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타 고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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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타 코이치의 직책 /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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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95~1997년 센트럴리그 최다 도루
1994년
노무라 켄지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
37도루

오가타 코이치
(히로시마 도요 카프)
47도루(1995년)
50도루(1996년)
49도루(1997년)


1998년
이시이 타쿠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39도루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95-1999 센트럴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

{{{#ffffff [[히로시마 도요 카프|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번호 37번}}}
킨조 테츠지
(1983-1986)

오가타 코이치
(1987-1995)


노노가키 타케시
(1996-2000)
{{{#ffffff [[히로시마 도요 카프|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번호 9번}}}
이시바시 후미오
(1994)

오가타 코이치
(1983-1990)


마루 요시히로
(2014-2018)
{{{#ffffff [[히로시마 도요 카프|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번호 79번}}}
오사나이 타카시
(1994-2005)

오가타 코이치
(2010-2019)


카와다 유스케
(20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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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타 코이치
緒方孝市 | Kouichi Ogata

생년월일
1968년 12월 25일 (55세)
국적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출신지
사가현 토스시
학력
사가현립 토스 고등학교
포지션
외야수, 내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6년 드래프트 3순위
소속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87-2009)
지도자
히로시마 도요 카프 1군 야수종합코치 (2010)
히로시마 도요 카프 1군 수비주루코치 (2011~2012)
히로시마 도요 카프 1군 타격코치 (2013)
히로시마 도요 카프 1군 야수종합코치 (2014)
히로시마 도요 카프 감독 (2015-2019)
가족 관계
배우자 : 오가타 카나코[1]
자녀(1남 2녀) : 오가타 유우나

1. 개요
2. 선수 커리어
3. 코치 시절
4. 감독 시절
4.1. 2016시즌
4.2. 2017시즌
4.3. 2018시즌
4.4. 2019시즌
5. 이후
6. 기타



1. 개요[편집]


일본의 前 야구 선수. 선수 경력부터 코치, 감독까지 모두 히로시마 도요 카프 한 팀에서만 보낸 히로시마의 프랜차이즈 스타.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타선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90년대 중반 히로시마의 붉은 헬멧 군단, 아카헬을 이끄는 리드오프로 유명한 선수이다.

와다 유타카 처럼 오직 한 팀에서만 선수와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야마모토 코지 이후 히로시마에서 선수, 감독으로써 우승을 경험한 인물.

여담이지만 큰딸인 오가타 유우나아임 엔터프라이즈 소속의 성우로 활동하고 있다. 비슷한 사례로 오치아이 히로미츠의 아들인 오치아이 후쿠시가 있다.


2. 선수 커리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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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드래프트에서 3순위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처음에는 내야수로 지명되었고 1988년에 처음 1군에 출장하였다. 1989년에는 미국 마이너리그에 야구 유학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1991년에는 100경기 이상 출전하고 일본시리즈[2] 선발로도 출전했지만 극심한 타격 부진에 시달리고 있었다.

1995년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비극을 겪기도 하였지만 47개의 도루를 기록하면서 그 해 도루왕[3]에 올랐고, 1997년까지 3년 연속으로 도루왕을 차지했다. 그 3년간 통산 도루 개수는 146개. 그 기간동안에는 발만 빠른 게 아니라 작은 시민구장의 힘을 등에 업고20홈런을 날릴 수 있는 펀치력과 빠른 발을 살린 넓은 외야수비범위, 레이저 송구를 뿌려대는 강견을 두루 갖춘 5툴 플레이어였다. 1999년에는 3할 타율에 36홈런을 기록하기도 했고, 이후 몇 년간은 부상으로 신음했으나 2002년부터 2005년까지는 도루가 줄었긴 해도 연속으로 20+홈런을 때려냈다. 마에다 토모노리, 가네모토 도모아키와 함께 히로시마의 황금 외야진을 책임지던 선수였다.

2008년에는 플레잉코치로 전환되었고 그 해 5월 25일 지바 롯데전에서 대타로 나와 통산 1500호 안타인 역전 투런을 때려냈고, 이듬해에 공식적으로 선수 은퇴했다. 통산 성적은 22시즌 1808경기 6178타석 5342타수 1506안타 241홈런 725타점 268도루, 타-출-장 .282 .365 .477.


3. 코치 시절[편집]


2010년에 코치로 전업하여 1군에서 1루 코치를 맡았고, 2011년부터 수비주루코치를 맡았다. 2013년에 타격코치를 지내다 2014년에 다시 야수종합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그러다 2014년 시즌 후 노무라 겐지로 감독이 사임하자 후임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2015년 2월 26일에는 팀의 외야수 마루 요시히로에게 등에 반성문을 붙이고 훈련할 것을 지시하여 논란이 되었다. 시즌 중에도 마루에게 맨투맨으로 붙어 타격을 지도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는데, 아무래도 현역시절 자신과 비슷한 호타준족 스타일의 선수다 보니 유독 눈이 가는 듯.



4. 감독 시절[편집]


2018년까지는 일본프로야구한용덕, 더스티 베이커[4]였었다.

감독으로서 첫 시즌 성적은 69승 71패 3무로 센트럴리그 4위. 불과 반 게임 차로 한신 타이거스에 밀리면서 A클래스 진입에 실패했다. 물론 9월 12일 한신전에서 나온 비디오 판독 오심으로 승을 날려먹은 것이 결과적으로 순위싸움에 영향을 줬으니 오가타 감독 입장에서는 다소 억울한 결과일 수도 있으나, 어쨌든 마에다 켄타의 잔류, 구로다 히로키의 복귀로 한층 고무되었던 시즌 전 분위기를 생각해봤을 때 실망스러운 성적임에는 분명하다.


4.1. 2016시즌[편집]


2016년은 시즌 초반부터 시작해서 센트럴리그 1위를 독주, 7월말부터 한때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추격당하면서 1996년처럼 히로시마가 요미우리에게 역전당하고 1위수성에 실패할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지만 9월초 현재 다시 두팀간 승차가 13.5경기차까지 벌어지면서 한시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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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종료 후 헹가래를 받는 오가타 감독.

결국 9월 10일 요미우리에게 6-4로 이기면서 25년 만의 센트럴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2016년은 143전 89승 52패 2무로 마쳤으며,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로 직행했다. 1승의 어드밴티지를 안고 시작한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에게 4승 1패로 승리하며, 2016년 일본시리즈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일본시리즈에서는 먼저 2연승을 따내고도 필승조 이마무라 타케루, 제이 잭슨 콤비를 무리하게 6연투나 시킨 것이 화근이 되어 4연패를 당하며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1~2차전 주도권을 가져와준 타선도 3차전 패배이후 강타선과는 안어울리는 물빠따로 엘드레드를 제외하면 다들 큰 활약이 없어 4연패의 원흉중 하나가 되었다.


4.2. 2017시즌[편집]


아쉬움을 뒤로하고 이듬해 3월 31일 에서 열린 김지헌과 아이들과의 개막전에서는 패했지만 이후 10연승을 거두고 일찌감치 치고나갔다. 중간에 4연패를 당한적도 있지만 바로 호구 만나더니 정신차리고 계속 질주중. 이번시즌도 이변이 없는한 리그우승은 무난할듯 했는데 한신,DENA와의 상대전적이 앞서질 못해 선두수성의 가장 큰 변수가 될듯. 결국 우려가 현실이되어 5월 5일부터 시작된 한신 타이거스와의 고시엔 원정 3연전에서 충격의 스윕패를 당해 선두자리를 내주었다. 하지만 그후 정신차리고 인터리그에서도 파리그팀들을 열라 뚜까패고 인터리그 마지막날 홈에서 소프트뱅크와 인터리그 우승을 놓고 다퉜으나 결국 패해 소프트뱅크에게 인터리그 우승을 내줘[5] 아쉽게 2위를 차지했다. 본 리그로 돌아가서도 이기세를 계속 이어가 9월 18일 2위 한신과의 경기에서 승리하여 2년연속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하였다. 닭똥같은 눈물을 질질짜며 행가레를 받았다.

일단 구단 역사에 둘 밖에 없는 2년연속 리그우승 감독[6]이니 무능력자는 아닌 듯 하지만 명장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약간은 논란이 있는 듯 하다. 2016년 일본시리즈에서 보여준 구태의연한 투수기용법도 그렇고, 노무켄이 하위권에 신음하던 팀을 추스려서 다져놓은 전력에 구단의 시스템 덕으로 숟가락만 얹고 있다는 인상이 없지는 않아서 그런지 감독 재임시절에 이룬 성과에 비해서는 인상은 희미한 편이다. 다시 말하면 우승은 했는데 이 사람이 팀을 우승하게 만든 감독으로서의 특별한 점이 뭐냐라고 물어본다면 딱부러지게 이거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얘기. 실제로 일본 내에서도 히로시마의 리그 2연패의 비결 얘기를 할 때 전부 스카우트진, 훈련, 팀분위기 등 전부 시스템 얘기만 하지 이 사람에 대한 얘기는 별로 나오고 있지 않다.

결국 2017년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이동일까지 날리고 3경기만에 올라온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를 상대로 어드밴티지 1승+ 1차전 승리[7]를 거두고도 내리 4연패 하며 5경기동안 목이 터져러 응원해 준 홈 팬들 앞에서 센트럴리그 사상 최대의 하극상의 희생양이 되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 시즌 88승, 상대팀과 14.5게임차라는 승차가 무색하게 선수기용, 투수교체 타이밍 등등에서 악수를 연발하면서 무기력하게 패배하며 전년도 일본시리즈에서의 패배의 설욕은 고사하고 설욕의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다. 2015년의 포스트시즌 탈락, 2016년 일본시리즈에서의 구태의연한 투수운용으로 비롯된 역전패, 2017년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쓸놈쓸에 선발투수 당겨쓰기 하다가 실패하면서 역전패 등등 3년 연속으로 시즌 마무리를 개운치 않게 하면서 감독으로서의 평가를 스스로 까먹고 있다. 물론 리그 2연패도 업적이니만큼 이것으로 경질되는 일은 없겠지만 필요한 곳에서 과감하게 승부수를 작렬시키면서 답없던 팀을 일본시리즈까지 끌고간 상대팀 감독과 대비를 이루고 있다.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여 감독으로서 부족했던 부분을 보완해서 발전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모처럼 찾아온 팀의 중흥기도 일찍 지나가버릴 수도 있다.


4.3. 2018시즌[편집]


2018시즌에도 개막 3연승을 시작으로 여전히 센트럴리그 최강팀 임을 입증하고있다. 물론 중간에 간혹 연패하는 경우도 있지만 적어도 같은 리그안에서는 적수가 당분간은 없을듯 보인다. 개막부터 중심타자 스즈키 세이야마루 요시히로 등 부상자가 속출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4월 하순부터 팀을 내내 리그 선두로 이끌었다. 하지만 한가지 흠이 있다면 올시즌 교류전에선 작년과는 다르게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특히 오세라 다이치크리스 존슨을 제외한 투수진이 집단 난조에 빠지며 거의 붕괴 직전까지 간 것은 일본시리즈 우승을 노리는 카프로서는 매우 염려스러운 부분으로 지적받았다.

하지만 교류전이 끝난 이후에는 다른 세리그 팀들과의 현격한 전력차를 다시 보여주며 1위 자리를 무리없이 수성했다. 구원진의 난조도 도미니카 아카데미 출신 육성선수 좌완 헤로니모 프랑수아가 셋업맨으로 자리잡으면서[8] 안정화. 팀을 구단 사상 최초의 센트럴리그 3년 연속 제패로[9] 이끌었다. 7월 초 서일본 지역에 호우가 발생해 히로시마 현의 각지에서 홍수와 산사태가 발생했고 오가타의 가족들도 피난하는 고난을 겪었지만, 27년만에 홈 구장에서 리그 우승을 확정지으며 재해로 상처받은 홈 팬들에게 큰 선물을 안겼다..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저서 '성공의 금언 365'는 오가타 감독에게는 성경과 같은 책이며 팀 운영에 많은 참고가 되었다고 한다. 4월초 세상을 떠난 팀 선배 기누가사 사치오에게 리그 우승과 일본 제일을 눈물로 맹세했는데 리그 우승은 성공, 이제 34년만의 2018년 일본시리즈 제패에 다시 도전한다.

심기일전으로 2년만에 다시 진출한 일본시리즈! 홈에서 먼저 열린 1차전에서는 양리그를 대표하는 강팀답게 팽팽한 승부가 계속되었고 끝내 8년만에 무승부 경기가 나왔고 2차전에서 타선이 선발 릭 밴덴헐크를 공략하여 먼저 1승을 챙겼다. 그러나 야후오쿠돔이 히로시마에게 악몽의 장소가 되어버렸다. 히로시마의 빠른 발을 앞세운 작전은 번번히 카이 타쿠야의 견제에 끊어졌고, 일본시리즈 홈경기 연승중[10]인 소프트뱅크는 3차전의 승리 이후 단숨에 기세를 몰아 3연승으로 시리즈 전적을 뒤집었다.[11] 그리고 6차전 선발로 나선 밴덴헐크도 두 번은 당하지 않았고, 이미 분위기를 내준 히로시마는 또다시 우승 문턱에서 좌절하고 만다. 지난 두 번의 포스트시즌 경기에서의 패배를 거울삼아 다시 도전한 일본시리즈였지만, 이번에도 통하지 않는 작전을 끝끝내 고수한 끝에 결국 승기를 놓쳐버렸다.[12]

5년 계약의 마지막해인 2019시즌을 앞두고 팀에서는 재계약 요청을 할 전망이다.


4.4. 2019시즌[편집]


20년만의 11연패를 기록하는 등 지난 시즌에 비해 고전하는 와중에 선수를 폭행해 물의를 일으켰다. 어찌된 일이냐면 6월 30일 디엔에이전 2-2 동점인 상황에서 대주자로 출장했다 11회초 1사 주자없는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노마 타카요시가 에드윈 에스코바의 3구를 받아쳤는데 투수 뜬공을 예상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천천히 달렸다. 헌데 이 공을 에스코바가 못잡았고 뒤늦게 이걸 본 노마가 전력질주를 했지만 토스아웃을 당하고 말았다. 결국 양 팀은 12회까지 점수를 내지 못하고 무승부로 경기를 마쳤다.

문제는 이 상황을 본 오가타 감독이 화가 잔뜩나서 노마를 감독실로 불러 싸대기를 여러대 때리는 등의 폭력을 가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7월 24일에 대대적으로 알려졌고 결국 구단 측으로부터 엄중경고 조치를 받았다고 한다. 히로시마 구단은 엄중경고를 내린 이유도 설명했는데 이전까지 폭행을 쓴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팬들도 화가 날만한 상황인건 이해하지만 폭력을 가한건 너무 나갔다는 반응.[13]

오가타 본인 입장에서 더 난처해진건 안그래도 요 근래 일본 내의 체육계 폭력을 뿌리뽑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는데 이 사건으로 이 목소리를 한층 더 증폭시킨 것이다.

이후에는 그냥저냥 2~3위를 왔다갔다 하면서 시즌을 치렀는데 시즌 막바지 한신과 주니치의 상승세로 3위자리를 위협받는 처지가 되었다. 주니치와의 시즌 최종전을 이기기만하면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이 확정되는 상황. 그러나 결국 최종전을 패하며 자력으로 3위를 확정짓지 못했다. 그리고 한신이 남은 3경기를 극적으로 잡아내며 4위로 시즌을 마감하게 되었다.

감독부임 첫 해인 2015년 이후 4년만에 다시 B클래스로 전락해버렸고[14] 상술했듯이 선수를 폭행한 사건까지 있어서 사실상 올해를 끝으로 감독직을 물러날 것으로 예상된다. 성적은 성적대로 못 내고 구설수에도 잠깐 올랐으니 구단 수뇌부가 좋게 봐 줄 리가 없다.

결국 예상대로 10월 1일이 되자마자 구단에 사임 의사를 표명. 5년간의 감독생활을 포함한 33년 히로시마 외길을 청산하고 팀을 떠나게 되었다.


5. 이후[편집]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닛칸스포츠의 야구 평론가로 활동중이며 객원 해설로도 종종 모습을 보이고 있다.

평론가 활동이나 해설 외에는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가 올림픽 종료 후 뜬금없이 차기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후보로 급부상했다는 기사가 떴다. 오가타의 나사빠진 단기전 운영을 3년 연속으로 지켜봤던 현지 야구팬들의 반응은 당연하게도 기겁하는 분위기. 실제로는 전 닛폰햄 감독인 쿠리야마 히데키가 선임됐다.

6.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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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이돌 출신 방송인.[2] 2016년 이전 카프의 마지막 일본 시리즈다. 그가 감독을 맡아 팀을 2016년 일본시리즈로 이끌었다.[3] 여담으로 1987~1998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뛰었던 동명이인의 외야수(한자가 다르다. 緒方耕一)도 1990년과 93년 시즌에 도루왕을 기록한 적이 있다. 심지어 두 오가타 코이치는 똑같은 1968년생이기도 하다.[4] 정규시즌 운용은 리그 컨텐더를 꾸준히 이끌 정도로 잘 했지만 선수 기용면에서 아쉬운 점을 드러내면서 항상 포스트시즌에서 발목을 잡힌 것이 유사하다. 다만 한용덕과 베이커는 선수 시절에 우승반지를 껴본 적이 있다.[5] 승패는 소프트뱅크와 같으나 맞대결에서 1승 2패로 루징시리즈를 기록하여 승자승에 따라 소프트뱅크가 우승.[6] 다른 한명은 1979~1980년을 우승한 고바 다케시.[7] 그것도 5회 강우 콜드로 거둔 승리이다.[8] 8월 한달간 일본프로야구 한달 최다경기 등판 신기록인 18경기에 등판하는 기록을 세우며 쌔빠지게 굴렀다. 6월에야 정식 선수로 계약해 후반기부터 뛰었음에도 47경기(2경기 선발) 65이닝을 소화했으니 풀시즌이었다면... 정말 빠른 페이스로 굴려진 것.[9] 이전까지 세리그에서 3연패(이상)을 한 것은 요미우리 자이언츠 뿐이었다.[10] 2011년 일본시리즈 7차전 이후 소프트뱅크는 일본시리즈 홈경기 9연승 중이었다.[11] 2013년 일본시리즈 7차전 이후 파리그 홈경기 15연승.[12] 사실 카프가 전통적으로 적극적인 주루플레이와 기동력을 중시해오기는 했지만, 그게 안 풀리면 주루사도 많고 도루성공율도 낮은 비효율적인 야구를 하는 때들도 있었다. 일본시리즈에서 그러한 문제가 대폭발한 것.[13] 더군다나, 노마 타카요시는 입단 당시에 오가타 본인이 직접 자신이 현역 시절에 사용했던 등번호 '37번'을 물려줄 정도로 아끼던 애제자였다.[14] 공교롭게도 게임차 역시 그때와 같은 0.5게임차이에다 3위팀이 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