새아의 난은 산동 지방의 농민 수만명이 가담하여 들고 일어나 산동 지방 전체를 휩쓸었다. 특히 영락제가 보낸 진압군이 초반에 참패하고 진압에 실패하여 다시 대규모의 진압군을 보내고 많은 사상자를 내서야 겨우 진압했을 정도였다.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29] 실제로 영락제 시기 동몽골을 견제하기 위해 서몽골(오이라트) 수령들에게 왕호를 내리고 군사 연맹을 맺는 등 많은 지원을 해주었고, 이를 바탕으로 흥기한 오이라트가 토목의 변을 일으켰다.[30] 사실 비밀경찰 제도는 홍무제 때부터 있었다. 홍무 15년에 금위군을 개편하면서 설치한 금의위가 바로 그것이다. 동창과의 차이라면 외신(환관이 아닌 일반신하)인 무관이 우두머리라는 것. 주원장 역시 사람을 잘 못 믿고 유방 이상의 숙청을 감행했었는데 그 도구로 유용히 쓰였다. 일화가 있는데 어느 관리가 지인들을 불러 연회를 주최한 후 다음날 홍무제를 만났는데 홍무제는 어제 무슨 일을 했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 관리는 누구를 불러 언제부터 언제까지 무슨 음식을 먹었다는 등 아주 자세하게 말했고 홍무제는 거기에 자네는 참 정직하구만! 하고 만족하면서 그 관리 앞에 뭔가를 내밀었다. 그건 바로 어제 연회가 그대로 그려져 있던 그림이었다. 이 관리는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한가지 상기할 점이 있는데 금의위 같은 경우 원래 홍무 20년에 그 폐해로 말미암아 홍무제가 폐지했다는 것이다. 헌데 영락제가 즉위하면서 다시 부활하게 된다. 그것도 권한이 더 강화된 채로. 거기에 동창까지 만들었으니...어지간히 불안했던 모양이다.[31] 다만 이는 환관들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황제들의 무능함과 무책임이 컸다. 실제로 유근은 그의 횡포가 도를 넘어선 것을 알게된 정덕제의 의해 숙청되고 위충현도 천계제 사후 즉위한 숭정제에 의해 숙청된 것만 봐도 황제들의 권력이 결코 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진과 위충현은 정통제와 천계제가 그들에게 휘둘리며 처벌을 하지 않아서 행패를 마음놓고 부렸던 것이다.[32] 나중에 토목보의 변과 경술의 변에서 북경이 몽골군에게 공격당하고 말기에 청나라군이 북경을 공격하면서 영락제의 북경 천도가 큰 실책이 되었음이 드러난다.[33] 실제로 영락제 이후 명나라는 더이상 주변국들에게 패권을 행사하거나 정복 전쟁을 하지 못하고 영토 유지에만 매달리게 되었다.[34] 세조는 나중에서야 공신들의 힘이 커져 왕권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부랴부랴 구성군, 남이 등 신공신을 양성했지만 이들 모두 기존 공신 세력에 밀려 몰락하는 등 결국 실패로 끝났다.[35] 우연의 일치인지 영락제의 묘호도 원래는 태종이었다.[36] 태조 이성계주원장이 살아 있을 때는 조선과 명의 관계가 좋지는 않았다. 정도전이 주도한 진법 훈련이나 조선을 경계했던 주원장의 움직임이 맞물린 탓. 이 탓에 주원장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승인하고 국교는 통해야 했기 때문에 태조 이성계를 책봉은 했지만, 외교적으로 굴복을 유도하기 위해 임명장과 공식 인장에 해당하는 고명이나 책인은 지급하지 않았다.[37] 사후 공헌현비 권씨로 추존[38] 사후 첩여 여씨로 추존[39] 한영성의 딸로서, 인수대비의 아버지인 한확의 첫째 누이이니 인수대비에게는 고모가 된다. 흔히 생전의 첩지를 따라 여비 한씨로 부른다.[40] 사실 처음에 영락제는 이 사실을 알고도 그냥 덮고 넘어가려 했지만, 여 장비와 궁녀 어씨가 영락제에게 처벌 받을것을 두려워해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해버렸고 이 때문에 분노하게 된다.[41] 다만 여기에서는 여 강비가 황후를 독살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죽은 것으로 나오는데 독살당한 권씨는 황후가 아니므로 고증오류.[42] 황씨가 공비로 뽑혀 명나라로 갈 때는 이미 임신 중이었다. 이 사실을 철저히 숨긴 채 이동 중 약을 써서 유산하고 핏덩이를 몰래 내다버리는 데까지 성공했는데 나중에 이걸 또 들키는 바람에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다.[43] "황제께서 신에게 이르시기를, 중국에 술이나 과일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길이 하도 멀다 하시고, 생견(生絹) 3백 필과 안팎 옷감 30필과 양 1천 마리를 하사하시어, 술과 과일 값으로 하라 하시었으니, 이상의 물건들을 왕이 받으시고, 왕의 나라에 있는 것으로 잔치를 차리게 하시오."하고, 사신이 먼저 태평관으로 돌아가니, 병조 참판 이명덕과 지신사(知申事) 원숙(元肅)을 보내어, 채백(綵帛) 15필, 채견(綵絹) 15필, 생견 3백 필, 양 8마리, 거위 16마리, 《음즐서(陰騭書)》 1천 권을 받아 오게 하였다. 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da_10108017_001[44] 조공에 관한 오해에 대해서는, 조공에 대한 답례로 황제국이 회사(回賜)를 내리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해 생기는 오해다. 이것은 윗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받은 선물보다 더 큰 선물을 내리는 것이, 상국으로서 체면을 차리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조공을 하면 할수록 명나라의 무역 적자는 늘어나고, 반대로 조선의 무역 흑자는 늘어났던 것이다. 관련 내용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옆의 링크를 참조 바람.#[45] '정예한지가 중요하지 머릿수만 많다고 능사가 아니다'라는 뜻.[46] 만약 조선에서 논쟁 끝에 흥왕사의 금탑을 영락제한테 보냈다면 그 논쟁의 장면이 조선왕조실록에 있어야 하는데, 흥왕사나 금탑으로 검색을 하면 영락제 시절인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에서 전혀 관련 내용조차 나오지 않는다.[47] 이곳에 묻히지 못한 세 황제는 홍무제, 건문제, 경태제이다. 홍무제의 경우 생전에 난징에 능을 조성해두었기 때문에 그곳에 안장되었고, 건문제는 실종되어서 능이 없다. 마지막 경태제는 탈문의 변으로 폐위된 후 친왕의 신분으로 격하되었기 때문에 친왕 자격으로 별도의 장소에 묻혔다. 추존황제인 명예종 주우원의 능도 이곳에 없는데, 주우원은 생전에 거주했던 봉지 근처인 후베이 성 징먼 시에 안장된 것을 황제 추존 후에도 이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우원의 능은 후베이 성에 따로 있다.[48] 이유는 이 기린과 황제가 나라를 잘 다스려야 나온다는 기린과 음이 같기 때문인데 그래서 처음에 정화가 기린을 데려왔다고 하자 영락제가 "그럴 리 없다"고 했다는 얘기도 있다.[49] 친족의 4대와 외족의 3대, 그리고 처족의 2대[50] 이 게임에서 왕족은 8세부터 장수로 사용할 수 있다.[51] 정황상 위의 "정난의 변"으로 추정. 참고로 여기서 방효유는 명나라 암살단의 그랜드 마스터라는 설정으로 나온다.[52] 5차례나 수십만을 동원 원정을 하였는데 대륙과 유목민족의 특성상 여의치 않으면 사막너머나 시베리아로 도망치면 그만이라서 위협적인 측면을 제외하면 실익은 크지 않았다.[53] 원래는 대항해를 준비할 때 현실적이면서 보수꼴통 관료와 (보수꼴통도 있었으나 "천재지변"과 "영락제의 여러 사업" 그리고 "내란"으로 명나라의 사정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홍무제의 유지로 항해의 감독자를 뽑는데 어려움이 있자 주군을 도우려고 환관의 특징(남성이 아닌 것)을 이용하여 대항해의 제독이 되었으나 시간이 지나자 탐험과 교류, 상업을 좋아하게 되고 의남매의 아이와 같이 탐험을 할 정도로 열심히 하였는데 시간이 지나 북경과 자금성 공역이 끝나자 새 궁궐을 태자와 관료들과 정화와 같이 둘러보면서 영락제가 이제는 항해를 그만두고 스스로 찾아오게 하는 게 어떨까라고 말하자 태자와 관료들은 입 찢어질 정도로 정말로 좋아하고 정화는 반대로 무서워 하는 것이다.[54] 1946년생으로 중국의 유명한 배우이자 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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