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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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재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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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축구 감독


파일:96374_gallery.jpg

이름
왕선재
王善財 | Wang Seon-Jae
출생
1959년 3월 16일 (65세)
경상남도 산청군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직업
축구 선수 (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선수
한일은행 축구단 (1983~1984)
럭키금성 황소 (1985~1986)
포항제철 아톰즈 (1987~1988)
현대 호랑이 (1988~1989)
감독
원주공업고등학교 (1992~1994)
오븐클럽 (1995~1997)
동아대학교 (1988~2000)
아다프 갈루 마링가 (2007)
대전 시티즌 (2009 / 감독 대행)
대전 시티즌 (2009~2011)
옌볜 푸더 (2015~2017 / 유소년 감독)
옌볜 베이궈(2018)
한려대학교 (2019~2022)
코치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1~2003)
대전 시티즌 (2007~2009)
국가대표
1경기 2골 (대한민국 / 1984)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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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파일:왕선재 서명.png
본관
개성 왕씨[1]


1. 개요
2. 선수 시절
3. 지도자
3.1. 초기
3.3. 중국 생활
4.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축구 선수 출신 감독.


2. 선수 시절[편집]


1959년 3월 16일 경상남도 산청군에서 아버지 왕종진(王宗珍)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우고미(李又古未)의 딸 사이의 3남 2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야구부 소속, 즉 야구선수로 지냈는데 야구로 진학을 하려고 하다 보니 중학교를 마산, 부산 등으로 가야 했으나 시골에서 보내기가 힘들었던 탓에 공부 쪽으로 진로를 바꾸려 했다. 그러다 산청중학교 2학년 초에 개교기념일 행사로 축구대회를 했었는데, 당시 체육교사가 축구 잘 하는 몇 명을 눈여겨보고 축구부를 창단하면서 본격적으로 축구로 진로를 바꾸게 된다. 동아고등학교 입학 후 1학년부터 주전으로 뛰면서 2~3학년때 동아고를 전국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1] 여기에 동아고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78년에는 청소년대표팀에 발탁되어 아시아축구대회에서 20년만에 우승을 이끌었다.

하지만 연세대학교 진학 후 그에게 예기치 않은 시련이 찾아왔는데 정작 대학 시절에는 2년동안 고작 3경기를 뛴 것이 전부였을 정도로 출전 기회를 많이 받지 못했다. 당시 왕선재는 축구를 그만두려 했으나 연세대 3학년 무렵 감독이 교체되면서 출전 기회를 많이 보장받은 것이 위안이었다.

1983년 연세대학교 졸업 후 그는 프로 구단으로 입단하는 대신 김호 감독의 부름을 받아 실업팀인 한일은행 축구단에 입단하였는데, 그 해 한일은행은 창단 13년 만에 첫 우승의 감격을 누렸고 동시에 득점왕까지 선정되는 겹경사를 누렸다. 또한 1984년 싱가포르 아시안컵 예선전 대표팀에도 승선해 파키스탄과의 예선전에서 멀티골을 기록하였으며, 이후 아시안컵 대표팀에도 승선하였으나 단 한 차례도 기용되지 못하였다.

이후 럭키금성 황소에 입단하여 포항제철 아톰즈현대 호랑이를 거쳤으나 30세라는 이른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3. 지도자[편집]



3.1. 초기[편집]


이후 지도자로 전직하여, 원주공업고등학교 축구부 코치로 취임하며 지도자 무대에 입문하였으며, 1995년 호주의 오븐클럽의 감독으로 취임하였으며, 이후 동아대학교의 감독을 거쳐 2001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스카우트 겸 2군 코치로 부임하였고, 2002년 수석 코치로 보직을 변경하였다. 2007년 잠시 브라질의 아다프 갈루 마링가의 감독직을 맡았으며, 이후 수원 삼성 블루윙즈 시절 보좌했던 김호 감독의 부름을 받고 대전 시티즌의 코치로 부임하였다.


3.2. 대전 시티즌 감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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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시즌 중반 김호 감독이 구단과의 마찰 등을 이유로 사임하면서 대전 시티즌의 감독 대행직에 올랐고, 감독 대행으로서 대전을 FA컵 4강에 진출시키는 등 나름대로 대전 구단의 분위기를 잘추스르며 지도력을 인정받았고, 2010 시즌을 앞두고 정식 감독으로 승진하면서 구단 최초로 감독 대행 출신 감독이 되었다.

왕선재는 전술적인 측면은 김호 감독과 비슷한 측면이 많았으나, 김호와는 다르게 권위를 탈피하고 자율성을 강조하는 팀 분위기를 추구하였다. 전반적으로 선수를 믿고가는 스타일이었던 것이였다.[2]또한 리그에만 집중하고 컵대회는 비교적 2군 선수들만 내보내며 어린 선수들의 경험을 쌓게 해주는 용도로 활용하면서 유망주 육성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2011시즌 리그 초반에는 새로 영입한 박은호를 앞세워 엄청난 돌풍을 이어가며 창단 최초로 정규리그 1위에 오르는 이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3]

하지만 2011시즌 도중 승부조작 사태가 터지면서 주전급 대전 선수들이 대거 제명되었고, 승부조작 사태에 책임을 지고 7월 2일 전남 드래곤즈전을 끝으로 이사회에 사표를 제출하였고, 결국 7월 1일 이사회가 사표수리를 권고함에 따라 해임이 결정되면서 용두사미로 끝나버렸다.


3.3. 중국 생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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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야인으로 지내던 왕선재는 재능기부 형식으로 대학팀 등에서 선수를 가르쳤으며, 2013년 최진한 감독이 자진 사퇴한 뒤 공석이 되었던 경남 FC 감독직에 지원을 하기도 했다.

2015년 10월에 옌볜축구협회의 유소년 담당 지도자로 부임해 중국에서 옌볜 푸더 산하 U-16 팀을 이끌었으며 2017년에는 유소년 클럽 해란강FC의 해란강 축구클럽의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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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중국 을급리그 옌볜 베이궈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대략 7년만에 성인팀 감독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3.4. 한려대학교 감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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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한려대학교 감독으로 부임하며 대략 8년만에 국내 무대에 복귀하였다.#

왕선재의 지도 아래 해체위기와 지방 대학의 한계를 뛰어넘어 2020년 101회 전국체전 전남대학축구 선발전 우승과 더블어 대학축구 판도 변화의 중심축으로 성장세를 거듭하면서 감독 취임 3년 차 만에 한려대학교의 첫 전국대회 16강전에 진출을 이끌기도 하였다.

하지만 2022년 한려대학교가 끝내 폐교되면서 자연스럽게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4. 여담[편집]


  • 대전 시티즌 감독 시절 팬 서비스가 좋았다고 하며, 팬 사인회를 비롯한 팬들과의 만남에 적극 참여하고 원정길에 오르는 팬들에게 사비를 털어 간식 등을 주는 등 팬들과의 소통도 원활하게 했다고 한다.
  • 비록 승부조작이 터지긴 했지만, 대전팬들은 훗날 대전의 감독으로 부임하는 김인완, 최문식, 이영익 감독 등을 겪어보니 왕선재는 나름대로 괜찮은 감독이었다고 평가한다.
  • 2022년 국 동호인들의 축구 축제인 제41회 대한축구협회장기 전국축구대회 겸 2022 전국생활체육대축전에 전남 60대 구단을 이끄는 감독으로 참가해 압도적인 실력으로 대한축구협회장기 실버부(60대) 정상에 등극하는 기쁨을 맛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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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8년 제11회 대통령금배 전국고등학교축구대회에서 안양공업고등학교를 꺾고 최우수선수상을 수여받기도 했다.[2] 하지만 이 같은 팀 운영이 승부조작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지만 이를 무조건적으로 왕선재의 탓으로 보기는 어렵다.[3] 여기서 말하는 정규리그는 어디까지 최상위리그 K리그1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