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예프의 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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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루스 섭정
키예프의 올가 | St. Olga of Kiev


파일:Olgaofkiev.jpg

이름
키예프의 올가
Olga of Kiev
현대 러시아어 이름
О́льга[1] 또는 Еле́на[2]

출생지
프스코프

배우자
이고리 1세 대공
생몰년도
?[3] ~ 969년 7월 11일
재위
키예프 루스 섭정
945년~960년
종교
슬라브 이교동방정교회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
2.2. 역사에 길이 남은 대복수극
2.3. 내정 업적
2.4.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다
2.5. 루스 최초의 기독교도 군주
2.6. 말년
2.7. 사후
3. 여담



1. 개요[편집]


러시아어 : Княгиня Киевская О́льга[4]

키예프 루스 제3대 대공 이고리 1세의 배우자이자 4대 대공 스뱌토슬라프 1세의 어머니이다. 남편의 사망으로 섭정에 올라 945년에서 963년까지 아들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렸다. 최초로 러시아 일대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기독교를 전파한 군주이기도 하다. 이 공적으로 훗날 시성되었으며, 성녀로서의 축일은 가톨릭정교회가 동일하게 7월 11일.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올가의 초기 생애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얼마 남지 않은 기록도 모두 원초 연대기[5]에 의존하고 있다. 원초 연대기에 의하면 그녀는 프스코프 출생[6]으로, 집안은 현지 슬라브인 가문이 아닌 바랑인[7] 가문이라고 한다. 15세기 러시아 연대기들에는 그녀를 키예프 루스 제 2대 대공 올레그의 딸로 기록한다. 올레그와 올가가 러시아식 이름[8], 스칸디나비아식 이름[9] 양쪽으로 굉장히 비슷한데서 나온 추측인데 뚜렷한 근거는 없다. 러시아 고대사 권위자인 알렉세이 카르포프는 그녀의 정확한 출생연도는 파악할 수 없으나 그녀가 15세 즈음에 결혼한 것은 확실하다고 밝혔다.[10]

그녀의 출생연도가 890년에서 925년 사이인 것은 확실하다. 올가는 대공 후계자 또는 대공이었던 이고리 1세와 결혼하였고 아들 스뱌토슬라프를 낳았다. 그 외의 다른 자식은 알려져 있지 않다. 많은 기록은 그녀가 890년 후반에 태어나 900년대 초반에 결혼했다고 하나, 이미 이 기록은 그녀가 죽은 지 200년도 안 돼서 역사가들에게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900년대 초반에 결혼했다면 장남 스뱌토슬라프를 결혼 30년 만에 낳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대 연대기들은 이 때문에 올가의 출생연도를 미루는 등 많은 추론을 한 흔적이 보인다. 11세기에 쓰여져 올가의 시대와 그리 떨어지지 않은 노브고로드 제1연대기는 이고리와 올가 사이의 전설을 전하고 있다. 이 연대기에 의하면 젊은 시절 이고리는 프스코프 일대로 사냥을 나갔다가, 강을 건너기 위해 나룻배를 타게 되었다. 나룻배의 뱃사공은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아이였는데 당시 20대 중후반 즈음 되었던 이고리는 이 아이를 보고 한눈에 반해 뜨거운 성욕을 느꼈다. 그래서 뱃사공을 겁탈하려 다가갔는데, 눈치 빨랐던 뱃사공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왕자님, 어째서 무례한 말로 저를 난처하게 만드십니까? 저는 어리고 아무 것도 모르지만, 제가 치욕을 견디는 것보다 강물에 몸을 던지는 것이 낫다는 것은 압니다!


영특한 대답에 감명이라도 받은 건지 이고리는 겁탈을 그만두고 물러났고, 결혼을 하지 않고 기다리다가 나중에 혼기가 꽉 차서야 올레그 대공에게 부탁해 성장한 그 여자아이를 찾아 결혼했다고 한다. 이 뱃사공 여자아이가 바로 올가라는 이야기. 따라서 900년대 초반에 결혼했다는 건 뱃사공 강간미수 사건 이야기고, 실제 결혼은 훨씬 뒤에 했다는 뒷이야기를 전한다. 물론 전설의 영역이라 역사적 근거는 부족하다.


2.2. 역사에 길이 남은 대복수극[편집]


그녀가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되는 것은 945년이다. 당시 키예프 루스의 대공이던 이고리 1세941년에 제 9차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을 일으켜 페체네그족과 함께 동로마 제국 수도권을 전면 침공하였다. 하지만 동로마 해군 비장의 무기 그리스의 불에 통렬하게 당해 함대를 거의 잃었고, 남은 육군은 요안니스 쿠르쿠아스에게 공격당해 섬멸당했다. 다행히도 동로마 역시 전쟁을 오래 할 상황은 아니라 944년에 이고리 1세가 다시 무력시위를 벌이자 945년에 평화 조약[11]을 맺고 경제적 권리를 얻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군비 소모는 상당했고, 이에 이고리는 피지배층 슬라브인들에게 세금을 많이 뜯어서 벌충하려 했다. 이고리는 군대를 이끌고 드레블랴인[12] 영역으로 진군해 공물을 요구했다. 드레블랴인들은 순순히 공물을 바쳤다. 공물을 챙겨 돌아가던 이고리는 왠지 좀 더 털면 더 나올 거 같다는 생각을 했는지, 약간의 병력을 데리고 다시 드레블랴인들에게 돌아가 더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드레블랴인들은 이고리를 습격해 체포해버리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그를 구부러진 자작나무 가지 사이에 사지를 묶어놓고 자작나무를 튕겨 사지를 찢어 죽여버렸다.[13]

이고리의 사망 소식이 키예프에 전해졌을 때, 나라를 물려받아야 할 왕자 스뱌토슬라프는 고작 3세였다. 따라서 젊은 공비 올가가 섭정에 등극했다. 드레블랴인들은 강해보였던 키예프 루스의 대공을 죽이고 그 나라에 여자가 권좌에 앉은 것을 보자 기고만장해지고 키예프 루스를 무시했다. 드레블랴인들은 사절 20명을 보냈다. 사절들은 올가에게 어차피 남편은 죽었으니 떠난 이는 잊고 드레블랴 연합의 공작 몰과 재혼하여 키예프를 넘길 것을 요구했다. 올가는 사절들에게 그 말에 동의한다면서, 내일 그대들에게 빛나는 명예를 줄 테니 돌아가 쉬라고 대답했다. 사절들은 이 말을 듣고 자고 온 뒤, 다음 날 아침에 기대에 차서 궁전 앞에 모였다. 곧 올가의 말처럼 루스 전사들이 와서 그들을 가마에 태우듯 보트에 앉혀서 그 보트를 짊어지고 궁전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궁전 마당에 웬 크고 깊은 구덩이가 있었다. 그리고 전사들은 배에 태웠던 드레블랴인 사절 20명을 죄다 구덩이에 부어버렸다. 구덩이에서 허우적거리는 사절들 앞에 올가가 나타났다. 올가는 그들에게 “내가 준 명예가 어떤가?”라고 물었고, 사절들은 이고리의 죽음보다도 명예롭다고 받아쳤다. 올가는 이들을 전부 생매장했다.

그 다음, 올가는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드레블랴인들에게 전령을 보내, 저번 사절들을 잘 맞아들였으니 더 저명하고 지위 높은 인사들을 새로운 사절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드레블랴인들은 아무 의심 없이 최고위층 인사들을 보냈다. 올가는 이들에게 자신을 만나기 전 목욕탕에서 깨끗이 씻고 올 것을 권했다. 드레블랴인 귀족 사절들은 의심 없이 목욕탕에 갔는데, 올가는 목욕탕 입구를 걸어잠근 뒤 목욕탕에 불을 질렀다. 사절들은 모두 타 죽었다.

이렇게 드레블랴인 귀족 수십 명을 손쉽게 죽여버린 올가는 다시 드레블랴인들에게 전령을 보냈다. 새 결혼을 하기 전에 전 남편 이고리의 무덤에서 장례식을 하고 싶으니 벌꿀술을 잔뜩 준비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드레블랴인들은 조금 긴장했지만 이를 수락했다. 얼마 후 이고리의 무덤이 있는 곳에 나타난 올가는 정말로 수행원 몇명을 대동하고 왔다. 올가는 장례식을 연 후 남편의 무덤 앞에 앉아 엉엉 울기만 했고, 수행원들은 먹고 마시는 분위기였다. 이에 많은 양의 벌꿀술에 눈독을 들이던 드레블랴인들은 루스인들의 태도가 수상하지 않자 곧 장례식에 모여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다들 술에 취해 곯아떨어졌다. 하지만 루스인들이 그저 술잔을 기울이던 것도, 올가가 무덤 앞에서 울고 있던 것도 모두 연기였다. 계획대로 드레블랴인들이 전부 곯아떨어지자 올가는 수행원들에게 전부 처단할 것을 명했다. 수행원들은 드레블랴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인 후 올가와 함께 키예프로 탈출했다. 이 날 밤 드레블랴인 전사 5천 명이 살해당했다.

얼마 후 946년, 올가는 드레블랴인들을 침공했다. 전쟁 명분은 당연히 남편 이고리의 복수였다. 드레블랴인들은 전쟁을 지휘할 귀족 수십 명과 전사 5천 명을 손실한 상태였기에 전쟁은 순조로웠다. 순식간에 드레블랴인 도시 대다수가 장악당하고, 드레블랴인들의 수도 이스코로스텐[14]만이 남았다. 올가는 1년 간 이스코로스텐을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 못 했다. 그러다 올가는 기막힌 꾀를 내었다. 그녀는 이스코로스텐에 전령을 보내어, 지금 성 밖의 마을들은 일찌감치 항복하여 농사도 짓고 생업을 하는데 어째서 이스코로스텐 사람들은 항복하지 않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이스코로스텐 수비대는 일찍이 우리가 당신들의 대공을 죽였으므로 보복당할까봐 항복하지 못 한다고 답장했다. 이에 올가는 이미 귀족 수십 명과 전사 5천 명을 죽인 것으로 화가 풀렸다며, 우리가 승리했다는 증거로 대단한 것은 필요없고 다만 드레블랴인들 한 사람 당 비둘기 세 마리와 참새 세 마리를 바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드레블랴인들은 안심하며 비둘기와 참새들을 마련해 올가에게 전했다. 하지만 올가의 복수는 당연히도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올가는 포위를 푸는 척 하는 한 편, 나뭇가지, 천쪼가리와 석탄을 잔뜩 가져왔다. 그리고 이 나뭇가지, 천쪼가리, 석탄에 불을 붙인 후 이것들을 드레블랴인들에게 받은 비둘기들의 다리에 묶고 모두 풀어주었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비둘기는 귀소본능이 있어 원래 살던 집을 찾아간다. 비둘기들은 원래 살던 집인 이스코로스텐으로 날아갔고, 비둘기들이 다리에 불 붙은 상태로 주인 집을 찾아가는 바람에 이스코로스텐에 어마어마한 화재가 났다. 이 시기 동유럽 성채들은 거의 대부분이 건물은 물론 성벽마저도 목재였기 때문에, 이스코로스텐은 불타며 내려앉았다. 그리고 올가와 루스 군대는 진격해 불타는 이스코로스텐을 마구 휩쓸었다. 드레블랴인 대다수가 타죽거나 루스 군대에 학살당했고, 생존자들은 모두 사로잡혀 노예로 팔려갔다. 이로써 드레블랴인 연합 국가는 멸망하고 민족은 거의 절멸당했다. 가히 역사에 남을 만한 대복수극의 마무리였다.


2.3. 내정 업적[편집]


이렇게 드레블랴인들을 파괴해버린 올가는 이고리의 원한을 완벽히 갚아주면서 강력한 권위를 갖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내정 업적도 남겼다. 우선 드레블랴인들의 반란 원인이 과도한 공물 수취인 것은 알고 있었기에 속국들에게 공물을 수취하는 횟수를 줄여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리고 불탄 이스코로스텐 대신 브루치[15]에 관청을 세워 옛 드레블랴인들의 땅을 관리하게 했다. 또한 이전까지 주먹구구식으로 통치되던 키예프 루스 전역에 제대로 된 행정구역을 설치하고 관리들을 파견하여 행정력을 강화했다. 또한 강들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루스식 무역 체계를 개량해 강변 곳곳에 무역기지를 설치해 상업 효율을 높였다. 수출할 모피를 구할 국립 사냥터도 곳곳에 설치했다. 새로운 마을과 도시의 설립도 적극 후원해 훗날 키예프 루스가 '도시의 나라'라는 호칭을 얻게 되는 기틀을 마련했다. 군사 요충지에 기지를 설치해 제대로 된 국경 수비를 시작한 것도 올가다. 올가의 내정 개혁은 동유럽 최초의 법률 제정으로 인정받는다. 사실상 키예프 루스를 부족 연맹 수준에서 왕국 수준으로 단숨에 끌어올린 셈. 재밌게도 올가는 석조 건물 축조에도 많은 관심을 보여 키예프와 노보고로드의 왕궁, 훗날 짓게 되는 교회, 그리고 자신의 프스코프 고향 집 등을 석조건물로 증축했다. 이스코로스텐에 불을 내 함락시켜 본 경험 때문에 목조건물을 불신하고 석조건물을 찾게 된 것일 지도 모른다. 그 동안 수많은 결혼 제안이 있었으나 모두 거절했다. 통치하면서 아들이 성장하자 군권은 아들에게 넘겼으나, 자신은 키예프의 비쇼로드 성에 머물면서 계속 내정을 전담했다.


2.4.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다[편집]


957년, 올가는 수행원들을 이끌고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했다. 당시 황제는 콘스탄티노스 7세였다. 원초 연대기는 콘스탄티노플 방문 이야기를 아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많은 저작물을 남긴 콘스탄티노스 7세 본인의 기록으로도 이때의 이야기가 남아있다. 올가는 957년 9월 9일 수요일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해 황제를 알현했다. 이후 10월 18일 일요일에도 황제를 알현했다. 원초 연대기에 의하면 콘스탄티노스 7세는 이 때 올가를 만나고 그녀의 미모와 지성에 놀라 한눈에 반했다고 한다. 그래서 황제는 올가에게

그대는 과 함께 나의 도시에서 군림할 가치가 있소.

라며 은근히 청혼의 뜻을 전하였다. 그러자 올가는

저는 아직 이교도입니다. 만약 황제께서 저를 기독교도로 만들고자 하신다면 직접 세례성사를 주관해 주십시오. 아니면 세례를 안 받을 거랍니다.

라며 우선 종교적 문제로 관심사를 돌렸다. 그러자 콘스탄티노스 7세는 무려 세계 총대주교를 불러 직접 세례성사를 주관했으며, 올가의 요구로 대부까지 서 주었다. 총대주교는 올가에게 많은 축복을 베풀었으며 올가는 무척 즐거워하며 열심히 참여했다. 세례명으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이자 성십자가의 발굴자 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 성녀에게서 따온 헬레나를 택했다.[16] 세례성사가 끝난 이후, 황제는 직접적으로

나와 결혼해 주시오.

라고 청혼했다. 하지만 올가는

황제께서 제 대부가 되셨으니 우리는 이제 영적으로 부녀관계가 아닙니까? 이건 종교적으로 불법이라는걸 잘 아셔야 할 텐데요.

라며 받아쳤다. 처음부터 영적인 부녀관계를 내세우려고 황제에게 세례 주관과 대부를 서 줄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러자 황제는 무릎을 탁 치며

올가, 그대가 나를 속였구려!

라며 호탕하게 대답하고는 올가에게 많은 금은보화를 선물하며 그녀를 자신의 딸이라 칭했다고 한다. 황제가 올가에게 청혼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많은 연대기에서 공통적으로 묘사하는 것처럼 올가의 미모와 지성 때문일수도 있겠지만, 수 십년 간 동로마의 북방을 위협한 키예프 루스를 지배해버리기 위한 정략적 결혼을 추진했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현대에 원초 연대기의 이 기록 자체가 비판받기도 한다. 이야기가 왠지 솔로몬 왕과 시바의 여왕의 이야기를 참고한 느낌이 나는데다가 콘스탄티노스 7세는 올가가 왔을 때 이미 유부남이었기 때문.[17] 아예 올가의 세례명 헬레나도 옛 황후 헬레나가 아닌 콘스탄티노스 7세의 부인에게서 따왔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원초 연대기 역시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많은 동로마 사료들을 참고해서 쓴 책이므로 아예 무시하기도 곤란한 기록. 어쨌든 원초 연대기와 콘스탄티노스 7세의 기록이 확실히 겹치는 것은 올가가 아주 인상적인 인물이었으며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종하고 귀국했다는 것이다.


2.5. 루스 최초의 기독교도 군주[편집]


사실 이미 키예프 루스 내에는 그리스도교도들이 있긴 했다. 올가의 남편 이고리 시대의 기록에 이미 야훼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는 인물들 몇 명이 드러난다. 하지만 대다수의 귀족들은 북유럽 신화를, 평민들은 슬라브 신화를 믿었으며 외국인 핀란드인들도 그들만의 신화가 있어 모두들 다신교를 믿었다. 이 다신교들의 공통점은 통치에는 그닥 도움이 되지 않는 단순한 민간 신앙이었다는 것이다. 통일된 경전도 없었고 세계관도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고 왕권에 대한 내용도 거의 없었다. 거기다 귀족과 평민의 종교가 다른 것은 국론 통일에 장애물이었다. 기독교 개종은 이 모든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치트키였다. 왕국 내 모든 사람들의 신앙을 하나로 모으고 교회 조직을 통해 행정력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올가는 귀국 후 열심히 기독교를 전파하려 했다. 하지만 끝내 자신의 재임기간 내에 루스의 개종을 이뤄내진 못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당장 자신의 아들 스뱌토슬라프부터가 반기독교 친다신교 세력의 수장이었기 때문이다. 원초 연대기에 비하면 올가가 스뱌토슬라프를 개종시키려 무던히 노력했지만 스뱌토슬라프는 어머니를 비웃었을 뿐이었다고 한다. 이에 959년엔 아예 독일 왕국오토 1세, 간접적으로는 교황에게 접근해 기독교를 전파해 줄 것을 부탁했다.[18] 이에 마그데부르크 대주교 아달베르트가 키예프로 파견됐는데, 961년에 도착해보니 정권이 올가에게서 이교도인 스뱌토슬라프에게로 넘어가 있어 허탕만 치고 돌아왔다고 한다.


2.6. 말년[편집]


960년 즈음에 올가는 자의 또는 아들의 요구로 장성한 아들 스뱌토슬라프 1세에게 권좌를 넘겼다. 스뱌토슬라프 1세는 964년에 공식적인 대관식을 열고 대공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스뱌토슬라프 1세는 무골 체질로 행정은 영 적성에 안 맞아 어머니에게 계속 내정을 맡기고 자신은 전쟁만을 수행했다. 964년 하자르 칸국의 모든 주요 도시를 파괴하고 사실상의 멸망 상태로 만들어버린 후 동로마의 요청을 받아들여 불가리아 제1제국으로 남진해 불가리아 차르 보리스 2세와 동생 로만을 붙잡아 버리는 등 어마어마한 군사 능력을 과시했다. 동로마는 스뱌토슬라프를 통해 하자르와 불가리아를 무너뜨리는 엄청난 이익을 보았으나 스뱌토슬라프가 불가리아 영토를 동로마에게 양도하는 것을 거부하고 트라키아를 약탈하기 시작하자 그를 적대했다. 그래서 그를 견제하기 위해 페체네그족을 매수해 키예프를 공격하게 시켰다. 이에 올가가 나서 키예프 방어를 지휘했다. 다행히 올가는 불가리아에 가 있던 아들이 돌아와서 페체네그를 무찌를 때까지 버티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나이 든 올가는 방어전을 치르면서 병을 얻었다. 결국 올가는 몸져눕게 되었는데, 눈치 없는 아들은 공공연히 자신은 키예프를 떠나서 훨씬 물자도 풍부하고 약탈할 동로마와도 가까운 불가리아의 페레야슬라베츠로 천도할 것을 떠들고 다녔다. 그러자 올가는 아들을 불러 울면서

내가 이리 약해진 것을 좀 보려무나. 왜 그렇게 나에게서 떠나가려고 하는거니? 어디 가려거든, 이 어미는 묻어주고 가거라.

라며 탄식했다. 그러자 효자 스뱌토슬라프는 불가리아로 돌아가지 않고 키예프에 머물렀는데, 결국 올가는 아들을 불러 이 말을 남긴 지 3일 후인 969년 7월 11일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녀가 죽자 그녀의 아들, 손자, 가족들, 그리고 온 나라 사람들이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큰 슬픔에 빠졌다고 한다. 스뱌토슬라프는 비록 개인적으로 기독교를 썩 안 좋아했지만, 어머니의 신앙심을 알았기에 어머니의 장례식은 기독교식으로 치뤘다.


2.7. 사후[편집]


그녀는 그녀가 생전에 살던 비쇼로드 성에 묻혔다. 이후 그녀의 손자 야로폴크 1세 대공 시대에 그녀는 이미 어느 정도 기독교화된 키예프 루스 내에서 성인 취급을 받기 시작했으며, 또 다른 손자이자 키예프 루스의 기독교화를 완성한 블라디미르 1세 대공은 1007년 그녀를 키예프 내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으로 이장했다. 수도자 야코프의 기록에 의하면 올가의 시신은 전혀 부패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그녀의 시신은 성유물로 안치되어 신자들이 참관할 수 있게 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시신은 1240년 바투가 이끄는 몽골군에게 키예프가 완전히 파괴당할 때 안치되었던 성당이 무너지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공식적인 시성이 언제 되었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13세기 후반부터 보헤미아인 여성들이 올가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쓰는 것이 보이므로 13세기 중후반 즈음에 가톨릭정교회 양측에서 그녀를 시성한 것으로 보이며, 확실한 기록은 1547년에 남아있다. 1547년에 올가는 막달라 마리아, 성녀 이코니움의 테클라[19], 성녀 콜로세의 아피아[20], 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 성녀 조지아의 니노[21]와 함께 단 여섯 명 뿐인 사도와 동등한 여성 성인에 올랐다. 즉 양대 종단 공식으로 가장 위대한 여성 기독교도의 반열에 오른 것. 성 베드로 대성당 북동쪽 제단에 그녀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현대에는 그녀가 거주하고 다스린 키이우가 있는 우크라이나와 그녀가 태어난 러시아에서 열렬히 기리고 있다. 고향 프스코프에서는 공항부터 시작해서 동네 제방, 동네 다리, 동네 성당까지 모두 올가의 이름이 붙어있다. 우크라이나의 수도이자 그녀가 오래 살았던 키이우,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 고향 프스코프, 그녀의 손자가 지은 도시 블라디미르, 그리고 그녀가 불태운 코로스텐에 그녀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러시아는 연해주에 올가라는 도시를 세우고 그 앞바다를 올가 만으로 명명했다. 키이우르비우에는 올가의 이름이 붙은 거리가 있다. 세계 곳곳에 그녀의 이름이 붙은 규모 있는 성당이 있다. 옛 러시아 제국은 사회에 기여한 여성에게 주는 성 올가 휘장이 있었으며, 현대 우크라이나에는 여성이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급의 훈장이 성 올랴[22] 훈장이고, 러시아 정교회에도 공훈 높은 수녀에게 성 올가 상을 준다.


3. 여담[편집]


기독교를 널리 전파했기에 원칙적으로 성녀로 공경받기는 했으나 피에 젖은 행적 탓에 올가는 공식적으로 어느 나라의 수호성인으로도 지정되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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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명 올가를 그대로 표기한 것.[2] 기독교 세례명[3] 최대 890년, 최소 925년으로 비정된다.[4] 크냐기냐 키예프스카야 올가, 키예프 여대공 또는 대공비 올가라는 뜻이다. 영문으로는 Princess Olga으로 번역되어서 종종 올가 공주로 오역되곤 한다. Prince라는 직위를 대공과 왕자로 혼동하는 것처럼, Princess라는 직위를 여대공 혹은 대공비를 공주와 혼동한 것.[5] 러시아 고대-중세 역사를 다룬 거의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은 완벽한 기록. 연대기 작가이자 키예프의 수도자였던 네스토르(1056~1114)가 1113년경에 완성한 연대기이다. 키예프 루스 영토 전역에서 막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하여 쓴 연대기로 많은 역사적 사실은 물론 슬라브 전설, 게르만 전설도 많이 담겨 있어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다만 역사와 전설을 섞어 써서 중요한 데서 정확도가 떨어지는 시대적 한계도 있다.[6] 원초 연대기에는 굉장히 구체적으로, 프스코프 시가지에서 벨리카야 강 쪽으로 12km 떨어진 마을이라고 명시했다.[7] 바랑기안 가드 할 때 그 바랑인 맞다. 이 당시 루스 지역에서 스칸디나비아 바이킹들을 일컫던 말.[8] 올레그-올가 [9] 헬기-헬가[10] 그는 출생연도를 920년으로 비정했다.[11] 동로마와의 무역통상 권리와 드네프르 강 하구 항구의 이용권을 얻었다. 하지만 키예프 루스 측도 크림 반도 남부에 대한 불가침조약과 정착촌 건설 금지를 약속해줬다. 이 조약문은 당시 키예프 루스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이기도 하다. 조약문에 서명한 루스인이 총 76명인데, 왕족이 12명, 왕족 1인당 1명씩을 대표하는 외교관 11명, 수행원 27명, 따라온 상인 26명이다. 왕족과 귀족층인 외교관들은 거의 전원이 스칸디나비아식 이름을 갖고 있다. 오히려 왕족 중엔 현지인들과의 동화를 위해서인지, 슬라브식 이름을 가진 사람이 셋 있다. 귀족층 중 핀란드식 이름이 셋 있으나, 슬라브식 이름은 전혀 없다. 왕가부터가 외국에서 와서 그런지 슬라브인보다 핀란드인계 민족을 중용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평민 계층일 상인들에는 핀란드식 이름이 셋, 슬라브식 이름이 둘 있다.[12] 동슬라브계 민족들 중 하나. 연대기 작가 네스토르는 명성이 높지 않는 슬라브 부족들을 묶어 평지에 사는 이들을 폴랴인, 숲에 사는 인들을 드레블랴인들로 불렀다. 키예프 루스처럼 느슨한 부족 연맹 국가를 형성했던 것으로 보이며 유물과 유적도 꽤나 남아있다. 민족 자체는 11세기 쯤에 완전히 사라진다.[13] 동로마 제국 역사서에 남은 기록인데, 현대 학자 일부는 그냥 드레블랴인들에게 잡혀 죽은 것을 가지고 그리스 신화테세우스와 도적 시니스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어 양념친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14]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코로스텐[15] 현재의 우크라이나 오우루치[16] 헬레나가 러시아어 발음으로 엘레나다.[17] 선황 로마노스 1세의 딸 엘레니 레카피니. 당대의 미녀로 유명했다.[18] 이때는 동서 대분열 전이나 이미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는 갈등 중이었으므로, 양측 교회가 경쟁이 붙어 더욱 열성적으로 루스에 기독교를 전도하려 들 것을 노린 것이라는 설이 있다.[19] 유명한 성 바오로의 제자로, 평생 순결을 지키며 기독교에 헌신했다. 맹수가 피해가는 기적, 병자를 낫게 하는 기적 등을 보이다가 90살에 체포당했는데, 이 때 바위로 뛰어들자 바위가 열리면서 틈이 생겼고, 테클라가 그 틈으로 들어가자 바위가 닫혔다고 한다. 최초의 여성 순교자.[20]바오로의 제자로 남편 필레몬과 함께 기독교에 입교했다. 선행과 자선을 베풀며 살다가 체포당해 돌을 맞고 죽었다. 남편은 사도 칭호를 받았다.[21] 카파도키아 소국의 공주 출신으로, 전쟁 포로가 되어 조지아 왕국에 노예로 팔려갔다. 이곳에서 치유의 기적을 통해 왕족들을 감화시켜 조지아 왕국 전역을 개종시켰다.[22] 우크라이나어로는 올가를 올랴로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