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겐 리터 폰 쇼베르트
덤프버전 :
분류
1. 개요[편집]
독일 국방군의 상급대장이다. 만슈타인이전의 11군의 사령관이었으며 자신의 Fi 156이 지뢰밭에 착륙해서 죽었다.
2. 어린시절[편집]
그는 독일제국 바이에른 왕국에서 소령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02년 바이에른 왕국군에 입대했다. 그는 제1 바이에른 왕국 보병연대 소속이었으며 1911년에는 조종사 교육을 받기도 했다. 그는 그 꿈을 이루지 못했으나 그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꿈을 이루었다.
3. 군생활[편집]
3.1. 제1차 세계 대전과 패전 이후[편집]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쇼베르트는 장교로서 루덴도르프 공세에서 바르비아 왕국 1 연대의 3소대를 지휘하였다. 쇼베르트는 그의 소대를 무사히 저시까지 이끌어냈으며 그 공로로 기사십자 막스 요제프 군사훈장을 수훈받았다.
패전 이후 그는 국가방위군에 남았다. 그는 1933년 12월부터 1934년 9월까지 보병 사관이었고, 1935년부터 1936년까지 17보병 사단을, 1936년부터 1938년까지 33보병 사단을 지휘했다. 1938년 2월 4일에 7군단의 지휘를 맡았다.
3.2. 제2차 세계 대전과 죽음[편집]
1939년 9월, 쇼베르트는 남군 예비군의 일부로 폴란드 침공에서 그의 VII 군단을 이끌었다. 1940년 5~6월, 에른스트 부시 장군의 A그룹 제16군의 일부인 그의 군단은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침공과 프랑스 전투에 참가했다. 그는 마지노선 돌파와 낸시와 툴의 함락에서 7군단을 지휘한 공로로 철십자 기사십자장을 받았다. 이후에도 쇼베르트는 영국 침공을 준비하는 동안 제 7군단을 지휘했다. 그러던 중 1940년 7월 19일 그는 9명의 대장들과 함께 상급대장이 되었다. 이때 에리히 회프너, 하인츠 구데리안, 프란츠 할더도 함께 상급대장이되었다.
1940년 9월, 쇼베르는 제11군 사령관이 되었다. 육군은 소련 침공인 바르바로사 작전을 위해 남부집단군에 배치되었다. 남부 집단군에 배치되있던 제 11군단은 우크라이나에서 전투를 했다. 그리고 그는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전투를 하는 동안 그는 자신의 Fi 156으로 그곳을 정찰했다. 그러나, 그의 Fi 156은 다름아닌 지뢰밭에 추락하였다. 지뢰가 터지면서 그는 즉사했다.[4] 이후 제11군단장은 만슈타인이 되었다. 만약 그가 살아남았다면, 그의 뛰어난 지휘력을 보았을때 우리는 만슈타인이 아닌 쇼베르트를 기억했었을 것이다.
4. 가족[편집]
쇼베르트는 1921년 앨리스 리더-골위처와 결혼해 2남 1녀를 낳았는데, 그의 둘째 아들은 공군의 파일럿이었다. 그는 1944년 사망하였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0 10:22:18에 나무위키 오이겐 리터 폰 쇼베르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리터 폰쇼베르트'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사진에서 기사 철십자훈장 밑에 있는 훈장이다.[3] 이것이 그의 마지막 비행이었다.[4] 파일럿은 추락하기 전에 도망쳐서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