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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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문종의 왕자에 대한 내용은 진한공 문서
던전 앤 파이터의 고대 던전에 대한 내용은 왕의 유적 문서 참고하십시오.
王儒/王柔
생몰년도 미상.
후삼국시대~고려 초기의 인물. 자는 문행(文行).
922년 진보성 성주 홍술이 고려에 들어오도록 회유했다. 훗날 홍술이 전사하자 왕건이 두 팔을 잃은 것과 같다고 슬퍼한 기록이 있어 왕유가 고려로 끌어들인 홍술은 상당히 중견 거물 호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932년 중국 후당에 외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932년 새겨진 <진철대사비문>과 944년 새겨진 <법경대사비문>에 의하면 그는 고려 초기의 1등 개국공신들과 나란히 이름을 올리고 있어 지위가 매우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위와 같이 이런저런 공을 세워 국성 왕(王)씨 성을 하사받았다. 벼슬은 대광에 이르렀으며 그의 딸은 왕건의 18번째 비인 예화부인이 되었다. 예종 묘정 배향공신인 왕자지가 그의 후손이다.
자세한 내용은 박유(태조 왕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중국 당(唐)대의 시인이자 화가에 대한 내용은 왕유(당나라)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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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王儒/王柔
생몰년도 미상.
후삼국시대~고려 초기의 인물. 자는 문행(文行).
2. 생애[편집]
본래 성은 박(朴)씨로 광해주 출신. 품성이 수수하면서도 정직했고 <경서>, <사서> 등에 통달했는데 태봉에서 원외랑, 동궁기실[1] 등을 지냈지만 궁예가 미치자 벼슬을 버리고 산 속으로 가서 숨었다. 이후 왕건이 정변 끝에 즉위하자 산에서 내려와 918년 6월 그를 알현했는데 왕건은 '부열, 태공망을 얻은 것'에 비유하면서 그를 얻은 것을 매우 기뻐했고 관모와 띠 등의 공복을 내려주고 기밀을 관장하는 직위를 맡도록 하였다.은사(隱士) 박유(朴儒)가 와서 알현하였다. 왕이 예를 갖추어 그를 대하며 말하기를, “다스려짐에 도달하는 길은 오직 현인(賢人)을 구하는 데에 있을 따름이오. 지금 경이 찾아오니 마치 부암(傅巖)과 위빈(渭濱)의 선비[士]를 얻은 것과 같소.”라고 하였다. 이어 갓[冠]과 허리띠를 하사하고 중요한 기밀을 관장하게 하였으며, 왕씨(王氏) 성을 하사하였다. 박유는 품성이 질박하고 정직하였으며,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 통달하였다. 처음에 궁예(弓裔)를 섬겨 원외(員外)가 되었다가 동궁기실(東宮記室)로 옮겨갔다. 궁예의 정치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마침내 출가하여 산골짜기에 은거하였다가 왕께서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찾아온 것이다.
- 고려사절요 권1 (태조신성대왕 태조1년 6월 미상일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 고려시대 사료
922년 진보성 성주 홍술이 고려에 들어오도록 회유했다. 훗날 홍술이 전사하자 왕건이 두 팔을 잃은 것과 같다고 슬퍼한 기록이 있어 왕유가 고려로 끌어들인 홍술은 상당히 중견 거물 호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932년 중국 후당에 외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932년 새겨진 <진철대사비문>과 944년 새겨진 <법경대사비문>에 의하면 그는 고려 초기의 1등 개국공신들과 나란히 이름을 올리고 있어 지위가 매우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위와 같이 이런저런 공을 세워 국성 왕(王)씨 성을 하사받았다. 벼슬은 대광에 이르렀으며 그의 딸은 왕건의 18번째 비인 예화부인이 되었다. 예종 묘정 배향공신인 왕자지가 그의 후손이다.
3. 대중매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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