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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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과학대 야구부 감독
오철민
吳喆珉

출생
1973년 5월 28일 (50세)
전라남도 목포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영흥고 - 파일:영남대학교 엠블럼.svg 영남대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97년 1차 지명 (해태)
소속팀
해태-KIA 타이거즈 (1997~2006)
지도자
목포과학대 야구부 (2021~)

1. 개요
2. 경력
3. 여담



1. 개요[편집]


한국프로야구에서 뛰었던 좌완투수로 해태 타이거즈KIA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었다.

2. 경력[편집]


1973년 5월 28일 전남 목포시 출생으로 야구 무명 학교인 영흥고등학교에서[1]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 8강으로 이끌었으며 청소년대표로 선발되었다. 이 당시 포수는 김지영이었다.[2] 1992년 한미일 고교야구대회 미국전에서 선발투수로 등판해 호투했다.

영남대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로 선발됐고 1997년 KBO 드래프트 1차 지명을 받았으며 해태는 IMF 시대 직전의 가난한 팀 사정에도 불구하고 계약금 2억 3천만 원, 연봉 2천만 원의 거금을 안겨주었다. 이는 그 당시까지 해태에 입단한 신인 투수 계약금 최고액이었다.[3][4]

그러나 프로에서의 성적은 1997~2005년 9시즌 동안 241경기에서 16승31패2세이브9홀드 평균자책점 5.48을 기록하여 기대치에는 못미쳤다. 2006년을 끝으로 은퇴 후 ING생명 재정설계사(FC)로 취업하며 새로운 인생을 걷고 있다.[5]

프로5년차이던 2001년에 뒤늦게 프로 첫 승을 신고했다. 선발로 등판한 4월 8일 현대 유니콘스[6]에서 6과 3분의 1이닝 동안 삼진 7개를 잡으며 4안타 2실점만 내주는 호투였다.

3. 여담[편집]


2022년 5월 전설의 타이거즈최상덕과 함께 출연했다. 2021년부터 목포과학대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고 있다고 밝혔다.

삼성 라이온즈에서 양준혁이 해태로 트레이드되면서 광주 동림동의 아파트로 이사 올 때 청소도구를 들고 아파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2명 중의 한 명이다. 다른 한 명은 곽현희였으며 오철민과 곽현희는 모두 양준혁의 영남대 후배들이다. 이 장면이 유독 양준혁의 기억에 남았는지 해태 타이거즈의 팀 분위기를 이야기 할 때 꼭 이 사례를 들곤 한다.

제구력이 좋지 않아 코감독의 지시로 1999년에 불펜에서 반성투구를 한 적이 있다.기사[7]

2017년 레전드스크린야구 부천중동점에서 레슨을 진행한 바 있다.

이대진과 친구 사이로 지내는 것으로 보아 유급 내지는 입학유예를 한 것으로 보인다. 대학도 93학번으로 원래는 동갑내기인 곽현희, 전병호가 그의 선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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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향남의 후배다. 같은 학교를 나온 인연으로 최향남과 최근에도 자주 연락을 한다고 한다.[2] 김성한 구타 사건의 당사자다.[3] 당시 해태의 고졸 우선지명 동기생 중 한 명이 바로 김병현이었다. 해태 입단을 거절하고 성균관대에 장학금을 받으며 입단했다가 1999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유니폼을 입었다.[4] 그 후 2001년 6월에 해태가 1차지명한 김진우가 계약금 7억 원에 사인했지만 그 때는 타이거즈의 모기업이 기아로 바뀌기 직전이었다.[5] 대다수의 고객은 일반인이지만 이종범, 김창희, 장성호 등 옛 팀 동료들도 그의 고객이라고 한다.[6] 2000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등 팀 전력이 절정이었다.[7] 김응용 감독은 좌완투수, 좌타자가 희귀한 팀 사정상 왼손잡이라고 하면 사족을 못 쓴다고 할 정도로 많은 기대를 건 것으로 유명하다. 이 당시 아꼈던 좌완투수로 강영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