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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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개국공신 왕유[2] 의 후손이다. 왕자지의 아버지는 해주 서리[3] 출신이었다. 누나가 계림공의 수하인 상장군 왕국모와 결혼했는데, 왕국모는 이자의의 난 당시 처남 왕자지로 하여금 본궐의 문을 폐쇄하게 하였고 이 공을 바탕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척준경과 매우 친밀한 사이였던 듯한데 여진족의 기습을 받아 말을 빼앗기고 죽을 뻔했다. 이때 척준경이 구해주고 말을 잃은 그를 위해 적을 추격해 장갑마 1필을 얻어줘서 가까워졌다고. 그 뒤 쭉쭉 승진하여 추밀원사와 이부상서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이후 사은 겸 진봉사로 송나라에 갔다가 대성아악을 가지고 귀국했다.
말년에는 참지정사로 있다가 1122년 향년 57세로 사망했다. 장순(章順)이라는 시호를 받고 예종의 묘정에 배향받는 영예를 안았으나 뒷날 탐욕스럽다는 이유로 배향 공신 자격에 부적절하다는 주장이 나와 끝내 배향을 철회했다.
1. 생애[편집]
고려의 개국공신 왕유[2] 의 후손이다. 왕자지의 아버지는 해주 서리[3] 출신이었다. 누나가 계림공의 수하인 상장군 왕국모와 결혼했는데, 왕국모는 이자의의 난 당시 처남 왕자지로 하여금 본궐의 문을 폐쇄하게 하였고 이 공을 바탕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내시#고려시대[4] 출신으로 윤관의 북방 개척에 참전해 공을 세웠다. 예종 3년 병마판관(兵馬判官)이 되었고, 윤관의 휘하에서 소드마스터 척준경과 함께 함주와 영주 지방에서 여진족을 무찔렀다.
척준경과 매우 친밀한 사이였던 듯한데 여진족의 기습을 받아 말을 빼앗기고 죽을 뻔했다. 이때 척준경이 구해주고 말을 잃은 그를 위해 적을 추격해 장갑마 1필을 얻어줘서 가까워졌다고. 그 뒤 쭉쭉 승진하여 추밀원사와 이부상서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이후 사은 겸 진봉사로 송나라에 갔다가 대성아악을 가지고 귀국했다.
말년에는 참지정사로 있다가 1122년 향년 57세로 사망했다. 장순(章順)이라는 시호를 받고 예종의 묘정에 배향받는 영예를 안았으나 뒷날 탐욕스럽다는 이유로 배향 공신 자격에 부적절하다는 주장이 나와 끝내 배향을 철회했다.
2. 여담[편집]
- 역사 교과서에는 윤관, 척준경만 간략하게 나오는 탓에 일반인들이 거의 모르지만 왕자지 뿐 아니라 여진 정벌에 참가한 장군들 거의 대부분은 그렇다. 오히려 이름 때문에 유명해진 케이스. 하필 성씨까지 "왕"이어서 참으로 절묘한 어감의 이름이 되어버렸다.
- 우리나라 역대 최고의 소드마스터인 척준경의 생애가 드라마화되지 않는 이유로 그의 절친이었던 이 분의 이름을 드는 사람이 있다. 일례로 국방TV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 이 시대를 다룰 때도 차마 이름을 부를 수 없어 패널들은 왕 장군이라고 애둘러 언급하고 이름은 자막으로만 나왔다.[5] 물론 우스개로 하는 말에 가깝고, 왕자지가 주인공인 창작물이 아닌 다음에야 굳이 못 만들 이유까지는 없다. 일단 왕자지의 초명은 소중(紹中)
아니 원래 이름조차 왕소중이라니..., 자는 원장(元長)이므로, 삼국지에서 조운을 조자룡으로 부르는 것처럼 왕원장으로 작중에서 부를 수도 있고,[6] 사극이라고 모든 기록상의 인물을 다 등장시켜야 하는 것도 아니며,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파생 창작물일 뿐이니 다른 이름으로 바꾸거나 다른 실존인물의 캐릭터와 적절히 합체시켜 등장시키는 등의 방법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진지하게 따지자면 왕자지 때문이라기보단, 척준경 문서에도 서술되어 있듯 척준경의 구체적인 행적이 불명이기 때문일 것이다.[7]
- 우스개로 왕자지가 사극에 출연할 때 다음과 같은 대사들이 나올 거라는 얘기가 인터넷에 떠돌기도 했다.#
- 비슷한 이름으로는 후대 명종조 인물인 무장 신보지(申寶至)가 있으며 김자지(金自知) 선생도 있다. 김자지는 고려 말 ~ 조선 초기의 문관으로, 그 역시 나름대로의 업적이 있음에도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다. 이 역시 자로 김원명이라고 부르면 되긴 된다.
- 중등과정 국사 교육 과정에서 참으로 민망하고 난감한 어감으로 인해 잘 등장하지 않는 이름이기도 하다. 비슷한 사례로는 고려시대에 널리 퍼진 '이씨가 왕이 된다'는 소문이었던 '십팔자위왕'이 있다.[8]
- 본인의 묘지명은 실전됐으나, 본인의 아내인 황려군부인(黃驪郡夫人) 김씨[9] 의 묘지명이 현전한다. 묘지명엔 황려군부인이 음력 1130년 7월 10일에 만 68세의 나이로 졸(卒)[10] 했다고 한다.
-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왕의(王毅)는 상서공부원외랑(尙書工部員外郞)으로,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 서균(徐鈞)의 딸과 혼인하였다. 딸은 상서형부시랑(尙書刑部侍郎) 이공의(李公儀)와 혼인하였다.
- 2014년 1월 30일에 올레마켓 웹툰에서 척준경을 주인공으로 다룬 푸른바람 척준경이 연재됐었는데[11] 왕자지도 본명 그대로 나왔다. 한 가지 기묘한 점은, 건실한 청년으로 묘사 되는 척준경, 이자겸과 달리 왕자지는 더벅머리의 곱상한 쇼타로 묘사된다.
귀엽다작품 내에 고증 오류가 조금씩 보이는데, 1화에 이자겸의 난을 조명했지만 본궐에서 싸웠다는 고려사의 기록과는 달리 야전으로 그리는데다 이자겸의 난은 1126년에 일어났는데 이미 1122년에 사망한 왕자지가 버젓이 살아서 척준경과 붙어다니며, 문관 출신인 윤관이 인간 흉기급 무관이다. 가장 고질적인 오류는 역시 봉두난발.
3.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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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주 김씨 김정지(金廷砥)의 딸[2] 원래 해주 박씨였고 궁예의 신하였는데 역성혁명 당시 왕건을 도운 공로로 왕씨 성을 하사받아 해주 왕씨가 되었다. 즉 일반 귀족보다도 신분이 높은 준 왕족급이다.[3] 지방의 약세 호족. 조선시대엔 기세가 크게 꺾인다.[4] 고려시대 내시는 조선시대와는 달리 왕을 가까이서 보필하는 신진 관료들을 말한다. 내시하면 환관을 떠올리는데, 고려의 내시는 거세된 환관이 아니며 김인존, 안향 같은 상당한 엘리트만이 될 수 있었다.[5] 메인 패널이었던 임용한은 2000년대 초반에 저서를 통해 왕자지의 존재를 국내 역덕계에 알린 일등 공신이다. 임용한교수의 말에 따르면 원래 본명을 언급하며 방송하기로 했지만, 방송하다보니 웃음이 터져나와 결국 언급하지 않고 가기로 했다고 한다.[6] 이 정도 높은 신분의 인물이라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 보통은 관직명으로 부르고, 아무리 막역한 사이라도 이름(名)보단 자(字)로 부른다. 부모나 임금이라면 이름을 부를 수 있지만 부모는 아명으로, 임금도 그를 존중해 관명으로 부르면 해결된다. 다만 조서 같은 공문서에는 이름이 들어가야 하므로 이것까진 피할 수 없다.[7] 생애 자체가 불명인 것은 아니고, 세부적인 부분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기록상에 등장하는 그의 행적 대다수는 "여진족 몇 명을 베었다"나 "이자겸과 붙어먹었다" 같은 거시적인 행적뿐이고, 상세한 과정이나 그 속에서 사람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등이 거의 기록이 없다. 이 때문에 척준경으로 드라마를 만들면 그의 대사 거의 전부를 허구로만 채워야 한다.[8] 십팔자득국, 목자득국으로 변형해서 올라가는 경우도 드물게 있다.[9] 여주 김씨 김정지(金廷砥)의 딸[10] 유교 예법 상으론 천자는 붕(崩), 제후는 훙(薨), 사대부는 졸(卒), 평민은 사(死)로 죽음을 표현한다.[11] 작가는 과거 노숙검객후크라는 닉네임으로 유명했던 박경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