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룡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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臥龍生 (1930 ~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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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이력
3. 한국에서의 와룡생
4. 작품 목록


1. 개요[편집]


대만무협소설 작가. 와룡생이란 이름은 필명이며 본명은 우학정(牛鶴亭, 뉴허팅)이다.

대만에 신파(新派) 무협을 정착시킨[1] 작가 가운데 한 명이다. 사마령, 제갈청운과 함께 대만무협의 삼검객(三劍客)으로 불린다.


2. 이력[편집]


  • 1955년 : 군대를 퇴역한 후[2]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친구 동창철(童昌哲)의 권유로 을 쓰기 시작했다.
  • 1957년 : 와룡생(臥龍生)이라는 필명으로 데뷔, 대만의 성공만보(成功晩報)에 처녀작 풍진협은(風塵俠隱)을 발표했다. 풍진협은의 성공 이후 민성일보(民聲日報)에 경홍일검진강호(驚虹一劍震江湖)를 실어 3쇄까지 찍는 성공을 거뒀다.
  • 1958년 : 대화만보(大華晩報)에 비연경룡(飛燕驚龍)을 연재하며 일약 무협소설의 거장으로 발돋움한다.
  • 1959년 : 상해일보(上海日報)에 철적신검(鐵笛神劍)을, 1960년에 중앙일보(中央日報)에 옥차맹(玉釵盟)을 연재하기 시작. 모두 3쇄 이상 재판을 하여 성공을 거둔다.
참고로 연재한 신문들은 당시로 치면 한국의 지상파 3사(MBC, SBS, KBS)급의 지명도를 지녔다. 한 곳에서만 연재해도 메이저급인데 세개 다 연재했단 건 정말 유명한 작가란 것이다.
  • 1960년대 초반 : 와룡생은 계속해서《천향표》(天香飇), 《강설현상》(絳雪玄霜), 《소수겁》(素手劫), 《천검절도》(天劍絶刀) 등 다수의 걸작들을 발표하여 전성기를 이어갔다.
  • 1960년대 중반 : 김용의 작품들이 대만에 정식으로 소개되었고 와룡생은 김용과 대만내에서 라이벌 관계를 형성한다.
  • 1960년대 후반 : 고룡의 작품들이 대만에서 본격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반대급부로 와룡생은 점점 인기를 잃어간다.
  • 1970년대 : 와룡생은 이 위기를 타계하기 위해 TV 드라마로 눈을 돌려 CTS에서 드라마 제작자로서 활동을 시작했지만 성적이 신통치 않았고, 영화 각본 쪽으로도 눈을 돌려 《협사표객살수》(俠士、鏢客、殺手), 《화염장과 한빙수》(火燄掌與寒冰手)[3] 등의 영화 각본을 맡았지만 이 쪽도 실패했다. 이후 다시 작가로 회귀하여 신작을 집필하지만 역시 인기를 얻는데 실패하고, 생활고를 겪는다.
  • 1980년 : 어느 유명출판사가 그의 필명인 와룡생을 매입하기를 희망하고, 생활고에 시달린 와룡생은 필명을 매각하고 절필, 출판계와 인연을 완전히 끊었다...라고 쓰여져 있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데, 당시 그 출판사 측에서 와룡생과 같은 시기에 활동한 무협 소설 작가 동방옥(東方玉)[4], 독고홍(獨孤紅)[5] 등의 작가에게 변호사에게 소송을 의뢰해야 하니 빈 종이에 서명해달라고 요청했고 그렇게 저작권 양도서를 위조한 뒤 행정부에 저작권장을 신청한 뒤 저 3명의 작품을 무단으로 출판한 것. 저작권 위반은 차치하고 문서 위조 행위였기에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한 와룡생, 동방옥, 독고홍 등이 타이베이 지법에 소송을 걸었으나 타이베이 지법은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고 3명은 바로 고등법원에 상소하였다. #
  • 말년 : 7~80년대 저작권 의식이 빈약한 건 대만도 다를 게 전혀 없었던 탓에 여러 무협소설 작가의 이름을 도용한 위작이 나오는 경우가 빈번했으며, 당연히 와룡생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생활고에 시달리던 차에 와룡생은 80년대 후반기에 터진 다단계 사기 사건이었던 훙웬 사건(鴻源案, 鴻源吸金案)[6]으로 피해를 입었고 결국 임대 아파트에 기거하는 저소득층으로 몰락했다. 경제적으로 완벽하게 몰락하자 와룡생은 강건하던 몸도 쇠약해져서 심장에 병을 얻게 되었다.
  • 1997년 3월 23일 : 타이베이시의 병원에서 지병인 심장병으로 타계했다.


3. 한국에서의 와룡생[편집]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무협작가라고 하면 아무래도 김용이겠지만, 국내 무협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무협작가는 아마도 와룡생일 것이다.[7]

와룡생은 1960~80년대까지 20여년간 한국에서 많은 인기를 끈 작가로[8], 오늘날 한국 무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대 배경이 모호한 강호에서 구파일방과 악의 세력이 정사대전을 벌이는 식의 이야기'는 와룡생의 영향을 제법 받았다.[9] 한국 무협계에서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정파, 사파의 구분도 와룡생의 작품에서 처음 등장한 개념이다.[10]

한국의 무협소설가 좌백은 와룡생의 의의를 무협에서 역사를 제거한 것으로 보았다. 그의 소설을 시작으로 무협이 중국의 역사라는 배경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와, 특정한 시대로부터 자유로워진 판타지 세계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좀 더 논의는 필요하겠지만, 실제 와룡생의 작품에서 국가 공권력은 잘 비춰지지 않고, 무림인들은 백주대낮에 칼을 들고 싸우며 몇천 명이 무리지어 전쟁을 방불케 하는 사투를 벌인다. 또 강호무림인은 정파와 사파, 구대문파와 무림세가로 나누어져서 싸움을 벌인다.#

이러한 작품의 특성은 군벌내전기를 겪은 와룡생의 인생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국공내전을 겪으며 소년병으로 복무하기도 한 와룡생에게 공권력은 역설적으로 와닿지 않는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고로 소설에 등장하는 각 무림 문파는 중국 각지에서 할거하던 군벌의 투영이며 정파와 사파는 극한으로 치닫던 당시 이념 대립의 투영이라는 식의 주장이다.

한국에서는 거의 모든 작품이 표절당했다.(...) 70~80년대가 표절이나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미미하던 시절이라 큰 문제 의식도 없이 그냥 베껴쓰는 경우도 많았는데,[11] 한두 군데도 아니고 참으로 열심히 베껴대서 무협소설의 역사에서 가지는 위상과는 별개로, 현재 독자들이 와룡생 작품을 보면 어디선가 본 듯한 이야기라고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4. 작품 목록[편집]


대만에서 찍은 위작과 국내에서 멋대로 이름을 붙인 위작 때문에 따로 와룡생 진품 목록이 돌아다니는데, 대표작은 다음과 같다.

  • 이름 (원제 연도) - 국내 출판명
  • 비연경룡 (飛燕驚龍 1959) - 비룡 비룡문
  • 옥차맹 (玉钗盟 1960) - 군협지 군웅지
  • 무명소(無名簫 1961) - 무명소
  • 강설현상(絳雪玄霜 1963) - 무유지 군웅문
  • 소수겁(素手劫 1963) - 야적 천룡기 / 후반부 역용 대필
  • 천검절도(天劍絶刀 1964) - 생사교 좌소백
  • 금검조령(金劍雕翎) + 악소채(岳小釵) (1964) - 금검지 원본금검지
  • 풍우연귀래(風雨燕歸來 1965) - 비연 비룡검
  • 쌍봉기(雙鳳旗 1965) - 쌍봉기 금봉문
  • 표화령(飄花令 1967) - 표화령 무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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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와룡생은 어릴 적부터 구파(舊派) 무협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며 작가로서 감을 쌓았다고 한다.[2] 소년병으로 국민당군에 종군하느라 정규교육과정을 수료하지 못했다.[3] 한국에서도 VHS로 나왔는데 여타 대만산 무협 영화와는 달리 영어 더빙 버전으로 나왔다.[4] 본명은 진유(陳瑜). 1925년 저장성 출신.[5] 본명은 이병곤(李炳坤). 1937년 허난성 출신.[6] 단순히 작은 사기 사건이 아니라 대만 경제 역사상 최대급 규모의 경제 범죄 사건으로 피해자만 16만명, 피해액은 948억 신 대만 달러였다. 범죄의 수법은 1980년대 일본에서 터진 도요타상사 사건과 유사하다.[7] 크게 보면 와룡생, 고룡, 김용 작품들이 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와룡생이 세계관에 많은 영향을 줬다면, 고룡은 특유의 문체와 작풍 등에서 영향을 줬고, 김용은 그 세계관과 분위기 속 주요 문파(무당파, 화산파, 개방, 마교 등)들의 설정과 특징에 많은 영향을 줬다.[8] 오죽하면 다른 작가들, 심지어 김용 작품조차 와룡생의 이름을 달고 막 찍어내던 시기도 있었다. 국내에서 비디오로 출시된 무협시리즈 중 심검(心劍)이란 드라마의 케이스에도 와룡생 원작이라고 버젓이 붙어있었다. 실제로는 와룡생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데도 말이다.[9] 다만 항목에도 있듯 와룡생의 구파일방은 오늘날의 구파일방과는 약간 다른 개념이긴 하다.[10] 이에 대해 와룡생이 1920~40년대 중화권 무협 작가들의 문풍/파벌 대립(남파와 북파)을 참고해 정파와 사파 개념으로 치환한 것 아니냐는 의견이 있다.[11] 70~80년대 로봇이 나오는 극장판 한국 애니메이션이 대표적인 사례. 많은 캐릭터와 메카닉이 일본 애니를 베꼈는데, 저작권에 깐깐한 일본 측이 여기에 대해 일일이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것은, 당시 한국의 애니메이션 회사들이 대부분 일본 업체의 하청을 맡아 성장하였는데, 원청 회사들이 엄청난 작업량을 할당하면서 까다로운 조건을 내세웠지만 큰 군말 없이 묵묵히 작업에 임한 한국 하청업체들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그랬다는 카더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