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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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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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연원
3. 시조 옥진서와 옥의 띠, 신라의 천사옥대와 태조왕건
4. 개성왕씨와 의령옥씨. 왕사온과 옥사온, 왕보고와 옥보고, 왕규와 옥규, 왕안덕과 옥안덕, 王(임금왕)과 玉(구슬옥)
5.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에 존재하는 의령옥씨 인물
6. 거제도의 옥포해전과 의령옥씨
7. 실존인물
8. 옥씨 성을 가진 가상 인물


1. 개요[편집]


옥(玉)씨는 한국의 성씨로, 한국 성씨 순위 88위 22,964명이다. 한자가 왕씨와 비슷하다. 연원은 당나라 때 고구려, 신라를 거쳐 경남 의령에 정착한 옥진서에 연원을 두고 있다.

2. 연원[편집]


의령 옥씨의 시조 옥진서(玉眞瑞)[1]는 당나라에서 고구려로 파견된 8재사(八才士)의 한 사람으로 고구려 멸망 후 신라로 들어가 국학교수(國學敎授)를 역임하였는데 그 공으로 의춘군(宜春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세계를 고증할 수 없어 고려 때 창정(倉正)을 지낸 옥은종(玉恩宗)을 1세조로 한다.

본관은 문헌에 17본이 전하나 현재는 의령 옥씨 단본으로 통합되었다.

한편 옥씨에 대해서는 고려 왕가의 후예 왕(王)씨가 조선 왕조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왕씨 성과 비슷한 문자형태를 가진 옥씨 성으로 환성했다는 설이 있으며 의령 옥씨 집성촌 중 하나가 조선왕조가 왕씨를 유배시켰던 거제도 인것을 보면 역성왕조의 박해를 피해 정착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2] 한편 여말선초의 왕사온(王斯溫)이란 사람이 다른 기록에서는 옥사온(玉斯溫)이라고 기록된 것처럼 역사기록에서 고려말에 왕씨였던 사람이 이름은 그대로에 성만 옥씨로 바꾼 기록도 몇몇 발견되어서 이런 의혹은 상당히 알려져있다.

이에 대해서는 성리학적 관점에서 금기에 해당하는 개성이 행해졌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옥씨의 독자적인 역사성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이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 이걸 사실로 믿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연예인 옥주현아는 형님에 나왔을 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같이 나온 윤종신이 자기 할머니도 옥씨였는데 비슷한 얘기를 하신 적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이 두 관점이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탄압을 피하기 위해 개성이 행해졌다고 해도 아예 새로운 성씨를 만드는 건 너무 눈에 띄기 때문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가문에 숨어드는 것이 훨씬 그럴듯한 방법이 된다.[3] 이런 경우에 대해 실제 그런 사건이 있었다 해도 적어도 자신들의 계보는 절대 그런 경우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혹은 한때 남북국과 후삼국을 완전히 통일하고 500년 동안 한국을 지배한 왕가의 후손일 수도 있다는 점에 자부심을 갖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설령 그런 역사가 있었다 해도 이미 왕가는 500년 전에 몰락했으며 아무튼 자의적으로 개성이 된 상태로 그대로 이어져 온 것이니 옛 역사는 그걸로 종료된 것이고 아무래도 좋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즉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나 연구자들의 흥미를 끄는 소재임에는 확실하나, 수많은 당사자들의 입장에서는 감상이 제각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시조 옥진서와 옥의 띠, 신라의 천사옥대와 태조왕건[편집]


의령옥씨 세보(世譜)에 의하면, 고구려의 요청에 의하여 당나라에서 파견된 8재사(才士)중의 한 사람인 옥진서(玉眞瑞)가 신라에서 국학교수(國學敎授)를 역임하고 의춘군(宜春君)에 봉해서 의령(宜寧)에서 살게되면서부터 시원(始源)을 이룬다고 전해진다.

시조 옥진서는 중국 당나라 때 옥을 가공하는 기능공이었는데, 당나라 황제에게 옥으로 된 옥띠를 올렸고 황제가 처음 보는 귀중한 옥띠를 받고 기뻐했다고 한다. 이 때 옥(玉)씨 성을 하사받게 되었고, 옥진서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시조 옥진서는 635년(당 태종9년) 8재사 중 한 사람으로 뽑히기 이전에는 옥을 가공하는 기능공으로서 일하였다는 것이 되고, 정말로 황제에게 옥띠를 만들어 올렸다면 어디인가에는 국가보물로 존재해야 이 이야기가 맞게 된다.

그런데 이 시기는 한반도에선 신라 제26대 국왕 진평왕(재위기간: 579년 ~ 632년)의 시대였음을 알 수 있고, 삼국유사 1권 기이편(紀異篇) 천사옥대(天賜玉帶)에 수록된 이야기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이 하늘로부터 받은 옥대(玉帶)(=옥의 띠)에 관한 설화로 기록되어 있다. 이 천사옥대는 황룡사 장륙존상(皇龍寺丈六尊像)과 황룡사 구층목탑과 함께 신라 3보(寶)로 여겨지는 상징적인 보물이며, 937년(고려 태조 20) 5월에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이 옥대를 고려 태조왕건에게 바쳤다고 한다.

4. 개성왕씨와 의령옥씨. 왕사온과 옥사온, 왕보고와 옥보고, 왕규와 옥규, 왕안덕과 옥안덕, 王(임금왕)과 玉(구슬옥)[편집]


의령 옥씨는 태조 이성계역성혁명으로 개성왕씨 집안과 함께 늘 끊이지 않게 등장하는 집안이다. 이러한 점에서 조금 더 명확하게 구분짓고 싶지만, 씨족의 세계관과 정체성이 송두리째 바뀌는 부분이다보니 매우 조심스러운 숙제로 남아있다.

옥사온(玉斯溫)은 고려시대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과 고려문과방목(高麗文科榜目)에서 왕사온(王斯溫)과 옥사온(玉斯溫)은 동일한 번호에 등재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통일신라 시대에 존재했던 거문고의 대가 옥보고(玉寶高)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어 집안의 존립이 가능했다.

- 왕산악(王山岳) (출생 미상 ~ 사망 미상): 신라고기(新羅古記)에 기록되어 있는 고구려 시대 거문고의 제작자이자 거문고 연주의 대가
- 옥보고(玉寶高) (출생 미상 ~ 사망 미상):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되어 있는 통일신라 시대 거문고의 대가

김부식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제24대 양원왕(재위 545~559)때 왕산악(王山岳)은 진(晉)나라에서 보낸 칠현금(七絃琴)을 완전히 뜯어 고쳐 6개의 줄로 된 새로운 악기를 만들었으며, 옥보고(玉寶高)[4]신라 35대 경덕왕(재위 742~765)때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 50년 동안 거문고를 연주하며 새로운 곡조 30곡을 만들어 연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의령옥씨 족보에는 고려시대 이전 인물은 시조 옥진서 외에는 나와있지 않으며, 오류일 수 있지만 옥보고가 왕보고(王寶高)로 표기되는 자료가 존재한다.
1986년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동양음악연구소에서 '민족음악학, Vol.8, pp. 137-153'[5]로 발행되어, 서울대학교 오픈 저장소 사이트[6]에 pdf 파일[7]이 등록되어 있다. 이 pdf 파일의 15번 페이지 또는 종이 151쪽[8][9]을 보면, 옥보고(玉寶高)가 아닌 왕보고(王寶高)로 표기되어 있으며, 서울대학교 오픈 저장소 사이트[10]의 글에 '轉載에 있어 본래의 철자법과 띄어쓰기를 그대로 따랐다.'라고 표기되어 있다.
* 국회도서관 사이트[11]에 옥보고(玉寶高)로 등록된 자료들[12]은 2002년 자료인 것으로 보아, 고증자료와 지역, 실제 문화재에 세겨진 이름 등을 토대로 수십년간 고민 끝에 옥보고(玉寶高)라는 이름으로 등록된 것 같다.

그리고 고려시대에 실존했던 왕규(1142)(王珪)와 옥규(玉珪)는 동명인(同名人)인 것으로 보인다.
- 옥규(玉珪): 의령옥씨 종파계보도에는 안 나오지만, 의령옥씨 가문의 중요인물로 소개되는 한 사람이며. 시호(諡號)는 장경(莊敬),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
- 왕규(1142)(王珪)(1142~1228): 고려의 문신. 자는 숙개(叔玠)이고 원래 이름은 왕승로(王承老)다. 시호는 장경(莊敬)이며, 신종 때 여러 번 문하시랑 동중서평장사를 역임. 왕규는 '태조 왕건의 사촌동생인 왕만세(王萬歲)'의 7세손 왕충(1078)(王冲)(1078~1159)의 아들이며, 1142년에 태어나 1228년에 사망한 개성왕씨 집안의 인물이다.

우연히도 의령옥씨 종파계보도에 존재하는 옥여(玉汝)가 평장사(平章事)인데, 이를 1세조로 하는 계통이 존재한다.
*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선계(先系)를 상고할 수 없어 고려(高麗)조에 창정(倉正)을 지낸 옥은종(玉恩宗)을 1세조(一世祖)로 하는 계통과 평장사(平章事) 옥여(玉汝)를 1세조로 하는 계통으로 나뉘어 있다.

이와 더불어, 옥은종(玉恩宗)을 1세조(一世祖)로 하는 계통이면서 의령옥씨 종파계보도에 존재하는 옥사온(玉斯溫)의 아버지인 옥안덕(玉安德)은 왕안덕(王安德)으로 추정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3] 사이트에 의하면 왕안덕은 1392년(공양왕 4)에 사망하였다. 이로써 태조 이성계가 1392년에 조선을 건국한 재위기간이랑 일치한 것으로 보아, 왕안덕은 이성계 세력에 의해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옥사온의 동생인 옥사미(玉斯美)'의 아들 옥고(玉沽)(1382~1436)[14] 또한 옥고(玉沽)의 출생일과 사망일을 대조해보면, 왕사온(王斯溫)과 옥사온(玉斯溫)으로서 남긴 백부의 과거급제 날짜와 왕안덕(玉安德)의 인물로 사망한 옥안덕(玉安德) 할아버지의 사망일이 연결된다. 그리고 의령옥씨 8세손인 옥고(玉沽)의 고조 할아버지이자, 의령옥씨 4세손인 옥성(玉成)은 개성왕씨 집안의 '왕성(王成)[15](생년미상~1178년, 고려 명종8년)'으로 성은 다르지만 같은 이름의 인물이 존재하며, 여기에 더해 의령옥씨 4세손 옥성(玉成)의 밑에 있는 5세손 '평장사(平章事) 1세조로 하는 옥여(玉汝)'가 왕규(王珪)인 것이 맞다면 왕규의 출생사망년도(1142~1228)와 왕성(王成)(생년미상~1178)으로 추정되는 옥성(玉成)은 모두 같은 시대의 인물들로 연결된다.

만일, 의령옥씨 4세손 옥성(玉成)이 왕성(王成)으로 동명인(同名人)이라면, 태조왕건으로부터 왕성까지 내려오는 계보도는 아래처럼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옥성과 왕성이 우연일 수 있으니, 어디까지나 참고용으로만 봐야 된다.
* 고려 제1대 국왕 태조왕건(877~943)(재위기간: 918~943) → 성덕헌경효의대왕(聖德憲景孝懿大王) 왕욱(王郁)(?~996) → 고려 제8대 국왕 현종(992~1031)(재위기간: 1009~1031) → 개성국공(開城國公)·평양공(平壤公) 정간왕(靖簡王)(1021~1069) → 경안공(敬安公) 왕영(王瑛)(1043~1112) → 승화백(承化伯) 왕정(王禎)(?~1130) → 한남백(漢南伯) 왕기(王杞)(?~?) → 신안후(信安侯) 왕성(王珹)(?~1178)

한자에서도 (임금 왕)과 (구슬 옥)은 우연하게도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다. 네이버 사전[16]에는 한자 王은 王(임금 왕)과 王(옥 옥)이라는 단어의 뜻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玉이라는 한자에서도 玉(구슬 옥) 뿐만 아니라, 玉(옥 옥)이라는 단어의 뜻을 표기하고 있을 만큼 서로서로가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내용들이 정말로 우연에, 우연이 집합되었다고 했을때. 씨족으로서 조상을 섬기는 부분에 매우 중대한 문제가 생기므로, 아직까지는 더 면밀히 파악하고 자세한 조사가 필요하다.


5.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에 존재하는 의령옥씨 인물[편집]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17]에 등록된 인물들을 보면, 고려시대에 존재하는 의령옥씨 인물옥사온(玉斯溫) 단 한 명만 존재한다.

< 고려시대 >
[고려사마(高麗司馬)]
- 옥사온(玉斯溫)[18]: 사마(司馬) 우왕3년(禑王3年) 1377년

[고려문과(高麗文科)]
- 왕사온(王斯溫)[19]: 문과(文科) 창왕1년(昌王1年) 1389년
*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 왕사온(王斯溫)[20], 『고려문과방목(高麗文科榜目)』: 옥사온(玉斯溫), 『전조과거사적(前朝科擧事蹟)』: 옥사온(玉斯溫)

< 조선시대 >
[문과(文科)]
- 옥고(玉沽)[21](1382~1434 壬戌生): 문과(文科) 정종1년(定宗1年) 1399년. 경북 민속문화재 제19호 묵계서원(默溪書院)에 봉향(奉享).
- 옥려(玉礪)[22](?-?): 문과(文科) 단종1년(端宗1年) 1453년
- 옥진휘(玉晋輝)[23](1572 壬申生): 문과(文科) 광해5년(光海5年) 1613년. 조선(朝鮮) 때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역임.
- 옥경련(玉景鍊)[24](1829 己丑生): 문과(文科) 고종5년(高宗5年) 1868년
- 옥병관(玉秉觀)[25](1831 辛卯生): 문과(文科) 고종17년(高宗17年) 1880년

[무과(武科)]
- 옥형(玉衡)[26](?-?) : 무과(武科) 성종14년(成宗14년) 1483년
- 옥글동(玉文里同)[27](1602 壬寅生): 무과(武科) 인조15년(仁祖15年) 1637년
- 옥승(玉承)[28](1623 癸亥生): 무과(武科) 효종2년(孝宗2年) 1651년
- 옥신호(玉信浩)[29](1662 壬寅生): 무과(武科) 숙종20년(肅宗20年) 1694년
- 옥채형(玉采荊)[30](1764 甲申生): 무과(武科) 정조8년(正祖8年) 1784년
- 옥대집(玉大集)[31](1762 壬午生): 무과(武科) 정조8년(正祖8年) 1784년
- 옥영윤(玉永潤)[32](1802 壬戌年): 무과(武科) 순조29년(純祖29年) 1829년

[생원(生員)]
- 옥광형(玉光亨)[33](1531 辛卯生): 생원(生員) 선조12년(宣祖12年) 1579년
- 옥세보(玉世寶)[34](1649 己丑生): 생원(生員) 숙종37년(肅宗37年) 1711년
- 옥진소(玉振韶)[35](1674 甲寅生): 생원(生員) 숙종41년(肅宗41年) 1715년
- 옥치규(玉穉圭)[36](1766 丙戌生): 생원(生員) 순조7년(純祖7年) 1807년

[진사(進士)]
- 옥진휘(玉晉輝)[37](1572 壬申生): 진사(進士) 광해군4년(光海君4年) 1612년
- 옥진함(玉振)[38](1687 丁卯生): 진사(進士) 경종3년(景宗3年) 1723년
- 옥이탁(玉以琢)[39](1747 丁卯生): 진사(進士) 정조10년(正祖10年) 1786년
- 옥재온(玉在溫)[40](1775 乙未生): 진사(進士) 순조1년(純祖1年) 1801년
- 옥재곤(玉在崑)[41](1821 辛巳生): 진사(進士) 헌종10년(憲宗10年) 1844년

6. 거제도의 옥포해전과 의령옥씨[편집]


태조 이성계(재위기간: 1392~1398)의 태조실록에 의하면 강화도거제도는 조선시대에 고려왕조의 유배지[42]로 사용되었던 섬이며,

태조 3년(1394년) 태백산사고본(太白山史庫本)[43]과 영인본[44]에 의하면 '손흥종(孫興宗) 등이 왕씨(王氏)를 거제(巨濟) 바다에 던졌다'와 '중앙과 지방에 명령하여 왕씨(王氏)의 남은 자손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이들을 모두 목 베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거제도에는 이순신 장군이 첫 승리를 거뒀던 옥포해전(선조25, 1592년)이 있으며, 이를 상징하는 옥포대첩비문에는 의령옥씨와 김해김씨, 거제반씨의 성씨가 기록되어 있다. 옥포해전은 오늘날 거제시 옥포동 앞 바다에 위치하며, 그 자리에는 대우조선해양(=옥포조선소)이 위치해있다.

현재 옥(玉), 윤(尹), 신(辛)씨 3성이 거제도에서 대성(大姓)을 이루고 있으며, 본관 의령보다 많이 밀집해있어 의령옥씨에게 집성촌(集姓村)은 거제도라 불러도 의심치 않는다.

7. 실존인물[편집]


  • 옥관빈(玉觀彬, 1891~1933) - 대한제국의 계몽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언론인, 기업인. 그 외, 도산 안창호에게 독립운동 지원금을 정기적으로 지원해줬으며[45], 고려 관련 불교문화재인 향주 고려사(杭州 高麗寺) 복원 운동에 주도하였음.[46]
  • 옥창호(玉昌鎬, 19??~1996) - 5.16 국가재건최고위원, 전 육군 중령
  • 옥종화(玉鐘華, 1915~2005) -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명예교수, 전 서울대 농대부속 가축병원장
  • 옥조남(玉朝南, 1918~1997) - 전 제6대 국회의원
  • 옥만호(玉滿鎬, 1925~2011) - 전 공군참모총장, 전 제13대 국회의원
  • 옥한흠(玉漢欽, 1938~2010) - 목사, 사랑의교회 설립자, 한국기독교 목회자협의회 명예회장, 교회갱신위한목회자협의회 명예회장
  • 옥소리 - 배우[47]
  • 옥주현 - 가수, 뮤지컬 배우
  • 옥고운 - 배우[48]
  • 옥범준 - 농구선수
  • 옥자연 - 배우
  • 옥준호 - 前 KIA 타이거즈 투수. KBO 리그에 등록 된 선수 중 역대 최초 옥씨다.
  • 옥택연 - 2PM 멤버
  • 옥진욱 - 가수, 배우
  • 옥효진 - 유튜버
  • 옥은호 - 정치인[49] 겸 사업가
  • 옥현진 - 천주교 광주대교구 대주교
  • 옥성태 - 던전앤파이터 모바일 총괄디렉터

8. 옥씨 성을 가진 가상 인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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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작 바이두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걸로 보아 가공의 인물일 가능성도 있다. 덧붙여서 중국의 옥씨의 연원을 살펴보면 한족보다 소수민족(주로 만주족, 몽골족, 좡족)에서 주로 나오는 성씨이다. 이런 경우는 다른 성씨들에서도 많으므로 특별히 이상한 건 아니다.[2] 왕씨에서 옥씨로 바꾼 사실이 맞다면, 의령 옥씨의 시조는 가공인물일 가능성이 있으며 중국에서 옥이라는 성씨가 극히 드물다는 점과 함께 보면 마냥 틀린 말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된다.[3] 실제로 왕씨가 숨어든 성씨로 추정되는 건 딱히 옥(玉)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외에도 금(琴), 마(馬), 전(田), 전(全), 김(金), 차(車), 신(申), 노(盧)씨 등이 거론되는데 딱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이미 당대에도 어느 정도 존재하고 있던 성씨들이다. 오직 (乃)씨만이 그때 새로 생긴 성씨로 추정된다.[4] 삼국사기 번역본이 아닌, 원본에 표기된 이름 재검토 필요.[5] 학술논문: 倭政下 定期刊行物 所在 - 國樂關係記事 (2), 학술지정보: 서울대학교 동양음악 1986 8권 137p ~ 153p (ISSN 1975-0218)[6] 서울대학교 오픈 저장소 사이트[7] 10. 資料 왜정하 (倭政下) 정기간행물 (定期刊行物) 소재 - 국악관계기사 (國樂關係記事) (2).pdf[8] 王山岳이 創作하여 얼마가 지난後 新羅사람의 王寶高가 地理由 雲上院에 들어가 學琴 五十年에 또한 作曲까지 三十餘曲이나하여 得이라는 그 弟子에게 傳하고 得은 이를 또 貴金先生에 傳했는데 이貴金先生亦是 地理山에 들어가 나오지않음으로 羅王이 琴道의 斷絶 크게 憂濾하야 伊後允興에게 南原公事를 맡기고 貴金先生의 音을 傳得하려하였습니다. (번역: 왕산악이 창작하여 얼마가 지난후 신라사람의 왕보고가 지리유 운상원에 들어가 학금 50년에 또한 작곡까지 30여곡이나하여 득이라는 그 제자에게 전하고 득은 이를 또 귀금선생에 전했는데 이귀금선생역시 지리산에 들어가 나오지않음으로 라왕이 금도의 단절을 크게 우려하야 이후윤흥에게 남원공사를 맡기고 귀금선생의 음을 전득하려 하였습니다.)[9] 王斯溫의 作曲한 三十曲은 아래와 같습니다. 上院曲一 中院曲一 下院曲一 南海曲二 倚嵒曲一 老人曲七 竹庵曲二 玄合曲一 春朝曲一 秋夕曲一 吾沙息曲 鴛鴦曲一 遠岵曲六 比目曲一 入實相曲一 幽谷淸聲曲 降天聲曲一 (번역: 왕보고의 작곡한 30곡은 아래와같습니다. 상원곡1, 중원곡1, 하원곡1, 남해곡2, 기암곡1, 노인곡7, 죽암곡2, 현합곡1, 춘조곡1, 추석곡1, 오사식곡 원앙곡1, 원호곡6, 비목곡1, 입실상곡1, 유곡청성곡 강천성곡1)[10] 서울대학교 오픈 저장소 사이트[11] 국회도서관 사이트[12] '옥보고의 행적과 업적 검토', '옥보고(玉寶高)의 금도(琴道)와 선도(仙道) / 權五聖'[1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왕안덕(王安德)[14] 옥고(玉沽)(1382~1436)[15] 왕성(王成)(?~1178)[16] 네이버 한자사전 사이트[17]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사이트[18] 고려사마(司馬) 옥사온(玉斯溫)[19] 고려문과(文科) 왕사온(王斯溫)[20] 고려문과(文科) 왕사온(玉斯溫), 옥사온(玉斯溫)[21] 조선문과(文科) 옥고(玉沽)[22] 조선문과(文科) 옥려(玉礪)[23] 조선문과(文科) 옥진휘(玉晋輝)[24] 조선문과(文科) 옥경련(玉景鍊)[25] 조선문과(文科) 옥병관(玉秉觀)[26] 조선무과(武科) 옥형(玉衡)[27] 조선무과(武科) 옥글동(玉文里同)[28] 조선무과(武科) 옥승(玉承)[29] 조선무과(武科) 옥신호(玉信浩)[30] 조선무과(武科) 옥채형(玉采荊)[31] 조선무과(武科) 옥대집(玉大集)[32] 조선무과(武科) 옥영윤(玉永潤)[33] 조선생원(生員) 옥광형(玉光亨)[34] 조선생원(生員) 옥세보(玉世寶)[35] 조선생원(生員) 옥진소(玉振韶)[36] 조선생원(生員) 옥치규(玉穉圭)[37] 조선진사(進士) 옥진휘(玉晉輝)[38] 조선진사(進士) 옥진함(玉振)[39] 조선진사(進士) 옥이탁(玉以琢)[40] 조선진사(進士) 옥재온(玉在溫)[41] 조선진사(進士) 옥재곤(玉在崑)[42] 태조실록 1년 7월 : 사헌부 대사헌(大司憲) 민개(閔開) 등이 고려 왕조의 왕씨(王氏)를 밖에 두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순흥군(順興君) 왕승(王昇)과 그 아들 강(康)은 나라에 공로가 있으며,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와 그의 아들 조(珇)·관(琯)은 장차 고려 왕조의 제사를 받들게 할 것이니 논하지 말고, 그 나머지는 모두 강화(江華)와 거제(巨濟)에 나누어 두게 하라."[43] 태백산사고본 - 2책 5권 19장 A면[44] 영인본 - 1책 62면[45] 김광재, 상해시기 옥관빈 밀정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 근현대사 연구 63, 2012 , 63~64[46] 조영록, 일제 강점기 杭州 高麗寺의 재발견과 重建籌備會, 한국 근현대사 연구 53, 2010, 54~58쪽[47] 본명은 옥보경.[48] 본명은 옥지영.[49] 20대 대선 후보로 출마해 최하위로 낙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