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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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정
王鋥

이름
왕정(王鋥)

오봉(五峰)
별명
왕직(王直), 왕직(汪直), 노선주(老船主)
출생
생년 미상
명나라 남직예성 휘주부 흡현
사망
1560년 1월 22일
명나라 저장성 항저우부
국적
명나라

1. 소개
2. 생애
3. 평가



1. 소개[편집]


왕직의 동상

중국 명나라해적이자, 중국인 출신의 거물 왜구.[1] 가정제 시절에 악명을 떨쳤던 가정왜구(嘉靖俊德)의 대표격인 인물이며 당대의 해적왕이라 할만한 대해적이었다.[2] 중국의 휘주 흡현 출생으로 본명은 왕정(王鋥)이다.[3] 왕직은 어머니의 성을 따와서 부른 별칭이며, 스스로를 오봉(五峯)이라고도 칭하기도 했다.


2. 생애[편집]


본래는 소금 상인으로, 용맹하고 의협심이 있어서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본래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민간인들이 소금을 파는 것을 규제하고 전매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다보니 소금 상인들 중에는 밀수꾼들이 많았는데, 요즘으로 치면 조직폭력배와 같은 무리들이다. 왕직도 이런 부류의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업에 실패하게 되자 허동의 밑으로 들어가 밀수꾼 생활을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해상무역에 진출하여 일본, 필리핀, 안남, 타이, 말라카 등과 교역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1540년 경에는 일본의 고토 열도(五島列島)를 근거지로 삼아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밀무역의 중개자로 이름을 떨치며 위세를 누렸다. 고토는 옛날부터 왜구 및 일본이 한반도와 중국을 침략하는 거점으로 활용되어왔으며, 사쓰마랑 가깝기 때문에 훗날 일본 해군의 중심 지역이 되기도 했다.

1543년에 일본에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타네가시마에 갔다가 조총을 전파했다는 설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배에 있던 포르투갈인이 타네가시마 영주에게 화승총을 팔았다고 한다. 다만 페르낭 멘데스 핀투는 자신이 1542년 전파한 것이라고 자신의 편력기에서 주장하였다.

1547년에는 주환의 해금 강화와 단속이 심해지자 왜구들과 결탁하여 중국 연안을 약탈하는 등 해적 행위를 했으며, 1551년에는 진사반을 소탕하고 절강성 주산을 중국의 거점으로 삼았다. 명나라 조정에 자신에 대한 해금령을 해제할 것을 요청했지만 1553년에 유대유의 공격을 받았으며, 히라도로 도주해 나라를 세워 국호를 송(宋)으로 하면서 정해왕(淨海王)을 자칭했다가 나중에는 휘왕(徽王)으로 바꿨고, 36개의 섬이 왕직을 따랐다.

1555년 을묘왜변 때 조선에 쳐들어온 해적단도 왕직의 해적단이었다.

1559년 12월, 절강순무 호종헌에 의해 체포 작전인 귀순요청에 속아넘어가 명나라로 귀국했다가 호종헌의 지시를 받은 순안어사 왕본고에게 체포되었으며, 이듬해 1월에 처형당했다.


3. 평가[편집]


대규모 카르텔을 구축하고 국제적으로 골칫거리를 만들던 것, 가족을 끔찍히 아끼는 모습, 심지어 사람들을 다루는 기술까지 파블로 에스코바르와 비슷하다.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그 유명한 Plata o Plomo(은 아니면 납)의 경우 자신의 은(돈)을 받고 자기 밑에서 일하거나 납(총알)을 박아주거나 양자택일을 하도록 사람들에게 강요하던 방식을 왕직도 아주 유사하게 했다. 자신에게 거스르는 관리가 있다면 그 집에 은이 든 궤짝을 보내 시험하는 것이 그것이다.

최후에도 이 둘은 비슷한 방식으로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가족에게 전화 통화를 하던 것이 들통나면서 위치가 노출되어 죽게되었고 왕직 역시 가족의 안전과 이에 대한 향수를 미끼로 잡아 참형 당하게 된다.

더불어 범죄의 길로 대성하게 된 시대적 배경까지도 에스코바르와 판박이인데, 에스코바르가 미국에서 마약과의 전쟁이 선언 되면서 오히려 마약 문제가 더 극심해진 것을 틈타 부를 키운 것과 같이 왕직의 해적 행위 뒤에도 명나라의 해금령으로 인한 밀무역 수요가 배경이 되었다.[4]

전통적으로는 중국을 배신하고 일본이랑 편먹은 매국노라는 평이 주류 였지만, 최근에는 중국의 대외전략인 일대일로의 모델을 제시한 인물로 재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왕직을 비롯한 가정왜구들이 하던 짓은 그냥 밀무역이 아니라 죄 없는 민간인을 살인, 약탈 하는 범죄 행위였다. 정말 밀무역만 했다면 이들을 부수려고 군대까지 투입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대 선단을 거느린 부호였다는 이유만으로 엄연한 악질 범죄자를 재평가 하는 일이니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다.
특히 그 선단의 원천은 수 없이 죽어나간 무고한 피해자들이니...
남에게서 강탈한 재물을 좋은 데 써도 죄다. 그렇지 않으면 범죄를 잔뜩 저지르고도 조금의 선행만 하면 면죄부가 된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왕직의 범죄는 순전히 개인의 영달만을 위한 것이니 변명할 것도 없이 흉악범죄다.


[1] 명나라 대의 왜구는 악명이 높아 중국의 도시와 마을들을 대대적으로 약탈하고 중국인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잡아갔으며 중국의 해적들과 결탁하기도 했다. 그래서 중국인이지만 왜구로 활동하는 중국인들이 많았다.[2] 비슷한 부류의 인물로는 이광두(李光頭), 허동(許棟) 등을 꼽을 수 있다.[3] 명나라의 정순공이 작성한 일본일감(日本一鑑) 참고[4] 사실 마약과의 전쟁이나 해금령의 경우 단순히 에스코바르와 왕직의 유사함 외에도 범죄학 분야에서 풍선 효과의 대표적인 예시들이라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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