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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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제군주제하에서의 왕권과 신권의 대립양상
2.1. 전제군주의 의미
2.2. 현실
3. 왕권의 강화 방법
3.1. 안정적인 왕위 계승
3.2. 정치적 방법
3.2.1. 친척 중용
3.2.1.1. 장점
3.2.1.2. 단점: 반란
3.2.2. 외척 중용
3.2.2.1. 장점
3.2.2.2. 단점: 라이벌의 등장(구(舊), 신(新) 외척)
3.2.3. 환관 이용
3.2.3.1. 장점
3.2.3.2. 단점: 무능력
3.2.4. 부르주아에게 요직을 맡김
3.2.5. 귀족을 우롱의 대상으로 전락시킴
3.2.6. 지방관리를 파견하여 귀족감시
3.2.7. 왕실에 과도한 에티켓을 부여
3.2.8. 귀족에게 세습불가 봉토 하사
3.2.9. 귀족에게 줬던 특권 폐지
3.2.10. 신흥 귀족의 수를 더 늘림
3.3. 군사적 방법
3.3.1. 대규모 전쟁, 원정
3.3.2. 국왕직속 혹은 상비군 창설
3.3.2.1. 혼인 불가 상비군
3.3.2.2. 상비군
4. 이후의 발전 형태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왕권()이란 군주 또는 왕실권력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관료, 귀족 등으로 구성된 신료들의 권력인 신권과 대립된다. 특히 전제군주제의 군주들은 신권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2. 전제군주제하에서의 왕권과 신권의 대립양상[편집]



2.1. 전제군주의 의미[편집]


전제군주가 통치하는 이른바 동양국가는 작게는 동북아시아중국한국 넓게는 동유럽, 중동북아프리카오스만 제국이나 동로마 제국에 이르기까지 이론상 전제군주가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신민의 생사여탈권한을 쥐고 있었다. 즉, 모든 귀족과 관료는 왕의 노예로 왕의 명령을 수행하는 존재이자 왕을 위하는 게 존재 의의였다. 흔히 전통시대 왕조라고 하면 귀족보다는 왕권이 강화되어야만 정치적으로 안정이 되고, 민생도 따라서 안정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1]

이에 반해 봉건제도를 사용했던 서유럽의 경우, 왕의 권한이 매우 제한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게르만 시절 선거부족장 시대의 족장이 왕이 된 이유도 있었을 것이며 교회의 사회적 도 무시할수 없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서 왕이 국가원수이긴 하지만 각자의 영역을 존중해야 하는 사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서유럽의 절대왕정도 사회변화에 따른 왕의 영역이 비대하게 강해지면서 얻은 불안정한 권력이었다. 이는 왕은 법위의 존재라는 일반적 전제군주제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2.2. 현실[편집]


전제군주제에서 명목상 군주의 권한이 아무리 강력하다 한들 이론현실은 다른 이고 명목상의 권한과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왕권은 차이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명목상 아무리 강력한 전제군주라도 왕의 명령을 집행하고 통치를 보좌하는 관료와 고위 관료를 독점하는 귀족 및 사대부, 지방토지를 소유한 소귀족과 호족에게 권력이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강력한 군주라도 혼자서 모든 일을 할 수 없는 이상에 이런 통치권을 어느 정도 나누어 가진 지배층과 온갖 이해관계 속에서 타협을 하면서 움직여야 했다. 더구나 왕은 궁궐에서 혼자서 고립된 존재이지만 권력층은 혼인, 학연, 지연 등등 각종 인맥으로 맺어진 사이였다. 이러니 아무리 막강한 전제군주라도 명령 한 마디에 모든 일이 일사분란하게 돌아가게 하기는 어려웠다.

또한 세습군주제의 경우 기본적으로 능력에 따라 왕위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혈연관계에 따른 왕위계승순위에 따라 즉위하기 때문에 개인의 정치력과 리더쉽유전자를 통해 물려받는 것이 아닌 만큼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하거나 정신이나 건강에 문제가 있거나 혹은 단순히 능력이 부족하다거나 적성에 안맞는 사람이 왕위에 오르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왕권은 실추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설사 본인 능력에는 문제가 없다고 해도 왕 본인이 정치를 할 의지, 의사가 없어서 국정은 모두 총신(寵臣)에게 떠넘기고 본인은 놀아제끼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세자가 능력이 없거나 정치를 할 의지가 없는 경우 세자를 폐하고 왕위계승순위가 낮더라도 다른 능력있는 왕족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방법도 있으나 그럴 경우에는 또 정통성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러다보니 전제군주제 왕조라고 하더라도 왕이 실제로 강력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시기는 매우 적었고, 권신, 외척, 환관, 심지어는 태상왕이나 세자에게 밀려나 바지사장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3. 왕권의 강화 방법[편집]


당연히 이런 군주권이 제한된 상황황제라고 좋아하는 건 아니였다. 특히나 중앙 집권이 강력한 동양권 국가일수록 이론상 권력과 실제로는 중앙 관료 집단과 마찰로 인한 제한받는 현실의 괴리감이 클 수 밖에 없었다.[2] 군주의 명령을 받는 관료집단 그 자체가 왕을 견제하는 형태이니 왕들이 답답함을 느꼈고 이런 상황을 타파하고자 다양한 방법들이 사용되었다.

평화시에 통상적으로 많이 쓰이는 방법은 왕의 친가인 왕실 인사의 기용, 왕의 외가인 외척 기용, 환관의 중용이었다. 문제는 이런 방법들은 널리 쓰이는 만큼 효과가 있었지만 부작용도 심했다.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는 방법도 있었다.


3.1. 안정적인 왕위 계승[편집]


말 그대로 그 나라의 왕위 계승의 법칙에 따른 정당한 후계자에게 안정적으로 계속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다. 사실 군주 본인이 밑에 있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군주 본인의 왕권을 최대한 끌어올렸더라도 그 왕권은 본인이 살아있을때에는 아무 문제 없이 유지 가능하겠지만 본인이 죽고 나서 그 다음 왕위에 오른 후계자가 너무 어리거나, 왕위 계승의 법칙에서 벗어나 정통성이 부족하거나 하는 경우 애써 끌어올려놓은 왕권이 그 다음 후계자 대에 가서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긴 세월동안 왕위계승법에 따라 안정적으로 왕위를 계승하기만 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왕실의 권위가 상당히 높아져 자연스럽게 왕권을 높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경우 중세까지만 해도 선거로 왕을 뽑자는 말이 나올정도로 왕실의 권위가 낮았으나 카페-발루아-부르봉 왕조로 이어지는 왕가의 혈통을 계속 보존한 덕분에 근세 이후로는 태양왕 루이 14세로 대표되는 절대왕정을 구축할 수 있었다. 반면 옆나라 신성 로마 제국은 중세 이후 대공위시대가 발생하는 등 황위 계승이 불안정하여 황권이 계속 약화되어 30년 전쟁베스트팔렌 조약 이후로는 제후들에 대한 통제를 완전히 상실하여 제국이라는 체제 자체는 완전히 껍데기만 남은 수준으로 몰락한다.

문제는 그 왕위 계승의 법칙이 역사적으로 일반적인 세습군주제라면, 안정적으로 왕위 계승을 하기 위해 군주 본인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군주의 자녀들이 사고질병으로 사망하지 않고 무사히 장성할수 있을 정도로 운이 따라줘야 하며, 또한 위에서 설명했듯이 능력이 없거나 의지가 없는 암군이 왕위에 오르는 경우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3.2. 정치적 방법[편집]



3.2.1. 친척 중용[편집]



3.2.1.1. 장점[편집]

친가인 왕실 인사 기용은 동일한 이익을 공유하는 친족에게 권력 몰아줌으로써 폐쇄적인 관료집단을 자기 혈연을 통해서 통제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장점이었다.[3] 거기다 왕실 인물인만큼 일반 귀족보다 더 권위가 있어서 말빨도 서고 귀족/사대부에게 이익이 되는 것보다 왕실에 이익이 되는 쪽으로 움직였다. 혈연인만큼 통상적으로 충성을 받아내기도 쉬었다. 왕실은 적절한 경우 권신이나 호족들로부터 왕을 지켜낼 울타리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3.2.1.2. 단점: 반란[편집]

문제는 이런식으로 권력을 가진 왕실 인사는 왕위 계승권이 있기에 까딱하다가는 반역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나 중앙의 권위가 허약할수록 반역 가능성이 높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팔왕의 난계유정난. 이러니 통상 계승권이 가까운 인물일수록 중용되기 어렵고 이러면 권위가 살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계승권에서 멀면 100% 안전한 것도 아니였다. 그리고 왕실 기용의 폭이 클수록 지배층의 반발도 커져서 한계가 있었다. 이래서 어느 정도 정비되는 국가일수록 왕실 기용의 폭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신라에서도 고위상층부는 죄다 진골귀족들이었는데 문제는 이 진골들은 너나없이 왕위계승권을 쥐어 신라 하대가 개판이 되는 원인이 되었다.


3.2.2. 외척 중용[편집]



3.2.2.1. 장점[편집]

왕실 인사의 단점을 해소하면서 혈연이 있는 인척을 기용하려는 시도에서 사용되는 게 왕의 외가를 중용하는 방법이었다. 외척은 왕이라는 존재가 있는 모든 국가에서 사랑받는 권력 장악 수단이었다. 일단 왕가는 혼인으로 이어진 혈족에 가까운 관계로 왕과 이익을 공유하는 면이 있다. 또한 왕실과 혼인할 정도면 어느 정도 세력이 있기 때문에 동맹으로는 제격이며 지배층 내에서 상당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관료통제에도 용이했다. 그렇기에 설사 고위직을 맡기더라도 반발이 적었고 다른 지배층과 인맥이 있기 때문에 여론을 이끌기도 쉬웠고 왕실에 충성하는 당을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계승권은 없었으니 왕실 인사보다 훨씬 안전했다. 중앙집권이 강할수록 왕에 의지해서만 권력을 가질수 있는 외척은 더더욱 왕에게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 후한은 관료를 장악한 귀족과 호족에 대해서 외척을 기용해서 대응했다.


3.2.2.2. 단점: 라이벌의 등장(구(舊), 신(新) 외척)[편집]

하지만 이것도 100% 해결책은 아니었다. 외척이라는 게 기형적으로 한 가문이나 집단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일이고 이는 왕실에 필적할 세력의 등장이었다. 통상 새로운 군주가 즉위해서 외척이 갈리면서 문제가 해결되지만 이 경우에는 구(舊) 외척과 신(新) 외척의 갈등이 발생한다.[4] 그렇다고 구(舊) 외척을 계속 중용하면서 혼인을 맺다가는 외척이 왕을 잡아먹는다. 원래부터 상당히 강력했을 외척은 왕실이 얽매이지 않고 다른 귀족 / 사대부와 연결되는 인맥이 있는 만큼 세력 만들기도 더 쉬웠다. 왕망은 외척이라는 입장으로 전한을 몰락시키고 건국했고, 조선은 안동 김씨 세도가 한 때는 나라를 흔들었다.

그리고 외척은 찬탈 루트로도 쓰인다. 조조, 수문제 같은 경우 찬탈 루트를 밟기 전 외척 루트도 같이 탔다.


3.2.3. 환관 이용[편집]



3.2.3.1. 장점[편집]

이렇게 피가 흐르는 친족은 계승권 분쟁으로, 혼인으로 맺어진 외척은 권력 독점견제 불가한 지배층 등장이라는 문제 때문에 기피하는 대신에 애용한 게 환관이었다. 기본적으로 환관은 노예로써 왕의 사유재산이나 마찬가지였다. 동시에 궁궐에서 고립된 왕이 어려서부터 가까이 지낸 사이로 인간적 관계가 가까웠다. 당연히 생사여탈 문제가 임면 문제에서 훨씬 자유로웠다. 환관 하나 죽이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었으니. 친가나 외가는 어째든 기존 관료제를 안에서 인사로 통제하는 방법이고 관료 집단과 권력과 이익을 공유하는 순간 왕이 고립되는 문제가 있었지만 환관은 관료제 밖의 존재였다. 이런 점 등에서 지배층과 연결될 고리도 적었다. 거기다 왕이 아니면 권력을 가질 수 없다보니 다른 지배층과 결탁할 수도 없었고 기본적으로 원래 신분도 낮은 편이었으니 귀족이나 사대부가 친하게 지내기 어려웠다. 고자라서 권력이나 재물을 몰아줘도 물려받을 자식이나 가족도 없어서 죽으면 기본적으로 왕에게 돌아오고 새왕이 즉위한다고 환관이 유세부리기도 어려웠다. 그러면서 원래 고자니 역성혁명 가능성도 없었다. 이러니 원래 하렘이 있던 나라들은 물론이고 기독교 국가인 비잔티움 제국도 하렘이 없음에도 환관을 관료로 기용했을 정도로 왕들에게 사랑받았다. 중국은 환관을 조직화 했고 단순한 왕의 명을 받드는 거부터 시작해서 기밀관리, 군대 감독을 맡기더니 아예 군대 지휘와 관료 감시까지 도맡았다. 의 강력한 황제권 뒤에는 동창으로 대표되는 거대한 환관 조직이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도 나르세스 같은 환관 장군이 있었다.


3.2.3.2. 단점: 무능력[편집]

문제는 환관을 기용했다가 망한 사례가 조선의 이웃인 중국사에 잔뜩이었다. 기본적으로 환관은 궁정 사무를 처리하는 존재였고 신분이 높지 않은 이들로 학문적 소양이 높지 않았고 높을 필요도 없었다. 이러니 국가를 운영하려는 큰 철학이나 비전이 없었고 출세 때문에 환관이 된 경우가 대부분이니 권력 획득 후 큰 그림을 그리는 대신에 자기 욕구 해결이 우선이었다. 거기다 군주에게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로 권력을 획득하게 되는 만큼 윗사람에게 잘보이는 아부와 처세술이 뛰어난 전형적인 간신, 무능력한 상사가 권력을 가지기 쉬웠다. 안 그런 경우도 있지만 그런 인간성 좋고 능력있고 정치적 안목도 있는 환관은 긴 중국 역사에서도 손에 꼽을 수준이었다.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조고가 국정 농단과 황제시해를 자행했고, 이후 후한도 환관의 농단과 십상시의 전횡으로 결정타를 맞고 망했으며 당나라는 황제가 환관의 반란으로 노예인 환관의 포로이자 사실상 노예라는 처참한 상태가 되었다. 강력한 황제권을 가진 명은 황제가 환관에게 농락당하지 않았지만 대신에 환관이 황제를 홀리고 권력을 대신 휘두르면서 나라를 망하게 만들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사례는 예외 중의 예외로 애초 비잔티움 제국의 환관은 타 문명권의 환관과 신분부터가 달라서 이들은 주로 황위계승에서 밀려나 거세당한 황족이 많았다. 당연하게도 거세당했다고 본 신분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황족인 만큼 타 문명권의 환관들과는 질이 달랐다. 때문에 고위직을 턱턱 받을 수 있던 것.


3.2.4. 부르주아에게 요직을 맡김[편집]


서유럽에서는 동양과는 다른 방식의 왕권강화를 시도했는데, 바로 전통의 기득권 세력인 귀족 대신 신흥 세력에 해당하는 부르주아 계층을 밀어주는 것이었다. 귀족 세력은 농업토지를 기반으로 세력을 형성하는 반면, 부르주아 계층은 상공업을 통해 성장한 계층으로, 서로 이익이 충돌하기 때문에 이들을 밀어주면 자연스레 귀족의 세력을 줄일 수 있었다. 유럽절대왕정은 이러한 방법으로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고도로 발달된 상공업이 요구되는 시대의 흐름과 맞아떨어져 국력 자체가 강화되는 기능이 있기도 했다.



3.2.5. 귀족을 우롱의 대상으로 전락시킴[편집]


  • 루이 14세: '국왕 직속 수건 담당', '국왕 직속 낭독인', '국왕 직속 심부름꾼' 등. 그러나 나중에는 이런 자리라도 얻기 위해 귀족들끼리 암투를 벌이거나 금전으로 사고파는 일까지 벌어졌다.


3.2.6. 지방관리를 파견하여 귀족감시[편집]




3.2.7. 왕실에 과도한 에티켓을 부여[편집]




3.2.8. 귀족에게 세습불가 봉토 하사[편집]




3.2.9. 귀족에게 줬던 특권 폐지[편집]




3.2.10. 신흥 귀족의 수를 더 늘림[편집]


  • 프랑스루이 14세: 부르주아들을 신흥 귀족들로 만들어 버리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신흥귀족들끼리 연합하여 사다리 걷어차기를 하였고 재산은 있지만 신분상승이 막혀버린 후발 부르주아들은 신세한탄을 하면서 혁명사상에 빠져들게 되었다.


3.3. 군사적 방법[편집]



3.3.1. 대규모 전쟁, 원정[편집]


군주가 직접 주도하는 전쟁이나 대외원정, 정복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방법. 전쟁 같은 비상 상황 시, 총사령관을 겸하는 왕은 말 안 듣는 귀족들을 ’군사적 목적’ 핑계로 숙청이 가능했다. 게다가, 전쟁이 성공만 한다면 군주의 권위와 왕권은 수직상승한다. 물론 전쟁에 패배한다면 왕권의 실추는 물론이고 나라를 말아먹을수도 있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도박적인 왕권강화책이다.


3.3.2. 국왕직속 혹은 상비군 창설[편집]



3.3.2.1. 혼인 불가 상비군[편집]

  • 초기 예니체리: 오스만 제국술탄 직속 노예부대[5]


3.3.2.2. 상비군[편집]

  • 스트렐치: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존재했던 러시아군 부대명.[6] 창설자는 뇌제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이반 4세, 러시아 최초의 상비군이었다고 한다.



3.3.3. 쿠데타숙청[편집]


권력이 있는 왕족이 신하들에게 휘둘리는 어리거나 무능한 왕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거나 국왕 본인이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권신과 귀족들을 숙청하는 방법. 사례로는 밀명을 내려 김준임유무를 차례로 주살하고 무신정권을 종식시킨 고려 원종고다이고 덴노겐무 신정 등이 있다.[7] 이 방법의 문제점은 국왕을 도와 쿠데타에 참가하여 포상으로 한자리씩 받은 공신들이 왕권을 위협하는 또다른 세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4. 이후의 발전 형태[편집]


  • 절대왕정: 왕권이 시민세력과 합쳐지면서 만들어진다.
  • 시민혁명: 절대왕정 이후, 시민 세력이 공식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기위해 일어나는 혁명[8]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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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은 선하고 신하는 악해서 민생이 해결되는게 아니다. 전제군주제의 왕은 국가의 소유주고 물려줘야할 재산이라 정말 포악하거나 어리석지 않는 이상 국가기반을 붕괴시키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반면 신하는 권한에 비해서 책임이 훨씩 적은 위치고 국가가 자신의 개인재산이 아니기에 한탕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반면 봉건제에선 신하들도 영지에선 전제군주이기에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간단히 가게 주인과 알바생 각각의 평균적인 책임의식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2] 이 괴리감을 뒤엎으려고 시도한 게 연산군이다.[3] 요컨데 신하들에게 지연, 학연, 혈연이 있다면 왕에게는 왕족이라는 혈연이 있는 것이다.[4] 서진사마염의 외척이었던 양씨와 사마충의 외척인 가씨의 갈등이 그 예이다.[5] 오스만 제국이 안정기에 접어든 이후부턴 오히려 예니체리가 황제들을 갈아버릴 정도로 강성해졌다.[6] '사격수'를 뜻한다.[7] 또다른 사례로는 친위쿠데타로 이자의를 비롯한 권신들을 죽이고 왕권을 휘어잡은 뒤 세력이 없는 헌종을 폐위시킨 숙종이 있다. 단 고려 헌종은 애초에 지병이었던 소갈증을 앓았던 지라 고려 숙종은 아예 애초부터 조카를 따로 죽이지는 않았다.[8] 영국의 명예혁명(1688), 프랑스의 프랑스 대혁명(1789)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