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탈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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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설명
3. 역사적 변천
4. 비동양권의 경우에
5. "동양" 내부의 오리엔탈리즘
5.1. 한국 내부의 오리엔탈리즘
5.2. 일본의 내적 오리엔탈리즘
5.2.1. 일본 제국의 오리엔탈리즘 내재화와 민족주의
5.2.2. 동양사학과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
5.2.3. 현대 일본에서
7. 비판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은 1970년대영국령 팔레스타인 태생인 미국 문학평론가 에드워드 사이드가 주장한, 서구 중심의 동양관(비서구권)에 기초한 각종 담론들을 총칭하는 낱말이자 동양에 대한 편견 및 고정관념을 뜻하는 말이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적하기 이전에 오리엔탈리즘이란 주로 '동양학'을 가리키는 낱말이었다.


2. 설명[편집]


에드워드 사이드영국령 팔레스타인기독교를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복잡한 정체성이 서구인들의 편협함을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주로 중동과 인도에 대한 서구의 시각을 드러내는 언설들을 자신의 저서 《오리엔탈리즘》에서 정리했다.

저서의 핵심은 동양에 대한 서구의 지식은 현실에서 생성된 것이 아니라 '동양'의 여러 사회가 본질적으로 서로 닮아있으며 '서구'의 사회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선입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 선험적 지식이 '동양'을 '서양'의 안티테제로 놓는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 관계에는 힘이 작용한다.

사이드에 따르면 오리엔탈리즘은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나누어진다. 우선 18세기 말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을 계기로 본격화된 ‘학문적인 의미’가 있다. 이는 동양을 연구하고 정의하는 모든 행위를 포괄한다. 두 번째 의미는 서양이 동양을 자신과 구별하는 인식이다.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곧 오리엔탈리즘은 ‘동양’과 ‘서양’이라는 것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구별에 근거한 하나의 사고방식이다.”

-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박홍규 역, 교보문고, 1991, 16p

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페르시아와 자신들을 대비한 이래로 점차 확장되며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의미는 독립적이지 않으며, ‘통제된 교류’의 과정을 통해 상호작용하여 새로운 근대적인 의미의 오리엔탈리즘을 만들어낸다. 즉, 예를 들어 샤토브리앙과 같은 여행기 작가들의 작품에 나타난 동양에 대한 경험과 심미적인 인식들은 레인으로 대표되는 동양학자들의 과학적 연구 결과의 권위에 기대어 ‘공적인’ 하나의 담론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을 형성한다.

“곧 유럽인의 동양 거주와 그 기록은... 오리엔탈리스트(동양학자)가 그 위에 더욱 많은 학문적 관찰과 서술을 가하여 조립하고 기초를 확립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 위의 책, 277p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서양은 동양을 비이성적, 전제적, 비도덕적이고 불결하며 정체적인 존재로 정의하며, 각종 생산물들을 통해 이를 텍스트화한다. 이러한 행위가 진행되고 또 그 결과물이 권위를 얻을 수 있던 까닭은 서양이 18세기 당시 동양과의 불균형적 관계 속에서 식민 지배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이드에 따르면 오리엔탈리즘은 허구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제국주의 서양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같은 다양한 층위의 권력 교환 과정에 융합하여 실존하는 담론이며[1], (세 번째 의미인) 식민 지배 체제를 뒷받침하는 구성 요소라고 할 수 있다.[2]

종합해보면 근대 오리엔탈리즘은 제국주의 체계에서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억압하기 위한 서양의 방식”[3]이다.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서양은 타자인 동양이라는 대상을 형성한 후 그들의 본질적인 ‘열등한’ 속성을 정의한다. 그리고 자신을 이에 대비하여 '진보적이고 우월한' 속성과 주체성을 획득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이분적인 의식은 서양이 동양과의 관계 속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여 수동적인 동양을 지배하며 그 열등한 문명을 개량해야 한다는 지배의 당위성과 도덕적 사명감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 흔히 말하는 '동양'을 깔보는 선입견이나 풍조가 오리엔탈리즘이 아니라, 동양이라는 범주 자체가 오리엔탈리즘이다. 전혀 상관이 없는 수많은 제국을 서구의 입장에서 타자화해 동일한 담론으로 묶는 것이 바로 오리엔탈리즘의 기본 전제다. 따라서 사이드의 이 저서가 출간된 이후로는 '오리엔트'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단어가 되었다.

하지만 오리엔트라는 단어가 완전히 사장된 것은 아니며, 예전에 쓰던 명칭인 중동(Middle East)은 '지중해의 입장이 담겨있는 용어'이기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 주변의 국가들을 '오리엔트'라고 부르고 있다. 비슷한 이유로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는 극동(Far East)이라고 불렸다. 현재에 와서는 아시아라든지 동양 같은 단어가 거의 똑같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어서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즉 오리엔탈리즘은 단순히 동양에 대한 서양의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 등을 비난하는 용어가 아니며 서구에서 동양을 인식하고 정의하고 묘사하고 연구하는 그 담론 전체를 아우르는 용어이다. 학문, 희곡, 회화, 문학 등 서구에서 생성된 담론 속 '서구가 동양을 인식하는 방식'을 분석하고자 만들어진 용어다. 그러므로 비서구권 나라의 문화를 깔보는 서양인에게 '이런 오리엔탈리스트!'라고 일갈하는 식으로 써서는 안 된다. 실제로 저런 상황을 마주하면 차라리 Racist(인종차별주의자)라고 하는 편이 낫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오리엔탈리즘의 기저에는 문명화되고 우월한 서양보다 열등한 동양이라는 전제가 깔려있기 마련인 것이 현실이다. 예외라면 불교, 힌두교나 그에 기반한 문화들은 평화적이기에 물질문명에 찌든 서구사회에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나 몇몇 공동체주의 성향 정치철학자들이 말하는 "동양권에는 서구권에서 잃어버린 덕과 정의가 살아있다"는 등의 주장들이 있다. 그런데 이 또힌 '포지티브 오리엔탈리즘'의 예로 볼 수 있다.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이라고 지적받는 부정적 인식들 사이에도 대조적인 것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동양인들은 비굴하고 소극적이며 겁이 많다." ↔ "동양인들은 잔인하고 무례하며 사기를 잘 친다." 와 같이 모순된 편견도 존재한다.

《오리엔탈리즘》에서는 주로 중동과 인도에 대한 서술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중동과 인도를 제외한 비서구권에 대한 논의는 없으나, 이후에 비서구권을 대하는 근대 서구권의 시각을 분석하는 데 유효한 이론으로 각광받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짧게는 시누아즈리나 튀르크리부터 길게는 오리엔트에 대한 고대 그리스의 인식까지 그 기원을 소급할 수 있다. 그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것은 역시 이질적인 것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 대상화이다.

근대 서구문명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나머지, 비서구권도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을 스스로 투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내재화된 오리엔탈리즘'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내재화된 오리엔탈리즘' 언설로는 소위 태평양 전쟁 시기에 일본에서 외친 구호인 '근대로의 초극(近代への超克: 동양의 정신문명으로 근대 서구의 물질문명을 극복하자는 의미)'이 있다.

서구권의 영화나 드라마에도 심심찮게 등장하며, 작품에 따라 상당히 묘하게 녹아있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동양의 신비성이나 이념을 강조하는 형태부터, 직접 일본도를 든 사무라이나 때로는 중국과 일본풍이 뒤섞인 닌자가 등장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아시아 나라들의 문화 차이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 한다. 한국인네덜란드, 벨기에,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문화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나마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같은 네덜란드 문화권이고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은 같은 북게르만 문화권이기에 참작의 여지는 있다. 물론 이렇게 구별하는 것도 유럽 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의 얘기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편이다.

이러한 성향은 만화에도 등장한다. 서구권에서는 영어식 이름이나 지명, 소재가 등장하는 만화 못지 않게 동양풍 배경과 소재가 등장하는 만화도 인기를 끌고 있다. 동양풍 복장과 소재를 이용하는 드래곤볼, 나루토, 블리치 등이 이 오리엔탈리즘과 맞아떨어져서 영미권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오리엔탈리즘론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이 계열의 학자들이 흔히 일으키는 문제이지만 이론의 검토 대상이 너무 방대하다 보니 사실문제를 정확히 검토하지 않고 논증에 활용하는 일이 있어 설득력을 잃기도 한다.

동명의 저서는 국내에도 번역되어 있다. 교보문고에서 출판했고, 번역자는 영남대학교 박홍규 교수다. 그런데 번역자가 법학자다 보니 사이드가 방대하게 인용한 문예 작품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각주를 통한 보충이 부실하다. 반면에 역주 및 역자의 후기에는 번역자 본인의 성향이 매우 강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하다가 오히려 옥시덴탈리즘 성향을 보이기도 하고, 오리엔탈리즘과는 관련이 없는 개고기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게다가 번역된 문장이 정제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다.


3. 역사적 변천[편집]


언급한대로 '오리엔탈리즘' 이라는 용어 자체는 1978년에 출간된 에드워드 사이드의 저서가 기원이기는 하지만 서구의 동양학을 지칭하는 말은 그 전부터 있어왔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오리엔트를 저열하고 퇴폐한 전제군주정이라 멸시했을 망정 야만인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대신 설화를 통해 그리스인이 세운 나라라고 주장했다. 이건 이집트도 마찬가지. 당대부터 페르시아 제국은 수준 높은 문명국이었고, 로마 제국 시절에도 파르티아, 사산 왕조는 야만국이 아니었으며 이들과 교류하던 유럽인들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중국에 대해서도 교역을 통해서 세리카 등으로 불렀는데 세리카는 비단을 뜻하는 라틴어 sericum에 a를 붙인 이름이다. Espania, Britannia, Italia, Croatia, Serbia, Romania 등 국가나 지명 뒤에 붙는 A이다. 비단이 서양에 전래된 것은 고대 그리스 시기부터이며 로마 제국 시절에도 비단이 꽤 사용되었다. 참고로 영어의 Silk는 라틴어 sericum, 더 정확히는 라틴어 sericum의 기원인 고대 그리스어 sērikós가 기원이며 이것은 다시 중국어 絲(si, 실 사)에서 온 것이다. 폼페이 유적에서 중국제 비단 옷의 모습이 그려진 벽화가 발굴되기도 했다. 이처럼 중국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저 멀리 그런 곳이 있다는 사실을 일단 알고는 있었다.

중세이슬람 제국 전성기에 서구 유럽 문명은 대체로 이슬람 세력의 침략을 당하는 입장이었다. 십자군 전쟁, 레콘키스타, 시칠리아 탈환과 노르만의 알제리 정복 등의 반격도 있었으나 유럽 문명의 기원인 고대 로마의 영토인 팔레스티나, 북아프리카, 아나톨리아 등이 모두 이슬람 세력의 손에 넘어갔고,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발칸 반도가 모두 먹히고 중부 유럽까지 공격을 받았다.

중세 유럽인들도 예루살렘성지순례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이슬람 세력과의 교역, 포로생활, 십자군 전쟁, 레콘키스타, 시칠리아 탈환을 거치며 남겨진 이슬람 문명의 모습 등을 통해 이슬람 문명이 야만스러운 문명이 아니라 유럽 문명 못지 않게 발달한 문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중세 유럽인들은 동양인들을 신심없는 이교도라고는 욕할지언정, 열등한 야만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중세까지만 해도 기독교의 가치관이 깊게 남아 있던 탓에 동방 문명을 상종하지 못할 이교도라 볼 뿐이지 이들을 연구하고 관심의 대상으로는 보지 않았다.

다만, 저렇게 기독교의 위상이 높던 중세유럽에서도 이미 몇몇 편리해 보이는 문물은 이교도들인 아랍에서 받아들였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아라비아 숫자. 원래 인도 기원이니 인도 숫자라 불러야겠지만, 유럽에서는 중동을 거쳐 들어왔으므로 아라비아 숫자(arabic number)라고 부른다. 아라비아 숫자는 1200년대 초반에 유럽에 들어왔으며, 중세 끄트머리인 1400년대 후반부터는 교회에서조차 아라비아 숫자를 썼고, 1500년대 중반부터는 일상생활에서도 로마 숫자를 거의 몰아내었다. 그 밖에 물질적인 것들로 면직물(인도기원이지만), 시럽, 소다(음료수) 등등은 모두 중세에 중동에서 유럽으로 들어왔으며 연금술과 거기서 이어지는 화학도 중동을 통해 도입되었다.

그런데 근세에 이르자 유럽에서 동양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이슬람 세력은 더 이상 유럽의 위협이 아니었으며, 대항해시대의 개막으로 중동을 넘어 인도나 중국과도 교류하게 되면서 이들에 대한 호기심도 생겨났다. 또 계몽주의의 발현으로 유럽에서 기독교의 색채가 옅어짐에 따라 동양인들을 사악한 이교도들로 보는 관점이 아닌 우리들(유럽)과는 또다른 문명이 있는 세계로 바라보기 시작했으며, 이 시점부터 유럽의 작가나 예술가들이 동양의 문화를 자신들만의 시각으로 묘사하기 시작했고, 동양을 연구하기 시작하는 학자들도 나타났다. 당시 이들을 오리엔탈리스트(Orientalist)라고 불렀다.

이 시절에 전 유럽에 걸쳐서 동양풍 유행이 나타나게 되었다. 중국풍이라고도 번역하는 시누아즈리(Chinoiserie), 터키풍인 튀르크리 등이 퍼졌으며 로코코 양식 전반에 동양풍 유행이 나타났다. 치펜델 양식(chippendale style)이라 일컫는 중국식 가구 스타일이 널리 유행했으며, 중국산 도자기가 널리 쓰였고 아예 유럽인들이 우리도 중국풍 도자기를 한 번 만들어보자해서 나온 게 오늘날에도 유명한 본차이나 도자기다. 건축양식 중에서는 영국의 로열 파빌리온, 프랑스 베르사유 궁의 트리아농 궁 등 동양풍 색채의 영향을 받은 건축물들이 널리 등장했으며, 동양식 파고다 스타일 건축이 널리 쓰였다.

회화양식 중에서도 프랑수아 부셰, 크리스토프 위에 처럼 동양의 화풍에 영향을 받은 화가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 때의 오리엔탈리즘은 오히려 동양을 신비하고 환상적이며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오스만 제국데브시르메 제도나 한자 문화권의 과거제도를 소개하며 '동양의 능력주의'는 근대 국가를 지향하던 계몽주의자들이 여전히 유럽 사회 전반에 남아 있던 봉건제적 정치적 분화, 귀족 권력의 잔재 등을 비판하는데 전형적으로 쓰인 레퍼토리였을 정도. 우습게도 정작 실무 능력은 대학에서 교육받고 오랫동안 경력을 쌓은 서양 관료들이 훨씬 우수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이 시기에 서구에서 다른 문명을 대등하거나 우월한 상대로 간주했던 것은 아니다. 오스만과의 관계 변화에 따른 튀르크리의 발흥이 대변하듯이 당시의 오리엔탈리즘 열풍은 대항해시대의 개막 뒤에 타 문명권에 대한 확고한 질적 우위를 점한 서구에서 지구 방방곡곡을 탐험하며 외국의 신기하고 이질적인 문화를 즐긴 것의 연장선상에 있다. 중국처럼 타 문명을 오랑캐로 멸시하지는 않았지만 동경이나 열등감을 느끼지도 않았고 오히려 흥미로운 연구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중국에 대해서는 아직 막연한 환상이 남아 있었지만, 이 시기에 이미 서구에서는 이슬람과 인도를 후진적인 문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18세기에 이르면 서구에서 동양을 바라보는 시각이 또다시 달라졌다. 산업 혁명 이후에 유럽문명이 전세계를 지배하는 패권문명이 되면서 제국주의 시대가 열려 비서구 각국이 유럽열강들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시기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이 때부터는 서양에서 비서구인들을 여지 없이 열등하고 무능력한 존재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비판하는 식민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오리엔탈리즘은 바로 이 시기를 말하는 것이다. 즉, 식민지화를 정당화하고 서양의 우월함을 내세우기 위해 동양을 열등한 존재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다만 에드워드 사이드의 정의를 떠나서 원래 오리엔탈리즘은 반드시 제국주의의 시각으로 동양을 열등하다고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라, 서양에서 동양을 인식하고 정의하는 시각 전반을 이르는 말이라는 것은 위와 같다.


4. 비동양권의 경우에[편집]


오리엔트라는 말은 라틴어 'oriens'에서 왔으며 oriens는 원래 '뜨다'를 의미한다. 물론 해가 뜨는 곳, 즉 동쪽을 뜻한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 즉 아시아 문명에 대한 시각을 말한다. 그런데 백인우월주의의 시각으로 타 문명을 낮추어 보는 경우에도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단어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남북 아메리카 원주민,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원주민, 오세아니아, 태평양 원주민들에 대한 시각은 원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는 없다. 애초에 이곳은 오리엔트도 아니니, 엄밀히는 이들에 대해서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말도 성립할 수 없다. 지금도 영어의 오리엔탈리즘은 원칙적으로는 이들에 대해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이럴 때는 그냥 간단하게 인종차별이라고 부른다.

유럽에서는 고대부터 교류하던 동양과는 달리 신대륙,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원주민들과 대등한 관계로 교류한 적도 없고 인종주의가 타파되는 20세기 전까지는 아예 처음부터 열등한 존재로 여겼다. 바야돌리드 논쟁 등으로 알 수 있듯이 그나마 양심적인 유럽인들은 원주민들을 교화의 대상 정도로는 보았지만 자신들과 대등한 존재라고 여긴 적은 20세기 전까지 한 번도 없었다. 북미에서는 힘이 약했던 초기에 식민지 이주민들과 원주민들이 비교적 대등한 교역관계를 맺는 일이 있었지만 유럽에서 대등한 존재로 여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때문에 이런 단어가 생겨날 여지도 없었다.

간단히 예를 들면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이 있다고 비판받는 인디아나 존스 같은 작품은 'Indiana Jones', 'Orientalism'으로 검색하면 학술 서적, 문서, 언론기사도 수두룩하게 나온다. 물론 인디아나 존스는 4편을 제외하고는 동방이 배경으로 1편은 이집트, 2편은 인도, 3편은 터키(사실 주요 무대는 유럽 전역이다)이니 오리엔탈리즘이 맞다. 영화 300도 오리엔탈리즘적이라며 비판받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역시 식민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는 아포칼립토를 다루는 학술 서적이나 언론 기사는 'Apocalypto', 'Orientalism'으로는 잘 나오질 않는다. 물론 'Apocalypto', 'Racism'이라고 검색하면 숱하게 나온다. 오리엔탈리즘이 아니라고 해서 비판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인종차별이라고 비판한다는 말이다. 다만, 원칙적으로는 이렇다는 것이고 영어로도 신대륙과 관련해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용어를 쓰는 사례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는 주로 일반인들이 인터넷 게시판이나 SNS 등에서 잘 모르고 쓰는 것이지 학술적, 전문적으로는 이렇게 부르는 일이 거의 없다.


5. "동양" 내부의 오리엔탈리즘[편집]



5.1. 한국 내부의 오리엔탈리즘[편집]


한국의 경우에도 전공자거나 대(大)중동의 역사/군사 등의 주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대(大)중동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이슬람, 히잡, 밸리댄스, 알라딘, 아라비안 나이트, 테러리즘, 성차별"이 전부인 사람이 수두룩하다. 게다가 1990년대에 민주화가 되면서 미국 문화가 유입되었는데 그중에서 1970년대까지 미국에서 성행했던 뉴에이지가 유입되어 인도, 티베트 등 남아시아에 대한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관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현재에도 대(大)중동 문화를 몰이해하여 논란을 빚는 경우는 매우 흔하다. 유튜브 콘텐츠 튀르키예즈 온 더 블럭에서 튀르키예인 흉내를 낸답시고 아랍 복장을 입었다가 튀르키예 네티즌들의 뭇매를 맞은 것이 그 사례도 있다. 아랍 옷 입고 터키 아이스크림 판 이용진...제작진 사과 “새 의상 준비 중”(조선일보).

한편 영미권서유럽을 같은 '서양'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간과하기 쉽지만, 영미권과 서유럽도 사회, 문화 측면에서 차이가 상당히 많으며, 이러한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과장하여 서로간에 갈등을 빚는 사례도 있다.

5.2. 일본의 내적 오리엔탈리즘[편집]



5.2.1. 일본 제국의 오리엔탈리즘 내재화와 민족주의[편집]


"그 대열(아시아)을 벗어나서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해야 한다. 중국과 조선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는 이웃 나라라 하여 특별히 배려할 필요 없이 서양인이 이들을 대하는 방식에 따라서 처분해야 할 것이다."

- 후쿠자와 유키치, 1885년 시사신보 논설에서. 그의 탈아론이 드러난 대표적인 문장이다.

19세기 서양 세력의 침투가 가속화됨에 따라 동아시아 각국은 근대화를 추진하였는데, 그중 일본은 가장 성공적인 결과를 얻어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유일하게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한다. 이때 오리엔탈리즘 또한 내재화되어, 서양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체계를 구성하는 요소로 기능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일본은 ‘탈아’를 통해 인접한 아시아 국가들을 일본 자신과 구별하고, 차별과 멸시의 시각을 가지고 바라보며 지배의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오리엔탈리즘에는 '문명국인 서양과 대비되는 열등한 동양 국가인 일본'과 '열등한 여타 동양 국가와 대비되는 문명국가인 일본'이라는 상반된 인식이 병존하며, 이 때문에 세계 인식과 주체성 획득의 측면에 있어서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근대 일본의 국민적인 체험으로부터 생긴 대외관의 가장 큰 특징은 ‘낡은 모욕적, 양이적인 서양관’의 극복과 더불어 ‘구태의연한 근린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일본을 구별하려는 자의식’이 강화되어 두 가지 대외관이 양극으로 분해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 강상중,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이경덕·임성모 역, 이산, 1997년, 91p

자기모순적인 관념이 형성된 이유는 일본의 개항 과정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서양의 경우 고대로부터 형성된 동양과 서양이라는 두 집단을 구분하는 인식이 중간에 파괴되는 일 없이 점차 확장되어 끝내 근대 제국주의 식민권력과 융합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기에 그들은 동양과의 관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의심의 여지 없이 확고하게 점할 수 있었다. 반면 일본은 강제적인 개항이라는 폭력 행위의 피해자 상태에서 근대화를 시작하였기에, 한때 서양을 오랑캐로 여겼던 관념은 파괴된 대신 그들에 대한 열등 의식이 기저에 확고히 자리잡았다.

그 결과 일본의 심상에는 아시아 출신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두 가지의 인식이 형성된다. 하나는 '유럽 세력의 동진을 막기 위해'[4] 유럽 문명을 내재화하여 이 당시에 입은 정신적인 외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식이며, 다른 하나는 아시아 국가로서 서양 세력의 침탈에 맞서고 주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관념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일본 식민제국의 건설은 경제적인 이유보다는 심리적인 이유로 강박적이리만치 빠르게 진행되었다. 다시 말해, 동양 안에서 여타 아시아 국가들을 열등 국가로 재정립하고 자신을 이에 대비시킴으로써 잃어버린 주체성을 찾고, 서양에 대항해 자국을 중심으로 ‘주권선(내지)’과 ‘이익선(외지)’이 구축된 방사형의 제국 체제를 구축하는 작업이 수행되었다.[5] 때문에 도쿄대 강상중 교수는 당시의 일본의 제국 건설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금융자본주의 국가로서의 제국주의 실행자라는 실질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이데올로기 면에서는 이미 훌륭한 제국주의 국가였다."

- 강상중,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95p

한편, 이 과정에서 동양은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구별을 통해 기존 동아시아 체계의 종주국이었던 중국이 대표하는 '지나'라는 열등한 대상, 그리고 문명이자 진보의 주체에 해당되는 '일본'의 두 가지로 나뉘었다.[6] 그리고 사이드가 주장한 바와 같이 이러한 구별 의식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다양한 서양의 과학적 학문이 동원되어, 일본 문명에의 문화적인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중국 문명에 대한 철저한 부정[7] 과 세계 보편사적인 유럽 문명과 일본 문명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방향의 연구가 진행된다.

예를 들어 사학자 다케고시 요사부로(竹越與三郞)의[8] 경우, 저서 《이천오백년사》에서 유럽 문명이 해양을 통해 일본에 도달하였고, 그 증거로 일본이 가나로 대표되는 자체적인 표음문자를 사용함을 들었다. 그에 따르면 정체적인 중국의 표의문자인 한자는 단순히 빌린 것일 뿐이다.[9] 그리고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의[10] 경우에도 《무사도》를 통해 서양에서 종교를 통한 도덕 교육이 이루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 또한 무사도를 통한 도덕 교육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며 일본의 유럽적 특징을 강조하였다.[11]

이러한 이항 대립적 비교 연구는 일본이 1895년과 1910년에 각각 대만조선 등 '지나'에 속하는 식민지들을 획득함에 따라 식민지 지배 권력과 융합하여 더욱 심화되었다. 그로 인해 식민지의 지나적인 속성, 그리고 이에 대비되는 일본의 유럽적 속성이 더욱 체계적으로 정리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진행된 통제된 교류를 통해 일본은 자신들의 우월성과 지배의 당위성을 더욱 확고하게 믿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때부터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체계로서의 오리엔탈리즘 담론이 본격적으로 구성되었다.

대표적인 예시가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와[12] 니토베 이나조의 사례이다. 후쿠다 도쿠조의 경우, 그의 저서인 《일본경제사론》과 《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에서 막스 베버의 사회경제 발전 이론에 따라 문명야만을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조선은 높은 노비의 비율로 보아 봉건제 사회 진입하지도 못하였기에, 정상적인 발전 단계에서 이탈한 '이계'로 정의된다. 반면 일본은 서양의 봉건제에 대응하는 무사 계급의 지배를 받아 근대 국민국가의 자본주의 체제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자체적으로 마련한 '정계'라고 주장하였다.

"고도의 문화로 갑작스레 군림해서 그 역사적 발전을 무시하고 그 국민적 성격을 양해하지 못하는 외국 문화(서양)여서는 안 된다. 한국인을 노동자로 계발하고 유도해서 완전한 인격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한국의 토지를 개척하고 경작해서 서서히 자본화하고 그 가치를 높이는 기술을 이해하고 있는 자여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에 수많은 경제적 설비를 베풀고, 수천년의 교류에서 얻은 양해와 동정을 통해 한국인을 부리는 데 익숙하며, 한국의 토지를 사실상 자기 사유로 삼아 서서히 농업경영을 시도하고, 그 생산품인 쌀, 콩의 최대 고객인 우리 일본인이야말로 이 사명을 수행하는 데 가장 적합한 자가 아닌가. (......)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서는 그 부패와 쇠망의 극을 달리고 있는 ‘민족적 특성’을 밑바닥부터 소멸시킴으로써 우리에게 그들을 동화시켜야 할 자연적 운명과 의무를 지닌 ‘유력하고 우세한 문화’라는 무거운 사명을 다해야 할 자가 아닌가."

- 후쿠다 도쿠조, “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 1902년


그리고 샤토브리앙이 오리엔트에 대해 보였던 사례와 같이, 후쿠다의 조선 연구에는 조선 여행에서 받았던 경험에서 기인한 '전근대적이고 더럽고 나태한 조선인'이라는 개인적 편견이 짙게 깔려 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인들의 나태한 모습에서 발전에 대한 욕망이 낮다는 결론을 도출하였고, 때문에 그들이 여전히 고대 노예제 사회에 안주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오리엔탈리즘 담론 내의 통제된 교류를 통해 형성된 그의 관념은 최종적으로 일본이 조선을 이끌어 이러한 열등한 속성을 개량해야 한다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진다.[13]


5.2.2. 동양사학과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편집]


하지만 이때까지도 일본의 오리엔탈리즘은 일본이 여전히 서양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완전한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위에 언급한 부시도 및 일본경제사론 모두 서양의 역사적인 사례와 일본의 사례를 무리하게 등치시켰다. 예를 들어 후쿠다의 경우, 그의 이론의 사상적 배경이라 할 수 있는 막스 베버부터가 '일본의 봉건제는 서양의 레엔제 봉건제와는 다르다'고 딱 선을 그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을 일본의 무사 지배 체계를 설명하는 데 그대로 인용하였다.[14] 때문에 동시대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베버 연구자였던 칼 라트겐(Karl Rathgen)은[15] 후쿠다의 이런 어거지 대입을 두고 '선을 넘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일본이 러일전쟁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서 유럽 국가와 동등한 위치에 선 반면 서양 국가들 간의 관계는 전쟁의 여파로 경색되자 이러한 상태는 전환기를 맞이한다.[16] 이제까지는 서양을 답습하는 데 머물렀다면, 이제는 일본 고유의 문명을 재평가함으로써 일본 문명이 서양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또다른 '보편 문명'임을 드러내어 완전한 제국주의적 주체성을 획득하고자 한 것이다. 강상중 교수는 당시 일본의 이러한 조류를 두고 '나르시시즘적이다'라고 표현한다.

이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한 것은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를[17] 필두로 한 '동양사학' 연구였다. 시라토리는 만주조선 지역(만선)에서 서양의 학문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서양이 동양(오리엔트)를 학문적 연구를 통해 유럽에서부터 분리하였던 것처럼, 이 지역의 언어학적 기원 연구를 통해 일본과 열등한 만선의 기원적 공통점이 없음을 입증한다. 그리하여 일본은 독립된 인종으로 규정되며, 서양과 동양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이 둘의 장점을 주체적으로 흡수하는 또 다른 보편자로 정의되었다.[18]

보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천황제에 기초한 일본 민족이념을 창출하고자 했다. 이는 비교언어학에 기반했던 당대 유럽에서의 민족연구 방식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여러 형제 민족 중 '오리엔트'와 '아시아'의 열등한 문화에 물들지 않은 가장 순수한 이들이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당시 유럽 민족주의의 주요 화두 중 하나였다. 셈족 유대인이 독일을 망친다며 모조리 학살한 나치 독일이 가장 유명하지만, 정도만 다를 뿐 다른 유럽 국가들 역시 자국이 가장 순수하다며 제국주의와 민족의식 고취에 잘 써먹었다. 가령 영국인은 형제 민족인 인도인들이 열등해진 이유가 아랍을 비롯한 오리엔트에 물들어 기존의 순수성을 잃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순수성을 잘 보전한 앵글로색슨이 이끌어 교화시켜야 한다는 논리로 인도 식민지배를 정당화했다. 그 외 아시아 기원 민족들의 영향을 받은 발칸 반도 국가들과 러시아는 종종 진정한 유럽이 아니라고 매도당하였으며, 아예 기원이 아시아 국가인 튀르키예헝가리 그리고 핀란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럽에서 인도유럽어족 이론에 기반한 순수 아리아인 담론이 그러했듯, 시라토리는 초기에는 우랄알타이어족 이론에 기반하여 몽골어일본어가 동류에 있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그 중간 가교 역할을 하는 조선어와의 관계를 연구했다. 이 방식을 통해 그는 몽골, 조선과 일본을 중국과 기원적으로 분리하였다. 그리고 하늘을 뜻하는 단어의 언어학적 비교 연구를 통해 우랄알타이어족 민족들의 천손강림 신앙, 즉 북방민족의 텡그리 신앙과 고대 조선의 단군 신앙, 그리고 일본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숭배 신앙이 공통의 기원을 가졌으며 중국 문명과 관계 없음을 밝혔다.[19] 그러나 이어진 연구를 통해 일본과 몽골 그리고 조선 간에 언어학적 공통점을 찾을 수가 없자, 그의 논리는 오히려 한술 더 떠 일본은 '순수한', '독자적'인 민족이라는 아주 인종주의적인 주장으로까지 나아간다.

후대 동양사학 연구자들은 그의 논리를 이어받고 더 발전시켜 나갔다. 가령 사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蔵)[20] 같은 이들은 각 민족의 샤머니즘 전통과 일본 고대 신토의 관계에 주목하였다. 북방민족의 샤머니즘, 조선의 무속신앙과 고인돌 문화, 그리고 일본의 태양신 신앙과 고분 문화가 샤먼 숭배 전통이라는 공통점의 측면에서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본 그는, 과거 조선의 우수한 도래인이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인이 되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불평등한 관계 속에 이는 객관적으로 진행된 연구가 아니었으며, 매우 정치적이었다. 조선은 일본과 달리 낙랑군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소위 '식민지배'를 받았기에 순수성을 잃었다는 것이 동양사학자들의 시각이었다. 이는 일본 제국의 식민 정책에 다시 적용되었다. 즉 동양사학 연구는 일본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신앙만이 북방 계통 민족들이 공통적으로 보유했던 천손 사상의 유일한 정통이자 순수한 형태이며, 따라서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 제국만이 옛 형제들을 이끌고 교화할 자격이 있다는, 지극히 제국주의적인 결론의 역사적 근거로 작용한다. 사이드가 말한 오리엔탈리즘의 최종적 의미, 즉 식민지배 담론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의 학문적 기반이 된 것이다. 이를 두고 일선동조론이라 한다.

'만주'라는 지역을 최초로 규정지은 것도 이들 동양사학자들이었다. 그들은 독립된 지역으로써의 의미가 부족하던 동북 지역을 '만주'로 새로이 규정했다. 당시 일본인들에게 만주는 중국 및 유럽과 분리된 우랄알타이어족의 고유 영역이었으며, 알타이어족의 맹주이자 중국과 유럽의 장점을 모두 흡수한 선도문명인 일본이 이끌어 계몽하고 개발해야 하는 지역으로 선포됐다. 내선일체, 오족협화, 만주국 등이 이러한 논리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에 이르면 서남태평양 일대에도 이러한 시각이 확장되어 남양은 서구가 아니라 새로운 선도문명 일본이 주도하는 대동아공영권의 영역으로 선포됐다. 물론 이러한 허울 좋은 간판을 걸어놓은 만주 지배의 실상은 여느 식민제국들이 그렇듯 한국인 및 퉁구스계 민족들의 독립된 권리를 전부 부정하고 일본 제국의 독점적인 발전에 강제로 동원하는 것이었다. 일본 제국령 만주와 조선에서 '형제' 민족들의 권리는 없었고, 큰형님 일본이 모든 것을 결정하며 그것은 항상 옳았다.

이렇게 일본은 열등감을 벗고 주체성을 확보했으며, 자신의 오리엔트인 만선 지역과 중국을 정당히 침공할 수 있는 사상적인 근거를 완벽히 마련하여 1931년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대륙 침략에 나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일본 제국주의는 경제적 발전 단계가 아니라 주체성의 획득과 주권선의 보호를 위한 심리적인 강박관념에 의해 추진된 것이었다. 따라서 1930년대의 확장은 대공황과 겹쳐 제국의 경제적인 부담을 가속화시키고 적을 양산함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침략을 이어가기 위해 형성된 것이 '동아'라는 협동체 개념이다. 이는 일본이 열등 인종이라고 정의했던 만선 지역 주민들, 심지어 지나라고 멸시해 마지않던 중국인마저도 일본인의 개념에 억지로 포괄해서라도 전쟁을 무리해서 수행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21]

종합하자면, 위와 같은 발전 단계를 통해 서구 식민제국들의 오리엔탈리즘은 일본 내부에도 내재화되어, 일본이 같은 동양 국가들을 폭력적으로 침탈하는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로써 작용하였다. 그러나 일본 역시 근본적으로는 아시아에 속했던 만큼 서양의 오리엔탈리즘과는 달리 이중적인 모순점이 존재하였고, 이는 결과적으로 일본이 자신의 체급과도 맞지 않는 거대 제국을 형성하다가 전쟁을 일으키고 파멸하는 동인으로 작동하였다.


5.2.3. 현대 일본에서[편집]


몇 년 후, 내적 오리엔탈리즘에 기반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적 팽창은 태평양 전쟁의 종전과 함께 끝났다. 압도적인 미군의 폭격과 원자폭탄으로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되는 과정 속에서, 과거 쿠로후네 사건 당시에 그러했듯 서구에 대한 열등 의식이 다시 살아났다. 식민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내적 오리엔탈리즘 담론의 하드웨어적 기반인 일본 제국 체제는 GHQ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파괴되었다. 일본이 당연히 이끌어야 하는 영역이었던 식민지들은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지닌 독립 국가가 되었으며, 제국의 중심이자 한때 신이었던 천황은 이제 어떤 정치적 권한도 없는 단순한 상징이자 인간이 되었다.

그러나 냉전이라는 이유로 태평양 전쟁의 전후 처리가 확실히 매듭지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은 미국이 동아시아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국제 질서에 복귀했고, 일본의 오리엔탈리즘과 우월 의식도 전체주의적인 식민제국의 모습을 탈피하여 경제적인 형태로 복귀하였다. 그 결과 일본의 경제적, 문화적 헤게모니는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에 빠지고 중국과 한국이 성장하는 근래까지 이어졌다.[22]

물론 일본인들의 내적 오리엔탈리즘은 두 국가의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위상이 일본과 동등 또는 그 이상이 된 오늘날이 되어서는 과거에 비해 많이 약해진 것이 사실이다. 일본인들의 무의식 속의 '열등한' 한국중국의 이미지가 실제 그들이 현실에서 마주하는 경제문화 강대국으로서의 한국과 중국의 모습으로 인해 점차 깨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2000년대 이후로 일본인들이 한국 대중문화에 20년 가까이 노출되고, 중국에게 경제적으로 역전된 것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이래로 정립된 일본 민족주의 관념과 일본인으로써의 정체성 자체가 내적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성장했기에, 일본과 여타 동아시아를 이항 대립 구도로 이해하는 사고방식은 일본 내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날에도 많은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아시아보다는 유럽에 가깝다고 생각하며, 유럽미국에 대해 열등 의식을 내보이면서도 그들과 자신들의 공통점을 찾고자 한다. 때문에 일본의 내적 오리엔탈리즘은 현재까지도 일본인들이 가진 민족의식과 외부 인식의 근간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메이지 시대 이래로 일본의 내적 오리엔탈리즘 안에 자리잡은 양가적 인식, 즉 '동양과 달리 서양 문명에 가까운 일본'을 내세우면서도 '서양과는 다른 일본'[23]이라는 자기모순적인 관념 사이에서 벌어지는 괴리감 역시 아직도 해결하지 못했다. 일본인들의 국제적 위상은 제국 시절과 냉전 후반기 두 차례에 걸쳐 세계를 집어삼킬 기세로 불타올랐으나, 결국에는 1853년의 강제 개항과 1945년의 패전, 1990년대의 경제적 몰락, 그리고 구 식민지들의 약진 속에 꺾이고 무너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본인들이 그토록 유별나게 한국과 중국의 부정적 측면에 집착하고 구미권의 시선과 인정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것은, 여전히 서양과 동양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 그들의 존재론적 불안을 드러낸다.

여담으로, 내적 오리엔탈리즘 담론이 가장 활발했던 일본 제국 시절 생산된 동양사 정보들은 비단 현대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까지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인터넷에서 소위 '일뽕'이라고도 불리는 극단적인 일본 추종자들이 앵무새처럼 주워섬기는, 구 제국 시절 일본인들이 저술한 조선 여행기들과 역사서들이 그 예시다. 이 서적들은 라트겐이 비판했던 후쿠다 도쿠조의 저서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므로 매우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 세기도 더 전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고는 한다.

6. 사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오리엔탈리즘/사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비판[편집]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는 지난 2세기 간의 서구 및 러시아 학자들의 '오리엔탈리즘'을 나무라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공들여 연구하지 않았다면 이슬람권을 비롯한 동쪽 세계의 지적 활기에 대한 이야기 가운데 상당 부분은 결코 오늘날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철저한 국제적 공조 덕에 가능했다.

잃어버린 계몽의 시대 / 프레더릭 스타 저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을 오남용하면 상술한 사이드 쿠틉의 극단적 사고방식과 다를 바 없이, 제3자가 자신들을 비판, 비평하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배타주의로 이어지기 쉽다.

20세기 후반부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이 화두가 되면서 사람들이 흔히 간과하는 부분이 있는데, 오늘날 중동/중앙아시아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한 것에는 19세기 오리엔탈리스트들의 기여가 결코 적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발 오일머니 때문에 서구 학자들의 중동사/중동문화 해석은 무조건 다 틀린 것이라고 강요당하는 분위기마저 조성되어 있는데,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으로 서구 학자들의 기여를 모두 평가절하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R. A. 니콜슨이 아랍 문학사 연구에 기여한 바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빠르다.

해당 개념의 주창자로 알려진 에드워드 사이드영문학자이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책은 영문학 고전을 상당히 많이 인용했기 때문에 한국어 번역본으로는 그의 책의 진가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 그의 저서가 한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이런 부분이 제대로 번역되지 못해서 한국어판 번역본 기준으로는 제대로 된 책이라고 보기 힘든 수준이기도 하다.즉 사이드는 중동아시아 전문가가 아니다.

비교하자면 190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중동아시아에 대하여 전공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양성과정은 런던파리베를린로마이스탄불모스크바중앙정부부처, 싱크탱크, 명문대에서 극소수의 자국민을 선발한 다음에 약 10년간 이런저런 전공학문들(언어학, 논리학, 역사학, 지리학, 사회학, 고고학, 인류학, 종교학)을 섭렵하면서 현장학습과 실무연수를 모두 마치고, 학석박사학위를 받아 연구원이나 정보기관원 및 고급관료와 대학교수로 임용하는 절차였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런 절차를 밟지 못했고, 전공 분야도 문학과 철학에 한정되어 있으니, 그의 논거는 허점이 많다. 실제로 그는 중동아시아 학술연구에 어설프게 덤벼드는 매우 큰 잘못을 저질렀다. 그래서 중동아시아 전공학문(앞에서 언급한 학문들)의 대석학급 학자들인 버나드 루이스, 클로드 카엥, 루이 마시뇽, 파울 크라우스, 할릴 이날즉, 조셉 플레처 등은 하더라도 이론과 현장에 모두 밝은 VIP급 능력자로서 사이드를 명색이 대학교수라는 사람이 논설문의 기초지식도 제대로 모르면서 엉터리로 덤비냐고 맹렬하게 비판했다.

따라서 오늘날에 에드워드 사이드의 이론을 그대로 잘못 인용하면, 이를테면 오늘날의 시점에서 동로마 제국의 역사에 관련한 논문을 쓰면서 18세기 에드워드 기번로마제국 쇠망사에 나온 낡은 이론을 재인용하는 수준으로 우스꽝스러운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방패를 내세우면서, 서구인에게 동양에 대한 학습을 강요하는 문제도 있다.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동양인은 과연 서양을 깊이 있게 알고 있냐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대한민국 외교부에서 발틱 국가를 발칸 국가로 잘못 표기해 놓고 방치하다가 라트비아 대사가 외교부에 항의한 사건도 있었다.#1 #2.

북미와 유럽 등으로 큼직하게 구분하는 정도면 그나마 양반이고 그냥 '서양=미국'으로 퉁치는 사람이 넘치는 게 현실이다. 또한 일본산 서브컬처에서는 중세와 근대가 버무려진 시대를 배경으로 독일과 프랑스가 섞인 공간에서 영어와 독어가 섞인 이상한 이름을 쓰는 캐릭터들이 돌아다닌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든 문화권과 문화권의 관계에서든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이해가 필수적인 것일지, 그 기준을 외국인들에게 터무니 없이 올려잡는 게 아닐지 반성해야 할 일이다.

8. 관련 문서[편집]


[1] 임시연,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의 오리엔탈리즘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2003년, 40p~41p[2] 《오리엔탈리즘》, 16~18p[3] 위의 책, 18p[4] 고야스 노부쿠니, 《동아, 대동아, 동아시아》, 이승연 역, 역사비평사, 2005, 27p[5] 위의 책, 85p[6] 윤명철, 〈오리엔탈리즘의 정의 및 역사적 전개-한국상황과 관련하여〉, 한국민족학회, 2010, 225p[7] 《동아, 대동아, 동아시아》, 133p[8] 1865~1950. 게이오의숙 출신의 사학자. 중의원과 귀족원 의원직을 역임하기도 했다.[9] 위의 책, 69p~72p[10] 1862~1933. 일본의 외교관. 무사도를 주창하는 등 소위 '문명국' 일본의 위상 확립에 매진했던 인물이었으나, 그 과정에서 식민지배의 차등적 질서를 옹호하고 제국 식민정책에 실무자로 참가했다.[11] “니토베 이나조는 무사도를 쓰게 된 동기를 이렇게 말했다... 즉 ‘종교 없이 어떻게 도덕교육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라고.” 위의 책, 51p[12] 1874~1930. 일본의 경제학자. 뮌헨 대학교 출신으로 일본 경제학의 선구자로 꼽힌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당시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복지국가론까지 주창한 인물이었으나 식민지 조선에 대해서는 인종차별적인 시각을 숨기지 않았다.[13]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99p~103p[14] 위의 책, 100p[15] 함부르크 대학교 초대 총장. 1882년부터 1890년까지 도쿄제국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동시기 일본 제국 농상무성의 고문으로 있었다.[16] 위의 책, 131p[17] 1865~1942. 도쿄제국대학 출신의 사학자로, 동양사학 연구의 선구자적인 인물이다. 미우라 고로가 총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가쿠슈인에서 교편을 잡았고, 쇼와 천황을 가르치기도 했다. 한국학의 창시자이기도 하나, 그의 연구는 제국 일본의 시각에서 바라본 식민지 조선 연구라는 속성을 강하게 띄었다.[18]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99p~103p[19] 전성곤, 내적 오리엔탈리즘 그 비판적 검토, 275~283p[20] 1870~1953. 도쿄제국대학 출신의 사학자. 일본 내 동아시아권 인류학의 선구자로 꼽힌다.[21] 《동아, 대동아, 동아시아》, 133p[22] 위의 책, 94p[23] 이 '서양과 다르다'는 관념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속성을 띈다. 근본적으로는 일본 역시 동양에 속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만큼 '열등감'의 모습을 보이며, 개항과 제국 시절 전반, 그리고 패전 직후에는 서양에 대한 '두려움'의 속성 역시 강하게 띄었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와 같은 시기에는 반대로 서양에 대한 '우월감'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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