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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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제1선거구)
제9대
장기영[A]
정일형[B]

제9대
오제도
정대철

제10대
정대철
민관식

대한민국 제9·11대 국회의원
오제도
吳制道 | Oh Je-do

파일:오제도.jpg}}}
창씨명
쿠레야마 세이도(吳山制道)
본관
해주 오씨[1]
출생
1917년 11월 15일
평안남도 안주군 (現 안주시)
사망
2001년 7월 1일 (향년 83세)
서울특별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8호
배우자
한석주
자녀
3남 3녀
학력
와세다대학 전문부 (법과 / 졸업)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9, 11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
4. 선거이력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법조인이자 정치인.


2. 생애[편집]


1917년 11월 15일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태어났다. 1939년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 후 1940년부터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에서 판임관(判任官) 견습을 시작했으며, 이후 광복 이전까지 서기 겸 통역으로 일했다.

8.15 광복 후 월남하여 1946년 판검사 특별임용시험을 통해 검사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반공검사로 유명해졌다.[2] 좌익 전력자를 전향하도록 한 보도연맹 결성을 선우종원과 함께 주도하였다. 남조선로동당김삼룡이주하 체포. 국회 프락치 사건, 여간첩 김수임 사건, 조봉암진보당 사건 등 공안 사건을 주로 담당하였다. 1952년에는 서울지방검찰청에서 부장검사를 역임했다.

1960년 3.15 부정선거마산의 시위를 북한이 조종한 것이라고 선전하였다.[3] 4.19 혁명 이후 검사직을 사직하고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1971년 11월 사단법인 북한연구소를 창립하고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77년 6월 서울특별시 종로구-중구 선거구 재보궐선거[4]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정대철(정일형의 아들이다.)과 동반 당선되었다. 당선 후 민주공화당에 입당하려 하였으나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을 이유로 입당이 불허되었다.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였으나 "구시대적 낡은 인물"이라는 당내 비판으로 자신의 지역구인 종로구-중구에 출마하지 못하고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5]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민주정의당을 탈당하여 서울특별시 종로구-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이종찬 후보와 신한민주당 이민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에도 활동을 계속하면서 한국안보교육협회 이사장, 통일대비포럼 공동대표 등을 역임하였다.

말년에 망명온 황장엽과 의형제를 맺고 서로 호형호제할 정도로 친했다.[6]

우익 반공인사였지만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인정하고 오히려 보도연맹원들의 무고함을 증언했다.

"보련은 세계 사상사에 유례가 없는 성과로 외국에서도 조사해 갈 정도였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면서 보련원들이 적에게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인해 경기도 이남에서 학살이 벌어졌다." 오씨는 한국전쟁 개전 초기 서울에서 미처 피난 가지 못한 군경과 가족이 의외로 많이 살아 남은 데는 보련원들의 도움이 컸다면서, 수원 이남에서 무차별 학살한 것은 '불행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이북에서도 반동으로 규정된 보련원은 오히려 인민군이 숙청할 대상이었는데도 남한쪽 군경이 심사도 하지 않고 무조건 집단 학살했다는 것이다. 서울과 경기 북부의 보련원만 학살을 모면했을 뿐 전국 각지에서는 약 30만에 달하는 보련원들이 영문도 모른 채 불려가 학살당했다. 30만이라는 숫자는 4·19 직후 전국 각지의 유족들이 국회에 낸 청원 내용에 들어 있다. 오제도씨는 "이제 정부가 보련 가입자들의 억울한 죽음을 공식 확인해 범국가 차원에서 위령제를 올릴 때가 되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


2001년 법조인 최초로 국가유공자로 인정되어 7월 5일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4. 선거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77
1977년 재보궐선거
서울 1[7]

[[무소속|
무소속
]]

37,650 (35.59%)
당선 (1위)
초선[8]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61,270 (24.59%)
낙선 (3위)

1981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5,776,624 (35.60%)
당선 (27번)
재선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중

[[무소속|
무소속
]]

19,780 (7.29%)
낙선 (4위)


역대 선거 벽보

[ 펼치기 · 접기 ]

파일:1977 오제도.jpg


파일:오제도 1978.jpg

1977년 재보궐선거 (서울 1[B])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1[B])

파일:오제도12.jpg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1[B])



5. 둘러보기[편집]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전국구 제11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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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의당

61석


이재형

나길조

김종경

이용훈

김기철
~~~~
송지영
~~~~
정희택

박동진

정원민

김정호

윤석순

김종호

최상업

황병준

류근환

김용수

박태준

박경석
----
이우재

이춘구

김현자
~~~~
정순덕

배성동

김사용

이건호

신상초
----
오제도

김윤환

정희채

김춘수

박현태

이양우

박종관

고귀남
~~~~
나웅배

김집

지갑종

허청일

이상선

손춘호

정시채

안교덕

최낙철

김모임
~~~~
이헌기

이윤자

이민섭

이영희

김종인

박원탁

이상희

이영일

이경숙

조남조
~~~~
김행자

이낙훈

김영구

황설

하순봉

곽정훈

전병우

정창화

문용주

김유상

장경우

유수환

김지호
~~~~
이성재

강창희

이성배
민주한국당

24석

~~~~
유옥우

이태구

김문석

황산성

양재권

정규헌

손태곤

신재휴

이정빈

김진기

이중희

연제원

최수환

서종렬

손정혁

김노식

이의영

조주형

강원채

이윤기

윤기대

이홍배

김형래

김덕규

이용곤

한국국민당

7석


김영광

이필우

노차태

조정구

김한선

김유복

강기필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50%; text-align: right; font-size: .8em;"
제12대





파일:민주정의당 심볼.svg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제11대 국회 전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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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형
나길조
김종경[A]
이용훈
김기철
송지영[B]
정희택
박동진
정원민
김정호
윤석순
김종호
최상업
황병준
류근환
김용수
박태준
박경석
이우재[B]
이춘구
김현자
정순덕[B]
배성동
김사용
이건호
신상초
오제도
김윤환
정희채
김춘수
박현태
이양우
박종관
고귀남
나웅배[B]
김집
지갑종
허청일
이상선
손춘호
정시채
안교덕
최낙철
김모임
이헌기[B]
이윤자
이민섭
이영희
김종인
박원탁
이상희
이영일
이경숙
조남조
김행자[A]
이낙훈
김영구
황설
하순봉
곽정현
전병우
정창화[C]
문용주[C]
김유상[C]
장경우[C]
류수환[C]
김지호[C]
이성재[1]
강창희[C]
이성배[C]
[A] A B 임기 중 사망.[B] A B C D E 임기 중 사퇴.[C] A B C D E F G H 승계.[1] 승계 전 사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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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임기 중 작고[B] 국회의원 자격정지[1] #.[2] 오제도는 공안검사의 아버지로도 불리고 공안검사의 시초로도 불렸다.[3] 이는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민관식 후보에게 패배하는 계기가 되었다. 왜냐면, 저 3.15 부정선거를 외쳤을 당시 의거 중이다가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고 김주열 열사를 생각해보면, 무소속으로 나온 후보가 박정희 조차도 건들지 못 했던 마산을 함부로 건드렸기 때문이다.[4] 정일형은 유신반대운동으로 유명한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구속되어 국회의원직 상실, 전 경제부총리이자, 김두한에게 똥물을 얻어맞았던 장기영 의원은 1977년 4월 11일에 심장마비로 사망.[5] 원래 오제도는 1981년 총선을 앞두고 이북 출신들과 새 정당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고 있었다. 그런데 민정당권정달 사무총장의 제의를 받고 입당한 것. 하지만 민정당에 먼저 입당한 송지영이나 윤길중 같은 혁신계 인사들은 오제도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고생한 적이 있는지라 격렬하게 반대했다. 결국 허화평이 중재에 나서 이종찬을 종로구-중구에 출마시켰고, 오제도는 전국구 후보로 보냈다.[6] 나이는 오제도가 7살이 위로, 황장엽이 먼저 세번 절하면서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증언했다. 북한에서도 영화 등에서 오제도가 악역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아 유명한 '반공검사'였다고. 한편 진중권은 극과 극은 통화는 사례라며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에서 비꼬았다.[7] 종로구·중구[8] 전임자 정일형 의원직 상실 및 전임자 장기영 작고. 당시 국회는 중대선거구제였는데, 우연히도 서울 1선거구 의원 2명이 동시에 공석이 되었다. 오제도와 함께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사람은 무소속 정대철 후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