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군
최근 편집일시 :
1. 개요[편집]
백제의 인물. 자는 온(溫). 동생 예식진은 유명한 백제의 매국노로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백제가 멸망할 때, 의자왕 일행과 함께 당에 투항해 웅진도독부 관리가 되었다. 이후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지만, 중국 천자의 사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입국 거부를 당했다. 삼국사기에 예군의 행적이 기록이 되었는데, 670년 7월 웅진도독부의 사마로 신라한테 붙잡혀 갇혔다. 삼국지의 관해처럼 등장의 빈도가 매우 적다. 사실 예군의 묘지명의 발견이 없었으면 대다수 한국 고대사의 인물들처럼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는 사례가 되었을 것이다.
2. 예군의 묘지명 발견[편집]
2011년, 중국에서 그의 묘지명이 발견되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묘지명 전문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고대금석문
【원문과 해석】
3. 묘지명의 일본에 대한 해석[편집]
이때 日本(일본)의 남은 백성은 扶桑(부상)에 의지하여 주벌을 피하고 있고, 風谷(풍곡)의 남은 백성들은 盤桃(반도)를 의지하여 굳세게 저항했다.
于時日本餘噍, 據扶桑以逋誅; 風谷遺甿, 負盤桃而阻固.
2011년 예군묘지명의 내용 중 '日本(일본)'이라는 표현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예군묘지명의 탁본을 학계에 처음으로 소개한 왕롄룽(王連龍)은 日本(일본)을 倭(왜)국의 바꾼 국호로 보았다.[1] 게가사와 야스노리(氣賀澤保規)[2] , 거지융(葛繼勇)[3] , 김영관[4] , 권덕영[5] 등 2011~2012년 사이의 연구자들도 왕련룡의 견해의 따라 의심없이 日本을 국호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도노 하루유키(東野治之)는 묘지명의 일본이 당시의 왜국이 아니라 백제를 뜻한다고 처음 반론을 제기하여 학계에 큰 파장을 던졌다. 고바야시 도시오(小林敏男), 이성시, 이용현 등도 이에 동의하여 예군묘지명의 일본이 국호가 아니고 일반명사로서 백제를 뜻한다고 보았다.
이용현은 일본 용어를 중점으로 학계의 의견을 정리하였고, 평제비[평] 의 '부상'과 비교하여 예군묘지명의 '부상'을 백제로 보았고 해석에 따라 '일본' 역시 백제로 보았다.[6] 이준호는 이용현의 학설을 들어 "일본이 왜국의 국호로 성립되기 이전 시기의 용어로서 당에 의해 멸망한 백제를 가리키는 표현이라는 것이 확실시 되었다"라고 하였다.[7]
3.1. 왜국을 지칭[편집]
왕롄룽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8]
1.日本은 국호이며, 扶桑(부상) 역시 일본땅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2. 風谷은 바람이 부는 계곡이란 뜻이고 遺甿(유맹)은 移民(이민) 혹 後裔(후예)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3. 盤桃(반도)는 秦(진)의 徐福(서복)이 구하였다는 신화 중 仙桃(선도)로 먹으면 수명을 연장하여 장수할 수 있는 과일이라고 하였다.
3.2. 백제를 지칭[편집]
도노 하루유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9]
이에 대해 이용현은 "이와 같은 주장은 학계에 큰 파장을 던졌다."라고 하였고, 고바야시 도시오는 예군묘지의 "日本"이 국호가 아니라는 점에 동의하였다.1. 墓誌(묘지)는 기교를 응축시킨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묘지의 작문자는 결코 국호를 쓰지 않았다.
2. "日本(일본)"이란 국호로 정착되기 전의 용법으로 중국에서 볼 때 해가 뜨는 곳이라는 의미로 쓰였으며 百濟(백제)를 가리킨다.
3. 倭國(왜국)은 묘지에서 "海左(해좌)", "瀛東(영동)"으로 표기되었다.
4. 唐(당)대에 日本(일본), 日東(일동)은 신라를, 日域(일성)은 新羅(신라)나 고구려를 가리키는 예가 있다. 扶桑(부상) 역시 마찬가지로 고대 한국을 가리킨다.
5. 백제가 아니라 "本藩(본번)"이라 쓰고, 삼국시대를 살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삼국에 대해서는 "三韓(삼한)", "靑丘(청구)"라 하였다.
6. 日本餘噍(일본여초)와 대구를 이루는 것이 風谷遺甿(풍곡유맹)의 風谷은 바람부는 계곡이란 뜻으로 쓰였고, 風師(풍사), 風伯(풍백)은 箕星(기성)과 연결되어, 결국 箕子朝鮮(기자조선)을 가리킨다.
7. 風이 바람이듯 그 對句(대구)가 되는 日도 해로 읽어야 한다.
8. 盤桃(반도) 역시 日本과 관련된 仙桃(선도)라기보다는 東海(동해)의 度索山(도삭산)에 있는 큰 복숭아 나무가 수천리 뻗은 지역을 가리킨다.
9. 만약 이 시점에서 일본이란 국호가 존재하였다면 "日本"이라고 쓰지 않았을 것이다. 日本이란 용어를 쓴 자체가 일본이란 용어가 아직 국호로서 성립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이성시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학술원장 또한 도노 하루유키의 의견에 동의하며 678년에 ‘일본’이 국호로서 성립돼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고 하였다.
이용현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1. 도노 하루유키의 학설, "일본, 부상, 풍곡, 반도, 해좌, 영동 등 예군묘지명에는 단 한번도 국호가 쓰지 않았다."에 동의하며 일본 즉 "해 뜨는 동쪽 끝"이란 의미는 중국에서 표현하면 일본열도 뿐 아니라 백제 등 한반도가 들어간다. 즉 국호 성립여부와 관계없이 부를 수 있는 칭호다. 예군묘지에서의 일본은 비록 국호가 성립된 이후의 자료라 하더라도 국호가 아닐 가능성이 크며, 그것은 백제 혹은 웅진도독부 중심적 호칭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번", "웅진우이"란 표현이 좋은 예가 된다.
2. 風谷(풍곡)은 風伯(풍백), 箕星(기성)과 관련있고 箕(기)는 箕子朝鮮(기자조선)의 箕子(기자)와 연관되는데[10]
기자조선의 후예는 고구려를 의미하며 양자는 평양을 매개체로 공통된다는 도노 하루유키의 견해를 봤을 때 풍곡은 고구려일 수도 있고, 箕子朝鮮의 箕準(기준,준왕)이 韓의 金馬郡(금마군)에 내려온 설화와 고구려와 백제를 연관된 나라로 보던 사례를 봤을 때 백제일 수도 있다.3. "扶桑(부상)"을 평제비[평]
에서처럼 백제로 보게 된다면, "日本"도 百濟로 보는 것이 정합적이다. 이 경우라면, 日本은 백제저항세력(백제부흥운동세력)을 가리키되, 扶桑은 백제저항세력의 백제내 근거지를 가리킨다. 백제저항세력은 州柔城(주류성)이나 任存城(임존성)등을 근거로 저항했다.[11]4. 평제비의 蟠木(반목)이 고구려를 가리킨 사례를 볼 때 風谷遺甿(풍곡유맹)은 백제나 고구려의 지원을 받은 백제 세력를 가리키며, 원래 백제에 있던 세력인 福信(복신)이나 고구려로 망명한 遲受信(지수신)과 같은 부흥세력이 해당하고 일본의 지원을 받은 부여풍은 해당되지 않는다. 盤桃(반도)는 任存城(임존성)같은 근거지를 가리킨다
5. 일본과 부상을 왜국 땅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는데, 이 경우 "日本餘噍(일본여초)"에 해당하는 이들은 부흥운동의 장수로 저항세력의 최후 근거지인 주류성(州柔城, 周流城)이 함락되자 일본에 망명한 여백신(餘自信) 달솔(谷那晉首), 목소귀자(木素貴子), 억례복류(憶禮福留) 등으로 볼 수 있다. 고로 "日本餘噍"란 1.日本=백제의 餘噍, 2. 日本으로 달아난 餘噍(日本의 후원을 받은 餘噍)가 된다.
언급된 평제비문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용맹스런 군대[貔貅] 백만이 번개처럼 일어나고 바람같이 드날려 앞에서는 반목(蟠木)을 베다가도, 물러나서는 부상(扶桑)을 베어버리매, 얼음은 여름 해에 녹고 잎은 가을 서리에 부서졌다.
반목(蟠木)註 몸이 휘감겨진 나무라는 뜻으로 좋지 않은 나무를 의미한다(김영심, 1992, 473쪽)
부상(扶桑)註 동쪽 바다의 해돋는 곳에 있다는 神木 또는 그 신목이 있는 곳. 동쪽의 백제를 가리킨 듯하다(박지현, 2015, 564쪽).
이용현은 '반목을 베다가도'에서 '반목'은 고구려, '물러나서는 부상을 베어버리매'의 부상은 백제로 본 것이다. 이는 644년부터 660년 사이에 벌어진 1,2차 고구려-당 전쟁에서 당이 물러났다가 660년 백제를 정벌한 사실과도 부합한다.
去 顯慶五年 官軍平本藩日
지난 현경 오년 관군(당군)이 본번(백제)을 평정하던 날
(중략)
日本餘噍 據扶桑以逋誅
일본의 남은 백성은 부상에 의지하여 주벌을 피하였고
風谷遺甿 負盤桃而阻固
풍곡의 남은 백성들은 반도를 의지하여 굳세게 저항했다.
(중략)
僭帝一旦稱臣
참제(僭帝)가 하루아침에 신하라고 칭하고
仍領大首望數十人, 將入朝謁.
이에 대수망(大首望) 수천인을 거느리고 조정에 들어와 알현하려 하였다.
예군 묘지명
이에 왕과 태자 효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정방이 왕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演) 및 대신(大臣)과 장사(將士) 88명, 백성 12,870명을 당나라 수도로 보냈다.
於是, 王及太子孝與諸城皆降, 定方以王及太子孝·王子泰·隆·演及大臣將士八十八人·百姓一萬二千八百七人, 送京師.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예군묘지명의 일본과 부상이 등장한 문구의 앞뒤 문장은 백제를 정벌의 시작에서 의자왕을 압송한 백제의 멸망까지를 묘사한 상황이기 때문에 660년 평제비의 부상과 같이 백제로 볼 수 있다.
이용현은 이와 같이 부상이 백제를 뜻하므로 '일본 잔당은 부상에 근거하여 주벌을 보면하고'라는 문장은 '백제 잔당이 백제지역에 근거하여 주벌을 모면하고'의 해석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한편, 일본이 백제를 뜻하는 일반명사로 보는 학설은 구당서와 신당서의 왜국이 일본으로 국호를 고친 것의 관한 기사의 해석으로도 이어졌다.
왜국은 옛 왜노국이다. (중략) 일본국은 왜국의 별종이다. 이는 그 나라가 해 뜨는 곳에 있기에 일본이라 이름지었다. 혹은 말하기를 왜국이 아름답지 않은 이름이기에 스스로 나쁘게 여겨 일본이란 이름으로 고쳤다. 혹은 일본은 예전엔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합하였다고 한다. 그 사람들 중 입조하는 자들 대부분이 자랑하고 그것이 실제와 일치하지 않는 까닭에 중국이 의심을 하였다.
倭國者,古倭奴國也。···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或曰:倭國自惡其名不 雅,改為日本。或雲:日本舊小國,並倭國之地。其人入朝者,多自矜大,不以實對, 故中國疑焉
사신을 보내어 고려와[13] 평화를 축하하고서야 조금씩 하음을[14] 익혔으며 왜란 이름을 나쁘게 여겨 일본으로 고쳤다. 사자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라가 해가 뜨는 곳과 가까워 그렇게 이름을 정했다고 한다. 혹은 일본은 작은 나라인데 왜국 지역을 병합하고 그 이름을 사칭한다고 한다. 사자가 그 실정을 말하지 않아 의심스럽다.日本,古倭奴也。··· 鹹亨元年,遣使賀平高 麗。後稍習夏音,惡倭名,更號日本。使者自言,國近日所出,以為名。或雲日本乃小 國,為倭所並,故冒其號。使者不以情,故疑焉。
구당서의 별종이라는 표현은 발해를 언급하면서도 나타난다.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려의 별종이다.
渤海靺鞨大祖榮者 本高麗別種也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록에서 왜국이 일본으로 국명을 바꾼 부분이 있다. 그런데 설명하는 사람마다 내용이 달라 의심스럽다고 서술되어 있다. 또한 일본이 왜국의 땅을 합병하였다는 설명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는데 일본(日本)을 '백제의 유민들'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왜국으로 넘어간 '백제의 유민들'은 스스로를 왜국과 다르다고 인식하였을 것이다. 야마토인들도 '왜'라는 표현을 싫어하여 일본어 발음이 같은 화할 화(和)자를 주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이라는 국명을 쓰게 된 것은 양자 간에 이해관계가 맞아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구당서와 신당서에서 언급한 국명 변경의 세 가지 이유를 모두 설명할 수 있다. 별종에 대한 표현도 일본과 왜국은 연속성 있는 다른 나라로 추측할 수 있다.#
일본이라는 국호의 공식 사용은 701년 다이호 율령 이후에 쓰이게 된다. #
또한 일본이라는 말은 해가 뜨는 곳을 말하는데, 이는 중국이나 한반도의 입장에서 이르는 말이다. 즉, '일본(日本)'이라는 이름 자체는 해당 나라의 입장에서 사용된 말이 아닌 것이다. 타 지역 사람이 그 나라로 유입된 이후 '왜국'을 대체하기 위해 제시되었다는 것이 중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