왈라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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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고대 : 다키아고트족
2.2. 중세
2.2.1. 불가리아 제1제국(서기 7세기~11세기)
2.2.2. 계속된 아시아 유목민의 침공
2.2.3. 헝가리 왕국(1290년 ~ 1330년, 40년간)
2.2.5. 오스만 지배기
2.3. 근대 ~ 현대


1. 개요[편집]


파일:Mihai_1600.png

현재 루마니아의 일부를 지칭하는 역사적 지명. 북쪽의 카르파티아 산맥과 남쪽의 다뉴브 강 사이에 펼쳐진 드넓은 평야 지역으로, 중세에 왈라키아 공국이 위치하였으며, 현재 루마니아 남부 일대이다. 트란실바니아, 몰다비아와 함께 현대 루마니아를 구성하는 세 지역 중 하나이다.[1] '차라 로므네아스커(Ţara Românească)'는 루마니아어로 '로마인들의 땅'이라는 뜻인데 트라야누스 시절 로마 제국이 지금의 루마니아 일대인 다키아를 정복하면서 이 일대에 정착한 로마인들 그리고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로마화된 다키아인들이 루마니아인의 기원이 된 것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루마니아인 스스로를 제외한 유럽의 대다수 민족들은 이들을 '블라흐(Vlach)'라고 불렀는데 원시 게르만어 발하즈(Walhaz)에서 유래한 단어[2]로 원래 '발하즈'는 이방인이라는 뜻으로 켈트족을 가리키는 단어였으나 로마 제국 영내에 사는 로마화된 켈트족, 나아가 로망스어군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 전체를 가리키게 되었는데 루마니아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남동유럽 일대에서 로망스어군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루마니아인들 밖에 없었기에 이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발하즈'의 변형인 '블라흐'가 자리잡게 되었다.[3]

중심 도시는 부쿠레슈티인데, 루마니아의 수도이다. 실제로 루마니아의 세 지역 중 트란실바니아는 원래 헝가리 왕국 영토였던데다가 독일인 이주민의 영향으로 헝가리 풍과 독일 풍이 강하고 몰다비아는 폴란드러시아 등 슬라브계의 영향을 많이 받은 지역이다. 따라서 루마니아 민족주의자들은 왈라키아가 가장 민족적으로 순수하다고 주장한다. 민족 구성은 루마니아인으로 고대 다키아인과 라틴인, 그리고 슬라브인의 혼혈이다. 종교는 정교회를 믿는다.

1859년, 몰다비아 공국의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Alexandru Ioan Cuza 1820~1873)가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으로도 동시에 선출되며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을 구성하였고, 1878년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였으며, 1881년에 루마니아 왕국이 되었다.

드라큘라의 모티브가 된 15세기의 군주인 왈라키아 공작 블라드 3세의 영지로 유명하다. 다만 소설 드라큘라에서는 배경이 왈라키아에서 트란실바니아로 변경되어, 블라드 공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군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4]


2. 역사[편집]



2.1. 고대 : 다키아고트족[편집]


해댱 지역은 고대 다키아 왕국이 있던 지역으로 서기 105년 트라야누스다키아 전쟁 이후 다키아 속주 및 모이시아 속주로 편입되었고 로마군 기지(리메스)가 곳곳에 들어섰다. 로마 제국의 속주가 들어선 시기 주민들이 라틴어를 사용하며 로마화되고 상당수의 로마인 상인들이 정착하기도 했으나 서기 3세기 말 이민족의 로마 변경 침략이 격화되면서 로마군은 해당 지역을 방기하고 철수하였다.

4세기 로마 제국이 일시적으로 다키아를 재수복하고 다리를 건설하였으나 이후 고트족들이 침공하면서 해당 지역을 다시 포기하였다. 사료에 따르면 훈족아틸라가 이 지역을 공격하면서 다뉴브 강 내외로 170여개의 마을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해당 지역은 로마 제국이 본격적으로 기독교화하는 과정에서 재수복되었다 상실되었지만, 상당수의 고트족들이 로마인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상황이었고 이 지역 역시 로마 제국의 다른 지역과 비슷한 시기에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했다.

훈족이 몰락하고 고트족들이 이탈리아 반도이베리아 반도로 이주한 이후 다키아 지역에 남아있던 현지인들은 라틴어의 영향을 받은 고유 언어를 유지하되, 계속되는 이민족들의 침략을 피해서 농경 생활을 포기하고 유사시 피난이 쉽도록 양을 방목하는 유목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지 원주민들은 본래 유목민족이 아닌 정주민이었고, 텐트를 치는 대신에 땅을 파고 그 위에 간단하게 초가 지붕을 덮는 움집 형태의 거주 장소를 만들어 생활하였다.

서기 5~7세기에는 아바르 칸국의 팽창 과정에서 왈라키아 지방을 넘어서 슬라브족들이 발칸 반도 각지에 정착하게 되었다. 발칸 반도가 대대적으로 슬라브화하는 가운데 오늘날의 루마니아 지역에는 어떻게 로망스어가 잔존할 수 있었는지는 사료 부족으로 자세한 내막을 알기 힘들다.

2.2. 중세[편집]



2.2.1. 불가리아 제1제국(서기 7세기~11세기)[편집]


서기 7세기에는 볼가 강 일대의 튀르크유목민족 불가르족이 오늘날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일대로 이주하여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을 건국한다. 불가르인들이 발칸 반도로 넘어오기 이전 아바르 칸국은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피지배 슬라브인들이 지속적으로 봉기하여 국력이 약화된 상태였는데, 이 과정에서 아바르 칸국과 동유럽의 무역 루트를 따라서 불가르인들이 침공하여 아바르 칸국의 잔당들을 붕괴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은 불가르 칸국의 방계 국가로 681년 건국되어 1018년 멸망한 그리스와 트라키아 일대를 제외한 발칸 반도 전역과 판노니아 전체를 지배했던 오늘날 불가리아의 전신이다. 도나우 강 유역에 있었기 때문에 '도나우 불가르'로도 불린다.

불가리아 제1제국 치하에서 오늘날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일대는 치안이 회복되면서 문명 생활이 다시 복구되고 도시들이 조금씩 재건되기 시작했다. 이 당시 도입된 문자가 키릴 문자이며, 이 문자는 아직도 동유럽과 러시아에서 쓰이고 있을 정도. 300년 후, 이 지역에 자리잡는 왈라키아 공국 역시, 공식적으로 이 키릴 문자를 사용했다. 경제적 빈곤 및 동유럽 이외의 지역과의 제한적인 교류로 명목상 기독교인으로 이교 풍습이 강하던 왈라키아 주민들이 본격적으로 다시 기독교화한 것도 이 시대이다. 동로마 제국 출신 선교사들과 불가리아 제국 내 성직자들의 영향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오늘날에도 루마니아는 국민 대부분이 정교회를 믿는 나라로 남았다.

번영하던 불가리아 제1제국은 바실리우스 2세가 지휘하는 동로마 제국 군대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제국의 북부 지역은 동로마 제국에 수복되지 않은 상태로 이후 여러 아시아 유목민들이 침공과 정착을 반복하게 되었다.

2.2.2. 계속된 아시아 유목민의 침공[편집]


11세기 말경,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하여 키예프 루스를 침공하던 페체네그족은 키예프 루스에 반격으로 세력이 약해지자 공격 방향을 돌려 발칸 반도 방향으로 남하하여 트라키아 지역을 초토화시켰으나, 레부니온 전투에서 알렉시오스 1세에게 대패하여 세가 약해졌다.

페체네그족은 설욕을 위해 12세기 초반에 다시금 전쟁을 벌였지만, 알렉시오스 1세의 아들 요안니스 2세가 이끄는 중흥기의 동로마 제국에게 밀려 베로이아 전투에서 멸족의 위기에 몰렸다.

이후 살아남은 페체네그의 잔존세력은 왈라키아 지방으로 후퇴하였고, (당시 불가리아 제1제국은 동로마 제국에게 멸망한 상태) 1130년 즈음엔 뒤이어 중앙아시아에서 유입된 쿠만인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몽골의 침략 이후에 페체네그인들은 헝가리의 판노니아 평원으로 흩어졌다가, 마자르족에게 흡수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11세기 말부터 볼가강 하류 평원에 튀르크계 민족인 쿠만인이 발칸 반도와 동유럽을 잇는 무역 루트를 통해 왈라키아에 유입되었다. 본래 동유럽의 쿠만인들은 대개 기독교도가 아니었으나, 왈라키아에 정착한 쿠만인들은 이웃 국가들과의 마찰을 피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몽골 제국의 침략군은 쿠만족 패잔병들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왈라키아 지방마저 공격하였고, 이후 왈라키아 지방은 1290년까지 공식적으로 킵차크 칸국의 영향 하에 있게 된다.

2.2.3. 헝가리 왕국(1290년 ~ 1330년, 40년간)[편집]


1003년에 헝가리 왕국이슈트반 1세에 의해 병합된 트란실바니아에 이어, 왈라키아도 확장하는 헝가리 왕국의 한 지역이 된다.

1247년 헝가리 왕국의 벨라 4세가 성 요한 기사단을 이용해 왈라키아 정복을 시도하지만 실패한 이후에 헝가리 왕국의 침입은 계속 이어지고, 결국 이지역의 족장 중 하나인, '리토보이'는 이와 싸우다가 1270년대에 사망, 그의 동생이었던 '바르바트'는 포로가 되는 일이 발생한다. 이 바르바트가 석방되면서 헝가리의 지배를 허용하게된다.

이 바르바트의 후계자인 토코메리루스의 아들이 바로 바사라브 1세가 되어 후에 왈라키아 공국을 창시하게 된다.

2.2.4. 왈라키아 공국[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왈라키아 공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317년 ~ 1714년까지 398년간이어진 공국이다.

1317년 '바사라브 1세'가 헝가리 왕국의 지배에 항거하여 독립을 선포한다. 이 후, 한 세대를 넘기기 힘들게 정권이 자주 바뀌며, 혼돈의 카오스가 펼쳐진다.

인접 민족들의 잇단 침략을 받다가 16세기 초, 오스만 제국의 보호하에 들어간 왈라키아는 오스만 제국의 주요 곡창지대였는데, 당시 오스만 제국에서 도로 건설에 신경을 쓰지 않아 정작 곡물은 수출되지 않았고 대신 엄청난 양의 소가 매년 왈라키아에서 오스만 제국 각지로 이송되었다.[5]

드라큘라의 모델로 유명해진 블라드 가시공(생몰년: 1431 ~ 1476, 46세)과 역사상 처음으로 루마니아 영토 전체를 통합했던 보이보드 미하이 2세도 이 공국의 '공작(보이보드)'이었다.

2.2.5. 오스만 지배기[편집]


이시기 오스만 제국에서는 선거제를 완전히 폐지하고 그리스인 파나리오테스들을 파견하여 해당 지역을 직접 통치하였다. 왈라키아 주민들과 그리스인들은 모두 정교회를 믿는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은 이들을 이른바 룸 밀레트로 묶었다. 왈라키아 도회지에서 파나리오테스들과 유대인들이 상권을 장악하자 왈라키아 현지인 상류층들이 고대, 중세 초와 마찬가지로 그리스인들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은 베네치아폴란드-리투아니아에 비해서는 피지배지 농민들에게 비교적 관대했던 반면 도로망 관리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기도 했다. 건조 지역인 아시아 영토에서는 도로망을 적극적으로 관리하지 않아도 별 문제는 없었겠지만[6] 비가 자주 내리고 수풀이 우거진 유럽 영토에서 도로망 관리에 허술한 것은 상당히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오스만 제국의 발칸 영토는 제국 세입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지역이었으나, 돌이나 아스팔트로 포장되지 않은 도로는 금새 다시 나무가 자라 막혀버리기 일쑤였고 농촌에서 생산된 잉여 식량은 오스만 제국 중심부로 이동되지 못하고 썩어버렸다.[7] 물론 루마니아 민족주의자들 입장에서는 오스만 제국이 왈라키아를 낙후된 반농반목 지역으로 방치한 셈이고, 이들은 오스만 제국의 왈라키아 지배가 루마니아를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뒤쳐지는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하는 편이다.

다른 한 편 북부의 다른 정교회 문화권이던 러시아 제국부동항 확보를 위한 확장 정책을 세우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해당 지역을 노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크림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이 패하며 러시아 제국은 왈라키아 지역까지 확보하는데는 실패하고 만다.[8]


2.3. 근대 ~ 현대[편집]



2.3.1. 1859,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 시기를 거치며 그동안 반농반목이 중심이 되었던 왈라키아의 경제는 농업 위주로 개편되었으며 도로 인프라가 대거 확충되어 오스만 제국 지배 시기 잉여 식량이 남아돌아도 다른 지역으로 수출하지 못해서 썩히던 농산물들이 유럽 다른 국가들로 수출되기 시작했다. 또한 루마니아인들은 근현대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자국 내 오스만 제국 및 그리스 문화의 요소들을 점진적으로 제거 혹은 정제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거치며 루마니아는 근대 국민 국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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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몰다비아의 경우 프루트 강 동쪽 절반은 베사라비아라는 이름으로 러시아 제국소련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국 몰도바우크라이나의 일부가 되었다.[2] 웨일스, 콘월, 왈롱 등과 어원을 공유한다.[3] 현대 폴란드어이탈리아를 의미하는 브워히(Włochy)도 '발하즈'에서 유래한 고대 슬라브어 *volxъ가 어원이다.[4] 트란실바니아 공국은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이면서도 헝가리인의 자치 공국이었고 루마니아인은 농노 신분으로 살아있는게 겨우 용인되는 수준으로 천대를 받았다.[5] 유사 사례로 중세 말 폴란드 왕국의 갈리치아 지역에서도 곡물을 운송할 만한 인프라가 충분하지 않아서, 갈리치아 농민들이 소를 사육하여 폴란드 왕국 본토로 보내는 식으로 부역을 해결하였던 바 있다.[6] 이 지역은 고대에 이미 건설된 도로도 잘 굴러가는데다가 도로가 없는 곳에는 낙타를 활용하면 되기 때문이다.[7] 18~19세기 당시 오스만 제국은 인플레이션이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발칸 반도 지역의 인프라만 잘 정비했어도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타격이 확실히 줄었을 가능성이 높다.[8] 러시아 제국이 최종적으로 확보한 지역은 오늘날의 몰도바 일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