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신도

덤프버전 : r20210301


성명
오신도(吳信道)
생몰
1852년 4월 18일 ~ 1933년 3월 29일
출생지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오흥리
사망지
평안남도 강서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손정도의 모친이다.

2. 생애[편집]


오신도는 1852년 4월 18일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오흥리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강서군 증산면 오흥리에 사는 유생 손몽룡(孫夢龍)과 결혼하여 맏아들 손정도 외 자식 4명을 낳았다. 그녀는 유교를 신봉하는 집안에서 자랐기에 집안에서 가정을 돌보는 데 전념하는 걸 본분으로 삼았다. 하지만 손정도로부터 감리회를 전도받은 뒤 전도부인이 되어 강서군 일대의 전도 활동에 전념했다.

이후 손정도와 함께 평양으로 이주한 그는 평양 인근 일대를 돌며 복음을 전했고, 서양 선교사 및 아내들을 도우면서 주로 평양, 강서, 진남포, 증산, 봉산 등지에서 활동했다. 그녀와 함께 활동했던 루퍼스 선교사는 1910년 오신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우리 전도부인 오신도의 보고는 다음과 같습니다. '9개 성경반을 통해 1,327명을 가르쳤으며, 봄 가을로 평양에서 열리는 사경회와 에스티 양이 주관하는 정규 성경반도 참석하였습니다. 또 지난 1년 동안 104개 마을, 2810리를 돌며 전도하였습니다.' 한번은 강도를 만났는데 돈을 요구하였답니다. 그녀는 돈을 주는 대신 그에게 전도할 기회를 얻었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는 바울의 말씀을 성취한 셈입니다."


1912년 손정도가 일본 총리 가츠라 타로를 암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전남 진도군으로 유배된 뒤, 그녀는 전도부인 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평양에서 감리회 신도로서 조용히 신앙 생활을 하던 그녀는 1919년 6월 대한애국부인회에 가담하여 총재로 추대되었다. 그녀는 총재를 맡아서 평남 일대를 돌며 조직을 확대하고 군자금을 모았다.

일제 경찰이 대한애국부인회 사건에 대해 기록한 수사기록에 따르면, 평양·진남포·강서·함종·증산 등지에 대한애국부인회의 7개 지회가 있었고, 회원은 모두 100명이었다고 한다. 또한 체포 직전까지 모금한 액수는 2,400원에 달했다고 한다. 그녀는 이렇게 모은 지원금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했다.

그러나 1920년 11월 금산지회장 송성겸(宋聖謙)이 체포됨으로써 조직이 발각되었고, 그녀는 동지들과 함께 체포된 뒤 1921년 2월 23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며느리 박신일과 함께 손정도가 있는 중국 지린성으로 망명한 그녀는 길림한인교회에 다니면서 아들을 뒷바라지했다. 그러나 1931년 손정도가 사망한 후 귀국하여 강서군의 고향집에 머물다 1933년 9월 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오신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