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역사/일본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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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류큐 처분 및 일본으로의 편입
3. 철의 폭풍[1]


1. 개요[편집]


일본 제국1879년 이른바 '류큐 처분'을 통해 당시 이미 왕국에서 (藩)으로 강등된 류큐 정부를 해산한 이후부터 1945년 일본 제국이 패망하고 일본에 귀속되어 있던 류큐를 미국이 분리하여 통치한 시대인 "류큐 열도 미국민정부" 이전까지의 역사를 서술하는 문서이다.


2. 류큐 처분 및 일본으로의 편입[편집]


오키나와 현의 역사(縣史)는 일본이 1879년 이른바 '류큐 처분'을 통해 당시 이미 왕국에서 번(藩)으로 강등된 류큐 정부를 해산하면서 시작된다. 당시 일본 정부는 500여 명의 군경을 파견해 류큐 정부를 해산하고 쇼타이 왕을 도쿄로 압송해 형식적 작위(후작)를 내린 뒤, 이 일대에 오키나와 현을 설치하였다.

오키나와 현의 행정은 대부분 일본 본토 출신들이 독점하다시피 했으며 이들은 오키나와를 식민지처럼 대했다. 이들은 오키나와의 근대화 같은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낡은 제도를 거의 손대지 않는 구관온존책(旧慣温存策)의 방침을 한동안 유지하였다. 이는 주민들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1895년이 되어서야 예로부터 미야코지마 등의 주민들을 괴롭혀오던 악습인 인두세가 폐지되었다. 인두세 폐지뿐만이 아니라, 대만, 조선 등과 달리 엄연히 일본 본토인데도 일본 본토에서 시행된 근대적 정책이 10~25년 뒤에야 도입되었다. 지방행정 역시 일본 본토는 이미 1889년에 시정촌제를 시행하면서 근대적인 행정구역 통폐합을 단행했고, 조선에서도 경술국치 직후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1914년에 부군면 통폐합을 단행한 반면 오키나와현에서는 류큐 왕국 시절 마기리·도(間切·島) 체제를 한동안 유지하다가 1908년이 되어서야 도서정촌제를 실시하면서 행정구역 통폐합을 단행했다.

오키나와 주민들도 마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류큐왕(琉球王)으로 불리며 악명을 떨치던 4대 현지사 나라하라 시게루(奈良原繁)의 통치에 맞서서 현비유학생 출신 관료였던 쟈하나 노보루(謝花昇)는 1899년 오키나와 구락부(沖縄倶楽部)를 세우고 민권운동과 자치권 및 참정권 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나라하라 시게루의 탄압에 류큐구락부는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운동이나 학생운동 등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결국 이러한 운동은 일본 정부가 치안유지법을 제정하면서 반체제인사들을 탄압하는 명분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1920년대의 공황기에는 경제사정이 나빠졌는데 특히 설탕값이 폭락하여 설탕 수출에 의존하던 오키나와는 큰 타격을 받았다. 여기에 흉작이 겹치면서 엄청난 기근을 겪었다. 도호쿠 등 다른 일본 내 지역들도 기근으로 고생했지만 오키나와는 특히 혹독한 기근을 겪었는데, 이 시기는 소철 지옥이라 불렸다. 당시 주민들이 소철[2]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부르는 말이다. 1930~40년대 빈궁한 조선인들이 나무껍질까지 먹었다고 한 바와 비슷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키나와인들은 가깝게는 오사카 등지의 공장에 일자리를 구하거나,[3] 멀게는 남양군도, 하와이, 브라질 등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삶을 개척하려고 하였다. 때문에 일본의 이주자 가운데 오키나와 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다. 하와이에만 현재 5만여 명의 오키나와계 미국인이 살고 있으며 주지사까지 배출하였다.[4] 이는 하와이에 거주하는 한국계 주민의 두배나 되는 수치이다.

일본 제국은 1940년부터 류큐어 사용을 금지하는 등 오키나와를 일본에 동화하려고 노력했다. 일본 내에서 당하는 불이익[5]을 없애기 위해서는 오키나와 고유 요소를 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호응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일본의 민예 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6]가 이를 문화탄압이라 비판하고 한편에서는 이는 방언을 애완하는 것이라고 하며 갈등이 일어났다. 이를 방언논쟁(方言論争)이라고 부른다.

한편 오키나와학(沖縄学)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하 후유(伊波普猷)를 비롯한 학자들이 오키나와의 고유한 문화를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성과를 남기기도 했다.

이 시기의 괴로웠던 역사 때문에 오늘날 오키나와는 일본 제국(+ 현재 일본 정부)에 대한 반감이 강하다. 더불어 사쓰마 번(현 가고시마 현) 시절이던 1609년에 류큐 왕국을 침략하여 복속시킨 것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 시기 오키나와 현의 경제와 정치를 장악한 자들도 대부분 가고시마 출신이었기에 가고시마에 대한 반감도 강하다. 류큐왕이라 불리던 현지사 나라하라 시게루 역시 가고시마 출신이었기에 가고시마에 대한 반감 역시 강한 편이다.


3. 철의 폭풍[7][편집]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자 오키나와는 다시 주목 받았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벌이기 시작하면서 이곳을 병참 기지로 쓰기 시작했던 것(이곳의 지리적 특성 때문에 일본군의 집결지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결국 패전이 다가오면서 미군이 오키나와에도 접근, 상륙하여 이오지마 전투와 더불어서 태평양 전선 최대의 혈전인 오키나와 전투가 벌어졌다. 이 와중에 일본은 자국민 보호는커녕 오키나와 주민 전원을 총동원하여 방어전을 펼쳤다. 웬만한 남성은 죄다 징집했고, 어린 남학생들은 데려다 군인으로 써먹었다. 여학생들도 간호요원이나 군무원으로 끌려갔다. 그 가운데 잘 알려진 것이 히메유리 학도대.

전선이 밀리자 일본군은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옥쇄하라라며 죽음을 강요했다. 당시 미군에 저항하던 오오타 미노루(大田実) 해군 사령관은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는지 해군 차관에게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후세에 특별한 배려를 부탁합니다"라는 전보를 보내고 자결하였다. 이후 일본 중앙 정부의 오키나와 현에 대한 태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 특별한 배려가 언급되곤 한다. # 일본군은 이것도 충실하게 수행해서 오키나와 주민들을 전투 중에 인간 방패로 쓰거나, 패배가 다가오자 주민들을 모아놓고 자폭(말이 좋아서 자폭이지, 살고 싶어하는 민간인들까지 살해했다) 게다가 젊은 여자들을 강간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린 소녀들을 데려다가 히메도리 학병대와 같은 일본군 위안부 성노예로 삼아 임신시키기까지...이하생략. 게다가 일본군에 의해 미군에 대한 끔찍한 소문[8]이 퍼져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동반자살한 오키나와 사람들도 많았다.

오키나와 전투가 끝날 때까지 최소 15만 명 이상의[9] 오키나와 주민들이 희생되었고, 강제징용된 식민지인들도 많이 목숨을 잃었다.

오키나와 전투의 이러한 모습들은 미국에 보여주기 위한 쇼였다는 평이 많은데, 당시 미국 입장에서는 일본 본토로 보이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그냥 단순한 식민지인 오키나와의 상황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본문 후반부에 다시 언급되는 전쟁 종료 막후 협상에서 일본 측의 최후 협박용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면 오키나와보다 더한 저항에 직면할 것이라는 의미로. 그리고 여기에 미국은 핵폭탄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뜨리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런 사례들로 인해 오키나와는 특히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고, 미국과 일본 본토에 대한 감정도 이전보다 더욱 복잡해지게 되었다.

1945년 6월을 기해 류큐 군정부가 들어섰다. 이후의 이야기는 미국 통치기 류큐 열도 참조.

[1] 오키나와 사람들이 오키나와 전투를 표현할 때 쓰는 말. 미군의 포탄이 말 그대로 폭풍처럼 쏟아졌다.[2] 잎과 열매에 독이 있기 때문에 번거롭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만 식용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상황히 급했고, 미처 독이 빠지지 않은 소철을 먹다가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다.[3] 오사카 타이쇼역 일대가 '리틀 오키나와'라고 불릴 정도로 오키나와 출신이 많이 사는 곳이다. 츠루하시역 일대가 재일교포가 많이 사는 곳인 것과 같다. 오사카는 공장이 밀집해있어 조선이나 오키나와 등지에서 노동력을 값싸게 들여올 수 있었고, 이들이 공장 주변에 살면서 공동체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4] 2015년 현재 재임중인 제 8대 하와이 주지사 데이비드 이게(David Ige).[5] 관동 대지진에서도 조선인, 중국인과 함께 류큐인들이 학살당한 적이 있다.[6] 한국에는 조선의 도자기에 대한 애정, 총독부의 광화문 철거 반대 등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미는 한의 미라고 처음 주창한 것도 바로 이 사람이다.[7] 오키나와 사람들이 오키나와 전투를 표현할 때 쓰는 말. 미군의 포탄이 말 그대로 폭풍처럼 쏟아졌다.[8] 남자는 잔인하게 죽이고 여성은 강간하고 나서 죽인다는 헛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9] 오키나와 전적 국립공원의 "평화의 주춧돌"에 이름이 새겨진 오키나와인 희생자의 수가 149,329명이다. 확인되지 않은 희생자들까지 합하면 숫자는 20만 명 이상까지도 추산할 수 있다. 1940년의 오키나와 현의 인구가 574,579명이었으므로 3명 가운데 1명 꼴로 사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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