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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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沙門
생몰연대 미상

1. 개요
2. 대중매체에서
2.1. 드라마 연개소문
2.2. 드라마 대조영


1. 개요[편집]


고구려 말기의 장군. 고구려-당 전쟁에 참전했다.

659년 황산에서 벌인 전투에서 설인귀와 대결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구당서 설인귀 열전에는 온사문이 깨졌다고 나오지만 신당서 고려전 등에는 주어가 빠진 채로 설인귀가 깨졌다는 뉘앙스로 애매하게 나온다.


2. 대중매체에서[편집]


둘 다 온으로 시작하는 이름이라 창작물에서는 온달의 후손으로 엮는 경우가 많지만[1] 사실 두 사람이 같은 가문 출신이라는 기록은 없다. 물론 온달과 온사문 모두 고구려 장군으로 전투에 임한 상황으로 봤을 때 친족일 가능성도 배제할수는 없다.


2.1. 드라마 연개소문[편집]


배우 나한일이 연기하였다가 박영록으로 교체되었다.

1부에는 청년으로 나와 요동성에서 양만춘과 함께 부장으로서[2] 강이식을 보좌하여 수나라 군대로부터 요동성을 사수하였으며 2부에선 연개소문을 지지하는 세력으로서 당시 유일하게 연개소문에게 반대하는 입장에 있던 양만춘을 설득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3] 이후 고당전쟁이 일어나자 자신이 부장으로서 수호했던 요동성의 성주로서 2주 가량을 당군에 맞서 버티지만 끝내 함락당하여 패퇴 후 안시성으로 도주해 양만춘, 연개소문과 함께 안시성을 사수한다.

온달의 손자이자 영양왕의 근위장인 온군의 아들이라는 설정이 붙었다. 그리고 대걸중상보다는 임관 시기가 느리며 양만춘과 동기다. 앞서 각주에서 밝혔듯이 양만춘과 함께 해당 무사대회 장원이라는 언급이 있으나 굳이 따지자면 양만춘보다는 아래인 2위거나 딱 1등을 가리지 않아 공동장원이거나일 것으로 추정된다. 연개소문과 검모잠, 뇌음신, 고돌발보다는 임관시기가 빠르다. 하지만 임관 시기 차이 때문에 서열이 분명한 것은 아니고 대걸중상부터 고돌발까지 거의 동지처럼 지내기는 한다. 이들보다 군부내의 확연히 윗 서열은 고승이고 고승보다 윗서열은 강이식과 을지문덕이다.

2.2. 드라마 대조영[편집]


배우 이원발이 배역을 맡았다. 고구려의 장수로써 연개소문의 부장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검모잠의 고구려 부흥운동에 참여한다. 하지만 고안승이 배신을 하게 되고 그 때 기습한 신라군들과 싸우다 보자기에 싸여서 사망했다.

[1] 나이대를 고려해 보통 손자로 나온다.[2] 양만춘과는 같은 무사대회 장원이라고 언급된다. 딱 누가 1등이라는 언급은 없으나 무사대회 장면에서 양만춘의 활약 장면을 중심으로 보여줬고 임관 이후 온사문은 이런저런 패배가 있으나 양만춘은 무결점으로 묘사되다보니 비유로 표현하자면 입사동기로 둘이 1, 2위로 들어왔으나 그 중에서 양만춘 쪽이 우위로 보인다.[3] 특히 설득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팔을 거는 장면이 압권이며, 온사문을 연기한 배우가 박영록이다보니 이 장면에서 야인시대의 김영태가 생각난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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