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리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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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도성 및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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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백제
웅진성
공산성


[a] 어떤 성곽이 위례성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b] 하북위례성 또한 존재만 전할 뿐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다.









파일:문화재청 CI_상하.svg
익산 왕궁리 유적
益山 王宮里 遺蹟

Archaeological Site in Wanggung-ri, Iksan




분류번호
대한민국 사적 제408호
소재지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631-30
분류
유적건조물 / 유물산포지유적산포지 / 육상유물산포지 / 선사유물
면적
218,155㎡
지정연도
1998년 9월 7일
제작시기
백제 무왕 재위기
관리자
(관리단체)

익산시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백제역사유적지구
영어
Baekje Historic Areas
프랑스어
Aires historiques de Baekje
국가·위치
대한민국 전라북도 익산시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15년
등재기준
(ii)[1], (iii)[2]


파일:Wanggung-ri.png


파일:왕궁리유적.jpg

왕궁리 유적[3]

1. 개요
2. 유적의 정체
2.1. 《관세음응험기》의 기록
3. 발굴 조사
3.1. 발굴성과 종합
4. 왕궁리 오층석탑 및 사리장엄구
4.1.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4.1.1. 외부 링크
4.1.2. 국보 제289호
5. 관련 전설 및 민담
6. 찾아가는 방법



1. 개요[편집]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에 위치한 유적. 미륵사와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이곳은 예로부터 왕궁평, 왕검이, 왕금성 등으로 불렸으며, 정확히 어떤 곳이었는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에 궁궐로 사용되었으나, 후대에 사찰로 용도가 바뀌었고, 이후 사찰도 폐사되고 폐허로 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는 국보 제289호[4]인 왕궁리 5층 석탑만이 남아있으며, 해당 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는 국보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2. 유적의 정체[편집]


왕궁리 유적은 광활한 빈 땅에 거대한 석탑이 떡하니 서 있어 예로부터 범상치 않은 장소로 여겨진 곳이었다. 다만 조성 시기에 대해 여러가지 주장이 있으며, 과연 이곳에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1. 첫번째 설: 고조선준왕위만에게 왕위를 뺏긴 뒤 남쪽으로 피신해 세운 도읍이다. 관련 유적으로는 미륵산성[5]이 제시되었다.
  2. 두번째 설: 백제무왕이 천도 혹은 별도를 목적으로 조성한 왕궁이다. 관련 유적으로는 미륵사지쌍릉 등이 제시되었다.
  3. 세번째 설: 신라안승을 지원해 건국한 보덕국의 도읍이었다. 관련 유적으로는 오금산성[6]이 제시되었다.
  4. 네번째 설: 견훤후백제를 세우고 이곳에 도읍을 세웠다. 관련 유적은 제시되지 않았다.

발굴 조사 결과 백제시대의 궁궐이 있었던 것으로 결론이 나왔으며, 근처의 미륵사제석사지, 익산토성, 미륵산성, 낭산산성, 천호산성, 금마도토성, 쌍릉 등의 유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무왕왕궁이었다는 견해가 유력한 상태다.[7]

하지만 일본의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는 "백제 무광왕(武廣王)이 지모밀지(枳慕密地)[8]로 천도하고 새로이 제석정사(帝釋精舍)라는 사찰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무광왕이 무왕인지, 제석정사가 어떤 절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한 확실한 답이 없는 상태다. 인근의 다른 유적인 제석사지와의 관련성 역시 제기되고 있다.

아직 발굴이 완전히 끝나지 않아 여러가지 수수께끼가 남아있는 곳이다.


2.1. 《관세음응험기》의 기록[편집]


百濟武廣王 遷都枳慕蜜地 新營精舍

백제 무광왕께서 지모밀지로 천도하시어 새로이 정사를 경영하셨다.

以貞觀十三年歲次 己亥冬十一月 天大雷雨 遂災 帝釋精舍 佛堂 七級浮圖 乃至廊房 一皆燒盡

정관 13년(639) 기해[9]

겨울 11월, 하늘에서 크게 천둥과 함께 비가 내려 마침내 재해가 있었는데, 제석정사와 불당 칠급부도와 회랑과 승방이 일거에 모두 불타버렸다.

塔下礎石中 有種種七寶 亦有佛舍利 睬水精甁 又以銅作紙 寫金剛波若經 貯以木漆函

탑 아래의 초석 안에는 여러 칠보가 있고 또한 불사리와 채색한 수정병, 또 동으로 만든 판에 사경한 금강바야경[10]

과 그것을 담은 목칠함이 있었다.

發礎石開視 悉皆燒盡 唯佛舍利甁 與波若經漆函 如

초석을 들추어 열어 보니 모두 다 불타 없어지고 오직 불사리병과 바야경의 옻칠함만이 옛날과 같이 있었다.

水精甁 內外徹見 盖亦不動 而舍利悉無 不知所出

수정병은 안과 밖이 환히 보이고 뚜껑은 역시 움직이지 않았으나 사리는 모두 없어졌고 어디로 나갔는지 알지 못했다.

將甁以歸大王 大王請法師發卽懺悔 開甁視之 佛舍利六箇 俱在處內甁

그리하여 사리병을 대왕에게 가지고 왔는데, 대왕께서 법사를 청하여 참회하고서 병을 열어 안을 보니 불사리 6개가 모두 병 속에 있었다.

自外視之 六箇悉見 於是 大王及諸宮人 倍加敬信 發卽供養 更造寺貯焉

병 밖에서도 그것을 보니 6개 사리가 모두 보이므로, 이에 대왕 및 여러 궁인들은 삼가 믿는 마음을 더욱 더했고 공양을 올리며 다시 절을 지어 그 안에 봉안하도록 했다.



3. 발굴 조사[편집]



파일:attachment/WGpalace2.jpg

발굴조사 항공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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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복원 작업 내용을 다룬 〈SBS 8 뉴스〉

왕궁이 사라지고 절이 들어섰는지, 원래 왕궁 안에 절이 같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왕궁은 먼저 기능을 잃었고 절은 백제 멸망 이후에도 통일신라, 고려까지 한동안 존속했지만 절 역시 세월이 흐르며 사라졌다. 그 뒤에는 빈 터에 사찰 시절의 석탑만이 홀로 남아 지금까지 남아있다. 이는 후대의 기록에도 나타나는데, 조선시대인 1756년에 간행된 익산읍지 《금마지》에는 석탑과 관련된 전설이 기록되었고, 1872년에 편찬된 《호남읍지》의 익산군 지도에는 왕궁탑이 그림으로 그러졌다.


파일: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2.jpg


파일: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3.jpg


파일: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7.jpg

오층석탑 해체 당시 발굴된 유물의 일부. 왼쪽부터 금제방형사리함, 금제금강경, 금동여래입상이다.

그 후로는 별다른 기록도 없이 그냥 방치되었고 유적 일대는 수풀이 우거졌다. 그렇게 잊혀지던 중 1965년 오층석탑 해체 및 복원 작업으로 왕궁리 유적은 다시 빛을 보았다. 작업의 취지는 그저 무너질 위기에 처한 석탑을 바로 세우는 것이었지만, 작업 도중 탑 내부에서 여러 가지 유물들이 쏟아져나오자 탑과 주변을 발굴했다. 비록 작업을 끝내고 곧바로 발굴한 것은 아니었지만, 왕궁리 유적이 꽤나 중요한 곳이라고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976년에서부터 77년까지 유적 일대를 시굴조사했다. 당시에는 왕궁리 유적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조사는 무리였고, 약간만 파서 대략적인 것만 알아내고자 했다. 이 조사에서 왕궁리 유적의 장방형 성곽을 확인했는데, 성곽에서 백제시대 수막새를 비롯하여 ‘대관관사’명 명문기와, ‘수부’명 인장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석탑 뒤편에서는 석재는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판축으로 기단을 다진 금당지를 확인하고 주변에서는 ‘관궁사’명 명문기와를 찾았으며, '관궁사'란 명칭 때문에 일단은 왕궁 내부 부속시설로 절이 있었으리란 추측이 나왔다. 출토된 유물들이 백제 무왕 시기에 해당한다는 결과가 나와 왕궁리 유적은 무왕이 천도를 위해 조성한 왕궁이라는 추측이 나왔다. 그러나 역사서에는 백제 후기 수도가 성왕의 천도부터 의자왕 재위기에 멸망할 때까지 쭉 사비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천도쯤 되는 거대한 일이 현존하는 어느 기록에도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 때문에 왕궁설은 사장되는가 했다.

그런데 일본에서 관련 내용이 기록된 《관세음응험기》라는 문헌이 발견되자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 문헌에는 ‘무강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새로 정사를 지어 경영했다.’는 기록이 있었는데, 여기의 무강왕은 무왕이고 지모밀지는 익산이라는 것이었다. 비록 관세음응험기라는 새로운 자료가 나타났긴 했지만, 교차검증이 가능한 다른 문헌이 없기에 새로운 학설을 곧바로 신뢰하기는 어려웠다.

그러자 왕궁리가 무왕의 왕궁이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해당 문헌에서 ‘절이 화재로 모두 타 버렸으나 석탑 내부의 심초석에 들어있던 금판경과 사리함 등은 타지 않았다.’는 다른 기록을 들고 나왔는데, 이는 1965년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 일체와 어느 정도 일치하는 내용이었다. 이들은 이를 근거로 주장을 계속했는데, 이는 왕궁리 유적이 '사찰'이었다는 주장에서 한발 더 나아간 것이었다. 하지만 즉각 체계적인 발굴을 실행하지는 않았는데, 당시에는 인근의 미륵사지에 관심이 더 쏠렸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왕궁리 유적은 짧은 빛을 본 뒤 다시 십여년 동안 방치되었다.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1989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첫 번째 조사는 유적 내에서 절의 흔적을 찾는 것이 목적이었다. 조사범위는 석탑을 중심으로 북쪽, 동쪽, 서쪽이었는데, 그중 북쪽에서 강당과 금당의 터로 추정되는 곳을 확인했다. 그 다음에는 금당 터 동쪽에서 가마터와 다른 건물의 터를, 두 터의 북쪽에서는 여러 단으로 축조된 동서방향 석축을 확인했다. 그 이후로는 그간 조사되지 않았던 석탑 동남쪽의 건물 터와 석탑 남쪽의 동서방향 석축을 조사했다. 일련의 조사 끝에 왕궁리 유적에 있었던 사찰은 1탑 1금당 배치였음을 알아냈지만, 그 밖에 중문이나 회랑은 확인되지 않았다.


파일:왕궁리 유적 토기.jpg

왕궁리 유적에서 발굴된 토기[11]

절 터에서는 ‘왕궁사’명 명문기와 등 다양한 이름이 기록된 명문기와들이 대량으로 출토되었고, 인화문토기와 토기호 등 토기들도 나왔다. 첫 번째 발굴에서 주목할 점은 석탑 아래쪽에서는 목탑을 세웠던 듯한 터가, 석탑 주변에서는 절보다 일찍 조성된 듯한 건물들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절을 세우기 전에 이미 다른 건물들이 있었고, 절은 이 건물들의 터를 파괴한 뒤 지었다는 뜻이다. 절 이전에도 뭔가 있었음이 밝혀지자 왕궁리 유적이 단순한 절 터는 아니라는 추측이 힘을 얻었다.

두 번째 발굴조사는 1994년부터 시작되었다. 석축을 중심으로 진행했는데, 당시부터 현재까지 진행한 조사로 동서 석축 4개소와 남북 석축 2개소를 확인했다. 석축들은 일정한 비율로 뻗어 있었는데, 왕궁리 유적 전체의 가로세로 비율과 유사했다. 이를 통해 왕궁리 유적 내 건축물들이 어떤 원칙 아래 계획적으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다음에는 성토층을 조사했다. 왕궁리 유적은 전체적으로 완만하게 경사가 진 지형이었기 때문에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평탄화 작업이 필요했다. 왕궁리 유적의 성토층은 보통 한쪽으로 흙을 쌓는 방식이 아닌 양쪽에서 쌓는 독특한 양상이었다. 왕궁리의 대지 조성 작업은 판축으로 유명한 풍납토성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으로, 이러한 작업을 위해 동원했을 막대한 인력을 생각해보면 일반적인 유적이었을 가능성은 상당히 낮아졌다.


파일:왕궁리 궁장.jpg

왕궁리 유적에서 발굴된 궁장[12]

석축 발굴과 동시에 유적을 둘러싼 궁장도 발굴했다. 조사 중 드러난 너비는 최대 1m 남짓이었지만 원래 너비는 약 3m에 가깝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궁장 안팎에 돌을 깔아 만든 시설이 있었는데 그것까지 포함한다면 약 10m에 달했다. 궁장은 지형과 지질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쌓아 올렸는데, 부대시설로 문 터 네 곳, 수구 세 곳, 석축 배수로 한 곳이 있었음을 발견했다. 유적에서 발견된 이러한 대규모 공사 흔적 때문에 왕궁리 유적에 있었던 건물이 매우 중요한 시설이라고 판단할 수 있었다. 또한 상술했듯이 석축의 비율과 유적 전체의 비율이 유사하므로, 건축물들의 규모나 배치 등을 매우 꼼꼼하게 설계했음을 알 수 있다.

두번째 발굴조사에서는 통일신라 시기 이전에 대규모 토목공사가 있었고, 이후 유적 전반에 걸쳐 철저한 계획 아래 대규모 건물들을 지었는데, (어떤 건물이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 수준을 볼 때 왕궁 혹은 그에 버금가는 건물이었으리란 결론을 내렸다. 유적의 방대한 면적과 큰 오차가 없는 장방형 형태 역시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해주었다. 이러한 규모에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건축물을 세웠다면 그 장소는 왕궁이었으리라는 것이 조사의 결론이었다. 이런 결론이 나왔으니, 다음 조사의 목적은 누가 이런 곳에 무슨 목적으로 왕궁을 세웠는지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이후 왕궁리 유적에 대규모 건물을 지은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두고 다양한 가설이 제시되었다.

1.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게 왕위를 뺏긴 뒤 남쪽으로 피신해 이곳에 궁궐을 세웠다.

2. 서동요로 유명한 백제의 무왕이 사비성에서 왕궁리로 천도하고자 왕궁을 조성했다.

3. 신라가 안승을 지원해 건국한 보덕국의 도읍이었다.

4. 견훤이 세운 후백제의 도읍이었다.


당시의 대세는 보덕국과 관련된 가설이었다. 문무왕이 고안승과 고구려 유민들을 금마저에 정착하도록 했다는 기록도 있거니와, 백제의 궁궐로 보기엔 증거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정말로 천도를 하겠다고 새로이 궁궐을 지었다면 역사서에 당연히 기록이 남았을 텐데, 어디에도 그런 기록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왕궁리 유적이 작은 규모는 아니나, 그렇다고 일국의 궁궐로 보기에는 한참 모자란 수준이었기 때문에 궁궐이 맞다고 해도 수도는 아니고 별궁 정도였으리란 추론이 나왔다. 결국 유적의 주인을 명확히 밝혀내지 못한 채로 계속 발굴을 진행했다.

2001년 3월부터 시작된 조사에서 사비시대 것으로 보이는 공방터가 발굴되었는데, 유적 서쪽의 성벽 일대를 조사하던 중 발견된 금조각이 발단이었다. 주변의 흙을 체로 치자 금조각들이 무더기로 걸러져 나왔기 때문에, 이곳에 금으로 뭔가를 만들던 공간이 있었다는 가설이 나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 도가니가 출토되어 이를 증명했다. 또한 금조각 이외에도 금실과 유리 도가니, 은조각, 유리조각, 청자 파편, 송풍관 등이 대량으로 출토되었고, 근방에서는 만들다 만 물건들과 원료가 나와 그 일대에 공방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뒤이어 진행한 발굴에서는 합금 제품과 아말감이 출토되었다. 또한 석탑에서 발견된 금강경판과 사리내함이 순금이 아닌 도금 제품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당시의 금속 관련 기술 수준이 상당히 높은 경지에 다다랐음을 보여주었다.

2002년에는 또다른 흥미로운 유적이 발굴되었다. 동서 석축 배수로의 남쪽을 조사하다가 특이한 구덩이가 발견되었는데, 제법 깊은 구덩이 내부에는 수분이 다량 함유된 유기물 흙이 쌓였고 벽은 뭔가를 바른 듯 반질반질했다. 처음에는 과일이나 물 등을 보관하는 저장고로 추정했지만 그런 용도라고 하기에는 폭이 좁았다. 일단 구덩이에 쌓인 흙부터 걷어낼 필요가 있었으므로 도르래를 동원하여 구덩이에 쌓인 흙을 걷어냈는데, 이 과정에서 짚신, 나무 막대, 기와 조각, 곡물 씨앗 등 여러 유물들을 수습했다. 구덩이를 발굴하던 과정에서는 지속적으로 어떤 의문이 제기되었는데, 바로 흙에서 악취가 심하게 났다는 것이다. 곡식이 출토되었기에 처음에는 곡식이 부패하여 묻힌 탓이라고 생각했지만, 곡식이 아무리 부패한들 냄새가 그리 고약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2013년 12월에 이 유적이 고대의 화장실이었으리란 의견이 나와 출토된 흙을 분석한 결과, 각종 기생충의 알이 나와 화장실 유적이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실시한 조사에서 화장실은 배수로와 같은 방향으로 3기가 나란히 배치되었고, 내부에는 나무 기둥을 박아 공간을 나누었으며, 각 칸의 바닥에는 구덩이를 파서 사람 여럿이 한꺼번에 사용할 수 있게 한 공동 화장실이었을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백제세계유산센터에서 제작한 왕궁리 화장실 영상

이 화장실들은 규모도 규모였지만 생각보다 과학적이었다. 화장실 내부의 오물이 일정 높이까지 차오르면 인근의 동서 석축 배수로로 흘려보내는, 저류식 화장실과 수세식 화장실을 섞은 독특한 형식이었다. 뒤이어 흙과 다른 출토물을 조사하여 밝혀진 것들도 있었다. 흙에서 나온 기생충들은 채식 위주 식사를 했을 때 생기는 기생충들이 대부분이었고, 용도 미상의 나무막대는 뒤처리용 막대였다.[13] 이러한 유물은 중국에서 유래되어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해졌기에 3국 모두에서 발견된다.


파일:왕궁리 변기토기.jpg

왕궁리 유적에서 발굴된 변기토기[14]

왕궁리 유적에서는 화장실 유적 말고도 유물로 변기 형태 토기 2점이 출토되었는데, 조선시대의 매우틀과 비슷한 도구였다고 본다. 화장실 유적과 변기형토기 유물이 같은 곳에서 나왔고, 화장실 유적은 공방 유적 근처에 있었으므로 신분에 따라 일처리를 하는 방식 역시 달랐던 듯하다. 기와 조각은 발굴 당시 구덩이 위쪽에 마구잡이로 쌓여 있었기 때문에, 모종의 이유로 화장실을 폐기할 적에 사용했다고 추정한다.



백제세계유산센터에서 제작한 왕궁리 정원 영상

2004년부터 4년간 이뤄진 발굴조사서는 네번째 동서 석축 주변에서 백제시대의 정원 유적이 비교적 완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그간 기록에만 등장하여 막연히 추측할 수밖에 없었던 정원이 실제로 발견된 것이다. 정원 유적에서는 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곳을 비롯하여 수로시설, 암거시설, 집수시설 등이 있었고, 한 켠에는 정자 같은 쉼터를 짓기 위해 터를 조성했음을 확인했다. 정원은 지형의 높낮이를 이용해 물이 아래쪽으로 흐르는 방식이었고, 주변을 온갖 정원석으로 꾸며 자연경관을 축소한 형태로 조성했다.

정원 주변에서는 정원을 비롯한 왕궁의 내부 시설들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복잡한 수로 체계가 확인되어 고대 왕궁의 수로 체계를 규명할 만한 자료가 확보되었다. 경주의 임해전지나 남원의 실상사처럼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의 정원 유적이 발견된 적은 있었지만, 백제시대의 정원 유적이 이 정도로 완전한 상태로 발견된 것은 왕궁리 유적이 최초였다. 정원의 양식은 중국에서 유행했고 일본에서 비슷한 양식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동아시아 지역의 정원이 어떤 식으로 변화해 나갔는지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파일:왕궁리 수로.jpg

왕궁리 유적에서 발굴된 수로[15]

정원의 발굴조사가 어느 정도 완료된 2008년부터는 정원 뒤편에 위치한 유적 북쪽의 구릉지대를 조사했다. 그 일대는 숲이었기 때문에 뭐가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따라서 2013년까지 천천히 범위를 넓혀가며 조사를 진행했다. 그리하여 지금껏 국내 고대 궁성 유적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던 후원 유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원 유적에서는 물과 관련된 도수시설이 다수 발굴되었는데, 그중 돋보이는 것은 후원 전체를 아우르는, U자를 반대로 뒤집은 모양인 거대한 환수구였다. 이 환수구는 단순히 주변에 괴석들을 배치하여 경관을 조성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닌 주변의 수로 등과 함께 유적 내 물의 흐름을 조절하려는 실용적인 목적 또한 있었다. 후원 중심부에는 건물 터가 발굴되었으나 상태가 좋지 않아 어떤 건물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발굴이 어느 정도 완료된 뒤 장방형 담장을 다시 축조하는 등 유적 정비 작업에 한창이던 2015년 7월, 인근의 미륵사지와 다른 지역의 백제시대 유적들과 함께 '백제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이후로도 발굴 및 정비작업은 계속되었고, 2017년 7월 11일부로 후원 영역과 궁궐 담장을 일반에 공개하면서 모든 영역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간 알려진 영역들이 개방된 뒤에는 그간 발굴되지 않았던 부분을 발굴조사하며 지금까지 진행 중이다.


파일:국립익산박물관.jpg

왕궁리 유적 유물을 보존하는 국립익산박물관

이곳에서 출토된 수많은 유물들은 2008년부터 유적 남쪽에 세워진 왕궁리유적전시관에서 제석사지를 비롯한 주변 유적지에서 발굴한 유물들과 함께 보존 및 전시했다. 2020년 미륵사지 한 켠에 국립익산박물관이 개관하면서 그곳으로 모든 유물들을 이관했다. 그리고 기존 전시관은 리모델링 및 증축 공사를 목적으로 휴관하였다. 공사를 마친 뒤 2022년 백제왕궁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꿔 달고 재개관하였다.



3.1. 발굴성과 종합[편집]


1) 왕궁의 지위
백제시대의 왕궁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어느 정도의 지위를 가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천도를 위한 왕궁이었을 확률은 낮으며, 청남대와 같은 별궁의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유적의 기술 수준이 평범한 수준이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수도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여러 제반 시설들의 흔적이 왕궁리 유적 주변에서는 발굴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왕궁에 물자를 조달하고 각종 관청의 행정기능과 근무인원의 거주지 역할을 수행하는 대규모 도시가 중요한데 그 흔적은 현재로서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2) 관련 기록의 신뢰성
일본의 《관세음응험기》에 따르면 무광왕이 금마저로 천도했다는 기록이 분명히 존재하나, 고대 기록들이 다들 그렇듯 실제 역사와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다른 기록과의 교차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현재 천도와 관련된 기록은 《관세음응험기》가 유일한 상태이다. 나라의 수도를 세우는 중대사라면 웬만해선 해당 유적에 대한 기록이 여럿 남았을 것인데,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기에 문헌만을 증거로 보았을 때 실제 천도가 이루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당장 《관세음응험기》에 등장하는 제석정사 역시 인근의 제석사지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확실하지 않은 상태이다. 무광왕이 제석정사를 지었다고 쓰여 있지만 정작 제석사지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근거로 본다면 제석사는 위덕왕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 제석사지 참고.

3) 만들어진 목적
무왕에 의해 세워진 유적이 맞다면, 이는 왕권강화나 신라와의 전쟁을 위한 것이라고 보는 추측이 존재한다. 왕권강화가 목적이라는 설은, 정황상 권력구도에서 멀었던 무왕이 웅진-사비의 유력 귀족 가문들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의 지지 기반을 새로이 다지기 위해 금마저로 천도하려 했다는 설이다. 신라와의 전쟁을 위한 것이라고 보는 설은 신라와의 전쟁을 자주 벌였던 무왕이 보다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고, 전투 진행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기 위해 금마저에 별궁을 짓고 정무를 보았다라는 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의 영역이며 관련 유물이 적기에 확실하지 않다. 추가 발굴 성과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4) 왕궁과 사찰의 관계
사찰이 어느 시기에 조성되었는지 역시 확실하지 않다. 현재로서는 백제 멸망 이후 조성되었다는 것과, 처음부터 왕궁 안에 같이 있었다가 왕궁이 사라진 후 그 영역을 차지했다는 두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다만 그나마 확실한 것은 왕궁보다는 오래 존속되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백제 멸망 이후부터는 '신라의 지방 사찰'로서는 얼마든지 재사용이 가능하지만 '신라의 왕궁'으로 사용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며,[16] 실제로 목탑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석탑 주변에서 다양한 이름이 새겨진, 통일신라를 비롯한 다양한 연대의 명문기와들이 발굴되었다.

5) 무왕 시기의 백제 유물 발견
왕궁리 유적은 석탑 덕분에 예로부터 유명한 곳이긴 했지만 석탑 외에는 별다른 게 없어 인근의 미륵사지에 비해 소외되어 있었고, 나중에 석탑의 보수를 위해 해체하는 과정서 유물이 발견되자 그제서야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 후 왕궁리 유적에서는 당초 예상되었던 절 관련 유적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한 유적들이 하나씩 그 모습을 드러냈고, 유적들 안에서는 그간 사료가 부족했던 백제의 역사를 새로 쓸 만한 많은 유물들이 수습되었다. 왕궁리 유적은 단순한 사찰 유적에서 왕궁 유적으로 격상되었고, 후속 연구를 통해 백제시대, 특히 무왕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는 결론이 나왔는데, 이는 이 일대의 유적들과 마찬가지였다.

6) 현재의 결론
결국 이곳에 백제시대의 왕궁이 있었긴 했지만 어째서 이런 곳에 왕궁을 세웠는지는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또한 절터 유적 역시 명문기와가 출토되어 명칭은 알아낼 수 있었지만 절이 언제 세워졌고 언제 사라졌는지에 대한 것은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아직도 왕궁리 유적에는 밝혀내야 할 것이 많이 남아있다.


4. 왕궁리 오층석탑 및 사리장엄구[편집]



파일:SAM_5693.jpg

왕궁리 오층석탑

“왕궁탑은 폐허가 된 궁터 앞에 10장 높이 돌을 쌓은 것인데 소문으로는 마한시대에 세워졌다고 한다.”

《금마지》[17]


현재 왕궁리 유적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구조물인 왕궁리 오층석탑은 매우 넓고 휑한 터에 홀로 서 있는 상태로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왕궁리 유적을 대표하는 유적이 되었다. 근처에 살던 사람들은 멀리서도 보이던 이 탑을 영험하게 여겨 탑 앞에서 제를 올리기도 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탑 안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것이란 이야기도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져 오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만 했지 체계적인 관리는 전혀 이뤄지지 않아 탑은 오랜 세월 동안 점점 허물어지고 있었다. 탑은 전체적으로 서쪽으로 기울고 기단부에 고정된 석재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기단부가 계속 벌어졌다간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기 때문에 일단 응급처치로 기단부를 흙으로 덮어 놓았고, 이 일 때문에 한때는 기단부가 돌이 아닌 흙으로 되어 있는 희귀한 유형의 석탑이란 오해를 받기도 했다.

지속적으로 보수를 받지 못해 계속 무너져가는 건 일제강점기에도 그대로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1938년에 전북지사가 석탑 보수를 위한 비용을 조선총독부에 신청한 문건이 남아있는 것처럼 꾸준히 보수를 시도하기는 했지만 비용이 모자라 방치되어 있다가 해방과 한국전쟁이 끝나고 정권이 교체된 1965년 말이 되어서야 공사에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왕궁리 석탑의 해체 및 복원 작업은 당시의 역사학계나 지역 사회 모두에게 꽤나 큰 사건이었기에 이를 둘러싼 여러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사실일 가능성은 크지 않겠지만, 왕궁리 오층석탑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제법 많으니 이러한 이야기들이 탄생하여 전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체 과정서 왕궁리 오층석탑의 구조를 살펴볼 수 있었는데, 왕궁리 오층석탑은 여타 석탑과는 달리 목탑과 비슷한 양식을 가지고 있었다. 기단의 경우는 중앙에 주춧돌을 배치하고 그 위에 팔각기둥 4개를 세운 뒤 기둥의 사이를 길게 다듬은 장대석으로 연결하여 만들었고, 기단 위에는 심초석을 올려 탑을 지탱하도록 했다. 탑신과 지붕돌 역시 통짜 돌을 올린 게 아니라 여러 매의 돌들을 조립하여 올렸다. 탑의 지붕돌은 끝이 살짝 올라가 있었던 흔적이 있었는데, 이는 부여의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유사한 것이었다. 지붕의 모서리 4곳에는 구멍이 뚫려 있어 종을 달았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상륜부의 경우는 노반, 복발, 앙화까지만 남아있었다.

처음엔 그저 무너지려던 탑을 바로 세우려는 게 전부였지만 해체 과정 중에 생각치도 못한 놀라운 유물들이 출토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되었다. 기단을 해체하던 중 중앙의 주춧돌에 3개의 사리공이 있어 뭐가 있나 봤더니 청동방울과 유리구슬, 금동불상이 나왔다. 그 다음으로는 1층 지붕돌 한가운데 2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여긴 또 뭐가 있나 봤더니 각각의 구멍마다 금동으로 만든 사리함이 나왔고, 사리함의 안에는 금으로 만든 사리내합이 들어 있었다.

사리내합은 재질도 재질이었지만 정교한 조각이 새겨져 있어 그 안에 들어있을 무언가가 대단한 것임을 짐작케 했다. 그렇게 개봉된 서쪽 사리내합의 내부에서는 19장의 금속판에 금강경을 새겨 넣은 뒤 좌우로 경첩을 달아 연결하고 두 줄의 금띠로 묶은 금강경판이 나왔고, 동쪽 사리내합의 내부에서는 녹색 유리로 된 사리병이 나왔다. 이렇듯 유물들의 수준은 대단한 것이었고, 그 덕에 발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국보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반면에 석탑은 사리함 발견 당시에는 국보로 지정되지 않았고[18], 시간이 좀 지난 1997년에 국보 제 289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석탑이 언제 세워졌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나왔는데, 처음 나온 의견은 사리장엄 중 금동불상의 양식을 따라 통일신라 말 혹은 고려시대 초기에 세워졌단 것이었다. 하지만 석탑의 형태를 봤을 때 기단부는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인 반면 지붕돌의 끝을 살짝 올리는 기법은 백제시대의 양식이었다. 발견된 유물들의 연대도 엇갈렸는데, 상술했듯이 기단부서 출토된 금동불상이 10세기 초의 작품으로 추정되었지만 지붕돌서 출토된 사리함과 사리내합, 금강경은 백제 때의 작품으로 추정되었다. 이처럼 백제, 통일신라, 고려 초기 등 다양한 시기가 탑의 제작 연대로 거론되었고, 이에 대한 결론은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나오지 않고 있으며, 논의는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탑의 해체 및 복원 작업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왕궁리 유적이 범상치 않은 유적이란 것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유적 전체에 대한 광범위한 발굴은 10년도 더 지난 뒤에 시작되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연구로 해당 석탑 이전에 목탑이 있었다고 한다. 백제와 통일신라의 양식인 목탑은 석탑 이전의 양식을 지니고 있었을 테니, 백제 양식의 목탑으로써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4.1.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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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보 제289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益山 王宮里 五層石塔


소재지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산80-1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수량/면적
1기
지정연도
1997년 1월 1일
제작시기
고려시대


파일:왕궁리오층석탑.jpg

왕궁리 오층석탑


4.1.1. 외부 링크[편집]




4.1.2. 국보 제289호[편집]



마한시대의 도읍지로 알려진 익산 왕궁면에서 남쪽으로 2㎞쯤 떨어진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이다. 1단의 기단(基壇)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을 1965년 해체하여 수리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드러났다.

탑의 기단은 네 모서리에 8각으로 깎은 주춧돌을 기둥삼아 놓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길고 큰 네모난 돌을 지그재그로 맞물리게 여러 층 쌓아 올려놓아 목조탑의 형식을 석탑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 팔각기둥과 네모난 돌들 사이는 흙을 다져서 메웠는데 이 속에서 백제시대의 기와조각이 발견되기도 했다. 발굴 중에 기단 각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조각을 새긴 것이 드러났으며, 탑의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1층부터 5층까지 탑신부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1층 몸돌에는 다시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 모양을 조각했다. 지붕돌은 얇고 밑은 반듯하나,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위로 치켜 올려져 있으며,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각 층 지붕돌의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 다른 돌을 끼워놓았다. 5층 지붕돌 위에는 탑머리장식이 남아있다.

지붕돌이 얇고 넓어 빗물을 받는 낙수면이 평평한 점이나, 탑신부 1층의 지붕돌이 기단보다 넓은 점 등 백제석탑의 양식을 일부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언제 제작되었는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상태였으나 1965년 보수작업 때 기단의 구성양식과 기단 안에서 찾아낸 사리장치의 양식이 밝혀지면서 그 시기가 비교적 뚜렷이 밝혀졌다. 즉, 백제의 옛 영토 안에서 고려시대까지 유행하던 백제계 석탑양식에 신라탑의 형식이 일부 어우러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이 석탑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유물들은 국보 제123호로 일괄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최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발굴과정에서 지금의 석탑에 앞서 목탑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이 이 탑 밑부분에서 발견되어 다시금 주목을 끌고 있다.



4.2.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관련 전설 및 민담[편집]


1. 왕궁탑의 유래에 대한 전설
  • 고려 태조 왕건후백제견훤을 굴복시키지 못하여 급기야 도선대사를 불러 그 대책을 묻자, 도선대사는 왕건에게 "완산의 지세가 개가 웅크린 형상이므로 그 꼬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탑을 쌓으면 꼬리가 눌려 일어서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했다. 그래서 왕건이 꼬리에 해당하는 자리에 탑을 쌓았는데 바로 왕궁탑이다. 탑이 완성되자 완산이 사흘 동안 깜깜해졌고, 이후 견훤이 몰락했다고 전해진다.[19]

2. 남매의 탑 쌓기 전설
  • 옛날에 장사 남매가 살았다. 이들은 서로 제가 더 힘이 세다며 옥신각신하다가, 급기야 누가 더 빨리 탑을 쌓는지를 놓고 내기를 했다. 그런데 누이는 크고 섬세하게 쌓아올리는데, 오빠는 작고 투박하게 쌓아올렸다. 그래서 오빠가 먼저 탑을 완성했고 결국 누이가 쌓은 탑은 미완성인 채로 남아버렸다. 그렇게 오빠가 쌓은 탑이 지금의 왕궁탑, 누이가 쌓다 만 탑이 미륵사지 석탑이다.[20]

  • 다른 전설도 있다. 남매를 둔 노파가 있었는데, 어느날 노파에게 관상쟁이가 찾아와 "자식 둘 중 하나를 내보내지 않으면 불길해진다." 일러주었다. 노파는 남매 가운데 가장 먼저 탑을 쌓는 자식을 거두고 늦게 쌓은 자식을 내치기로 했는데, 딸에게는 일부러 크고 섬세하게, 아들에게는 작고 투박하게 탑을 쌓게 했다. 그런데 딸이 밤낮없이 열심히 탑을 쌓았던 반면, 아들은 설렁설렁 게으름을 피우며 느긋하게 탑을 쌓는 바람에 결국 남매가 동시에 탑을 완성했다. 노파는 하는 수 없이 둘 다 거두었는데, 이때 딸이 쌓은 탑이 미륵사지 석탑이고 아들이 쌓은 탑이 왕궁탑이라고 한다.

3. 왕궁탑 해체 복원과 관련된 전설
  • 왕궁리 석탑이 기울고 붕괴될 조짐을 보이자 정부에서는 왕궁탑을 해체 복원하기로 결정하고 1965년 해체 작업에 들어갔는데, 그 과정에서 옥개석 이음새로 사용된 꺾쇠에서 '천석(千石)'이라는 명문(銘文)이 발견되었다. 아마 왕궁탑을 처음 쌓을 때 참여한 일꾼이 제 이름을 세겨둔 걸로 추정되었는데, 공교롭게도 당시 왕궁탑의 해체 복원을 총감독하는 사람의 이름이 김천석(金千石)이었다고 한다.

  • 12월 5일에는 왕궁탑의 1층 개석과 기단 가운데에 감춰진 여러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유물이 출토되자 쾌청했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면서 난데없는 흙먼지가 일어났고, 유물들을 전부 수습하자 흙먼지가 그치고 날이 다시 개었다고 한다.

  • 공사를 감독하던 김천석이 갑자기 쓰러져 전주 예수병원으로 후송되었는데, 의사들이 아무리 진단해도 병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김천석은 사경을 헤매었다. 그러다가 현장에서 탑 상층부를 해체하면서 감춰진 유물들이 출토되자 병세가 호전되었고, 며칠 후 퇴원하여 현장에 복귀했다고 한다.

  • 왕궁리 석탑의 해체가 거의 끝나 기초가 드러났을 때 갑자기 땅 속에서 알 수 없는 붉은 기운이 솟아올랐다고 한다.


6. 찾아가는 방법[편집]


  • 익산역에서 갈 경우 인근의 대한통운 정류장에서 65번 계통 버스를 타면 된다. 돌아올 때도 같다.

  • 주말과 공휴일에는 익산역 앞에서 시에서 운영하는 순환형 시티투어버스를 타면 된다.

  • 금마공용버스터미널에서 내려서 걸어가는 방법도 있다. 인도는 중간에 끊기지만 차량 통행이 별로 없어서 도로 가장자리로 가면 된다.

  • 위 방법이 위험하다 생각된다면 금마터미널 앞에서 택시를 타거나 시간을 잘 맞춰 삼례 방면으로 가는 65번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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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두 번째 사진 출처 - 백제세계유산센터.[4] 보물 제44호였지만 1997년에 국보 제289호로 승격되었다. 따라서 보물 제44호는 영구결번이다.[5] 마찬가지로 준왕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유적으로 기준성(箕準城)이나 용화산성(龍華山城)이라고도 한다.[6] 사적 제92호 익산토성[7] 익산 일대에 남아 있는 유적들을 통해 추정하면 익산은 사비 백제 시절 제 2의 수도 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의 개경-서경, 원나라의 대도-상도의 경우처럼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수도와 이를 보조하는 부수도를 둔 것과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8] 익산의 옛 이름으로, 이를 다르게 음차한 것이 '금마저(金馬渚)'. 익산의 옛 중심지였던 '금마'면도 여기서 지명이 유래되었으며, 금마면의 소재지 이름이 동·서고도(古都)리이기도 하다.[9] 정관 13년, 즉 서기 639년은 무왕미륵사를 세웠거나 최소한 미륵사의 석탑을 건립한 해이다.[10] 바야(波若)는 범어 쁘라갸(prajñā)를 음차한 한자어 반야(般若)의 다른 표현이다. '파야' 또는 '파약'이라고 잘못 읽기 쉬우나 여기서는 '바야'로 읽음이 맞다. '바야경'은 '반야경'과 같은 말로 반야 사상을 설명하는 불경(반야부 경전)을 두루 가리키는데, 《금강경》은 반야부의 대표적인 경전이다.[11] 사진 출처 - 《서울신문》, 원 문화재청.[12] 사진 출처 - 《익산신문》.[13]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궁예가 신하들에게 '똥막대기'라고 질타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말하는 똥막대기가 바로 이러한 용도에 쓰는 것이다.[14] 사진 출처 - 《익산시민뉴스》.[15] 사진 출처 - 《중도일보》, 원 《연합뉴스》.[16] 절이야 왕조가 바뀌어도 불교라는 사상은 계속 남아있으니까 재사용이 가능하지만 왕궁은 왕조가 교체되면 당연히 제 기능을 잃고 관리할 주체도 사라지기 때문에 금방 쇠락한다. 신라 멸망 후 조유궁이 철거되고 고려 멸망 후 수창궁은 창고로 전락했으며, 조선 궁궐도 조선 멸망 후 경복궁의 전각이 다수 해체된 뒤 조선총독부 청사 부지가 됐고 창경궁은 아예 동물원이 되었다. 중국의 이야기지만 명나라의 궁궐이었던 자금성을 그대로 정궁으로 사용한 청나라가 상당히 특이한 경우다.[17] 1756년(영조 32)에 간행된 익산 읍지[18] 이미 보물 제44호로 지정되어 있었다.[19] 다만, 실제 역사에서는 도선대사는 왕건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열반했다. 즉, 전설일 뿐.[20] 실제로 미륵사지 석탑의 규모가 더 크다. 미륵사지 석탑은 무너진 부분이 있지만, 남아있는 부분만 해도 14.2 m, 온전하게 복원된다면 동양 최대 규모 석탑(최대 9층)으로 추정한다. 왕궁리 5층석탑은 전체 8.5 m 5층 규모이다. 무너진 부분까지 감안한 설화인 듯하다. 지어진 시기는 미륵사지 석탑은 삼국시대(백제), 왕궁리 석탑은 고려 시대(추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