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태조 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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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태조 왕건 주인공 아이콘(왕건).png


파일:최수종왕건.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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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오프닝왕건1.jpg


파일:오프닝왕건2.jpg

극중 왕건의 모습[복식][오프닝1][오프닝2]

1. 개요
2. 극중 행적
2.1. 출생과 성장
2.2. 본격적인 출사
2.3. 고려 건국
2.4. 시련을 이겨내고 대업을 이루다
2.5. 번외: 제국의 아침에서의 최후
3. 평가
3.1. 캐스팅 평가
3.2. 작중 인물들의 평가 및 캐릭터 특성
3.3. 페이크 주인공?
3.4. 한계
4. 인간관계
4.6. 부용[1]
5. 주요 대사
6. 기타



1. 개요[편집]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의 주인공. 배우는 최수종(성인기), 오현철(청소년기). 제국의 아침에서는 이문수.


2. 극중 행적[편집]



2.1. 출생과 성장[편집]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그려진 왕건의 출생과 성장은 앞으로 후삼국시대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또한 대립하게 되는 인물인 궁예는 물론 견훤과도 기이한 인연이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궁예와의 인연은 기이할 정도로 각별하게 묘사된다. 신라군에게 쫓기며 송악 인근 세달사의 범교 스님에게로 가고 있던 궁예와 그의 유모가 왕륭의 도움을 받았을 때, 장기간의 추격으로 몸이 상한 궁예의 유모가 숨을 거두는 날 왕건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왕륭은 동생 왕평달을 시켜 왕건의 출생을 알리며 세달사에 제를 올리라고 하였고, 범교 스님에게 궁예를 인도해 준 것도 왕륭이었다.[2]

도선대사의 예언을 믿은 왕륭은 왕건에게 엘리트 교육을 시키는데, 어린 왕건의 언급으로 보아 중국, 일본, 베트남에도 가 보았고, 이동하다가 해적과 마주치기도 하는 등 온갖 경험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왕륭은 인재가 가장 중요하다고 자주 언급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늠름한 10대로 성장한 왕건은 부친인 왕륭을 따라 서라벌로 가던 도중, 스스로를 장군이라 칭하는 마석두라는 이름의 산적 두목과 그 패거리들을 만나게 된다. 일행 중 선종(궁예)과 종간 두 승려의 활약[3]에도 수세에 몰렸으나, 한 무리의 신라 군사들을 거느린 대장이 나타나 마석두를 한 칼에 베어 버리고 왕건 일행을 구해준다. 다들 알겠지만 이 때에 왕건 일행을 지킨 스님 중 한 명인 선종 스님은 다름 아닌 궁예이고, 당시 신라 군사들의 대장은 바로 각간 위홍의 부관이던 견훤이었다.
이는 비록 작중의 창작이 가미되어 있지만 꽤 의미심장한 만남인 셈이다. 이후 왕건은 서라벌에 온 뒤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위홍에게 확인하러 왔던 궁예와 이를 막아서는 견훤이 서로 대등하게 겨루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왕건이 더 자라서 청년이 되고 나서는 도선 대사의 부탁에 따라 젊은 경보 대사를 당나라에 보내 주고, 그 이후 도선비기를 걸어다니는 스포일러 도선 대사에게 받게 되면서 왕건은 명실공히 도선대사가 말한 예언의 주인공이 된다. 도선비기를 읽으며 도선 대사의 뜻을 깨닫고 난 뒤 아버지 왕륭이 송악을 궁예에게 넘겨주려는 의도를 정확히 알아맞췄고, 아버지로부터 가문의 가주가 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후 아버지를 따라가 궁예를 알현하였을 때, 옛 일을 기억하고 있던 궁예의 환대를 받는다.

왕건은 아버지 왕륭의 뜻을 이어받아 2대에 걸쳐 궁예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가산을 거의 탕진해 가며 송악에 궁성을 지어 궁예에게 바쳤고, 이 과정에서 유금필, 능산, 박술희와 결의 형제[4]를 맺은 뒤 주군으로 삼는 일과 궁예의 명령에 따라 금성(현 김화군 금성면, 북한령 금성군) 태수로 가 있던 아버지 왕륭의 죽음과 스승 도선대사의 입적을 거의 비슷한 시기에 겪는다.[5] 비록 이 일로 인해 가산을 모두 탈탈 털었으나 숙부 왕평달과 사촌 아우들인 왕식렴, 왕신 형제가 나중에 다시금 가산을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성장하는 중 강 장자의 딸인 연화(강비의 드라마 속 이름)를 사랑하게 되고 정혼 이야기까지 오가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에 의해 정혼은 유야무야되고 종간과 강장자 사이의 이해 관계[6]가 맞아떨어지며 연화가 궁예의 비가 되었고, 첫사랑에 실패했다.

훗날 강 장자가 권력욕에 취해 나대가다 궁예에게 찍혀 결국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걸 보자면 결과적으로 왕륭이 연화와의 정혼을 막은건 정치적으로 옳은 선택이긴 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왕건에게 큰 트라우마가 되었고, 이십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왕건은 업무에만 집중할 뿐 장가는 커녕 여인에게 관심하나 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냥 정혼이 파혼된 수준을 넘어서 무기력하게 연화를 빼앗겼을 뿐더러, 연화가 멘탈 붕괴하는데도 왕건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어떤 변명도 하지 못한채 그저 연화를 달랠 수 밖에 없었다. 거기다 종간은 일부러 왕건에게 연화의 혼례를 주도하게 하는 잔혹한 일까지 시킨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국사에 손꼽히는 하렘 마스터가 된다.

이후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왕건의 미래가 창창하다는 걸 알아본 송악 근처의 정주(현 개풍군)의 호족 유장자(유천궁)는 왕건이 주도하는 금성 공략에 온갖 지원[7] 등을 아끼지 않았고, 심지어 외동딸(고려 태조의 첫 황후가 되는 신혜황후 유씨)로 하여금 왕건의 하녀 역할을 하게 한다. 그러나 연화에 대한 트라우마와 그에 대한 반동으로 워커홀릭스러운 모습만 보이며 왕건은 유장자의 집(정주에서 함선 제작이 이루어지므로)에서 반년이 넘게 머물면서 업무에 신경쓸 뿐 유장자의 부탁도 다 물리고, 유장자의 딸에겐 관심하나 주지 않았고, 결국 나주 공략이 실현되기 직전인 상황에서, 유장자는 최후의 수단으로서, 왕건에게 독주를 먹여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음 딸에게 시침을 들게 만들어 결국 왕건이 자신의 딸을 받아들이게 만든다(55화 후반부 내용). 이때 정신이 혼미한 왕건의 눈에 유장자의 딸이 연화로 보이게 연출되어 왕건의 트라우마가 어떠한지를 다시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2.2. 본격적인 출사[편집]


왕건은 궁예가 송악으로 천도한 뒤 궁예 휘하의 장군으로 활약하게 되었고, 진작부터 왕건을 높이 사던 궁예의 제의로 결의 형제를 맺게 된다. 궁예의 영토 확장 과정에 있어 왕건은 다른 장군과는 달리 특유의 인화력으로 호족들을 잘 다루며 충주의 유긍달[8]은 물론이고 중립을 표방하며 아들 견훤과도 거리를 두던 사벌주의 호족인 아자개 등 들르는 지역의 호족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후 궁예의 순행에 따라나서며 궁예가 가진 제국의 꿈을 같이 이루기로 하고, 제국의 세력을 확장시키고자 획기적인 계책이 필요하다는 궁예의 과제를 해결하고자 나주(당시 금성)를 침공하기로 한다.

이십대 후반이 되도록 장가를 들지 않던 왕건은 나주 침공을 계획하고 성공시키는 과정에서 부인 둘을[9] 얻게 되는데, 오래 전부터 유장자가 자신의 딸과 장가를 들라는 요구를 받아 왔지만 이를 한동안 거절했다가. 술에 만취시켜 놓고 딸이 밤시중을 들도록 만든 유장자의 행동으로 결국 장래를 약속하게 되어 첫째 부인으로 삼고, 나주 침공 시 결탁하기 위해 만났던 나주의 호족 오다련의 딸과도 결혼하게 된다. 어째 이 대목도 삼국지에서 유비가 감부인과 결혼한 뒤, 미축의 여동생 미부인과 또 결혼한 대목과 좀 비슷하다. 여담으로 이 때 소식을 들은 궁예는 '아니,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라며 놀라는 척을 해서 심각한 문제인 줄 알고 종간을 비롯한 신하들이 긴장하자 곧 웃음을 터뜨리며 '왕건 아우가 혼인을 한다는구려!'라고 말하는 장난을 쳤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충주 전선에서 후백제와 대치했을 때 죽령, 조령 전투에서 큰 도움을 얻은 유긍달의 딸을 세 번째 부인으로 삼는다.[10] 오랜 동안 거절해 오다 첫 번째 부인과의 정혼을 약속한 뒤, 궁예의 명령을 받아 세 번째 부인을 얻게 되기까지의 모습은 왕건이 여난 때문에 쩔쩔매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대목 중 하나.

이후로도 궁예의 명에 의해 북벌 총사령관을 맡았다가 다시 위기에 처한 나주를 구하러 떠나는 등 여러 곳의 전장을 오가게 되면서 작게는 공산 전투부터 훗날 후삼국의 통일까지 함께 하는 장군들을 여럿 만나게 되었고,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둔다. 특히 두 번째로 묘사된 나주 공방전에서는 군사 태평의 계절 변화를 읽은 계책으로 거의 불가능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적장 수달까지 잡는 등 엄청난 전과를 이루었다. 마진 - 태봉의 이름을 내건 여러 전장에서 사실상 궁예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 역할을 한 것. 당연히 왕건의 직책 역시 대장군, 도독 등으로 올라가다가 나중에는 최고 벼슬인 시중까지 올라가게 된다. 한편으로 충주에 있을 때 진표 율사의 제자인 석총 대사에게 간자를 받으면서 왕건은 다시금 예언의 인물임을 인증받게 된다.

이처럼 왕건은 송악의 군주였을 때 뿐만 아니라 궁예의 조정에서도 타고난 인덕으로 젊은 장수들부터 원로들까지 원만한 인간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충성심도 남달라서 자신의 의형이자 주군인 궁예가 피습을 받은 뒤 미륵 관심법을 내세우며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 와중에도 변함 없는 충성심을 유지하던 몇 안 되는 궁예의 측근들 중 한 명이었다. 작중에서 궁예의 측근에 있으며 이 정도의 절대적 충성심과 뛰어난 능력을 항상 유지하던 것은 왕건을 제외하면 종간은부 정도에 불과하다.종간과 은부는 왕건을 경계해 적대적인 시기가 태봉 멸망까지 길어서 미묘하지만.

(정무 보고를 하기 위해 왕건과 종간이 함께 대전에 든다. 궁예는 이미 환각으로 인사불성 상태.)

종간 : 폐하, 신 종간이옵니다. 어이 된 일이시옵니까?

궁예 : (뒤돌아 본다. 비틀대며)너희들은... 너희들은 누구인가? 석총이가 아닌가? 아니... 아지태인가?

종간 : 폐하, 신 종간이옵니다. 고정하시오소서, 폐하.

궁예 : 석총이가 아니라...? 아지태도 아니고?

(바라보다가 비로소 정신이 든다)

궁예 : 오호... 그렇구만. 아우가 아닌가? ...사형도 오셨구려.[11]


부당한 궁예의 명령이나 심해지는 철원의 참상을 보고 예하 장수들이 반발하고 궁예를 나쁘게 말하거나, 잊을 만 하면 송악 또는 도선 대사의 예언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왕건 자신은 그 불만이나 예언에 대한 대한 이야기들을 지속적으로 억눌러 왔으며, 주변 거의 모든 사람의 반발을 일축해 가면서까지 고집스럽게 충성을 논하고 황명을 받들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작은 아버지 왕평달이나 자신을 길러 준 사부들이 주위의 참소를 받아 유배를 가는 일도 있었지만[12], 왕건의 충성심은 변화가 없었다. 석총대사에게 받은 간자에 대해서조차 폐하에게 보고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할 정도였으니[13] 보는 사람이 답답할 정도.

심지어 강비와 두 태자를 죽이고 난 뒤 궁예가 쓴 관심법 앞에서도 끝까지 인정하고 충성하는 모습[14]을 보여 줄 정도로 한결같은 마음을 유지하였으나 아지태의 만행. 임춘길의 거듭된 참소, 종간과 은부 등의 모함, 형미 대사의 죽음 등으로 왕건은 점점 흔들리게 된다.

결국 궁예의 관심법과 그 뒤에 이어진 일들로 변함없는 충성을 맹세하던 왕건은 크게 흔들리게 되었으며, 이른바 '4기장'이라 불리는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이 주도한 역성혁명 모의에 대해서도 수없이 거절했지만[15], 이 과정을 몰래 듣고 있던 부인 유씨가 내 온 갑옷을 입음으로써 수락하여 혁명 세력의 우두머리로 추대되고, 훈련을 빙자해 도성 가까이까지 주둔했던 혁명군의 움직임과 내군 부장 장일 및 원봉성령 최응까지 따르게 된 역성혁명은 수월하게 성공하여 왕건이 황제의 위에 오른다.

이 와중에도 왕건은 혁명을 수락하는 대신 궁예를 죽이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고 실제로도 명성산으로 도망친 궁예를 발견한 뒤 직접 가서 궁예를 편한 곳에 모시려고 했지만, 궁예는 이미 왕건과의 마지막 만남 이전에 죽음을 택하기로 결정하고,[16] 왕건에게 자신이 했던 잘못을 반복하지 말고 성군이 되라며 뒷일을 부탁한 뒤 왕건과 마지막 만남을 가지기 전에 이미 어검으로 은부에게 자신을 죽이도록 명하였기 때문에 왕건의 오열 속에서 궁예는 그대로 죽게 된다.


2.3. 고려 건국[편집]


왕건은 역성 혁명을 통해 황제가 되어 고려를 건국한다. 그러나 재위 초반에는 남아 있는 친 궁예 세력으로 인해 곤란을 겪게 된다. 환선길의 반란 시도는 장수들과 왕건 본인의 기지로 넘겼고[17] 가장 큰 위험 세력이었던 명주의 김순식은 부친이 되는 허월대사가 설득해 반란을 막았으며 선장 및 임춘길의 반역은 군대를 보내 진압했다. 그러나 이흔암의 암살 시도 시에는 독화살에 내군의 장일 부장을 잃기도 하는 등, 즉위 초반 궁예를 추종하는 잔존 세력들의 문제로 크고 작은 곤란은 계속되었다. 이런 내부 사정들이 어느 정도 정리된 다음 팔관회를 열어 철원의 원혼들과 백성들을 위로한 뒤, 고향인 송악으로 도읍을 다시 옮긴다.

한편으로는 집안 문제도 부각되었는데[18] 적장자 문제로 인해 부인들을 둘러싸고 다툼이 일어나고[19] 조정도 분열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자 빠르게 이 문제를 봉합해야만 한다는 최응의 진언을 받아들여, 장인 오다련과 유긍달 등의 벼슬을 빼앗고 고향의 향리로 보내버렸고, 그 외 패서 출신의 원로들 역시 서경(현재의 평양)으로 사민하는 등 신하들과 왕실 내부에 무언의 경고를 보냈다.[20] 이 과정에서 충주 부인 유씨 소생의 아들을 병으로 잃기도 했다. 그리고 아자개에게 천년 묵은 산삼을 보내 상주를 차지하게 되나 그로 인해 병환 중이었던 신혜 왕후가 피접을 선택하며 이별을 하게 된다.[21] 이렇게 어느 정도 국내 문제들을 정리하고 난 뒤 태자 무(훗날의 고려 혜종)를 정윤으로 세우고, 나주 부인 오씨를 황후로 책봉하는 등 후계를 안정시킨 다음[22] 비로소 본격적으로 후백제와의 싸움을 벌이지만 조물성 전투와 실제 역사상 왕건의 최대 패배로 일컬어지는 공산 전투, 그리고 삼년산성 전투까지는 연이어 불리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조물성 전투에서 왕건은 돌림병으로 그간 의지했던 군사 태평을 잃었고 죽어가는 장졸들을 살리기 위해 견훤과 화의를 맺기로 한다.[23] 왕건은 견훤에게 군례를 올려 형제 관계를 감수하고, 일시적으로 신라와의 국교를 끊어야 했으며 사촌 동생 왕신을 볼모로 보내야 했다. 그러나 볼모로 주고받은 진호의 죽음[24] 과 이를 들은 왕신의 자결로 인해 후백제와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나빠졌고, 그 이후 서라벌을 침공한 후백제군을 상대하려다가 공산 주변의 지리에 어두운 상태에서 전투를 무리하게 강행한 탓에 만 명 이상의 군사와 신숭겸, 김락을 비롯한 여덟 명의 공신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게 된다. 이 공산 전투는 고려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으며 왕건 자신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굴욕을[25] 주었다.

공산 전투 이후 벌어진 삼년산성 전투에서도 왕건과 그의 군대는 호족과 변방 장수들의 배신으로 위기를 맞아 유금필이 없었다면 죽었을 정도로 큰 위기에 빠졌다. 다행히 유금필의 맹활약으로 최악의 상황은 면했지만 연이은 패전에 좌절감과 무력감 자괴감에 괴로워하다가 각혈을 하며 쓰러졌고, 삼년산성 전투에서 돌아온 뒤 일체 밖에 나오지 않으며 홀로 분을 삭이다가 그 분노가 배신한 호족들과 장수들에게 이르렀고, 사서의 기록대로 삼년산성 전투에서 고려를 배신하고 후백제로 투항한 호족의 가족들을 철퇴로 죽이라고[26] 명령하고 이들을 까마귀 밥이 되도록 하여 배신에 대해 철저하게 응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27]

그리고 절치부심 끝에 준비한, 지게 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한 고창 전투에서, 병력 규모는 적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적절한 전략 성공과 유금필, 삼태사들의 도움 및 활약으로 적병을 8천 명 이상 죽이는 큰 성과를 일궈냈다. 견훤 : 그 중에서도 전사자만 8천이야, 8천! 8천~! 8천! 이런...

2.4. 시련을 이겨내고 대업을 이루다[편집]


거듭된 패전에도 인내를 통해 힘을 기르고 최응 등의 의견을 통해 주위의 형세를 파악했던 왕건은 고창 전투에서의 승리로 드디어 삼한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룰 수 있는 기틀을 만든다. 고창 전투의 승리로 후백제와의 힘의 균형도 다시 고려 쪽이 우위에 서게 되었으며 여러 지역이 고려로 귀순했을 뿐만 아니라 경순왕의 초청을 받아 신라에 가서 신라의 병권을 이양받아 사실상 신라를 보호국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고창 전투와 운주 전투 사이의 과정도 아주 순탄치는 않았는데 신료들의 참소로 유금필을 유배 보내거나 최승우의 계책으로 인해 송악이 유린당하고 해군이 상당 기간 전투 불능 상태가 되기도 했고. 태평이 죽은 뒤 그 동안 왕건의 곁에서 책사 역할을 했던 최응마저 젊은 나이에 손쓸 수 없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등 여러 가지 환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후백제가 무리하게 벌인 운주 전투에서 후백제는 견훤의 등창과 지리멸렬한 병력 운용으로 운주가 가까이에 있었음에도 제대로 싸울 만한 대비를 갖추지 못했던 반면 왕건은 남천의 호족 서목과 나주 탈환 때 활약했던 전의 성주 이치의 협조로 인해 상대적으로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대승을 거두며 후백제와의 싸움에서 확실한 우위에 선다.

이처럼 후백제와는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며 강경 일변도의 전략을 쓴 반면 신라에게는 답답할 정도로 유화 정책을 벌인다.햇볕정책의 원조이자 끝판왕일듯 나라를 들어 바치겠다면서 경순왕이 사신을 보내도 이를 들어주지 않고 열심히 나라를 살려 보라는 식으로 돌려보낸 것. 물론 천년의 사직을 가진 신라에 대한 백성들의 희망과 바람. 그리고 이미 이름 뿐인 나라를 받아 봤자 실익이 없다는 정치적 판단 등에서 나온 용인술이기는 하지만, 나라를 들어바치겠다고 사신을 보내고 신하들이 모두 윤허하라는 말을 함에도 불구하고 이웃임을 강조하며 인덕을 내세운다는 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후백제에 대해서도 최응이 죽으면서 남긴 상소문에 따라 옥룡사의 경보 대사에게 지속적으로 사람을 보내기 시작한다.

신검쿠데타를 일으킬 당시에 견훤은 악몽을 꾸는데 꿈에서 왕건이 견훤을 꾸짖고서는 칼로 목을 베어버리려고 한다. 평소 왕건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꿈 속의 왕건은 아주 포악한 모습을 보이는데 평소 "상보 어르신"이라 깍듯이 존대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여기서는 "늙은이"라 부르며 겁박을 한다. 꿈이라 그런지 견훤 역시 평소의 호방하고 담대한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왕건에게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데꿀멍하는 모습을 보인다. 왕건에게 베일 때 깨어난 견훤은 밖의 시끄러운 소리는 군사들이 훈련하느라 내는 것이라는 거짓 보고를 받고서는 다시 잠자리에 드는데 이번에는 왕건이 자기 의형제들과 배현경, 홍유, 복지겸을 이끌고 나타나 견훤의 목을 베려고 덤벼드는 더욱 무시무시한 악몽을 꾼다.[28]

이후 신검이 견훤을 폐위시키자 그 동안 지속적으로 사람을 보냈던 옥룡사의 경보 대사를 움직이고 아자개의 서찰을 전하도록 하는 등의 술책으로 견훤을 고려에 망명하도록 했고, 오랜 동안 사양했던 경순왕의 귀부도 받아들여 신라를 병합한다. 그리고 일리천 전투에서 패륜을 저지른 아들들에게 복수심을 불태운 견훤을 내세워 후백제의 병력들을 완전히 붕괴시킨 뒤 후백제의 병력들을 한 발 앞질러 포위해 항복하도록 하여 승리를 거두고, 후백제의 황권을 찬탈했던 역신들과 견훤의 아들들을 모두 제거하며 도선 대사의 예언이었던 삼한 통일의 대업을 이루게 된다.


2.5. 번외: 제국의 아침에서의 최후[편집]


"참으로... 인생이란... 덧...덧없는 것이다... 덧없는.. 것이다..."

작중 왕건의 유언


태조 왕건. 그가 황제에 오른지 26년, 그리고 그의 나이 예순 일곱에 그는 눈을 감았다. 그의 마지막 말은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참으로 인생이란 덧없다는 것이다."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아왔던, 삼한통일의 대영웅이 남긴 마지막 말이라고는 너무도 회한어린 자주적 표현이었던 것이다.[29]

왕건 사후 나레이션


태조 왕건 후속작에 해당하는 제국의 아침 1화에서는 일리천 전투 이후 세월이 흘러 7년이 지난 시점 지극한 나이를 먹은 가운데 병이 악화되어 임종을 앞두고 있었다. 배우는 이문수(배우). 아내들과 신료들은 후계 문제로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고, 명을 받고 백두산으로 떠났던 요와 소를 기다리며 사망하기 전 2화 꿈 속에서 과거 궁예와 마지막으로 마주한 자리에서 나눈 대화와 후백제 정벌 후 견훤이 분노 속에 신검 일파를 죽이라 일갈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린다.

이후 깨어난 뒤 꿈 속의 일들을 말하며 정말 자신이 갈 때가 된 것 같다고 중얼거린 뒤, 박술희를 불러 훈요 10조를 쓰게했다. 통일 이전,이후의 세월의 흐름 속에서 회한이라도 느꼈던 듯 인생은 참으로 허망하기 그지없다는 식의 한탄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난다. 애통해 하는 황태자 와 신료들,부인들.돌아가시고 나서야 겨우 달려온 의 절규. 이것이 제국의 아침의 서사의 신호탄이 되며, 혜종과 정종이 이후 병이 악화되어 죽기 전 꿈에 나타나 저승으로 오라고 손짓하기도 했고, 최종화(94화)에서는 강박적으로 숙청을 계속해 균여 대사마저 처형하려는 광종의 꿈 속에 나타나 그를 꾸짖는 것으로 재등장해서 퇴장하기도 했다.

3. 평가[편집]



3.1. 캐스팅 평가[편집]


당시 태조 왕건의 방송 전에 최수종의 캐스팅을 두고 사극의 주인공으로는 맞지 않을 거라는 평이 많았다. 물론 최수종은 신체적 능력이 매우 좋은 연기자 중 한 명이지만 그 동안의 연기 경력에서 최수종의 이미지는 눈 크고 겁 많은 부잣집 도련님 수준[30]이었고, 사극 경력도 조선왕조 오백년사도세자철종같은, 카리스마와는 거리가 먼 역할들이었다.[31] 사극에서 전란의 시기를 그리는, 그것도 장군부터 시작해 황제가 되는 왕건 같은 인물을 맡는 것은 어렵지 않느냐 하는 말도 많았다. 물론 실제 역사상 왕건도 실전으로 잔뼈가 굵은 장군보다는 온화한 이미지의 부잣집 도련님에 가까웠으니 오히려 이쪽이 고증에 맞다는 주장도 방영 당시에 있었지만, 당시 최수종 외에 물망에 오른 배우 가운데 한 명이 그 유명한 용의 눈물의 주인공 유동근이기도 했으니...

그러나 당시 유동근은 용의 눈물에서 맡은 이방원의 이미지가 아직 너무 깊게 남기도 해서 최종적으로는 최수종이 캐스팅되었는데, 초반에는 우려대로 '눈만 초롱초롱해서 분위기가 영 겉돈다'는 부정적인 반응이 나왔다. 궁예와 견훤을 맡은 김영철과 서인석의 카리스마 연기에 비교되어 어딘지 유약한 청년기의 모습과 발성은 미스캐스팅 논란을 증폭시켰다. 노력하는 연기자답게 최수종은 선배인 김흥기와 임혁을 찾아가서 사극연기 개인지도도 받는 등 각고의 노력을 하였고,http://isplus.liv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005082 [32] 그 성과는 궁예에게 귀부한 직후 수염을 붙이자마자 최수종의 이미지는 단번에 180도 변침, 그의 연기력과 시너지효과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20대 초반의 젊은 시절부터 통일을 이루는 60대까지의 왕건 역할을 아주 잘 소화해 내며 주인공이자 황제로서의 포스를 유감 없이 드러낸 최수종은 이 후에도 해신, 대조영 등을 비롯한 각종 사극물에서 주인공이나 군주의 자리를 꿰차게 되면서 사극왕 최수종으로 우뚝 서게 된다.[33][34] 게다가 최수종은 인상 자체가 주인공인지라 샌님같을 줄 알았던 곱상한 얼굴이 알고보니 사극같은 곳에서 맹활약하는 그런 얼굴이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배우 중에 이토록 대놓고 얼굴에 주인공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얼굴의 소유자는 그리 많지 않다.

다만 당시 기사 내용을 보면 최수종이 원래 태조 왕건 후속으로 방영되었던 제국의 아침[35]에서도 왕건의 최후도 연기할 예정이다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출연하지 않고 배우 이문수가 대신 맡아서 퇴장했다.[36] 대신 죽기 직전의 회상에서 잠깐 나오고 역할이 끝났다.


3.2. 작중 인물들의 평가 및 캐릭터 특성[편집]


왕건에 대한 작중 인물들의 평가는 아래의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적과 동지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인품과 능력을 공히 인정받을 뿐만 아니라, 모두가 신뢰하는 인물.[37]

또한 왕건은 작중에서 다른 인물들과 형제 관계로 꽤 많이 엮이는 인물이기도 하다. 사촌 동생 왕식렴과 왕신 같은 직계 형제는 물론이고, 작중의 창작으로 의형제 관계가 된 유금필, 신숭겸, 박술희는 물론 궁예와 견훤과도 형제의 의를 맺었기 때문이다.

작중의 전반부 및 후반부를 관통하는 인물들인 궁예와 견훤과의 관계에서도 왕건은 두 사람 모두에게 극한의 인정과 신뢰를 받는 것으로 그려진다. 궁예는 먼저 형제의 의를 맺자고 했을 뿐만 아니라 병과 의심으로 정신이 망가지며 강비와 두 태자까지 죽이는 중에도 왕건만은 죽이지 않았고, 관심법조차 왕건을 구해 주기 위한 것이라 실토했으며, 마지막 순간에는 자신이 왕건을 언제든 죽일 수 있었으나 그렇지 않았던 것은 왕건이 자신보다 나은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견훤과는 조물성 전투에서 맺은 형제의 의를 기점으로 개인적인 교분이 생기며 견훤은 왕건을 '왕건 아우'라고 지칭하는 빈도가 점점 늘어나더니 금산사로 유폐된 뒤에는 왕건 아우가 아니면 삼한 통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대놓고 말하고, 나중에는 고려에 귀순함으로써 자신이 이룬 제국을 사실상 통째로 들어 바치게 된다.

물론 왕건 역시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활약할 때에는 무슨 말을 들어도 궁예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바쳤을 뿐만 아니라 혁명 세력이 자신을 황제로 추대하려는 것도 숱하게 거절했었고, 혁명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궁예를 끝까지 죽이지 않으려 했다. 또한 견훤에 대해서는 자신이 아우 대접을 받는 것을 감수하는 처지에 있었음에도 그를 대장부이자 영웅으로 높게 평가한 것은 물론, 정변이 발생해 그가 쫓겨나자 인간적인 측은함을 드러내며 상황이 이런 것이고 입지가 다른 것 뿐이지 사람이 미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런 인간적인 면모와 충성심은 적과 아군 모두에게 인정받았는데, 견훤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내며 끝까지 왕건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고 결국 궁예의 명령에 따라 화형을 선택해 죽은 수달조차도 왕건을 참다운 영웅이라고 인정했을 정도. 그리고 이러한 인간적인 면모는 견훤을 귀부시키는 원인이 된다.

후고구려 - 마진 - 태봉으로 계속 이름이 바뀌고, 군주가 타락하며 점점 위기로 치닫는 궁예의 조정에서도 변하지 않는 충성심과 어딜 가든 제 몫을 해내는 모습을 보인 것 때문에 왕건이라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퍼졌다. 사실 2차 나주 전투 이전부터 수하들은 물론 친척들이나 심지어 아지태까지 왕건에게 반역을 제의했으나, 왕건을 그걸 다 물리치고 오직 묵묵히 제 할일을 하며 국가에 충성을 다했다. 환선길이 삽질을 하던 충주 지역의 군대가 왕건으로 총사령관이 바뀌니 사기가 올랐다거나 하는 것을 보면 말단의 군대나 일반 백성들조차도 왕건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은 아주 잘 알 수 있다. 심지어 왕건을 소환하라는 명을 받고 수 차례 왕건의 집을 들락거렸던 내군 부장 장일이 나중엔 알아서 정보를 술술 불어주고 혁명 시 자발적으로 궁 내에서 내응하고 자기를 희생해 이흔암의 암살 시도로부터 지켜준 것이나, 지속적으로 명주를 차지했던 김순식이 왕건을 자발적으로 알현하며[38] 결국 충성을 맹세하는 일이나, 죽도록 싸웠던 최대의 적인 견훤조차 나중에는 왕건의 아래에 들어올 것을 자청하는 것을 보면 왕건은 가히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신뢰와 호평을 받고 있다.

물론 황위에 오르기 전의 왕건에게 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위험 인물로 보고 제거하려 했던 종간과 은부는 말할 것도 없고, 북벌의 망상을 이루고자 회유하였다가 회유에 실패하자 정적이 되며 죽음 직전의 순간까지 끝을 내어 왕건을 걸고 넘어진 아지태나 자신의 이득을 위해 왕건을 시기했던 강장자 같은 소인배들은 왕건을 싫어했으며, 임춘길은 백제의 첩자 도우의 꾀임과 자신의 영향력 강화를 위해 궁예 재위 때부터 왕건을 죽이려 했고 나중엔 그 스스로 일으킨 반란으로 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 중에 왕건의 인품과 능력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단 하나도 없었으며, 오히려 왕건의 인품과 능력을 경계했기 때문에 적이 된 것이다. 작중 최응과 종간의 대화[39] 에서도 나오지만, 지속적으로 왕건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기회를 봐서 줄곧 죽이려 했던 종간조차도 왕건의 능력과 충성심, 인품은 신뢰하고 있었다. 결국 태조 왕건 내에서, 황위에 오른 뒤의 왕건에게는 숙적은 있었으되 정적은 사실상 없었다.

유력 가문의 부잣집 도련님으로 자란데다가[40] 최수종의 이미지 때문에 겉으로는 부드럽고 유약한 부잣집 도련님처럼 보이는데다가, 우유부단한 인물로 보이지만, 뭔가 목표나 임무가 생기면 상당히 냉철하고 꼼꼼한 태도를 보인다. 가령 약혼녀 연화를 궁예에게 빼앗길 때는 연화에게 변명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유약한 모습만 보였지만, 그 와중에 양길이 쳐들어오고 어린 나이에 총 지휘를 맡게되자, 아까 그 유약한 도련님이 맞긴 한가 싶을 정도로 냉철하게 전장을 파악하고 효율적으로 군사를 지휘하여 양길군을 박살내버린다. 또한 역성 혁명으로 추대되었을땐 의리와 도리를 주장하며 거사 직전까지 참여를 거부하였으며, 참여 후에도 궁예의 목숨만은 보장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와는 별개로 왕건은 냉철하고 적극적인 태도로 역성 혁명을 주도한다. 고려 건국 후 태자를 정하는 문제에서도 왕건은 처음엔 너무나 이르다는 태도를 보였고 최응의 간언에 "글쎄..."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신하들의 대립이 격화되자 왕건은 빠르게 태자를 정하고 철저하게 주변정리를 하여 더이상 잡음이 나오지 않게 한다.

왕건을 연기한 최수종은, 왕건이라는 캐릭터를 '차례를 기다릴 줄 아는 인물이자, 커다란 목표를 위해 자신의 정도를 지켜나가는 절도있는 '사나이'라고 평가했다.

태조 왕건 곳곳에서 묘사된 왕건의 모습은 완성형 군주이자 한 왕조의 창업자에 어울리는 이상적인 인품과 능력을 창작을 가미해 조화시키면 어느 정도까지 극대화시킬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였고, 결국 이런 능력에 기반한 후한 작중 평가는 왕건을 돋보이게 하며 삼한 통일로 이끌었다.

다만, 같은 이환경 작가의 소설판에서는 성인군자와는 거리가 먼, 완전히 다른 인물이라고 보아도 좋다. 고우영 삼국지에서 유비를 하라구로이자 기회주의자, 야심가로 묘사한 바와 거의 흡사할 정도. "천하를 얻으려면 간악해져야 한다"는 도선 대사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강비를 정치적 함정으로 유인하질 않나,[41] 정혼녀를 빼앗은 궁예에게 마음속으로 '내가 대신 그대로부터 천하를 훔치리라' 하고 다짐하질 않나, 조정이 시끄러우면 병을 핑계로 출근하지 않고, 궁예가 자객의 습격을 받자 이를 뒤에서 주도한 유금필 등에게 일이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라며 타박을 놓지 않나, 게다가 적절한 명분이 만들어질 때까지 일부러 인의와 충성을 과장되게 내세우며 4기장에게까지 속내를 숨기는 등 가히 정사 삼국지유비조조를 연상케 하는 효웅의 면모를 보인다. 드라마에서의 성인군자와 같은 모습에 익숙한 시청자들로서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캐릭터가 다르다.[42]

3.3. 페이크 주인공?[편집]


태조 왕건이 방영된지 훨씬 지난 뒤에도 회자될 만큼 사랑을 받은 드라마이지만 임팩트 있는 장면들을 장식하는 것은 왕건보다 궁예견훤이 더 많다 보니[43] 드라마는 태조 왕건인데 진 주인공은 궁예와 견훤이 아니냐는 소리가 지금까지도 들린다. 일각에선 아예 태조 궁예, 태조 견훤이라고 장난삼아 말하기도... 역사적으로 왕건이라는 인물은 원래 무장형 군주 보다는 성장형, 만능형 군주로 그려졌고 드라마에서도 큰 틀에서 이 기조를 그대로 반영했기 때문에, 왕건 역을 맡은 최수종의 연기는 언뜻 보기엔 궁예와 견훤 역으로 열연한 김영철과 서인석의 포스에 약간 밀리는 감이 있어 보인다. 왕족 혈통을 타고났지만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내며 스님으로 성장해 국가를 세우고 타락하여 몰락한 궁예, 10대 청소년 시기에 스스로 서라벌에 가 하급 군졸로 시작하여 국가를 세우고 후계자 인선에 실책을 저질러 폐위당하고 얼마 전까지 적국이던 고려에 망명하여 스스로 선봉이 되어 자신이 일으킨 나라를 자신이 끝내버린 견훤의 일생과 비교하면 왕건의 일생은 비교적 심심해보이기 때문이다.[44] 심지어 캐릭터가 너무 가식적이라는 평까지 듣고말았다.

그러나 견훤, 궁예보다 강렬한 인상은 덜한 편이었어도, 극중의 대사나 배우 최수종의 연기는 이상적인 주인공이자 군주에 맞는 인덕을 갖춘 '왕건'이라는 선량하고 결백하면서도, 나아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한 시대의 영웅 캐릭터를 설득력 있게 묘사해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근래 몇몇 사극이 자주 일으키는 문제처럼 견훤과 궁예가 그저 막무가내로 악마화 되거나 미화가 지나친 것도 아니었고, 왕건 역시 어떤 이들이든 끝까지 인덕으로 대하는 모습을 그리면서 적당히 주인공 보정을 넣어 준 셈이라 드라마 전체적으로 보면 왕건의 결백하고 인덕을 갖춘 영웅다움이 설득력을 갖추면서도 빛날 수 있었다.

따져 보면 도드라지지 않을 뿐이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는 것들을 포함한다 해도 왕건 역시 주인공으로서 주인공 보정의 수혜를 입은 인물이다. 왕건이 출사한 이후 호족간의 세력 다툼이나 왕건 주변 인물간의 관계[45]가 생략되다 보니 궁예를 섬길 때에는 혁명 전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충성을 바쳤던 충신으로서의 의미가 역사적 사실보다 훨씬 더 강조되었고, 혁명으로 제위에 오른 뒤에는 폐주 궁예를 비롯해 임춘길 같이 자신을 몇 번이고 참소해 죽이려 했거나, 반란을 일으켰던 자들에 대해서도 가급적 죽이지 않으려 하였으며, 전장에서도 자신의 안위를 염려하기보다 자신 대신 죽어간 충신들을 애통해하거나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인덕에 대한 부분도 역사적 사실보다 훨씬 더 강조되었다.

또한 역성 혁명 이후 정략 결혼으로 인한 수난 및 그로 인해 있을 법한 궁중 암투는 초반에 맞은 세 부인들을 제외한 나머지 부인들을 거의 모두 엑스트라 취급하는 등의 방법으로 대폭 축소되거나 거의 모두 제거되어, 결과적으로 왕건의 이미지는 황제가 된 이후에도 황제 이전의 이미지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왕건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주인공 보정을 넣어 주지 않은 것도 아닌 게, 부하 장수들 두세 명이 덤벼도 쩔쩔 매던 수달과 일기토를 벌여서 수달이 칼을 놓치게 하는 장면을 보여 줘 무력으로 띄워 주기도 했으며 공산 전투에서 견훤군에게 포위를 당했을때도 상당한 무예를 선보인다. 애술과 맞붙어서 팔을 베어 상처를 입힌후 패배시켰고 견훤에게는 무예가 뛰어나다는 말은 들었지만 보는건 처음이라는말을 듣기도 했다. 또한 삼년 산성에서 신검군에게 기습을 당했을때도 역시 뛰어난 무예 실력을 보여주며 김총을 감탄게 했다. 김총은 왕건과 맞붙었으나 가슴에 부상을 입으며 패배한다. 이 모습을 지켜본 신덕은 무서운 실력이라고 말하며 대단한 무예라 칭하며 놀란다.[46] 견훤이 왕건의 무예가 뛰어나다는말을 들었다는것과 신덕의 대단한 무예라는 말. 김총의 소문이 헛소문이 아니구나 고려왕의 무예가 저렇게 높다니라고 말한걸로 봐서는 역시 드라마의 주인공답게 무예 실력 또한 범상치 않다라는것을 알 수 있다.

3.4. 한계[편집]


물론 태조 왕건에서 단순히 왕건이 군주로서 완전무결한 모습만 보여준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에는 철이 없음을 감안해도 서라벌로 가는 배를 타고 갈 때 자신의 능력을 뽐내려고 선장의 지위를 일시적으로 빼앗아서 아버지 왕륭에게 꾸중을 듣기도 했으며, 고려를 건국한 뒤에는 신하들을 책망하고 적장자 문제로 조정을 어지럽게 하는 장인들을 향리로 보내버리는 일도 있었고, 천년묵은 지초를 황후가 아닌 아자개에게 고집스럽게 사용하게 한 점도 있고, 최응의 만류를 무시하여 신라 구원을 고집했다가 여덞 명의 장수들이 희생당하며 혼자만 간신히 살아남은 공산 전투가 있으며, 유금필을 편애하여 유금필이 신하들의 미움을 사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또한 작중에서 미화 없이 정사 그대로 묘사된 왕건의 대표적인 어두운 면모로서, 삼년산성 전투에서 자신을 배신하고 후백제로 투항한 호족들 본인뿐만 아니라 그 친족들, 심지어는 마지막 남은 열 살도 안 된 철모르는 소녀까지도 철퇴로 때려 죽이라고 명령하며 연좌제를 행사한 사례도 있었다.[47] 특히 이 삼년산성 연좌제 건은 아무리 겨레의 위인으로 칭송받는 왕건이라지만 결국 그 역시도 연좌제 문화가 당연시되던 당시의 시대를 살다 간 인물에 불과하다는 명확한 한계점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마지막화에서 폐기된 각본에는 견훤의 간청을 들어 신검을 살려주려고 했지만, 이후 생각을 바꿔 그냥 죽여버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실제 에피소드에서는 살짝 지나간 신검의 처형 장면은 태조 왕건에서 가장 마지막에 촬영한 장면이며, 다큐멘터리에서는 이 장면 직후 쫑파티를 하는 모습이 나왔다. 현실보다 훨씬 미화된 모습들을 보여주면서도 인간적인 허점이나 일부분 감정에 치우친 면모들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태조 왕건에서 최수종의 연기가 뛰어난 연기력을 바탕으로 창작과 사실 사이에서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


4. 인간관계[편집]



4.1. 왕륭[편집]


태어나기 전부터 왕건이 제왕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걸 알고서 어릴 때부터 제왕이 되기 위한 문무를 모두 겸비하도록 교육시키며 가진 재산을 모두 궁예에게 바치면서 왕건이 정계에 입문해 경력과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해줬다. 하지만 자신의 첫사랑과의 정혼을 무산시켜버리며[48] 아직 어리던 왕건의 마음에 트라우마를 심어 왕건이 오랫동안 여자와 인연이 없게 만들기도 했다.


4.2. 도선대사[편집]




4.3. 궁예[편집]


어릴 때부터의 인연으로 시작하여 후고구려를 함께 개국한, 서로 굳게 신뢰하는 군신관계이자 의형제였다. 하지만 후일 궁예가 폭군으로 타락해가며 서서히 어긋나기 시작하지만, 그럼에도 왕건은 궁예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버리지 못하였고 완전히 미쳐서 피바람을 일으키던 궁예도 왕건에게 여전한 신뢰와 우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 군신관계도 결국 궁예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넘을 느낀 왕건이 부득이하게 역성혁명을 일으키며 완전히 끝나버린다. 그럼에도 뒤늦게나마 정신차린 궁예는 왕건에게 뒷일을 기약하고 스스로 죽으며 왕건의 앞길을 열어준다.


4.4. 견훤[편집]


왕건이 새로운 지도자가 된 후 초반에는 축서를 보내주고, 2차 조물성 전투에서는 의형제 관계를 맺는 등 비록 맞수였지만 그럭저럭 우호적인 관계였지만 서로 교환한 인질들의 교살을 기점으로 완전히 틀어진다. 판세가 왕건에게 유리해지는 상황에서 신검이 자신의 처지에 분노와 불만으로 반기를 들어 견훤을 몰아내고, 견훤이 고려에 귀순하자 상부로 모시며 다시금 우호적으로 대하였으며, 견훤이 직접 후백제를 멸망시키자 이미 고려에 나라를 바친 신라와 후백제를 흡수하여 삼국을 통일한다.
비록 적수였으나 서로 인간적으로 서로를 인정해주고 서로에게 호감이 있었던 듯하다.


4.5. 종간[편집]


내부의 적으로 한때는 나름대로 잘 지내보려고 했지만 종간이 유일하게 따르는 주인은 오직 궁예뿐이었으므로, 태생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사이였다. 결국 왕건이 역성혁명을 일으키자 종간은 스스로 죽음을 택하며 왕건에게 궁예의 마지막에 예우를 다할 것을 요청한다. 왕건은 그가 나라를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목을 효수했지만 청렴한 사람이었다며 능력과 인품은 인정해줬다.

4.6. 부용[49][편집]



4.7. 유금필[편집]


왕건이 가장 총애하는 덕장. 왕건 휘하의 4번 타자.


4.8. 태평[편집]


유금필 휘하의 부하로서 낭장 신분으로 처음 왕건의 눈에 띄었다. 그러나 조물성 전투 중 고려군은 전염병 치료제가 없었기 때문에, 전염병 발병 이후 이틀 내에 죽는다고 하여 사망한다.


4.9. 최응[편집]


14살의 나이로 궁예의 조정에 들어와 궁예에게 신동, 성인 대우를 받으며, 궁예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반역죄로 누명을 쓰게 되어 사형당할 위기에 처한 왕건에게 붓을 바닥에 떨어트리는 기지를 발휘해 왕건을 살려나게 해준, 왕건에게 있어서는 생명의 은인.[50] 그리고 왕건이 즉위 후 최응이 35살의 나이로 요절[51]하기 전까지 절대적인 믿음을 보였던 참모이자 군사.


5. 주요 대사[편집]


왕건의 캐릭터가 캐릭터이다 보니 왕건의 대사들은 보통 군자의 도를 말하거나, 충성을 논하거나, 앞서 유명을 달리한 충신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등의 대사들이 많다. 아래는 그 대사들 중 일부.

(왕건) : 나와 폐하는 결의를 한 사이일세. 형이 잠시 고단하고 병들었다고 해서 아우보고 버리라. 이 말인가? 그건 어디서 배운 논리인가?

(능산) : 주군, 폐하께서는 이미 망녕이 든 사람이옵니다.

(왕건) : 그러니까 버리라...? 허허. 큰일날 사람들이로군. 그렇다면 내가 아프고 병들었을 때 자네들도 날 버리겠네그려. 정신 차리게, 이 사람들아!! 사람이 정도를 걷지 못하고 다른 길로 빠진다면 멀리 가지 못하는 것이야. 끝까지 충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의리를 다할 때 또 다른 진리가 보이는 것이야! 폐하께서는 나를 의지하고 계시네. 모름지기 사내란, 끝까지 변하지 않는 것이 사내야. 알겠는가? (94화)[52]


태평이 답지 않은 소리! 세간의 눈이 무섭고 폐하의 의심이 두려워서 이 왕건이가 해야 할 일을 못 한단 말인가!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남의 눈치만 보며 숨어다니며 살았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어. 이 왕건이는 왕건이가 사는 방법대로 사는 것이야. 알겠는가! 군자는 대로라 하였어. 가야할 길을 돌아간다면 이미 군자가 아니야. 나는 나대로 사는 것이야. 알겠는가? 나대로 말이야! (110화)


((독백) : 그렇사옵니다. 폐하. 일이 있사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형제의 마지막이옵니다. 폐하. 어찌 눈물을 아니 흘릴 수 있겠사옵니까. 형님 폐하.) 그렇사옵니다. 형님 폐하. 어쩌다가 우리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어쩌다가 세월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사옵니까... 폐하. 하늘이 원망스럽사옵니다. / 하늘이 원망스럽사옵니다... 형님, 이 아우를 용서하시옵소서. 이 아우를 용서하시옵소서... 형님. (118화)[53]


그대들이 모두 하늘의 뜻이라 하고 백성들의 여망을 앞세우니 계속 마다하는 것도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 될 것이오. 이제 어쩔 수 없이. 부득불 나라를 위해 그들의 청을 아니 받을 수가 없구려. 그러나. 기왕에 혁명의 대열에 총사로 나서는 이상. 나도 장군들에게 청이 있소이다. 사사로이 폐하께서는 나의 의형이시오. 또한 수십년 이 나라를 통치한 군주이시오. 그 분의 목숨만은 보장해 드리고 싶소이다. 신료였던 사람으로서 그 주인의 목을 벤다는 것은, 차마 나로서는 하지 못할 짓이오. 어찌 하겠소이까? 들어 주시겠소이까, 마시겠소이까? (119화)


이럴 수는 없다. 내 목숨 하나 살자고 아우와 제장들을 다 죽이다니. 이럴 수는 없다. 난 아니 갈 것이다. 난 아니 갈 것이야!! 놔라. 이것들 놓지 못할까.. 난 아니 간다. 난 아니 가!! 아니 돼. 아니 돼. 아니 돼. 아니 돼... 아니 돼!! 숭겸 아우!!! 숭겸 아우!!! 아니 돼...... 아니 된다!!!!! (160화)


틀림이 없다. 내 아우가 틀림이 없어!! 얼굴이 없어도 나는 아느니라. 내 아우이니라!! 내 아우야...!! 이렇게 돌아왔구나. 이렇게 왔어. 형을 대신해서 나가더니 이렇게 왔어, 이렇게... 이렇게... 으흐흐흑... 모두들 보시오!! 여기 목이 없이 돌아온 이 시신은 신숭겸 장군이 아니라 바로 짐이올시다!! 짐이 목이 잘려서 돌아온 것이올시다!! 짐이 말이오......!! (162화)


누가 칼을 쓰라 하였는가! 나라를 배신한 역적들의 가족들이다! 철퇴를 쓰도록 하라. 칼을 쓰는 것은 그나마 시신을 온전하게 보존해 주는 처형법이다. 역적에게는 아니된다! 철퇴를 써라!! 시행하라! 어서 시행하라!![54]

(165화)


글쎄... 아직 믿기지가 않아.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가 않아!! 옛날의 저도 나와 같았을 것이야. 저 공산에서 나처럼 이렇게 보고 있었을 것이야. 저들은 포위되었네. 나갈 곳이 없어. 잡아야 해... 이번엔 꼭 백제의 왕을 잡아야 해!! 꼭......!! (170화)


천 년의 사직인 신라국이올시다. 홀로 절을 받음은 마땅치 않은 일입니다. 이 사람의 절도 받아 주시오. (171화)[55]


최응아...!! 이렇게 가다니... 아니된다. 어떻게 나를 두고 최응이 자네 혼자 가 버렸단 말이냐... 최응아... 최응아!! 황제가 왔느니라. 짐이 왔느니라. 말을 해 봐. 최응아. 최응아... 말을 해 봐. 말을 해 봐...!!! 어흐흐흐흑.... 이렇게 가 버리다니... 젊은 자네가 이렇게 가 버리다니!! 하늘이시여. 이를 어이 하오리까... 이를 어이 하오리까...... 최응아... 최응아....!! 최응아. 말을 해! 짐이 왔느니라... 말을 해!!! 최응아...!! 아니된다... 아니된다 최응아... 어떻게 이렇게 혼자 가 버린단 말이냐... (180화)


어허, 그만 하지 못할까! 우리의 이웃이 힘이 없이 나약할 때 그 약함을 틈타 나라를 받는 것은 천하의 현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가서 그리 전하시오. 열심히 나라를 살려 보라고 말이오. / 우리는 이웃이오. 서로가 도와가며 잘 해 보십시다. 암요. 그래야지요. 허허허허.... (187화)


상부 어른. 상부 어른!! 어찌 이리 하시옵니까. 왜 굳이 이리 하셔야 한다는 말이옵니까...? 이 아우는. 진심으로. 진심으로 상부 어른을 뫼시고 싶었사옵니다. (199화)[56]


고맙소이다. 모두 고맙소이다! 그렇소이다. 삼한은 통일되었소이다!! 우리들의 힘으로, 자주적으로 대업을 이루었소이다!! 우리 고려가 이제 삼한의 주인이 되었소이다!! (마지막화)


"마음을 빼앗겼다... 박술희가 말이지? 아니 그 얼굴로 여자를 다 생각했단 말인가?!"(36화)[57]



6. 기타[편집]


  • 유달리 의형제 관계가 많은 인물이다. 궁예의 의제이자 유금필, 신숭겸과 박술희의 의형이며, 견훤도 그를 사사로이는 아우로 부른다.

  • 대하사극 주인공 중에서도 이성관계가 유독 불우한 인물이다. 평생의 사랑인 연화와 이어지지 못한 것도 모자라, 첫째 처가는 술에 몽혼약을 타서 억지로 같이 재운 다음 반강제로 혼약을 받아냈고 둘째 처가는 첫째 처가와의 혼약 따위 무시하고 황명을 핑계삼아 새치기로 혼인했으며 셋째 처가는 가문의 위세를 빽으로 써서 어거지로 혼인을 밀어넣었다. 전설급 일부다처를 실현했음에도 하렘 운영은 커녕 역으로 호족들과 미녀들의 계략에 걸려 원하지 않는 성착취를 당하는 불쌍한 미남 역할이 되었다.

  • 작중 비중 있게 등장하는 왕건 가문의 사람과 왕건의 의형제들 중 대부분의 끝은 그리 좋지 못했다. 왕륭은 송악을 궁예에게 바친 후에 외지에서 사망, 왕평달과 변사부, 마사부는 섬으로 귀양 간 이후로 돌아오지 못했다. 장수장과 신숭겸은 각각 조물성 전투와 공산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사촌동생 왕신은 후백제에 볼모로 갔다가 자결했다. 제국의 아침까지 고려하자면 박술희와 왕식렴의 최후 역시 그리 좋지 못하였다.



  • 왕건을 연기한 최수종은 본작에 출연하기 5년 전 첫사랑이라는 드라마의 26화에서 신숭겸의 묘를 둘러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5년 후 신숭겸과 군신 관계인 왕건으로 나오게 됐다.

  • 작중 144~145화, 181화 사이에 발해에서 망명 온 사람들을 왕건이 직접 맞이해주는 모습이 나오는데, 왕건을 연기한 최수종은 4년 후에는 그 발해를 세운 대조영(고왕)으로 나와 배우 개그가 성립됐다. 또한 해신에서 장보고를 연기하여 일명 최수종 유니버스 중 한 축을 이룬다. 그리고 1화에서 문무왕의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인 김춘추도 언급됐는데, 최수종은 대왕의 꿈에서 김춘추를 맡게 되었다. 또 태조 왕건에서는 언급이 없었지만 고려 역사 중 여요전쟁을 다룬 2023년 사극 고려거란전쟁에도 또다시 최수종이 고려를 구하는 강감찬 장군으로 캐스팅되며 삼국~ 고려 시대 속 최수종 유니버스를 더욱 굳건히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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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식] 두번째 사진은 171회부터 나오기 시작한 적색 곤룡포와 통천관을 착용한 모습을 어느 팬이 합성한 것이다.[오프닝1] 세번째 사진은 32회 이전 오프닝에서의 왕건, 아직 청년기라 다른 주연들과는 달리 조금 부족한 면을 보여준다.[오프닝2] 네번째 사진은 32회 이후 오프닝에서의 왕건, 수염이 많이 자랐고 눈빛또한 후삼국시대의 영웅답게 매서운 포스를 보여준다. 다만 갈수록 KBS 대하사극 특성상 총 분량의 약 45%?정도 후엔 오프닝 영상을 아무리 인원이 많이 바뀌어도 재촬영하지 않고 그냥 배우 목록을 들어내 버리는 일종의 관례가 있어서인지 견훤과, 궁예와는 달리 왕건의 즉위 후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1] 작중에 지어진 가명.[2] 이때 왕건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종간과도 만난다.[3] 궁예와 종간은 범교 스님의 청으로 세달사를 나와 왕륭, 왕건 일행과 함께 서라벌에 가던 중이었다.[4] 다만, 이 결의 형제는 작중의 창작이며 결의 형제의 분위기나 모습들은 삼국지연의에서 유관장 삼형제의 결의 형제와 비슷한 면모를 풍긴다. 드라마 태조 왕건삼국지를 과도하게 차용했다는 비판을 받는 장면들 중 하나.[5] 도선대사의 입적은 궁예가 송악으로 들어오고 연화를 부인으로 맞은 후 처음으로 열린 팔관회에 방문한 허월이었다.[6] 강비 자체는 문제가 없으나 강장자 부부는 왕건을 미래의 군왕이 될 거라 믿던 왕륭 입장에서는 장사꾼 그릇이 어울리는 인물들이지 왕실 외척으로는 부적합한데다 가문을 부흥시킨다는 구실로 자기 잇속만 챙기는 속물이었다, 종간은 궁예의 황후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황권 강화 명목으로 채우는 것과 동시에 과거 서라벌로 동행하던 도중 어린 아이였지만 위험 인물임을 첫눈에 알아본지라 왕건의 기를 꺾어놓으려고 무슨 짓이든 하려고 했다.[7] 수많은 전함을 제작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나주의 호족들의 공감(작중 설정상 나주의 호족들은 자신들을 장보고 세력의 후예로 여기고 있었다)을 얻게 할 수 있도록 장보고가 심복 부하들에게 주었다던 특별한 검을 비싸게 사서 왕건에게 내어주는 등 결정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8] 훗날 세 번째 부인인 충주 부인(후에 신명순성왕후(神明順成王后)) 유씨의 아버지가 되는 충주의 호족. 참고로 유천궁과는 한자가 다르다(유천궁은 정확힌 柳씨).[9] 다만 결혼식은 두 번째 부인과 먼저 올렸으며, 그 때문에 정혼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오해한 유장자의 딸이 머리를 깎고 출가하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유장자의 딸을 일시적으로 비구니로 받아준 사람이 충주에서 왕건에게 간자를 줬고, 훗날 타락한 궁예에게 직언하다 철퇴를 맞고 죽는 석총 스님이었다.[10] 이것도 왕건 자신은 거절했지만, 유긍달이 황제 궁예에게 청하여 칙령으로 결혼을 명령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하게 된 것.[11] 제103화 중. 왕건은 뒷자리에 머물러 있고 한참 종간만 말을 걸고 있었는데도 궁예는 아우부터 먼저 알아본다. 물론 종간도 왕건도 궁예에게 소중한 사람들이었지만 그가 얼마나 왕건에게 더 의지하고 있었는지를 암시하는 대목.[12] 참고로 이 유배를 끝으로 이들 세 사람은 다시는 출연이 없어서, 유배지에서 죽은 걸로 처리되었다고 보아도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다. 가상 인물들인 변사부와 마사부에 실존 인물이나 생몰년도가 불분명한 왕평달이 이쯤이면 퇴장할 때라고 작가가 판단했던 것으로 여겨 유배로 극중 하차를 시킨 것으로 보인다. 살아있다는 설정이면 왕건이 역성혁명 성공 후 다시 복권시켰을 텐데 전혀 그런 게 없었다.[13] 당연히 태평이 그렇게 하면 죽을 거라고 말려서 궁예에게 보고하지는 않았다.[14] 물론 최응의 기지가 왕건을 몰래.살린 일이기는 하지만 작중에서 궁예에 대한 왕건의 충성심은 혁명을 결심하기 전까지 변하지 않았다. 사실 일반적이라면 생각도 안 한 모반을 하려고 인정하라는 귀뜸을 들으면 대부분 끝까지 억울하다고 했겠지만 최응이 '궁예는 원하는 대답을 들으면 뒤끝없이 살려준다.'라고 암시를 해준 걸 왕건이 눈치좋게 알아들었다고도 할 수 있다. 반대로 궁예는 왕건을 죽일 마음이 전혀 없었다. 물론 제 정신이 아닌 상태인지라 끝까지 고지식하게 계속 아니라고 했다면 자신을 능멸했단 죄로 어쩔 수 없이 이미 죽은 3명의 뒤를 따르게 했을지 모르지만, 왕건에게 시비를 건 것은 그 자리에서 왕권을 더 세우기 위한 일종의 쇼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건이 최응의 충고대로 거짓자백하자 곧바로 솔직하게 고백했으니 됐다며 용서해준다. 이에 더해 종간, 은부 등 최측근들이 대역죄를 물어야 한다는 것도 일축하고는 아예 관련된 이야기를 불문에 붙일 것을 명하고, 자리를 떠나며 자기 뜻대로 답해준 왕건에게(폐하께서 관심법으로 보고 그렇다 하시면 그런 것이니 죄를 받겠다는 식으로 궁예를 잘 띄워주었다.) 흐뭇한 웃음까지 보여준다. 왕건을 향한 궁예의 호의가 진심이었음을 보면 일부러 종간 등의 정적들에게 더 공격받을 빌미를 지워주려고 한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궁예가 죽는 120화에서 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 때 궁예 스스로 자신은 왕건을 죽일 수 있으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고 인증까지 했다.[15] 처음에 의제인 능산이 여러 번 찾아가 설득했지만 무산되었고, 뒤이어 다른 세 장수가 밤중에 찾아온 것이다.[16] 아무리 왕건이 궁예를 죽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한들, 무력으로 폐위된 황제를 살려둔 예는 예로부터 없었으며, 계속적으로 폐주를 죽여야 한다고 상소가 올라오고 호족들이 압박하고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면 왕건이라 한들 막기가 힘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건의 앞길을 가로막지 않고 명예롭게 죽을 수 있을 때 자결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17] 사료에도 '추대를 받았지만 내가 보위에 오른 것은 천명인데 너희가 어찌 이럴 수 있느냐.'며 호통을 치며 오히려 당당한 모습을 보이자 환선길이 지레짐작해 도망쳤다가 소탕됐다.[18] 하지만 왕건의 집안 문제는 셋째 부인까지 서술하는 데에서 그치고 그 이후의 황후 혹은 후궁들은 그저 엑스트라 선에서 그쳤기 때문에 작중에서는 실제 일어난 문제들보다 상당히 많이 축소되어 그려졌다. 이 중 셋째 부인 유씨(극에서는 수인(자막) 또는 충주부인)의 경우, 권력욕이 상당한 모습을 보였으나, 둘째 부인 오씨의 견제 및 첫 아이 태의 요절 문제로 결국엔 권력욕을 놓아버린다. 하지만 왕건과의 사이에서 많은 자식을 두었고, 그 중 둘이나 왕이 되었다. 사실 왕건 사후 일어난 권력 쟁탈전을 봐도 두 번째 황후인 장화왕후의 집안에서 배출한 혜종을 지지하는 세력과 세 번째 황후인 신명순성왕후의 집안에서 배출한 정종, 광종을 지지하는 세력 간에 일어난 게 대부분이라 왕건 시대에는 굳이 신명순성황후 이후의 부인들을 다룰 이유나 여유는 없었다. 이 과정은 후속 드라마인 제국의 아침에서 제대로 다뤄졌으며, 정작 이후 고려의 왕실은 왕건의 제4비인 신정왕후와 제5비 신성왕후의 핏줄이 왕통을 이어갔다는 것은 함정(...)[19] 적장자 문제 말고도 아내 개개인의 대우 문제도 심각했다. 최응과 대화하는 장면에서, 오늘은 어느 부인 방에서 자야 할지 고민이라 불평할 정도. 이걸 단순히 부러워할 수 없는 게, 총애를 골고루 못 받았다는 것이 정치적 이슈가 되어버리면 그것 역시 분열의 위험이 되기 때문이다.[20] 첫째 장인인 유천궁은 극에서 훨씬 이전에 퇴장했기 때문에 이 대목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다.[21] 실은 드라마가 연장되면서 신혜왕후 역의 박상아가 연장한 만큼 출연하지 못하고 중도하차했기 때문이다.[22] 훗날 비슷한 문제를 오랫동안 겪었던 후백제의 견훤은 왕건의 이 발빠른 대응을 나름 부러워했다고 한다.[23] 후백제군은 이미 조기에 약을 찾아 돌림병을 치유하고 사기를 되찾은 상황이었다. 때문에 약 짓는 법을 알려줄테니 자신에게 무릎을 꿇으라는 조건을 내건 것.[24] 수렁에 빠진 고려의 상황을 타개하고,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왕건의 의형제들이 최응에게 자문하고, 진호를 죽여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자 유금필왕식렴을 설득한 끝에 독살하는 것으로 나온다.[25] 중국 한나라 시대의 고사를 인용하여 신숭겸과 김락 등이 왕건과 복지겸의 의관을 입고 전투에 나섰고, 그들이 전사함으로써 왕건과 복지겸 등이 피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왕건은 의제가 자신 대신 죽음을 택한 것에 대해 한동안 한과 울분을 삭이지 못했고, 이것은 삼년산성 전투에서도 패배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26] 처형 명령을 내릴 때 칼로 죽이려는 병사들을 중지시키며 칼은 시체를 온전히 남겨주는 처형법이라고 하며 배신자에게 그러면 안된다며 철퇴를 쓰라고 한다. 시중 김행선의 작중 대사를 통해 이 모습이 예전의 폐주를 떠올린다고 말하고는 있으나, 분명 왕건이 분노한 것은 맞지만 사람을 마구 때려 죽이던 궁예처럼 완전히 광기에 휩싸여 실성한 모습은 아니다. 게다가 자세히 보면 왕건도 맘이 편치 않은 듯 고개를 돌리기도 하고 마지막 남은 어린아이가 울고 불고 빌 때 망설이기까지 한다. 물론 박술희가 부장을 갈궈 처형은 집행되어졌지만.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궁예는 미쳐서 관심법하다가 기침해도 열병식에서 웃어도 아무나 철퇴로 때려죽인 반면 왕건은 참다참다 빡쳐서 결국 폭발한 것이다.[27] 심지어 이 때 옛날 폐주의 마음을 알 것 같다라는 말까지 하며 으름장을 놓는다. 물론 이는 정말 궁예처럼 폭정을 저지르겠다는 뜻이라기보단 다시는 배신을 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를 에둘러 표현한 것에 가깝다.[28] 사실 견훤이 이 꿈을 꾸기 전에 반대로 왕건이 개경을 떠나 서경에 가서 있을 때 견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악몽을 꾼 적이 있다. 정확히는 신숭겸이 애타게 왕건을 부르며 깨워 왕건이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정작 신숭겸은 사라지고 견훤이 나타나 의기양양하게 겁을 주며 덤벼들었다. 악몽을 꿀 당시 후백제가 예성강을 통해 고려의 황도를 기습하려는 기습 작전을 실행하던 중이었는데 고려에게 닥칠 불길한 기운을 암시하는 꿈이라고 봐야 한다. 이번에는 견훤이 이 악몽을 꾸니 극 중에서 왕건과 똑같이 불길할 징조가 일어남을 견훤에게 암시해주는 꿈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신검이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서 현실이 되고 말았다.[29] 다만 이 부분은 작가가 사료를 완전히 잘못 읽었는데, 고려사 원문에 따르면 회한과 자조가 아니라 웃으면서 말했다(王笑曰)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주변 사람들이 태조가 숨을 거두려는 것을 슬퍼하자 빙그레 웃으면서 "그럼 사람이 태어났으면 죽어야지 영원히 살 줄 알았느냐?" 정도로 말하고 운명한 것.[30] 단, 최수종의 배우 커리어에서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첫사랑에서는 가난한 서민층 편부가정의 화가 지망생으로 등장했다.[31] 특히나 최수종의 트레이드 마크인 깊은 쌍꺼풀은 부담스럽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뤘고, 이건 훗날 최수종 본인이 SNL에 출연했을 때 셀프 디스를 하기도 한다.[32] 최수종은 스타가 되었어도 노력하고 공부하는 배우로 유명한데, 왕건 찍을 때는 김흥기 선배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제발 이거 하나만 가르쳐달라고 해서 하나하나 배웠다고 인터뷰에서 회고하였다. 개인지도를 해준 선배 중 한명 임혁은 훗날 대조영에서 아버지와 아들로 호흡을 맞췄다.[33] 대체적으로 기나긴 태조 왕건 촬영을 통해 사극 연기가 원숙해지긴 했으나, 이후로도 아예 성장이나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태조 왕건 당시 최수종의 발성이 '가래 끓는 소리'가 난다며 싫어한 시청자들도 제법 있었고, 본인도 이를 의식해 차기작인 해신에서 장보고 역할을 연기할 때에는 발성을 좀 더 편안한 쪽으로 변화를 주었다.[34] SNL 코리아에서는 진짜로 사극왕 최수종이라는 개그 에피소드를 본인이 직접 찍었다. 왕건부터 시작하여 무열왕까지 본인이 연기했던 인물의 망령들에게 실컷 고생하는 게 포인트[35] 태조 왕건처럼 이환경 작가가 맡았다.[36] 물론 초반 잠시 나오는 특별출연이라고 해도 왕건의 장남 혜종 역의 노영국이 최수종보다 14살이나 많고, 전작에서 왕건의 의동생인 박술희는 이 드라마에선 최수종보다 18살 많은 조경환이 연기하니, 위화감이 들어 내용이 무산되었을 수도 있긴 하다.[37] 다만 예외도 있는데 바로 궁예의 심복이었던 종간과 은부였다. 이 둘과도 물론 화해 및 대화의 조짐이 없지는 않았지만 종간과 은부는 끝까지 왕건을 믿지 않았다.[38] 아버지인 허월의 명을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김순식의 세력이라면 전쟁에 져서 돌아오는 왕건의 뒤를 칠 수도 있었다. 게다가 김순식이 알현한 시기는 왕건이 공산 전투에서 겨우 살아남아 너덜너덜해진 상태에서 귀환했을 때였다. 황제 즉위 이후에도 다른 반란에 대해서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던 왕건이 유이하게 놀란 것이 바로 명주와 나주의 반란이었고, 명주를 큰 땅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작중에서 일리천 전투에 무려 군사 2만을 보낸 것만 봐도 김순식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감이 잡힌다.[39] 최응은 종간과의 대화에서 나라를 보존하려면 "무리한 북벌 준비를 중지하시고 아직도 충성이 변치 않은 왕건 장군과 손을 잡으셔야 하옵니다"라고 말하고, 종간이 "왕건? 아지태가 아니라 왕건이라?"라고 반문하자 "백성이 신뢰하고, 폐하께서 신뢰하시고, 실은 내원 어른께서도 신뢰하고 계시옵니다. 다만 왕 장군께서 과분하게 지나친 기대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 걱정이 아니겠사옵니까."라고 말한다. 종간은 최응에 대해 아직 어린데 세상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대사로 그 말이 사실임을 인정한다.[40] 사실 오냐오냐 자란 금수저 2세와는 거리가 멀고 철 들기 전부터 무예와 학문을 배우고, 바다를 통해 해외를 드나드는 등 일찌감치 사회경험을 쌓아갔다.[41] 물론 그녀를 포기한 것은 드라마에서나 소설판에서나 대업을 위해서였고 젊은 날 그녀에 대한 사랑은 진심이었기 때문에 죄책감 정도는 갖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42] 캐릭터 묘사나 행보가 다른 건 왕건만 아니다. 예를 들어 박술희와 대주도금은 소설에서는 결국 부부가 되나 드라마에서는 각자의 길로 가며, 태평은 소설에서 그냥 어쩌다 가끔 언급되는 문관 1 같은 비중이나 드라마에서는 천재 책사였지만 조물성 전투 때 역병에 걸려 최응을 추천한 후 병사하는 걸로 묘사된다.[43] 궁예의 그 유명한 기침소리나 견훤의 '또 졌어?'는 태조 왕건 방영 당시 태어나지도 않던 세대들도 밈으로 자주 접하는 반면 왕건은 이런 밈들이 없다.[44] 실제로 궁예와 견훤은 둘 다 실제 역사에서도 한국사 상 유일한 특징을 지니고 있을 만큼 (궁예는 수도자 출신 왕, 견훤은 자기가 건립한 나라를 적국의 장수로써 멸망시킨 왕) 개성이 어마어마한 인물들이다. 왕건이 그 영향력을 가지고도 이들보다 개성이 떨어지는 건 어쩔수 없다.[45] 대표적인 사례로 형미와 왕건의 관계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46] 신덕 또한 문무를 겸비한 백제의 명장으로 배현경하고 동급의 실력을 가졌다.[47] 심지어 박술희 또한 여기에 동조하여, 아이를 불쌍히 여기는 병사에게 '그 아이도 반역자의 핏줄이니 주저하지 말고 죽여 없애라'고 명령하는 기계와도 같은 모습을 보였다. 물론 박술희가 사람죽이는 걸 즐기는 망나니 같은 인간이 아니라 지속적인 호족들의 이탈과 배신에 대한 본보기를 확실하게 보여줘야한다는 강경함 때문이다. 호족들의 가족을 때려죽이는 장면을 다른 장수들이 차마 다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았을 때 최응과 더불어 끝까지 지켜봤지만 잠시 인상을 찌푸리는 등 그도 아주 편한 마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48] 이는 첫사랑 여인 연화 자체의 문제였다기 보다는 연화의 아버지 강장자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49] 작중에 지어진 가명.[50]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왕건을 지지하는 것을 드러낸 시점이다.[51] 극 중 묘사에서 의원의 말로는 간장, 폐장, 위장 등 이미 손쓸 수 없을 만큼 여러 장기에 악성 종기가 나있다고 한다. 온 몸에 퍼져 몇 달을 살 수 없다는 시한부 판정으로 이미 늦었다는 걸로 보아, 지금으로서 말하면 말기 암으로 추정된다.[52] 왕건이 의리와 충성을 최우선 가치로 여긴다는 걸 보여주는 동시에 그 대화 상대가 능산(신숭겸)이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대사. 먼 훗날 공산 전투에서 능산은 주군이자 의형제인 왕건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다. 극 중에서 이와 비슷한 대화는 몇 번 등장하는데, 실제로 위에 언급된 대사가 있던 94화는 '이런 왕건의 말에 감명을 받아서인지, 나중에 신숭겸은 공산 전투에서 왕건 대신 자신의 목숨을 바치게 된다' 라는 나레이션으로 끝났다.[53] 강비 처형 이후, 궁예는 왕건에게 다시 시중 자리를 맡기고 관계를 회복하고자, 왕건을 술자리에 부른다. 이때 왕건은 속으로 저 대사를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술자리에 가기 직전에 능산(신숭겸)이 왕건에게 역성 혁명에 참여하라고 제의한 것을 왕건은 거부하였으나, 이 대사를 통해 왕건 역시 궁예가 이젠 끝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54] 배반한 호족들의 삼족을 멸하고자 아녀자부터 어린아이까지 무자비하게 철퇴로 때려죽이라 명한다. 극중 모든 인물들에게 인격자로 소문난 왕건이지만 다른 호족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연좌제를 실시하는 냉정하고 현실적인 일면도 있음을 보여준 장면. 하지만 왕건이 아무리 인격자라고는 하나 충신 신숭겸의 죽음, 잇달은 패전으로 인해 반쯤 미쳐버린 상황이었고, 이 와중에도 자신에게 살려달라고 비는 순진한 어린아이조차 무시하려 애쓰는 등 왕건 자신도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결국 박술희가 이를 보고 형을 집행하는 병사에게 역적의 자식이니 주저말고 어서 죽이라고 닥달하여 아이마저 죽이게 된다.[55] 왕건이 경순왕의 초청에 응하여 서라벌을 방문한 대목인데, 이때 경순왕은 왕건에게 먼저 절을 올린다. 그에 대해 대답한 부분.[56] 고려로 망명해와 왕건의 환영을 받은 견훤이 절을 올리자. 이때 견훤이 한 '고려국 황제 폐하. 폐주 알현이옵니다!! 절 받으시오소서...' 라는 대사는 본 위키의 견훤 항목에도 명대사 가운데 하나로 올라와 있다.[57] 대주도금에게 발리고 돌아온 박술희에게 한 말. 개그스러운 분위기가 아닌 진지한 상황에서 저런 대사가 나올 정도면 작중 설정상 박술희가 정말로 추남이긴 한 모양(...) 원래 의도는 '넌 여자에 관심없는 그냥 싸움꾼인지 알았는데 뜻밖에 면이 있다.' 이렇게 놀리는 의도였겠지만, 대부분의 시청자에게는 '그렇게 못생긴 얼굴로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다니 깬다.'라는 비하적인 말로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