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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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젠민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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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양키스 등번호 40번
게이브 화이트
(2004)

왕젠민
(2005~2009)


더스틴 모슬리
(2010)
워싱턴 내셔널스 등번호 40번
콜린 벨레스터
(2008~2009)

왕젠민
(2011~2012)


윌슨 라모스
(2013~2016)
토론토 블루제이스 등번호 67번
결번

왕젠민
(2013)


앤드류 앨버스
(2015)
캔자스시티 로열스 등번호 67번
프란시슬리 부에노
(2012~2014)

왕젠민
(2016)


게이브 스파이어
(20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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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width=20%><colcolor=#e51837> 투수 ||<colbgcolor=#FFFFFF,#191919><colcolor=#e51837,#61ABF6> 15 뤼옌칭 · 16 왕웨이중 · 17 천관위 · 21 리전창
29 덩카이웨이 · 32 천위쉰 · 43 쑹자하오 · 58 후즈웨이
59 천관웨이 · 60 쩡쥔웨 · 69 황쯔펑 · 71 장사오칭
81 천스펑 · 93 우저위안
||
|| 포수 || 4 주리런 · 31 린다이안 · 65 가오위제 ||
|| 내야수 || 1 정쭝저 · 5 린쯔웨이 · 6 왕웨이천 · 18 장위청
39 우넨팅 · 46 판궈천 · 83 린리 · 90 장위청
||
|| 외야수 || 2 궈톈신 · 9 왕보룽 · 12 천천웨이
24 천제셴 · 35 청진
||
||<-2> 파일:대만 국기.svg 70 린이웨핑 파일:대만 국기.svg 0 수밍체
파일:대만 국기.svg 40 왕젠민 파일:대만 국기.svg 70 가오치강
파일:대만 국기.svg 23 펑정민 · 91 성하오진 파일:대만 국기.svg 66 장첸민
파일:대만 국기.svg 13 천치앙호 ||
||<-3><bgcolor=#000096> 대만 야구 국가대표팀 / 역대 로스터 ||





파일:Chien_Ming_Wang_Fubon_Guardians.jpg

푸방 가디언스 No.40
왕젠민
王建民 / Wang Chien-Ming

출생
1980년 3월 31일 (43세)
타이난 시 관먀오 구
국적
파일:대만 국기.svg 대만
학력
대만 국립체육대학
신체
193㎝ / 102㎏
포지션
선발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2000년 국제 자유계약 (NYY)
소속팀
뉴욕 양키스 (2005~2009)
워싱턴 내셔널스 (2011~2012)
토론토 블루제이스 (2013)
캔자스시티 로열스 (2016)
지도자
푸방 가디언스 2군 투수코치 (2018~)

1. 개요
2. 선수 경력
3. 은퇴 후
4. 피칭 스타일
5. 연도별 성적
6. 기타
7. 관련 문서
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만의 前 야구선수이자 現 푸방 가디언스 2군 투수 코치. 현역 시절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약하며 브랜든 웹과 양대 리그를 대표했던 싱커볼러로 불릴 만큼 뛰어난 싱커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주무기로 활용해 뉴욕 양키스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대만의 영웅으로 칭송받았던 선수다.

2. 선수 경력[편집]



2.1. 뉴욕 양키스[편집]


대만 국립체육대학교를 거쳐 2000년 계약금 200만 달러를 받고 뉴욕 양키스에 입단했다. 마이너에서 경험을 쌓는 한편 2002 부산 아시안 게임2004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해 대만 대표팀의 에이스 역할을 해내기도 했다. 그리고 2005년 4월 30일 토론토 블루제이스전에 선발 등판하며 천진펑, 차오진후이에 이은 역대 세 번째 대만 출신 메이저리거가 된다. 이후 케빈 브라운, 칼 파바노, 제럿 라이트 등 주축 투수들이 부상으로 이탈한 양키스 선발진의 한 축을 담당하며 8승 5패 평균자책점 4.02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친다.

이듬해인 2006 시즌, 19승 6패 평균자책점 3.63의 좋은 성적을 거두며 아시아 투수 최초로 다승 타이틀을 획득함과 동시에 사이 영 상 2위를 기록한다.[1] 더불어 아시아 투수 단일시즌 최다승 기록[2], 아시아 투수 사이 영 상 득표 최고순위 기록[3]까지 갈아치우게 된다. 그리고 2007 시즌에도 19승 7패 평균자책점 3.70의 성적으로 명실상부한 양키스의 에이스로 우뚝 서게 된다.

이런 활약 덕분에 고국인 대만에서 왕젠민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그의 모든 등판 경기는 대만 전역에 중계되었고, 고국의 전폭적인 지지 덕에 '2007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대만의 국민영웅[4]으로 추앙받게 된 것.

더불어 노모 히데오의 아시아 투수 통산 최다승을 넘어설 가장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으며,[5] 통산 200승까지도 가능하다는 전망이 나오는 등 그의 미래는 밝아 보였다.

2008 시즌에도 14경기에서 7승 2패를 거두며 순항하고 있었고, 시즌 15번째 등판 경기인 6월 15일 인터리그 휴스턴 애스트로스와의 경기에서도 5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하고 있었다. 그리고 6회초 1사 1,2루에서 타석에 들어선 왕젠민은 번트를 댔지만 2루 주자만 3루에서 아웃되었고 1루에 출루하게 된다. 이후 조니 데이먼의 야수선택 출루로 1사 만루가 되었고, 그 다음 데릭 지터의 안타가 나오며 2루 주자인 왕젠민도 홈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쇄도하는 과정에서 발 부상을 당하며 다음 이닝에 교체되었다. 어쨌든 그 경기에서 승리투수가 되었으나 경기 후 발바닥 근육 파열 진단이 나왔고, 결국 시즌 아웃되며 8승으로 시즌을 마치게 된다.

그 후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데, 2009 시즌 초 난타를 당하며 25.45라는 경악스러운 평균자책점을 기록한다. 그 후 시즌 중반까지 승을 기록하지 못하고 10점대 후반의 자책점을 넘나들다 5월 28일 첫 승을 거둔다. 하지만 그것을 끝으로 어깨부상이 발견되며 수술을 받게 되어 시즌 아웃. 최종 성적은 1승 6패 ERA 9.64를 기록하며 그야말로 폭삭 망했다. 결국 시즌이 끝나고 논텐더 형식으로 방출당하게 된다. 양키스에서 방출당할 때 "크리스마스까지는 통보를 유보해줄 알았다"고 눈물을 흘렸다고.[6]


2.2. 워싱턴 내셔널스[편집]


2010 시즌을 앞두고 워싱턴 내셔널스와 계약을 맺는다. 부상 회복 후 시즌 중반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하여 투수진에 힘을 줄 것으로 예상했지만, 재활 때문에 결국 마이너리그에서도 출전하지 못한 채 시즌을 마쳤다. 이듬해인 2011 시즌에 힘겹게 올라온 메이저 무대에서 11경기 출전 62⅓이닝 동안 4승 3패 ERA 4.04를 기록하며 부활의 신호탄을 날렸다.

그리고 2012 시즌 시범경기 뉴욕 양키스와의 경기에 등판해 전성기를 연상케하는 95마일 하드싱커를 뿌리며 재기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서는 듯 했으나, 러셀 마틴의 빗맞은 타구를 직접 잡아 1루 베이스를 밟는 과정에서 스텝이 엉키며 왼다리 햄스트링 부상을 당하며 개막 로스터 합류가 불발되었다. 그리고 왕젠민 대신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한 로스 뎃와일러가 연일 호투를 펼치며 팀 내에서의 입지가 많이 애매해졌다.

2012년 5월 30일 마이애미 말린스와의 경기에서 복귀전을 가졌으나 4이닝 7피안타 3볼넷 4실점 4자책으로 털렸다. 결국 부진을 거듭한 끝에 전반기 막판 불펜으로 강등되었으며, 2승 3패 ERA 6.68의 초라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다.


2.3. 토론토 블루제이스[편집]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대만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출전하여 호투했다. 이 대회 왕젠민은 팀의 1선발 중책을 훌륭히 수행하여 조국의 사상 첫 8강 진출을 견인했다. 그리고 이 활약이 인상 깊었던지, 친정팀 뉴욕 양키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계약 조항에 메이저 계약이 들어오면 조건없이 풀어지는 조항이 있어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그의 영입을 시도했고, 이에 따라 토론토로 팀을 옮기게 되었는데 2013년 6월 11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첫 선발등판에서, 7⅓이닝 5자책이란 기록을 남기고 패전 투수가 되었다. 6월 16일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두번째 선발 등판에서 7이닝 7피안타 2볼넷 무실점을 기록하여 복귀 첫 승을 기록했고, 그 다음경기에서도 호투를 보여주며 부활의 날개짓을 펼치는 듯 했으나, 다음 2경기에서 각각 1⅓이닝 7실점, 1⅓이닝 3실점으로 말아드신 다음 바로 지명할당 당하고 말았다.

이후 2014 시즌을 앞두고 신시내티 레즈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고, 시즌 중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이적했으나 끝내 빅리그에 올라오지는 못했다. 트리플 A에서는 선발로만 출장하며 13승 8패 ERA 4.12의 성적을 거두었다.


2.4. 캔자스시티 로열스[편집]


2014 시즌이 끝난 후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지만 트리플 A에서 2승 6패 6.10을 기록하며 방출되었고, 애틀랜틱 리그를 거쳐 시애틀 매리너스 트리플 A에서 경력을 이어갔지만, 4승 5패 5.69의 저조한 성적을 남기고 말았다. 이대로 메이저리그와는 작별을 고할 것으로 보였는데, 2016 시즌 초청선수 자격으로 캔자스시티 로열스에 합류 후 스프링캠프, 시범경기를 거쳐 25인 로스터에 포함되는 데에 성공했다.[7]

시즌 최종 성적은 계투로만 38경기에 출장하여 53⅓이닝 6승 무패 ERA 4.22를 기록해서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마지막 불꽃을 태웠으나, 시즌 막바지 이두건염이 발병하며 9월 17일 다시 지명할당되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좋은 모습을 보이며 자신이 아직 살아있음을 증명한 이후 미국 무대를 떠났다.

이 당시 몇 년간 마이너와 독립리그를 전전하며 부진의 늪에 빠져있다가 캔자스시티에서 복귀하기까지의 여정을 다큐멘터리에서 다루기도 했다. 한때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삼류 투수로 전락했다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왕젠민의 모습을 다룬 내용으로 메이저리그 팬이라면 한번쯤 볼 만한 수작이다.


3. 은퇴 후[편집]


결국 17년은 무직으로 놀았고 현역을 은퇴하여, 2018년에는 고국으로 돌아가 대만프로야구 푸방 가디언스의 2군 코치를 맡고 있다. 은퇴에 물음표를 붙인 이유는 국가대표로서는 은퇴하지 않았기 때문. 코치로 활동하면서 국가대표에는 선수로 참가한다고 한다. 이상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선수 풀이 부족한 나라들은 이렇게 은퇴한 선수라도 국대에 부르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은퇴한 라이언 뎀스터나 에리크 가녜가 WBC 캐나다 국대에 참가한 적이 있고 이안 킨슬러도 올림픽에 이스라엘 국대로 참가할 예정이다.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도 2라운드 진출시 출전하겠다는 의사를 보였으나 탈락하며 무산. 2019 WBSC 프리미어 12에는 대표로 뽑히지 못했고 다만 홍이중 감독의 요청으로 대만 야구 국가대표팀의 투수코치로 부임했는데 대회기간 동안 해외에서 뛰어 컨디션이 별로일 장샤오칭, 후즈웨이, 장이 같은 투수들을 잘 지도해 대회기간동안 셋이 합쳐 21이닝동안 고작 2실점만을 허용하며 호투하는 모습과 기타 투수진들이 호투하며 왕젠민에 대한 위상이 올라갔다.


4. 피칭 스타일[편집]


브랜든 웹과 더불어 2000년대를 대표하는 싱커볼러 중 한 명. 주 무기는 90마일 중반을 기록하는 빠르고 각이 큰 싱킹 패스트볼이며 슬라이더나 서클 체인지업도 능숙하게 사용한다. 다만 지나치게 적은 탈삼진 갯수는 수비진에게 극단적으로 의존하는 투수라는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고, 이 때문에 그의 롱런 가능성을 비관적으로 보는 전문가들도 많았다. 그래도 2008년에는 보다 능숙해진 구질 구사와 제구를 통해 루킹 삼진까지도 자주 뽑아내는 등 탈삼진 능력조차 진일보하며 전문가들의 예상을 비웃는 듯 했으나, 결국 부상 때문에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렸다.

혹자는 왕젠민과 브랜든 웹이 같이 드러누운 것을 근거로 이들이 장수하지 못한 건 바로 싱커볼러였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하는데, 사실 왕젠민의 경우 싱커를 익히기도 전인 2000년에 어깨 수술을 받고 꼬박 1년간 재활한 경력이 있어 이전부터 내구성에 문제를 지적하는 시각이 있었다. 이 때문에 왕젠민이 한창 사이영 스터프를 보여줄 때도 양키스 측에서 연봉인상에 소극적이었던 건 이런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다만 왕이 2007시즌 종료 시점으로 풀타임 2.5년차 루키 신분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정상적인 연봉 책정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한편으로는 왕젠민이 2007년 한 경기 10개의 탈삼진을 뽑아냈을 때 포수였던 호르헤 포사다가 그날 던진 103개의 공이 전부 싱커였다고 밝힌 것에서 그가 망가진 원인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반론이 있는데, 일단 왕젠민은 당대 최강의 싱커를 던질 수 있는 싱커볼러였고, 당대 최강을 자부하는 싱커를 던지는 투수가 싱커 구사율이 높은 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계약 초기의 왕젠민은 포심, 슬라이더, 스플리터를 던지는 파이어볼러 타입이었지만, 싱커를 익히면서 싱커에 대한 의존도가 상승했고 그 결과 세컨더리 피치를 익힐 시간이 부족했다. 결국 사실상 싱커 원피치의 투수가 되었던 상태에서 그 구종이 리그 최강의 구종 중 하나라면, 그걸 마음껏 던지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싱커가 정말 부상을 유발하는 구종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히 증명된 바가 없다. 무엇보다 그의 부상은 싱커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출루한 후 홈으로 쇄도하는 과정에서 생긴 발 부상이었고 이후에 생긴 어께부상도 발쪽에 부상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한 투구를 하다 생긴 것이다.

5. 연도별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ERA+
fWAR
bWAR
2005
NYY
18
8
5
0
0
116⅓
4.07
113
9
32
6
47
1.246
105
1.4
2.3
2006
34
19
6
1
0
218
3.63
233
12
52
2
76
1.307
125
3.7
6.0
2007
30
19
7
0
0
199⅓
3.70
199
9
59
8
104
1.294
122
3.7
5.0
2008
15
8
2
0
0
95
4.07
90
4
35
3
54
1.316
108
1.5
2.0
2009
12
1
6
0
0
42
9.64
66
7
19
2
29
2.024
48
0.1
-1.5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ERA+
fWAR
bWAR
2011
WSH
11
4
3
0
0
62⅓
4.04
67
8
13
1
25
1.283
95
0.0
-0.4
2012
10
2
3
0
0
32⅓
6.68
50
5
15
3
15
2.010
60
-0.4
-0.4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ERA+
fWAR
bWAR
2013
TOR
6
1
2
0
0
27
7.67
40
5
9
0
14
1.815
54
-0.2
-0.7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ERA+
fWAR
bWAR
2016
KC
38
6
0
0
0
53⅓
4.22
60
6
18
2
30
1.463
102
-0.1
0.3
MLB 통산
(9시즌)
174
68
34
1
0
845⅔
4.36
918
65
252
27
394
1.384
101
9.7
12.5


6. 기타[편집]


  • 메이저리그 등록명은 Chien-Ming Wang으로 되어 있어[8] 국내에선 왕첸밍, 왕치엔밍 등으로 읽히나 병음으로 쓰면 Wáng Jiànmín으로 표준 중국어 표기법에 의하면 왕젠민으로 읽힌다.


  • 동양인 메이저리거들 중에서 가장 유들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MLB 출신 선수들이 한입을 모아서 칭찬하는 선수가 왕젠민.

  • 2018년, 대만에서 그의 복귀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끝까지 전력투구-왕젠민 이야기' 가 방영되었다. 해당 다큐멘터리는 넷플릭스에도 볼 수 있다.

  • 단기간 임팩트가 강했지만 오래 가지 못했기 때문에 성공한 메이저리거 기준으로는 큰 돈을 벌진 못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누적 연봉이 1,500만 달러에 달하고 한참 잘 나갔을 때 광고를 찍어두었다.

7. 관련 문서[편집]



8.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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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위는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요한 산타나 [2] 기존 기록은 2000년 박찬호가 거둔 18승 [3] 기존 기록은 1995, 1996년 노모 히데오가 기록한 4위. 2013년 다르빗슈 유, 2019년 류현진, 2020년 마에다 켄타도 사이 영 상 투표 2위에 오르게 된다.[4] 아마도 우리가 전성기 때 박찬호에 열광한 것과 동률, 아니 그 이상일 듯 하다. 2000년대 중후반들어 CPBL승부조작으로 망해가는 상태라 더더욱 추앙받는다. [5] 선발주자였던 박찬호는 당시 뉴욕 메츠휴스턴 애스트로스의 마이너 팀을 전전하며 은퇴의 기로에 몰려 있었다.[6] 그래도 이 해 양키스가 우승했기에 우승 반지는 받을 수 있었고 우승 퍼레이드에도 참석했었다. 본인이 우승에 기여한 바는 조금도 없었지만.[7] 시범경기에서 싱커가 95마일까지 찍혔다고 한다. 정말 캔자스시티 투수코치에게도 뭔가가 있는 건지.[8] 표준중국어 ing과 in 발음이 대만국어에서 잘 구분되지 않는 현상이 반영되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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