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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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훈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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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KBO 퓨처스 남부리그 타격왕



파일:KBO 퓨처스리그 엠블럼.svg
2009 KBO 퓨처스 남부리그 타점왕

[[롯데 자이언츠|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44번
박경진
(1999~2006)

오장훈
(2007~2009)


홍재영
(2010)
[[롯데 자이언츠|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99번
손광민
(2008)

오장훈
(2010)


임영학
(2011)
[[롯데 자이언츠|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25번
최만호
(2007.7.29.~2009)

오장훈
(2011)


강승현
(2012~2013)
[[두산 베어스|두산 베어스]] 등번호 46번
김창훈
(2010~2011)

오장훈
(2012)


이정호
(2013~2015)
[[두산 베어스|두산 베어스]] 등번호 55번
장우람
(2012)

오장훈
(2013)


한주성
(2014~2018)
[[두산 베어스|두산 베어스]] 등번호 24번
김재환
(2012~2013)

오장훈
(2014~2015)


오재원
(2016~2022)
[[두산 베어스|두산 베어스]] 등번호 42번
윤명준
(2012~2015)

오장훈
(2016~2016.8.)


이성곤
(2016.9.4.~2016)



파일:오장훈.jpg

오장훈
吳長勳 | Chang-hun Oh

출생
1984년 5월 19일 (39세)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1]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영일초[2] - 영남중 - 성남고 - 홍익대
포지션
1루수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2007년 신고선수 (롯데)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 (2007~2011)
두산 베어스 (2012~2016)
등장곡
B1A4 - 잘자요 굿나잇
본관
군위 오씨[3]

1. 개요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2.3.1. 2015 시즌
2.3.2. 2016 시즌
3. 은퇴 이후
4. 연도별 주요 성적
4.1. 타자 성적
4.2. 투수 성적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롯데 자이언츠, 두산 베어스 소속의 내야수, 투수. 현재는 농업인으로 일하고 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아마추어 시절[편집]


서귀포 의귀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 교사의 권유로 교내 야구부에 입단하여 처음 야구를 시작했는데, 5학년 때 야구부가 해체되자 혈혈단신으로 상경하여 서울 영일초등학교에 전학했다.[4] 이후 그는 영남중학교를 거쳐 성남고등학교홍익대학교를 졸업했지만, 지명을 받지 못해 2007년 육성선수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2.2. 롯데 자이언츠[편집]


롯데 자이언츠에서 육성선수로 3시즌을 보내다가 2009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식 선수로 승격될 수 있었다. 홍대 시절에는 투수와 타자를 겸하다가 팔꿈치 부상 때문에 프로에서는 투수를 포기하고 완전히 타자로 굳어졌다. 타자로 전향을 권유한 것은 당시 롯데 2군 타격코치였던 박정태였다. 186cm, 100kg의 체격 때문에 장타자로 육성한 선수고, 실제로 2군에서는 상당한 장타력을 보여줬다. 2009년 2군 남부리그에서 홈런왕과 타점왕에 올랐던 선수. 여담으로 상당한 노력파였는데 악바리로 유명했던 박정태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열심히 훈련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2009년 중반에 정식 선수로 승격된 그는 6월 28일 대전 한화 이글스전에서 류현진을 상대로 4타수 3안타 1타점 1득점을 기록하면서 팀의 2:0 승리이자 송승준의 3연속 완봉승의 첫 경기의 주역이 되어 주목을 받았고, 준플레이오프전에서 대타로 나와 안타를 기록하였다.

하지만 그 뒤로 오장훈에게 기회는 없었다. 전형적인 2군 본즈답게 오장훈은 발이 느리고 수비가 약했으며 선구안에도 약점을 드러냈다. 또한 1루와 지명타자만 소화할 수 있었는데 당시 롯데에서 해당 포지션들은 이대호, 홍성흔, 김주찬 등 확실한 주전 선수들이 돌아가며 소화하고 있었고, 박종윤이 좋은 1루 수비와 좌타자라는 이점을 통해 백업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장훈의 자리는 없었다.[5]


2.3. 두산 베어스[편집]


파일:external/file.osen.co.kr/201201121621770813_1.jpg

결국 2011 시즌 후 첫 실시된 한국프로야구 2차 드래프트에서 두산 베어스의 지명을 받아 팀을 옮기게 되었다. 이적 후에는 2군에서 상당한 장타력을 보여 주고 있지만, 선구안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서 그런지 1군 무대에서는 다소 아쉬운 성적을 내고 있다. 전형적인 2군 본즈라는 평가가 많다.

오장훈 입장에서 아쉬웠던 것은 당시 두산은 오재일, 김재호, 허경민 등이 백업에 불과했을 정도로 역대급 야수 뎁스를 가진 팀이었고, 최준석의 군입대를 대비해 2군 본즈들을 수집했는데, 정작 최준석이 군 면제를 받으면서 오장훈이 크게 필요가 없던 상태였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이적 후 1년 뒤엔 홍성흔까지 FA로 영입하게 되었다. 정작 친정팀인 롯데의 경우 1루, 지명타자를 소화하던 이대호, 김주찬, 홍성흔이 모두 팀을 떠나고 박종윤 혼자 1루를 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차라리 2차 드래프트에서 뽑히지 않았다면 기회가 주어졌을 수도 있었다.[6]


2.3.1. 2015 시즌[편집]


결국 2015 시즌, 타자에서 투수로 전향하였다! 우연히 피칭을 했는데 143km/h가 나왔고, 주위에서 권유하여 투수로 다시 전향하였다고.

투수에서 전향한지는 기사가 나기 2주 전이라고 한다. #

투수로 전향한 것에 대해 돡갤에서는 긍정적인 반응. 평소 아쉬웠던 선수이니만큼 응원과 격려를 보내는 반응이 대다수다.

2015년 9월 3일 마산 NC전에 투수로 첫 데뷔, 1이닝 1피안타, 1볼넷, 2삼진 무실점의 기록을 올렸다. 하지만 투수로서, 그리고 선수로서 1군 등판은 이게 마지막이었다.


2.3.2. 2016 시즌[편집]


1군에 올라오지 못하고 2군에서만 보냈다. 2016년 9월 무슨 이유에서인지 구단 공홈의 선수 명단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10월 19일 조인식 기자의 트위터를 통해 김강, 김명성, 최영진과 함께 웨이버 공시된 것이 확인되었다. 은퇴 후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8월 말에 구단에서 방출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


3. 은퇴 이후[편집]


이후 현역에서 은퇴하고 고향 제주특별자치도로 귀향해 아버지의 감귤 농장을 이어받아 운영 중이며, 사회인야구 레슨도 가끔씩 한다고 한다. # 농장 이름은 오장훈의 홈런농장으로, 한라봉과 레드향을 재배하고 있다. 박병호가 단골 손님이라고 하고 허경민, 강동연, 함덕주, 이형범도 오프 시즌 중 감귤 농장에 놀러오기도 했다. 그 와중에 노경은에게 니 공보다 빠른 배송 드립을

2020년 8월 4일 MBN 사노라면 방영분에 그의 사연이 방영됐다. # 그리고 2020 한국시리즈 도중 두산 선수단에게 감귤을 보낸 것으로 알려지며 훈훈함을 자아냈다.

그러다 2022년 맥심 9월호 화보를 촬영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2023년 '제주도로 귀농한 홈런왕'이라는 인터뷰 기사로 안부를 전했다.# 감귤 농사와 서귀포리틀야구단의 감독을 겸하고 있다고 한다. 2023년 11월 수원에서 열리는 팜테크포럼에도 같은 주제로 참가한다.

4.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4.1. 타자 성적[편집]


역대 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8
롯데
1군 기록 없음
2009
3
6
.500
3
1
0
0
1
1
0
0
.667
.500
2010
1군 기록 없음
2011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12
두산
10
18
.111
2
1
0
0
0
0
0
1
.167
.158
2013
1군 기록 없음
2014
1
5
.200
1
0
0
0
0
0
0
0
.200
.200
KBO 통산
(3시즌)
14
29
.207
6
2
0
0
1
1
0
1
.276
.233


4.2. 투수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15
두산
1
1
0
0
0
0
0.000
0.00
1
0
1
2
0
0
2.00
2016
1군 기록 없음
KBO 통산
(1시즌)
1
1
0
0
0
0
0.000
0.00
1
0
1
2
0
0
2.00


5.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0 10:36:34에 나무위키 오장훈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2] 서귀포 의귀초등학교 5학년 때 팀이 해체되자 영일초로 전학했다.[3] 말파 20세 훈(勳) 항렬.[4] 이때 부모님은 계속 제주도에 계셨고, 본인은 친구 집이나 감독 집에 얹혀살면서 통학했다고 한다.[5] 하지만 오장훈이 두산으로 이적한 후 거짓말처럼 박종윤을 제외한 선수들이 차례로 롯데를 떠나고 만다.[6] 그리고 롯데는 이대호가 돌아오기 전까지 박종윤 혼자 1루수를 감당하면서 지독한 빈공에 시달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