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극렬 (r2020030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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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克烈
1930년 1월 7일 ~
1. 개요
2. 생애


1. 개요


북한군인정치인.

2. 생애


중국 지린 성에서 김일성의 측근 중 한 사람인 오중성[1]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복 후 가족들과 북한으로 돌아와 만경대혁명학원에 입학했고, 한국전쟁 시기에는 조선인민군 공군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전후에는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뒤 1962년에 소련프룬제 군사대학에서 2년 동안 유학했다.
귀국 후에는 공군 소장(한국군준장에 해당함)으로 진급해 장성이 되었으며, 동시에 김책공군대학 학장으로 부임했다. 3년 뒤인 1967년에는 중장(한국군의 소장)으로 한 계급 더 올라 조선인민군 공군사령관 자리를 얻었으며, 동시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직도 겸임해 정치 이력도 시작했다.
이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직을 기수 별로 계속 겸임하면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과 부총참모장(한국군의 합동참모차장)을 거쳐 1979년에 조선인민군 총참모장(한국군의 합동참모의장)이 되었다. 김일성 외에 후계자로 권력을 장악하게 된 김정일과도 괜찮은 관계여서 1980년대 들어서도 계속 승진을 거듭해 상장(한국군의 중장. 1980), 대장(1985)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오극렬은 정치위원 제도가 야전 사령관들의 지휘권을 지나치게 제한한다고 생각했는지, 김정일에게 이 제도를 폐지 혹은 약화시킬 수 없는지를 물었다고 한다. 김정일은 처음에는 이에 호응했지만, 김일성에게 이 문제를 건의했다가 개갈굼을 당한 뒤 결국 포기했다. 애비에게 한바탕 깨진 김정일은 이후 오극렬을 시범 케이스 삼아 총참모장 직책에서 해임하고, 조선로동당 민방위부 부장이라는 한직으로 좌천시키는 선에서 이 문제를 마무리지었다. 나름 정치장교의 문제점을 자각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군사적 안목은 있는듯 하다. 애당초 프룬제 아카데미가 공산권 최고의 군사교육기관으로서 거기에서 제대로 공부했다면 군사적 능력은 준수하다고 봐야 한다.
그 이후로는 거의 20년 동안 존재감이 없는 고령의 장성으로 맴돌았지만, 2009년 2월에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면서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는건 훼이크고, 군 내 실권자들이자 자기보다 후배인 리영호김영춘 등에 밀려 여전히 퇴물 장군 취급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느 정도 존재감은 있는지, 김정일 사후 국가장의위원회에 이름을 올렸고 조선로동당 제4차 당대표자회의에서 당 중앙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되는 등 형식적이나마 계속 고위직을 지키고 있다. 단, 주성하 기자의 주장에 따르면 총참모장 직을 그만 둔 뒤 민방위부 부장으로 간게 아니라 진짜 실세인 로동당 작전부장으로 가서 20년간 자신의 소왕국을 만들고 세도를 부렸다고 한다.#
한국전쟁 참전 경력에 김일성 측근의 아들이라는 배경도 있어서 정치적/군사적 영향력이 꽤 강한 인물이었고, 특히 공군사령관과 총참모장 시절에는 보급과 복지에 나름대로 신경쓰는 모습을 보여주어 군 내부에서는 꽤 신뢰도가 높았다고 한다. 군사적 성향은 대남 강경책을 주로 쓰는 매파로 분류되고 있고, 소련 유학 경험 때문인지 미사일 등 최신 무기 체계의 도입에도 적극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또 서방의 북한 통들은 매우 정교한 달러 위폐인 슈퍼 노트의 제작 책임자가 오극렬이라고 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군사적 문제에 너무 신경쓰다 보니 정치력 면에서는 조명록이나 오진우 같은 후빨 전문가라이벌들에게 발리는 형편이었고, 결정적으로 정치위원 문제를 대담하게 제시했다가 데꿀멍한 경력 때문에 이빨 빠진 호랑이 취급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다른 라이벌들이 차수 혹은 조선인민군 원수까지 진급할 동안 여전히 대장에 머물고 있는 안습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래도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 과정에서 계속 살아남은 인물이고, 이 과정에서 리영호의 숙청과 김영춘의 한직 좌천 등 군부 내 기존 실권자들이 버로우하는 데도 여전히 별다른 타격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면 나름대로 기반을 계속 굳건히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계급은 여전히 대장 찌끄레기
2012년 3월 8일에 국제 여성의 날 기념으로 평양대극장에서 개최된 은하수관현악단 음악회에서는 다른 주요 인사들처럼 무대로 불려나와 가족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는데, 부축을 받으며 나왔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건강은 별로 좋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뒤로도 빈도 수는 최룡해김정각, 현영철 등 여타 군 최고위 장성들 만큼은 못하지만 계속 김일성/김정일 동상 제막식이나 정치 집회, 군 관련 행사, 예술 공연 등에 꼬박꼬박 얼굴을 내밀고 있다.
2013년 12월 장성택이 처형당하고 그 수하들도 줄숙청을 당한 여러 경제기관의 빈 자리를 오극렬 일파가 빼앗으면서 다시 권력 전면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다만 치매가 왔다는 이야기도 있으므로 오극렬 일파도 그와 함께 몰락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다.
김종학 피디를 몰락시키고, 이병헌의 암흑기를 상징하는 백야 3.98이라는 드라마에서는 그를 모티브로 한 오국철 대장이 등장한다.
2018년 9.9절 열병식에서, 육군 대장 예복을 착용한 채 모습을 보였다. 직위를 맡고 있는 대장, 상장들과 달리 계급만 유지한 軍원로석에서 이용무, 김정각 차수와 함께 열병식을 관람하였다.

[1] 오중성은 다른 4형제들과 함께 빨치산으로 활동해 '유격대 오형제'로 알려져 있고, 그 중 오중흡은 (북한의 선전에 의하면) 김일성을 지키려다가 일본군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혁명투사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북한군에서 특별한 공을 세운 부대에게 주어지는 명예칭호인 오중흡 7련대 칭호가 이 자의 이름을 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