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공기총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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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사건 전개
2.1. 용의자 김양호와 아내의 별거생활 중 김양호가 세운 범행 계획
2.2. 계획된 범행 실행
3. 김양호의 도주 이후
4. 기타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1996년 9월 21일,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에 위치한 풍기관광호텔에서 생후 13개월이였던 영아가 친아버지에 의해 공기총[1]으로 살해당한 사건이다.

2. 사건 전개[편집]



2.1. 용의자 김양호와 아내의 별거생활 중 김양호가 세운 범행 계획[편집]


파일:살인용의자 김양호.jpg[2][3]
사건 용의자 김양호(당시 25세)

이 사건의 용의자인 김양호(당시 25세)는 사건 발생 3년 전인 1993년에 타이어 공장에서 일하다가 만난 같은 공장 여직원 서씨와 사귀었고 1994년경부터 동거를 시작해 1995년에 이 둘은 결혼을 했다.[4] 동년 8월엔 딸을 낳았으며[5] 이 세 가족은 오순도순하게 살 줄 알았는...

하지만 김양호와 서씨의 생활은 밑바닥으로 크게 곤두박질쳤다.

  • 김양호는 딸이 돌도 되기 전인 시점에 자신이 일하던 타이어 공장에서 갑작스럽게 해고를 당해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어 수입원이 없게 되자 아내의 경제적인 문제와 김양호의 폭력성[6]으로 이 둘은 허구한 날 부부싸움을 하게 되었고 결국 이 상황에 대해 크게 불안감을 느끼게 된 아내 서씨는 딸을 자신의 품에 안고 1996년 8월 18일에 자기 친정이 있는 경상북도 영주시로 가출했다.

  • 딸이 보는 앞에서 벌어진 심한 부부싸움 끝에 서씨가 가출하자, 졸지에 혼자가 됨과 동시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김양호는 서씨가 친정으로 도망갔으리라는 낌새를 알아챘는지 서씨가 가출한 그날 밤에 아내가 불안해서 떨고있든 말든 상관없이 아내와 딸을 찾기 위해 부산의 거리 일대에 놓인 공중전화로 처갓집에 전화를 걸어 서씨를 끈질기게 추적[7]하였고, 통화 중에 아내로부터 앙심섞인 말[8]을 들음에도 김양호는 포기할 수 없다며 기어이 아내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리라는 생각으로 꼬박 33일 가량을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자신의 고향이자 자택이 있던 부산[9]에서 아내의 친정이 있는 영주까지 무려 240km 가량의 거리를 홀로 전전하던 중에 우연찮게 아내 서씨와 만나게 된다.

  • 이때 33일 동안의 끈질긴 추적 끝에 아내를 만난 김양호는 반가움보다 배신감이 차올랐고 아내에게 화해하는 척하며 아내와 친딸을 살해하기로 결심한다.[10]

2.2. 계획된 범행 실행[편집]


사건 전날이자 김양호가 부산과 영주 일대를 물색하며 아내를 찾기 시작한 지 33일 뒤인 9월 20일 오후 5시 30분에 영주 시내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서 세 식구는 저녁 식사를 하게되며[11], 그날따라 컨디션이 좋았던 김양호는 아내에게 "오늘 밤은 셋이서 같이 보내자" 라고 하며 제안을 한다. 김양호의 제안에 아내는 그러자며 수긍을 했고, 이후 이 둘은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아내는 친정집에 가서 딸의 기저귀와 분유를 가져오겠다 하는데 김양호는 나중에 부산으로 가서 사면 된다는 등의 말을 하였고, 서씨가 딸을 데리고 모텔로 가려고 했지만[12] 김양호는 모텔 객실료보다 호텔 객실료가 더 비쌈[13]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호텔만 고집했다. 아내는 딸을 데리고 친정집에 들른 후에 모텔로 가겠다 했지만 김양호는 끝내 고집을 꺾지 않고 아내의 손에서 딸의 젖병을 자신의 손에 넣은 뒤 딸을 데리고 같은 날 저녁 7시에 풍기읍 성내리에 위치한 1성급 호텔인 풍기호텔[14]에 체크인을 하고 7층(703호)에서 투숙했다.[15]

김양호는 객실에 입실한 후 맥주를 연신 들이켰고, 아내 서씨는 식사 후 흩어진 지 9시간이 넘게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김양호는 이에 더 큰 배신감을 느꼈고, 네가 끝까지 날 버리는구나 라고 분노하며 호텔에 체크인을 한 지 9시간 20분 가량 지난 21일 새벽 4시 20분, 딸이 잠든 걸 확인한 김양호는 집을 나설 때 들고 나간 짐가방에 미리 넣어놓은 공기총[16]을 꺼내고 탄환을 장착한 뒤 딸을 눕혀놓은 침대로 총구를 겨냥하여 자고 있는 딸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고, 딸은 김양호가 발사한 공기총에 맞아 아무 말도 못 하고[17] 과다출혈로 숨졌다.[18]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친딸에게 무기를 겨눠 잔인하게 살해한 김양호는 야밤에 호텔을 빠져나와 객실 열쇠를 반납하지 않은 채 도주했다. 사건이 발생한 층의 위치 기준으로 최소한 6, 7, 8층[19]에서 총성이 감지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나, 이 상황에 대한 최초 신고가 어떻게 접수되었는지의 기록은 불명이다.[20]

사건 발생 3일 후인 9월 24일, 김양호는 충청남도 당진군에 위치한 한보철강[21]까지 이동해 그곳에서 일을 시작[22]했고, 이때 김양호는 회사 전화로 처갓집에 전화를 걸었다가 서씨가 계속 찾으며 추궁하자 입술만 빨다가 전화를 끊었다. 이후 김양호의 공식적인 행적은 끊기고 말았다.[23][24]

3. 김양호의 도주 이후[편집]


파일:공개수배사건25시_살인용의자 김양호.jpg
1999년 8월 25일 KBS 공개수배 사건 25시에서 수배된 김양호[25]
파일:2007상반기김양호.jpg[원본]
2007년 상반기 중요지명 피의자 종합수배 고유번호 2번으로 올라온 김양호[26][27]
1999년 8월 25일, 김양호는 공개수배 사건 25시를 통해 공개수배가 한 차례 이루어졌고[28], 이후 중요지명 피의자 종합수배에 2007년 상반기까지 올라왔으나[29]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시점인 2011년 9월 20일까지 검거나 자수 등에 대한 말이 존재하지 않아, 현재 이 사건은 끝내 영구 미제로 남게 되었다.[30]

이후 1999년에 추가 범행을 저질렀다는 말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2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김양호는 검거나 자수 등의 말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미 사망했거나 어딘가 숨어있을 가능성이 크다. 더군다나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되었기 때문에 지금 잡는다 해도 처벌이 불가능하나, 한 가지 희망이라면, 김양호가 해외로 도피했을 경우 공소시효는 정지되어 처벌이 가능해진다.[31]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범인을 발견하면 꼭 신고하도록 하자.


4. 기타[편집]


  • 이 사건에서 굉장히 헷갈리기 쉬운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영아 살해죄의 적용 여부이다. 세간에서 말하는 것과 달리 법적인 의미의 영아 살해는 분만 중 또는 그 직후의 영아를 살해했을 때에 해당되고, 이 사건은 생후 13개월 된 영아가 살해당한 사건이므로 영아 살해죄가 적용되지 않는다.

  • 현재까지 확인된 중요지명 피의자 종합수배 전단에 수배된 기록은 2001년 상반기 5번, 2002년 상반기 3번[32], 2003년 하반기 5번[33][34], 2007년 상반기 2번이다.

  • 여담으로 생후 13개월 밖에 안된 영아를 공기총 으로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 이였지만. 울산 살충제 요구르트 사건 사건 처럼 당시 크게 사건 이 알려지지 않았다.


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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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 자료에는 하단 링크에 있는 내용과 같이 목을 눌러 질식사하게 한 걸로 기록되어 있으며 방송 장면에서는 도입부에서 김양호(대역배우)가 아무도 없는 캄캄한 장소에서 목조 의자에 앉아 공기총(장총)을 겨누는 것이 나오다가 끝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논외지만 이 장면은 공개수배 사건25시 2000년도 오프닝 일부 장면에 사용된다.[2] 2005년 전후 수배전단 상의 사진이 아래의 양쪽 귀 위쪽 머리카락의 간격이 짧아진 사선머리에 투명안경을 착용하고 목을 길게 뺀 사진으로 교체되기 이전인 2001년 상반기 수배전단에 이 사진으로 기록이 남아있었다.[3] 2001년 상반기 수배전단 상 고유번호 5번이었으며, 당시 3번은 울산 살충제 요구르트 사건의 범인 김영세, 6번~8번은 양천 채무자 폭행치사 사건의 범인 서형택, 윤병노, 노희승, 13번은 대구 경찰관 총기 탈취 사건의 범인 차원갑이었다. 참고로 이 사진은 하단 사진과 대조를 위해 사진이 좌우반전되었다.[4]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고 혼인신고만 했다.[5] 그 이전에 김양호와 서씨는 1994년속도위반을 하는 사고를 치고 말았다.[6] 심지어 김양호는 딸이 보는 앞에서 서씨에게 폭력을 행사하기까지 했다. 공개수배 사건 25시에서는 그래! 나 무능력한 남자야! 라고 하는 등 언어폭력과 함께 원거리에서 베개를 집어던지는 걸로 나온다.[7] 이때 서씨의 어머니(김양호의 장모)가 서씨에게 어딘가 숨을 것을 권한다.[8] 방송에서는 김양호가 네가 날 떠날 수 있을 것 같아?! 라고 으름장을 놓자 서씨가 김양호에 대한 앙심을 섞어 난 거지같은 인생에서 벗어날거야 라고 하며 김양호에게 원망을 퍼붓고는 김양호가 거기까지 쫓아올 거라는 낌새를 알아챈다.[9] 수배 전단 상 주소지가 경상북도로 되어있었으나 실거주지였을 가능성이 있다.[10] 후술할 내용과 같이 아내는 끝까지 호텔에 오지 않아 계획이 반은 빗나가게 된다.[11] 당시 방송 장면 상으론 김양호와 서씨는 오른쪽으로 90도 돌린 길다란 ㄷ자형 소파에 앉아 스테이크를 먹고, 딸은 그 옆에 누워있는 걸로 나왔으며, 김양호는 스테이크를 먹는 도중에 옆에 누워있는 딸을 보고는 이 녀석이 벌써 13개월이라니 라고 하며 흐뭇해 한다.[12] 여기에서 김양호가 먼저 선발대로 가있고, 서씨가 친정집에서 딸의 기저귀와 분유 등 짐을 챙겨서 후발대로 가는 경로가 제시되지만 빗나간다.[13] 2022년 기준으로 풍기호텔은 기본 객실료가 5만원부터 시작해 웬만한 모텔보다도 더 비싸다.[14] 참조 현재 네이버 등의 포털 사이트에서 풍기호텔로 검색 시, 풍기관광호텔로 뜬다. 2022년 현재에는 별관 건물에 풍기호텔 간판이 남아있다.[15] 서씨는 친정집으로 이동했고, 김양호는 아내와 흩어질 때 꼭 와달라고 부탁하였으나 아내는 김양호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부탁을 무시했다.[16] 방송 장면에서는 장총으로 나왔으나 흔히 올림픽 사격 경기에서 사용되는 공기권총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사용된 공기총이 어떻게 김양호의 손에 넘어왔는지는 불명이나 무허가로 개인소지했을 경우 당시 법령으로 총포, 도검, 화약류등 단속법(1995년 개정, 1996년 6월 7일 시행) 제12조를 어긴 죄까지 포함된다.[17] 여담이지만 생후 13개월이면 아직 언어 발달이 되지 않았을 시기다.[18] 방송 장면에서는 차마 총으로 영아를 살해하는 장면을 찍는건 방송 심의상 문제가 될 것 같아서인지, 김양호가 클로즈업되며 딸의 목을 눌러 질식사하게 한 걸로 수정되었다.[19] 풍기호텔의 최대층은 9층이지만 9층은 연회장이라 그 시간대에는 사람이 없으므로 9층에서는 감지될 수 없고, 뉴욕타임즈에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공기총의 경우 발사될 때 최대 260dB의 소리가 나기에 7, 8층에서는 기본으로 감지되고, 6층에서는 물론이고 그보다 더 아랫층에서도 감지될 수 있다.[20] 후술될 내용 상으론 서씨가 김양호의 행방을 물을 때 김양호가 바로 전화를 끊자,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경찰에 실종신고를 한 이후 경찰 측에서의 탐문 끝에 김양호와 딸이 머무른 호텔의 직원에 의해 딸의 시신이 발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21] 한보철강은 2009년에 부도가 나 해체되었다.[22] 방송 당시 장면을 보면 작업복 차림이다.[23] 방송 재연 장면에선 김양호가 용접용 마스크를 들고 문밖을 나서면서 수배 화면으로 넘어간다.[24] 한보철강에서 일하다가 살인사건이 들통나 2차로 재 도주했다는 설이 존재한다.[25] 상단의 2001년 상반기 수배전단 상의 사진이 해당 사진에서 편집된 것이며, 여기에서 말하는 안경은 하단 수배전단 상 사진의 투명안경일 가능성이 높다.[원본] 파일:중요지명피의자종합수배07상반기(저화질).jpg[26] 당시 1번은 인천 보복 살인사건의 범인이자 지금은 형기 다 살고 자유인이 된 박병섭이었다. 하지만 사진이 너무 작은데다 원본 수배전단 사진 전체를 그대로 확대하면 저화질인 관계로 앨리어싱 현상이 나타나 안에 뭐라 써있는지 식별이 안 될 수도 있는데, 안에 깨알같이 적힌 글씨들을 자세히 보면 김양호(35), 신장 170cm, 체격 보통, 경상도 말씨 라고 써있고, 부산 출신에 주소지가 경북 영주시(읍/면/리 등 하위 지역단위 확인불가)인 것까진 확인 가능하다.[27] 사진에서 위의 죄명이 표시된 글자가 잘려있는데, 2003년 하반기(2003년 하반기는 묶는 방식이면서 가로로 3줄(7-6-7)이었다.)부터 2007년 상반기까지는 중요지명 피의자 종합수배 전단의 수배자 표기 방식이 지류 전단에 한해 살인이면 살인끼리, 사기죄면 사기죄끼리 묶는 방식으로 변경되다 보니 지류 수배 전단에는 고유번호 표시가 없었다. 예전 2003년 상반기(이 때는 피의자 1줄당 가로로 10명×2줄=총 20명, 고유번호 형식이 마지막으로 사용된 구형 전단지이다.)까지 사용되던 고유번호 표시제로 부활한 건 김양호가 수배된 2007년 상반기 다음인 2007년 하반기부터다.[28] 동년 12월 22일에 연말 정산으로 재수배되었다.[29] 2006년처럼 삭제된 경우도 존재한다.[30] 태완이법 적용으로 살인죄의 공소시효가 무기한이 된 사건은 2000년 8월 1일부터 발생한 살인사건에 한해 적용된다.[31] 제주 변호사 피살 사건의 범인과 대구 양궁선수 살인사건의 범인들, 그리고 양천 채무자 폭행치사 사건의 주범 노희승도 이 점을 간과해서 검거된 이후 법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32] 파일:조일환.png
뒤에 있는 벽에 붙어있는 게 실제 사용된 2002년 상반기 중요지명 피의자 종합수배 전단으로, 고유번호 3번에 수배된 사람의 사진을 자세히 보면 김양호가 맞다.
[33] 당시 3번은 제천 독신녀 토막 살인 사건의 범인 신명호였다.[34] 2004년 상반기는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