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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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의 인물로 자는 현칙(顯則). 북해군(北海郡) 극현(劇縣) 출신. 전진의 명재상 왕맹의 손자이자 왕진악의 아우였다.
왕헌의 아버지 왕휴(王休)는 하동(河東) 태수를 지냈다. 왕헌은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백부인 왕영을 따라 업성(鄴城)에 살았다.
383년 비수대전의 패전으로 전진이 혼란에 빠지고 385년 부견이 신평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이런 가운데 부견의 서장자인 부비가 제위에 올랐고 왕영이 승상으로 임명되었으나 왕영은 386년 서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왕헌은 청하(淸河)로 달아나 민가에 숨었다.
황시(皇始) 연간[1], 북위의 탁발규가 조군(趙郡) 당읍현(高邑縣)에 당도하자 왕헌은 탁발규에게 귀수하였다. 탁발규는 왕헌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423년, 제2대 황제 명원제 탁발사가 붕어하고 그의 태자인 탁발도가 즉위하니 이가 제3대 황제인 태무제였다. 태무제가 즉위한 뒤 왕헌은 정위경(廷尉卿)을 맡았으며, 상곡(上谷) 태수로 전출되고 중루장군(中壘將軍)이 더해졌으며, 고당현자(高唐縣子)에 봉해졌다. 이후 외도대관(外都大官)과 중도대관(中都大官)을 역임하며 공정하게 판결을 내렸으며, 작위가 극현후(劇縣侯)로 올라갔고 용양장군(龍驤將軍)이 더해졌다. 이후 왕헌은 병주(幷州) 자사로 전출되고 안남장군(安南將軍)이 더해졌으며 북해공(北海公)에 봉해졌다. 왕헌은 병주에서 청렴하고 엄정한 통치를 펼쳐서 좋은 평판을 얻었으며, 평성으로 돌아온 뒤 원로로 대우받아 진귀한 물품들을 받았다.
왕헌은 466년에 죽어서 진남장군(鎭南將軍), 청주(靑州) 자사로 추증되고 강(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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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해강공(北海康公) 王憲 | 왕헌 | |
시호 | 강(康) |
작위 | 고당현자(高唐縣子) → 극현후(劇縣侯) → 북해군공(北海郡公) |
성 | 왕(王) |
이름 | 헌(憲) |
자 | 현칙(顯則) |
부친 | 왕휴(王休) |
조부 | 왕맹(王猛) |
생몰 | 378년 ~ 466년 |
본관 | 북해군(北海郡) 극현(劇縣) |
1. 개요[편집]
북위의 인물로 자는 현칙(顯則). 북해군(北海郡) 극현(劇縣) 출신. 전진의 명재상 왕맹의 손자이자 왕진악의 아우였다.
2. 생애[편집]
왕헌의 아버지 왕휴(王休)는 하동(河東) 태수를 지냈다. 왕헌은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백부인 왕영을 따라 업성(鄴城)에 살았다.
383년 비수대전의 패전으로 전진이 혼란에 빠지고 385년 부견이 신평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이런 가운데 부견의 서장자인 부비가 제위에 올랐고 왕영이 승상으로 임명되었으나 왕영은 386년 서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왕헌은 청하(淸河)로 달아나 민가에 숨었다.
황시(皇始) 연간[1]
396년 ~ 398년
왕헌은 탁발규로부터 후한 대우를 받아서 주의 중정(中正)으로 임명되고 선조사(選曹事)를 겸임하였다.이 사람은 바로 왕경략(王景略)의 손자이다!
423년, 제2대 황제 명원제 탁발사가 붕어하고 그의 태자인 탁발도가 즉위하니 이가 제3대 황제인 태무제였다. 태무제가 즉위한 뒤 왕헌은 정위경(廷尉卿)을 맡았으며, 상곡(上谷) 태수로 전출되고 중루장군(中壘將軍)이 더해졌으며, 고당현자(高唐縣子)에 봉해졌다. 이후 외도대관(外都大官)과 중도대관(中都大官)을 역임하며 공정하게 판결을 내렸으며, 작위가 극현후(劇縣侯)로 올라갔고 용양장군(龍驤將軍)이 더해졌다. 이후 왕헌은 병주(幷州) 자사로 전출되고 안남장군(安南將軍)이 더해졌으며 북해공(北海公)에 봉해졌다. 왕헌은 병주에서 청렴하고 엄정한 통치를 펼쳐서 좋은 평판을 얻었으며, 평성으로 돌아온 뒤 원로로 대우받아 진귀한 물품들을 받았다.
왕헌은 466년에 죽어서 진남장군(鎭南將軍), 청주(靑州) 자사로 추증되고 강(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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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96년 ~ 39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