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다 히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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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野田 寛郎 (おのだ ひろお / Hiroo Onoda) [1]

1922년 3월 19일 ~ 2014년 1월 16일(향년 9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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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일본 패전 전까지의 이력
3. 패전 후
4. 여담
5. 참고 문서



1. 개요[편집]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일본 육군 장교. 최종 계급은 보병 소위이며, 필리핀 전역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저 그런 평범한 일본군 장교 같지만 그는 1945년 종전 후 1974년까지 무려 29년 동안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홀로 싸워 온 것으로 유명하다. 이 과정에서 필리핀 원주민 수십명을 무참히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결국 항복하고 일본에 돌아오게 됐지만, 이 사건은 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지금도 종종 각종 매체에서 회자되곤 한다.


2. 일본 패전 전까지의 이력[편집]


오노다는 1922년, 와카야마현 가이소군 가메가와촌[2]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구제중학교 졸업 후에 민간 무역 회사에 취직하면서 중국어 등을 습득하였다고 한다. 이때 이미 다른 형제들은 전부 군사 학교 등을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었으며,[3] 그 와중에 혼자 민간회사에서 일한 덕분에 오노다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큰 관심을 못 받았다.

그러던 도중 1942년 12월에 징병검사를 받고 보병 61연대(보병 218연대로 소속 변경됨) 이등병으로 입대하게 된다. 여기서 갑종간부후보생에 합격하여 1944년 1월 육군예비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과거 무역 회사 일을 하면서 배운 영어중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육군 나카노 학교[4]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 견습 사관을 거쳐 소위 계급으로 임관하게 된다.

이후 1944년 12월 14방면군에 배속받았다. 12월 26일에 타니구치 요시미(谷口義美) 소좌의 인솔 아래 오노다 소위는 자신과 같은 나카노 학교 졸업생 5명과 함께 첩보 및 유격전을 담당하기 위해 마닐라 외곽 군기지에 주둔했던 제8사단(사단장이었던 요코야마 시즈오)으로 파견된다. 이때 오노다 소위는 민도로섬 북서쪽에 위치한 루방섬에서 정보 수집과 유격전을 담당했는데, 특히 부두 시설과 비행장을 미군이 사용하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한편 요코야마 시즈오 사단장에게 다음과 같은 훈시를 받기도 했다.

옥쇄는 일절 허락하지 않는다. 3년이건 5년이건 버텨라. 반드시 지원을 가겠다. 그동안 병사가 한 명이라도 살아있으면, 야자수 열매라도 따먹으면서 버텨라. 다시 말하지만, 옥쇄는 용서하지 않는다. #

일본군 교리는 항복은 치욕이니 옥쇄하라는 교리였으며, 옥쇄는 해당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그냥 자살이었으므로, 훈시 내용은 '자살하지 말고 구조될 때까지 버티라'는 매우 상식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상식적인 훈시 때문에 후술할 참극을 일으켰다.

루방섬에는 일본군 200명이 있었는데 육군, 육군항공대, 해군으로 각자 소속과 부대가 달랐으며 더욱이 지휘하던 장교들이 따로 있었다. 이에 오노다 소위가 이들을 지휘할 수 없었으며, 자신이 받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비행장을 파괴하자는 조언을 하자 장교들은 일본군이 나중에 공중 우위를 되찾으면 이 비행장이 다시 필요하게 될 수 있다며 반대하였다. 결국 비행장 파괴는 실패하였고 필리핀 탈환전의 일환으로 미군 상륙 후 3월 중순까지 장교들이 다 죽고 자신만이 유일한 장교로 남은 후에야 지휘권을 잡을 수 있었으며 이때 루방섬에 남은 일본군은 30여 명이었다.

오노다는 추격을 피하기 위해 병사들을 더욱 작은 그룹으로 나누었는데, 4월 하순 약속된 장소에서 만날 수 있던 병사가 시마다 쇼이치 오장이며 일주일 후 만난 게 고즈카 긴시치 일등병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미군을 피해 섬 안쪽인 산 속으로 패퇴했다. 그 와중에도 그들은 반쯤 게릴라화되어서 국지전을 계속 벌였다.

3. 패전 후[편집]


그러던 중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결국 패전했다. 필리핀군은 물론이고 미군들과 그의 가족•지인에 동창생들까지 이 사실을 삐라를 통해 산 속에 남아있던 일본군 패잔병들에게 알렸고 실제로 많은 패잔병들은 그 삐라를 보고 투항했지만 8월 말에 이 삐라를 받아본 오노다와 그 휘하의 병사들을 포함한 일부 군인들은 '이것은 악랄한 미국놈들과 필리핀놈들의 프로파간다이자 기만책'이라고 믿어 항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을 깨달은 일본군 병사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했는데 루방섬에서는 1946년 한 해 동안에만 약 40여 명이 투항했고, 필리핀 전체적으로는 약 500명의 일본군 병사들이 남아 있었다.

오노다 소위는 아카즈 유이치, 시마다 쇼이치, 고즈카 긴시치 등 병사 3명을 이끌고 있었는데 1951년 아카즈는 오노다를 떠나 투항했고 1954년 시마다는 필리핀군과 총격전에서 사망했으며 1972년 필리핀군과 또 다른 총격전에서 고즈카를 잃어 혼자가 된다. 하지만 종종 루방섬 상공을 지나다니는 비행기를 공습으로 착각하고[5], 단파수신기를 통해 6.25 전쟁, 베트남 전쟁 당시의 군용 전파를 잡는 등 그의 마음 속에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믿음이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근데 이건 그냥 변명에 가깝다. 군인이 보급을 전혀 못 받는 상황이라면 본대와 연결이 끊어졌다는 것인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본대와 연결을 시도해서 보급을 제대로 받고 정식 명령을 받아야 하는 게 당연한 것이다. 안 그러면 탈영병일 뿐이다. 오노다 일행은 보급을 못 받으니 필리핀인 마을을 습격해 주민들을 살해하고 식량을 약탈했다. 그러한 만행이 전후에 전범 재판을 통해 처벌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계속 투항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1956년 필리핀 민도르섬에서 야마모토 시게이치 육군 소위[6]가 발견되었고, 루방섬에서도 계속적인 교전으로 일본 후생성이 1959년 5월 루방섬에 대한 수색을 했지만 흔적을 찾는 데 실패하여 11월 사망통지서를 교부하였다. 그러다가 1972년 고즈카의 시신이 나오자 오노다의 나카노 학교 후타마타 분교 동기인 스에쓰구 이치로 육군 중위를 중심으로 필리핀으로 와 여러 해에 걸쳐 수색을 하였다. 오노다 휘하의 부하였던 사람을 섭외해서 전쟁은 끝났다고 설득하거나 아예 오노다의 친인척까지 직접 데리고 와서 꾸준히 설득해 봤지만 오노다는 이마저도 미군과 필리핀군의 기만책으로 여기고 여전히 투항을 거부했다.

심지어 후에 밝혀진 바로는 토벌대가 일부러 당시 일본의 신문이나 잡지 등을 남겨 오노다에게 보게 했다고 한다. 1964 도쿄 올림픽 개최, 도카이도 신칸센의 개통이나 당대 일본 황가의 사진 등 일본이 건재하다는 내용을 주로 담았다고 한다. 이를 통해 전쟁은 끝났고 일본은 재기 중이라는 메세지를 간접적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오노다는 그걸 보고도 우리 조국인 일본이 이렇게 번영할 리가 없다면서 '이미 일본은 미국의 괴뢰국이 됐고 만주 지역에 망명 정부를 세운 게 분명하다.'고 심각한 인지부조화를 일으킬 뿐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 와중에서도 생존을 위해 식량 등은 반드시 필요했는데, 오노다는 필리핀인들의 협조를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의도적으로 민가를 습격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필리핀인들이 순순히 재물을 넘겨줄 리 없으니 대부분 저항했는데, 살해하고 집을 불태운 뒤 빠져나가는 경우가 많았으며 전투 와중에 붙잡은 필리핀군 포로들은 당연히 당시 일본군이 저지르던 관행대로 잔인하게 살해한 후 시신을 필리핀인들이 볼 수 있게 했다. 오노다 소위와 그 휘하 부하들은 29년 동안 이렇게 필리핀군과 민간인을 30명이나 살해했고 10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아예 원주민 가옥 전체를 불 지르는가 하면 사람을 토막내 죽이는 등 온갖 만행[7]을 저질렀던 그는 99식 소총과 탄환을 무려 29년 동안이나 보관하면서 상시 사용 가능하게 관리했고, 이런 끔찍한 만행을 투항할 때까지 계속 저지르고 있었다. 물론 이를 본 필리핀 정부 또한 당연히 토벌대를 보내서 일본군 잔당 퇴치 작전을 벌이며 대적했으며 다수의 일본군이 전투 중에 사살되었다. 이는 이걸 본 오노다가 역시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결과를 불러오기도 했다.

만약 상황이 쭉 이대로 갔으면 오노다는 크게 알려지지도 않고 다른 패잔병들처럼 싸우다 죽었을 테지만, 1974년, 당시 대학생이었던 스즈키 노리오(鈴木紀夫)[8]라는 청년의 등장으로 상황이 급변했다. 스즈키는 '남방 군도에 구 일본군 패잔병이 아직도 살아 있으며, 홀로 항쟁 중'이라는 소문에 흥미를 느껴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오노다를 만났다. 스즈키는 침착한 언행으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결국 오노다를 설득하는 데 성공해 그가 일본이 패전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전투를 중단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오노다는 그 와중에서도 '자신의 직속 상관이 직접 와서 항복 명령을 전달하기 전까지는 근무지를 이탈할 수 없다.'는 조건을 걸며 버텼다. 일본 정부 측에서도 이를 가만 두면 굉장한 골칫거리가 될 게 뻔하기에 어렵게 수소문한 끝에 전쟁 당시 오노다의 직속 상관 중 한 명이었던 타니구치 요시미(谷口義美)를 통해 투항 명령서[9]를 전달하면서 결국 혼자만의 전쟁을 끝내게 했다.

타니구치 요시미는 종전 시 계급은 소좌(소령)로 종전 후 서점을 운영하며 조용히 살고 있었다고 한다. 30여 년이 지났기 때문에 이때는 63세의 노인이었으나 워낙 중대한 사안이기도 하고, 그래도 한때 전우였던 부하를 내버려둘 수 없어서 노구를 이끌고 직접 루방섬까지 갔다고 한다. 참고로 처음에 사수 명령을 내린 사단장 요코야마 시즈오(横山静雄)가 직접 투항 명령을 내릴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이미 사망했기 때문이다. 시즈오는 종전 후 전범 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감형되어 1953년 석방된 뒤 1961년에 사망했는데, 즉 오노다가 살아서 항쟁 중이라는 게 알려진 시점에는 이미 죽었다. 그래서 타니구치가 대신 가게 된 것이다.

타니구치 요시미의 명령서는 다음과 같다.

1. 천황 폐하의 명령에 따라 제14방면군[10]

은 모든 작전행동을 해제하였다.

2. 참모부 별반(参謀部別班)은 작전 명령 갑-제2003호에 의하여 모든 임무가 해제되었다.

3. 참모부 별반 소속의 모든 부대와 장병들은 즉시 전투와 공작을 중지하고 가장 근접한 장교의 휘하에 들어가라. 직근(直近)의 장교가 없다면 미군 또는 필리핀군에 연락하고 그들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ㅡ 제14방면군 참모부 별반 반장 타니구치 요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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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투항 당시에 찍힌 오노다의 사진

투항 직후 오노다는 타니구치 요시미에게 필리핀군의 최신 레이더 기지 등 그동안 획득한 군사 정보에 대해 보고했다. 오노다의 건강 상태는 양호한 편이었고, 각종 군장들도 전시 상태에 알맞게 제대로 정비된 상태였다고 한다. 모자 챙이 찢어져 있는 것을 제외하면 군복을 완벽하게 차려입었고, 사격이 가능한 상태의 99식 소총과 500발의 탄환, 대여섯개의 수류탄을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 일본인들을 열광시킨 것은 수십 년이 흘렀음에도 끊임없이 손질하고 정비한 덕에 반짝반짝 빛나고 날이 살아있던 일본도였다. 그리고 이 상태로 옛 상관인 타니구치 소좌에게 날카로운 눈매로 경례를 하는 사진이 일본 열도를 센세이션으로 몰고 갔다. 이어 많은 일본 관료와 언론인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인근의 필리핀군 기지를 찾아가 사령관에게 무릎을 꿇고 차고 있던 군도를 내놓으면서 정식으로 무장을 해제한 뒤 항복했다. 남은 탄약과 소총은 모두 필리핀군에게 넘겨주었다.

비교할 만한 경우로 제2차 괌 전투 당시 고립되었다가 오노다보다 먼저 귀국한 패잔병인 요코이 쇼이치(横井庄一, 1915~1997) 육군 오장[11]의 경우, 발견되었을 때 총기의 상태가 좋지 않았고 무엇보다 총검이 녹슬어 있었다. 이 때문에 요코이는 일본의 우익들에게 없는 사람 취급 받으며 잊혔고 오노다 소위는 전후 패전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던 일본인들, 특히 일본 우익 인사들에게 '살아있는 일본 정신', '진정한 사무라이' 등으로 칭송을 받으며 거의 영웅 대접을 받게 된다.[12] 물론 실제 오노다는 구 일본군에서 철저하게 세뇌되어 상관의 명령에만 절대복종한다며 종전조차 받아들이지 못하고 수십 년의 세월을 허비한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자신만의)전쟁 와중에 살인을 저지른 사실을 오노다 본인이 밝혀 일반적인 일본인들은 거리를 두었지만, 구 일본군 신화에 푹 빠져 있던 우익들에게 이는 별로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귀환 후 오노다는 요코이와 만나는 것을 거부했는데, 그 사유가 "총검이 녹슨 자와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경우로는 오노다 히로오와 같은 년도에 발견되어 귀국한 나카무라 테루오(中村 輝夫, 1919~1979) 육군 일병이 있다. 이 양반은 인도네시아에서 29년간 고립되어 혼자 생활했고, 오노다 히로오처럼 일본이 항복했다는 삐라를 발견했지만 믿지 않았다. 1974년에 그가 숨어 지내던 거처가 발견되어 일본으로 돌아왔고, 귀국한 지 5년만인 1979년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3인방 중 가장 먼저 사망한 인물인데, 그래도 그의 행적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등 요코이 쇼이치보다는 대접이 나은 편이다.

위에서 서술한 대로 오노다는 산 속에 숨어 살면서 약탈과 살상을 자행했고, 필리핀군을 상대로 살상을 한 건 전쟁 중이라고 믿었으니까 그렇다 쳐도 많은 민간인들을 살상하고 피해를 끼친 흉악범이었다. 그래서 당시 필리핀 대통령이었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도 처벌을 검토하였으나 또 일본과의 관계를 생각해[13] 모든 죄를 대통령 명령으로 특별사면하고 일본으로 송환시켰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닥치고 죽였는데 무작정 사면한 건 아니고, 본인은 전쟁 중이라고 인식해서 그런 거라고 구차한 변명을 하기는 했다.[14]

귀국한 그는 적국이었던 미국과 교류하고 서방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발전 중인 고국을 보면서 '일본의 정신이 썩었다'며 분노했고 1975년브라질로 이민을 가 목장을 경영하다가 이듬해인 1976년에 결혼했다고 한다. 그러나 말년에는 다시 일본에 들어와 자신과 같은 각종 보수파, 극우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같이 제국주의 시절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1996년에 초청받아 그가 투항했던 루방섬에 다시 찾아갔다. 자신의 동료가 1972년 필리핀 경찰에게 사살된 곳에 가서 헌화를 하고, 자신의 소총과 장비들을 관람한 후 피델 라모스 대통령을 예방하였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만행에 대해 절대 사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지 시장에게 장학금 1만 달러를 전달했지만, 민간인을 살해하고 재산을 훔친 혐의로 보상을 요구했던 필리핀인들의 항의는 철저히 무시하였다. 관련된 기자들의 질문에도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다. 즉 참회하러 간 것이 아니라 그저 언론과 우익 측의 대대적인 관심을 받으며 본인의 찬란한 리즈 시절추억팔이하기 위해 간 것일 뿐이다. 2014년 1월에 도쿄의 한 병원에서 폐렴 합병증으로 인한 심부전으로 인해 향년 92세로 사망했는데, 일본 극우세력은 그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애도했지만 일본 정부는 그의 죽음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이 없었고 필리핀인들은 그의 죽음을 기뻐했다.


4. 여담[편집]


  • 일본어 위키백과 오노다 히로오 문서의 '평가' 항목에는 민간인 살해에 대한 비판과 함께 외신 인용의 호평이 게재되어 있다. 호평의 경우, 무려 뉴욕 타임즈를 인용하면서 '전후, 번영과 물질주의 속에서 일본인에게 상실되어 있던 자긍심을 환기시켰다'고 서술해 놓았으나(2020년 9월 기준), 뉴욕 타임즈는 실제로는 미국 내에서도 굉장히 진보성향 언론사이기 때문에 '돌아온 일본군이 과거 일본인들의 영광을 되살렸다.'는 네오 파시스트 같은 소리를 할 리가 없다. 원문을 보면 '일본인들이 그렇게 느끼고 있는 듯 하다.'는 일본인 사이에서의 인식을 서술했을 뿐인데, 문맥을 무시하고 미국 외신 기자의 시선이라 서술하며 일종의 자위를 하고 있다.[15]

  • 오노다의 행태는 다른 일본군과 비교해도 이례적인 편인데, 대부분의 일본군 패잔병은 현지의 정부군과 맞설지언정 이렇게 적극적으로 현지 주민들을 자극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상급자가 강요하면 학살을 저지르는 일은 있어도 자발적으로 학살을 저지른 일본군은 그리 흔치 않다. 따라서 그가 이렇게 오랜 기간 지극히 일본군스러운 방식에 따라 자발적으로 게릴라전을 이어간 이유 중 하나로 그가 첩보교육기관인 나카노 학교 출신이라는 점을 드는 사람들도 있다. 첩보원은 대개 국가에 가장 충성스러운 자를 뽑아 육성하는데, 애초에 일본군 마인드에 가장 충실했던 사람이 첩보원으로 육성되면서 누구보다 철저한 군국주의자가 된 것. 그리고 일본군에게 있어 적국 민간인은 사실상 적군이나 다름없었으며, 적에 대한 약탈과 학살은 필요하다면 당연히 해야 하는 행동이었다. 특히 필리핀인들은 일본 점령 기간 내내 가장 적극적으로 저항했기 때문에 민간인까지 적이라는 인식이 일본군들 사이에 뿌리박혀 있었기 때문에 오노다는 게릴라전 와중에 주민의 협조를 기대할 수 없다고 처음부터 결론 내리고 필리핀군과 같이 적으로 간주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 대한민국에도 오노다 히로오만큼 길지는 않았지만 꽤 오랫동안 이미 끝난 전쟁터에 숨어 살았던 사람이 있었다. 1942년 징용에 끌려갔다가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남양군도 파견 노동자로 지원한 한국인 조병기다. 그가 도착한 곳은 요즘 관광지로 유명한 팔라우 군도 중의 하나인 펠레류 섬이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그가 도착한 시점이 바로 미군이 그 섬을 총공격하기 불과 몇 달 전이었다는 사실이다. 조병기를 비롯한 한국인 노동자 3명은 미군과 일본군의 치열한 전투 이후 '미군들은 코와 귀를 자르고 혓바닥을 빼낸다.'는 일본군의 악선전을 그대로 믿어버리는 바람에 숲 속에 들어가 숨어 살았다고 하며 이후 영월 출신인 다케노[16]는 미군에게 사살되었고, 제천 출신의 한 사람은 행방불명되었다. 결국 홀로 남은 조병기는 아무런 무기도, 도구도 없이 오로지 생존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무려 11년을 버틴 뒤에 1955년에 한국으로 뒤늦게 귀국했다. 배고픔을 못 이기고 농장에서 고추를 훔쳐먹다 원주민에게 붙잡혔고 곧장 미군에 인계됐다고 한다. 오노다는 약탈을 위해 총검을 가장 소중히 여겼지만, 조병기는 무기가 없었고 단지 음식을 익혀 먹기 위한 불씨를 가장 소중히 여겼다고 하니 비슷한 처지였지만 둘의 생존 방식은 매우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조병기가 귀국했을 때 아내는 이미 개가(=재혼)한 상태였다고 한다.[17] 덧붙여서 사정을 딱하게 여긴 한 교장 선생이 서울에 있는 자신의 학교 소사로 취직 알선을 했다는 소식을 끝으로 조병기가 한국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 #


  • 오노다 히로오가 항복할 때 99식 소총을 들고 있는 것은 대단히 특이한 상황이었다. 당시 일본군 장교들은 소총 대신 군도만 패용하고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18] 전쟁 말기로 가면 하사관들까지 소총을 버리고 군도만 소지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군 출신 작가 에자키 마사노리는 "그가 소총을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총을 가지고 싸우는 장교의 모습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아마도 일본 육군의 역사에서 총을 손에 들고 싸우는 장교는 오노다 소위 외에는 없을 것이 틀림없다."라고 회고하였다.



  • 프랑스 영화 감독 아서 하라리가 '오노다, 정글에서 보낸 10,000일'이란 제목으로 그의 생애를 영화화했으며, 2021년 칸 영화제에 주목할 만한 시선 개막작으로 선정되었고, 47회 세자르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다. 엔도 유야가 청년기의 오노다, 츠다 칸지가 장년기의 오노다를 연기했다.


5. 참고 문서[편집]


[1] 이 인물의 이름인 히로오는 오랜 시간동안 나무위키에서 히로(ひろう)라고 표기되어 왔고, 한국어 매체에서는 '히로'라는 표기가 다수를 점해왔지만, 이 인물의 정확한 이름은 오노다 히로오(おのだ ひろお)이다. 이 인물 이름 한자 寛의 훈독은 ひろ, 郎의 훈독은 お이기 때문에, 寛의 훈독에 속하는 ろ와 郎의 훈독 お는 일체가 되어 장음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독립된 발음이라고 보아야 한다.[2] 現 와카야마현 가이난시.[3] 당시는 슬슬 일본 제국군국주의화가 급속화되던 시절이라 제대로 된 학교를 나와서 장교로 임관한다는 것은 출세의 지름길, 즉 엘리트 코스 중 하나였다.[4] 첩보교육기관이었는데 오노다 히로오가 입학할 때 유격전 학교인 '후타마타 분교'가 생겼다. 오노다도 후타마타 분교 출신[5] 실제로 루방섬은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 활주로의 일직선상에 위치해 여객기가 자주 지나다닌다.[6] 오노다와 후타마타 분교 동기다.[7] 출처 칼을 갈았던 남자와 불씨를 지켜낸 남자.[8] 1949~1986. 다방을 운영하는 동시에 모험가이기도 했다. 예티를 찾으려 했던 것을 보면 꽤나 괴짜였던 듯. 1986년 다울라기리 IV봉에서 조난을 당했으나 끝내 구조되지 못하고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9] 당연히 일본 제국은 망해 버렸기에 대충 일본제국군 느낌을 살려 작성하였다고 한다. 내용인 즉슨, 전쟁은 종료되었으니 공격 및 반격행위를 멈추고 즉각 무장해제 후 가까운 선임장교에게 보고하라는 내용. '가까운 선임장교라는 내용을 굳이 넣었어야 하나?' 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이 내용을 직속상관이 직접 읽었기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 오노다는 바로 경례 후 무장해제를 하였다고 한다.[10] 제14방면군은 남방군(총군급) 휘하에서 필리핀을 관할하던 야전군이며, 종전 당시의 사령관은 야마시타 도모유키였다.[11] 1972년 2월 2일에 일본으로 귀국했다. 징집병 출신이었으며, 오노다와 비교되어 금방 관심이 식어 귀국한 후 시골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1997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12] 다만 요코이는 일본 우익들에만 없는 사람 취급당했을 뿐 평론가로 활동하며 참의원 선거에도 출마하는 등 오히려 오노다보다 변화된 일본 사회에 잘 적응했다.[13] 당시 필리핀은 일본으로부터 많은 차관을 빌려 썼기 때문에 정치적인 이유로 이 문제에 큰 소리를 못 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오노다가 아무 이유 없이 민간인을 닥치고 살해한 건 아니고 전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고 했기 때문에 이걸로 국민들에게 변명했다.[14] 물론 전쟁 중이라고 인식했다 쳐도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은 엄연한 전쟁범죄이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의 마인드 자체가 적군에 협조하는 민간인=적군이었고 비단 과거 일본군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게릴라전 도중 적군에게 협조하는 민간인 때문에 죽는 군인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타군들 역시 적군을 도와주는 민간인을 마지못해 사살하는 경우가 많다.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에서 사살된 적군을 대신해 RPG를 들고 쏘려던 어린이를 조준하면서 제발 그 RPG를 들지 말라는 주인공의 심리 상태와 모습을 보면 잘 알 수 있다.[15] 애초에 국가가 번영하면 개인의 자긍심은 증가하면 증가했지 상실될 리가 없다.[16] 창씨개명한 이름이다.[17] 다만 당시에는 6.25 전쟁 직후인지라 전쟁통에 남편이나 아내랑 헤어져서 죽는 줄 알고 딴 사람과 결혼했는데 나중에 재회해서 난감했다는 사례가 흔했다.[18] 사관학교는 물론 위관급 장교 시절에서도 검술과 기마술만 연마하는 게 보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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