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량(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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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나라 홍무제 시기의 인물 吳良
2. 명나라 정통제 시기의 인물 吳良


1. 명나라 홍무제 시기의 인물 吳良[편집]


(1323 ~ 1381)

명나라의 인물. 정원 사람으로 초명은 국흥(國興)이고 하사받은 이름은 량(良)이다.

성품이 우람하고 강직하면서 동생 오정과 용략으로 유명했으며, 1352년에 주원장을 섬겨 장전선봉이 되었고 잠수하는 능력이 있어 정탐을 했다.

1354년 가을에는 주원장을 따라 저주를 빼앗고 1355년 봄에는 화주를 공략하고 6월에는 장강을 건너 채석, 고숙, 태평, 율수, 율양 등을 공략했다. 1356년에는 집경(남경)을 공격했고 서달을 따라 진강, 상주를 공격하고 단양을 수비했다.

1357년에는 진망산을 빼앗고 강음을 공략했고 지휘사에 임명되어 강음을 지켰으며, 오량은 방어 시설을 축조하고 그 공로로 추밀원판관이 되었다. 1359년에는 장사성의 군사가 강음을 공격하자 동생 오정을 북문으로 보내 맞서게 하면서 원수 왕자명에게 남문으로 출격하도록 하고 협공하도록 해서 장사성의 군사를 격파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사성의 군사가 상주로 진격하자 오량은 군사를 파견해 무석에서 장사성의 군사를 격파했으며, 당시 주원장이 진우량과 싸우고 있어서 그 틈을 타 장사성이 주원장을 공격하려 했지만 오량이 막고 있어서 공격하지 못했다.

1365년에는 서달, 상우춘이 회동을 빼앗고 태주를 함락시키면서 장사성이 마태사로 출병해 진강을 공격하고 수백 척의 전함을 보내 강을 따라 올라갔는데, 오량은 강음에서 진을 치고 대기했으며, 1366년에 주원장이 군사를 이끌고 장사성을 공격해 부상문까지 추격하자 오량도 군사를 내서 협공해 적 2천을 포로로 잡았다. 1367년에 장사성을 평정하면서 소용대장군, 소주위지휘사로 봉해져 소주로 고쳤으며, 도독첨사로 봉해졌다가 전주로 진을 옮겼고, 1370년에는 도독동지에 올라 강음후에 봉해져 식록 2,500석과 철권을 하사받았다.

1371년에 정주, 수녕의 여러 만족을 정벌했고 1372년에 광서의 만족의 반란이 일어나자 등유의 부장이 되어 이백승과 함께 정주로 출병해 반란을 평정했으며, 수 개월 동안 출정해 싸우면서 좌강, 우강, 오계 지역의 반란을 모두 평정하고 동고, 오계로 달려가 담계, 태평 등을 탈환하고 동관 철채에서 청동, 애산의 반란군을 물리쳤으며, 모든 만족이 두려워해 조정에 복속하자 광서 지방이 평정되었다.

1379년에 청주를 제왕 주희에게 하사하고 오량은 제왕의 장인이라 청주의 독건왕부에 파견되었으며, 1381년 11월 26일에 58세로 청주에서 병사했다. 주원장은 3일간 조정을 열지 않고 특진광록대부, 상주국, 중군도독, 강국공에 추증해 양렬(襄烈)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1382년 2월에 종산에 장사를 지냈다.


2. 명나라 정통제 시기의 인물 吳良[편집]


생몰년도 미상

1441년에 금의위 지휘 첨사를 지내다가 야인여진을 돌려보내는 일로 왕흠과 함께 조선으로 파견되어 여진의 복라을, 이관적 등을 거느리고 갔다.

조선의 원접사 정연에게 칙서를 받들고 길을 떠나기에 급해서 모든 행장을 미처 준비하지 못하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도 옷과 신을 갖추지 못했으니, 추위에 얼지 않도록 해주기를 원한다고 요구해 갖옷을 받자 전하 앞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겠다고 했다.

정연이 오양과 왕흠을 접대하다가 오양은 정연이 연회에서 술을 마시며 예를 행할 때 왕흠이 일어나면 정연도 일어나는 것을 보고, 어찌 왕흠을 위해 일어나냐고 말한 것으로 인해 오양은 왕흠과 다투었다. 정연에게 야인여진들이 머무르거나 돌아가는 일에 대해 물었으며, 민광미에게 금은과 진주를 사고자 요청했지만, 본국에서 나지 않는 것이라 해서 거절되었고, 기생 패강아를 가까이 두다가 다른 기생들을 들였다.

1442년에 아이신기오로 판차 휘하의 야인들이 조선 땅에 머물러 살고자 해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 사례해야 한다고 조선 조정에게 이야기했다. 명나라에 사신을 갔다가 죄를 짓고 돌아와서 강음현으로 유배된 고득종의 석방을 조선 조정에 요청했으며, 오도리에서 들어온 자들의 수효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다.

2월 26일에 조선 조정에서 나가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1449년에 조선에서 강문보를 통해 요동의 소식을 알아보면서 오양이 타타르에 들어갔다가 잡혀서 억류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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