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빈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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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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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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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국왕 · 역대 왕비 · 환조 ~ 연산군 후궁
※ 정식 후궁 첩지가 있는 사람만 기재
※ 고종의 후궁 보현당 귀인 정씨, 광화당 귀인 이씨, 복녕당 귀인 양씨, 삼축당 김씨, 정화당 김씨는 대한제국 멸망 이후에 후궁이 되었으므로 조선의 후궁이었던 적이 없다.






조선 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 | 寧嬪 金氏


영빈 김씨묘 전경
출생
1669년
사망
1735년 1월 24일 (향년 67세)
조선 한성부 인수궁(仁壽宮)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산3번지)
능묘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175
재위기간
조선 숙의
1686년 4월 20일 ~ 1686년 7월 17일
조선 소의
1686년 7월 17일 ~ 1686년 12월 19일
조선 귀인
1686년 12월 19일 ~ 1689년 6월 9일
조선 귀인 (복위)
1694년 5월 5일 ~ 1702년 12월 6일
조선 영빈
1702년 12월 6일 ~ 1735년 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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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신 안동 김씨
부모
부친 - 김창국(金昌國, 1644 ~ 1717)
모친 - 전주 이씨(全州 李氏, 1648 ~ 1714)[1][2]
형제자매
무남 2녀 중 차녀 [ 펼치기 · 접기 ]
언니 - 이하조(李賀朝)의 처
서제 - 김최겸(金㝡謙), 김익겸(金益謙), 김의겸(金宜謙)

배우자
숙종
봉작
숙의(淑儀) → 소의(昭儀)
→ 귀인(貴人) → 영빈(寧嬪)
궁호
인수궁(仁壽宮)[3]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후궁 간택
2.2.1. 배경
2.2.2. 간택 과정
2.3. 후궁 생활
2.3.1. 희빈 장씨 축출 운동
2.3.2. 유언비어 사건
2.3.3. 옥교 사건
2.3.4. 원자 정호 사태
2.3.5. 기사환국
2.3.6. 폐출
2.4. 폐서인 생활
2.4.1. 인현왕후 폐비 사건
2.4.2. 복위 운동
2.5. 복위 후
2.6. 장희빈인현왕후의 죽음 이후
2.7. 말년
3. 평가
3.1. 당대
3.2. 현대
3.2.1.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조선 숙종의 간택 후궁이다.

2. 생애[편집]



2.1. 초년기[편집]


1669년생으로 숙종보다 8세, 인현왕후 민씨보다 2세, 옥산부대빈 장씨(희빈)보다 10세 연하이며, 숙빈 최씨보다는 1세 연상이다. 부친 김창국(金昌國)과 모친 전주 이씨(이정영[1]의 차녀) 사이의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김창국을 승중한 아우 김치겸은 양자이다.

가문의 당적은 본래 서인 산당이었다가 1681년 노소분당이 발생하면서 일제히 노론이 되었고, 모계는 1686년 외조부 이정영(노론)이 사망한 후 외숙부들(이만성·이대성)이 소론으로 전향하면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졌다.

부계·모계가 당대 최고의 명문 세가로, 조선 역대 후궁은 물론 역대 왕후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혈통이었다. 조부 김수증과 부친 김창국의 생전 실직이 다른 친족에 비해 한미했던 탓에 흔히 노론의 초대 당수이자 전 영의정이었던 김수항의 종손녀라 소개되는데, 김수증과 김창국의 생전 실직이 한미했던 것은 이들이 신 안동김씨 문정공파의 역대 당주였기 때문으로[2],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을 번갈아 거듭 역임했던 김수흥과 김수항은 가문 내에선 백형(伯兄: 부친의 적장자) 김수증은 물론 3촌 조카인 김창국보다도 종법상 서열이 낮아 지시에 복종해야 했던 일개 문중인에 불과했다.

그녀가 숙종의 후궁으로 간택된 해인 1686년까지의 집안 배경을 살펴보면, 정계인물은 어마무시해 일단 차치하고 당대 왕족만으로도 정명공주·장렬왕후·인선왕후·숙휘공주·명안공주·인경왕후·인현왕후가 부계 친인척 혹은 가까운 사돈으로 엮여 있으며, 외가로는 다시 정명공주·숙안공주·숙명공주가 가까운 사돈으로 엮여 있다. 아주 소소히 몇 가지만 예를 들면, 김수증의 어머니 연안 김씨는 인목왕후의 오빠 김내의 딸로, 인목왕후에겐 조카가 되며 정명공주에겐 외종누이가 된다. 훗날 무고의 옥 때 노론 당수로서 수사지휘를 했던 이세백은 김수증의 누이(이정악의 처)의 아들로 영빈에겐 내당숙이 되는데, 이세백의 처남이 숙휘공주의 남편이다.

김수증의 다른 누이(이광직의 처)의 딸은 인경왕후의 올케(김진구의 처)이다. 김수증의 딸이자 영빈의 고모는 장렬왕후의 이종손자(언니의 손자)이자 숭선군의 처조카인 신진화의 아내로, 신진화의 아우 신석화는 인현왕후의 동복여동생의 남편이다. 김수증의 당고모는 효종비 인선왕후의 모친이며, 재종형 김수인은 장렬왕후의 오빠 조윤석의 장인이다. 영빈의 형부 이하조는 인현왕후의 큰오빠 민진후의 처남이다. 영빈의 당고모부 이만성(김수흥의 사위)은 인현왕후의 형부 이만창의 형이자 숙휘공주의 시동생 오이주의 처남이다. 모계로는 외조모 류씨가 광해군의 처남인 류희담의 증손녀다. 외숙모 홍희임은 정명공주의 손녀이자 인현왕후의 고모부 홍만형의 조카였고, 이종사촌 송징오(큰이모의 아들)의 처 이씨는 인현왕후의 큰올케와 자매이다. 둘째이모의 남편 홍치상은 숙안공주의 외아들로, 효종에겐 첫 손자이자 숙종에겐 고종사촌이 된다. 셋째 이모부 윤지인은 인현왕후의 작은 올케(민진원의 처)의 숙부이며, 넷째 이모부 조하언은 정명공주의 외손자, 다섯째 이모부 심정보는 숙명공주의 장남이자 역시 숙종의 고종사촌 형이다.

이는 단순히 영빈이 왕실과도 연계될 만큼 대단한 가문 출신임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영빈의 간택 배경 및 영빈이 웬만한 중죄를 자행해도 숙종이 벌을 내리기 어려웠음을 피력함과 동시, 원자 정호 사태(1689년)와 기사환국(1689년)·갑술환국(1694년)·무고의 옥(1701년)의 진실된 배경을 알린다.


2.2. 후궁 간택[편집]



2.2.1. 배경[편집]


1680년(숙종 6년), 외척 김석주(명성왕후 김씨의 종형, 구 서인 한당, 청풍 김씨 외척 수장)와 서인 산당의 대표[3][4]로 출전해 김석주의 보좌가 되어 남인 사냥을 총지휘했던 민정중(인현왕후 민씨의 중부, 서인 산당)의 합작[5] 아래 삼복의 옥경신대출척을 거쳐 서인(산당+한당 잔류[6]) 정권이 수립됐으며, 이 공으로 1681년 5월 민정중의 질녀 인현왕후 민씨가 김석주송시열(서인 산당 당수)의 합의 및 강행 아래 갓 왕비를 잃은 숙종의 계비로 등극했다. 애초 다수의 국법과 왕의 자존심까지 짓밟으며 무리하게 진행됐던 국혼 과정이었으며 서인 산당의 정치 이념과 상반된 남인의 전제주의에 이미 노출된 숙종의 정치 성향상 서인 산당의 성녀인 인현왕후가 낳을 원자는 곧 숙종에겐 위협[7]이 될 만큼 인현왕후는 신혼 초부터 숙종의 외면을 받았다. 게다가 홍수의 변(1681년)으로 세도를 박탈 당한 것에 대해 남인에게 원한을 품고 가문의 원수인 산당과의 연합해 삼복 형제(인조의 손자)를 기어이 죽이고 다시 왕실 최고 여성의 고유권한[8]을 제 멋대로 자행하는 명성왕후 김씨(당시 왕대비, 현종비, 숙종의 모후)에 대해 불쾌함이 컸던 장렬왕후 조씨(당시 대왕대비)가 왕실 최고 여성의 권한으로 숙종을 보조[9]했기에 혼인을 한지 오래되도록 자식을 얻지 못하였다.

인현왕후가 왕비가 된 해인 1681년(숙종 7년)은 회니시비와 더불어 노소분당이 발생한 해이기도 하다. 서인 사이에서 경신대출척의 과정[10] 및 여파, 그리고 삼척(三戚)[11] 세도 정치에 대한 불만이 격화되던 가운데 회니시비(=회니논쟁)가 발생하자 결국 송시열에게 등을 돌리는 당원들이 대거 발생하여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는 노소분당이 발생한 것이다. 물론 집권당은 삼척(三戚)이 속한 노론이 됐으며, 노론 초대 당수는 송시열의 후계자로 경신환국부터 송시열을 대리해 서인 산당을 이끌고 있던 김수항(영빈의 종조부)가 됐다.

1683년 12월, 숙종의 외면을 받는 인현왕후에겐 왕궁에서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명성왕후가 궁중에서 무속 행위[12]를 벌이다 급성폐렴으로 추정되는 병을 얻어 급서했으며, 다음 해인 1684년(숙종 10년) 9월엔 삼척(三戚)의 수장이자 노소분당의 최고 원흉으로 그녀의 가문의 방패가 되어주던 김석주가 사망하여 2주 뒤 여흥 민씨 외척의 수장이었던 중부 민정중이 가문에 닥칠 화를 염려해 좌의정 직을 내놓고 종형 민진주 등 친족들도 외직으로 나가는 등 일시적이나마 대거 중앙에서 후퇴해 궁에 고립된 인현왕후의 입지마저 위축됐다. 그리고 1686년 1월을 전후하여 숙종의 옛 정인이었던 궁인 장옥정이 그녀를 쫓아냈던 명성왕후 김씨의 상제를 마치고 곧 환궁하여[13][14] 곧 숙종의 애정을 독차지하고 장렬왕후의 비호를 받았다.


2.2.2. 간택 과정[편집]


1686년(숙종 12년) 2월 27일 숙의(淑儀)[15] 간택이 선언됐다.[16] 1686년 3월 3일 금혼령이 내려지고 처녀 단자를 수집했을 당시에 영빈은 청양감사로 부임 중이던 부친 김창국과 더불어 지방에 머물고 있었기에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했으나 한성에 본적을 둔 이로 지방으로 이사한 처녀들의 단자도 추가하라는 숙종의 기이한 명령이 있었기에 단자를 올릴 수 있었다. 한성으로 급히 상경했으나 시간을 맞추지 못한 탓에 초간택(3월 19일)엔 참석치 못하였고 숙종이 연기한 재간택(3월 22일) 때 초간택에 합격한 2인[17]에 특별히 합류부전승하였으며, 삼간택이 있은 3월 28일에 유일하게 최종 간선되어 숙의가 됐다.[18] 삼간택을 마친 직후 미리 별궁으로 내정된 명안공주의 구궁(舊宮)으로 이동되어 한달 가량 머물며 교육을 받다가 4월 26일 독뢰연을 행하고 같은 날 입궐하여 대전에 조현례를 올렸으며, 다음날인 4월 27일 대왕대비인 장렬왕후와 왕비인 인현왕후에게 조현례를 올렸다.

애초에 후궁이 되기엔 가당치도 않은, 조선 역대 왕후를 통틀어도 적수가 없을 정도로 입지적인 혈통과 세력의 소유자였던 만큼 대신들이 혼란에 빠져 본래의 절차에 예우를 거듭 더하다 결국엔 제도를 새로 세우다시피 하여 정궁에 준하는 가례 절차로 입진했음은 물론, 입궁 전후에도 후궁인 그녀에게 정궁인 인현왕후와 동급의 예우 및 물선이 올라가는 등의 물의가 연이어 발생했다. 숙종 역시 후궁에 불과한 그녀에게 정궁보다 상급이기까지 한 공주의 혼수를 기준으로 하여 혼인 예물을 준 것으로도 불편했는지 국유 저수지인 덕지통(德池筒)[19]과 진하산(珍下山) 목장[20]을 추가로 하사하였는데 이는 살 날이 길지 않을 연로한 대비에게 임금의 극진한 효성을 피력하기 위해 바쳤던 선물의 수준으로, 아직 17세에 불과한 젊은 후궁에겐 지나치게 파격적인 예물이라 결국 취소되었다.[21][22] 대신 5월 27일 장렬왕후의 육순이 된 를 기념한다는 명분으로 영빈을 숙의에서 소의(정2품)로 특별 진봉시켰다가 이것으로도 불편했던지 11월 5일엔 장렬왕후의 육순 생일을 기념한다는 명분으로 귀인(종1품)으로 다시 특진시켰다.

그녀의 간선은 오직 영빈을 위해서만이라고 밖엔 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간택 과정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처음부터 미리 내정된 것으로, 재간택이 있은 날 영빈 김씨의 친정에 하례객 및 선물이 줄을 이었던 것과 다음날인 3월 23일엔 영빈의 종조부인 영의정 김수항이 "들리는 말에 장차 청양 현감(靑陽縣監) 김창국(金昌國)의 딸로 정하려 한다고 하니, 김창국은 곧 신의 형의 아들입니다."라며 영빈에게 지병이 있으니 뽑지 말 것을 탄원한 내용에서도 명확히 알 수 있다. 또한 1686년 당시 영빈의 나이가 이미 18세에 이른 상태였다는 점도 주목할 점인데 17세기 후반에 사족의 딸이 18세에 이르도록 혼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중대한 결함이 있어 혼처를 구하지 못했거나 파혼을 당했다는 뜻[23]으로, 영빈의 집안 특성 및 결과적으로 후궁으로 입진했다는 사실은 영빈의 집안에서 일부러 혼인을 시키지 않고 대기를 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24] 따라서 영빈의 후궁 입성은 이후에 발생한 일렬의 사건들과 이어보면 고매한 이복 아우 김수항의 성정 탓에 삼척에 들지 못했던 것을 애석하게 여겨왔던 김수흥과 1684년의 일시후퇴 이래 정계 복귀를 도모하고 있으나 이미 세태가 바뀌어 노론의 수장이자 숙종과 소론에게도 신망을 받고 있던 김수항의 도움없이는 성사가 어려웠던 민정중이 1684~5년 사이에 영빈을 간택후궁으로 입궁시키는 것을 조건으로 합의하고, 친정을 지령을 받은 인현왕후가 숙종과 합의하여 명성왕후의 상제가 완전히 종료된 1686년 2월 10일 이후에 맞이하는 것으로 내정된 상태에서 이뤄진 것이라 볼 수 있으며, 이는 곧 《숙종실록》과 《인현왕후전》 등 영조 정권에서 완성 혹은 집필된 사적에 인현왕후에겐 투기심따위가 존재하지 않음을 강조하기 위해 피력했던 "인현왕후가 희빈 장씨의 환궁을 주선했다."가 숙종을 설득한 합의 조건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희빈의 환궁 역시 명성왕후의 상제를 마친 후에 이뤄졌기에 앞서 언급한 사적에서 피력하는 것처럼 인현왕후가 희빈을 다스리기 어려워 고심 끝에 숙의 간선을 종용했다고 보기엔 기간이 지나치게 짧다.[31]


2.3. 후궁 생활[편집]



2.3.1. 희빈 장씨 축출 운동[편집]


서인 대신들이 아직 승은상궁에 불과했던 장씨를 내쫓으라고 숙종을 종용했던 것은 이미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유명한 사실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서인이 남인계인 장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는 것을 염려'하여, 혹자는 '숙종이 장씨의 미색에 혹해 백성들이 연이은 재난으로 비탄에 빠져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축을 벌이는 등 애정이 과한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라 해석한다. 그러나 이는 조사 부족이다. 노소분당은 인현왕후가 왕비가 된 해인 1681년 회니시비로 이미 시작되어 1683년엔 완전히 갈라져 격하게 대립하고 있었으며, 장씨의 출궁을 종용했던 대신들은 서인이 아닌 노론이자 모두 영빈 김씨의 일족이었다. 애초 《숙종실록》엔 누락된 탓에 사건의 본질이 감춰져 잘못된 해석을 할 수 밖에 없기도 했는데, 이 사태의 시발점은 1686년 6월 13일 김수항이 올린 장계[32]부터이다.

1686년(숙종 12년) 4월 26일 영빈이 독뢰연을 행하고 입궐, 5월 27일에 정2품 소의로 특별진봉됐다. 영빈의 후궁 입성이 성공하고 안정기에 돌입한 시점인 6월 13일, 영의정이자 노론 당수인 김수항이 돌연 이미 반 년 전에 종결된 사안인 역관 장현에게 대역죄인 삼복 형제의 심복이었던 죄를 물어 역적(譯籍: 역관 리스트)에서 제명하고 그 일족과 더불어 대역죄로 처결하길 요구하는 계를 올렸다. 장현이 바로 장씨의 당숙으로, 장현이 대역죄로 처결되면 장씨는 그 근척으로서 출궁될 수 밖에 없다. 물론 이 계는 숙종의 강력한 부정 아래 다시 기각됐으며, 김수항 역시 다시 이에 대한 논의를 벌이진 않았다.[33]

문제는 다음달인 7월 6일 이징명(노론)이 올린 상소이다. 《숙종실록》엔 앞의 기록이 빠져 있는 탓에 연계점이 사라진 채 장씨의 출궁을 요구한 최초의 상소로 인식되고 있다.

외간에 전해진 말을 들으니, 궁인(宮人)으로서 은총을 받고 있는 자가 많은데, 그 중의 한 사람이 역관(譯官) 장현(張炫)의 근족(近族)이라고 합니다. 만일 외간의 말이 다 거짓이라면 다행이겠습니다마는 만약 비슷한 것이 있다면, 신은 종묘 사직의 존망이 여기에 매어 있지 않으리라고 기필하지 못하겠습니다. 대개 상처를 받는 길이 많아지고 나면 병을 조심하려는 뜻이 늦추어지기 쉽고, 말을 받아들이는 계제가 바르지 않으면 참소의 길이 쉽게 열리는 법입니다. 이것이 어찌 성명(聖明)께서 절실히 경계하고 두려워 하셔야 될 바가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장현의 부자(父子)는 일찍이 정(楨)·이남(李枏)[34]

에게 빌붙은 자이겠습니까? 그의 마음가짐이나 하는 일들이 국인(國人)에게 의심을 받아온 지가 오랩니다. 이제 만약 그들의 근족을 가까이하여 좌우에 둔다면 앞으로의 걱정은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예로부터 국가의 화란이 다 여총(女寵)으로 말미암고, 여총의 화근은 대개 이러한 사람에게서 나왔습니다. 전하의 명성(明聖)으로 어찌 알지 못할 바가 있겠습니까마는, 신은 바라건대, 성상께서 장녀(張女)를 내쫓아서 맑고 밝은 정치에 누를 끼치지 말게 하소서.

《숙종실록》 숙종 12년 7월 6일


분명 이징명의 이 상소 내용은 약 보름 전 김수항이 쏘아올렸다가 불발된 계와 연계된다. 이징명은 영빈 김씨의 외조모 청송 심씨(이정영의 처)의 고모부이자 영빈 김씨의 6촌 외외재종조부(외조모 심씨의 사촌아우)인 심권(훗날 경종초비 단의왕후의 증조부)의 처남이니, 사실 앞서 언급한 영빈의 4촌 종조부 김수항이나 아래에 이어 언급할 5촌 외당숙 이덕성과 5촌 당숙 김창협, 더 나아가 1687년 조사석 유언비어 사건의 공범인 이모부 홍치상, 1688년 옥교사건의 진범인 김성적·윤덕준 종숙질[35]과 당숙 김창집[36], 1689년 원자정호 사건의 결정타가 된 4촌 종조부 김수흥과 기사환국의 결정타가 된 5촌 내당숙 이세백에 비하면 남 같은 바가 없진 않으나 일단 연계가 없진 않다. 그러나 이징명이 김씨 일족의 지시를 받고 이 상소를 올렸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 상소의 첫 요구가 "연이은 재난은 외척의 세도에 하늘이 노한 탓이니 곤성(坤聖: 곤전. 왕비의 이칭. 여기선 인현왕후를 가리킴)을 면계(勉戒: 타이르다, 야단쳐 깨우치게 하다)하라."로, 김씨 일족과 체결 관계에 있는 여흥 민씨 척족을 건드린 것이다. 즉, 이징명은 독단적으로 당수 일가에 아부할 목적으로 물색없이 이러한 상소를 올린 것이거나, 그간 동당이라 참아왔던 민씨 척족에 대한 불만을 결국 터트리면서 물론 그간 소론은 참지 않았다. 목숨 부지를 위해 당수인 김수항의 발목을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숙종은 이징명에게 장현에 관한 것은 억측이니 죄를 묻지 않겠지만 국모를 모함한 죄는 용서할 수 없다며 이징명에게 벌을 내렸으며[37], 동당 영수인 김수항의 변호와 구명 아래 혹독한 고신은 피한 채 유배형을 받는 것으로 종결됐다. 하지만 민씨 척족은 이에 만족치 않았다.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이 상소(上疏)하기를, "신이 지난번에 교리(校理) 이징명(李徵明)의 응지(應旨)에 대한 상소를 삼가 보았었는데, 첫 머리에서, ‘과거의 역사에 지진의 재변은 외척이 세도를 부리는 데에 말미암은 것이었다.’라고 말하고, 이어, ‘거처와 봉양이 습관의 변화를 초래한다.’는 등의 말로써 신을 지적하면서 심지어는 곤성(坤聖)을 경계시키고 척리(戚里)를 주의시켜야 한다고까지 청하였으니, 어떤 일이 생기기 전에 미리 경계하도록 한 것은 엄격하고 간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은 그 글을 보고 놀랍고 두려워서 마음과 뼈가 함께 섬짓할 정도였습니다. 잇따라 삼가 들으니, 간장(諫長) 【윤경교(尹敬敎)이다.】 의 상소에 또다시, ‘총애가 지나쳐서 교만이 생겼다.’고 말했다 하니, 신의 죄는 이 지경에 이르러 한층 더 첨가되었습니다. 신은 진실로 어리석어서 종전의 범죄가 어떠했는지를 스스로 알지 못하였으며, 마침내 죽게 된 때에 이르러서 이렇게까지 좋지 못한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숙종실록》 숙종 12년 8월 6일


다음달인 8월 6일, 여양부원군 민유중이 비분강개하여 사위인 숙종에게 직접 올린 상소이다. 이는 곧 이징명을 엄중히 처벌하여 일벌백계로 삼으라는 뜻이였다. 이미 유배형을 받은 이징명에게 가중처벌을 더하라고 한다면 그건 곧 사형을 의미했다. 이로 인해 난처해진 것이 김수항이다. 본가와 연계된 민유중 측에 서서 이징명을 버리면 소론과 마찬가지로 민씨 척족에 대한 불만은 있으나 의리 때문에 노론에 남아있던 당원들이 다시 분열되어 소론에 합류할 것이고, 당수로서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민유중과 척을 지면 가문에서 불리해진다. 이로 인해 시작된 것이 이징명 상소 바꾸기 작전이다.

다음달인 9월 5일, 이국화·원진택·이덕성이 숙종이 몰래 인부를 들여 (장씨를 위한) 별당을 짓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면 연이은 재난으로 나라가 어려우니 당장 중단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덕성은 영빈 김씨의 5촌 외당숙(이정영의 조카)이다. 그리고 9월 13일, 김창협(김수항의 차남. 차기 노론 당수)이 앞서 이덕성이 올린 상소를 근거로 '궁중에 은밀히 건축이 있었다는 소문도 사실이고, 장현의 근족이 궁인으로 있어 숙종의 총애를 받는다는 소문도 사실임을 확인했으니 (이징명이 언급했던) 연이은 재난의 원인은 (민씨 외척 탓이 아니라) 왕이 장씨의 미색에 혹해 하늘과 신하들을 속이는 것에 하늘이 노여워한 탓', '이에 이징명의 상소 중 재난의 원인이 외척의 세도 탓이라 했던 것이 억측이고 역적 장현의 근족인 장씨가 궁중에서 총애를 받는 것이 사실인데 후자는 억측이라 벌을 묻지 않겠다고 하셔놓고 전자에 대해서만 벌을 내리셨으니 이징명은 억울하게 벌을 받은 것이다'란 논리로 이징명의 상소 사건 자체를 뒤집어 장씨에게 뒤집어 씌움으로써 가문과 체결관계에 있던 민씨 척족의 격노와 당원 이징명의 생명+노론의 재분열 사이에서 곤란한 처지에 놓인 부친 김수항을 구제했다.

중도에 목적이 살짝 틀어진 감은 있으나 이들이 전원 영빈 김씨의 일족이고, 하나같이 들은 소문이라 주장하고 있으며, 숙종을 미색에 혹해 나라를 망치려고 하는 왕으로 몰아가면서까지 장씨의 출궁을 도모했던 것도 사실이다. 숙종을 압박하여 장씨의 출궁을 종용한 것은 외정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내정에서도 발생하였다. 다름아닌 숙종의 고모들인 숙안공주·숙명공주·숙휘공주, 그리고 숙종에겐 유일하게 남은 동기였던 여동생 명안공주가 숙종에게 장씨를 쫓아내라 종용한 것이다. 숙안공주의 외아들 홍치상과 숙명공주의 장남 심정보가 영빈 김씨의 이모부였고, 숙휘공주와 명안공주는 시식구가 영빈 김씨와 인현왕후의 친정과 혼연 관계로 얽혀있었다.

이에 대한 숙종의 소심한 반격이 바로 12월 10일, 장씨를 내명부 종4품 숙원으로 책봉해 정식 후궁으로 삼은 것이다.[38] 애초에 여염집 유부녀나 기녀, 비구니를 궁에 들인 것도 아니고 사족 남성들이 집에서 부리는 여종에게 서슴없이 욕구를 해소하듯[39] 궁녀를 가까이 한 것 뿐인데, 대신들이 왕에게 장씨의 출궁을 요구한 것 자체가 전례를 찾을 수 없는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인 행위였다. 그러나 장씨를 정식 후궁으로 책봉하면 녹봉을 받는 관원이 되는 것임과 동시에 왕실 계보에 등록이 되는 것이라 최소한 인현왕후가 제 멋대로 쫓아내거나[40] 더이상 대놓고 해코지를 할 수는 없으며, 영빈은 물론 공주들도 함부로 하대할 수 없게 되고 공식적인 죄인이 되지 않는 이상 대신들이 출궁을 요구할 수 없게 된다.

장씨의 숙원 책봉을 선포한 다음날인 12월 11일에 오해를 살 수 있는 부분이라는 옥당 송주석(송시열의 손자)의 지적 대로 연석(筵席)[41]에서 이징명의 상소(7월 6일)에 대한 당시의 비답에 대한 공식 해명을 했다.[42] 12월 14일 한성우가 다시 김창협이 각색한 상소(9월 13일)의 내용을 들어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왕소(王素)의 간언을 한 번 듣고는 줄줄 눈물을 흘리면서 덕용(德用)이 바친 여자를 쫓아 내었으니, 신이 비록 변변찮으나 또한 어찌 감히 앞장서서 전하를 송나라 인종의 아래에 처하게 하여 곧바로 그렇게 할 수 없는 분이라고 말하겠습니까?"라고 숙종을 비난하며 모욕하는, 민진원조차 '미쳤다(狂)'고 표현했을 정도로 과격한 발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한성우의 처조카 이섭이 김수항의 사위였고, 한성우의 처남 홍수헌의 처가 인현왕후의 형부의 누이였으며, 한성우의 처숙부 홍처윤은 민정중의 장인이었으니 숙종의 의혹을 자극하는 건 당연한 일. 지금껏 장씨의 축출을 종용했던 대신들, 정확히는 영빈 김씨 일족의 정치적 압박에 '억측'이라는 일관된 답변으로 무난히 넘겨왔던 숙종이 폭발해버린 것이 이때다. 숙종은 한성우에게 왕을 모욕한 죄를 물어 파직과 유형의 벌을 내림그리고 지금껏 팝콘각 구경만 해왔던 김만중이 적으로 돌변[43]과 동시에 전교하기를,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니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아 궁인(宮人)들은 왕족(王族)들과 체결(締結)하고, 왕족들은 사대부(士大夫)들과 결탁하여 갖가지로 아첨하고 없는 사실을 날조(捏造)하며 음흉한 소문을 지어내어 군주를 모함하는 습관은 진실로 매우 통탄할 일이다. 지금부터 이와 같은 일은 드러나는 대로 효시(梟示)하는 것을 영갑(令甲)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의 전교 가운데 왕족(王族)은 대체로 제공주(諸公主)들을 가리킨 것으로서, 익평 공주(益平公主)의 집이 더욱 의심을 받았다. 나중에 대신의 진달(陳達)로 인하여 환수(還收)하였다.】

《숙종실록》 숙종 12년 12월 14일


여기서 궁인[44]이란 김씨를 가리키는 것이며, 익평공주는 숙안공주를 말하는 것으로 숙안공주의 남편의 작호가 익평(익평부위→익평위→익평군)이다. 효시란 기밀을 외부에 누설한 죄인의 목을 참하여 성문 밖에 걸어두는 형벌로, 조선에선 군법으로 쓰던 것이다. 또한 빈말이 아님을 피력하려 했던지 부왕인 현종이 2차 예송의 준비를 위해 왕권 강화를 꾀하여 해금시켰던 의빈의 정사 참여를 다시 국법대로 금지시키고 본보기로 당시 의빈들 중 숙종에겐 가장 만만한 상대였던 매제 해창위 오태주(여동생 명안공주의 남편)가 앞서 진청했던 것[45]을 폐단이라 지적하여 공개망신과 더불어 취소시켰다.[46]

효시 경고는 12월 14일 김수항의 진언[47] 아래 비망기가 회수되어 취소됐지만 이러한 경고를 내릴 만큼 숙종이 격노했던 사실 자체는 취소가 될 수 없기에 더이상 조정 대신들과 공주들을 통해 장씨(당시 숙원)의 출궁을 숙종에게 종용하는 행위는 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장씨의 축출을 꾀한 김씨의 행각이 멈춘 것은 아니다.


2.3.2. 유언비어 사건[편집]


다음해인 1687년 5월 1일 숙종이 친히 조사석(당시 이조판서)을 우의정으로 제배했지만[48], 끝내 조사석이 거부하여 맡지 않게 되었다. 이에 대해 노론은 숙종이 기어이 다시 소론을 삼정승에 올린 것에 대해[49], 소론은 왕실과 혈연·혼연에 있는 자들이 중앙 최요직을 장악하는 세태[50]에 대해 불만이 큰 상태였다. 게다가 복상 후보에 올랐으나 숙종이 조사석을 직접 채택한 탓에 물을 먹은 대신가의 분노도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51]

이때 영빈 김씨가 이모부 홍치상[52]과 작당해 "숙종이 복상(卜相) 관례[53]를 무시하고 조사석을 우의정으로 임명한 것은 조사석이 장씨의 모친과 친밀한 관계(간통을 상징)라 숙종에게 청탁을 넣은 덕분"이란 내용의 익명서신을 만들어 대신들에게 뿌렸다. 간통이든 청탁이든 무죄를 증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로,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둘 중 하나라도 정식으로 채택이 되면 희빈의 모친은 유죄를 받을 수 밖에 없게 되고, 국가 죄인의 딸이자 후궁인 희빈 장씨는 폐출시키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일부 대신에게 밖엔 전달치 못한 초기 단계에서 이 소문을 사돈인 이사명에게 직접 전해들은 김만중[54]이 옛 질서(姪壻: 질녀의 남편. 인경왕후가 김만중의 질녀이다) 한 숙종에게 소문이 사실인지 공개적으로 따지며 조롱함으로써 이에 분개한 숙종이 소문의 출처를 찾겠다고 친국 수사를 벌이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수사는 반드시 배후를 잡겠다고 길길이 뛰던 숙종이 돌연 김만중을 일시 유배 시키는 것으로 수사를 중도 종결시킨 덕분에[55]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었으나 2년 뒤인 기사환국 후 이사명[56]에 대한 남인의 보복성 수사가 전개되던 과정에서 이징명(노론)이 당시 홍치상이 시킨대로 소각치 않고 가지고 있던 증거품[57]과 '홍치상에게 직접 소문의 출처가 궁중이라고 들었다.'는 이징명의 증언 아래 사태가 역전된다.


2.3.3. 옥교 사건[편집]


1688년(숙종 15) 10월 28일 장씨가 숙종의 서장자를 생산하니, 이가 바로 숙종을 계위하여 조선의 20대 군주로 등극하는 경종이다. 경종의 탄생은 숙종에겐 비록 서자에 불과했으나 29세에 이르러 처음 얻은 아들임과 동시에 10년 만에 처음으로 안아보는 살아있는 자식이었던 것 만큼 그 기쁨과 걱정은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시에 경종의 탄생은 인현왕후에겐 당시까지의 현행법[58] 상 임진왜란 급의 변란이 발생하거나 숙종의 나이가 40대[59]에 이르거나 혹은 중병을 얻어 더이상 정사를 볼 수 없게 되는 사태에 이르지 않는 이상 세자의 자리는 정궁이 원자를 생산할 때까지 무기한 유보되는 것이 제도였기 때문에, 장차 자신이 생산할 지도 모를 적통 왕자들의 승계 순위가 밀릴 위협따윈 되지 않았지만 증오하는 연적이 자신보다 먼저 자식을 낳고만 매우 불쾌한 사건이자 꿈에서 죽은 시부모에게 계시를 받았다며 장씨 팔자엔 아들이 없을테지만 자신의 팔자엔 자식이 매우 많을 테니 장씨에게 노고(성관계 중 갖는 노동과 피로를 뜻함)하지 말고 자신에게 그 공을 쏟으라 큰소리 쳐왔던 것[60]이 모두 거짓 혹은 허황된 것임이 들통난 난처한 사건이긴 했다. 이에 인현왕후는 희빈이 딸을 낳아놓고 궐 밖에서 남의 아들을 데려와 숙종의 아들이라 속이는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트렸다.[61]

"원자가 탄생한 뒤에 더욱 불평하고 좋아하지 않는 기색이 있으면서 말하기를 ‘처음에는 여자가 쓰는 모자를 만들었는데 이제는 남자의 모자를 쓴다니 실로 뜻밖이다.’하고 궁인들 중에도 왕자가 탄생한 것이 의외의 일이라고 말하는 자가 몇이 있으니 그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내가 국본(國本)을 일찍 정한 본의가 이것이다." - 《기사유문(己巳遺聞)》

연려실기술 제35권 / 숙종조 고사본말(肅宗朝故事本末) 중 "원자(元子)의 명호(名號)를 정하다" 편



"원자(元子)가 탄생하자 더욱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삭제)실로 이는 뜻밖이다.’ 하였다.(삭제) 일찍 국본(國本)을 정한 데에는 뜻이 있는 것이다."

숙종실록 20권, 숙종 15년 4월 21일 정해 1번째기사


그런데 영빈 김씨(당시 종1품 귀인)에게 있어 경종의 탄생은 단순히 불쾌하거나 불편한 사건이 아니었다. 비록 그녀가 정궁인 인현왕후보다도 우월하기까지 한 혈통을 소유한 명문 거족 출신으로, 이로 인해 숙종이 제도까지 뜯어고쳐 정궁에 준하는 예우로 맞이해야 했던 간택후궁이었으나, 법적 입장은 중인 신분의 승은후궁인 희빈 장씨와 동일하게 숙종의 첩인 후궁이었다. 따라서 장씨가 숙종의 서장자를 먼저 낳아버린 이상 그녀가 장차 왕자를 생산할 지라도 서중자가 된다. 더욱이 이때의 정황 상 숙종의 애정을 독차지한 장씨가 그녀로 인해 숙종의 증오를 얻어버린 자신보다 먼저 또 회임하여 왕자를 생산할 가능성 역시 충분하니 경종이 요절하든 과거 선조의 서장자였던 임해군처럼 자라든, 장차 자신이 낳을 아들의 계승 서열은 인현왕후가 죽거나 폐비되어 자신이 왕비로 등극하지 않는 이상 경종 혹은 장차 태어날 수 있는 경종의 동복 아우에게 영구히 밀려난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발생한 것이 숙종실록 1688년 11월 12일자 기사에 숙종이 사헌부 조례와 금리를 장살하라는 것으로 서두를 연 옥교 사건이다.

흔히 이 사건은 남인계인 장씨가 서인계이자 정궁인 인현왕후보다 먼저 왕자를 생산하자 이에 불쾌함과 불안함을 느낀 이익수 이하 사헌부 소속 서인계[62] 관원들이 장씨의 모친이 불법으로 가마를 타고 다니는 것을 벌을 주어 숙종에게 경고한 사건이라 정의되는데, 이는 오랜 기간 교육과 각종 서적 및 미디어 매체로 주입되어 왔던 구학설에 숙종실록 중 1688년 11월 12일 2번째 기사를 대충 읽고 끼워맞춘 것이다. 사건의 과정과 진상은 아래와 같다.

1. 10월 28일에 장씨가 경종을 생산하자 숙종은 장씨의 친정어미인 파평윤씨에게 장씨의 산후조리를 직접 맡겼다. (그러나 후궁의 모친에 불과한 윤씨는 궁에 머물 수 없었고[63], 60대 노파인 윤씨를 음력 11월 한겨울에 도보나 말을 타게 하여 은평구에서 궁까지 매일 왕복시키는 것은 무리인 터,) 이에 숙종은 윤씨에게 왕명을 상징하는 동패를 주고, 후궁이 출산을 하면 친정붙이 특별히 가마를 타고 입궁해 출산 전후를 돌보도록 하는 관례를 일부 확장해 윤씨가 가마를 타고 궁에 출퇴근토록 한 것이다. 《단암만록》에 따르면 이 8인옥교는 동평군의 가물(家物: 집안 물건)이라 했고, 《인현왕후전》에도 숭선군의 처인 영풍군부인 신씨(동평군의 모친)의 것이라 쓰여있다. [64][65]

2. 11월 11일 밤 혹은 이전 밤, 옥당(홍문관의 이칭) 소속 김성적(노론)과 윤덕준(노론)이 장렬왕후의 곡반을 마친 밤에 집으로 가지 않고 볼일이 남았다며 입궁하다가 궐문 앞에 세워진 옥교가 윤씨가 타고 다니는 것임을 알고 사헌부에 국법을 어긴 죄인을 적발하여 벌을 주려하니 사람을 보내달라는 서신을 넣었다. 김성적(김광현의 손자)은 김수증·김수흥·김수항 형제의 7촌 조카임과 동시에 김수흥의 처조카이기도 하며, 윤덕준(김광현의 외손녀의 아들)은 김수항 형제의 8촌 손자이다. 《단암만록》엔 공범으로 김창집도 언급하고 있는데, 김창집은 김수항의 적장자이다.[66]

3. 당시 사헌부에 숙직 중이던 이익수(소론)가 서신을 받고 정황은 모른 채[67] 사헌부 소속 하급 아졸인 금리와 조례를 보내주었고, 현장에 도착한 이들이 김성적과 윤덕준의 명에 따라 귀가 중이던 윤씨의 가마를 쫓아가 윤씨가 왕명을 상징하는 동패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윤씨의 눈 앞에서 가마꾼과 수종을 현행범으로 매질하고 윤씨에겐 가마를 탈 신분이 안되니 집까지 걸어가라며 가마에서 끌어내리고 가마꾼과 수종을 더불어 가마 역시 압수했다. 정해진 국법으론 옥교를 탈 수 있는 것은 오직 문관 당상관과 그 처, 그리고 모친에 제한된다. 실제론 개나소나 다 타고 다녔음

4. 돌아온 금리와 조례에게 보고를 받은 이익수가 (사헌부, 더 나아가 소론에게 닥칠 화를 깨닫고) 스스로 숙종에게 나아가 사건을 자진 보고하고, 국법을 따른 것이나 책임을 묻겠다면 자신이 모두 책임질 것을 자청했다. 상황을 몰랐던 숙종은 당황하여 윤씨가 가마를 탔던 것은 어명에 따른 것이고, 후궁이 출산을 하면 친정붙이가 가마를 타고 입궁하는 왕실의 관례가 있어 전례까지 확인하고 명을 내린 것임을 피력, 그러나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비답으로 이익수를 돌려보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당황이 가시자 분노가 찾아온 숙종이 내관들을 시켜 천한 신분으로 왕명을 상징하는 동패마저 무시하고 왕자의 외조모에게 수모를 준 조례와 금리[68]를 내수사[69]에서 매질하라고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매질을 당하던 조례와 금리가 옥당의 명령을 따른 것 뿐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했고, 이를 보고받은 숙종이 이익수가 보고했던 대로 사헌부 자체의 소행이 아니었음을 알게됐다. 옥당은 노론, 그 중에서도 영빈 김씨의 일족이 포진되어 있던 부서였다.

5. 정식으로 조례와 금리를 체포해 의금부로 옮기고, 사건의 배후자와 실정이 밝혀질 때까지 죽어도 상관없으니 형벌의 차수를 따지지 말고 엄문하란 명을 내렸다. 이게 바로 11월 12일로, 앞의 1번과 4번 및 뒤의 6번과 7번의 내용이 숙종실록 11월 12일 2번째 기사에 순서가 섞여 압축되어 나열됐다.

6. 소식을 전달받은 이익수가 아무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했던 숙종의 약조를 상기시키며 법을 어긴 윤씨에게 죄를 묻거나 본인에게 책임을 물을 것을 요구하며 애초 법에 궁중 관례란 예외가 존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 주장했다. 이에 소론이 이익수의 구명을 위해 이익수의 주장처럼 (문관 당상관의 처나 모친이 아닌) 윤씨가 가마를 탄 것은 불법인 건 맞다고 주장.

7. 분개한 숙종이 돌연 영빈 김씨를 공개 언급하며 "내외의 족당(族黨)[70]이 요진(要津: 요직)에 반거(盤據: 점거)하여 기세(氣勢)가 두렵고 강약(强弱)이 같지 않으므로 진실로 감히 항형(抗衡: 대항, 항거, 반항) 할 수가 없는데,"란 발언으로 신랄한 비판을 하고, 영빈 김씨의 모친 역시 자격이 안되면서[71] 출산을 한 것도 아닌 딸을 보겠다고 옥교를 타고 수시로 궁에 오다니는데 누구도 모욕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음을 지적했다.

8. 11월 13일, 옥교 사건의 진범인 김성적과 윤덕준이 자수했으며[72], 이익수와 이언기(사헌부)가 직임에 종사할 수 없다며 인피하였다. 사간원에서 앞으로 윤씨가 옥교를 타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어명을 내릴 것을 요구했으나 숙종이 되려 가마 타는 것을 정식으로 시행하겠다고 선언했다.

9. 11월 15일, 조사석이 사태를 중재코자 다시 숙종을 찾아 윤씨가 탔던 가마가 그냥 가마도 아닌 왕녀가 타는 8인 옥교로 모양이 매우 사치스러웠음이 지적함과 동시에 영빈의 모친은 전판서의 딸이자 명가의 며느리이니 (비록 불법이나) 옥교를 타도 무방하다며 영빈에 대한 비판을 취소할 것을 권유했다.

10. 11월 15일, 노론 당수 김수항[73]과 영의정 김수흥이 숙종이 13일에 언급했던 "귀인의 내외족당의 기세" 운운이 불쾌하다며 사직서를 올렸다.[74]

11. 11월 16일, 김성적(진범 1)이 사헌부 이졸들이 매질 후유증으로 집에 도착하자마자 연이어 사망했음을 알리며, 후궁의 어미가 불법으로 참람하게 가마를 타고 궁중에 출입하다가 사헌부에서 법대로 다스렸을 뿐인데 왕이 듣고 노하여 환관을 시켜 이졸 2명을 박살내 죽였으니 이는 선왕의 법에 죄를 준 것으로 후세의 비판을 받기 싫으면 뉘우치는 뜻(=윤씨에게 공식적으로 죄를 물을 것)을 보이라는 상소를 올렸고, 옥당(노론)에서도 모두 같은 의견의 상소를 올렸다. 이익수(소론)와 유득일(소론)의 상소에 숙종이 일부 마음을 누그러트리고 사헌부 이졸들이 죽은 것에 유감을 표하는 것으로 상황이 진정 기세에 들어갔으나, 김수흥과 김수항이 다시 사직소를 올렸으며, 이어 노론 관원들이 수일에 걸쳐 연이어 사직을 청했다.[75]

12. 11월 17일, 숙종이 김수흥에게 사과하며 위로하였으나 김수흥이 사직을 고집하였고, 김창집(김수항의 적장자) 등 김씨 일족을 비롯한 노론이 계속해 사직소를 제출하였다. 이후 노론은 김수흥과 김수항, 영빈에 대한 숙종의 사과에 정성이 부족하다며 이들이 감복하여 사직을 취소할 때까지 더욱 정성을 들여 사과를 반복할 것과 윤씨에 대한 공식적인 강경 처분을 촉구했다.

분명 영빈 일족이 이 사건을 미리 공모 설계하여 벌였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이미 영빈 일족은 공권력과 숙종의 혈친을 동원해 희빈 장씨의 제거를 수차례 꾸며왔던 전력이 있었으며, 이 사건의 진범인 김성적과 윤성적, 그리고 더 나아가 《단암만록》에서 숙종에게 공범 혐의를 얻었다고 언급한 김창집(당시 옥당 재직)까지 전원 영빈 일족이다. 더욱이 김성적은 숙종의 친조모인 인선왕후 장씨(효종비)의 외종제(=외사촌동생)라 숙종이 벌을 내리기 어려운 대상이기도 했다. 이에 숙종이 이 사건 역시 영빈 일족의 공모라고 판단해 영빈에 대해 공개 비판을 퍼부었던 것은 비록 증거는 없으나 합리적인 의심이자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이를 기다렸던 듯 노론 당수 김수항과 영의정 겸 노론 중진인 김수흥이 영빈에 대한 숙종의 공개 비판에 대해 노골적인 불쾌함을 담은 사직서를 제출했다. 김수항은 작은 형 김수흥에게 영의정 직을 넘기고 시골에 낙향하여 지내던 상태였는데 김성적 일동이 옥교 사건을 벌이기에 앞서 한성에 올라와 대기 중이었던 것이다.

노론 당수인 김수항, 노론 중진인 김수흥을 비롯하여 노론의 중추 세력인 영빈 일족이 단체로 사직서를 제출한 상황에서 발생할 일은 자명했다. 노론이 대거 사직 시위를 벌이며 숙종에게 정성을 운운하며 김수항 형제와 영빈이 용서할 때까지 거듭 공개 사과할 것(=굴복)과 기록에 남겨 후세가 선례로 남도록 파평 윤씨의 불법 행위에 대해 공식적인 강경 처분(=실형)을 내릴 것을 요구했다. 전례로 남기기 위해선 파평 윤씨에게 당시엔 이미 유명무실했던 가마법의 처분을 그대로 내려야 하는데, 이 경우 노파인 파평 윤씨가 살아남을 것을 장담할 수도 없을 뿐더러, 뭣보다 그 딸인 장씨는 폐출이 될 수 밖에 없다. 다른 문제는 경종이었다. 갓 태어난 신생아인 경종은 아직 책례 전이라 숙종의 법적 자식으로 등록되지 않아 모친이 폐출되면 모친을 따라 함께 출궁될 수 있으며, 설사 숙종이 왕권을 동원하여 경종만큼은 궁에 두더라도 죄를 얻어 폐출된 후궁의 아들로 장래가 위태로울 것은 자명한 일일 뿐더러 그 전에 내명부 수장이기도 한 인현왕후와 영빈의 행적과 인성 상 당장의 생명조차 보장할 수 없게 된다. 이에 대한 숙종의 반격이 원자 정호 사태이다.

2.3.4. 원자 정호 사태[편집]


1688년(숙종 14) 12월 16일은 장렬왕후의 국장일(國葬日)이다.[76] 옥교 사건으로 인해 정작 국가의 중요한 행사인 국장례에 대한 논의 및 절차는 미뤄지고 있던 가운데, 12월 4일 송시열이 회덕에서 장렬왕후의 인산일이 임박하여 상경하겠다는 상소를 올리니, 노론은 시위를 임시 중단하고 열흘 남짓 밖에 남지 않은 장렬왕후의 국장을 준비하는데 총력을 다하기 시작, 12월 16일 무사히 국장을 마쳤다.

국장 등의 국가 행사가 있으면 국장 도감 관원들을 비롯하여 여러 대신들을 포상하여 공로와 수고에 감사하는 절차가 이어진다. 이 포상은 곡물이나 옷감, 말(馬) 같은 물질적인 것도 있지만, 자급을 올려주거나 명예가 있는 직함(○○대부, ○○○부사 등)을 더해주는 것도 있다. 따라서 국가 행사가 있은 후엔 반드시 인사 이동이 이뤄졌다. 더욱이 이때는 12월. 새해를 앞두면 인사 이동이 있다. 이에, 장렬왕후의 국장을 무사히 종료함과 동시에 숙종이 여러 대신들을 가자하고, 인사 이동이 시작된 시점에는 노론은 전혀 의심을 하지 못했다. 이미 남구만·박세채·여성제 등 소론 핵심 인물은 7월을 기점으로 모두 끌어내려져 지방에 은거 중인 상태였고, 이익수·유득일 등 장차 소론을 이끌어갈 핵심 인물이 될 젊은 유망주들은 이미 영빈 일족의 초기 계획대로 옥교 사건에 연루되어 본인들 스스로가 정계를 떠나겠다 자청하던 상태였다. 비록 조사석이 좌의정으로 있긴 했으나, 사실 조사석은 노론도 소론도 아닌 애매한 중간 입장에 있어 노론이 그를 '노론이 아니니 소론'이라며 공격했던 것일 뿐, 노론 역시 그가 노론은 아니지만 소론도 아니며 소론 역시 그를 소론으로 인정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에 껄끄럽긴 해도 딱히 우려할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인사이동이 매우 비정상임을 깨닫게 됐다. 노론이 대거 가자되는 것에 숙종이 다시 곧 점화될 옥교사건에 앞서 노론에게 아부하는 것이라 판단했고, 숙종이 하루 이틀, 빠르겐 바로 당일에 마음을 바꿔 이미 내린 임명을 취소하고 다른 직책으로 임명하기를 반복하는 것도 무리까지 해가며 노론을 가자해주는 탓 정도라 착각한 듯 하다. 물론 이 과정엔, 소론이지만 김창협(김수항 차남, 차기 노론 당수 예정자)과 민진원(민유중 차남, 인현왕후 오빠)의 장인이기도 했던 윤지선이 신임 도승지로 임명되어 노론이 딜레마에 빠져 일단 아무 말 없이 퇴청해 고민부터 한 뒤 다음날 등청하니 숙종이 도승지를 이세백(김수항의 생질)으로 바꿔 할 말이 사라져버렸고, 그런데 퇴청할 때 쯤 숙종이 "맞다, 이세백 지금 지방에 있지?"하며 소론 이언강으로 바꿔버리는 식과 같은 고도의 페이크 인사 이동이 전개된 탓도 있다. 이런 식으로 언론3사가 소론의 산하로 넘어가고, 6조를 소론이 점유했으며[77], 급기야 남인인 이덕원이 예조판서에 임명되기에 이르니, '실수겠지, 다음날 바꾸겠지. 다다음날 바꾸겠지'하며 일단 기다려봤던 노론이 결국 숙종의 의중을 파악했을 땐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대부, ○○○부사 등으로 가자된 노론 중진들은 모처럼 얻은 휴가[78]에 한성을 비운 자들이 다수. 왕에게 대놓고 간언을 하거나 탄핵을 할 수 있는 언론3사는 소론이 점유. 왕의 비서실인 승정원 역시 소론 산하로 넘어가버렸고, 삼정승 중 영의정은 노론인 김수흥이 그대로 맡고 있으나 좌의정은 소론 조사석이고, 우의정은 여전히 공석인 채로 남은 상태였다.곧 소론 여성제가 우의정으로 임명된다. 특히 심각했던 건 6경(=6조판서)이다. 오직 이조판서인 남용익만 노론이고, 호조판서 유상운과 병조판서 윤지완은 소론, 예조판서인 김덕원과 공조판서 심재는 남인이다. 형조판서는 앞서 10월 이래로 공석으로 남아 원자 정호 사태 후인 1689년(숙종 15) 1월 12일에야 결정된다.

왕자 명호는 책례(冊禮: 책봉 예식. 책봉식) 때 정해지며, 이 시기 왕자의 책례는 숙종은 이때 5세라 뻥쳤지만 6-7세에 거행됐다. 책례 때 명호(세자·세손·대군·군)와 호명(戶名: 호적에 올리는 이름. 휘)이 왕실 계보(족보)에 등록되면, 이 왕자는 왕의 법적 아들이 됨과 동시에 조선의 정식 왕족이자 녹봉을 받는 관원이 된다. 그리고 역모죄가 아닌 이상 모친의 죄에 연루되지 않는다. 숙종이 꾀한 것이 이것으로, 이후 옥교사건에 논의가 재개되어 결국 숙종이 이에 굴복해 윤씨를 처결하고, 이어 장씨를 폐출시킬 지라도 숙종의 호적에 이미 등록이 된 아들 만큼은 보호할 수 있었다. 또한 애초 영빈 일족이 벌인 옥교 사건의 목적은 장씨가 낳은 왕자가 숙종의 서장자로 등록되기 전에 제거하기 위함에 있었는데, 이는 중국에서 왕세자(친왕의 후계자)·왕장자(군왕의 후계자)의 대상을 왕비 소생 적자, 혹은 서장자로 제한했기 때문이다.[79] 앞서 선조 때 광해군이 명에게 왕세자 고명을 받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이 조항 때문으로, 광해군은 선조의 서차남, 즉 서자였다.

숙종이 말한 '국본' 운운은 진심이었겠으나, 실제로는 아직 책년에 한참 미치지 못한 고작 2세, 만으로는 갓 3개월을 넘긴 영아에게 왕자 명호를 내리겠다는 것에 반대할 것이 자명한 대신들의 시선을 흩어버릴 페이크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사실 이 시점 당시까지 후궁 소생인 서출 왕자를 왕세자로 삼는 것은 조선의 법으로도, 중국의 법으로도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태종이 적서차별법을 세우고 승계법을 개정한 이래 약 300년 간 적통 승계를 원칙으로 삼았으며, 이 원칙이 깨졌던 것은 단 한 차례, 선조 때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한 것이 전부이다. 그런데 이때는 자그마치 3가지나 되는 초유의 변수가 한꺼번에 터졌던 탓. 임진왜란, 분정, 그리고 선조에게 적통왕자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종친부에도 선조가 양자(=적자)로 입적할 수 있는 항렬엔 오직 선왕의 얼자(승은후궁의 소생)의 자손만 남아있었다는 것. 이에 '나도 왕인데, 나한테 서얼자가 차고 넘치는데, 굳이 선왕의 얼출을?' 이란 공식으로 마흔이 되도록 세자의 자리를 공석으로 두었다가 임진왜란이 터졌고, 선조는 명으로 망명하길 바랐고, 그래서 선조를 대신해 조선과 종묘사직을 지킬 대리인인 세자가 필요했고, 그런데 여전히 선조에겐 적통왕자가 없었을 뿐더러 종친부 상황도 마찬가지라 선조의 서자를 세자로 세우게 된 것이고, 그런데 서장자인 임해군은 결함이 심각하니 서차자인 광해군이 세자가 된 것이었다. 그리고 종전 후, 명에선 명의 제도, 《대명회전(大明會典)》번왕봉전(藩王封典) 중 "왕(王)과 비(妃)의 나이가 50세가 되고서도 적자(嫡子)가 없으면 서자(庶長子)를 세워 왕세자(王世子)를 삼는다"를 들어 광해군이 서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고명을 주지 않았다.그래서 선조는 광해군을 정식 왕세자가 아니라며 대놓고 부정하다가 죽었고, 서중자는 왕세자가 될 수 없을 뿐, 왕이 될 수는 있기 때문에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가장 먼저 형인 임해군을 폐서인으로 강등하여 호적에서 파버리고 생모 공빈 김씨를 왕후로 추숭하여 본인의 입장을 선조의 적장자로 만들었다. 선조의 진정한 적장자인 영창대군이 책례를 올려(광해 3년 12월) 선조의 호적에 오른 것은 이 뒤의 일로, 당연히 호적엔 선조의 적차자로 등록됐다. 그러나 숙종의 사정은 다르다. 아직 29세에 불과했으며, 장애나 중병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전쟁이 발발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종친부엔 숙종이 양자로 입적할 수 있는 항렬 중에 적통왕자(세자 혹은 대군)의 적자손들이 여럿 있었다. 이 자리에 동석했던 대신들을 비롯하여 이후 송시열이 숙종과 인현왕후의 나이와 지극히 건강함, 태평성세를 운운하며 여러 전례와 더불어 이르다고 한 것은 단순히 설득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 존재했던 제도를 빗대어 불법임을 지적한 것이다. 즉, 숙종이 4-5년 뒤 책년에 이르게 될 경종을 왕세자로 책봉할 작정을 하고 이 사건을 벌였다고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김수흥이 다시 아뢰기를,

"왕자(王子)가 지금 강보(襁褓)에 계시는데, 갑자기 명호(名號)를 정한다면, 어찌 너무나 크게 서두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예전 사람은 태자(太子)에 대하여 단지 교양(敎養)을 성취(成就)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던 것이었으니, 명호(名號)를 급한 일로 여겼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왕자(王子)가 많으면 혹 맏이를 세우기도 하고 혹 어진이를 가려서 세우기도 하지만, 오늘날은 단지 한 왕자(王子)만을 두셨으니, 덕기(德器)가 성취(成就)한 뒤에 국본(國本)이 끝내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선묘조(宣廟朝)에 의인 왕후(懿仁王后)께서 저사(儲嗣)가 없으시어 광해(光海)가 어질다고 하여서 아들을 삼았으나, 명호(名號)에 이르러서는 임진년 에 비로소 정하였습니다."

숙종실록 20권, 숙종 15년 1월 10일 무인 1번째기사


모두가 "국본"이란 단어에 꽂혀 제도에 어긋난다며 후궁 소생인 신생왕자를 국본으로 삼는 건 시기상조라 열렬히 반대하는 와중에 갑자기 김수흥이 "지금 왕자가 하나 뿐이니 세자 책봉을 유보했다가 여러 왕자 중에 탄생 서열이 따지지 말고 자질을 따져 세자로 삼아야 한다"는 엉뚱한 발언을 해버린 것이다. 김수흥은 영빈 김씨의 종조부. 즉, 장차 인현왕후가 적통 왕자를 낳지 못하면 자신의 혈친인 영빈이 낳을 왕자를 세자로 만들겠다는 속셈을 드러내버리고 만 것이다. 2차 예송논쟁도 이 분 말 실수 때문에 산당이 졌다. 이로 인해 분위기는 급변, 도승지(=비서실장) 이언강이 입을 열어 '적은 인원으로 논의하기엔 너무 중대한 일이니 일단 파하고, 이후에 원임대신과 2품이상을 불러 다같이 다시 논의하자는 주청'을 올려 일단 자리를 파해버리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고, 다른 대신들 역시 급한 일은 아님을 강조하며 다시 자리를 만들자고 입을 모아 종용하기 시작했으나 이미 물은 엎질러진 상태였다. "이미 대계는 정해졌다."는 발언으로 자리를 파한 숙종은 다음날인 1월 11일 예조판서 김덕원(남인)에게 왕자의 명호를 원자(元子)로 정할 것을 명하였다. 원자는 태종 때 적서차별법이 세워진 이래로 왕비 소생 적장자의 고유명칭으로 쓰여져 왔던 호칭이다. 조선의 승계법이 약 300년만에 바뀌고 만 것이다.


2.3.5. 기사환국[편집]




2.3.6. 폐출[편집]


"김씨(金氏)는 궁궐에 들어온 뒤로 조금도 경순(敬順)한 행실이 없었고 해괴하게 질투만을 일삼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밖으로는 김수항(金壽恒) 및 주가(主家)와 교결(交結) 화응(和應)하여 임금의 동정(動靜)을 살폈으므로1 궁중의 모든 일이 누설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2. 신하들을 인견(引見)했을 적에 한 말을 적어 놓은 소지(小紙: 노트)를 훔쳐 몰래 보고 나서는 소매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누차 힐문을 받은 뒤에야 비로소 도로 바쳤다.3 정말 마음이 음흉하여 실로 헤아리기가 어렵다. 안으로는 교사스럽고 간특한 부인(인현왕후)에게 주야로 아첨하여 혈당(血黨)을 맺고4 유언 비어를 날조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는가 하면, 국가를 교란시키기 위해 군상(君上)을 무함했으니 실로 패역 부도(悖逆不道)한 죄과(罪科)를 범한 것이다. 당연히 중법(重法)으로 다스려야 하지만 우선 너그러운 법을 따라 작호(爵號)를 환수하고 정상을 참작하여 폐출(廢黜)시킨 것이니, 그대들은 알라."

《숙종실록》 숙종 15년 4월 24일


1689년(숙종 15년) 음력 2월 28일, 결국 1687년의 조사석 사건의 진범이란 사실이 증거와 증언을 통해 들통났다. 이 사건의 공범인 영빈의 이모부 홍치상은 일찍부터 왕실 내척이란 배경을 믿고 여러 악행을 자행해왔다. 게다가 홍치상은 남인의 증오를 얻고 있던 이사명[80]의 최측근 수하로 활동해왔기에 기사환국으로 정계에 복귀하여 노론의 수사역을 맡은 남인의 수사 대상에 오른 상태였다. 그래도 고종형이라 홍치상을 일찌감치 유배하는 것으로 구명을 꾀했던 숙종조차 홍치상이 이사명과 작당하여 효종 때부터 서인 산당의 제거 대상이었던 숭선군[81] 일가 및 희빈 장씨의 동시 제거를 꾀했다는 사실만큼은 무마해줄 순 없었다.

홍치상은 희빈 장씨의 오빠 장희재에게 친근한 척 접근하여[82] 숭선군이 청에서 짐새를 구해 숙종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하려고 한다고 고발토록 사주했지만 동평군과 친했던 장희재가 거부해 실패했다는 사실까지 들통났고, 이러한 혐의를 숙종의 외숙부인 김석연(명성왕후의 아우)에게 뒤집어 씌우기까지 하여 숙종의 눈 밖에 난 상태였다. 여기에 조사석 사건이 드러나고, 또 이를 면죄하기 위해 홍치상의 아들 홍태유(영빈 김씨의 외종제)가 격쟁하여 아비의 죄를 숙명공주와 심정보(숙명공주의 장남. 숙종의 고종형제. 영빈 김씨의 이모부)에게 뒤집어 씌우기에 이르니, 숙종이 결국 홍치상의 사형을 승락하기에 이른 것이다. 단, 공족특별법에 따라 감형이 더해진 홍치상에게 다시 왕의 특명으로 1등 감형을 더해주어 홍치상은 사지육신을 유지할 수 있는 교형(絞刑: 교수형)[83]으로 처분됐다. 또한 이로 인해 이미 유배 중이던 김수항에게 가중처벌이 더해져 사형에 이르게 되었다.

홍치상의 교형이 집행된 4월 22일, 영빈 김씨에 대한 처벌로 폐출이 선고되어 당일 집행되었다. 이는 김수항의 구명운동을 벌였었던 남인 온건파 당수 영의정 권대운이 안타까운 마음에 김씨를 처분할 전례를 찾아오란 숙종의 명령에 일부러 중종 때의 작서의 변을 전례라고 가져와 경빈 박씨가 폐출되어 사사된 것은 세자를 죽일 작정으로 모해한 죄[84]였으나 현재는 정황이 같지 않으니 사형은 감하고 폐출로 충분하다고 구형해준 덕분이었다.

숙종 역시 수많은 지친이 영빈과 혈연·혼연으로 엮여 있던 만큼 연좌제가 적용될 수 있는 중벌을 내릴 수 없었기에 권대운의 구형을 받아들여 영빈을 폐출하는 것으로 최종 판결했다. 이로 인해 김씨는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85] 사죄(死罪: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선고받은 비빈은 사형의 등급을 감해주는 대신 직계 남성에게 책임죄를 묻는 형벌 및 연좌제 역시 피할 수 있어 신 안동김씨 문정공파의 대종가이기도 한 친정의 멸문지화 역시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은혜를 훗날 원수로 보답

영빈 김씨의 공식 죄명은 "(왕을) 불법 사찰1", "기밀 유출2", "(왕의 기록물) 절도와 유출 미수3"[86], "(왕·대신·원자모·원자외조모를 청탁죄·간통죄 등으로) 무고 및 명예훼손", "(왕을) 모욕 및 협박", "국가 분열 선동" 등에 해당되며, 이외 교사죄[87]와 청탁죄4, 뇌물죄 등이 있다.


2.4. 폐서인 생활[편집]



2.4.1. 인현왕후 폐비 사건[편집]



2.4.2. 복위 운동[편집]




2.5. 복위 후[편집]


숙종 20년 음력 4월 12일, 귀인으로 궁으로 돌아온다.

후에 인현왕후가 복위될 때 김씨도 같이 복위되었지만, 숙빈 최씨가 이런저런 이유 와 핑계 로 계속해서 품계가 올라 그보다 높은 빈이 되고 다른 후궁들도 하나하나 승봉[88]될 때도 홀로 귀인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했다.

인현왕후가 2년 동안 투병 생활을 하면서 죽기 얼마 전에, 만약 자신이 죽으면 희빈 장씨가 아닌 귀인 김씨를 왕비로 삼으라고 숙종에게 청한다. 결과적으로 숙종은 반만 들어주었다.


2.6. 장희빈인현왕후의 죽음 이후[편집]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죽음 이후 숙종은 "후궁은 중전이 될 수 없다."라는 교지를 내린다. 희빈 장씨의 일 때문에 내려진 교지라고 하지만, 숙빈 최씨를 노렸다는 의견과 또다른 의견도 존재한다.

숙종의 후궁들 중에는 인현왕후가 사망할 당시 김씨의 품계는 숙빈보다 한 단계 낮은 귀인이었지만[89] 위에 서술된 대로 매우 한미한 집안 출신임이 분명한 숙빈과 달리 영빈은 서인 세력의 명문가 출신이었다.

게다가 자녀가 없었으니 문제가 될것이 없었다. 숙빈 역시 서인에 속하였고 당시 귀인이었던 영빈보다 품계가 높긴 했지만, 만약 후궁들 중에서 중전을 간택했다면 중전이 됐을 사람은 숙빈이 아니라 영빈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위의 교지의 타깃은 숙빈이 아니라 영빈이라는 것이다.[90]

여기에는 또 다른 근거가 있는데,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영빈은 기사환국이 터지고 한달이 안 된 시점에서 왕의 동정과 궁중 기밀에 관한 정보를 친정에 빼돌리고 이모부 홍치상[91]과 작당하여 희빈의 친정 어머니에 관한 유언비어를 날조한 혐의가 적발되어 홍치상은 처형되고 그녀는 폐출됐다.

게다가 역시 인현왕후 복위 때 같이 복권되었던 홍치상의 경우 그의 아들인 홍태유[92]가 영빈 김씨와 같이 홍치상의 무고함을 밝혀달라고 호소했다가 빡친 숙종에 의해 복권이 취소되고, 숙종이 죽을 때까지[93] 명예 회복이 영원히 금지되어 버린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지.그만큼 홍치상과 공범이었던 영빈 김씨를 향한 숙종의 악감정이 컸다.

사실 복권까지 한 걸 보면 숙안공주나 홍씨 집안에 대한 별다른 감정은 없는 듯한데, 무슨 이유인지 영빈 김씨에 대한 악감정이 대단한 듯. 김씨는 인원왕후 책봉 때에야 간신히 빈으로 승봉된다. 다만 이것을 김씨에 대한 숙종의 악감정이 풀린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숙종과 인원왕후의 국혼이라는 경사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모든 후궁을 한 품계씩 승봉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2.7. 말년[편집]


경종 즉위 후에 사가에서 지낸다. 본래 후궁의 사가는 화려해서 문제가 되었던 반면에, 영빈 김씨는 숙종 사후에 궐을 나갈 때 사저가 너무 허름해 경종이 안쓰러워 사저를 사라고 돈을 줬다.

후에 경종의 독살 소문이 나자 영빈 김씨의 친정이 용의자로 지목되고, 영빈 김씨의 외사촌 이진검[94]이 영빈을 공개적으로 지목해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인원왕후는 이진검의 고모이자 영빈 김씨의 이모인 이씨(숙명공주의 아들인 심정보의 아내)에게 이진검을 설득하라고 했다 다음달 경종이 돌연 급서하니 왕위에 오른 영조는 영빈 김씨를 무혐의로 처분을 내리며 각별한 예우를 올렸다.

장희빈의 아들이지만 인현왕후처럼 경종과도 사이가 나쁘진 않은 듯하며, 한편으로는 숙종의 사랑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악감정이 보통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인현왕후처럼 백성들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그렇게 존재감 없이 말년을 보낸다.

숙빈 최씨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연잉군을 친아들처럼 대했고, 숙빈 사후 연잉군과 모자지간처럼 지냈으며 연잉군도 어머니처럼 따랐다고 한다.


3. 평가[편집]



3.1. 당대[편집]


훗날 영조는 자손이 없었던 그녀의 봉사손으로 자신의 서10녀이자 후궁 귀인 조씨의 둘째딸 화유옹주를 지명했다. 이후 영빈 김씨의 제사는 화유옹주의 부군이자 영조의 부마인 창성위 황인점의 집안에서 지내고 있다.

남인 과격파 영수였던 전 좌의정 민암은 국문 중에 영빈 김씨에 대해 "지모가 있어 아낌없이 재물을 풀어 궁중의 환심을 얻을 줄 알았다.(金貴人, 亦多智, 且不惜財, 深得宮中之歡心)'고 하였다. 추가 정보로 인현왕후에 대해서는 "본래 재물을 아낄 줄 몰라 궁인들도 은전을 받았다.(=떡고물을 주워먹을 수 있었다)"고 했다. 민암은 이때의 이 발언으로 국모를 사치스럽다고 모함했다는 죄명이 더해져 사사됐다. 아이러니하게도 민암은 장희재 남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인현왕후와 영빈에게 아부할 목적으로 했던 발언이었다.

서포 김만중의 풍자소설 《사씨남정기》에서 주인공 사정옥의 책사로서 교채란을 함정에 빠트리고 결국 간악한 실체를 증명해낸 임취영의 모델로 추정된다. 혹자는 임취영이 숙빈 최씨를 모델로 한 것이라 추정하기도 하는데 김만중은 1689년에 남해로 유배되어 1692년에 배소에서 사망했기에 1693년에 등장한 숙빈 최씨의 존재를 알 수가 없다. 물론 숙빈 최씨가 소문대로 김춘택(김만중의 종손자)의 첩 출신으로 미인계를 위해 궁중에 파견된 간자가 맞다면 사정은 다르다.


3.2. 현대[편집]



3.2.1. 대중매체에서[편집]


공통적으론 인현왕후의 배후인 서인 측에서, 대항 관계인 남인 측의 희빈 장씨의 대항마로써 궐에 들이는 것이 묘사된다. 실제로도 조선왕조 후궁 중 엄청난 집안 값으로도 유명하게 회자되는지라 굉장히 계략적이고 머리를 잘 쓰는 사람으로 묘사된다(2002년 장희빈은 이걸 반영하지 못한 듯). 희빈과 불꽃 튀는 기싸움을 보이지만, 점차 아웃 카드로 전락. 이후 숙빈 최씨(당시 승은상궁~숙원)가 자기보다 높은 품계인 빈에 등극하자 숙빈 쪽에 줄을 서며 붙어다니기 시작한다. 자기 야심을 털어놓을 때마다 격노하는 인현왕후에겐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으로 나온다. 차라리 숙빈 쪽에게 솔직함을 털어놓는 게 나았는지, 숙빈쪽과 친밀히 지낸다. 긴 시간 숙빈보단 품계는 낮았으나 지식이 월등히 높아 숙빈에게 이것저것을 타일러준 모양. 물론 집안과 출신이 천양지차라서 숙빈이 빈이 되기 전까진 상종도 안 했었다. 하지만 실제론 숙빈과 동등한 빈이 되어서도 같은 정파의 후원을 받는지라 말년까지 친하게 지냈다. 숙빈과 붙어다니는 묘사는 아직 대중매체에 노골적으로 드러나진 않았다. 무엇보다 영빈은 아예 엑스트라가 되는 경우가 많다.

  • 장희빈(SBS) - 조현숙. 처음부터 장희빈과 불꽃튀는 싸움을 벌이는데, 인현왕후가 자신과는 다르게 장희빈에게 자애롭게 굴기만 하자 답답해한다. 결국 인현왕후가 폐출되기 직전에 먼저 폐출되는데, 궁녀가 인현왕후에게 하직 인사를 올려야하지 않느냐고 말하자 "내가 누구때문에 쫓겨나는데!" 하며 인현왕후가 물러터져서 장희빈을 누르지 못했음을 원망한다. 훗날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역시 귀인 작위를 회복하고 궁으로 돌아오게 된다. 인현왕후 사후 숙빈 최씨의 고변으로 장희빈이 사약을 받게되자, 무척 기뻐하며 숙빈 최씨에게 흐뭇한 웃음을 보이고 "큰일을 하셨습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숙빈 최씨는 장희빈의 죽음까지 원했던 건 아니라 죄책감에 어쩔 줄 몰라하고, 그런 숙빈 최씨의 태도를 보며 썩소(...)를 짓는다.
  • 장희빈(KBS) - 조여정. 작중 취급은 사실상 대하사극에 긴장감을 풀어주는 개그캐(..). 장희빈을 견제하겠다며 자기딴에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지만, 생각이 얕고 성격도 경솔해서[95][96][97] 항상 장희빈에게 당한다. 남편 숙종이 장희빈만 총애한다고 술을 잔뜩 마시고 한밤중에 궁궐을 쏘다니며 술주정을 벌이는 짓도 한다.(...) 위의 1995년 드라마 속 영빈 김씨와는 다르게, 인현왕후가 폐출될 무렵 같이 폐출당하고 그 후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1] 정종의 서10남 덕천군의 후손[2] 본래 조선시대 씨족(xx x씨), 파족(xxxx파)의 족장은 대과를 보지 않았는데 첫 번째 이유는 이들이 대종가의 모든 제사를 주관하는 제주였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이들의 안위가 곧 가문의 존폐와 직결됐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예 과거를 보지 않거나 진생원시 정도만 입시하고, 정부에게 명예직이나 임시직(주로 참봉, 세마, 중년 쯤 되면 별제나 인근 지역 임시 사또)을 음서로 받아 호칭·명함용으로 쓰다가 사후 문관 당상직으로 추증되어 묘비·지방 등에 썼다. 김수증 형제의 조부인 김상헌이 대과 출신에 실직으로 당상관에 이르렀던 것은 김상헌이 바로 신안동김씨 문정공파의 개조로, 김상헌이 사망한 뒤에 문정공의 시호를 얻어 문정공파가 개파됐기 때문이다.[3] 서인 산당의 관례대로라면 차기 산당 당수가 될 김수항이 맡았어어야 할 책임이었으나 전형적인 '고서 속 글 읽는 선비'였던 김수항을 당시 서인 산당 당수였던 송시열 역시 끔찍이 사랑하여 더럽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더러운 행위엔 야심가로서 정과 사를 가리지 않았던 제자 민정중에게 항상 일임시켜왔다.[4] 앞의 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는데 김수항은 일단 산당이 아니다. 단순히 글 읽는 선비가 아니며 현실 정치가이다. 필요할 경우 파이터적인 모습도 보인 경우도 많다. 물론 송시열과는 매우 가까운 정치적 협력 관계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안에 따라 이견이 있을 때도 있었고, 그런 모습을 보아왔던 처남 나양좌는 훗날 회니시비 당시 그런 사실을 들며 조카인 김창협, 김창흡을 소론계로 끌어들이려 노력했던 바 있다.[5] 삼복의 옥과 경신대출척에 있어 서인 산당 당수 송시열과 그 후계자로 경신환국 후 지방에서 은신한 스승을 대리하여 서인 산당을 이끌다가 노론 초대 당수가 되는 김수항이 매우 소극적이었던 탓에 이 두 사건이 송시열과 관련이 없었으며 오히려 송시열은 남인 사냥 과정에 불쾌해 했다가 1683년 허새의 옥사(1682년 발발)에서 스승 김장생에 대한 의리로 돌아선 것이란 해석이 현재에도 난무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송시열의 사냥개였던 민정중이 출전하여 김석주의 보좌를 했다는 것 자체가 송시열이 김석주와 결탁해 경신환국과 삼복의 옥을 설계한 장본인이었음을 증명한다. 덧붙여 민정중은 송시열의 지령 아래 김석주의 부친인 김좌명을 평생 괴롭히다 울화 속에 죽게 만들었던 장본인이며, 송시열은 송준길의 지령 아래 김좌명·김우명의 부친인 김육을 물어뜯었던 장본인이다. 때문에 2차 예송논쟁에서 김우명이 남인과 결탁해 서인 산당을 공격했던 것.[6] 청풍 김씨 척족[7] 남인(동인)의 기본 이념은 왕은 국가를 대표하여 만백성을 군림하는 지존으로, 사대부(신하)는 백성의 대표이다. 서인의 기본 이념은 왕은 백성(=상민: 사농공상 중 사족(=사대부, 양반)을 제외한 양민과 천민)을 군림하는 사대부의 대표로, 이에 왕권이란 사대부의 대표로서 사대부의 합의 아래 누리는 특권일 뿐 애초 존재하지 않으며 왕에게 대표의 자질이 부족할 시엔 바꿀 수도 있었다. 14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경신환국(숙종 6년)이 있기 전까지 남인과 더불어 절대왕권을 누려봤던 숙종이 서인에게 적응하기는 애초 불가능. 언제든 다시 서인 산당을 쳐낼 수 있었고, 이는 10년 뒤 실제로 일어나게 된다. 때문에 송시열인현왕후를 서인의 성녀로 채택해 국법까지 무시하고 서둘러 숙종의 계비로 만든 것. 인현왕후가 적통 왕자를 낳으면 자동으로 원자-세자가 된다. 즉, 숙종은 서인, 하물며 그 중에서도 극진 과격파로 구성된 노론의 성녀 인현왕후를 품었다가 자칫 적통 왕자가 태어나면 절대왕권의 회복을 포기해야 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며, 효종의 손자이자 현종의 아들이기도 한 숙종이 이 당시에 이 사실을 인지하지 않았을 리 없다.[8] 왕실 최고 여성은 생존 중인 정비 중 남편이 가장 먼저 왕이었던 여성 1인에 한정되는 것이다. 이 왕실 최고 여성의 고유권한이란 왕의 즉위와 폐위, 20세 미만 왕의 수렴청정 및 수렴청정 대리인(=섭정) 선정, 왕의 혼사 주관, 왕의 요양처 선정, 후사가 없이 사망한 왕을 계승할 후임왕 선정(왕의 즉위와 일맥상통) 등이 있다. 명성왕후가 숙종 즉위 초 장렬왕후가 겸양해 친정시킨 숙종의 옆자리에 자리를 깔고 유사 수렴첨정 행위를 한 것과 홍수의 변의 과정에서 자행했던 행위들을 비롯하여 경신환국 후 숙종의 계비 간택령과 인현왕후의 택점 역시 엄연한 불법이자 왕실 최고 여성인 장렬왕후를 능멸한 행위였다.[9] 왕실 최고 여성은 왕에게 병이 있거나 궁중에 변고가 생길 경우 왕의 임시 처소를 선정할 수 있다. 장렬왕후는 특정 시기만 되면 숙종의 건강을 운운하며 대전의 별당에 숙종의 임시 침소를 지정했는데 왕비가 대전에서 머물 수 있는 건 책비례를 올린 첫날밤 딱 하루 뿐이다.[10] 본래 서인 산당과 청풍 김씨 가문(구 서인 한당 종주 김육의 집안)은 효종 때부터 이어진 불구대천의 관계였고, 이에 2차 예송 때 청풍 김씨 가문이 남인과 연합하여 산당에 대한 원한을 풀었던 것. 그런데 숙종 1년의 홍수의 변으로 청풍 김씨 가문이 남인과 삼복형제에게 원한을 품어 척을 지게 된 상태에서 돌연 청풍 김씨 가문과 산당이 연합해 경신환국을 벌였으니 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겠다.[11] 세 외척이란 뜻으로, 소론 종주 윤증이 경신환국 후 노론, 특히 그 중 명성왕후의 친정인 청풍 김씨, 인경왕후의 친정인 광산 김씨, 인현왕후의 친정인 여흥 민씨 외척이 공권력 및 관직을 독점 장악하여 세도를 부리는 행위를 지탄하며 일컬은 호칭이다.[12] 친신 무당 막례를 궐 안 깊숙이까지 가마를 태워 은밀히 입궁시켜 왕의 정무복인 곤복(袞服: 곤룡포)를 입히고 굿판을 벌여 이때 얻은 계시대로 애자부(愛子婦) 인현왕후와 더불어 속옷에 갓만 쓴 차림새로 우물에 새로 고인 얼음물을 몸에 끼얹으며 치성을 올리는 행위를 벌였다. 이때는 양력 1월의 한겨울. 이로 인해 명성왕후는 병을 얻게 되었는데 왕과 세자, 그리고 정궁의 치병과 병인은 국사(國事)로서 정밀히 검토되어 공무 중에 논의되기 때문에 그녀의 병인, 즉 궁중에 무당을 불러 곤룡포까지 입히고 굿판을 벌였을 뿐만 아니라 친히 남사스런 무속 행위를 벌이다가 병을 얻었다는 사실이 들통나면 송시열이라도 등을 돌릴 것이 염려되어 병을 숨겼다가 결국 병이 중해져 들통이 났을 땐 치료시기를 놓친 시기였다.[13] 숙종실록 18권, 숙종 13년 9월 13일 무자 4번째기사 中 "공주가 장귀인(張貴人: 희빈 장씨)이 자전(慈殿)의 상제(喪制: 국상)가 막 끝나자마자 즉각 도로 들어와 총애(寵愛)를 독차지함을 근심하여 여러 차례 불평하는 말을 하게 되었었다."[14] 희빈 장씨는 귀인이었던 적이 없으나 후궁의 승봉은 내명부 자체적으로 이뤄질 때도 있어 대신들이 빈 이하 후궁의 정확한 작호를 모르는 경우가 흔했고, 이때 이미 귀인 장씨(인조의 간택후궁)라는 존재가 있어 대신들에게 익숙했기에 종종 헷갈렸던 듯 희빈 장씨를 귀인이라 잘못 호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기사 속 사평(실록청 사평)에서 장씨를 귀인이라 일컬었던 것 역시 이 기사 속 관련 인물인 김만중이 장씨를 귀인이라 잘못 부른 탓에 숙종실록청에서 동일인임을 피력하기 위해 굳이 교정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서 "희빈"을 검색어로 찾으면 장귀인이 더불어 출력되는데 잘 구별해야 한다.[15] 내명부 종2품 후궁작이다. 본래 간택후궁은 숙의, 승은후궁은 숙원(종4품)으로 초봉하는 것이 관례였던 탓에 이후 승봉된 현 작위와 상관없이 간택후궁을 숙의, 승은후궁을 숙원이라 일컫기도 했다. 그러나 제왕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영조가 승은궁녀인 이씨(영빈 이씨)를 멋대로 숙의로 초봉해버린 탓에 정조 때부터 간택후궁을 빈(무품)으로 초봉하기 시작했다. 이는 승은후궁은 단순히 야합으로 맺어진 관계이고 간택후궁은 사가(士家)의 혼인육례를 갖춰 정중히 맺어진 관계였던 탓에 차등을 줄 수 밖에 없었던 탓이다.[16]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2월 27일 신해 2번째기사[17] 통덕랑 강진상의 딸과 주부 송이석의 딸. 영빈이 입궁한 다음 달인 윤4월 14일에 허혼 명령이 내려졌다.[18] 《숙의가례청등록》[19] 덕지통은 영유(永柔)에 있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영유현이었으며 지금의 평안남도 평원군이다. [20] 《세종실록》에서 함평현 해제곶(海際串)에 목장을 설치한 사실이 나온다. 조선시대에는 함평현이었으며, 지금의 전라남도 무안군이다. [21]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윤4월 28일 신사 2번째기사 [22] 이러한 부동산은 영구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가 사망하면 다시 국가로 회수된다. 영토 하사는 그 영토 내에서 수확되는 소작물 및 특산물, 그리고 해당 영토에서 주거하는 백성의 세금 및 부역이 주어지는 것. 때문에 노령에 이른 대비에게 주어지는 것과 변고가 없으면 수십 년은 더 살 젊은 후궁에게 주는 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다. 때문에 대신들은 물론 소식을 접한 영빈의 집안에서도 기겁하여 마땅히 취소해야 한다고 숙종을 말렸던 것. 그리고 훗날 덕지통은 숙빈이 꿀꺽.[23] 사족의 딸은 국법에서 지정한 여성의 최고 혼인 연령인 20세를 넘길 수 없다. 만일 이를 어겼다가 적발될 시엔 호주가 장형+유배형의 엄벌에 처해지고 최악의 경우 관할서가 지정한 아무 남성에게 강제적으로 출가해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문제는 사족은 유복친의 상기(최고 3년)나 부모가 상복을 입는 기간(최고 3년) 중에 혼례를 치를 수 없었다. 때문에 일찌감치 양친을 잃은 것이 아닌 이상 17세에는 딸의 혼례를 완성시키는 것이 조선시대 왕가·사가의 풍경이었다. 그런데 심지어 이때는 1680년대로, 현종 때의 경신대기근의 여파로 인해 남녀의 혼인 연령이 대폭 빨라진 상태였으며 권력이나 재력이 있으면 불법인 조혼마저 강행되던 시점. 현대인에겐 불과 1-2살 차이이겠으나 이 때는 17세기 후반 조선이고 이 시기 사족 여성의 평균 혼인 연령이 약 14.5세, 평균 초산 연령이 16세였다. 18세 사족 여성은 이미 혼기를 넘겨 더이상 동급의 혼인이 불가능.[24] 심지어 이 당시는 영빈의 유복친 중 초고령자가 다수 포진된 상태. 실제로 영빈이 후궁으로 입궁한 직후 영빈의 외조부인 이정영의 사망이 신고됐다. 외조부는 대공친(6개월)이니 설사 숙종이 내정을 무시하고 그녀를 후궁으로 간선하지 않았을 지라도 상기를 마치고도 아직 유보 기간이 1년 남짓 남았던 만큼 혼인물실과 딸의 행복에 대한 욕심만 버린다면 가문의 격이 떨어지거나 결함이 있거나 늙은이 재취·삼취로라도 초고속으로 혼례를 시킬 수 있겠지만, 문제는 조부 김수증 역시 생존 중이었다는 것이다. 친조부는 기년(1년). 근데 영빈의 부친은 3년간 상복을 입어야 하며, 상장제주인 적장자이기까지 한 탓에 영빈은 3년간 혼인을 할 수 없게 되니 국법이 지정한 혼인 연령을 넘기게 된다. 한성 거주 사족일 뿐더러 근척들이 하나같이 당상 문관이라 상 중에 혼인을 강행하든, 혼인 연령을 넘기든 적발될 수 밖에 없는 입장인 터. 하물며 영빈의 부친인 김창국 역시 이미 17세기 조선 남성의 평균 수명을 넘긴 40대로, 이에 영빈은 국법이 공식적으로 허가한 조혼 대상자이기까지 했다. 즉, 명문거족 일파의 차기 족장의 딸인 탓에 혼인이 가능한 대상이 지극히 제한되어 있기까지 한 영빈이 숙종의 후궁으로 입진할 것이란 완벽한 보증이 없는 이상 이토록 어마어마한 도박을 강행했을 리 없다.[25] 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 9월 29일 갑인 2번째기사 중 "유감동(兪甘同) 여인의 추악함도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심하지 않았는데, 김여달(金如達)에게 강포(强暴)한 짓을 당하여 이렇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도 부녀들이 강포(强暴)한 자에게 몸을 더럽힌 사람이 간간이 있었지만 모두 시정(市井)과 민간(民間)의 미천한 무리뿐이었는데, 지금 여달(如達)은 어두운 밤을 타서 무뢰배(無賴輩)와 결당(結黨)하여 거리와 마을을 휩쓸고 다니다가, 유감동(兪甘同) 여인을 만나 그가 조사(朝士)의 아내인 줄을 알면서도 순찰을 핑계하고는 위협과 공갈을 가하여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가서 밤새도록 희롱했으니,[26] 세종실록 75권, 세종 18년 10월 26일 무자 2번째기사 중 "소쌍이 말하기를, ‘지난해 동짓날에 빈께서 저를 불러 내전으로 들어오게 하셨는데, 다른 여종들은 모두 지게문 밖에 있었습니다. 저에게 같이 자기를 요구하므로 저는 이를 사양했으나, 빈께서 윽박지르므로 마지못하여 옷을 한 반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더니, 빈께서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들어와 눕게 하여, 남자의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하였습니다.’ 하였다."[27] 문종실록 3권, 문종 즉위년 9월 21일 임술 2번째기사 중 "안완경은 겉으로는 봄처럼 온화한 태도로 꾸몄으나 속으로는 여우처럼 간사한 마음을 품고 있으며, 훼예(毁譽)를 치우치게 하고 음욕(淫慾)이 많아서 집안에 들어가면 상시 속옷을 벗고 첩을 희롱하고 있었다."[28] 덧붙여 국역에서 "내전이 명하여 종아리를 때리게 하다"로 번역된 "內殿命撻之"는 구 학설 속 고상하고 인자한 여군자이자 요조숙녀였던 인현왕후의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의역으로 한자 "撻"는 종아리를 회초리로 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몽둥이로 때리거나 채찍질을 하는 것에도 두루 쓰는 한자이다.[29] 조부인 효종과 부친인 현종이 재위 연간에 정식 후궁을 두지 않았던 탓에 조선시대의 정서상 후궁을 들이기가 쉽지 않은 처지였던 만큼 설득에 시간이 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처음만 어렵다.[30] 세종 때 왕세자(문종)의 간택후궁을 정궁으로 올린 이래부터 1701년 숙종이 후궁을 계비로 삼지 않는다는 새로운 법령을 선포하기 전까지 조선에서 간택 후궁이란 곧 정궁이 사망하거나 폐출될 시에 계비로 올리기 위함에 있었다. 때문에 1689년 전까지 정궁이 될 가능성이 없었던 승은후궁과는 달리 간택후궁의 존재는 아직 원자조차 생산치 못한 정궁인 인현왕후에겐 위협적인 존재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심지어 영빈 김씨는 조선 최고의 혈통과 배경의 소유자. 자칫 영빈이 인현왕후보다 먼저 왕자를 생산하거나 영빈이 딴 맘을 먹을 경우엔 정궁의 자리를 빼앗길 수 있는 위험부담이 있었다.[31] 희빈은 숙종의 승은상궁으로서 환궁을 한 것이 아니라 장렬왕후의 궁녀로서 환궁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어느 날 임금이 그녀를 희롱하려 하자 장씨가 피해 달아나 내전(內殿)의 앞에 뛰어들어와, ‘제발 나를 살려주십시오.’라고 하였으니, 대개 내전의 기색을 살피고자 함이었다. 내전이 낯빛을 가다듬고 조용히, ‘너는 마땅히 전교(傳敎)를 잘 받들어야만 하는데,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할 수가 있는가?’ 하였다. 이후로 내전이 시키는 모든 일에 대해 교만한 태도를 지으며 공손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불러도 순응하지 않는 일까지 있었다. (원문: 一日, 上欲戲之, 張避走跳入於內殿前曰: "願活我。" 蓋欲觀內殿之氣色也。 內殿整容徐曰: "汝當奉承傳敎, 何敢如是?" 自後, 內殿凡有使令, 偃蹇不恭, 至或呼之而不應。)"의 내용 탓이다. 한 유명 재야사학자의 오역이 여기저기 복붙된 덕분에 흔히 "나 잡아봐라~♡" 놀이로 인식되고 있는 이 문단 속 희롱은 성관계를 뜻한다. 조선시대 공석 혹은 문서에 희롱·희·농이 가족이 아닌 이성간에 쓰일 경우 성희롱 혹은 성관계를 뜻하기도 하며, 남성이 귀인이거나 여성이 천인(=기녀, 여종, 비구니, 무녀, 간녀)일 경우엔 권력 혹은 폭력으로 강행된 강간일지라도 "남성이 가지고 놀았다/즐겼다"는 의미로 희롱을 썼다.[25][26][27] 원문을 보면 한자 희(戲) 앞에 의지미래형 한자인 욕(欲)이 수식하고 있어 장씨가 내전으로 달려가 살려달라고 빌었을 땐 아직 희(戲)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 때문에 이 희를 나 잡아봐라든 자치기든 윷놀이든 단순 놀이로 해석할 경우엔 나이 26세, 재위 연차 13년의 현역 조선 국왕인 숙종이 이러한 놀이를 할테니 준비하고 있으라는 어명을 전달받은 희빈이 이 놀이가 너무나 하기 싫어 내전으로 도망가 인현왕후에게 제발 살려달라고 요청한 기상천외한 꼴이 된다. 따라서 위 문단의 내용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희빈이 숙종과 "나 잡아봐라~♡" 놀이를 하다가 인현왕후가 몰래 숨어서 훔쳐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달려가 다짜고짜 살려달라고 빈 것이 아니라 입궁을 한 뒤 어느 날 숙종에게 동침 명령을 받은 장씨가 꽃단장 대신 내전으로 달려가 인현왕후에게 "제발 살려달라"고 요청했는데 인현왕후가 "어명을 따르라"며 돌려보내 결국 숙종과 동침을 하였던 것이다. 이는 곧 장씨가 인현왕후에게 살려달라고 요청했을 당시의 장씨의 입장이 왕의 정신적·육체적 위로가 유일한 소임이었던 승은상궁이 아니었음을 증명하여 장씨가 장렬왕후의 궁인으로서 환궁했던 것임을 뜻한다. 그리고 이 사건, 즉 숙종과 동침을 한 "이후로 내전이 시키는 모든 일에 대해 교만한 태도를 지으며 공손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불러도 순응하지 않는 일까지 있었다. 어느 날 내전이 명하여 종아리를 때리게 하니 더욱 원한과 독을 품었다.(원문: 自後, 內殿凡有使令, 偃蹇不恭, 至或呼之而不應。 一日, 內殿命撻之, 益懷怨毒,)"가 된 것이다.[28] 왕을 정신적·육체적으로 위로하는 것이 유일한 소임인 승은상궁이 된 장씨에게 정궁인 인현왕후가 시킨 일이 대체 무엇 피임? 낙태? 출궁? 동침거부? 자해? 자진? 대리청탁?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장씨가 이를 순순히 복종치 않고 급기야 불러도 오지 않는 일이 발생해 인현왕후가 아랫것들을 시켜 매질을 한 것이 이 문단 속 내용의 전말이다. 따라서 "희빈 환궁→일정 시간이 흐른 뒤 숙종과 합방→이로 인해 교만해져 인현왕후에게 순종 x→급기야 인현왕후가 불렀는데 순순히 오지 않음→내전으로 끌고와 매질→이 일로 희빈이 원한과 독을 품음→다스리기 어려움을 깨달은 인현왕후가 고심 끝에 숙의 간택을 결정→숙종 설득[29]→숙종이 숙의간택령을 내림"의 과정이 길어도 2개월 남짓, 짧으면 수일에 불과한 기간 내에 이뤄졌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으며, 특히 영빈 일족과 인현왕후 일족 사이에 얽힌 혼연 관계는 자칫 발생할 수 있는 불상사[30]를 충분히 고려하여 치밀한 계산과 추가 보험을 거친 엄선으로 영빈을 내정했음을 알 수 있어 2-3개월 정도론 택도 없다.[32] 승정원일기 316책 (탈초본 16책) 숙종 12년 6월 13일 을축 13/17 기사[33] 김수항의 성정에 비추어 볼 때 집안의 강압 아래 어쩔 수 없이 한 번 치고 발을 뺀 것으로 추정된다. 전형적인 '고서 속 글 읽는 선비'였던 김수항은 송시열도 차마 더럽힐 수 없어 본래 차기 산당 당수가 될 후계자의 책임이기도 한 더러운 짓, 즉 당원들을 현장에서 지휘하여 당파나 당수에게 대적한 당적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매장시키는 것송준길(김육 사냥)도 했고 송시열(예송)도 했다을 김수항에게 도저히 시키지 못해 번번이 민정중에게 대신 시켰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서인 산당의 세력을 꺾기 위해 반평생을 올인했던 현종도 김수항이 송시열의 수제자임을 알면서도 죽기 전 숙종에게 "허적(탁남 영수)과 김수항만은 믿어도 되는 자들이니 가까이 두고 중용하라"고 당부했을 정도였으며, 남인이 씹어 먹으려고 했던 노론의 당수이기까지 한데 오직 김수항에 관해서만은 유배로 족하다면서 구명운동을 펼치는 자들까지 있었을 정도다.[34] 삼복형제. 복창군 이정, 복선군 이남, 복평군 이연[35] 김수증 형제의 당숙인 김광현의 손자가 김성적이고, 외손녀의 아들이 윤덕준이다. 그리고 김성적은 김수흥의 처조카(김성적에겐 이모부)이기도 하다. 소론(이익수)을 이용해 숙종의 서장남을 생산한 장씨를 제거하고 소론에게 후환을 전가하려고 했던 이 옥교사건을 설계한 인물이 김수흥으로 추정되는 이유 중 하나.[36] 《단암만록》에 옥교사건을 김성적과 김창집이 벌인 일로 쓰여있다. 자세한 내용은 옥교사건 참조.[37]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7월 6일 무자 1번째기사 [38]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12월 10일 경신 4번째기사[39] 심지어 이 분들은 여종이 유부녀든 아동이든 부친이나 아들이 건드린 여자든 상관하지 않았으며 무력을 동원한 강간일 지라도 가지고 놀았다고 여겨 희롱이란 표현을 썼다. 이게 조선 시대의 정서였다.[40] 물론 숙종과 장렬왕후의 비호 아래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빈을 영입한 것.[41]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12월 11일 신유 1번째기사[42] 정석이 아닌 연석에서의 일이라 본래 《승정원일기》엔 기록될 수 없는 일이지만 《조선왕조실록》의 기본 구성상 마땅히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숙종실록》에 누락되고 오직 14일 기사에 연석에서 정정했다는 언급만이 있을 뿐이라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이징명이 장씨의 출궁을 요구했던 것은 "역적 삼복 형제의 (활쏘기 친구였을 만큼 가까운) 심복이었던 역적 장현의 가까운 친족"이란 이유 때문으로, 1685년에도 숙종이 누누히 장현의 역적설을 부정하며 장현의 복직 취소를 거부했듯 장현이 역적이 아니면 장씨가 출궁되어야 할 명분 자체도 없기에 이것이 대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7월 6일 이징명의 상소에서 숙종이 억측이라 했던 것은 '장현의 근척인 장씨가 궁인으로 있어 은총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역적의 근척인 장씨가 궁인으로 있어 은총을 받는다'였던 것.[43] 김만중의 모친과 한성우의 처가 사촌자매로, 홍명원의 딸이 김만중의 외조모이고 홍명원의 아들 홍처후가 한성우의 장인이다.[44] 국역엔 궁인들로 번역되었으나 원문엔 "宮人之締結宮家, 宮家之締結士夫"라 기록되어 단수였는지 복수였는지 구분되어 있지 않다. 단수든 복수든 영빈 김씨가 포함되며 복수일 경우엔 인현왕후가 포함된 것이다.[45] 12월 11일에 금창부위 박태정이 품계(의빈부)에 비해 관직이 2계급이나 낮은 것을 시정해달라고 진청했고 숙종이 해조에서 확인한 후에 조정하겠다란 비답을 내렸다.[46]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12월 14일 갑자 7번째기사[47] 효시는 군법이니 군 외부에서 쓸 수 없고, 차후 명백한 증거와 함께 죄가 드러나면 관례대로 처분하면 되는데 굳이 효시를 언급하여 나이든 공주들(숙종의 고모들)이 무서워 덜덜 떨고 있으니 도리가 아니다며 취소시켰다. 그런데 이때의 발언으로 인해 숙종 16년 영빈 김씨가 조사석과 파평윤씨(희빈모)에 대한 추문을 지어 퍼트린 증거가 확보되어 진범이었음이 드러나게 되자 영빈의 법적 대리인 입장이던 김수항에게 관례대로 가중처벌이 더해져 사사됐다.[48] 숙종실록 18권, 숙종 13년 5월 1일 무인 1번째기사[49] 이때 우의정을 뽑은 것은 앞서 우의정이었던 이단하를 좌의정으로 옮긴 탓이며, 오랜 기간 공석으로 두었던 좌의정에 이단하를 이동시킨 것은 노론의 격한 공격 아래 역적으로까지 몰린 남구만(소론)이 결국 좌의정을 하지 않겠다고 도망쳐 숙종이 기어이 찾아내 얼르고 달래도 돌아오지 않았던 탓이며, 남구만이 좌의정이 됐던 것은 전임 좌의정이었던 정지화(소론) 역시 같은 이유로 도망쳤기 때문이다. 정지화의 전임 좌의정이 바로 민정중(노론)으로 민정중의 사임 이유는 공식적으론 병때문이었지만 사실은 2주 전 김석주가 사망해 자신과 가문에 떨어질 총공격을 일시적이나마 피하기 위함이었다. 즉, 3~4년에 걸쳐 겨우 소론을 쫓아냈는데 다시 소론을 끼어넣은 것[50] 일단 영의정 김수항부터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의 4촌 종손자로, 인목왕후의 친정오빠 김래의 딸이 김수항의 모친이다. 김수항과 이단상이 추가로 추천한 후보 4인 중 이숙은 인현왕후의 형부 이만창의 부친이자 외사촌오빠 송병하의 처숙부이자 명안공주의 시누이의 시부였고, 이민서는 숙경공주의 시고모부이자 인경왕후의 숙부 김만중의 (겹)사돈이자 영빈 김씨의 양동생 김치겸의 처조부였고, 신정은 장렬왕후의 3촌 이질이자 숭선군의 처남, 여성제는 인렬왕후의 3촌 이질이었다. 덧붙여 이들 4인 중 마지막 후보였던 여성제(어차피 숙종이 싫어한데다 중혼자라 뽑힐 가능성은 희박했다)만 제외하고 모두 노론이자 삼척 중 남은 2척(여흥민씨·광산김씨) 뿐만 아니라 김수항 형제와도 혼연 관계에 있다는 것이 특색으로, 이숙은 김수흥(김수항의 둘째형)의 사돈, 이민서는 김수항의 조카 김창국의 사돈이자 김수항 형제의 재종형인 김수빈의 사돈이자 김수항의 동서 이사명의 숙부, 신정은 김수증(김수항의 맏형)의 사돈이었다. 비록 첫 복상 후보는 공개되지 않았으나 앞뒤 정황상 전 좌의정이던 민정중은 확실히 올랐을 듯하며, 다른 후보 중 한 명으로 김수항의 동서이자 김만중의 사돈인 이사명(혹은 김만중)이 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51] 실제로 민진주(민정중의 조카)가 격분하여 첫 복상 후보 중에서 뽑으라는 상소를 올렸으며, 김만중의 분노 표출 역시 정상은 아니었다.[52] 훗날 이것이 들통나자 홍치상의 아들 홍태유(영빈 김씨의 이종아우)는 아비가 아닌 숙명공주와 심정보의 소행이라 주장했지만 이에 앞서 홍치상이 면죄를 꾀해 자신의 죄를 숙종의 외숙인 김석연에게 덮어씌우려 했던 전력이 있어 기각됐다. 홍치상이든 심정보든 영빈의 이모부인 건 마찬가지. 비록 홍치상 부자의 인성을 믿을 수 없다하여 기각하였지만 혐의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어 심정보 역시 서인으로 강등하여 유배시켰다가 1년 뒤 '죽을 병에 걸렸으니 아들을 한 번 만나게 해달라'는 고모 숙명공주의 간청에 넘어가 석방시켜줬다.[53] 삼정승 중에 결원이 생기면 나머지 정승(들)에게 후보를 추천받아 왕이 마음에 드는 자의 이름에 점을 찍어 선발하는 것. 관례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숙종이 조사석을 우의정으로 직접 추천했던 것도 영의정 김수항과 좌의정 이단하가 선조 때 전례가 있다며 권유했기 때문이었다.[54] 홍치상이 말년에 맞이한 후처의 사촌오빠로, 본래 홍치상은 소론을 자칭하며 노론을 공격해왔었지만 재혼 후 이사명의 심복으로 활동하며 노론을 자칭했다. 즉, 이사명은 홍치상에게 전해 들었고, 이걸 사돈인 김만중에게 전달한 것.[55] 고종형인 홍치상이 걸려있음을 포착하고 급히 중단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기사환국 후 남인에게 노론의 감찰 수사역을 맡기면서 남인의 복수 0순위인 이사명과 연계된 홍치상을 즉각 유배 보내 수사 대상에서 제외시켰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56] 여흥 민씨 외척이 독점 장악했던 병권을 차지하기 위해 왜의 영주와 내통하여 '남인 잔당들이 왜와 결탁해 조선을 침략하려고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란 거짓 정보를 퍼트려 조선을 발칵 뒤집었으며 이로 인해 무고한 남인들이 많이 죽었다. 이사명은 삼척 중 광산 김씨 외척에 해당된다.[57] 홍치상이 이징명에게 '소문을 접했냐, 나도 깜짝 놀랐다'며 소문이 적힌 익명서신을 건냈는데 필체가 홍치상의 것이라 이징명이 집에 가져가 매제 심권에게 보여주고 홍치상과 영빈의 수작질을 안주로 삼다가 그대로 소장했던 것이 이사명에 연루되어 체포됐던 김만중의 측근으로 역시 체포되어 국문됐던 심권이 실토해버린 탓에 결국 발각나고 말았다.[58] 이것이 개정된 것이 숙종 15년(1689년) 1월의 원자 정호 사태이다. 이 사건과 숙종 22년 청의 개정(주: 이 전까지는 왕세자 고명의 대상이 번왕비 소생 적통왕자로 한정됐었다. 자세 정황은 아래 주석 참조.)을 계기로 적서여부에 상관없이 왕의 장자에게 원자의 명호가 주어지고, 이후 세자로 책봉되는 것이 일반이 되어 영조 때의 효장세자와 사도세자, 정조 때의 문효세자와 순조가 이러한 경로로 원자, 세자가 됐다. 이러한 결과 및 중국에선 후궁 소생이 황태자가 되는 것이 대수롭지 않게 이뤄졌던 사실의 합성 아래 정사가 공개로 전환되기 전 구학설에선 경종의 탄생 자체가 인현왕후와 서인에게 위협이 됐다고 정의했다.[59] 규정상으론 50세. 중국의 관제상으론 번왕과 번왕비의 나이가 모두 50세가 되도록 적통 왕자가 없을 시엔 특별히 서자를 세자로 책봉할 수 있었다. 조선에선 먼저 왕, 왕비, 왕세자의 책봉식을 거행한 뒤에 주청사를 보내 고명을 받았던 만큼, 왕세자의 경우엔 6-7세 경(숙종 때부턴 3세)에 세자 책봉식을 거행한 뒤 중국의 성년이자 책년인 10세 때 주청사를 보내 고명을 받는 형식을 취했다. 광해군 역시 선조가 50세가 됐을 때 세자 고명을 청하러 사신을 보냈다. 그리고 거부됐다. 이유는 서자가 아니었던 탓. 이 조항은 어디까지나 중국, 즉 명나라까지 이어져온 관제 중 한 조항인데, 문제는 숙종 23년에 경종의 나이가 10세가 되어 왕세자 고명을 받기 위해 청에 주청사를 보냈을 때 아직 내부 제도가 완성되지 않아 명의 제도를 차용하던 청이 이 조항을 들어 경종의 왕세자 고명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이때는 지난 숙종 20년의 왕비 교체로 인해 경종의 입장이 다시 서장자로 돌아간 상태였고, 숙종과 인현왕후의 나이가 50세에 이르지 않았으며, 숙종은 매우 건강하고 을병대기근 중이긴 했지만 전쟁이 발생하거나 하진 않았던 탓. 결과적으론 다시 사신을 보내 받아왔으며, 이후엔 이 조항이 폐기되어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청도 떳떳한 입장이 아니었다. 개국조인 홍타이지부터 당시 황제였던 강희제까지 전원 서출. 때문에 강희제가 적후 서후의 차등법을 폐지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해당 조항 역시 개정한 것으로 추정된다.[60] 장씨에게 노고하셔봤자 공이 없을 테지만 자신의 팔자엔 자식이 많을 것이란 발언은 인현왕후가 폐비될 때 "왕의 신체를 두고 조롱한 죄"로 적용됐다. 더군다나 훗날을 보면 알겠지만 인현왕후는 폐위되고 복위된 뒤에도 죽을 때까지 자식을 낳지 못했다.[61] 이는 숙종 20년에 인현왕후가 복위된 후 인현왕후가 폐비될 때 공표됐던 미안스러운(=불미스러운) 부분을 비망기와 승정원일기 등의 기록에서 모두 삭제해야 한다는 노론측의 주청과 기록에서 모두 삭제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소론측의 반대가 부딪히자 이를 절충하여 지극히 자극적인 내용만 부분적으로 삭제됐는데, 인현왕후가 폐비될 당시에 '원자를 위해하려 한 죄'로 적용됐던 이 발언 역시 이 중 하나이다. 그런데 후세인이며 정사 열람권이 없었던 이긍익이 이 사실을 몰라 《기사유문(己巳遺聞)》에 기록된 전문을 그대로 옮겨 놓은 탓에 흔적이 남아버렸다. 《연려실기술》에 왜곡된 사실이 많긴 하지만 이 전문은 숙종실록에 기록된 토막난 문장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진실임을 파악할 수 있다.[62] 정사 기록이 공개되기 전 고증 사료로 채택했던 소설과 야사, 개인문집의 내용을 바탕으로 기사환국과 갑술환국을 남인계인 희빈 장씨와 서인계인 인현왕후의 대결 구조로 정의했던 옛 학설이 현재까지 널리 인용되고 있는 탓에 이익수(소론)를 두고 옥교 사건에 있어선 장씨를 공격했다는 이유로 서인, 송시열 상소 사건에 있어선 송시열을 공격했다는 이유로 남인이라 소개하는 것이 현 작태실정이다.[63] 애초 안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인조 때 인렬왕후 한씨의 언니(여성제의 양모)가 걸핏하면 입궁해 수일간 머물다 갔기에 대신들이 살다시피 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냐며 항의를 한 바 있다.[64] 《인현왕후전》이 《단암만록》의 내용을 기반하여 쓰여진 것인 만큼 동일한 주장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65] 《단암만록》의 특성상 이 옥교의 실제 주인이 영풍군부인 신씨도 아닐 수 있지만 역시 같은 이유로 장씨의 친정에서 소유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은 확실하다. 이때는 한창 홍치상(숙안공주의 아들. 영빈의 이모부)이 장희재에게 친밀한 척 접근했던 시기였고, 옥교 사건 당시에 지방에 있던 김수항이 미리 한성에 올라와 대기하고 있었던 점에서 미리 설계된 사건임을 알 수 있다.[66] 민진원과 김창집은 사적으로는 사돈지간이었으며 공적으론 경종의 하야를 공모했던 관계로, 소론은 민진원을 김창집의 창과 겹친다 하여 창귀(범에게 잡아먹힌 원귀로 원한을 풀기 위해 자신을 잡아먹은 범을 죄없는 자들에게 인도해 잡아먹게 했음)라 불렀을 만큼 매우 친밀했던 관계라 착각을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67] 애초 이 사건은 사헌부 관할조차 아니다.[68] 현대 서적에 사헌부 관원으로 서술하여 흔히 양반 출신 문관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는데 사헌부 조례와 금리는 사헌부에 배속되어 체포, 고문, 심부름, 청소 등의 천역을 담당한 이속으로, 종 예(隸)와 아전 리(吏)를 쓴 직위명에서 알 수 있듯 본래 공노가 맡았던 직위이지만 순조 때 납세 및 양역·병역 대상인 양민의 수를 증원하기 위해 내노비(內奴婢)와 시노비(寺奴婢)를 혁파하면서 양민이 맡기 시작했다.[69]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기구로 내노비의 소속 부서이기도 하다. 내관이 관리했다.[70] 여기서 내외의 족당이란 조선시대 어법상 내족과 외족을 뜻하는 것으로 내족은 부계 척족, 외족은 모계 척족을 말한다.[71] 영빈 김씨의 부친 김창국과 양동생 김창흡은 음서 출신이다. 본래 씨족·파족의 (개조(와 2대, 간혹 3대까지)를 제외한) 종주와 그 후계자는 본인의 안위가 곧 가문의 존망과 직결됐기에 정쟁에 연루될 것을 염려하여 최고 진생원시까지만 봤을 뿐 과거를 보지 않고 정부에 음서로 말직의 임시직이나 명예직을 받아 체면치례를 하다가 사후 문관 당상직으로 추증됐다.[72] 숙종실록 19권, 숙종 14년 11월 13일 임오 3번째기사[73] 본래 김수항은 영의정 직을 형 김수흥에겐 넘긴 후 지방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이때 마침(?) 한성에 상경해 머무르던 상태였다.[74] 숙종실록 19권, 숙종 14년 11월 15일 갑신 3번째기사 [75] 승정원일기 332책(탈초본 17책) 숙종 14년 11월 16일 을유[76] 장렬왕후는 음력 8월 26일에 승하하였다. 세종 28년의 개정으로 조선의 왕과 왕비의 장례는 5월장으로 규정됐다. 8월, 9, 10, 11, 12. 한편, 국장과 국상은 별개. 현대에는 상례와 장례를 함께 치르는 탓에 헷갈릴 수 있는데, 장례는 고인의 사체를 처리하는 예식이며, 상례는 고인을 특정 기간동안 애도하며 정성을 바치는 예식이다.[77] 수장인 판서가 소론으로 바뀌거나, 판서는 노론이되 부수장인 참판 이하 임원진이 소론으로 깔린다든지.[78] 이런 직함엔 딱히 직임이 없었다. 이에 국가 행사나 긴급 소집이 아닌 이상 굳이 등청할 필요가 없었으며, 설사 국가 행사나 긴급 소집이 있어도 이미 지방에 내려간 상태라면 당시의 통신수단과 교통수단의 특성 상 '연락을 늦게 받았다', '(연로하고 지병이 있으신 부모·조부모 등을 만나기 위해) 본향에 내려왔는데 급병이 생겨/지병이 재발하여 시간 맞춰 못 갔다'와 같은 다소의 변명으로 면죄가 가능했고, 설사 삭직의 처분을 받을 지라도 곧 복직이 됐으니, 사실 이 기간은 주말이나 연휴, 연차, 월차 같은게 딱히 없었던 조선시대 관리들에겐 그리운 고향도 방문하고 유람도 가능한 소듕한 휴가 기간이었다. 근친상이나 병으로 사직서를 제출해 휴직기를 맞는 거, 사가독서(독서휴가)를 받는 거랑은 다름. 이것들은 쉴 수는 있지만 놀러다닐 수는 없음.[79] 여진국인 청에서도 이 제도를 사용하다가 강희제 때 폐기했다.[80] 경신환국 후 여흥 민씨 척족이 독점한 병권을 노려 왜의 영주와 내통해 "남인 잔당이 원한을 품고 왜와 결탁해 전쟁을 도모하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퍼트려 조선을 공포와 혼란에 빠트림과 동시에 무고한 남인과 그 가족들을 대거 희생시켰다.[81] 인조귀인 조씨의 서장남. 효종 때 서인 낙당 당수 김자점(효명옹주의 시조부)을 제거할 수단으로 귀인 조씨와 더불어 효종의 시역을 꾀한 대역죄로 처결했지만 그 아들들인 숭선군 형제를 제거하는데는 실패했다.[82] 옥교사건의 8인옥교가 숭선군부인의 것이 아닌 홍치상이 빌려준 숙안공주의 것일 수도 있다는 혐의가 이로 인한 것.[83] 조선시대 사형은 능지형>참형>교형>사사형 순.[84] 훗날 무죄가 드러났다.[85] 연산군 때 두 후궁은 숙원 장씨(장녹수)를 모함하는 방을 붙여 유언비어를 퍼트렸다는 죄목 하나로 산 채로 손목이 잘린 뒤 능지형으로 처분된 바 있다. 물론 그대로 쓸 순 없었겠지만.[86] 현 대한민국의 현행법 상으로 대통령 기록물을 무단으로 유출할 경우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87] 해당 궁녀들은 사형에 처해졌다.[88] 쉽게 말해 진급[89] 이때 당시 숙종의 후궁들 중 빈의 지위에 있던 사람은 장희빈을 제외하면 숙빈 최씨가 유일했다.[90] 실제로 중종 때 장경왕후가 죽자 중종은 경빈 박씨를 왕비로 삼고싶어했는데 정광필이 왕비는 좋은 집안에서 들여야 한다고 주장해 무산시켰다. 게다가 경빈 박씨나 단경왕후 신씨가 중전 복위가 되지못한 이유도 후계자 문제 때문이었다. 김씨는 서인 명문가 출신에 자녀가 없으니 중전이 되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이 시대에서도 조정 대신들이 신분 제도에 관해서는 이때와 같은 시각인 걸 감안하면 숙종이라 할지라도 숙빈 최씨를 왕비로 삼지 못했을 것이다.[91] 효종의 차녀인 숙안공주의 아들. 즉 숙종의 고종 사촌이다.[92] 영빈에겐 이종 사촌 동생이 된다.[93] 홍치상은 영조 때 복권된다.[94] 당시 예조판서로 소론 준론에 속했다. 신임옥사로 강진으로 귀양을 가 그곳에서 죽었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명필인 이광사의 아버지, 연려실기술을 지은 이긍익의 할아버지이다.[95] 이와 관련해서 윤상궁에게 손자병법을 읽어주는데 영빈 김씨가 이것이 무슨 책인지 아느냐 묻자 윤상궁은 "손자가 아니옵니까?"라고 했더니 바보! 손자가 아니고 병법이니라.라며 윤상궁을 무식하다고 꾸짖었다(...). 원래 손자병법은 줄여서 손자(孫子)라고도 불렸기 때문에 상궁은 틀린 말을 한 게 아니다.[96] 금족령이 내려져 거처에 갇히자 상궁 옷을 입고 나가 즐거워 한다던지, 장희빈이 중전의 회임을 방해하기 위해 수은에 절인 대추를 들이밀자 화들짝 놀라며 도망간다던지..[97] 심지어 장옥정이 정 1품 희빈에 봉해져 종 1품 귀인인 본인보다 높아졌는데도 존대는 커녕 과거 소의 시절이라도 되는 양 하대와 멸시 발언으로 어그로를 끈다. 이건 경솔하다, 무례하다 수준을 넘어 그 자체로도 폐출감인 불경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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