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진군(황해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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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북한 국기.svg 황해남도

옹진군
甕津郡
Ongjin County






군청 소재지
옹진읍[1]
지역
해서
면적
696㎢
행정구역

시간대
UTC+9
인구

인구밀도

군당위원장
파일:wpk.jpg
미상
인민위원장
파일:wpk.jpg
미상


1. 개요
2. 역사
3. 경제
4.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
4.1. 구 해주목 지역
4.2. 구 옹진현 지역
4.3. 구 강령현 지역
4.4. 주요 섬 목록
5. 만약 옹진반도가 대한민국 (실질)영토로 남았다면?
6. 통일 이후의 전망



1. 개요[편집]


북한 황해남도에 위치한 군. 광복 당시에는 옹진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나[2], 북한 치하에서 1954년 남동쪽 절반이 강령군으로 분리되어 반도의 서남단만을 관할하게 되었다.

2008년 북한 인구조사에서 옹진군과 강령군(구 옹진군+벽성군 3개면)의 인구를 합치면 26만 명에 달한다. 남북이 통일되면 옹진'시'로 승격될 가능성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놀랍게도 저 인구조사 결과는 북한군을 제외한 것으로 알려져있다.[3] 그러나 북한 치하 황해도는 도시화율이 손꼽힐 정도로 낮고, 통일 후 이촌향도 문제가 가속화될 수 있으므로 섣부른 판단은 금물. 하지만 옹진반도가 옹진군에 수복되는 것이라면 다를 수 있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금광과 온천업으로 지역경제가 튼실한 동네였다. 북한의 2010년대에도 금광은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그러나 북한 정부가 워낙 경제적 수완이 떨어지는 터라 이걸 개발할 생각을 하지 않고, 민간이 금광을 법에 규정되지 않은 방식으로 자생적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2. 역사[편집]


통일신라에서 한산주에 소속시키고 고을 이름을 옹천(甕遷)이라 이름붙였다. 고려에서 현재 쓰이는 옹진으로 바꾸었다. 본래 이 지역에 독을 엎어 놓은 듯한 나루가 있다고 해서 고유어로 독나루라고 불리던 것이 한자로 훈차되면서 옹진, 즉 독 옹(甕), 나루 진(津)으로 된 것 이다.

옹진반도의 대부분은 38선 이남에 있어서, 광복 이후 6.25 전쟁 이전에는 대부분의 지역이 남한령이었다. 38선 분할로 인해 옹진군 교정면, 가천면 대부분[4], 옹진읍 극히 일부 지역이 북한령이 된 대신, 38선 이남에 있던 벽성군 해남면, 동강면, 송림면(연평도 포함)[5], 장연군 백령면(백령도, 대청도, 소청도)을 더하여, 옹진읍 온천리에 있었던 옹진군청에서 관할하였다. 또한 옹진군과 연백군경기도로 이관하였다. 그러나 바다로 남한 타 지역과 분리되어 있어 옹진반도는 사실상 섬이나 다름이 없게 되었다. 남한 본토와의 연락은 서울(당시 김포군) 김포비행장~옹진 간 부정기 공로(空路) 및 인천~옹진 부포 간 부포항로가 있었다. 참고로 1950년 3월 신문기사에서는 옹진군의 인구를 '18만 군민'으로 표현하였다.

사실상 섬과 같아졌던 이런 문제 때문에 미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는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에서 38도선을 행정구역별로 재조정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간단히 말하면 황해도소련군정에, 경기도미군정에 이양하자는 것이다.[6] 이것이 성사됐다면 개성시 송악산 이북 지역과 장단군, 연천군 전역은 남한으로, 그리고 서해 5도를 포함한 옹진은 북한으로 넘어가는 셈이이었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다. 만약 실현되었다면 개성 시가지를 방어하는 배후지는 차지할 수 있었겠지만, 서해 5도가 전쟁 중 인천의 방벽이 되어주지 못했을 것이다.

1949년 6월에 38선 일대에서 북한의 대규모 공격이 있기도 했었다. 결국 6.25 전쟁 당시 옹진반도 전투로 북한에 점령되었고 휴전 협정 이후 서해 5도를 제외한 전 지역이 완전히 북한 치하로 넘어갔으며 서해 5도는 옹진군 소속으로 남았고 군청 역시 인천으로 옮겼다. 당시 행정구역은 경기도였고 1995년에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었다. 옹진고등학교도 부천으로 옮겨 가서, 현재의 부천시 범박동에 있는 시온고등학교가 되었으며, 동남면 용호도의 수산학교도 인천으로 옮겨가 현재 인천해양과학고등학교가 되어 있다.

옹진군이 고향인 실향민들은 개전 초기 옹진지구 전투 당시 군과 함께 인천으로 피난한 경우가 적지 않다.[7] 그래서 인천광역시에는 옹진군 출신 및 그 후손들이 상당히 많이 거주한다. 또한 1.4 후퇴 당시 황해도평안도에서 바닷길로 피난한 사람들 역시 옹진군 도서지역에 집결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다.


3. 경제[편집]



2010년대 초중반의 옹진의 금광의 갱을 운영한 탈북자의 증언. 썸네일과 달리 북한 경제 체제에 관한 내용이다.[8]
일제 치하부터 있던 금광이 있다. 누군가에겐 생존의 유일한 수단이라는 증언이 있을 정도다. 대단히 어려운 사람들만 금광 인부로 일하기 위해 온다고 한다. 인부들은 1달에 28일 일하고 30달러 번다. 놀라운 것은 북한의 채광 기술이 일제를 못 따라간다는 주장이 있다는 것이다. 국영경제는 이미 몰락한 지 오래기에, 알아서 개인이 국가가 나서지 않는 채광을 하는 것이다.

4.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편집]




파일:옹진군기.png
파일:옹진군.jpg

광복 당시 기준 1읍 10면이며, 법제처의 법령해석에 따라 인천광역시옹진군과는 별개의 행정구역으로 보고 있다. #

4.1. 구 해주목 지역[편집]


아래 지역은 1906년 해주군에서 편입해 온 곳이다. 이들 지역은 공통적으로 38선이 지났다(단, 옹진읍은 북쪽 끝의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38선 이남이었다). 향토사적 정통성을 따지자면 구 옹진현 지역 문단이 가장 먼저 나와야겠지만, 이 지역은 군의 중심인 옹진읍이 있으니만큼 부득이하게 앞에 배치하였다.

  • 가천면(茄川面)
    • 관할 리: 장현(長峴), 가암(架巖), 사산(沙山), 삼괴(三槐), 성변(城邊), 옥천(玉泉), 한현(閑峴)
    • 광복 당시에 면사무소 소재지는 장현리이다. 38선이 설정될 때 면의 남부 3분의 1 지역이 이남에 있었다. 면사무소 소재지는 38선 이남이었지만 면 대부분이 38선 이북에 위치한고로, 북면에 편입되었다. 면 서남단에 있던 두락산(斗落山)의 38선 접경 국군 진지는 1949년 충돌 당시 북한군의 주요 공격 목표였다.

  • 교정면(交井面)
    • 관할 리: 송림(松林), 건전(乾田), 구포(鷗浦), 국봉(國峰). 난천(蘭泉), 낭암(浪巖), 비파(琵琶), 송현(松峴), 월암(月巖), 판정(判井)
    • 광복 당시에 면사무소 소재지는 송림리이다. 38선이 설정될 때 면의 남부 3분의 1 지역이 이남에 있었는데, 이 지역은 서면에 편입되었다. 판정리에는 면 이름의 유래가 된 판정우물이 있다.

4.2. 구 옹진현 지역[편집]


아래 지역은 원래부터 옹진군이었던 곳이다. 전 지역이 38선 이남이었다.



  • 동남면(東南面)
    • 관할 리: 당장(堂墻), 갈항(葛項), 거답(巨畓), 무파(茂巴), 사곶(沙串), 서장(西壯), 석교(石橋), 송강(松江), 송현(松峴), 신안(新安), 안산(安山), 어화도(魚化島), 용호도(龍湖島), 인평(仁坪), 장척(長尺), 전당(錢塘)
    • 1914년 구 옹진군 동면과 남면을 통폐합해 신설되었다. 강령군과 해주목 3개 면의편입으로 옹진군의 군역이 옹진반도 전체로 확장되었기 때문에 동남면이란 이름에도 불구하고 군의 중앙에 있다. 면사무소 소재지는 당장리이다. 사곶리와 무파리에는 북한 해군기지가 설치되어 있다. 주요 부속도서로는 어화도(漁化島), 용호도(龍湖島)가 있다. 어화도의 경우 인천광역시에는 어화도 출신 실향민들의 단체인 어화도민회가 있다. 용호도의 경우 과거 용호도수산학교(현 인천해양과학고등학교)가 있었고, 개전 초기 옹진철수 때 피난선을 제공했던 곳이다. 이 두 도서지역의 생산은 유명해서 어화도와 용호도에서 생산되는 김을 옹진김이라 하여 알아주는 특산품이었다. 이 지역의 해상교통은 사관리(=사곶)에서 용호도를 거쳐 어화도에 들어가는 기선이 전부였다. 인구 15,184명 (1949)

  • 북면(北面)
    • 관할 리: 화산동(花山東), 고안(古安), 봉소(鳳所), 삼산(三山), 상심적(上深寂), 웅현(熊峴), 초일(蕉日), 하심적(下深寂), 화산중(花山中)
    • 군 중앙에 있는 면으로, 1914년까지의 군청 소재지였으며 옹진향교 또한 이 곳에 있었다. 면 소재지는 화산동리이며 화산성(花山城)이 있다. '화산'이라는 데에서 눈치 챈 사람도 있겠지만, 베트남(대월)에서 왔다는 화산 이씨의 시조 이용상(리롱뜨엉)의 유적지인 '망국단'이 바로 이곳에 있다. 이 곳은 옛 수군절도사의 본영이 있었기에 일명 '본영(本營)'이라고도 했다. 한편 구곡로동자구[9]에는 북한 중앙식물원 옹진분원이 있다. 인구 10,609명(1949).

  • 서면(西面)
    • 관할 리: 읍저(邑底), 내전산(內錢山), 동문외(東門外), 동오(東五), 만진(萬珍), 서경(西京), 연봉(蓮峰), 외전산(外錢山), 장포(長圃), 창린도(昌麟島)
    • 군 서부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읍저리. 읍저리는 일명 '소강(蘇江)'이라고도 하는데, 수군첨절제사[10]의 본영인 소강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 안의 누각인 만하정(挽河亭)과 진해관(鎭海館)은 광복 당시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한편 동오리 일대는 염불사라는 이 있어 그 일대를 일명 '염불(念佛)'이라고도 하며 농산물 집산지로 장이 열렸다. 연봉산에는 오래된 절인 청련사(靑蓮寺)가 있었으며, 주요 부속도서로는 창린도가 있다. 1949년 옹진 전투(6.25전쟁 초기 옹진반도 전투와는 다르다) 때 면의 북부 지역(및 남한에 남은 교정, 가천면 잔여지역)이 북한군에 큰 피해를 입었다. 주요 어항(漁港)인 옹진항은 옹진읍이 아니라 이 곳 읍저리에 있었다. 백령도 주민들은 분단 후 장연과의 교통이 차단되면서 6.25 전쟁 이전까지 한때 이 곳 읍저와 한 생활권을 이루기도 했다. 당시 인구 15,389명(1949)

  • 용천면(龍泉面)
    • 관할 리: 포산외(蒲山外), 기린도(麒麟島), 대기(大機), 대정(大井), 마합(麻蛤), 마항(馬項), 손량(孫梁), 용암(龍巖), 용문(龍門), 원산(院山), 제작(諸作), 포산내(蒲山內)
    • 군 서단에 위치한 면으로 삼면이 바다에 접해 있으며, 면 소재지는 포산외리. 포산외리의 용천약수가 유명하며, 주요 부속도서로는 기린도, 마합도가 있다. 인구 11,475명 (1949)

4.3. 구 강령현 지역[편집]


아래 지역은 1909년 폐지된 강령군에 해당되는 곳이다. 역시 전 지역이 38선 이남이었다.
  • 봉구면(鳳鳩面)
    • 관할 리: 장수(長壽), 광암(廣巖), 건지(乾智), 도화(都華), 무도(茂島), 부포(釜浦), 신평(莘坪), 옥은(玉隱), 죽교(竹轎), 평양(平陽), 향가(香街)
    • 구 강령군의 봉현면과 구주면을 합병했다. 면사무소 소재지는 장수리이다. 옹진반도의 주요 해상 요충지 중 한곳인 부포리가 이 면에 있는데, 부포선의 종착역인 부포역이 있으며 6.25 이전까지는 옹진군이 사실상의 섬이었던 관계로 인천과의 사이에 연락선이 다녔다. 일명 부포항로. 평양리의 개머리 해안포진지와 무도리의 "무도방어대"는 2010년 연평도 포격전 당시의 도발 원점이기도 했다. 인구 13,414명(1949)

  • 부민면(富民面)
    • 관할 리: 강령(康翎), 고동(古洞), 광평(廣坪), 금병(錦屛), 내동(內洞), 미산(眉山), 부암(婦巖), 석계(石溪), 성도(聖道), 천상(泉上)
    • 면소재지는 강령리이며, (구) 강령군의 중심지이다. 강령탈춤의 발상지. 강령반도에서 해주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해있다. 부포선 강령역이 있고, 신강령역은 바로 부민면 북쪽 끄트머리에 있다. 산지에는 강령저수지가 있다. 인구 11,275명(1949)

  • 용연면(龍淵面)
    • 관할 리: 송학(松鶴), 봉황(鳳凰), 수계(水鷄), 오산(梧山), 용산(龍山), 용연(龍淵), 장릉(長陵), 한봉(漢鳳)
    • 군 동부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송학리. 부포선 철도가 통과하며 용연역이 있다. 한 때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던 옹진 학 도래지가 용연면의 강령천변에 있던 거다. 인구 8,195명(1949)[11].

  • 흥미면(興嵋面)
    • 관할 리: 안락(安樂), 괘암(掛巖), 냉정(冷井), 등산(登山), 봉강(鳳崗), 석포(石浦), 송산(松山), 식여(食餘), 아미(峨嵋), 월계(月溪), 예진(禮津), 창암(蒼巖)
    • 군 남단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안락리이다. 봉구면과 잘록한 육지로 이어졌을 뿐 그 외에는 바다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본토 최남단에는 등산곶이 있으며[12], 옹진반도 도서지역의 최대도서이자 전국구로 봐도 꽤나 큰 섬인 순위도(巡威島)[13]가 이 면의 관할이다. 인구 12,373명 (1949).

4.4. 주요 섬 목록[편집]


이북 5도 행정구역상 옹진군의 주요 섬들을 면적순으로 다룬다.


면적(㎢)
소속 면
비고
순위도(巡威島)
26.5
흥미면

기린도(麒麟島)
7.1
용천면

창린도(昌麟島)
7.0
서면

용호도(龍湖島)
2.0
동남면

어화도(漁化島)
1.45
동남면

마합도(麻蛤島)
0.94
용천면

신도
0.9
동남면
북한 치하에서 방조제로 육지와 연결됐다. 옹진군(인천광역시) 북도면 신도(信島)와는 전혀 무관.
과도
0.5
동남면

도도
0.45
동남면

무도(茂島)
0.27
봉구면

봉곶도
0.1
서면
창린도의 부속섬
비압도(飛鴨島)
0.15
흥미면
부속된 작은 섬인 조도(鳥島)와 연륙. 서해에서 멀리 나와있는 섬이라 북한군이 주둔하는 건물들이 많이 깔려있다.
옹도(甕島)
0.05
흥미면
등산곶 서남쪽에 위치. 북한 최남단.
하기도(下麒島)
0.03
용천면
기린도의 부속섬


5. 만약 옹진반도가 대한민국 (실질)영토로 남았다면?[편집]


38선 이남 옹진반도만 따지면 800㎢를 넘어가니 무시할 만한 면적은 아니다. 그렇다고 황해도를 존치할만한 면적정도는 또 아니면서 인천광역시로 편입하기도 뭔가 애매한 지역이 된다.[14] 그래도 유일한 황해도의 육지지역이니 상징성 차원에서 서해 5도와 함께 황해도로 존치해두었을 가능성이 높아보이며[15] 반대편 동해바다의 강원도 고성군처럼 최전방 안보관광과 휴양지, 군 위수지역 일대 상권 및 인프라 등등, 여러모로 유사한 지역이 되었을 것이다. 또 마찬가지로 엄격하고 제약이 많겠지만, 어업도 어느정도는 가능할 듯. 농업은 산지인 고성군과는 달리 더 활발했을 듯하다.

  • 육상 및 해상교통: 육로의 경우 바다로 타지역과 격리되어 사실상 섬이 된다. 다만 연백평야 지역을 한국이 가지고 있다면, 가장 좁은 바다 폭의 구간이 6km 정도 되니 다리를 놓을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 케르치 대교의 건설로 아조프 해우크라이나 측 항구들이 사실상 봉쇄된 것처럼 북한의 해주항은 확인사살당했을 것이지만, 유사시에는 다리가 포격 등으로 무력화되어 육로가 봉쇄당할 수 있다는 게 문제될 수 있다. 한편 해로의 경우 인천에서 옹진반도로 가는 부포항로가 여전히 살아남아 옹진반도의 생명선이 되어줄 것이다.

  • 철도교통: 해옹선은 해주 등 타지역과 연결이 끊겨버리게 되어 신강령역에서 옹진역까지 짧은 구간만 남기 때문에 전쟁후 동해북부선처럼 실질적인 운행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해옹선과 부포선의 분기점이 38선 이남이니 해옹선 잔여 구간과 부포선을 직결시켜 운행해 고성과 파주의 통일전망대처럼 옹진에도 통일전망대를 만들어 연계시키는 등의 등등의 전방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거나[16] 연백평야와 연결되는 다리를 건설할 경우 토해선과 연결시켜 활용할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 군사: 방어에는 불리하다. 사실상 섬이나 다름없는 위치도 그렇고, 옹진반도 방어선을 가장 좁게 만들 수 있는 태탄~취야리(현 벽성읍)보다 더 남쪽인, 반도의 폭이 넓어지는 곳에 38선이 설정되어 있기 때문. 그리고 38선에서 4km 지점에 옹진광산, 6km 지점에 옹진읍이 있어 민통선이 생긴다면 읍내 코앞이 민통선이 된다. 그리고 섬과 다를바 없는 위치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엄연히 육지이지만 인근의 서해5도와 연계하여 육군이 아닌 해병대가 강안경계가 아닌 육지경계로서 GOP를 담당하고 DMZ내의 GP까지 담당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그리고 옹진반도는 앞서 언급했듯이 면적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라서 아예 사단을 하나 더 창설하여 옹진반도와 그 일대의 서해5도를 담당하게 했을 듯.

  • 북한의 해주항은 항만 기능을 상실하고 고자가 되었을 것이다. 해주의 용당포[17]와 옹진반도 사이 바다의 폭은 불과 700m에 불과하다. 대청도연평도는 완전한 최전방까지는 아니게 된다. 그로 인해 유사시 옹진반도를 지원해주기 위한 전초기지로서의 역할을 할 것이다.

6. 통일 이후의 전망[편집]


옛날처럼 탄탄한 지역경제를 지니게 될 지 의문이다. 부존량이나 채산성을 확인해야겠지만 80년 전 마산면을 옹진읍으로 만들어줬던 수대리 광산이 과연 21세기인 지금에도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온천업은 전국구로 보면 온양이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 황해도 내에서도 연백의 연안, 배천과 송화 등 경쟁자가 너무 많다. 광복 전에는 서울에서도 많이 놀러왔다고는 한다. 그나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뜨거운 온천 타이틀로 승부를 볼 수 있으니 그렇게까지 암울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 외에는 농사를 위시한 농업과 전쟁 전부터 유명했던 양식 같은 수산업 정도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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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한에서는 군 소재지는 무조건 군의 이름을 딴 읍에 둔다.[2] 일부 지역은 벽성군에 속했다.[3] 북한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역별인구에 나온 전체인구와 전국인구의 전체인구가 다르다. * 특히 지역별인구에 나온 연령별 남녀 인구 총합은 20대에서 성비가 여성이 남성에 비해 2배나 많은 세대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북한군의 인구가 지역별인구 통계에 빠져있다는 것을 의미한다.[4] 38선 이남에 남은 나머지 지역은 각각 서면과 북면에 편입시켰다.[5] 이 밖에도 38선 이남에 위치한 벽성군 월록면과 대거면 일부 지역은 옹진읍에, 가좌면 일부 지역은 부민면에 편입시켰다.[6]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정병준, 돌베개. 171~174페이지[7] 개전 초기의 급박한 전황에 피난해서 그런지 가장과 장남 정도만 고향을 떠나 피난한 사람들이 많았다.[8] '동발'은 갱도가 무너지지 않게 받치는 기둥이다. 한국에서도 쓰는 표현이다.[9] 고안리, 웅현리, 상심적리를 합친 북한의 행정구역[10] 격은 북면 본영에 주둔했던 수군절도사가 더 높았다. 조선 수군 문서에서 보듯 수군절도사는 정3품으로 오늘날의 함대사령관 급이고, 서면 소강에 주둔했던 첨절제사는 종3품으로 오늘날의 전단장에 해당.[11] 통계청 포털에서는 용유면으로 되어있는데, 그 당시 용유면(현 인천 중구)은 부천군 소속이었다.[12]북한 육지 영토의 최남단이다. 고양시(일산), 서울특별시 도봉구과 동위도이다! 이보다 더 남쪽에 위치한 북한 최남단은 등산곶 바로 아래에 위치한 섬인 옹도이다.[13] 창암리, 예진리 관할[14] 애초에 서해 5도도 우도와 그 부속도서 일대를 제외한 나머지 섬들은 황해도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 섬들로는 도를 존치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편입한 것에 가깝다. 근데 이와 같은 이유로 통째로 인천광역시로 편입하기엔 애매하면서도 황해도로서 존치하기도 애매하다.[15] 다만, 옹진반도 하나 가지고 황해도청을 설치하기는 영 그렇기 때문에 타이틀만 황해도로 걸어두고 광역지자체 업무는 인천에서 관할했을 듯 하다.[16] 이렇게 되면 총연장은 29.2km로 구 수인선보다 길다. 협궤긴 하지만 어차피 섬이나 다름없으니 타지와의 연계는 신경쓸 필요 없긴 하겠다.[17] 38선 이남이었지만 미국과 소련의 합의로 북측에 넘겨졌다.[18] 단 사곶은 수심이 얕은 게 약점이다. 아무튼 지리적으로 봐도 옹진군은 통일 이후에는 서울, 경인 지역을 대비하는 전략적 요충지가 될 확률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