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타 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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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센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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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센구미 1번대 조장
오키타 소지
沖田総司

출생
1842년~1844년 여름
무사시국 에도 시라카와 번 저택
(現 도쿄도 미나토구)
사망
1868년 7월 19일 (향년 25~27세)
무사시국 에도 (現 도쿄도)
재임기간
신센구미 1번대 조장
1864년 ~ 1868년 7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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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마사(春政) → 카네요시(房良)
아명
소지로(宗次郎)
계명
현광원인예명도거사(賢光院仁誉明道居士)
신체
약 167cm | 약 61kg
유파
천연이심류(天然理心流)
가족
아버지 오키타 카츠지로(沖田勝次郎)
어머니
매형 오키타 린타로(沖田林太郎)
첫째누나 오키타 미츠(沖田みつ)
둘째누나 오키타 킨(沖田キン)


1. 개요
2. 이름
2.1. 오키타 총사?
3. 생애
3.1. 출생과 곤도와의 인연
3.2. 신선조 시절
3.3. 결핵, 그리고 사망
4. 성격
5. 외모
6. 검술
6.1. 사용했던 검
7. 일화
7.1. 연애
8. 기타 창작물에서의 등장



1. 개요[편집]


일본 에도 시대 말기 인물. 신선조(신센구미) 1번대 대장이자 격검사범. 아명은 소지로[1].


2. 이름[편집]


"오키타"(沖田)는 성이었고, "소지"(総司)는 이름이었다; "후지와라"(藤原)는 가족 일족[2]; "카네요시"(房良)는 공식적인 이름이였다.

오키타가 1863년에 그의 이름을 오키타 소지 후지와라 카네요시로 바꿨는지 1862년에 이름을 바꿨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주변의 몇몇 사람들이 그를 "소지"[3]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가 그의 이름을 소지로 바꿨다는 추측이 있다.


2.1. 오키타 총사?[편집]


이름을 한국 한자음으로 읽으면 '충전총사'인데, 어째 한국에 들어온 신센구미가 등장하는 만화에서 성은 그대로 쓰고 이름은 한국 한자음으로 읽어 '오키타 총사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은근히 있다. 이는 이름인 총사(総司)가 오해하기 딱 알맞는 경우이기 때문. 총(総)은 거느릴 총(總)의 일본식 한자이고 사(司)는 다스릴 사. 즉, 한국이나 일본에서 흔히 쓰이는 군용 단어 총사령관(總司令官)과 정확히 두 글자가 일치한다. 때문에 신선조 관련 지식이 별로 없는 번역가들의 경우 오키타가 실제로 1번대 대장 직위를 맡고 있기까지 하다는 점까지 곁들여지면 '아, 오키타라는 인물이 총사(령관)의 직책을 맡고 있나 보다'라고 확신(?)하고 번역해버리는 것. 그러나 신선조에 '총사'라는 직책은 없었고, 일본어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총사령관 등의 직책을 '총사'로 줄여쓰는 용례는 없다.[4]

이로 인해 해적판으로 들어온 신센구미 관련 작품에서 '오키타 총사'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경우가 제법 많았다. 정발된 타임슬립 닥터 JIN의 경우, 내내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멀쩡하게 '오키타 소지'라는 이름으로 번역되다가 마지막 20권에서 뜬금없이 오키타 총사라고 오역했다.

참고로 번역기로 돌려도 오키타 총사라고 뜬다.


3. 생애[편집]



3.1. 출생과 곤도와의 인연[편집]


그는 1842년 또는 1844년에 에도 시라카와 번[5]의 저택의 사무라이 가문에서 ‘오키타 소지로[6] 후지와라 하루마사[7]’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오키타 카나에몬[8]이었고 그의 할아버지는 오키타 산시로였다.

그의 아버지 오키타 카츠지로는 1845년에 사망했으며 어머니도 일찍 사망했다. 일찍 죽은 부모 대신, 오키타에게는 두 명의 누나인 오키타 미츠[9]와 오키타 킨[10]이 있었다.

1846년, 오키타 가문의 입양된 아들인 오키타 린타로[11]와 결혼하기 위해, 그의 큰누나인 오키타 미츠는 곤도 슈스케의 입양된 딸이 되었다. 곤도 슈스케는 천연이심류의 검객이었고 오키타는 9살쯤에 그와 함께 시에이칸에서 훈련을 시작했다.

여담으로 그 시점에서 곤도 슈스케는 이미 시마자키 카츠타를 입양했었는데… 그가 바로 훗날의 곤도 이사미.

오키타는 곤도와 함께 지내며 주변의 도장을 운영하고 있는 하라다 사노스케, 토도 헤이스케, 나가쿠라 신파치 등과도 친해지게 된다.

곤도는 오키타와 각 마을의 유력자들과 인맥을 만드는데 힘을 쓰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친해진 후원자 중 하나가 히노 역참[12]의 촌장이었던 사토 히코고로[13]로, 그는 자기 돈을 내서 히노에 천연이심류 도장을 만들고 마을 사람들에게 곤도에게 수련을 받을 것을 장려하고 다녔다. 히코고로와 오노지 마을[14] 촌장인 코지마 시카노스케[15], 그리고 곤도 이사미 세 사람은 의형제의 결의를 맺은 사이였다고 한다.

한편 앞에 나온 히코고로는 곤도에게 자기 처남을 소개시켜 주었다. 무사가 되겠다고 하면서 고용살이를 나가면 사건을 치고 돌아오고, 데릴사위 양자가 되라는 혼담을 퇴짜놓았으며, 안정된 직업을 갖는 일 없이 무사적 취미, 약제 판매의 명목을 단 방랑, 그리고 여자 꼬시기에 몰두하던 이시다 마을[16] 부농 집안의 막내아들, 바로 히지카타 토시조였다.

토시조는 1세 연상인 곤도와의 만남을 계기로 카에이 4년[17]에 천연이심류에 입문하였고, 얼마 안 가 곤도와 오키타의 절친이 된다.

오키타는 무츠 시라카와 번[18]의 아시가루 소대장[19]이었던 아버지 덕에 유파 안에서는 무사의 혈통으로서 존중을 받았으며, 타고난 재능 덕에 이미 15세 나이에 천연이심류 문하생들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고작 19세 나이에 개전에 도달했다.

오키타는 한번 칼을 잡으면 인정사정없이 혹독하게 지도하는 스타일로, 농민들이 소지에게 배우기를 꺼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1863년, 곤도는 오키타, 히지카타 등과 훗날 신선조의 토대가 되는 로신구미에 들어간다.

3.2. 신선조 시절[편집]


그렇게 오키타는 분큐 3년[20] 낭사대를 결성할 때 참가하여 교토로 상경, 매형 린타로와 함께 로신구미를 결성한다.

로신구미 분열 후에는 곤도 이사미, 히지카타 토시조, 나가쿠라 신파치 등과 함께 남아 신선조를 결성한다.

그렇게 곤도 이사미, 히지카타 토시조, 나가쿠라 신파치 등과 함께 신선조에 들어가서 맹활약을 펼친다. 그가 대장으로 있었던 1번대는 가장 첫 번째 부대답게 언제나 어려운 임무를 맡았으며, 대장인 오키타 또한 1번대 대장답게 신센구미 내에서도 1, 2위를 다투는 검술실력을 자랑했다.

오키타의 1번대는 항상 주요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검호들로 넘쳐나는 신선조 안에서도 1,2등을 다툴 정도로 많은 사람을 베었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세리자와 카모 암살, 우치야마 히코지로 암살을 맡기도 하였다.

오키타가 사람을 베었다는 첫 기록은 분큐 3년 3월 24일 밤. 키요카와 하치로의 호소에 모인 낭사대 1번대에 소속해 있던 토노우치 요시오의 기록이다.

겐지 원년[21] 6월 5일에 일어난 이케다야 사건에서 막부 토벌파의 여러 간부를 숙청하며 활약했지만, 폐결핵으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고 알려져 있다[22]. 그러나 그 뒤 신선조 역사를 통해 보면 의연하게 활동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폐결핵을 앓고 있었다고는 보기 어렵고, 따라서 폐결핵이 아닌 탈수증세로 쓰러졌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게이오 원년[23] 2월, 신선조 총장인 야마나미 케이스케가 탈주하는 사건이 일어나 추격대로 파견되어 오미국 쿠사츠시에서 잡는다. 야마나미는 오키타의 시중을 받아 할복하였다. 오키타는 야마나미를 형처럼 따랐다고 알려져 있으나, 고향에 보낸 편지에는 야마나미의 죽음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3.3. 결핵, 그리고 사망[편집]


오키타는 결핵을 앓고 있었지만 게이오 2년[24]까지는 심각한 수준이 아니었으며, 다른 신선조 간부들도 그가 가끔 쓰러지는 걸 제외하면 곤란한 점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제 1선에서 활약하지 않게 된 것은 게이오 3년[25] 이후 부터로, 도바 후시미 전투에는 참가하지 못하고 오사카에 후송된다[26]. 도바 후시미 전투에서 패전한 뒤, 대원들과 함께 해로로 에도에 돌아가 갑양진무대에 참가하나[27] 도중에 낙오하게 된다.

그렇게 1867년경부터 폐결핵[28][29]으로 요양하게 되면서 임무에서 빠지게 된다. 그 후 막신(幕臣) 마츠모토 료쥰이 센다가야의 정원사로 숨겨주었다.

여담으로 당시의 유명한 양의였던 마츠모토 료준[30]이 우연히 교토에 와서 신센구미 대원들을 전부 진찰하고 남긴 기록에는 폐결핵인 대원이 1명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이 오키타로 추정된다.

센다가야의 정원사로 위장하고 나서 그는 오키타 린타로, 오키타 미츠,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과 함께 게스트하우스로 이사했다. 막부 군대[31]가 도호쿠 지역으로 퇴각했을 때, 오키타는 에도에만 남아 있었다.

게이오 3년 12월 18일 오키타가 요양하기 위해 머물고 있던 콘도의 애첩의 집을 어릉위사·아베 쥬로, 사하라 타로, 우츠미 지로 3명이 습격하였다.

전달 그들의 지도자적 존재였던 이토 카시타로를 살해한 신선조에 대한 복수였으나, 오키타는 후시미봉행소로 떠난 후라 재난을 면했다.[32]

이후 갑양진무대가 출진할 때 곤도가 오키타를 문병하자, 평소에는 밝던 오키타가 이때만은 목소리를 높여 울었다고 한다.

죽을 때까지 곤도를 걱정하는 말을 여러 번 했었다고 전해진다. 사실 곤도는 그가 죽기 두 달 전인 1868년 5월 이미 죽었으나, 곤도의 죽음에 대해서 주변 사람들은 단단히 입막음을 당했기 때문에[33] 오키타는 끝내 곤도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고.

그렇게 오키타는 곤도가 참수당하고 2개월 뒤인 1868년 7월 19일[34]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날 밤 늦게, 그는 에도 아자부에 있는 센쇼지 사원에 그의 본명으로 묻혔으며 사세구[35]는 〈움직이지 않으면 어둠 속에 멀어지는 꽃과 물[36]〉이라고 한다.

묘지는 도쿄도 미나토구 모토아자부 3 센쇼지 외. 센쇼지에 의한 계명은 〈현광원인예명도거사[37]〉. 또한 오키타 가문의 누대 묘비에는 천연이심류 외 북진일도류의 면허개전을 얻었다는 취지도 적혀 있다.

그의 묘지는 NHK의 타이가 드라마 신센구미가 출시될 때까지 수년 동안 대중에게 공개되었으나 2004년, 드라마 자체 덕분에 신센구미와 오키타에 대한 새로운 관심으로 인해, 많은 방문객들이 그의 무덤을 보기 위해 사원으로 몰려들었고, 그 결과 사원의 묘지는[38] 대중에게 제한되었다.

형님처럼 따랐던 곤도 이사미나 히지카타 토시조의 죽음, 그리고 신센구미의 최후를 보지 않았던 것은 행운일지도. 하지만 신센구미의 몰락 자체가 그의 병으로부터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4. 성격[편집]


여러 일화를 보면 매체에서 처럼 좋은 성격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뛰어난 실력의 1번대 대장이라는 체면과는 상반되게, 오키타는 항상 농담을 하며 웃고 있던 밝은 분위기의 사람이었다고 한다. 둔소 근처의 아이들과 자주 놀아주었으며, 작가인 시바 료타로는 신선조를 소재로 한 작품을 집필할 때 어렸을 때 오키타가 놀아주었다는 노파를 취재하였다.[39]

곤도나 히지카타 등 신선조에 대한 혹평으로 알려진 니시무라 카네후미조차 산난 및 오키타에 대해서는 비판을 남기지 않았다. 이것은 니시무라가 산난과 오키타에 대해서는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표현으로 보이며, 따라서 오키타는 신선조와 표면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사람 외에는 대인관계가 좋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어린 나이인데다 천진한 성격으로 알려진 사람인 반면, 살인을 밥 먹듯이 하는 무시무시한 정치투쟁 한가운데 있는 치안조직의 일원, 그중에서도 최선봉 간부에다 언제나 어려운 임무(암살을 포함)를 맡았기 때문에, 정상적인 인간의 감정을 결여한 사이코패스 같은 측면을 가진 섬뜩한 인물이었다는 설도있다.

하지만 미디어 믹스와 다르게 그의 성격에는 무서웠다는 여러 일화가 있다.

사쿠마 쇼잔의 아들 미우라 케이노스케가 어느 대원에게 놀림을 당했다. 며칠 뒤, 히지카타와 오키타가 바둑을 두고 있을 때 옆에서 미우라가 자신을 놀렸던 대원을 향해 배후에서 공격하자, 오키타는 뒤에서 공격하는 비겁한 행동에 격노하여 "이 바보자식"이라 외치며 미우라의 목덜미를 잡아 머리를 다다미에 밀어붙이고 질질 끌고 돌아다녔다. 그로 인해 미우라는 콧등이 새빨갛게 찰과상을 입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또한 '사납고 쉽게 화를 낸다'며 오키타에게 검술을 배운 자들은 사범인 콘도보다 오키타를 더 두려워 했다. 그 외에도 "칼로 베지마! 몸으로 베어라!" 라고 배웠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으며 그 외의 기록을 보아도 본래의 오키타는 항간에 알려진 상냥하고 어른스러운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르다.

5. 외모[편집]


여러 매체에 등장할 때의 이미지는 대부분 병약미소년 천재검사,[40] 신선조 가운데 가장 실력이 뛰어났다고 하며, 어느 매체에 등장하든지 전부 다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많은 매체에서 미남 혹은 미소년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사실 아무 근거가 없는 말이다. 오키타의 사진은 단 한 장도 남아있지 않고, 야기 가의 사람들이나 신센구미에 몸을 담궜던 사람들의 증언으로는 "미소년이었다"는 기록은 없다. 외모에 관한 기술로서는 "넙치같은 얼굴에 웃으면 애교가 있고 피부가 검다", "어깨가 퍼졌다", "새우등", "장신"이라 적힌 것이 남아있다.

일단 '소지=넙치 얼굴'이라는 설은 사토 히코고로의 증손이 TV에서 타니 하루오의 이야기에 가볍게 응하다 말실수를 한 것이 시작인 듯 하지만, 타니가 '소지는 넙치 얼굴'이라고 한 것은 "넓적하고 밋밋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친척들이나 형제들의 사진을 보면 모두 눈 사이가 좁기 때문" 이라고 한다.

참고로 오키타 테츠야는 이 설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오키타 가문에서는 소지의 외모에 대해서 "피부가 새하얗고 작은 남자였다"는 식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이 인물이 미소년으로 이미지화 된 것은 시바 료타로가 써낸 소설의 영향으로 추정된다. 그 중 '타올라라 검'의 한 구절을 보면,

오키타는 좋은 가문에서 자랐기 때문에 말씨가 공손했다. 남색(男色)의 상대로 삼고 싶을 만큼 얼굴도 여자처럼 예뻤다.

라고 나온다.

파일:x1NscMq.jpg

현재 남아있는 이 초상화는 오키타 본인의 초상화가 아니라 오키타의 누나 미츠가 손자 카나메 씨를 "소지와 어딘가 닮았다"고 한 것을 바탕으로 쇼와 4년(1929년)에 그려진 것이다.

이 외에도 저 초상화 말고 다른 생김새의 소지가 곤도 이사미와 같이 촬영한 사진 등이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나 합성사진이다. 오키타 소지 본인의 사진은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 않다.


6. 검술[편집]


오키타의 검술로 유명한 것이 〈3단 찌르기〉이다. 천연이심류의 평정안[41]의 자세에서 파고드는 발 소리는 한 번 밖에 울리지 않았는데 그 사이에 연속으로 세번을 찌른다고 한다. 눈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상대방은 한번 찔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세번 찔렸다는 묘사를 소설 등에서 많이 볼 수 있으나 실제로 그러한지는 불명.

《신선조 유문》에서 사토 센의 담화에 의하면, 오키타의 검술 형태는 사범인 콘도와 똑같았으며, 내지르는 소리마저 아주 닮아 가늘고 날카로운 소리였다고 한다. 단 칼 끝을 약간 내려 넘어질 듯한 자세로, 콘도[42]와는 조금 다른 자세를 취하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오키타의 검에 대해서는 나가쿠라 신파치가 "히지카타 토시조, 이노우에 겐자부로, 토도 헤이스케, 산난 케이스케 등 모두 죽도를 들면 어린애 취급을 받았다. 아마도 진심으로 맞붙으면 사범인 콘도도 당했을 것이라고 말했다"(《나가쿠라 신파치 유문》)고 말하였으며, 제자에게 "오키타의 검은 맹자의 검, 사이토의 검은 무적의 검"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물론 북진일도류의 면허개전을 받은 산난이나 목록을 받은 헤이스케를 애취급하는 것은 역시 나가쿠라가 지나치게 말한 것이지만 그만큼 그의 검술이 뛰어났다는 것일 것이다.

한편 신선조 외부에서의 평도 있다. 코지마 시카노스케는 신선조가 결성되기 전[43]에 "이 사람의 검술은, 만년에 반드시 명인에 이르게 될 것이다"[44]라고 서술하였으며, 신선조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던 니시무라 카네후미는 "콘도의 비장의 부하이자 국중 제 1의 검객이다", "천재적인 검법자"[45]라고 하였으며, 게다가 신선조를 적대시하던 아베 쥬로는 "오키타 소지, 콘도의 수제자로 상당한 실력이었습니다", "오키타 소지, 오오이시 쿠와지로라는 젊은이는 다만 실력이 좋은만큼, 검술등은 잘 부렸습니다" "오오이시 쿠와지로, 오키타 소지, 이노우에 겐자부로, 이들은 함부로 사람을 참살하므로"[46]등, 특히 적으로 돌렸을 경우 제일 먼저 위협이 될 검객으로 언급하였다.

참고로 치바 야이치로 [47]는 '우리들 눈으로 보면 겨우 목록[48] 정도의 실력'이라며 유일하게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6.1. 사용했던 검[편집]


소설 등에서 오키타 소지가 소유한 칼로 〈키쿠 이치몬지 노리무네〉의 이름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시모자와 칸 등이 전기에서 〈오키타의 칼은 "키쿠 이치몬지가 새겨진 폭이 좁은 칼"〉이라고 한데서 시바 료타로가 쓴 《신선조 혈풍록》 중 지어낸 이야기가 퍼진 것이다.

그러나 노리무네가 만든 칼은 일본도가 상용되던 당시에조차 굉장히 귀중한 고도[49]로, 경제적으로도, 실전에서 많이 사용할 필요성에서도 오키타가 소유했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고 추정되기 때문에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문제 삼고 있지 않다.

현재로서는 오키타가 소유한 실제 칼로 확인된 것은 〈카슈 키요미츠〉와 〈야마토노카미 야스사다〉이다. 혹은 노리무네 이외에도 몇 개인가 존재했던 국화에 일(一)자를 새겨넣은 폭이 좁은 칼 중의 하나가 아니냐는 설도 있다. 어쨌든 다른 부대원들과 마찬가지로 수도에 머물고 있었을 때 몇 번이나 칼을 교환했을 가능성도 높다.


7. 일화[편집]


여러가지 일화 중에는 나무 위에 올라가서 내려오지 못하는 새끼 고양이를 보고, 검을 휘둘러서 나무가지를 베어서 내려오는 고양이를 품에 안고 내려놔줬다는 일화가 있다. 고양이 같이 호기심 많은 동물이 검을 꺼내서 자기 근처의 나무가지를 베는 동작에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게 포인트.

고양이에 관련된 일화가 하나 더 있는데, 병으로 요양하던 시절 마당에서 고양이가 어슬렁 거리면 검을 가지고 쫓아내는 게 소일상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마당에 고양이가 왔고 오키타는 검을 들고 고양이를 쫓아내려고 했으나 고양이가 도망치지 않는 것을 보고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직감했다고 한다. 아마 그 시기에 고양이가 검을 든 자신을 위협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런 듯 하다.

여담으로 오키타가 사람을 베었다는 첫 기록은 분큐 3년 3월 24일 밤. 키요카와 하치로의 호소에 모인 낭사대 1번대에 소속해 있던 토노우치 요시오의 기록이다.

7.1. 연애[편집]


창작 세계 속에서 오키타는 시바 료타로의 소설 이후 일반적으로 순수한 청년으로 그려지는 일이 많았다. 마을 의사 딸과 플라토닉한 연애를 하는 것이 대부분으로, 실제 생활에 있어서도 콘도나 히지카타처럼 화류계 여성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노우에 마츠고로의 분큐 3년[50] 4월 22일 일기에 의하면, 히지카타, 마츠고로, 이노우에 겐자부로와 함께 오키타가 신마치의 유곽 쿠노기쵸 요시다야에서 텐진[51]을 샀다는 서술이 있는 걸로 보아 반드시 밤놀이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호의를 가지고 있는 여성의 이야기가 나오면 매우 진지해졌다고 한다.

또한 미부 코엔지에는 과거장에 〈오기타 씨 일가〉라고 쓰인 여성의 기록이 있어, 이것은 오키타의 애인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이 여성은 이시이 사토시라는 미망인으로 의붓 자식[52]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오키타가 이 여성과 슬하에 딸을 하나 얻어 쿄우라는 이름을 지어줬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하다. 또한 신선조에는 〈오키타 쇼노신〉[53]이라는 오키타 성을 가진 대원이 한 명 더 있어, 과거장의 '오키타 씨'는 쇼노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한편 시위관에서 일을 하고 있던 여성[54]에게 "결혼해줘"하고 고백받아 "수행중인 몸이라" 고 거절했다는 일화도 남아있다[55]. 이 여성은 콘도 슈헤이의 약혼녀인 이와타 코우라는 설도 있다.

또한 아부라코지에 있던 여관 마리모의 주인 딸과 어릴적부터 알고 지낸 소꿉친구였다고 한다.


8. 기타 창작물에서의 등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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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宗次郎[2] 즉 조상의 성이다[3] 예명인 소지로의 줄임말[4] 보통 '총사령總司令'까지만 줄인다.[5] 도쿄 도 미나토 구[6] 아명[7] 沖田宗次郎藤原春政[8] 1819년 사망[9] 1833-1907[10] 1836-1908[11] 1826-1883[12] 日野宿[13] 佐藤彦五郎[14] 小野路村[15] 小島鹿之助[16] 石田村[17] 1851년[18] 陸奥白河藩[19] 足軽組頭[20] 1863년[21] 1864년[22]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23] 1865년[24] 1866년[25] 1867년[26] 현재는 도바 후시미 전투를 향해 가던 중 부상을 입어, 오사카로 후송되는 배 안에서 폐결핵 증상이 나타났다는 설이 유력하다[27] 여러 가지 설이 있음[28] 당시에 폐결핵은 불치병이었다. 폐결핵은 주로 항생제를 투여하여 치료하는데 최초의 항생제인 페니실린이 발견된 것이 수십 년 후인 1928년이었고 항생제가 대량생산되고 상용화된 것은 더 후대인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었다.[29] 그래서 이 시대에 폐결핵에 걸리면 오래 못 살고 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케다야 사건(1864년) 때 피를 토했다는 세간의 설은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30] 후일 마츠모토 준으로 이름을 바꾸고 메이지 정부에서도 서양의학의 대가로 요직을 역임했다.[31] 신센구미와 신초구미 포함[32] 여담으로 같은날 저녁무렵 아베 일행들은 니죠 성에서 돌아오던 콘도 이사미를 총격, 부상을 입혔다.[33] 안 그래도 환자인 사람이 충격으로 병세가 악화될 수 있으니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라 여겼을 것이다.[34] 음력으로 다섯 번째 달 30일[35] 辞世句[36] 動かねば闇にへだつや花と水[37] 賢光院仁誉明道居士[38] 매년 6월의 하루를 제외하고는[39] 취재를 한 것이 1960년 전후로 추정되는데, 당시까지 실제로 오키타 소지를 본 사람이 살아 있었다는 것이다. 메이지 유신1868년이었으므로 상당한 고령이었겠지만.[40] 몇몇 작품에서는 TS돼서 병약미소녀 천재검사로 나오기도 한다.[41] 平正眼, 천연이심류에서는 平正眼이라고 쓴다[42] 콘도는 배를 약간 내민듯한 평정안을 취했다.[43] 분큐 2년, (1862년) 7월[44] <코지마 일기>[45] 《미부 낭사 시말기》[46] 《사담회속기록》[47] 신쵸구미(新徴組) 대원으로 오키타의 매형인 오키타 린타로의 동료[48] 目録,낮은 등급[49] 古刀[50] 1863년[51] 天人,기녀 계급[52][53] 게이오 원년 4월, 히지카타가 에도에서 모집한 부대원 중 한 명[54] 기가 세고 남자같은 성격이었다고 한다[55] 그 여성은 거절당한 충격으로 자살을 시도, 그러나 미수에 그치고 그 뒤 콘도의 중재로 다른 가문에 시집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