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 헵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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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영국에서 활동했던 벨기에 출신[3] 의 배우. 에미상, 그래미상,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 토니상을 모두 수상한 미국 대중문화계의 그랜드슬램(EGOT) 수상자이다.
'세기의 연인'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21세기인 현재까지도 대중적으로 높은 인지도를 보유한 배우이다. 또한 은퇴 후에는 인권 운동 및 자선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치며 귀감이 되기도 했다.
2. 생애[편집]
2.1. 유년기[편집]
벨기에 태생. 영국의 은행가인 아버지 조지프 앤서니 러스턴(Joseph Anthony Ruston, 1889-1980)[4] 과 네덜란드의 귀족인 엘라 판헤임스트라 여남작(Ella barones van Heemstra, 1900-1984)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지프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일을 했는데, 이곳에서 네덜란드계 여성과 첫 결혼을 했다 이혼한 전력이 있었다. 어머니 엘라 또한 1919년에 영국계 네덜란드 귀족인 구스타프 아돌프 크발레스 판어포드(Hendrik Gustaaf Adolf Quarles van Ufford)와 결혼하여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거주하며 아들 둘을 낳았으나 1925년에 이혼을 했다. 이 두 이혼남녀는 사랑에 빠져 1926년 9월 24일에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이후 조지프는 영국의 '매클레인 왓슨 앤 컴퍼니' 사에서 일하면서 브뤼셀에 위치한 벨기에 지사로 발령을 받았고, 이곳에서 1929년에 딸 오드리를 낳았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성격의 아버지 조지프는 귀족 집안에서 자란 엄격한 성격의 어머니 엘라를 견디지 못하고, 1935년에 별거에 들어갔다. 이후 1939년 6월 24일자로 정식으로 이혼한다.
별거 후에 오드리는 어머니와 함께 잉글랜드 켄트 주의 작은 마을인 엘험(Elham)으로 이주한다. 캔터베리와 도버 사이에 있는 이 시골에서 오드리는 조그만 지역 기숙학교에 다니며 발레 수업도 받고 자유로운 학창시절을 보냈다. 별거 상태였던 아버지 조지프와도 가끔 만나며 관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아버지 조지프가 1939년에 성을 러스턴에서 헵번러스턴(Hepburn-Ruston)으로 바꿨을 때 그대로 따라간 것도 지속된 관계를 보여준다.
그런데 오드리의 부모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영국에서도 득세했던 파시즘 운동의 후원자였던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아버지 조지프는 열렬하게 활동하였고, 어머니도 파시즘에 동정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5] 이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파시스트에 대한 국민 여론이 급격히 나빠지자, 어머니 엘라는 오드리를 데리고 네덜란드의 친정으로 피신한다. 이런 결정에는 독일과 전쟁에 돌입한 영국보다는, 중립국인 네덜란드가 더 안전할 것이라는 판단도 작용했다.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네덜란드는 중립을 고수해 큰 피해 없이 전쟁의 참화를 모면했고, 이번에도 그럴 수 있으리란 낙관이 널리 퍼져 있었다.
한편 영국에 남아있던 아버지 조지프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파시스트란 이유로 체포되고 반역죄로 기소되어 수감되었으며, 전쟁 기간 내내 맨 섬에 억류되어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석방된 뒤에도 영국 내의 따가운 시선은 여전해서, 아예 아일랜드의 더블린으로 이주했다.[6] 이때부터는 전처 엘라와 딸 오드리 등 가족 및 지인들과도 소식을 끊고 은둔해버려서, 오드리는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아버지 조지프가 석방 후 사망한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0년대 초에 오드리의 첫 남편인 멜 퍼레어가 조지프의 행적을 수소문해 더블린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결국 두 부녀는 1964년 8월에 더블린의 쉘번 호텔에서 재회했다. 하지만 이미 셀럽이 된 오드리로서는 파시스트에 대한 여전히 나쁜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계속 아버지와의 관계를 비밀에 부쳐야만 했다. 이후에도 두 부녀는 은밀히 다정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아일랜드와 스위스에서 몇 차례 더 만났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조지프의 병세가 악화된 1980년 더블린에서의 일로, 이후 몇 달 지나지 않은 그해 10월에 조지프는 사망한다.
이렇게 1940년 외가로 피신한 오드리는 10대 시절 대부분을 네덜란드에서 보내게 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때 살던 곳이 바로 훗날 마켓 가든 작전으로 유명해진 아른험(Arnhem)이었다. 아른험은 귀족 가문인 외가의 영지가 위치한 곳으로, 외할아버지 아르나우트 판헤임스트라 남작은 1910년부터 1920년까지 이곳 아른험 시장을 역임할 정도로 지역의 명망 있는 귀족이었다.[7] 오드리가 로마의 휴일에서처럼 왕가의 공주까지는 아니었어도, 최소한 부유한 명문 귀족의 손녀였던 셈이다.
하지만 1940년 5월 10일에 독일군이 네덜란드의 중립을 무시하고 네덜란드를 진격로로 삼아 프랑스 침공에 나서면서 이런 유복한 생활도 산산히 깨진다.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네덜란드, 벨기에는 물론 프랑스까지 석권해버렸고,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여왕과 각료들은 영국으로 피신하여 망명 정부를 수립한다. 독일은 이후 점령한 네덜란드 지역에 네덜란드 국가판무관부(Reichskommissariat Niederlande)를 설치하고 군정을 실시했다. 이때 국가판무관으로 부임한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는 '네덜란드의 도살자'로 불릴 정도로 가혹한 통치를 일삼았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20만이 넘는 네덜란드인들이 사망했을 지경이었다. 오드리 헵번 또한 영국식 성인 '헵번'을 쓰다가는 불이익을 받을까봐, 외가쪽 성을 따라 '에다 판헤임스트라'라는 이름으로 지내야 했다. 결정적으로 외할아버지가 독일 점령군에 협조하기를 거부하고 지조를 지키는 바람에 집안 전체가 갖은 수난에 시달리게 된다. 친척 일부는 독일에 강제징용당했으며, 큰이모부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처형을 당했다. 거기에 각종 자산을 압수, 징발당했고, 영지의 저택에서도 퇴거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시달리다 못한 외할아버지 판헤임스트라 남작은 1942년 가족들을 데리고 아른험 북동쪽 외곽의 펠프(Velp)로 거처를 옮겨 은거했다.
외가가 이처럼 반 나치 성향이었기 때문에, 오드리도 펠프에 거주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네덜란드 레지스탕스 조직 활동 일부를 돕기도 했다. 아직 오드리는 어린 나이여서 적극적인 활동은 무리였으나, 발레리나로서의 재능을 살려 위장한 레지스탕스 모임에서 위문차 몇 차례 발레 공연을 했다. 또한 당시 네덜란드는 연합군 공군 폭격기들이 독일 본토로 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폭격기들이 격추되고 연합군 승무원들이 불시착하는 일이 잦았다. 레지스탕스 조직은 이들에게 은신처, 의복, 식량을 제공해주고 영국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영불해협이나 중립국(스위스, 스웨덴, 스페인 등) 국경으로 인계해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오드리의 외가는 이렇게 피신하는 승무원들을 지하실에 숨겨줬으며, 오드리 본인도 의심을 덜 받는 어린이란 점을 이용해 레지스탕스 조직원들 사이의 물품 배달이나 메시지 전달 심부름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연합군이 네덜란드를 향해 진격해오자 오드리의 외가는 점점 전쟁터의 한복판으로 내몰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마켓 가든 작전 당시에는 격렬한 전투는 다리 주변 아른험 시 중심과, 서쪽의 오스테르베크 일대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외가 식구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8] 하지만 더 심각한 위기가 마켓 가든 작전 이후에 찾아왔다. 독일군의 식량공급 차단으로 1944~45년 겨울 네덜란드 대기근[9] 이 벌어졌고, 이미 가세가 기운 외가는 이 재난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오드리 헵번과 외가 가족들은 튤립 구근을 먹고[10] , 쓰레기통까지 뒤져가며 근근히 버텼다. 오드리는 원래 건강한 몸도 아니었던데다, 이 시기에 심각한 영양실조를 겪으며 빈혈과 부종 등 갖가지 합병증에 시달렸다.
전쟁 뒤에도 오드리 헵번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외가가 마켓 가든 작전으로 그나마 남아 있던 아른험 주변 영지와 자산들이 쑥대밭이 되면서, 귀족 작위가 무색할 정도로 재정적으로 완전히 몰락해버렸다. 종전 후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계속 발레 수업을 받았는데, 외가의 살림이 너무 어려워져서 어머니 엘라는 귀족임에도 요리사와 가정부 일을 하면서 딸의 학비와 생활비를 대야 했다고 한다. 이처럼 전쟁으로 본인과 집안의 고통이 너무나 컸던 나머지, 오드리 헵번은 이후에도 평생 전쟁영화는 출연을 사양했다고 한다. 후일 〈전쟁과 평화〉 영화에 출연하기는 했으나, 전투 장면에는 출연하지 않았다. 그나마 이 영화에 출연하는 것 자체도 처음엔 매우 꺼렸으나 남편인 멜 퍼레어가 간청해서 함께 출연한 것.
로우틴 때까지만 해도 발레리나로도 제법 유명했으나[11] , 키가 너무 커서(170cm)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어려운 집안 사정 속에 연기 활동으로 집안에 보탬을 주다 1950년대 들어와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렇긴 해도 전체적인 지명도로 치면 무명이나 마찬가지였다.
2.2. 세기의 연인[편집]
오드리 헵번의 본격적인 스타덤은 1952년, 프랑스 작가 콜레트의 원작을 무대화한 연극 지지 초연에 캐스팅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24세 때인 1953년에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영화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의 여주인공인 앤 공주 역에 오디션을 거친 후 발탁,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끈다. 로마의 휴일은 상류층 여성이 평소의 일상에서 벗어나 평범한 남성과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는 이야기 구성의 원조로, 이것 외에도 훗날에 만들어진 여러 영화나 방송물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원래 로마의 휴일은 프랭크 캐프러 감독[12] 이 캐리 그랜트와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주연으로 만들 예정이였으나 조지 스티븐슨에게 프로젝트가 넘어갔는데, 스티븐슨도 거절해서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하게 되었다. 와일러는 앤 공주를 진 시먼스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스케줄이 안 맞아서 캐스팅이 불발되고 예산도 축소되어[13] 연극 배우로서 어느정도 인지도는 있었지만 영화계에서는 완전 무명이었던 오드리 헵번을 최종적으로 캐스팅하게 된것.
로마의 휴일은 오드리 헵번의 첫 주연작이지만 촬영 도중 헵번의 스타성을 직감한 그레고리 펙은 헵번의 이름도 자신의 이름과 같이 영화 제목 위에 올라가게 만들어달라고 에이전트에게 요청했다. "헵번이 오스카를 탈 게 분명한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 셈이다."[14] 라면서. 에이전트는 만류했지만 그레고리 펙은 강경했다. 그의 예상대로, 오드리 헵번은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후, 오드리 헵번은 빌리 와일더 감독의 1954년작인 사브리나에서 여주인공인 사브리나 페어차일드(Sabrina Fairchild)역을 훌륭하게 소화하며 제27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등 인지도를 점점 높여간다. 이 영화에서 헵번이 입었던 옷과 스타일은 사브리나 팬츠, 사브리나 플랫이라고 불리며 유명하다. 참고로 영화배우에게 특정 브랜드가 최초로 의상 협찬을 시작한 영화가 바로 사브리나인데, 이때 협찬한 브랜드가 바로 그 유명한 지방시(Givenchy).[15] 지방시는 이때 얻은 광고효과로 매출이 급격하게 늘어 큰 이득을 보았고, 이후부터 오드리 헵번이 출연하는 영화에 적극적으로 의상협찬을 아끼지 않았다. 헵번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입었던 검정색 블랙 드레스도 지방시의 브랜드일 정도. 단 오드리는 협찬받은 옷은 모조리 촬영이 끝나면 반납했다고 한다. 영화,드라마 협찬의 시초이자 시작.
사브리나 출연 직후 오드리는 영화계 인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화가 아니라 브로드웨이 연극인 <운디네(Ondine)>에 물의 요정 역으로 출연하였다. <운디네>는 1954년 2월 18일부터 1954년 7월 3일까지 상영되었으며 이 연극으로 오드리 헵번은 연극의 아카데미상이라 할 수 있는 토니상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연극 배우 출신으로서의 정체성과 단순히 예쁜 외모로만 뜬 배우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1957년, 오드리 헵번은 전직 발레리나로서의 경험과 평소 특기였던 노래 실력을 살려서[16] 뮤지컬 영화 화니 페이스에 출연하였다. 생전 오드리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들 중 자신의 실제 성격과 가장 비슷한 영화로 화니 페이스를 뽑았다고 한다. 1959년에는 파계에서 수녀 역으로 출연하였고 1960년에는 서부극인 용서받지 못한 자[17] 에서는 인디안족 여인으로 나온다.
화려했던 50년대가 지난 후, 오드리 헵번은 1961년.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의 작품인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에서 주인공을 맡아 다시 한번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다. 특히 이른 아침에 검정색 선글라스 & 드레스를 입은 여주인공 홀리 고라이틀리(Holly Golightly)가 택시에서 내려 뉴욕 5번가에 위치한 티파니 보석상[19] 의 쇼윈도우 앞에서 커피를 들고 크루아상을 먹는 모습은 명장면으로 스크린의 불멸성을 부여하였다. 다만 오드리는 홀리의 성격이나 생활이 자신의 실제 모습과 너무 달라서 홀리라는 캐릭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원래 이 배역 자체가 매럴린 먼로를 구상하고 만든 캐릭터였다. 원작자 트루먼 커포티가 매럴린 먼로와 친했는데 먼로의 화려함 뒤에 감쳐진 외로움에 감명을 받고 소설을 썼었다. 영화 캐스팅도 커포티는 당연히 매럴린 먼로를 원했지만 그 당시 연기적 변화를 원했던 먼로는 콜걸 캐릭터라는 얘기를 듣고 거절을 했고 영화사 측에서도 자주 지각을 하고 스캔들 메이커인 먼로를 감당못해 출연이 불발되어 오드리 헵번이 배역에 캐스팅 됐다.
1964년, 오드리 헵번은 두번째 뮤지컬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에 출연한다. 단, <화니 페이스>와 달리, 오드리 헵번의 노래 장면은 다른 가수의 더빙이었다. 본래 영화판 마이 페어 레이디는 뮤지컬 초연 배우들을 그대로 기용하여 제작할 예정이었는데 영화사에서 초연 당시 여주인공을 맡았던 줄리 앤드루스의 낮은 인지도를 못마땅해 하면서 이미 영화 화니 페이스에서 뮤지컬 넘버들을 훌륭하게 소화한바 있었던 오드리 헵번으로 여주인공역을 바꾸었다. 하지만 오드리는 크랭크 인이 될때까지 뮤지컬 넘버들을 익힐만한 충분한 시간을 얻지 못했고 감독 또한 오드리 헵번의 노래 실력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에 왕과 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등에서 노래 더빙을 한 마니 닉슨의 더빙으로 영화에 수록하게 된것. 더군다나 오드리 헵번은 줄리 앤드루스가 마이 페어 레이디의 출연이 불발되고 출연한 메리 포핀스에 밀려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놓치는 바람에 헵번은 이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20] 이 부분은 2015년 9월 20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이처럼 오드리 헵번이 영화상에서 맡은 배역 자체는 다양했지만 데뷔작인 <로마의 휴일>부터 대부분의 영화상에서 헵번이 맡은 캐릭터의 성격은 순진무구함으로 세상의 때에 찌든 남자들을 변화시키는 여성상일 때가 많았다. 이는 오드리 헵번의 연기력이 모자랐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사나 대중들이 오드리 헵번에게 바랐던 게 저런 이미지였기 때문.[21] 오드리 헵번은 이에 불만이 많았는지 연기생활 후반기에 찍은 샤레이드(1963년)에서는 남편의 죽음 뒤 음모에 시달리는 귀족 과부 역을, 어두워질 때까지 (1967년)에서는 살해 위협에 처한 시각장애인을 연기하여 기존 이미지와는 다른 강렬한 연기를 선보인다.
오드리 헵번은 평생 20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1967년 개봉한 <어두워질 때까지> 이후로는 영화 출연을 줄여가다가, 스티븐 스필버그의 1989년작 <영혼은 그대 곁에>를 마지막으로 영화계에서 은퇴했다.[22] 이 영화의 주연을 맡은 리처드 드라이퍼스가 스필버그에게 "누가 천사를 연기할 거지?"라고 물었는데 스필버그가 "오드리 헵번"이라고 대답하자, 드라이퍼스는 "그래, 그녀말고 누가 천사를 맡을 수 있을까!"라고 감탄했다.
2.3. 사생활[편집]
슬프게도 사생활은 타 할리우드 스타들과 비슷하게 암울했다. 첫 결혼 전 약혼했던 제임스 핸슨이라는 연인이 있었으나 오드리 헵번이 로마의 휴일을 찍으면서 스케줄이 바빠지자 헤어졌다. 당시 오드리는 로마의 휴일을 찍는 한편 약혼을 동시에 준비하면서, 자신이 직업과 결혼생활을 동시에 할 수 있을지를 엄청 고민했다고 한다.[23] 사브리나 영화 촬영 도중에는 주연인 윌리엄 홀든과 연애를 했다가 영화 개봉 후 헤어졌다.[24] 이후 오드리 헵번은 연극 <운디네(Ondine)>에서 함께 남녀 주연을 맡은 것을 계기로 당시 유부남이었던 미국 배우 멜 퍼레어 (Mel Ferrer)[25] 와 사귀게 되는데, 멜 퍼레어는 엄청난 바람둥이였고 오드리도 인정할 정도로 성질이 더러웠지만, 오드리를 구워 삶았다. 결국 연극 상영이 끝난 직후인 1954년 9월 25일, 멜 퍼레어는 3번째 아내를 버리고 오드리 헵번과 4번째 결혼을 하는데, 이 결혼은 아무리봐도 오드리가 아깝다는 이야기가 많았다고 한다. 최전성기의 20대 탑 여배우가 12살 연상에 한물간데다가 돈도 별로 없고 사회적 평판도 바닥이었으며 3번이나 이혼했을 정도로 사생활도 엉망인 배우랑 결혼하는 것이었다.
이 결혼은 불행하게 끝장났는데, 오드리 헵번은 남편 멜 퍼레어의 설득으로 평생 출연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전쟁영화에 출연하거나[26] 다른 거장 감독들이 제안한 캐스팅을 거절하고 남편이 감독한 영화에 출연하는 등 지극정성으로 그를 사랑했지만 정작 멜 퍼레어는 결혼생활 와중에도 자신의 바람기와 오드리 헵번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헵번과 잦은 다툼을 했고, 오드리가 첫번째 임신 중 언포기븐 촬영을 하다가 낙마사고를 당해서 유산한 이후 잦은 유산을 하게되자[27] 결혼 생활 말년에는 오드리 헵번에게 폭력까지 휘둘렀다고 한다. 결국 참다못한 오드리는 1968년 퍼레어와 이혼한다. 이후 오드리는 멜 퍼레어를 피한 것은 물론 면전에서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싫어했다고 한다. 멜 퍼레어는 오드리 헵번과 이혼 후 다른 여자와 5번째로 결혼했고 장수하다가 2008년 만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69년, 오드리 헵번은 로마의 휴일 촬영 당시부터 "나는 오드리 헵번과 결혼식을 올릴 거예요" 라고 말하며 오드리 헵번을 따라다니던 이탈리아 정신과 의사인 안드레아 도티(Andrea Dotti)와 재혼하였고, 도티 사이에서 39세에 아들을 보았다.[28] 그러나 전성기 시절 오드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랑했던 안드레아 도티는 중년이 된 오드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외도를 하기 시작했고[29] 결국, 오드리와 결혼한지 13년만에 이혼했다. 그래도 오드리는 도티와 계속 연락하고 지냈다고 한다. 오드리 헵번은 결혼 기간을 포함해서 20년 가까이 이탈리아에서 거주했고 이 시기에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영화 감독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 '가족의 초상' 캐스팅 제안도 들어왔으나 부도덕한 역이라고 거절했다고 한다.
도티와 별거중이던 오드리 헵번은 유니세프 대사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구호 활동에 나서게 되고 한창 구호 활동을 하던 1980년, 네덜란드 배우인 로버트 월더를 만나서 1993년 사망할 때 까지 동거했다.
평소 오드리 헵번은 매우 검소해서 아이들에게 밤새 동화책을 읽어주며 직접 식사를 차려주고 빨래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사치도 하지 않는 매우 검소한 성격이었다. 스위스로 이사를 갔을 때는 허름한 옷을 입고 직접 짐을 날랐고, 협찬받은 의상은 모조리 반납했으며 재규어에서 나온 예쁜 스포츠카도 가지고 싶어했지만 가족이 다 탈 수도 없고 장 보러 갈때 쓰지도 못한다고 끝내 안 샀다고 한다.[30] 둘째 아들의 회고에 따르면 하도 사람들이 "너희 엄마가 식사는 주냐, 책은 읽어주냐"고 물어봐서 다른 엄마들은 아무도 집에서 식사를 안 차려줘서 자기에게 묻는 줄 알았다고 한다.
2.4. 은퇴 이후[편집]
영화계 은퇴 이후 유니세프 대사로서 인권운동과 자선사업 활동에 참가하고 제3세계 오지 마을에 가서 아이들을 도와주었으며, 그런 활동에서 미소짓는 노년의 헵번이 보여준 모습은 젊을적 미녀의 이미지 못지않게 유명해졌고,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다.[31] 특히 1992년 암 투병 중임에도 소말리아에 방문하여 봉사활동을 한 것이 유명하다. 이러한 행보를 기리고자, 이후 유니세프에서 이름을 딴 오드리 헵번 인도주의상(Audrey Hepburn Humanitarian Award)을 케이티 페리에게 수여하기도 했다.[32] 또한 유니세프에서 주최한 대니 케이[33] 국제어린이(예술) 경연 대회가 열리게 된 결정적 계기도 대니 케이가 아닌 오드리 헵번이었다.[34]
이런 모습 덕분에 오드리 헵번의 아버지가 나치 동조자였다고 욕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본전도 못건진 채 배로 비난세례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오드리가 어릴 때 집을 나갔으니 영향을 받을 겨를도 없었으며, 오드리 헵번은 나치 독일이 저지른 만행의 피해자들 중 하나였다. 위에도 여러 번 서술하듯, 네덜란드로 갔던 어렸을 적 독일군이 최후의 발악으로 식량을 죄다 수탈해가는 바람에 튤립 구근을 캐먹고 벌레도 먹고 쓰레기까지 뒤져먹을 정도로 심각한 기근에 시달렸고 네덜란드가 해방된 후 연합군과 유니세프가 지원해 준 연유를 허겁지겁 먹다 탈이 났던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35] (#) 게다가 2차 세계대전 기간 고향 네덜란드에서 나치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 활동에 적극 가담했던 것이 밝혀졌다.# 이때의 경험을 아들에게 "연합군 병사를 돕는 것이 위험했으나 스릴 넘치는 것이었다. 발각되면 전 가족이 위험에 빠질 수 있었던 만큼 공포감에 시달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힘들었던 경험은 오드리 헵번이 자선사업 활동을 하는 계기들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자신도 한때 전쟁 난민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2.5. 사망[편집]
이렇게 은퇴 이후에도 자선사업가로서 아름다운 삶을 살다가 1993년 1월 20일 결장암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63세.
오드리 헵번의 유언이라고 돌아다니는 이 시는 헵번이 좋아했던 시인 샘 레벤슨(Sam Levenson)의 시로, 숨을 거두기 1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에 자식들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고인의 뜻을 잇기 위해서 아들 션 헵번은 오드리 헵번 어린이 기금(Audrey Hepburn Children's Fund)을 설립하여 전세계의 아이들에 대한 구호사업을 펼치고 있다.
현재 헵번의 무덤은 스위스 톨로체나즈에 있다.
3. 위상[편집]
캐서린 헵번과 베티 데이비스에 이어 미국영화연구소(AFI) 선정 가장 위대한 여성 배우 3위에 선정된 인물이며,[36] 에미상 ∙ 그래미 어워드 ∙ 아카데미상 ∙ 토니상을 모두 수상한 미국 대중문화계의 그랜드슬램(EGOT) 수상자이다.
할리우드를 넘어서 클래식 시대의 막바지인 1950~60년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오드리 헵번은 1950년대~1960년대 초를 상징하는 여배우로, 영화계를 넘어 대중문화계가 현대화되던 시기를 대표하는 슈퍼스타이다. 대중음악계와 비교를 해보자면 1950년대 초 프랭크 시나트러나 냇 킹 콜 등의 고전 스탠다드 팝 가수가 유행하던 시절 영화계에 등장하였으며, 1964년 비틀즈가 처음 등장하여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일으킬 때 오드리 헵번의 최전성기 후반부였고, 비틀즈가 사이키델릭 록, 블루스 록 등으로 장르를 바꾸며 60년대 말 하드 록 밴드들이 나와 본격적으로 현대적인 대중음악 체계가 형성되던 시기 오드리의 전성기가 끝났다. 또한, 이 시기에 영화계도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라는 새로운 사조가 등장하며 영화 촬영 기법이 현대적으로 넘어가게 된다.[37] 공교롭게도 오드리 헵번이 활동을 줄이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 대중문화계는 완전히 현대로 넘어와서 오드리 헵번은 클래식 시대의 마지막 아이콘으로 남게 되었다. 폴 뉴먼, 그레고리 펙, 비틀즈와 함께 60년대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인물로도 여겨진다. 현재까지도 '만인의 연인'으로 칭송받고 있다.
또한 은퇴 이후에는 유니세프를 통해 개발도상국으로 건너가 자선활동과 기부를 꾸준히 하며 난민 구호활동에 노력을 기울이는 제2의 삶을 살아 칭송을 받았고 이를 근거로 1992년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의 수훈자가 되었다.
(뉴욕 유니세프 본사 앞에는 오드리 헵번의 업적과 봉사, 희생 정신을 기린 'The Spirit of Audrey'라는 이름의 동상이 서 있다.)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미인 중 한 명이며, 현재까지도 세기의 미녀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20세기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를 꼽으라면 1위를 다툴 정도로 눈부신 외모를 가졌다.
오드리 헵번이 선보인 메이크업, 헤어 스타일, 옷차림은 현대에도 꾸준히 유행하면서 인기를 끌고 있다. 트레이드마크였던 짙은 눈썹과 큰 눈을 강조한 메이크업은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고, 데뷔작 로마의 휴일에서 선보인 단발 헤어컷 역시 "헵번 스타일"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38] 헵번 스타일은 단순히, 의상, 화장 등뿐 아니라, 영화 속에서의 행동도 포함한다. 대표적으로 <로마의 휴일>에 나온 커피잔을 들 때 잔 받침을 같이 든다는가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나온 창가에 앉아 Moon River를 부르는 모습 등 어쩌면 말로 표현하기는 극히 어려우면서도 별다를 게 없는 행동이지만, 직접 보면 뭔가 분위기가 다르다는 걸 이해하기가 쉬워진다.
사브리나에서 지방시의 옷들을 입어서 지방시를 세계적인 패션 하우스로 격상시켰으며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선보인 헤어스타일과 검은색 드레스[39] , 긴 장갑도 '헵번 드레스'라고 불리며 유명해졌을 만큼 영화배우로 활동한 시기의 오드리 헵번은 한마디로 유행의 선두주자였다. 그래서 당대의 유명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특히 사랑받은 배우이기도 했다. 사실 1950년대 이후 오드리 헵번이 대중문화에 워낙 영향을 끼친 부분이 많다 보니, 우리 일상 생활에도 알게 모르게 정말 영향을 많이 끼친 영화배우다. 반항적이고 파격적인 이미지로 티셔츠와 가죽재킷을 유행시킨 말런 브랜도와 동시기에 여성 패션 쪽에서 비슷한 역할을 했던 인물로 꼽힌다.
한국에서도 카페나 미용실에만 가도 사진이 걸려있는 곳이 매우 많다. 국내 방송을 보면 종종 오드리 헵번의 사진이 실내 장식으로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초상 사진은 21세기의 휴대폰 광고에 쓰였을 정도다.
4. 수상 경력[편집]
- 1953년 제19회 뉴욕비평가협회상 여우주연상
- 1954년 제11회 골든글로브시상식 드라마부문 여우주연상
- 1954년 제7회 영국아카데미시상식 여우주연상
- 1954년 제26회 아카데미시상식 여우주연상
- 1954년 제8회 토니상 연극부문 여우주연상
- 1955년 제12회 골든글로브시상식 여자인기상
- 1959년 제25회 뉴욕비평가협회상 여우주연상
- 1959년 제7회 산세바스찬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 1960년 제13회 영국아카데미시상식 여우주연상
- 1965년 제18회 영국아카데미시상식 여우주연상
- 1968년 제22회 토니상 특별상
- 1990년 제47회 골든글로브시상식 평생공로상
- 1992년 제45회 영국아카데미시상식 평생공로상
- 1993년 미국배우조합협회 평생공로상
- 1993년 제65회 아카데미시상식 진허숄트박애상
5. 영화 출연작[편집]
- 로마의 휴일 (1953)
- 사브리나 (1954)
- 전쟁과 평화 (1956)
- 화니 페이스 (1957)
- 하오의 연정 (1957)
- 그린 맨션 (1959)[40]
- 파계 (1959)
- 용서받지 못한 자 (1960)
- 티파니에서 아침을 (1961)
- 아이들의 시간 (1961)
- 샤레이드 (1963)
- 뜨거운 포옹 (1964)
- 마이 페어 레이디 (1964)
- 백만달러의 사랑 (1966)
- 언제나 둘이서 (1967)
- 어두워질 때까지 (1967)
- 로빈과 마리안 (1976)
- 혈선 (1979)[41]
- 뉴욕의 연인들 (1981)
- 영혼은 그대 곁에 (1989) - 조연으로 천사역을 맡았다. 오드리 헵번의 마지막 작품.
6. 여담[편집]
- 브뤼셀에서 태어나고 부유한 부모를 따라 어린 시절 유럽 각지에서 살아본데다,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기에 다중언어 화자였다. 아래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를 모두 유창하게 구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