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제현(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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烏濟顯
생몰년도 미상


1. 개요[편집]


발해의 유민. 후발해의 관리로 추정되는 인물로 후당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1]


2. 생애[편집]


三年二月, 以入朝使南海府都督列周道爲檢校工部尙書, 政堂省工部卿烏濟顯試光祿卿.

청태(淸泰) 3년(936년) 2월, 입조한 남해부도독 열주도에게 검교공부상서를, 정당성 공부경 오제현에게 시광록경의 관직을 주었다.

- 『오대회요(五代會要)』 권30(卷三十) 발해(渤海) -


열주도가 935년 11월(혹은 12월) 후당에 입국한 기록으로 미뤄보아 보면 오제현도 같이 입국한 것으로 추정된다.[2]

936년 2월 후당으로부터 시광록경(試光祿卿)의 벼슬을 받았다. 오제현의 후발해 관직 정당성공부경(政堂省工部卿)은 후발해의 중앙관직이 발해의 제도를 답습한 것으로, 공부란 발해의 정당성 소속 신부(信部)를 공부로 명칭만 바꾼 것이다.

3. 기타[편집]


열주도와 오제현의 기록을 끝으로 954년 후주에 투항하는 최오사 사이에 중국 - 후발해 간 교류 기록이 아예 없는데 후당에 사신을 파견한 발해부흥운동세력의 약체화[3], 후당 멸망 후 후진을 세운 석경당이 친 거란 성향인 점, 흑수말갈이 교류를 방해한 정황 등이 영향을 줬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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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또는 동란국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2] 책부원구에서는 935년 11월에 열주도의 오기인 열주의(列周義)가 입조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오대회요에서는 열주도의 방문이 935년 12월로 기록되어 있다.[3] 발해가 멸망당한 후 일어난 발해 유민들의 저항을 거란이 진압하고 요동 지역으로 발해인 사민을 실시했으며, 926년 혹은 934년에 발해세자 대광현이 유민 수 만명을 거느리고 고려로 투항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