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전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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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국 전국시대 명장, 병법가, 정치가.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전략전술의 귀재 중 한 명으로 오기(傲氣)도 많았고, 인간적으로는 너무나도 차가운 냉혈한이었지만 병사들의 상처를 친히 입으로 빨아 주었다는 유명한 일화를 생각하면 상당히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인물. 일생도 꽤나 극적이었다.
우연의 일치로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을 뜻하는 동음이의어 오기의 뜻에 맞게 파란만장하고도 오기있는 삶을 살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실제로 오기의 삶을 보면 진정한 오기란 이런 것이다 싶을 정도. 오기의 처절하고도 섬뜩한 독심과 비정함까진 배울 필욘 없어도, 여러차례 모함을 받으며 자리에서 쫓겨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그야말로 오기있게 살았던 것만큼은 후대의 사람들에게도 의미심장하다.
2. 생애[편집]
2.1. 젊은 시절[편집]
얼마나 오기(傲氣)가 셌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어렸을 적 자기보다 더 강한 깡패를 상대로 덤볐다가 곤죽이 되도록 맞았다. 그런데도 오기는 다음날 깡패를 다시 찾아가 도발했고, 또 전날처럼 죽이 되도록 맞았다. 오기는 이후에도 단념치 않고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계속 깡패를 쫓아다니면서 덤볐고, 결국에 밑도 끝도 없는 오기에 지친 깡패는 마지못해 싸움에서 져주었다.
별다른 수입없이 백수생활을 하는 터라 벼슬을 구하려고 명망있는 사람들에게 연줄을 대기 위하여 1,000금을 날리는 바람에 아버지는 홧병으로 돌아가시고,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자, 홧김에 칼을 들고 가서 평소에 비웃던 사람 30여 명을 찾아내어 차례차례 모두 살해했으며, 이런 끔찍한 죄악을 저질렀으니 도주해야 했다. 떠날 때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긴 어머니가 크게 꾸짖자, 어머니 만류에도 팔을 물어뜯어 피를 흘려 그 피로 재상이 되기 전까진 찾아오지 않겠다고 어머니께 맹세했다고 한다.
한때 공자의 제자인 증삼의 아들 밑에서 수학한 적이 있었으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공부에만 열중했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스승이 묻자 어머니와의 약속을 언급하며 자신을 변호했고[1] , 효를 중요하게 여기는 유가 사상의 특성상 그는 증삼의 가문에서 계속 공부를 할 수 없어 결국 쫓겨났다. 더불어 효를 중시하는 유가의 기준에서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피의 맹세를 했다'는 자체가 탐탁지 않았는데, 하물며 부모 장례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면야... 거기다 증삼은 공자의 제자이면서 효자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결국 오기는 유학을 버리고 병법을 익혔다. 그리고 그는 노나라에서 벼슬을 얻었는데, 마침 제나라가 노나라를 쳤다. 그런데 노나라 조정에선 오기의 재능을 알면서도 그 아내가 제나라 출신이라 선뜻 그를 장군으로 쓰기를 꺼렸다. 이를 들은 오기는 주저없이 아내의 목을 베고 대장군의 자리에 오른 다음 노나라에 침입한 제나라를 상대로 한 싸움에서 승리했다.
오기는 자신이 출세하기 위해서는 아내를 죽여야 함을 깨닫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집으로 돌아가 아내에게 장군으로 승진한다고 했다. 같이 고생한 나날이 오래되었던 터라 그의 아내도 기뻐하였다. 그가 "정말 내가 장군이 되면 좋겠소?" 하고 묻자, 아내는 당연하지 않냐고 했다. 그러자 오기의 얼굴이 일순간 싸늘해지며 "그렇다면 어쩔 수 없소." 하며 아내를 죽였다.[2] 비록 그는 제나라 군대와의 싸움에서 큰 전공은 세웠으나 대장군에 기용되기 위하여 아내를 죽인 일과 아내를 죽여놓고, 아내의 고국과의 전쟁에서 처가를 거론하며 휴전하자고 제의하고는 기습을 한 일이 빌미가 되어 노나라에서 쫓겨났고, 위나라 문후(文侯)를 만나 장수로 기용된다. 바로 이 부분이 바로 《오자병법》의 도입부다. 문후가 '난 평화를 사랑해서 그대는 필요없소'라고 말하자 오자가 '가죽 모아다가 갑옷을 만드는 데 쓰고, 대장간마다 병장기 만드느라 분주한 것을 이미 다 보아 두었으니 거짓말은 마시오'라고 하자 바로 문후는 할 말을 잃었다.
2.2. 조작된 오기의 악행?[편집]
하지만 오늘날의 학계에서는 초년기 오기의 악행이 조작되었거나 과장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없지 않다. 이것이 일리가 있는 것이, 위에서 언급된, 마을 친구 30명 싸그리 도륙내기, 어머니 장례 생무시, 고생과 행복을 함께한 아내의 목을 쳐버림... 등등의 냉혈하기 짝이 없는 일화가 모두 《사기(史記)》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에 있는 어떤 노나라 사람이 오기를 비방한 말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20세기 후반이나, 21세기에 들어서서 제기된 설이 아니라 20세기 중엽의 학자 곽말약(궈모뤄)이 이 문제를 제기한 바 있고, <술오기>(述吳起)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아예 오기의 악행이 봉건 귀족들에 의해 조작, 왜곡되었다는 견해를 주장한 바 있다. 《사기》 외의 다른 문헌에서는 이와 같은 일화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3] . 오히려 《한비자》(韓非子), 《여씨춘추》(呂氏春秋) 등 전국시대 당대의 문헌에서는 오기를 권세와 재물에 초연한 현자와도 같은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즉 오기의 악행이라고 기록된 일화들은 한나라 시대에 편찬된 사서인 《사기》 외에는 전국시대 당대의 문헌들과 교차검증이 안 된다는 얘기다.
특히 《한비자》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吳起之出愛妻, 文公之斬顚頡, 皆違其情者也。
오기(吳起)가 사랑하던 아내를 쫓아내고 문공(文公)이 전힐(顚頡)[4]
를 벤 일[5] 은, 모두 그들 인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故能使人彈疽者, 必其忍痛者也。
그러므로 남에게 등창[6]
을 보이고 따게끔시키는 자는, 반드시 그 아픔을 견뎌 낼 수 있는 자인 것이다.
이는 《한비자》에서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는데, 오기가 아내한테 허리띠를 짜 달라 했는데 '국정 허리띠 치수'에 맞지 않아서 다시 짜 달라하고 외출했다. 아내는 "이미 날실을 넣고 짜서 고쳐 짤 수가 없습니다"하면서 그대로 짜 버리고는 내놓았다. 이 일 때문에 오기는 아내와 이혼했다. 쫓겨난 아내가 친인척 중 하나에게 자신 대신 용서를 빌어달라 부탁을 했는데, 이 양반이 말하기를 "오기는 법을 지키는 사람이라서 법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왕에게까지 이르는 공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자기 마누라한테부터 그렇게 함으로써 법을 실천하겠다는 거니까." 또 다른 일화에서는, 오기가 아내한테 허리띠를 짜달라했는데, 어쩐지 옛날에 짜줬던 허리띠보다 잘 만들어졌다. 왜 잘 만들었냐고 아내한테 따지니 이번엔 특히 정성을 들여서 짰다고 대답했다. 근데 오기 이 양반 왈: "난 저번 거랑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정성들여 잘 만들다니!"
한비자가 인용한 일화에서 오기는 법치의 실현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아내를 쫓아낸 철인 정도로 그려져 있다. 물론 한비자나 사마천이나 딱히 어느 쪽에 지대한 신빙성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서도, 적어도 《사기》의 험담이 꼭 사실에 부합함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만 이건 딱히 사마천이 악감정을 품어서 오기의 이미지를 왜곡했다기보다는 사기를 편찬할 무렵 오기에 대한 남은 기록은 여러 종류가 있었고, 이를 취합 편집하는 과정에서 기록간 모순이 생겼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7] 오히려 오기와 피터지게 싸워 그를 진짜 원수로 여겼을 진나라 사람들이 쓴 《여씨춘추》에서도 오기는 이렇게 평가되고 있다.
숨은 낌새와 드러난 외양이 파악하기 쉽든 어렵든 성인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일이 없지만 보통 사람들은 알아차릴 길이 없다. 알아차릴 길이 없으면 보통 사람들은 "신기하다", "요행수다"라고 한다. 그러나 신기한 것도 요행수도 아니고, 그 이치상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후성자와 오기는 성인에 가깝다.
다만 사람이 어느 한 면만 가진 것이 아닌 다면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동물이라는 점과, 제3자가 평가한다 해도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이 본 모습만 가지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니까 사서에 기록된 오기의 모습이 딱히 미화나 폄하된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실제 오기의 모습일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혹자는 사마천이 법가를 싫어해 일부러 왜곡했다고 하나 사마천이 오기 사후 236년 후 인물이란 걸 생각해야 한다. 아무런 원한도 없는 인물을 굳이 왜곡할 이유가 없을 뿐더러 당시 시점에서도 1500여년 전이라 기록이 거의 없었던 상나라의 왕계도를 완벽에 가깝게 복원한 고증의 대가란 걸 생각하면 왜곡설은 초라해진다. 또한 사마천이 참고했을 수많은 사료 중 2000여년이 넘은 현재 여씨춘추, 전국책, 한비자 같은 지금까지 전해지는 서적들 말고도 역사서에 이름도 안 남았을 전국시대의 기록을 감안해보면 왜곡설이야말로 기록을 선택취사했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남아있는 《오기병법》 등의 사료에 있는 오기의 직설적인 면모를 들며 이런 사람이 어떻게 기회주의자나 위선자라고 할 수 있냐는 사람도 있지만 이런 시선이야말로 오기를 한가지 시선으로만 바라다 보는 편견일 뿐이다. 사람은 관계가 먼 사람일수록 경계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친해지면 모를까 아첨부터 한다고 의외로 쉽게 넘어오지 않는다.[8] 특히 왕을 비롯한 상류층일수록 이런 기회주의자나 사기꾼을 많이 접해볼 기회가 많기 때문에 사람을 보는 안목이 보통사람에 비해 탁월할 수밖에 없다. 타국에서 천거받아 온 사람인 오기 입장에선 자신의 실력부터 증명해야 앞날이 밝기 때문에 왕 앞에서도 직설적이면서도 사실에 기반한 발언으로 "나는 입만 산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당신에게 찍힐 위험성을 감수하면서 이런 발언할 정도로 실력있고 믿음직한 사람이다"란 걸 어필했어야 했고 실제로도 실력을 증명했기에 출세가 가능했던 것이다.
당장 밑단락에 나오는, 병사들에 대한 처우에서 볼 수 있듯이 오기는 자신한테 필요하다 싶으면 주변의 평가는 아랑곳하지 않고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과거를 아는 사람은 위선적이라고 평가하겠지만, 그런 과거를 알 리 없는 병사들 입장에서 오기는 말 그대로 성인 그 자체로 보일 수밖에 없다. 오기를 성인같이 묘사한 진나라의 기록은 이런 병사들이 좋게 평가한 것을 적국에서도 이런 면모는 인정하고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기록을 보면 병사들 뿐만 아니라 주변의 인사에게도 필요하다 싶으면 적극적으로 인간적 대우를 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렇게 되면 호의를 받은 사람 측에서는 좋게 평가하지 나쁘게 평가하지는 않는다. 기록에 남아 있는 서로 상충하는 기록은 세월 탓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오기 그 자신의 처신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2.3. 명장의 면모[편집]
오기는 진(秦)나라의 동진을 막기 위한 요지인 서하(西河)로 부임해 이곳에 성을 쌓고 군사를 조련했다. 서하는 위나라가 서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필요했던 요충지였다는 점과, 문후가 승하했을 때 오기가 사흘을 통곡했다는 것으로 말미암아 문후가 오기의 재능을 간파하고 그를 요충지로 보내어 그가 지닌 능력에 맞는 대우를 해줬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리고 오기는 진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노려 침공을 개시하였고, 다섯 개의 성을 빼앗는 전공을 세웠다.
오기는 무졸(武卒)이라는 정예 중보병을 양성하였다. 《순자》에 따르면 무졸은 중무장을 하고 창과 방패, 칼, 무거운 쇠뇌, 쇠뇌살 50개, 3일치 식량 등을 완전군장한 채 100리를 행군하는 정예부대였다. 이들은 혹독한 훈련만큼이나 엄청난 혜택을 받았는데 논과 밭, 집은 물론이고 심지어 퇴직하면 연금까지 받았다. 덕분에 무졸의 병사가 되면 노예는 평민이 되고 평민은 부자가 된다고 할 정도였다.[9]
이렇게 오기가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와 대치할 무렵 그가 세운 전적은 명실공히 불패였다. 덧붙이자면, 공을 세우지 못한 예비병들로 급조된 5만명의 부대로 50만의 진나라 군대를 상대로 승리하기도 했다. 이것이 기원전 389년에 벌어진 후세에 음진(陰晉) 혹은 양진(陽晉)의 싸움이라고 불리는 전투이다. 서하에 말뚝박고, 이를 전진기지삼아 지속적으로 진나라를 압박하는 위나라를 축출하기 위해 대규모로 군사를 일으킨 진군을 오기가 격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군이 50,000명의 병력으로 10배의 병력을 물리쳤다는 구체적 숫자가 기록된 것은 《오자병법》인데, 과장이 섞여있긴 하겠지만 이후로 관서가 텅텅 비었다고 할 정도로 진나라는 엄청난 타격을 입고 빈사상태에 빠진다.
오기는 수십만이 동원된 큰 전투만 76회를 치른 결과 그중 64회를 승리로 이끌었고, 나머지 12회는 무승부를 기록했다. 다만, 이때의 진나라는 상앙의 개혁이 있기 전이라 다른 나라들이 벌벌 떠는 원톱 자리는 먹지 못했다는 점은 참고할 필요가 있다. 기원전 389년, 음진 전투로 진나라의 기둥 뿌리를 뽑았던 오기는 기원전 387년, 진나라 영내에 더 깊숙히 쳐들어가 승리했으나 이내 모함을 받고 초나라로 망명한다.
이후 기원전 386년, 진나라를 이어받은 진출공이 변란에 휘말리고, 진나라의 혼란기가 계속되었음을 감안하면 오기와 위나라 양측에게 대단히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오기가 진나라를 쳐발랐는데도 오기가 떠난 이후로 야금야금 서하 전역의 땅을 갉아먹히던 위나라는 결국 서쪽에 치우쳤던 수도인 안읍을 동쪽의 대량으로 천도하기에 이른다. 서하 땅에서 황하를 건너면 바로 안읍이 위치해 방위에 불리했기 때문이다.
이후 위나라는 기원전 342년 마릉 전투에서 결정타를 얻어맞아 완전히 몰락하고, 상앙의 변법에 힘입어 진나라는 서하뿐만 아니라 옛 수도인 안읍을 포함한 위나라의 서쪽 영토를 완전히 정복하고야 말았다.
그가 위나라에서 밀려난 이유는 왕실과 인척이 되기 위한 혼인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출세길에 오르고자 스스로 아내의 목을 친 그의 무자비한 면모나, 여자와 재물을 꺼리지 않았다는 악평이 자자했지만, 의외로 장수로서 군대를 통솔할 때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한 병사가 등에 종기가 났다는 보고를 듣자 그 병사를 찾아가 입으로 고름을 빨아준 이야기가 바로 그의 다른 면모였다. 그런데 그 병사의 어머니는 이러한 소식을 듣고는, 남편도 오기의 그런 행동에 감동받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다 전사했는데, 이젠 아들마저 오기를 위해 싸우다 전사하게 생겼다며 오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러한 오기의 인간적인 면모를 두고 오기가 진심으로 휘하 병사들을 아꼈다기보다는, 자신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울 병사들을 만들기 위한 용인술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러한 일은 요즘 군대에서도 보기 힘든 일인데, 그 당시에 이런 일이 있었다면 사람들이 받은 감동은 엄청났을 것이다. 이건 절대 빈말이 아니다. 오늘날의 군대에서 군 내부의 계급 차이 때문에라도 이런 일화는 있기 어려운 것인데, 당시에는 신분 차이도 있는데다 전반적으로 계급의식이 더 강하던 시절이니 더 말 할 필요가 없다.[10] 더하여 오기는 병졸들과 똑같이 입었고, 똑같은 음식을 먹었으며[11] , 똑같은 조건의 잠자리에서 자고, 행군할 때에는 수레에서 내려 같이 짐을 지고 걸었다고 한다.[12] 군참에 병사가 우물을 다 파기 전까지는 장수는 목 마르다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오기는 그런 점에서 실로 현명한 통솔자였다.
이러한 오기의 일화는 군대에서 정훈교육 시간이나 지휘관이 훈화하는 시간 등에 단골로 언급되며, 같은 이야기가 《육군 수양록》에도 짤막하게 실려 있다. 하지만 아내를 죽인 일화나 어머니의 죽음을 묻어둔 채 무덤조차 찾아가지 않았던 사실, 그리고 병사를 선대했던 오기의 본심은 언급되지 않아서 오기를 그저 병사들에게 자애롭던 훌륭한 장군 정도로 알고 있던 군필자들은 나중에 오기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듣고 나서 놀라기도 한다.
여담으로 문후는 악양이란 장수도 등용했는데, 악양은 중산국 정벌 때 그곳에서 벼슬살던 그의 아들이 고깃국이 되자, 거리낌 없이 그 국을 마셔버리고 공격을 계속한 일화로 유명하다. 훗날 제나라 전역을 유린한 연나라의 명장 악의가 바로 악양의 손자였다. 독하기로는 악양도 오기 못잖았던 셈인데, 악양은 중산국 정벌 후로 다시 중용되지 않았지만 오기는 위나라에서 꽤 오래 활동했다.
비록 군사는 아니지만 서문표 역시 문후 시대의 인물이었는데, 하백 신앙 때문에 인신공양을 하던 마을을 개혁한 것으로 유명하다. 상당히 인재풀이 좋았던 시기였다 할 수 있다.
2.4. 위나라를 떠나다[편집]
이후 문후가 승하하고 무후(武侯)가 즉위했다. 오기는 문후의 뒤를 이어 무후도 섬겼다.
하루는 무후가 뱃놀이를 나갔다가 주변 경치를 보며 '강산의 험난한 지세는 위나라의 보물이다' 하고 감탄했다. 그러자 오기는 '하나라 은나라도 험난한 터에 나라를 세웠으나 결국 왕이 덕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지형에 의지하지 말고 왕은 덕을 닦으십시오' 하고 왕에게 간언했다.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오기는 더하여 '덕을 쌓지 못한다면 이 배에 있는 사람들이 언제 왕의 적이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라며 더 적극적인 간언을 해서 무후와 사이가 틀어졌다. 그러나 무후는 오기에게 계속 서하를 맡겼다.무후가 스스로 정사(政事)를 긍휼히 여겨 조정에서 나올 때마다 기쁜 빛을 띠었다. 이때 오기가 고했다.
"이제껏 초 장왕의 얘기를 말해준 신하가 있었습니까?"
무후가 답했다.
"모르오."
오기가 고했다.
"초 장왕은 자신이 나라를 다스리는 나랏일에 신하가 끼어들 틈이 없었으나, 매우 근심했습니다. 무신(巫臣)이라는 사람이 그 이유를 물으니 장왕이 말하기를 '은나라의 중훼(仲虺)가 이르기를 제후가 그 스승이 될 만한 자를 얻으면 왕자가 될 만하고, 좋은 벗이 될 만한 자를 얻으면 패자가 될 만하며, 의심을 풀어줄 자를 얻으면 유지할 만하나, 나서서 계획하나 신하가 감히 따르지 못하는 사람은 망할 만하다 했는데 나는 망할 운명인가 보오…' 하였습니다."
오기가 다시금 고했다.
"장왕은 그것을 근심하였는데 지금 주군은 그것을 기뻐하시는군요."
이에 무후가 몇 걸음 물러나 두 번 절하며 말했다.
"하늘이 선생으로 하여금 과인을 깨우치게 하는구려!"
《순자》 〈요문(堯問)〉
무후는 새로 재상 자리를 만들고 전문(田文)[13] 을 앉혔다. 오기는 평소 자신의 공이 높다고 자부했기 때문에 내심 불복하고 전문을 찾아가 누가 더 잘났는지 따졌다. 비록 전문이 차분하게 타일러 납득하게 되었지만. 오기와 전문이 이를 논한 것은 다음과 같다.
훗날 전문이 죽고 부마 공숙좌(公叔痤)가 그 자리를 이었는데, 오기를 못마땅하게 여겼다.[15] 공숙좌는 오기를 몰아낼 계락을 만들면서 무후를 설득했다. '오기 같은 인재를 붙잡아 두려면 공주를 시집보내야 한다. 만약 위나라에 뼈를 묻을 각오라면 부마가 될 테고, 다른 꿍꿍이가 있다면 사양할 것이다.' 그리고는 공숙좌는 오기를 부르고는, 일부러 부인(공주)을 자극해서 개작살이 나는 추태를 연출한다. 이 광경을 본 오기는 식겁해서 부마 자리를 사양했고, 무후는 오기를 의심하게 되었다. 결국 오기는 초나라로 떠나게 된다.[16]"병사를 지휘하면서 사기를 드높이고 적국이 감히 넘보지 못하게 한 공적은 어느 쪽에 더 많습니까?"
"공이 더 낫소."
"그렇다면 백성과 친하여 국고를 풍성하게 한 공적은 어떻습니까?"
"공이 더 낫소."
"서하를 지켜 진나라로 하여금 감히 공격하지 못하게 하고, 한나라와 조나라를 복종케 한 공적을 세운 것은 누구입니까?"
"그것 또한 당신이오."
"내가 세 가지를 들어 당신보다 나은 점을 밝혔거늘, 내가 아닌 당신이 재상이 된 연유는 무엇이라 생각하오?"
"왕이 어려 민심이 왕에게 없고 왕은 신하를 믿지 못하며 신하들도 진심으로 복종하지 않고 신뢰 또한 확립되지 못한 상태요. 왕 사이와 신하와 백성을 잘 다스리는 데 공이 낫소, 내가 낫소?"[14]
"…역시 공이 낫겠구려."
2.5. 초나라의 재상이 되다[편집]
초나라 도왕(悼王)은 오기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재상 자리를 내주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어머니와 피로 했던 약속을 지킨 셈이다. 하지만 오기가 재상이 된 뒤에도 어머니의 묘를 찾아갔다는 기록은 없다. 이것을 보면 끝까지 불효자식이었던 셈.
당시 초나라는 영토에 비해 국력은 약했는데, 젊은 시절부터 바라 마지않던 재상 자리에 오른 오기는 대대적인 부국강병책을 펼쳤다. 법률을 정비하고 불필요한 관직은 모두 폐지해 재정 낭비를 없앴고, 촌수가 먼 초나라 왕족과 귀족들이 이름값으로 받아먹던 봉록을[17] 몰수해서 국고로 환원시켰다. 이런 일련의 조치로 탄탄해진 재정 덕분에 초나라는 군사력을 불리며 오기의 지휘하에 강국으로 부상했다.[18] 오기는 이 군사력을 가지고 남쪽으로는 백월을 평정하고, 북쪽으론 진(陳)나라와 채나라를 병합했으며, 삼진(三晉, 한•위•조)의 군사를 격퇴하고, 서쪽으로는 진(秦)나라를 쳤다. 그러자 제후들은 초나라의 강성함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졸지에 특권을 빼앗긴 귀족들은 이를 갈고 있었다.
2.6. 오기 가득한 최후[편집]
결국 도왕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오기를 증오하던 초나라 귀족들이[19] 작당하여 그를 죽이려고 들고 일어났다. 도왕의 상이 채 끝나지도 않은 바로 그 자리에서, 오기는 귀족들이 쏜 화살에 맞아 부상당한 채로 쫓기다가, 마지막에 도왕의 시신 위로 엎어졌고 결국 무수히 날아오는 화살비에 (도왕의 시신과 함께) 고슴도치가 되어 명을 다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당시 초나라의 법을 따르자면 왕의 옥체에 해를 끼치는 자들은 역모죄로 사형은 물론이고 구족을 멸했었으며 여기에는 시신도 예외는 아니었다.[20] 예전에 오자서가 도왕의 현조부인 초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에 채찍질을 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위를 계승한 숙왕(肅王)이 부왕의 시신을 훼손한 무리를 용납할 리가 없었고, 결국 초나라의 귀족 가문 중 무려 70여 집안[21] 에, 화살을 쏜 용병들 뿐 아니라 그들의 일가족을 포함하여 수많은 초나라 사람들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싸그리 잡혀 몰살당하고 대가 끊어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에 대해 '오자는 결국 마지막 싸움에서도 무승부를 기록했다'라는 의견도 있지만 날아간 머릿수만 보고 따지면 무승부는커녕 엄청난 대승이다(…).
그러나 그가 세운 정책들은 모조리 엎어졌고 초나라의 왕족과 귀족들이 다시 특권을 회복했으므로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다. 이처럼 국가 내부가 통합되지 못하고 봉건성이 강했다는 것은 초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초나라의 문제로 지적된다. 즉 오기의 개혁이 실패한 결과 초나라는 한 단계 더 발전할 가능성을 잃어버렸다는 것. 비록 원수는 갚지 못했지만 개혁 정책은 후대까지 받아들여진 상앙과는 정 반대라 할 만하다.[22]
이 계략은 일찍이 초나라 성왕(成王)이 아들 상신의 반란[23] 으로 최후를 맞게 되자 청웅탕(곰 발바닥 요리)을 먹고 죽게 해 달라고 한 것[24][25][26] 과, 제나라 민왕을 이용해 제나라 국력을 갉아먹던 소진[27] 이 누군가에게 암살당하자 숨을 거두면서 자신을 역적이라 발표하고 저자거리에 목을 매달게 해서 범인을 스스로 기어나오게 하여 잡은 것과 함께 춘추전국시대의 가장 유명한 권모술수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3. 평가[편집]
위무후와 나눈 대화나 초나라 제도의 개혁, 평생 많은 전투를 치렀지만 불패를 기록한 전적[28] , 그리고 최후의 순간까지도 지혜를 짜내 원수들에게 복수를 하는 등 결코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량만 따진다면 중국사에 무수한 네임드 장수 가운데도 탑 클래스일 듯.[29]
병법가로서 명망이 높지만, 재상으로서 초나라의 정치 개혁을 실시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상앙과 같은 법가적 정치가의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30] 그러나 가족조차 한낱 출세의 도구로 보는 비정한 행태는 비판을 받는다. 어지간해서는 사견을 잘 안 넣는 사마천도 비정함 때문에 몸을 망치니 슬픈 일이라고 말했다.
또 노나라에서 위나라로, 위나라에서 초나라로 나라를 옮겨다니며 출세를 추구했기 때문에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은 당시의 시대상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전국시대에 자신을 올바르게 평가할 사람을 찾기 위해 군주를 바꿨던 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32]
게다가 권력에 미친 사람으로 묘사되는 사기의 기록에서도 정작 정쟁에는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부마가 되지 않은 것도 그렇고, 초나라의 개혁을 위해 원한을 감수한 것도 그랬으며 왕에게 고언을 아끼지 않기도 했다. 특히 뱃놀이를 하던 무후에게 위에서 언급한 말을 했던 얘기도 있고, 무후가 어전회의를 하고 나서 오기에게 어전회의 중에 내 주장에 이의 거는 사람이 없었다 며 자랑하자 "초장왕은 그 상황에서 오히려 자신에게 똑똑한 신하가 없으니 안타깝다며 한탄했기에 춘추오패가 될 수 있었다"며 자만하지 말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또한 《한비자》에는 이런 일화가 또 있는데, 오기가 하루는 옛 친구를 만나서 식사를 하자고 했는데, 친구가 "그래. 근데 내가 좀 볼 일이 있어서 잠깐 일 좀 보고 먹자"고 했고 오기는 "그래, 뭐 자네 돌아오면 먹지"라고 대답했는데, 저녁이 되도록 친구는 오지 않았고 오기는 끝까지 밥을 먹지 않고 기다리다가 결국 하루 종일 식사를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오기는 사람을 보내 옛 친구를 찾아오게 했고 친구가 오자 그때서야 함께 식사를 하였다고 한다.
이런 일대기를 어느 블로거가 만화로 만들었다.
4. 오자병법[편집]
저서인 《오자병법》은 원래는 48편이었다 하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6편뿐이다. 현재 전해지는 《오자병법》의 내용은 문후와 무후와의 대화 내용을 담은 것이라 한다.
《오자병법》은 《손자병법》과 달리(적어도 현재 남아있는 6편으로 미루어 볼 때) 전략과 같은 거대 담론보다는 구체적인 용병술과 그 방법론에 그 중점을 두고 있다. 조직의 인화를 유지하고, 구체적인 부대 편제 방법과 아군의 전투력을 유지하며 상대의 전투의지를 꺾고, 전투 역량을 살상하는 방법 등을 서술해 놓았다.
《오자병법》은 조직내에서 조직원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나오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점술에 관한 것이다. 《손자병법》에서는 점술은 전쟁의 결과와 무관하므로 가치가 없다고 하였는데, 오자는 반대로 점술을 '잘 이용하면' 조직원들의 사기를 높일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양쪽 다 점술을 믿지 않는 것은 같으나 활용가치에 대한 평가가 다르다. 냉정한 것 같은 이미지와 달리 《오자병법》 내용 중 상당수는 조직내에서 인화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 많다. 이는 오자가 유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비록 증자에게서 쫓겨나긴 했지만 한때 몸담았으니. 오기가 문후를 만나러 갈 때에도 선비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있어서 문후가 오기를 병법가인지 선비인지 헷갈려했다고 하며, 애당초 오기 본인부터가 스스로를 유생이라고 칭한 적도 있다.
심지어 '전장에서 패배한 자는 군법으로 엄히 처형하여 필사적인 각오로 싸우게 만들어라.'라는 문구가 심심찮게 나오던 것이 당시 병법서인데 《오자병법》에는 '공을 세운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공을 세우지 못한 자를 격려해주는 것 또한 중요하다' 라는 말까지 한다. 위에서 말한 그 냉혈한과 동일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
<부국>편에서는 5종류의 정예병을 만들면 크게 쓰일 거라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종류는 다음과 같다.
- 관직에 있다가 실책을 범해 관직에서 물러나 공명을 되찾고자 하는 사람
- 전장에서 도망친 과거가 있어 명예를 되찾고자 하는 사람
- 담력과 기백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부대
- 적극적으로 용맹과 충성심을 보이려는 자들로 한 부대
- 발빠르고 잘 달리는 사람으로 구성되는 부대
특히 1, 2 번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정예병으로 만들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거라 주장했다. 그야말로 털끝만큼의 양심이 남아 있다면 목숨을 걸고 싸우게 만드는 능력이 탁월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훗날 이르길 장수의 명령에 불길로 직행하는 자들이라고 한다.
또한 정치의 중요성 역시 언급한다. 일단 왕과의 대화로 내용이 채워지다보니 정치의 중요성에 대한 문답도 언급되며 아군이 우리나라의 정치가 옳고 적국의 정치가 잘못되었다고 믿게 해야 이길 수 있다는 명분 중심의 이론 또한 언급한다.
4.1. 손자병법과 연계성[편집]
《손자병법》에서 잘 다루지 않은 부분도 중요시하며 다뤘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오자병법과 손자병법을 같이 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33] 위 무왕 조조가 병가를 논할 때 손오를 병칭한 예가 자주 있다.
손자병법이 주로 형이상적인 설명이 주를 이룬다면, 오자병법은 보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을 하기 때문에 손자병법의 설명이 구체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오자병법을 읽는 방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손자병법과 오자병법의 차이를 청동기에서 철기, 전차에서 기마로 전환된 것과 연관짓는 주장이 있다.
청동기와 전차가 주력인 시절엔 군사력을 유지하는데 드는 부담이 철기와 기마 시대보다 더 컸고, 주 병력을 구성하고 있는 계층이 농민병이 아니라 왕족과 경, 대부, 사를 비롯한 상위층의 명예 전쟁 비슷한 형태였다. 그랬기 때문에 그 시대에 쓰인 손자병법은 가급적 전쟁으로 손해를 입는 것을 최대한 지양하는 모습을 보인 반면, 대량생산이 쉬워진 철기와 기마병이 주력이 된 시대에 쓰인 오자병법은 전투를 통한 상대편의 전투의지 저해와 전투역량 살상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는 것이다.[34]
다만 손자와의 가장 큰 의견 차이는 특공대 양성을 통한 상황 타개다. 손자 같은 경우 이겨놓고 싸우는 것을 최우선시하는 반면, 오자 또한 사전 준비를 등한시하는 건 아니지만 목숨을 돌보지 않고도 무력이 강한 정예병들이 모인 특공대가 있을 경우 다소 불리한 상황에서도 강적에게 도전해서 상황을 극복할만하다고 자신있게 언급하고 있다. 물론 왕 앞에서 자기PR하는 자리라서 과장했을 가능성도 있지만[35] , 오자가 손자와는 달리 정예 특공대 육성과 유지에 특별히 더욱 열을 올렸다는 차이는 분명하다.
4.2. 충무공 이순신과 오자[편집]
오자는 이순신과 관계가 깊은데, 명량 해전 직전 이순신의 명언으로 유명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라는 구절이 바로 《오자병법》에서 인용한 것이다.[36] 그렇지만 《오자병법》 원문에 있는 표현과 이순신이 직접 한 말(정확히는 《난중일기》에 이순신이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적어놓은 표현)은 차이가 있다. 이 말의 정확한 출처는 《오자병법》 제3편의 <치병(治兵)> 제4장에 나오는 대목이다. 《오자병법》에 나오는 원래 표현은 "무릇 전쟁터란 한 번의 실수로 시체가 되는 죽음의 땅이다. 죽을 각오로 싸우면 살 수 있고 운 좋게 살려고만 한다면 죽게 된다.(凡兵戰之場 立屍之地 必死則生 幸生則死)"이다.
또한 저 말 뒤에 있는 '한 사람이 길을 막으면 능히 1,000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 일부당경 족구천부)'도 오자의 말을 이순신이 어레인지한 표현이다. 이 말은 《오자병법》의 6번째 장인 <여사(勵士)>편에 나오는 말로 《오자병법》에 나오는 원래 표현은 '일인투명 족구천부'(一人投命 足懼千夫)이다. 위무후가 오기에게 형벌과 상에 대해 물었을 때 오기가 다음과 같이 답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명량해전 때의 유명한 두 표현이 오자가 출처였다는 것은 이순신 역시 《오자병법》을 탐독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여담으로 일본에서 《오자병법》을 탐독해 똑같이 필사즉생 필생즉사를 강조한 인물이 있다. 바로 우에스기 겐신이다.
"왕께서 공이 없는 병사 50,000명을 출동시키면 신이 군사를 거느려 대응할 것인데, 만약 임금께서 이기지 못하면 제후에게 웃음거리를 사고 천하에서 권력을 잃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죽게 될 적 한 명을 넓은 들에 잠복시키면 1,000명의 군사가 쫓되 매우 겁내고 두려워할 테니, 왜 그렇겠습니까? 그것은 갑자기 뛰쳐나와 자신을 해할까봐 그럴 것입니다. 하여, 한 사람이 목숨을 던지면 1,000명도 두렵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一人投命 足懼千夫).
오늘날 저 두 표현은 그저 정신력이나 근성만을 강조하는 표현, 혹은 의지드립으로 자주 오용되곤 하는 표현들이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저 두 표현의 원 출처는 병법이다. 이순신도 분명히 '병법에 이르기를'이라고 말하고 있다. 효과적이고 합리적인 군대 운영방식과 군사이론을 설명하고 있는 병법에서 정신력이나 근성만을 주장할 리가 없다. 저 표현들을 뽀대난다거나 정신력 강조용으로 쓰기 전에 《오자병법》에 나온 원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필사즉생 행생즉사'도 흔히 '전장에서는 닥치고 목숨 걸고 싸우라'는 의미로만 알려져 있는데 이 표현의 진정한 의미는 한번 작전을 세운 후에 그 작전 때문에 죽지는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은 하지 말고 주저없이 작전을 실행하라는 의미가 진짜 의미에 가깝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최훈의 삼국전투기에서 환2 전투 편에서 한 컷 나오면서 패러디 되었다. 오자마녀 도레미.[37] 재미있는 것은, 유리한 상황에 있는 강적에게 도전하는 전투를 벌일지 판단하는 경우에선 오자가 손자보다 약간 더 적극론자인데, 이 속전속결의 경우에선 손자가 적극론자다. 다만 오자가 손자 입장에선 영 말이 안 된다고 할 적극론을 주장하는 경우는 손자 시대에는 좀 드물었던 정예 특공대의 존재를 전제로 하기에[38] 모순은 아니다.
고우영 열국지와 고우영 십팔사략에도 그의 일대기가 등장한다.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고도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며 가지 않고 아내가 제나라 사람이라 출전이 거부되자 집에 들어가자마자 참수하는등 비정한 모습을 보이며 출세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거는 비정한 모습이 부각된다. 능력은 있지만 인간미가 없는 간웅의 이미지라 그런지 삼국지편의 조조와 비슷한 외형으로 그려졌다. 그의 죽음은 참으로 살벌하게 그려지는데 마지막까지도 오기 있게 왕의 시신에 엎드려 주변인들까지 잡아가는 걸 마지막으로 사악하게 웃으며 죽는 최후를 맞이한다.
이후에 오기를 제거하려다 왕의 시신에 활을 쏜 3000명이 넘는 귀족집단과 용병들은 당시 기록가가 남긴 상세한 기록 덕분에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참수당했고 이로 인해 초나라 내 명문 귀족 70여 가문과 알려지지 않은 용병 일족의 대는 모두 끊겼다. 그들의 목이 죄다 날아간 후 마치 귀신의 귀곡성 같은 연출로 "어머니! 소자는 죽어서도 사람을 여럿 잡아가는 능력이 있답니다. 히히히히히...."하고 소름끼치게 웃는 대사가 흘러나오는 것이 압권.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10부터 등장. 통솔, 지력, 정치는 90대, 무력, 매력은 70~60대이다. 스탯의 전체적인 모습은 딱 매력만 낮은 조조 느낌이고, 상성도 조조와 일치한다. 즉 무력, 매력은 제외하면 90대인 S급 고대무장. 악의에 이어 두 번째로 손꼽히는 압도적인 성능을 보유하고 있다. 전투, 내정이 모두 가능한 전형적인 출장입상형 무장이지만 잔혹한 행적이나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던 경력을 반영한 것인지 매력은 60~70대에 속한다.
삼국지 10에서는 고대무장으로 등장하며, 99/74/96/96/70에 특기가 23개. 상성이 조조와 일치하는데, 능력치도 매력을 제외하면 비슷하고, 등장과 사망도 비슷하다. 둘다 높은 통솔, 지력에 군사 특기를 가져서 당연히 S급 무장이지만 비교하자면, 오기는 은밀이 없는 대신 화시, 반목, 천문이 있기 때문에 전투시에는 조조보다 더 낫다. 다만 명사 특기가 없어서 평상시에 도적들과 만나면 맞짱을 떠야되는 단점이 있다. 그래도 무기 하나 쥐어주면 왠만큼 이길 정도의 무력이니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삼국지 11에서는 97/70/95/96/67 특기는 귀모로 쓸 만해 보이지만, 병과적성이 기병 빼고 올A에 S가 없는 게 흠. 그래도 능력치과 병과적성 A는 어느 정도 쓸 만하고, 화계폭약없이 불함정을 활용할 수 있다. 친애무장은 조조고 상성도 동일하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조조라면 반드시 등용하게 되고 조조, 순유와의 조합도 가능하게 된다. 하지만 오기 본인도 전투에 능하기 때문에 보통은 곽가를 데려가게 된다.
삼국지 DS 2에서는 능력치는 무력빼고 11과 동일하지만 그 무력이 80인지라 안 그래도 강한 장수였는데 더 강해졌다.
삼국지 12의 전법은 신화계. 능력치는 무력이 66으로 너프된 것 외에는 변동이 없다. 총합이 조조, 악의, 오다 노부나가에 비해서 낮으나 이들보다 지력이 휠씬 높다. 특기는 상재, 경작, 병심, 연병, 변설, 수련, 공성, 군사, 귀모. 병종은 창병. 친애무장은 조조가 빠지고, 고증으로 초도왕과 친애무장이다. 그의 저서인 오자병법을 소지한다.
삼국지 13에서도 어김없이 등장. 능력치는 통무지정 94/66/95/96으로 전형적인 군사. 전수특기는 귀모에 중신특성도 신산귀모. 더 설명이 필요없다. 적성은 A/B/A로 기병을 제외한 남은 병종에서는 준특화. 전법도 종횡기략에 공격+방어+사기+기동저하+특공봉인을 해버리는 사악한 전법. 주로 궤주하는 적 부대 격파에 특화되어 있다. 특기도 상업3 / 문화3 / 훈련8 / 순찰5 / 설파7 / 교섭8 / 견수8 / 수영6 / 귀모8 로써 육전이든 해전이든 어디서든 다방면으로 활약가능하다.
여담이지만 시리즈 내내 조조와 궁합이 좋아서 거의 대부분 조조에게 등용되는 게 태반이다. 영웅집결에서 곽가와 정욱이 재야로 등장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또한 일본의 삼국지 해석에서는 조조를 '반유가적'인 인물로 많이 묘사하는 편인데, 정작 오기는 유가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병법가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일본에서는 오기와 유가의 연관성에 대해 그다지 주목하지는 않거나 애써 무시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