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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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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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 · · 황목 · 황보 · ·
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한자 표기가 다르더라도 한글 표기가 같으면 합산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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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

1. 吳[편집]


오(吳)씨는 중국과 한국의 성씨 중 하나다.[1] 소수이긴 하지만 일본[2]과 베트남에도 있다.

기원전 1100년대 주나라의 초대 제후인 오태백이 시조다. 그는 주나라(周)의 시조 고공단보의 장남으로 중옹(仲雍)과 계력(季歷)이 형제이며, 주나라 2대 왕 문왕이 조카가 된다. 기원전 12세기에서 11세기 경의 인물로, 왕위계승 서열 1위였지만 조카에게 황제의 위를 양보하고 제후의 한 명이 됐다. 현재 시조 사당도 의 수도였던 장쑤성 쑤저우에 있다. '오(吳)'는 '매우 높다, 고귀하다'는 뜻이다.

한국은 11~13위 정도로[3] top5인 수준은 아니더라도 대성이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인구 수가 꾸준히 증가해 지금은 서씨나 권씨보다도 많으며[4] 한씨, 신씨와 순위를 다투고 있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763,281명으로 대한민국 전체 인구(2015년 당시 51,069,375명) 중 약 1.49%를 차지했다.

1.1. 한국의 오씨[편집]


조선성씨통보에 210본까지 기록됐고 동국만성보에 의하면 20여본이 있다고 한다. 오씨대동종친회에 의하면, 가장 먼저 득관한 것은 고창 오씨이다.

해주 오씨는 중국에서 온 때가 서로 다른 두 갈래로 나뉜다. 둘 다 해주지만 다른 집안이다. 하나는 향파로 신라 지증왕 때 온 오첨(吳瞻)을, 다음은 경파로 고려 성종 때 중국 송나라에서 온 오인유(吳仁裕)를 시조로 한다. 향파는 오씨삼십세계도(1397)를, 경파는 해주오씨족도를 연원기록으로 한다.

1940년 전후로 공개된 '오씨30세계도' 필사본에 근거하면 해주 오씨 향파의 도시조는 태백왕의 25세손인 오기의 45세손 오첨이다. 지증왕이 김종지(金宗之)의 딸을 내려 경남 함양에서 2남 1녀를 두고 22년을 살다가 521년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는데 둘째 아들 오응은 나이가 어려 중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그대로 신라에 남아 함양에서 살게 되었다고. 내용을 보면 해주 오씨 향파와 거기서 분적한 성씨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까지는 이론이 없다. 다만 '오씨30세계도' 원본을 근거로 작성된 족보들에는 '오첨은 동방으로 와서 김종지(金宗之)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과 딸을 낳았다. 후한 건우 년간에 오첨은 중국으로 돌아갔다'고만 되어 있는데 필사본에는 함양이라는 지명이 추가되었다. 또한 후한 건우 년간은 서기 947~950년인데 지증왕 원년은 서기 500년으로 시간적인 차이가 크고, 지증왕 원년 동래설을 최초로 오씨 족보에 반영한게 1962년 '오씨대동보'이다. 이후 1969년 '오씨원본'도 '오씨대동보'를 따르고 그후로 대부분의 오씨 족보는 지증왕 원년(500년) 동래설을 따르나 문제는 시초가 되는 1962년 '오씨대동보'가 '오씨30세계도' 필사본을 근거로 하여 지증왕 원년(500년) 동래설을 기록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논란이 있다.

오응의 9대손 다련군 오희가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했으며, 딸이 고려 태조의 왕비인 장화황후가 되었다고 기록된 데서도 문제가 있다.[5] 장화왕후가 고려 2대 왕 혜종의 모후가 된 건 팩트지만, 오응, 오희 등의 존재가 필사본에만 있고 원본에는 없어 조작이 아닐까 의심을 받고 있다. 즉, 송은당(松隱堂) 오탁진(吳卓眞)의 기록을 기초로 한 해주 오씨(향파) 정해보(1767년), 보성 오씨 병술보(1766년), 함양 오씨 족보서(1689년)에는 원래 없던 부분이다. 또한 지증왕 원년은 경진(庚辰)년인데, 필사본에는 신사(辛巳)년으로 되어있다.

이후 내용은 원본과 필사본들이 같다. 오응의 12대손 오광우가 980년 다시 송나라로 귀국해 그의 현손인 오연총이 문종 때 다시 고려에 건너와 정착했고 오연총은 윤관과 함께 여진을 토벌해 1114년 추충공신에 봉해졌으며, 1116년 수사도 수태위 감수국사 상주국이 됐다. 오연총의 5세손인 오수권이 오현보, 오현좌, 오현필이라는 세 아들을 두는데, 이들이 1216년 강동성 전투에서 거란군을 격퇴했다. 그 공으로 각각 해주군, 동복군, 보성군에 봉해져, 해주 오씨 향파, 동복 오씨, 보성 오씨의 시조가 되었다.

한편 경파들은 해주오씨족도를 따로 쓰고 있다. 그에 따르면 시조인 고려 대학자 오인유는 본래 중국 송나라의 대학사로, 성종은 특별히 고려로 건너온 그를 발탁해 군기감과 예부의 일을 맡겼다. 황해도 해주에 정착해 후손들이 본관을 해주로 삼았다. 오인유의 14세손 오정방(吳定邦)의 정무공파(貞武公派)와 오윤겸(吳允謙)의 추탄파(楸灘派)에서 특히 많은 인물이 나왔고, 서인이 주동한 인조반정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세력이 또 다시 크게 늘었다. 오윤겸의 조카가 삼학사로 알려진 오달제(吳達濟)이다. 이후 영조때 이인좌의 난을 토벌한 1등 분무공신 오명항에 이르기까지 경파 역시 번성을 누렸다.

두 집안은 각 시조가 서로 어떤 관계인지 고증하기 어려우므로, 별개의 계통으로 보는 견해가 타당하다. 경기도 용인시에 경파 시조단이 있으며 충남 공주에 향파 시조단이 있다. 문과급제자 숫자나 상신 등 해주 오씨를 검색하면 나오는 수치들은 두 파를 모두 합한 것이다. 현대 해주 오씨 인구 수 역시 합친 것.


1.1.1. 본관 별 특징[편집]


사회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해주 오씨(462,704명)가 전체 오씨 인구(763,281명)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여기에 간간히 보이는 동복 오씨(72,394명)와 보성 오씨(71,162명)를 포함한 3개 본관이 전체 오씨 인구의 약 80%를 차지하고 있는 대성으로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함양, 나주, 군위, 고창, 낙안, 장흥, 화순, 함평, 울산 등 총 213개 본관이 존재한다.


1.1.1.1. 해주 오씨[편집]

해주 오씨(대한민국 내 462,704명, 2015년 기준)는 전국구다. 경파(약 40만 명), 향파(약 6만 명) 둘이 합쳐 조선시대에 문과급제자 99명, 무과급제자 269명(중시 등 2번 이상 합격자 횟수까지 따지면 298번), 생진사 326명, 역과 56명, 의과 15명, 음양과 2명, 율과 5명, 주학 2명 등을 배출했다. 서인 명문가로서 조선 중기 인조~현종~숙종~영조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정승과 대제학,판서를 배출하면서 전성기를 누렸고, 소론에서도 탕평파로 들어가면서 당파싸움에 거듭되는 환국에도 큰 피해를 면할수 있었다. 하지만 정조 이후 서인이 주도하는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중앙에서 멀어졌으며, 현대에는 다시 많은 인물을 배출하고 있다.


1.1.1.2. 동복 오씨[편집]

두 번째로 많은 동복 오씨(대한민국 내 72,394명, 2015년 기준)는 향파.[6] 고려시대조선시대에 정승을 배출하는 등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남인 계열 가문으로서, 우의정에 오른 오시수를 비롯, 오시복(호조판서), 오정창(예조판서), 오정위(공조판서) 등 숙종 때 중앙정계의 화려한 주류로 위세를 떨쳤으나 경신환국갑술환국을 거치며 대거 숙청되면서 짧은 전성기를 마감하였다.[7] 복천 오씨(福川 吳氏)라고도 한다.


1.1.1.3. 보성 오씨[편집]

세 번째로 많은 보성 오씨(대한민국 내 71,162명, 2015년 기준)도 향파 집안이다. 서기 500년 지증왕 때 남제의 사신으로 온 오첨과 그 차남을 시조로 한다. 본은 전라남도 보성군이지만 집성촌은 대부분 충청도에 위치해있으며, 중시조 오현필의 묘도 충청남도 공주시에 있다. 그래서인지 서울을 제외하면 특히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8]에 가장 많다. 집성촌은 전라도 2곳, 충청도 10곳이다.[9] 조선개국공신 오몽을을 배출한 집안이나 오몽을이 1차 왕자의 난 때 정안대군의 반대파에 섰다가 지면서 공신 작위가 삭탈된다.


1.1.1.4. 함양 오씨[편집]

네 번째로 많은 함양 오씨(대한민국 내 35,846명, 2015년 기준)는 향파다. 경상남도전라남도전라북도에 많고 당연히 동복 및 보성 오씨와는 같은 집안이다.


1.1.1.5. 나주 오씨(=금성 오씨)[편집]

다섯 번째로 많은 나주 오씨(대한민국 내 32,610명, 2015년 기준)는 고려 건국 당시 국구 오다련을 시조로 하므로 당연히 향파겠지만 지증왕 때의 오첨과 관련성이 있는 직접적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고려 초기 장화왕후가 낳은 혜종이 권력 다툼에 패하면서 집안이 위기에 처한다. 이후 고려조 때는 계속 잠잠하다가 조선 세조 때 오자치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에 공을 세우면서 집안을 다시 일으킨다. 그의 손자 오겸은 좌찬성까지 올라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한 후 죽었으며, 사후 우의정이 추증되었다. 또한 이때 시점 이후로는 서인 및 노론 계열 가문으로써, 세도 정치 시기 직전까지 전라도한양 정계에서 그 위세를 떨쳤다.


1.1.1.6. 군위 오씨[편집]

군위 오씨(대한민국 내 26,949명, 2015년 기준)는 향파로, 십중팔구가 제주도 출신이다. 특히 서귀포시에 많다. 성산읍을 비롯해 서귀포의 많은 지역에 집성촌이 존재한다.


1.1.1.7. 고창 오씨[편집]

고창 오씨(대한민국 내 16,716명, 2000년 기준)는 향파로, 오첨의 16세손인 한림학사 오학린을 시조로 한다. 초반에는 오인정, 오세재 등 학문으로 이름높은 사람이 많았으며 지역 특성상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한 사람이 많았다.


1.1.1.8. 낙안 오씨[편집]

낙안 오씨(대한민국 내 9135명, 2000년 기준)는 향파로, 시조는 고려때 원나라의 일본원정김방경의 고려군 소속으로 참전하여 삼사좌윤을 지내고 낙안군에 책봉된 오사룡(시조 오첨의 32세손)이다. 낙안이라는 지명은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의 서부 낙안면을 중심으로 한 지역과 보성군 벌교읍에 걸친 지명이다.


1.1.1.9. 울산 오씨[편집]

울산 오씨(대한민국 내 3,015명, 2015년 기준)는 경파다. 시조 오연지는 해주 오씨(경파)의 시조 오인유의 6세손 오효성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 충렬왕 때 중서시랑평장사에 이르렀고 동남 변경을 침범하는 왜구를 토벌한 공으로 학성군에 봉해졌다.[10]


1.1.1.10. 연일 오씨(=영원 오씨)[편집]

연일 오씨(대한민국 내 393명, 2000년 기준)도 경파 출신이다. 시조 오연경은 해주 오씨의 시조 오인유의 6세손 오효성의 장남으로, 고려 충선왕 때 연일로 강배되어 세거하였다.[11] 연경의 차남은 고려 이조전서 흡이며, 삼남 순은 간의대부를 역임하였다. 흡은 연일 오씨로 세계를 잇고, 순의 아들 오사충은 조선의 개국공신이 된 후 평안도 영원에 땅을 받고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그의 직계 후손들은 그들의 집안을 영원 오씨로 칭한다고 한다.


1.1.1.11. 청양 오씨[편집]


청양 오씨는 특별 귀화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케냐 출신 마라토너 에루페가 2018년 '오주한'으로 개명하면서 생겨난 본관이다. 대전가정법원 공주지원이 '청양 오씨' 본관을 창설할 것을 허가했다. 대한민국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15년 주기로 성씨의 본관 현황을 파악하고 있으므로, 가장 최근 통계인 2015년 통계에는 아직 잡히지 않는다.


1.2. 국가별 오씨 표기[편집]



  • 훈민정음 식 표기로는 ''(옛이응)을 썼다. 중국에서는 (우), ŋ 음가가 다른 형태로 계승된 광동어에서는 ng4(응)으로 발음되고, 일본에서는 (고)로 발음되고 くれ(쿠레)로 훈독한다.
    • 참고로 저 광동어 월병으로 쓴 Ng을 홍콩 사람들은 그대로 영문자로 표기하기도 한다.[12] 오맹달의 경우에도 'Ng Man Tat'으로 표기된다. 광동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대개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하여 직접 물어볼텐데, 한국 표기법으로는 "응" 정도에 해당하며, 비교적 최근 인물로는 응 씨 카이의 사례가 있다. 그나마 발음이 비슷한 Ung이나 오우삼(吳宇森, Ng4 Jyu5 sam1)같이 표준중국어 발음에서 따온 Wu, Woo로 바꿔서 쓰는 경우도 있다.

  • 베트남어에서는 한자음의 ŋ 음가가 소멸되지 않아 Ngô(응오)로 발음된다. 한국에선 ŋ 음가를 일본의 영향을 받아 고로 표기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에 따라 과거 베트남 대통령 응오딘지엠을 과거에 '고 딘 디엠'으로, 보응우옌잡을 '보 구엔 지압'으로 표기했었다.

  • 한국에서는 여권에 절대 다수(약 97.1%, 2011년 외교부 자료 기준)의 오씨들이 Oh[13]로 표기하며, 일부 소수(약 2.1%, 2011년 외교부 자료 기준)의 오씨들은 그냥 O를 사용한다. 단, 'O'로 표기한 경우 여권법 시행령 제3조의2에서 규정하는 '여권 성씨의 로마자 철자가 외자로써 출입국 심사 및 항공권 예약에 어려움이 있는 경우'에 해당하므로 여권의 성명 표기를 변경할 수 있다. 오승환메이저리그에 진출했을 때 미국 사람들이 많이 신기해했다고 하며, 외국 온라인 사이트에서는 회원가입 때마다 Last Name란에 성씨가 너무 짧다며 불편을 겪기도 한다고 한다.

  • 독일, 이스라엘, 노르웨이 계열 성씨 중에서도 한국의 오씨와는 연관이 전혀 없이 비슷한 발음으로 불리는 성씨가 존재한다. 표기는 각각 Ohr, Or, Owe 이다. Ohr는 라는 뜻에서 유래한 성씨이다. Ohr 성씨를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독일이나 미국에 있다. 독일어 발음으로는 "오-" 또는 "오-어"에 가깝고, 영어 발음은 "또는"을 뜻하는 "오-ㄹ"(Or)과 똑같다. 유명인으로는 미국 유명 변호사 브루스 오(Bruce Ohr), 미국 2차대전 파일럿 프레드 오(Fred Ohr), 네덜란드 필드하키 선수 마틴 오(Martine Ohr), 노르웨이 축구선수 스티안 오(Stian Ohr) 등이 있다. Or는 빛을 뜻하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성씨이다. 히브리어 발음으로는 "오-"[oː]이고, 영어 발음은 "또는"을 뜻하는 Or과 똑같다. 유명인으로는 이스라엘 작가 아미르 오(Amir Or), 이스라엘 펜싱선수 토머 오(Tomer Or), 이스라엘 대법관 시어도어 오(Theodor Or) 등이 있다. Owe는 노르웨이 계열의 성씨이다. 노르웨이어 발음은 오브/ˈɔvə/, 스웨덴어 발음은 오베/ˈoːvɛ/에 가깝다. 하지만 영어 발음은 오우/oʊ/에 가까우며, 국어 로마자 표기법으로는 "오"이다. 미국에서 많은 노르웨이계 사람들이 Owe라는 성씨를 갖고 있다. 스웨덴인들은 Owe를 이름으로 많이 쓰지만 성씨로 쓰는 경우는 별로 없다. 유명인으로는 노르웨이 배우 바드 오브(Baard Owe)가 있다.


2. 伍[편집]


배천 오씨와 복흥 오씨가 있다. 배천과 복흥은 모두 같은 지명을 가리키므로, 두 집안은 사실상 같은 집안이라고 볼 수 있다. 복흥 오씨의 시조는 고려 충선왕 시기의 인물인 오윤부(伍允孚)라고 전해진다.

중국어로는 (우), 광동어에서는 ng5(응)으로 吳씨와 발음이 같고 성조만 다르다.


3. 오씨 인물 목록[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오(성씨)/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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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간화자로는 吴라고 쓰며 중국어 발음으로는 Wú(우)라고 읽는다.[2] 呉라고 쓰며 훈독으로는 '쿠레'로 읽는다. 창씨개명 당시 오씨들이 창씨개명을 안 해도 티가 안 났던 것도 이것 때문이다.[3] 1985년 통계에서는 13위, 2000년 통계에서는 11위, 2015년 통계에서는 12위였다. 한씨와 엎치락뒤치락한다.[4] 경상도 지역은 제외.[5] 해주 오씨 향파, 동복 오씨, 보성 오씨는 후삼국시대의 호족이었지만 고려 초기 광종이 배다른 형이자 장화왕후 오씨의 아들인 혜종을 죽이고 집권하면서 중앙에서 얼마간 멀어진다. 그러나 중서시랑평장사 오연총이 사돈 윤관과 함께 북진을 개척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 가문이 중흥하게 된다. 조선 개국공신 2명을 배출하고 세도 정치 전까지 문과 급제자 219명, 상신 4명, 대제학 3명, 개국공신 2명, 공신 8명, 청백리 3명을 배출하는 등 기염을 토했다.[6] 同福; 現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7] 동복 오씨는 조선시대 기호학파(서인)의 중심지 호남에 본을 두었지만 해남 윤씨처럼 남인 집안이었으며, 그중에서도 강경파에 속하였기 때문에 환국에 따른 부침이 매우 컸다.[8]청원군 지역.[9] 그 중에서도 충북 청원군에는 절반인 6곳, 또 그 중에서도 현도면에는 4곳 이상이다. 지역별 인구로 봐도 서울을 제외하고는 충북, 대전에 압도적으로 많이 산다.[10] 鶴城; 現 울산광역시.[11] 延日; 現 경상북도 포항시.[12] 싱가포르에서는 黃씨가 민남어 발음을 바탕으로 'Ng'으로 표기되는 경우도 있으므로 주의.[13] 요즘은 이렇게 쓰면 미국 사람들은 로 발음한다. 펜트하우스에서 로건오윤희를 약간 '미스 오우' 내지는 '미스 오으'에 가깝게 발음하는 것을 보면 답이 나온다. (참고로 로건리 역을 한 박은석은 7살 때 미국으로 이민 갔다 22살에 한국으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