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귀스트 콩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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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콩트
Auguste Com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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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98년 12월 31일
프랑스 알자스-로렌 몽펠리에
사망
1857년 12월 30일 (향년 58세)
프랑스 제국 파리
국적
프랑스 제2제국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신장
165cm
체중
68kg
모교
몽펠리에 대학교
에콜 폴리테크니크

1. 개요
2. 생애
3. 사상
3.1. 사회학
4. 평가
5. 여담
6. 영향을 미친 사람
7. 관련항목



1. 개요[편집]


실증주의의 신성한 공식은 다음과 같다. 원리는 사랑이며, 기본은 질서이고, 목표는 진보이다.

La formule sacrée du positivisme : l'amour pour principe, l'ordre pour base, et le progrès pour but. [1]

최초의 사회학자. 사회학의 시조. 실증주의 철학자. 주저에 《실증철학》이 있다. 콩트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과학적 방법으로 파악하는 것처럼 "사회현상"을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고, 이러한 사회학적 통찰이 사회의 정치적 문제들의 해결을 용이하게 하는 새로운 사회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2. 생애[편집]


어려서부터 학문적으로 총명함을 보였고, 프랑스의 이공계 최고 명문인 에콜 폴리테크닉에 입학하였으나, 교수와 마찰을 빚고 중퇴하였다. 그 이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는데, 처음에 공상적 사회주의 시조인 앙리 생시몽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후 여러 가지로 생시몽과는 사상의 방향이 달라 결별하고, 독자적인 사상을 전개해 나간다. 학벌주의가 지배하던 프랑스 학계에서 졸업장을 못 얻고 중퇴를 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연구직은 갖기 힘들었고, 자신의 아파트에 수강생을 모아서 강연을 하고, 저술을 하는 식으로 학술활동을 해나갔다.

훗날의 엄청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생전에는 가난에 찌든 불우한 인생을 살았고,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의 업적이 인정받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자국인 프랑스보다는 영국으로서, 서신으로 교류하던 존 스튜어트 밀에 의해 영국학계에 큰 자극을 줌으로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현재도 실증주의는 프랑스 철학보다는 영미사상의 주류가 되고 있다.


3. 사상[편집]



3.1. 사회학[편집]


과학으로부터 예측이, 예측으로부터 행동이 나온다.

Savoir pour prevoir et prevoir pour pouvoir.

〈실증철학〉 중

콩트에 의하면 인간의 지적 발전은 3단계를 거쳐왔다.
  1. 신학적 단계
  2. #2 형이상학적 단계
  3. #3 실증적 단계

수학과 물리학과 생물학은 신학적, 형이상학적 사유에서 벗어난 과학으로서, 그가 살던 시대에서도 이미 실증적 단계에 들어왔다고 보았다. 하지만 인간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학문들은 여전히 신학적, 형이상학적 사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콩트는 생각했다. 그래서 콩트는 이 학문을 실증적, 과학적 단계로 발전시키고자 마음먹었다. 그는 이 관점에서 실증적 사회과학을 옹호했고, 그것은 그에 의해 "사회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2]

실증적(positive)이란 말은 다분히 신학적, 형이상학적 사변을 겨눈 용어이다. 그것은 경험적이고 객관적이며 반-사변적이다. 실증적 학문은 지각 가능한 현상들과 경험적 연구를 통해 확정될 수 있는 법칙적 연관 관계에 집중한다. 사회학은 사회에 관한 자연과학이 되어야 하며, 가능한 한 물리학을 모델로 구축되어야 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체계적이고 가르치기 좋다는 의미에서도 '실증적'이다.[3]

그는 사회 구조(질서)와 사회 변동(진보)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자신의 연구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두고 각각 사회 정학(social statics)과 사회 동학(social dynamics)이라 일컫기도 한다. 사회 정학은, 사회의 전체와 부분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부분만 관찰해서는 안되고 그 부분들 사이의 관계적 질서를 연구한다. 사회 동학은, 사회는 여러 부분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으면서 역사의 움직임에 따라서 하나의 균형에서 다른 균형으로 이행하기 때문에 이런 균형 상태의 계열적 변화를 지배하는 법칙을 연구한다.

콩트는 당시 새로운 풍조로 떠오르던 개인주의가 사회를 분열시킨다고 보아서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종교개혁과 계몽주의는 "서구 세계의 질병"인 개인주의를 퍼뜨려서 도덕적 위기를 초래했다. 이 "질병"의 주요 증상은 인민주권, 평등, 개인의 자유와 같은 이념들과, 이와 병행하여 나타나는 가족, 종교, 교회 및 공동체에 대한 부정적 견해들이었다. 이 개인주의는 또한 홉스에서 칸트로 이어지는 전통에서, '분리된 개인'을 바탕으로 한 사회계약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콩트는 사회가 '선이 점들로 분해될 수 없는 것'처럼 분리된 개인들로 분해될 수 없다고 보았다. 사회는 오직 집단과 공동체로 분해될 수 있을 뿐이다.[4] 그는 그의 '사회학'이 중세의 가톨릭교회와 유사한, 새로운 사회의 준종교적 통합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5]

그렇다면 콩트는 보수적 복고주의 사상가인가? 콩트는 두 가지 점에서 보수적 복고주의 사상가들과 구분된다. 첫째, 그는 사회 통합적 힘으로서 로마가톨릭교회의 사상을 거부했다. 보수주의 철학자들은 가톨릭적인 원칙들로 복귀하기를 원했지만, 콩트에게 이러한 원칙들은 인간의 지적 발전 단계 중 과거 시기에 속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실증주의적 원칙들에 의해 대체되어야만 할 것들이었다. 둘째, 콩트는 자연과학과 근대적 테크놀로지에 대하여 복고주의 사상가들보다 훨씬 열린 태도를 취했다. 사회에 대한 자연과학으로서 사회학은 새롭고 효율적인 사회 테크놀로지의 토대를 형성해야 한다. 사회학은 사회가 다시 질서 있고 잘 통합된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사회를 이끄는 도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4. 평가[편집]


그가 주장했던 여러 주장들은 여러 학문으로 세분화 되었고 그가 썼던 단어들은 낡은 인상을 주는 것으로서 잊혀져가는 경향이 다분하다. 더군다나 말년의 종교적 행보에 이르러서는, 그의 초기 추종자였던 존 스튜어트 밀허버트 스펜서 등이 등을 돌리거나 무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콩트를 잊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사회학을 하나의 학문으로 바라보고, 과학적 방법론으로 인간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회학은 비로소 협의의 인문학과 분리된, '인간(사회)에 대한 학문'으로서 독자적인 자리매김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뒤르켐, 베버 등을 거치며 사회학은 사회과학으로 더욱 탄탄하게 자리 잡게 된다.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는 사회과학이 과학인지 그리고 과학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장구한 과학철학 논쟁과 경제학, 심리학, 물리학 등 인접학문들끼리의 영역 다툼, 그리고 사회학 제국주의 논쟁에 이르기까지, 근대 이후 전개되어온 사회학 관련 논쟁들을 볼 때, 사회학은 물론이거니와 지성계 전체가 콩트에게 나름의 빚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5. 여담[편집]


  • 사회물리학이 사회학이 된 데에는 콩트의 작은 공명심이 영향을 주었다. 콩트가 벨기에의 사회통계학자 아돌프 께틀레(Adolphe Quetelet)가 사회물리학이라는 용어를 도용하고 있다고 생각한 끝에, 자신만의 용어를 만들기 위해 새롭게 조형한 용어가 바로 사회학이다. 오늘날에 와서 사회물리학이라는 단어가 물리학 기반의 사회 연구자들에 의해 다시 돌아오고 있는 것을 보면 콩트가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고 해야할까.

  • 콩트는 친구나 동료 연구자가 얼마 없었는데, 이는 그의 학문적 발전에 한계가 되었다. 다른 분과 학문의 전문가들은 자신의 학술체계에 자신들의 분야를 모두 포섭하려는 콩트의 시도를 경멸했다고. 물론 친구가 없는 게 이런 이유에서만은 아니었다. 인간성에 큰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례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대표적인 일로는, 자신을 1년동안 무상으로 후원해 주던 존 스튜어트 밀이 불가피한 사정으로 후원을 중단하자 그 동안 받은 후원은 아랑곳않고 밀을 비난하고 모욕하며 후원을 재개하라는 편지를 보낸 사건을 들 수 있다. 그 때 밀은 자신의 다른 친구들에게 콩트의 후원을 이어줄 것을 부탁하고 다니고 있었다.

  • 학생 시절엔 요즘 식으로 따지면 운동권이었다. 정확히는 완고한 공화파. 젊었을 적 활동의 영향인지 그는 평생 '질서'와 '진보' 두 축을 하나의 체계 안에 통합시키고자 시도했다. 역시나 싸움닭 기질이 있었는데, 아무리 상황이 열악해도 자신의 적들과 싸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 인류교라는 종교를 창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마흔 일곱 살 되던 해에 클로틸드라는 서른 살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하필 플라토닉 러브가 지속된 지 1년만에 클로틸드가 폐결핵으로 사망. 너무 큰 드라마를 찍어서 성격이 바뀐 건지, 남은 평생을 보편적 사랑의 힘을 전파하는 대사제(...)가 되기로 했다. 차가운 도시의 실증주의자 콩트의 이런 급격한 변화에 그를 지지하던 지적 동료들도 떠나가버렸지만, 새롭게 생긴 제자들에 콩트는 만족했다고 한다.

  • 1835년에 "과학자들이 지금까지 밝혀진 모든 것을 가지고 풀려고 해도 절대 해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가 있다. 그것은 별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하는 문제다." 라는 말을 남겼는데 그가 죽고 2년만에 분광기를 이용한 스펙트럼 분석을 통해 별의 구성성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분젠과 키르히호프가 태양광의 스펙트럼을 분석해 태양에도 지구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펑범한 원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다만 수소가 주된 구성성분임을 알아낸 것은 좀 더 훗날의 일이다. 천문학에서 분광 관측의 중요성을 언급할 때 종종 거론되는 일화 중 하나이다.

  • 브라질의 국호 '질서와 진보(Ordem e Progresso)'는 콩트가 만든 격언을 가져다 쓴 것이다. 브라질 제국을 전복시킨 군부와 사회 전반에 실증주의 추종자들이 많아 국기에 그의 격언이 삽입되었다. 실증주의는 브라질 외에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6. 영향을 미친 사람[편집]




7. 관련항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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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구절에서 브라질 국기의 모토인, '질서와 진보'(ordem e progresso)가 나왔다.[2] "사회학"이란 용어는 그가 그전에 사용했던 사회물리학physique sociale이란 말 대신 사용하기 위하여 『실증철학강의』에서 도입한 용어이다.[3] 다만, 알아두어야 할 것은 콩트가 말하는 '실증주의'의 개념은 현재의 실증주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콩트가 스스로 정의하기에 자신의 실증주의적 태도란 '공상주의와 반대되는 의미에서 실제적인 것', '맞닥뜨린 환경을 지속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건전한 성찰에 필요한 진정한 목적'을 의미한다. 오늘날 사회학자들이 실증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사회적 사실을 다루는 데 있어 자신의 가치판단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경험과학적으로 엄격하게 사실과 관찰을 중시'한다는 의미이다. 이 당시 콩트가 실증주의라고 부른 것은 사회학을 과학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오늘날 쓰이는 의미에서의 실증주의는 콩트의 사회학 전통이 아닌 막스 베버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다. 다만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것과 구분이 모호하던 초기 사회학의 발생에서 콩트가 과학적인 태도를 주장하였기에 사회학이 독립 분과로 나타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4] 콩트에 따르면, 이 집단 중 가장 근본적인 집단은 '개인'이 아니라 '가족'이다.[5] 이러한 견해는 콩트의 후기 저술에서 더욱 뚜렷하게 부각되는데, 이 시기 콩트의 실증주의는 마치 복고주의적 가톨릭 교리가 새로운 세속적 언어로 표현되어 나온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더욱이 말년에 "인류교"를 창시했는데, 많은 지지자들을 얻었고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미국에 "교회들"이 설립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