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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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가족 관계


王勵
(512 ~ 537)

1. 개요[편집]


서위의 인물. 이름은 려(勵)[1], 자는 추흥(醜興), 시호는 충식(忠武)이다.


2. 생애[편집]


북위에서 왕맹의 아들로 태어났다. 17세가 되던 해 사촌형[2] 우문태를 따라 관중에 들어왔고, 우문태가 진롱(秦隴)·관중을 평정하는 중에 그를 따랐다. 우문태는 왕려에게 "장수에 있어서는 앉은 자리에서 승패를 헤아리는 자가 으뜸이고, 갑주를 입고 창을 잡는 자는 그 다음이다."[3]라고 조언했는데, 왕려는 "무릇 그 둘을 겸하려고 합니다."[4]라고 답해 우문태가 크게 웃었다. 북위에서 왕려는 평동장군 산기상시에 임명됐고 양보현공(梁甫縣公)에 봉해졌다.

서위가 건국되고 대통(大統) 연간 초반에 천우위 비신직장 영좌우에 임명돼 문제의 침실에서 숙위를 맡았다. 왕려는 행동을 삼가고 조심했으며, 문제는 "왕려는 가히 두 마음이 없는 신하라고 할 수 있다."[5]라며 칭찬했다.

537년 10월 도독으로서 금군을 거느리고 우문태를 따라 사원 전투[6]에 종군했다. 왕려는 좌익에서 막하의 장수 수십명과 함께 단병기를 들고 적과 접전을 벌였다. 서위군 선두 병력이 큰 피해를 입어 사상자가 많았는데, 왕려도 중상을 입었고 결국 26세의 나이로 죽었다. 우문태는 사촌동생 왕려의 죽음을 깊이 슬퍼했다. 사후 사지절 태위 영상서령 십주제군사 옹주자사 함양군공에 추증됐고 시호를 받았다.


3. 가족 관계[편집]


왕려 사후 아들 왕필(王弼)이 습작했다. 왕필은 서위 안국공주와 결혼했고 관직은 무군장군 대도독 통직산기상시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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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사에서는 매(勱)라고 한다.[2] 우문태의 모친 왕씨가 왕려의 부친 왕맹과 남매간이다. 왕려가 5년 연하.[3] 為將, 坐見成敗者上也, 被堅執銳者次也.[4] 意欲兼之.[5] 王勵可謂不二心之臣也.[6] 동위의 승상 고환이 서위를 공격해 서위의 승상 우문태가 응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