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브게니 고르바티우크

덤프버전 :

파일:Горбатюк_Евгений_Михайлович.jpg
예브게니 미하일로비치 고르바튜크(Евгений Михайлович Горбатюк : 1914년 10월 23일~1978년 3월 2일)

1. 소개
2. 출생과 입대
3. 전쟁이 터지다
4. 증언
5. 종합 전과
6. 지휘관 승진
7. 종전 후
8. 서훈



1. 소개[편집]


독소전 동안 강력한 독일 공군과 분전을 거듭한 제28근위전투기연대(28-го истребительного авиационного полка)를 지휘한 소련 공군의 에이스로, 그 활약으로 상급부대인 제6전투항공대(6-го истребительного авиационного корпуса) 직권으로 대령까지 진급했다.


2. 출생과 입대[편집]


러시아 제국 시대인 1914년 10월 23일에 우크라이나 중부의 코피틴치(Копытинцы)라는 아주 작은 마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예브게니의 아버지 역시 빈농의 자식이었지만 장남만큼은 깡촌 생활을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는지 필사적으로 아들의 뒷바라지를 해주었고, 그 덕분에 장성한 그는 혼란스러운 적백내전10월 혁명으로 세상이 뒤집어지는 판국에도 세파에 휩쓸리지 않고 무사히 농업대학까지 졸업할 수 있었다.



3. 전쟁이 터지다[편집]


그는 22살이 되던 1936년붉은 군대에 지원했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938년에 카친스키 군사항공학교(Качинскую военную авиационную школу)에서 모든 비행 교육 과정을 수료하고 졸업했다. 소위로 임관했던 그가 중위로 진급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1941년 6월에 독일군이 서쪽 국경을 넘어 침공해왔고, 마침내 독소전이 터졌다. 그 무렵 고르바티우크는 네스토르 F. 데미도프(Нестор Филиппович Демидов) 대령이 지휘하는 제28전투기연대(28-го истребительного авиационного)에서 최신예 전투기인 MiG-3를 조종하는 편대장을 맡고 있었다. 연대는 독일군의 주 침공로에서 겨우 10 km 떨어진 리비우 근처에 주둔하고 있었다.



4. 증언[편집]


1941년 6월 21일 저녁, 조종사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고르바티우크 중위는 천둥이 울리기 시작하며 뇌우가 몰려오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궂은 날씨 탓에 부대원들은 거의 잠을 잘 이루지 못했고, 마찬가지로 잠을 뒤척이던 중위는 새벽 공기나 마실까 바깥으로 나왔는데, 공교롭게도 숙소를 향해 달려오는 연대장과 부딛혔다. 비행복을 입고 하네스를 찬 데미도프 대령은 불시 훈련비행을 위해 조종사들을 깨우라고 했고, 이때가 새벽 3시쯤이었다.

데미도프 대령이 인솔하여 5대의 전투기가 새벽 하늘을 가르며 날아올랐다. 훈련 계획은 아군 폭격기로 구성된 가상 적기들이 정해진 공역으로 침투해오면 요격하여 격퇴하는 것이었다. 훈련 공역으로 기수를 돌려 고도를 높이던 편대원들의 눈에 엔진 배기관에서 솟는 푸르스름한 불꽃을 볼 수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가상 적기들은 평소와 달리 동쪽이 아니라 서쪽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접근하던 그들이 본 것은 놀랍게도 검은 갈고리십자가 선명한 루프트바페 폭격기들이었다 ! 부편대장 위치에 있던 고르바티우크가 좀 더 확실히 보기 위해 옆으로 접근하자, 그 폭격기는 곧바로 두 줄기의 기관총 세례를 뿜더니 구름 속으로 숨어버렸다.

한편, 기지 대원들은 이미 전쟁이 시작된 것을 알고 있었다. 독일 폭격기 편대가 비행장 상공 위를 통과하고 있었다. 폭탄이 섬찟한 휘파람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활주로격납고 위로 눈부신 화광이 충천했다. 단지 5명의 조종사만이 요격 태세를 갖추고 있었지만, 이들은 아직까지도 아무런 교신을 받지 못해 일종의 훈련이 아닌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소련 조종사들이 어물거리는 사이에 폭격기들은 기수를 돌려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구멍투성이의 활주로에 착륙한 그들은 무사했지만 비행장은 엉망이 되었고 기지 막사에 떨어진 직격탄은 기지 요원들을 여럿 떼죽음시켜 버렸다.

엔진을 끄고 프로펠러가 채 멈추기도 전에 고르바티우크에게 달려온 정비사는 크게 외쳤다.

"전쟁!!"

그제서야 사태를 확신한 중위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국경에서 교전이 벌어지고 있더군."


"우리는 폭격을 받았습니다, 중위 동지. 부품 창고가 완전히 산산조각났습니다. 격납고도 마찬가지고, 막사에는 큰 불이 났습니다."

그가 폭격을 당한 장소들을 늘어놓는 목소리는 재미있는 놀꺼리를 찾아낸 소년처럼 들떠 있었고, 이에 고르바티우크 중위는 어쩔 수 없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쾌활하게 대답했다.

"잘했어! "


폭격을 받았지만, 당시 많은 러시아인들이 생각했듯이,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들은 공습에 대비해서 가짜 비행장을 지상에 그려놓거나 합판으로 만든 전투기를 줄세워놓고 연료 저장고나 막사도 엉뚱한 곳에 더미를 만들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리비우에는 호수 위에다 부표를 띄워 활주로처럼 보이게끔 위장한 시설도 있었는데, 종종 진짜로 착각하고 착륙하려다 실수를 깨닫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눈속임이 언제까지나 통할 리가 없었다. 독일 육군은 정찰기를 띄워 선제 폭격이 보고된 만큼 전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곤 공군을 힐난했고, 저공통제기와 슈투카를 동원해 족집게처럼 폭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자, 소련군들은 이 공격이 금방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진짜 전투기들이 줄줄이 격추되어 여기저기 떨어지고, 독일 폭격기들은 클러스터 폭탄 같은 신무기를 동원해 지상에 주기된 항공기와 설비들을 남김없이 불태우고 있었다.

고르바티우크는 활주로가 응급수리를 끝내자마자 두 번째 실전 출격을 나갔다. 여러 무리로 뭉친 적기들이 마치 눈보라처럼 비행장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륙 직후, 고르바티크는 최대한 고도를 높이려고 스로틀을 밀고 조종간을 당기고 있었다. 그는 상대가 고공 성능이 뛰어난 Me 109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한 자신이 몰고 있는 MiG-3가 고공에서는 메서슈밋 전투기보다 우월하다고 잘못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엔진을 풀스로틀로 작동시켜 6,000 m 까지 상승했고, 시선은 쉬지 않고 수평선을 가로질러 더듬어가며 적기를 찾았다. 그리고 갑자기 윙맨의 목소리가 리시버를 통해 울렸다.

"우측 하방 Me 109 !"


고르바티우크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상대할 적기들은 그들 아래에 있었고 전술적인 우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훈련을 통해 미그 전투기에게 있어 고도야말로 가장 뛰어난 무기라는 것을 체득한 그는 눈 아래의 적기를 지나치자마자 곧바로 샹델 기동을 걸며 하강 선회 코스를 잡았다. 그가 친 그물에 파시스트 전투기 9대가 갇혀 있었다.

하지만, 강의실에서 개발된 고전적인 급강하 공격 전술은 실전에서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의욕만 앞서 앞다퉈 강하하는 아군 편대기끼리 뒤얽히며 서로의 사선을 방해한데다, 기껏 퍼부은 사격도 전혀 적기를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9대의 적기 중에서 불이 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고르바티우크가 쏜 적기 1대가 캐노피가 깨지면서 비틀거리며 무너져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고르바티크 중위의 첫 전투 사격이자 첫 번째 승리였다. 형언 할 수없는 기쁨에 젖은 그는 잠시 냉정을 잃었는데, 즉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다른 Bf 109의 기수를 보고 공포를 느꼈다. 너무 순식간의 반격에 그는 얼어붙어 꼼짝도 할 수 없었고, 우레처럼 엔진 카울링을 두드리는 적기의 기총탄을 몸으로 느껴야만 했다. 방풍창이 산산조각나고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다행히 즉시 추락할 정도의 피해는 아니었는지, 측면으로 보이는 비행장을 향해 덜덜 떨리는 기체를 달래가며 고도를 낮춰 간신히 착륙할 수 있었다.

... 전쟁 첫날은 고르바티크 중위에게 용기와 조종술, 그리고 회복력을 시험하는 과정이었다. 6월 22일 새벽, 이렇게 그는 적기를 1대 격추시키고 자신도 격추되며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쓰라림을 모두 맛보았다. 하지만 목숨이 걸린 그 시험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6월 22일 하루 동안 고르바티우크와 연대원들은 11번이나 공습을 당했다. 이들에 맞서 싸우면서 니콜라이 보로비요프(Николай Воробьёв)와 사샤 샤레야(Саши Шахрая)가 격추당해 전사했고, 이 모든 일은 한 하루만에 전부 일어났다.


5. 종합 전과[편집]


예브게니 중위는 1942년 2월까지 7개월 동안 203회나 전투 비행 임무를 나가면서도 살아남았다. 200회가 넘는 출격을 반복하면서 그는 26회의 교전을 치렀고, 4대의 적기를 격추시켰으며 상당수의 지상 목표물을 파괴했다. 추풍낙엽처럼 조종사들이 죽어나가던 독소전 초기에 끝까지 살아남은 예브게니 고르바티우크 중위는 상관들로부터 전투력과 지휘 능력을 인정받아 수석중대장 보직이 주어졌다.

3월 4일에는 소련군 지도부 스타라프카의 선포에 의해, 나치 침략자에 대한 싸움의 전면에 나서 싸운 수석중대장 고르바티우크가 보여준 영웅적인 용기에 대하여 제665호 레닌훈장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가 주어졌다.


6. 지휘관 승진[편집]


1944년 2월에 소령이 된 고르바티우크는 제63근위전투기연대(63-й гв. иап)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예브게니 고르바티우크 소령이 이끄는 연대는 북서부 전선과 발트해 전선에서 독일 공군을 성공적으로 격파했다. 이때 그와 휘하 부대원들이 세운 혁혁한 무공으로 인하여 11월에 대령으로 승진한 그는 12월에 수보로프 제2전투기사단(Суворова 2 степени истребительной авиационной дивизии)을 맡게 된다. 사단장이 된 후에도 지휘 비행이나 훈련, 유지비행을 핑계로 최전선에 부하들과 함께 가끔 출격하던 그는 베를린 공세 작전에도 참가해 적국 수도 함락에 공을 세웠다.

독소전을 치르는 동안 고르바티우크 대령은 347회 출격하면서 50회 이상의 공중전을 경험했고, 단독 격추 11대에 공동 격추 8대, 그리고 수많은 지상 목표를 파괴하는 무공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지휘관으로서의 능력도 탁월했다.



7. 종전 후[편집]


전쟁이 끝나고 난 후 그는 1946년 11월까지 제3근위 전투기사단을 계속 지휘했고, 이듬해인 1947년 10월에는 제1공군 제14전투기군단 예하 제129 전투기사단장 보직이 주어졌다. 그가 전후에 담당한 구역은 현재의 벨라루스 공화국이었다. 1955년에 장성 진급을 위해 군사 아카데미를 졸업한 그는 12월에 제24공군 예하의 제71 전투기 군단장이 되었다. 1956년 11월에 남부 집단군 공군 사령관, 이후 1959년 7월에는 모스크바 군관구의 공군 사령관까지 거침없이 올라갔다. 1967년에 공군 중장으로 진급한 에브게니 고르바티우크는 1971년 6월부로 공군 부사령관을 역임했고, 1977년 1월부터는 공군 아카데미의 학교장을 맡았지만, 더 이상 직무를 수행하기에는 건강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1978년 3월 2일에 지병으로 숨진 그는 모스크바의 국립 묘지인 노보데비치녬 묘지에 묻혔다.


8. 서훈[편집]


소비에트 연방 영웅
레닌훈장 3회
알렉산드르 네브스키 훈장(Орден Александра Невского)
대조국전쟁 참전장 1급(Орден Отечественной войны I степени)
노동 적기 훈장(Орден Трудового Красного Знамени)
적성 훈장(Орден Красной Звезды)
소련군 근속 3급 / 2급
군사 공로 메달
레닌 탄생 100주년 기념 메달
모스크바 방위 메달(Медаль «За оборону Москвы»)
베를린 함락 메달(Медаль «За взятие Берлина»)
1941-1945의 대조국전쟁 승전 메달
1941 대조국전쟁 승리 20주년 메달
1941 대조국전쟁 승리 30주년 메달
소련군 베테랑 메달(Медаль «Ветеран Вооружённых Сил СССР»)
소련 육군/해군 30주년 기념 훈장 etc.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0 00:56:40에 나무위키 예브게니 고르바티우크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