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다 아키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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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91919> 70 다나카 슈타 71 쿠지 테루요시 72 타카하시 켄 73 카네무라 사토루 74 후지모토 아츠시 76 히라노 케이이치 78 히라타 가쓰오
80 키타가와 히로토시 81 시미즈 마사지 82 야마다 가츠히코 83 아라이 료타 84 히다카 타케시 85 후쿠하라 시노부
86 안도 유야 87 나카무라 유타카 88 야노 아키히로 [[감독#s-1.1|{{{#!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8b500; font-size: .8em"
{{{#white
}}}}}}]] 89 후지이 아키히토 90 쿠보타 토모유키 96 쓰쓰이 소
99 이노우에 카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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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다 아키노부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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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신 타이거스 엠블럼.svg
NPB 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1985

파일:한신 타이거스 우승 엠블럼 V2.svg
NPB 일본시리즈
우승 감독
2023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0년 센트럴리그 최우수 신인
1979년
후지사와 키미야
(주니치 드래곤즈)

오카다 아키노부
(한신 타이거스)


1981년
하라 타츠노리
(요미우리 자이언츠)











한신 타이거스 No.80


오카다 아키노부
岡田 彰布 / Akinobu Okada

생년월일
1957년 11월 25일 (66세)
오사카부 오사카시
국적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포지션
2루수, 3루수, 1루수,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79년 드래프트 1순위
소속팀
한신 타이거스 (1980~1993)
오릭스 블루웨이브 (1994~1995)
지도자
오릭스 블루웨이브 2군 조감독·타격코치 (1996~1997)
한신 타이거스 2군 조감독·타격코치 (1998)
한신 타이거스 2군 감독·타격코치 (1999)
한신 타이거스 2군 감독 (2000~2002)
한신 타이거스 1군 내야수비·주루코치 (2003)
한신 타이거스 감독 (2004~2008)
오릭스 버팔로즈 감독 (2010~2012)
한신 타이거스 감독 (2023~)

1. 개요
2. 아마추어 시절
3. 프로 시절
4. 은퇴 이후
4.1. 코치 시절
4.3. 해설가 시절
5. 기타



1. 개요[편집]


일본프로야구 선수, 코치, 감독이자 해설가. 현재 한신 타이거스 감독을 맡고 있다. 2023년 기준 일본프로야구 최고령 감독이다.

어렸을 적부터 팬이었던 한신 타이거스에서 프랜차이즈 스타로 성장해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리그 우승, 일본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1][2]


2. 아마추어 시절[편집]


오사카시 태생으로 작은 공장을 경영하던 아버지가 한신의 후원자로 무라야마 미노루한신 타이거스 선수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오카다가 어렸을 적에 한신의 주전 3루수이던 미야케 히데시와 캐치볼을 할 정도였고, 그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한신 타이거즈를 동경하게 되었다. 이후 오카다가 한신에 입단할 때 등번호 16번을 희망한 것도 미야케의 현역 시절 등번호였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난카이 호크스의 유소년 팀 격인 리틀 호크스에 들어가면서[3] 본격적으로 야구의 길에 들어섰고, 한편으로 아버지 회사에서 결성한 동네 야구팀에서도 투수로 활약한 적도 있다.[4] 당시 한신으로선 오카다의 아버지가 프리미엄 고객이었던 지라 집안에 한신 고시엔 구장의 특석 지정 입장권이 있었음에도 오카다는 고시엔에 갔다 하면 유독 3루 벤치 근처의 자리만 고집했는데, 이유는 라이벌인 요미우리 자이언츠3루수 나가시마 시게오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이후 메이세이 중학교에 들어가서 학교를 오사카 부 대회 우승으로 이끌었고 무라야마 미노루의 은퇴경기 때는 캐치볼 상대로 선정되기도 했다. 호쿠요 고교에 진학해서는 1학년 때 PL학원고등학교와의 지역예선 결승에서 선제 투런포를 날리는 등 맹활약하며 고시엔 본선에 진출하는 데 힘을 보태기도 하였다. 이듬해 여름 고시엔 대회에서도 2경기에 출장, 6타수 3안타의 맹타를 날렸다. 그러나 3학년 때엔 지역예선 결승에서 탈락하며 고시엔 그라운드를 밟지 못했다. 고교 졸업 후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여 주전 3루수로 뛰면서 2차례의 도쿄 6대학 리그 우승에 기여하고 1978년엔 리그 타격 삼관왕을 달성했으며, 1979년 미일 대학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4번타자로 활약한 바 있다.[5] 대학 시절 기록한 통산 타율 .379와 통산 81타점은 현재까지도 도쿄 6대학 리그 통산 최다 기록이다.


3. 프로 시절[편집]


1979년 신인 드래프트 때 6개 구단으로부터 동시 지명을 받을 정도로 오카다에 대한 영입 경쟁은 치열했고[6] 결국 추첨을 통해 오카다가 평소 바라 마지않던 한신 타이거스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원래 포지션은 3루수였지만 이미 카케후 마사유키가 떠억 자리잡고 있었던지라 오카다는 2루수로 전향할 수 밖에 없었고, 그럼에도 데뷔 시즌인 1980년에 108경기에 출장하여 109안타, 18홈런, 54타점, 타율 0.290이란 굉장히 준수한 성적으로 센트럴리그 신인왕을 수상하였다. 다음 시즌인 1981년엔 전경기 출장(130경기)을 달성하며 20개의 홈런을 기록하였고 1982년엔 정확히 0.300을 채우며 생애 처음으로 3할 타율을 기록하였으나, 4년차인 1983년 시즌엔 다리 근육 파열 부상으로 한동안 슬럼프를 겪었다.

그러나 대망의 1985년, 오카다는 선수회장(주장)을 맡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시즌을 맞이하였고 최고의 외국인 타자 3번 랜디 바스, 기존의 4번 카케후 마사유키의 뒤를 잇는 5번 타자로 자리잡으며 한신은 말 그대로 사상 최강의 클린업 트리오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 해 오카다는 한신 클린업 트리오의 멤버로 거칠 것 없이 그라운드를 누비며 157안타, 35홈런, 101타점, 타율 0.342/OPS 1.057이란 괴물 같은 기록과 함께 리그 최강의 5번 타자라는 명성을 드높였고[7] 이해 한신이 창단 이래 최초로 일본시리즈 제패를 달성하는데 크게 공헌하며 2루수 베스트나인, 다이아몬드 글러브를 수상하는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더불어 같은 해 4월 17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홈 경기 7회말 때 상대 선발 마키하라 히로미를 상대로 바스가 역전 라뱅쓰리런포, 카케후가 솔로포로 백스크린을 두들긴 다음에 나온 오카다도 이에 질세라 중월 솔로홈런을 쏘아올리며 이룩한 이른바 코시엔 백스크린 3연발은 아직도 한신 올드 팬들 사이에서 최고의 명장면으로 입에 오르내리고 있을 정도이다. 당시 한신의 1번 타자는 30홈런 타자 마유미 아키노부였으며, 오카다 뒤로 나오는 사노 노리요시, 히라타 카츠오, 키도 카츠히코도 전부 펀치력이 있는 타자들이어서[8] 하위타선이라고 투수들이 쉽게 상대할 수 없었다.


전설의 고시엔 백스크린 3연발 동영상

1986년 시즌에는 26홈런을 기록했지만 타율은 0.268로 다소 부진했고, 이듬해 1987년에는 14홈런, 타율 0.255로 오카다 답지 않다는 평이 나오기도 했으나 1988~1990년 3시즌 연속 20홈런을 기록하며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주전 3루수이던 카케후의 은퇴로 1989년부터는 원래 위치이던 3루수로 복귀하였으나 1990년부터는 후배인 야기 히로시의 등장으로 다시 2루수로 되돌아가기도 하였다. 1992년 일본 프로야구 선수회 회장을 맡아 FA 제도 도입에 주력하였고 선수로서는 와다 유타카에게 2루 자리를 넘기고[9] 1루수로 전향하였지만 3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기량이 쇠퇴하였는지 그 해 타율이 1할대로 추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결국 1994년 한신으로부터 자유계약 선수로 공시되며 오릭스 블루웨이브 유니폼을 입게 되었는데,[10] 입단 직전 한 여성과의 불륜 스캔들이 터지며 현역에서 물러날 지경까지 올 정도였으나 결국 오릭스의 자체적인 정보 수집[11]경찰 수사를 통해 그 여성은 꽃뱀임이 밝혀져 체포되면서 오카다는 홀가분하게 오릭스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

파일:external/blog-imgs-76.fc2.com/10-1_2015042416214844as.jpg
블루웨이브 시절.

그러나 오릭스에서도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한 채 1995년 퍼시픽리그 우승의 기쁨을 맛보고[12] 그것을 마지막으로 현역 생활을 마감하였다. 16시즌 동안 통산 성적은 1639경기 출장, 1520안타, 247홈런, 836타점, 타율 0.277이며 수상 경력으로 1980년 신인왕과 1985년 2루수 다이아몬드 글러브, 베스트나인이 있다.[13]


4. 은퇴 이후[편집]



4.1. 코치 시절[편집]


은퇴 이듬해인 1996년 오릭스의 2군 조감독 겸 타격 코치로 임명되어 2년간 재임하였고, 1998년엔 2군 타격 코치로 친정인 한신 타이거즈에 복귀하였다. 이후 한신의 2군 감독을 지내고 2003년엔 1군으로 올라와 내야수비 겸 주루 코치를 맡아 3루 베이스 코치로 활동하였다. 2군 코치로 웨스턴리그 우승 1회(1998), 2군 감독으로 웨스턴리그 우승 3회(1999, 2001, 2002)와 팜 일본 선수권 우승 2회(1999, 2002)를 달성하며 2000년대 한신의 주축이 될 거라 기대받던 선수들[14]을 길러냈다.


4.2. 한신 타이거스 감독 1기[편집]


파일:오카다한신1기.jpg
2004년 전임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퇴하면서 후임 감독에 취임, 2005년 팀을 센트럴리그 우승으로 이끄는 수완을 보였지만 일본시리즈에선 치바 롯데 마린즈에 4전 전패를 당했다[15] 그리고 이 사건은 33-4 사건 혹은 하얀 안개 사건으로 흑역사로 남겨지게 되고, 후일 일본 인터넷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얻게된다. 그리고 한신 팬들은 18년 동안 고통받아야 했다.

그 후 2006~2008년 3시즌 동안 리그 최고의 불펜진이란 얘기를 들은 JFK(한신)를 바탕으로 팀을 A클래스(2위-3위-2위)에 랭크시켰고 2007, 2008년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연속으로 진출했으나, 전부 주니치 드래곤즈에게 패퇴하는 바람에 우승을 원하던 구단 방침에 의해 결국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특히 2008년 정규시즌엔 전반기 요미우리에 13게임 앞선 1위[16]를 하다가 후반기 시작 단 두 달 만에 이승엽에게 시원하게 개털리며 그 차이가 다 따라잡혀 요미우리에게 역전 우승 허용이라는 못 볼 꼴을 봐야 했다. 그리고 7년 후에 비슷하게 재현에 성공했다

4.3. 해설가 시절[편집]


한신에서 퇴단한 이후 1년간 아사히 방송의 해설가 및 데일리 스포츠 객원 평론가로 활동하였다. 평론가 활동과는 별도로 NPB 조사위원으로 임명되었는데 조사위원 임기는 통상 2년이지만 2010년 오릭스 버팔로즈 감독으로 영입되면서 1년만에 조사위원에서 사퇴하였다.


4.4. 오릭스 버팔로스 감독 시절[편집]


파일:오카다오릭스감독.jpg
현역 말년을 보낸 오릭스와 연봉 1억 엔에 3년간 감독 계약을 맺은 오카다는 감독직과 동시에 팀 편성과 홍보책까지 맡으며 사실상 오릭스의 GM을 겸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작부터 액운이 꼈는지 외야수 오제 히로유키가 스프링캠프 때 숙소에서 추락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17] 2010년 감독 통산 400승을 기록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으나 투수 코치이던 호시노 노부유키가 시즌 도중 건강문제로 휴양을 신청하고 후임으로 임명된 고바야시 히로시는 코치로서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오카다 자신이 투수 코치까지 겸직하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팀은 시즌 5위에 그쳤다.

2011년에는 시즌 중반까지 리그 2~3위를 지키며 어느 정도 선전했으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시즌 최종전에서 깨지는 바람에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 커트라인 3위를 내주며 또 좌절(...). 그래도 그 해 감독 통산 500승을 채우며 개인적인 소득은 거두긴 했다. 그럼 뭐해 가을야구를 못했는데

계약기간 마지막 해인 2012년을 맞이하여 한국을 대표하는 거포 이대호를 영입하는 등 팀 전력 상승에 힘을 기울였지만...오릭스는 시즌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도 5위 라쿠텐 골든이글스와 압도적인 차이로 최하위를 마크하며 재계약이 가능할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결국 시즌이 끝나기도 전인 2012년 9월에 경질되었다. 후임으로 한큐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 투수 출신이며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 2009년 WBC 일본 대표팀 투수 코치를 지낸 야마다 히사시 등이 거론되었으나, 모리와키 히로시 수석코치가 정식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4.5. 한신 타이거스 감독 2기[편집]


2022년 9월 27일 야노 아키히로 감독의 후임으로 한신 타이거스 제35대 감독으로 내정됐다. 2008 시즌을 마지막으로 팀을 떠난지 무려 14년만이고, 오릭스의 지휘봉을 내려놓고 현장을 떠난지는 10년만이다.

오카다의 감독 부임과 함께 후지카와 큐지, 토리타니 다카시, 이마오카 마코토 등 오카다 1기 시절 팀의 주축이었던 OB들의 코치진 합류가[18] 점쳐지고 있다.

취임 직후 카일 켈러를 제외한 외국인 전원과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

3~4월간은 2위에 머물렀지만, 5월 중순부터 타격이 폭발하고 수비가 안정되면서 순식간에 센트럴 리그 1위까지 치고 올라왔다. 5월에 여러 시리즈를 연달아 위닝 이상을 기록하며 2위 요코하마와의 승차를 7게임차로 벌리며 리그 1위로 교류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허나 정작 교류전에서 유아사 아츠키를 비롯한 마무리 투수들의 잦은 블론세이브와 교류전 최다 실책이 연달아 터지며 7승 10패 1무로 부진했고, 요코하마가 교류전 우승을 거두면서 리그 1위는 유지했으나 승차가 2.5게임차까지 좁혀졌다. 교류전 다음 시리즈인 요코하마와의 수위공방 3연전에서 최대한 승차를 벌리는 것이 중요해진 상황. 그러나 요코하마와의 3연전 원정 경기를 모조리 내 주면서 기어이 요코하마에 도로 선두를 내주고 말았다. 하지만 현재는 1위 자리를 계속 오가고 있으나 4위인 요미우리와 게임차가 겨우 4겜차에 불과하다. 까딱하면 B클라스로 나락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최대의 위기라고 여겨졌던 8월 초 죽음의 원정을 8승 1패의 성적으로 이겨냈고, 이후 교세라돔 야쿠르트 3연전까지 10연승을 내달리면서 39경기를 남긴 8월 14일 현재 8경기 차 단독 선두로 치고 나갔다. 무섭게 치고 올라오던 히로시마와 요코하마가 주춤한 사이, 절묘한 계투책과 로테이션 선수 기용이 빛을 발하면서 16년 만의 10연승을 달성해 승차를 확 벌린 상황이다. 8월 15일 히로시마전을 승리할 경우 매직넘버가 점등되며, 8월 15일부터 시작되는 히로시마, 요코하마와의 원정 6연전을 좋은 성적으로 마무리한다면 리그 우승은 95% 이상 확정이라 봐도 될 정도.

그리고 9월 14일 요미우리를 상대로 4-3 승리를 거두며 자력으로 2005년 이후 18년만에 6번째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2023년 한신 타선의 볼넷을 얻어내는 비율이 크게 개선되었는데, 덕분에 잔루율이 상당히 높음에도 많은 득점을 뽑아내고 있다. 이에 대해 오카다 감독이 구단이 선수들과 연봉 협상 시 볼넷과 안타를 같은 기여도로 평가해달라고 요구해서 승낙을 받아낸 점[19], 상대적으로 선수들에게 빠른 타격을 주문하고 변덕이 심하던 전임 야노 아키히로 감독에 비해 선수들을 우직하게 믿어주는 것이 오카다 스타일인 점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물론 이런 장점이 단기전에서는 얼마든지 단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2023년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와 여길 넘어선다면 일본 시리즈에서 단기전 운용 능력이 다시 한번 관건이 될 것이다. 1기 시절 오카다 감독의 발목을 잡은 것도 이 단기전 승부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를 스윕한 데 이어 2023년 일본시리즈에서는 33-4때와 다르게 기민해진 불펜 운용으로 간사이 라이벌인 오릭스 버팔로즈를 4승 3패로 꺾고 한신 타이거스의 38년만에 통산 2번째 우승을 만들어내며 오랜 세월 자신을 얽매어 왔던 단기전에서 약하다는 평가를 뒤집게 되었다! 27살에 한신 선수로 우승했고, 65살에 한신 감독으로 우승하게 된 것이다.

여담으로 이 우승으로 센트럴 리그 최고령 우승 감독 기록을 경신했는데, 이전 기록은 2000년 요미우리의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당시 64세)이었다.

2023 시즌 기준으로 최고령 감독이면서[20] 감독 커리어 첫 일본시리즈 우승이였고 한신팬들이 향해 인사를 하고 벤치대기실에 들어가는데 한신팬들이 계속 오카다!오카다!하며 감독을 연호했다. 인터뷰 승리소감에서도 “최고의 최고였다고.” 답을 남겼다.

5. 기타[편집]


  • 일본 야구 커뮤니티에선 동뎅(どんでん)이란 별명으로 불린다. 현역에서 은퇴한 직후 아지노모토의 조미료 제품 '혼다시 우다시(ほんだし うどんでんだし)'의 CM에 출연한 것이 유래. 해당 링크는 당시 방영한 CM 중 하나로, 칸사이벤우동, 오뎅 발음의 유사성을 섞은 화려한 언어유희가 특징인 CM이다. 이 별명은 널리 알려져서 아사히 방송 등에서도 공식적으로 쓰고 있다.
  • 인터뷰와 말버릇이 유명하며, "그건 그렇다(そらそうよ)"는 오카다의 말버릇이 되어 구단에서 특허출원까지 했다. 5ch 난J 등 야구 커뮤니티에서는 오카다 감독의 알아먹기 힘든 인터뷰를 동어(どん語)라고 부른다.
  • 위 프로필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처진 눈매 때문인지 노안 속성이 있다. 1살 연하이자 프로입문 1년 후배인 하라 타츠노리가 동안이라 대비된다. 사실 오릭스 감독 시절까지만 해도 저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 폭삭 노화가 진행되었다.
  • 경기중에 덕아웃에서 파인애플맛 사탕을 종종 먹곤 한다. 그래서 칸사이 지역에서는 파인애플맛 사탕이 없어서 못 파는 지경에 이르렀고, 오릭스의 나카지마 사토시 감독도 목캔디를 먹는다고 인터뷰에서 언급했다.

[1] 오사카 토박이로 태어나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하며 한신 타이거스 광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한신 팬이 되어 코시엔 명당자리의 시즌 티켓을 가지고 마음껏 야구경기를 구경할 수 있었고, 어릴 적부터 좋아하는 팀의 선수들과 캐치볼을 할 정도로 개인적 교류를 가졌으며, 야구선수의 꿈을 품은 후엔 고교 시절에 코시엔 대회 진출, 와세다대학 진학 후에는 중심 타자로서 여러 프로팀의 주목을 받았고, 드래프트에서는 본인이 가장 가고 싶어하던 의 1순위 지명을 받은 후에 바로 주전 자리를 차지하면서 신인왕 수상, 중심타선의 일원으로서 팀 역사상 유일한 일본시리즈 우승의 주역 중의 한 명으로서 팀에 공헌한 레전드의 길을 걷고, 은퇴 후에도 그 팀의 감독으로서 팀을 닛폰이치로 이끄는 등 그야말로 팀의 팬이라면 가장 이상적인 인생역정을 걸어온 사람이다.[2] 비록 선수 시절의 마지막은 타팀에서 하였고, 감독 재임 중에 거대한 흑역사를 남긴 것은 옥의 티이지만, 본인이 팬이던 팀에 입단한 케이스 중에서 이 정도로 화려하거나 매끄럽게 선수-지도자 생활을 이어갔던 경우는 거의 없다. 정반대로 본인이 팬이던 팀과 상극인 라이벌팀에 입단해서 잘된 경우는 오히려 많은데, 같은 팀 선배였던 카케후 마사유키부터 교진팬이었고 나가시마 시게오는 간토출신임에도 한신팬이었다.[3] 한신에는 그 당시 유소년 팀이 없어서 난카이를 택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와 함께 간 오사카 구장에서 야구 경기를 관람하면서 프로야구 선수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4] 당시 무라야마 미노루의 등번호이자 현재 한신의 영구결번인 11번을 달았다고 한다.[5] 전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인 같은 성씨의 오카다 타케시와과는 소년 야구팀과 와세다대학(나이는 타케시가 1살 많으나 타케시는 재수해서 입학했다.)에서 동기였고, 각각 야구부와 축구부 주장을 맡았다. 그런데 더 무서운 건 둘 다 어렸을 적 야구소년이었다는 점인데, 오카다 타케시는 야구부의 똥군기가 싫어서 축구를 선택하게 된다. 이렇게 공통점이 많았음에도 유일한 접점이라곤 리틀 호크스 동료였다는 거 밖엔 없지만 2009년에 스포츠 잡지 Number의 와세다대 특집 기사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대담 요약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선 야구 오카다 감독이 축구 오카다 감독에게 응원을 보내는 훈훈한 모습을 남기기도. 오카다 다케시는 일본인감독 최초 16강진출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면서 일본축구감독들 중 명장대열에 올라갔다.[6] 이 때 오카다는 "한신 입단이 최대의 희망사항이지만 한큐 브레이브스 같은 구단도 좋다. 그 외의 구단이라면 생각해 보겠지만 프런트가 견고하고 우승권에 가까운 팀이라면 기꺼이 입단하겠다"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근데 오카다는 훗날 정말로 한큐의 후신인 오릭스에서 은퇴하게 되었다.[7] 참고로 그 해 랜디 바스는 174안타, 54홈런, 134타점, 카케후 마사유키는 143안타, 40홈런, 108타점을 기록하였다. 클린업 트리오 세 명이 474안타, 129홈런, 343타점을 한 해에 합작한 것. 뿐만 아니라 1번 타자이던 마유미 아키노부 또한 말이 1번이지 타율 0.322, 34홈런, 84타점이란 웬만한 팀 4번 뺨치는 스탯을 수립했다.[8] 셋 중 유일하게 두 자릿수 홈런을 못 쳤던(7홈런) 히라타 카츠오마저도 타점을 53점이나 뽑아내며 클러치 능력이 있음을 보여줬다.[9] 오카다의 3루수 자리를 받았던 야기 히로시는 정작 이 시즌까지만 주전 멤버로 활약했고 이후 부상과 부진 등으로 출전 기회가 급격히 줄다가 대타요원으로 전향하게 되었다.[10] 오릭스로 이적하기 전 기자회견에서 오카다는 "난 앞으로도 한신의 팬이다"라면서 눈물을 흘릴 정도로 한신에 대한 남은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11] 오릭스 구단의 모기업은 좋게 말하면 금융회사고 나쁘게 말하면 사채업자이다.(...)[12] 그러나 오릭스 블루웨이브노무라 카츠야가 이끌던 야쿠르트 스왈로즈에게 일본시리즈에서 패배했다. 다음 해엔 나가시마 시게오요미우리 자이언츠를 꺾고 우승했지만...[13] 당대 최강급 2루수 치고 상복이 적었는데, 그 이유가 하필 동시기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레전드 2루수 시노즈카 카즈노리가 존재했기 때문. 비록 장타력에 있어선 오카다가 압도적이긴 했어도 시노즈카 역시 통산 타율 .304에 수위타자를 2차례 수상할 만큼 출중한 교타력을 자랑했고 수비로도 정평이 나있던 타자였던 데다 오카다와 시노즈카가 주전 2루수 뛸 당시의 양팀 성적도 요미우리는 전설의 V9 시대만큼은 아니었어도 일본시리즈 우승 2회, 센트럴리그 우승 5회를 달성하는 등 여전히 강팀의 지위를 유지한데 비해 한신은 1985년의 임팩트 있던 우승을 빼곤 하위권을 전전하던 시기였기에 그만큼 오카다의 존재감이 덜할 수밖에 없었다.[14] 2군 에이스이던 이가와 케이후지카와 큐지같은 투수들이나 세키모토 켄타로, 하마나카 오사무같은 타자들이 있었다.[15] 이 당시 롯데 소속이던 이승엽이 시리즈에서 홈런 3개를 폭발시키며 롯데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크게 일조한 바 있다.[16] 사실 그 당시(7월 9일) 요미우리는 2위 주니치에 승률 1리 모자란 3위였다.[17] 2009년 12월에 결혼해서 신혼이었다고 한다. 향년 24세. 사고인지 자살인지는 조사를 하지 않게 되면서 알려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죽기 직전에 자살하는 사람과 비슷한 말을 하는 것과 침울한 모습으로 있던 것이 포착되어 자살이라는 의견도 많았다.[18] 안도 유야 투수코치, 츠츠이 소 1루코치, 후지모토 아츠시 3루코치는 남았다.[19] 이는 출루율을 중시하는 세이버메트릭스의 기조와도 유사하다.[20] 각 팀이 점점 더 젊은 감독을 찾고 있는 상황인데, 한신이 오히려 반대의 선택을 해 최고의 결과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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