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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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 천도교 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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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益濟, 1929년 ~ 2012년 (향년 83세)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종교인, 정치인이자, 북한의 정치인.


2. 생애[편집]


1929년 평안남도 성천군[1]출생. 8.15 해방 후 고향에서 천도교 종리원 교화부장을 지냈으며, 국방부 문관과 통일광복민족회의 의장 등을 지내다 천도교 선도사, 종무원장, 종학원장 등을 거쳐 1989년부터 1994년까지 대한민국 천도교의 22, 23대 교령을 맡았다. 그러나 아래의 월북 사건으로(게다가 80년대에 전임 교령 최덕신도 월북자다) 그렇지 않아도 교세가 미약한 천도교는 큰 타격을 입었다.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발기인에 있었고, 1995년부터 1997년 1월까지 새정치국민회의의 고문을 맡았다. 1997년 8월 15일 북한으로 월북하여 조평통 부위원장에 취임하였다. 이에 대해서 북한납치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본인 스스로가 크게 부정하고 자발적으로 월북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2008년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납치설에 대해 중상모략이라고 일축하였다.[2] 장진성의 증언에 따르면 통일전선부에서 북한에 있는 오익제의 처자식의 사진을 오익제에게 보내주는 공작을 통해 월북을 종용했다고 한다. 처음에 오익제 처자식 사진을 찍어왔는데 헤진 옷에 강냉이 밭을 배경으로 찍어와서 이러면 월북하려던 사람도 안오겠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고 일본제 중고옷을 사서 처자식에게 입히고 새로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오익제는 그걸 보고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서 한시간이나 운 다음에 그대로 중국에서 북한 가는 열차에 올라서 월북해버렸다. 1999년, 조국통일상을 받았으며 2002년 3월 27일, 김일성 탄생 90주년 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북에서 남한에서의 삶을 비하하고 북한에서 자기가 얼마나 참다운 삶을 살고 있는지 헛소리하는 자서전도 집필했는데, 그러한 목적을 감안하고도, 북한에서 남한식으로 xx군, xx씨 등의 호칭을 썼다가 평양 시민들이 못 알아들어서 당황했다는 에피소드도 실어놓는 등 재밌는 부분도 있다.

2003년 11기 최고인민회의2009년 12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대의원으로 당선되었다. 2007년 6월, 리인모 장의위원을 지냈다. 2009년 4월, 김정일로부터 80세 생일상을 받는 등 잘 대접을 받다가 2012년 9월 1일, 8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조국전선과 조평통은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선생은 위대한 장군님의 대해같은 사랑과 믿음에 보답할 일념을 안고 생의 마지막까지 자신의 모든 지혜와 정열을 조국통일성업에 다 바쳤다. 선생은 서거하였으나 조국통일위업에 이바지한 그의 공적은 길이 남아 있을것이다."라고 칭송하였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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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 회창군 대곡리[2] 2008.12 통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