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제니 드 몽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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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국 나폴레옹 3세의 황후
외제니 드 몽티조
Eugénie de Montijo


파일:Empress_Eugénie_in_Court_Dress_(after_Winterhalter,_Compiègne_IMP25).jpg

이름
스페인어
마리아 에우헤니아 이그나시아 아구스티나 데 팔라폭스포르토카레로 데 구스만 이 키르크파트리크
(María Eugenia Ignacia Agustina de Palafox-Portocarrero de Guzmán y Kirkpatrick)
프랑스어
마리 외제니 이냐스 오귀스틴 드 몽티조
(Marie Eugénie Ignace Augustine de Montijo)
출생
1826년 5월 5일
스페인 왕국 그라나다
사망
1920년 7월 11일 (향년 94세)
스페인 왕국 마드리드
배우자
나폴레옹 3세 (1853년 결혼 / 1873년 사망)
자녀
루이나폴레옹[1]
아버지
제8대 몽티조 백작 시프리아노 데 팔라폭스 이 포르토카레로
어머니
마리아 마누엘라 키르크파트릭 데 그리베네
형제
마리아 프란치스카
종교
가톨릭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
2.2. 나폴레옹 3세와의 결혼 과정
2.3. 프랑스 황후 시절
2.4. 말년
3. 평가
4. 기타



1. 개요[편집]


나폴레옹 3세의 황후이자 프랑스의 마지막 황후. 보통 외제니 황후라 불린다.[2]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스페인 귀족 가문의 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8대 몽티조 백작(스페인어로 몬티호 백작) 시프리아노 데 팔라폭스(Cipriano de Palafox)는 보나파르트 가문 지지자였다.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스페인의 왕이던 시절 아예 같은 편에 가담해서 전투에 참여했다가 한쪽 눈을 잃었다.

외제니가 유년기였던 19세기 유럽 정세는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이 와중에 외제니도 살기 위해 여성 교육을 꽤 많이 받았는데, 이것이 나중에 황후가 되어서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3] 외제니가 8살 때 아버지가 감옥에 갇히면서 프랑스로 이주하게 되고, 훗날 이게 나폴레옹 3세를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1839년에 아버지가 죽자 언니와 작위를 나누어서 상속받았다. 이때 받은 작위가 테바 여백작. 정확히는 제 19대 테바 여백작, 에우헤니아 팔라폭스포르토카레로 데 구스만 이 키르크파트리크(Excelentísima Señora Doña Eugenia Palafox Portocarrero de Guzmán y KirkPatrick, XIX condesa de Teba).[4]


2.2. 나폴레옹 3세와의 결혼 과정[편집]


그녀는 나폴레옹 3세의 총애를 받아 애인이 되었다. 그러나 혼전순결을 지키길 원했기 때문에 나폴레옹 3세와 결혼 전까지 육체적 관계를 가지진 않았다. 그래서 결혼 전에 외제니에겐 철의 처녀라는 별명이 있었다.

그녀가 나폴레옹 3세의 황후가 된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본래 나폴레옹 3세는 자신의 지위에 걸맞는 유럽 왕가의 여성들에게 혼담을 넣었다. 처음에는 전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4세 아돌프의 손녀인 카롤라에게 혼담을 넣었지만 카롤라의 아버지인 바사 공 구스타프는 스웨덴계 홀슈타인고토르프왕조[5]보나파르트 가문 간의 껄끄러운 역사[6], 불안정한 나폴레옹 3세의 지위를 생각해 거절했다. 뒷날의 일을 생각하면 선견지명이다.[7]

두 번째로 빅토리아 여왕의 조카인 아델라이드에게 혼담을 넣었는데 빅토리아 여왕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나폴레옹 3세의 측근들은 황후감을 외국의 왕녀가 아니라 프랑스 국내의 귀족 중에서 찾기로 결정하고 바로 혼처를 물색하기 시작했다.[8]

그러던 중 나폴레옹 3세가 외제니와 결혼하겠다고 공식 발표를 하자 외제니가 프랑스 대귀족의 딸이 아니라 스페인 출신인 것으로 인해[9] 사교계와 보나파르트 가문, 나폴레옹 3세의 측근들 사이에서도 이 결혼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이 나왔다. 예를 들어 나폴레옹 3세의 내무장관이였던 루에르나 페르시니[10]는 외제니와의 약혼 소문을 듣고, 나폴레옹 3세에게 "우리가 온갖 위험을 무릅쓰면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당신을 허튼 계집과 결혼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Ce n’est pas la peine d’avoir risqué le coup d’État avec nous pour épouser une lorette.")[11]란 격한 언사까지 내뱉으며 반대했다.[12] 하지만 그들도 나폴레옹 3세의 결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물론 나폴레옹 3세의 측근 중에선 이 결혼을 찬성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 예로 쿠데타를 실무기획한 샤를 드 모르니 공작의 경우 처음엔 결정을 번복할 것을 종용했지만 황제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과, 민중들이 황제의 연애결혼에 찬성하고 외제니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을 것이라 예상해 찬성했다.[13]

나폴레옹 3세가 외제니 황후와 결혼발표를 할 때 반대파들을 겨냥해서 뒤끝을 보여주었는데, 외제니의 출생 배경을 이용해서 자신은 스페인의 대귀족[14]이자 프랑스의 정신을 가진 여성과 결혼한다고 자랑한 것이다. 이에 국내외에 있던 반 나폴레옹 언론들의 논평은 "졸부 집안 보나파르트가 출세했네."


2.3. 프랑스 황후 시절[편집]


샤를 드 모르니 공작의 예측대로 외제니 황후는 제2제정기 사교계의 중심이 되었고, 패션을 비롯한 유행은 모두 그녀로부터 시작했다. 외제니 황후는 보나파르트 황가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보석을 광적으로 좋아했고 그녀의 보석 컬렉션은 오늘날 루브르에 남아 있다. 그녀는 한번 입은 옷은 다시 입지 않기로 유명했는데, 이 덕분에 럭셔리 브랜드가 호황을 이뤘다. 또한 황후가 여행을 떠날 때 드레스와 보석, 향수들을 실어나를 가방을 납품한 루이 비통을 총애해 파리 뇌브 데 카푸신 4번가에 포장 회사를 개업하도록 도와줬다.

황후 시절에 섭정을 3번 했는데, 첫번째는 1859년 이탈리아 통일전쟁, 두번째는 1865년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령 알제리 순방, 마지막은 1870년 보불전쟁 때이다. 섭정으로 내각 회의도 직접 주재했다.[15] 당대에는 황후가 너무 국정에 끼어든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정치력 덕분에, 프랑스에서 외제니 황후에 대한 평가는 조제핀 황후상위호환 버전이었다.[16] 실제로 나폴레옹 3세가 외국 왕실의 공주와 결혼을 시도했을 때, 이에 대한 민중들의 반응은 "네, 다음 마리 루이즈."였다.[17]

결혼 후 외제니 황후의 건강은 유산을 계기로 크게 나빠져서, 장남 출산 후 의사들이 둘째 출산은 곧 사망이라는 경고까지 했다고. 이 때문에 나폴레옹 3세와의 잠자리 역시 기피하여, 나폴레옹 3세는 후계자를 얻을 때까지만 외제니와 잠자리를 했다고 한다. 수에즈 운하 완공식 참석을 위해 이집트 왕국에 남편과 함께 국빈 방문 했을때 이집트 군주 이스마일 파샤와 바람이 났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수에즈 운하를 가기 전에 1868년 돌마바흐체 궁전을 방문했다가 오스만 제국 압뒬아지즈 황제의 형제 중 한명의 팔짱을 끼고 정원을 둘러보다가, (외간 여성의 사적 공간 출입에) 분노한 발리데 술탄[18] 페르테브니얄에게 뺨을 맞아 국제 분쟁을 번질 뻔 했다는 서술이 있는데, 문제는 나폴레옹 3세에 관한 책들마다 이 사건에 대해서 다르게 묘사해서 무엇이 진실이 알기 어렵다. 앞선 서술은 John Freely의 "Inside the Seraglio: Private Lives of the Sultans in Istanbul"에서 나온 내용이며, 데스몬드 수어드의 외제니 황후 평전에서는 뺨을 때린 것이 아니라 배빵(!)을 갈겼으나 이내 오해가 풀렸다고 기술되어 있다. 프랑스 출판물에서는 외제니 황후가 발리데 술탄에게 프랑스식으로 비쥬를 했다가 놀란 발리데 술탄에게 얻어맞았다는 내용도 전해진다. #

스당 전투에서 남편이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보좌관에게 차라리 황제가 자결했어야 한다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2.4. 말년[편집]


남편 나폴레옹 3세가 퇴위하고 몰락하면서 외제니도 황후 자리에서 쫓겨났다. 스당 전투의 패배로 나폴레옹 3세가 독일 측의 포로로 잡혔을 때, 외제니는 남편에 대한 선처를 부탁했으나 빌헬름 1세에게 모욕적인 편지만 받았다. 빌헬름 1세가 그런 반응을 보인 이유는, 60년 전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군 때문에 여기저기 피난을 가며 고생을 하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한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원한 때문이다.

남편의 퇴위 이후 외제니는 남편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했는데, 거기서 남편과 아들이 자신보다 먼저 사망하는 슬픔을 겪었다. 그러나 본인은 그럼에도 꿋꿋이 살아있었으며, 굉장히 장수했다. 그 사이에 빌헬름 1세, 프리드리히 3세 부자와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파일:외제니 전 황후와 빌헬름 2세.jpg
1907년에는 빌헬름 1세의 장손이자 마지막 독일 황제인 빌헬름 2세와 만난 적이 있다.

이후 영국에 머물며 영국, 러시아 제국 황실 인사들과 교류했고, 1차대전이 발발하자 영국군 지원을 위한 모금 및 기부활동을 펼쳐 그 공로로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 결과 자신을 몰락시킨 독일 제국의 패망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는데, 이 때 빌헬름 2세가 쫓겨나자 외제니는 빌헬름 1세에게서 받은 편지를 고스란히 독일에 돌려보내줘서 뒤늦은 복수를 했다.

90세를 넘기며 장수한 끝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지 2년 후인 1920년에 모국 스페인 마드리드의 알바 공 저택에서 타계했다.이후 유해는 남편과 아들이 묻힌 판버러의 묘지로 이송되어 남편 옆에 안장됐다.

외제니 황후의 유산은 크게 두 가문으로 분할상속됐다. 스페인쪽 유산은 친정인 언니의 후손들에게[19], 그 외 영국 및 유럽 대륙의 유산은 보나파르트가에게 상속되었다.


3. 평가[편집]


종교적으로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정교분리를 어지럽혔다는 비판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남편이 벌여놓은 일을 수습하느라 고생했던 정치인에 가깝다. 적어도 본인의 기본적인 역할에는 충실했고 여건만 갖추어졌다면,[20] 그 이상의 임무도 해냈을 능력과 책임감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비록 나폴레옹 1세 시절 '승리의 부인'이라고 불리었던 조제핀 드 보아르네만큼은 아니었지만, 같은 외국 출신이었던 마리 앙투아네트마리 루이즈보다는 좋은 평가를 받는다. 만약 남편인 나폴레옹 3세가 무리하게 프로이센과의 보불전쟁을 벌여 패하지 않고, 프랑스가 제정 체제를 이어갔다면 조제핀에 버금가는 국모로 보다 높이 칭송받았을 것이다.

상술한 것처럼 한 번 입은 옷은 다시 입지 않기로 유명했으나, 실제로는 한 번 입었던 옷은 경매를 통해 돈으로 바꾸고 기부했다고 전해진다.


4. 기타[편집]


  • 황후 시절의 외제니의 문장은 역대 프랑스 군주의 배우자들과 다르게 방패형이었다. 문장(그림) 항목에서 서술되는 것처럼 여성이 방패형 문장을 사용할 수 있는 경우는 본인이 관직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 해당되는데, 이 쪽은 스페인 대귀족의 관직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결혼하자마자 전임인 조제핀 황후를 본받겠다고 밝혔고, 이를 통해 외국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대중들에게 국모로 인정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명한 초상화 중에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대놓고 코스프레를 한 초상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는 이미지 타격이 적었던 편.[21]
  • 외제니 황후가 나폴레옹 3세의 자녀를 낳지 못해 후계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빅토리아 여왕내가 해봐서 아는데[22] 잠자리 자세를 바꿔보는게 어떻겠냐는 진지한 편지를 보냈다. 그렇게 해서 낳은 아이가 나폴레옹 외젠 루이 장 조제프 보나파르트.

  • 나폴레옹 3세가 그녀를 위해 친정인 스페인과 가까운 프랑스 남서쪽의 비아리츠에 지은 별장이 있는데, 제정이 폐지되자 1893년부터 고급 호텔로 개조되어 오늘날까지 관광 명소가 되었다. 지난 2016년 한불수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대한항공의 프랑스 여행 광고에도 등장했다. 한국에서 영상매체를 통해 외제니 황후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드문 사례.[23]
  • 외제니아라는 소행성의 이름 어원이 이 외제니 황후이며, 세계 최초로 소행성의 이름을 실존 인물에게서 따와 명명한 사례이다.
  • 뜬금없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앞바다에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외제니 황후 군도(Архипелаг императрицы Евгении)가 있는데[24] 프랑스 선원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 수에즈 운하를 만든 페르디낭 마리 레셉스는 그녀의 외가쪽 오촌 당숙이다. 레셉스가 어머니의 이종 사촌 동생이다.


5. 가족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보나파르트 가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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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속칭 나폴레옹 4세.[2] 나라에 따라 유제니아, 유제니, 에우헤니아로 불리기도 한다. 어원은 유진의 여성형 이름이다.[3] 외제니 황후를 가르친 가정교사들은 바로 소설 적과 흑을 쓴 작가 스탕달카르멘의 작가 프로스페로 메리메였다. 스탕달은 아버지 몽티조 백작의 프랑스인 전우인 인연으로 그녀를 가르쳤고, 메리메는 외제니의 어머니 마누엘라의 애인이라 그에게 사교상 필요한 모든 것을 알려준 한편, 외제니가 나폴레옹 3세를 만날때도 편지를 대신 써주기도 했다. 이 인연으로 메리메는 제2 제정 당시 궁정 출입을 하면서 그 측근이 되어 보수주의적 입장에 서기도 했으며, 상원의원으로 정치에도 관여했다.[4] 스페인 대귀족의 경우 Excelentísimo señor(남성)/Excelentísima Señora(여성)의 호칭이 붙는데 이 호칭은 각하와 대응된다. 그래서 공식석상에서는 테바 여백작 각하로 부른다. 프랑스 사교계에서 지내서 쓸 일은 거의 없었다.[5] 덴마크노르웨이를 통치한 올덴부르크 왕조의 방계로 러시아 제국로마노프 왕조가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로 홀슈타인고토르프의 직계, 스웨덴의 홀슈타인고토르프왕조가 홀슈타인고토르프의 방계였다.[6] 바사 공 본인이 원래 왕태자였으나, 나폴레옹 전쟁 당시 벌어진 핀란드 전쟁의 패배로 핀란드를 러시아 제국에 할양하면서 심해진 내부 불만으로 벌어진 쿠데타로 쫓겨났다. 스웨덴 왕위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화해하고 전쟁 중간에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스웨덴군에 대한 선처를 베풀었건 것이 계기가 되어 현 왕실인 베르나도테 왕조로 넘어간다.[7] 바사 공은 1877년까지 살아 있었다. 나폴레옹 3세의 몰락 소식을 들은 그는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작 본인이 사망한 뒤에 직계가 완전히 끊겨버리고 여동생 쪽 후손이 1명 남았는데(바덴의 빅토리아), 그 후손이 베르나도테 왕조로 시집갔다.[8] 그래도 이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던 탓인지 그 이후에도 나폴레옹 3세는 친척들을 통치가문의 여성과 혼인시키기를 원했고, 그러던 중 이탈리아 통일에 있어 프랑스의 도움을 받기를 원했던 사르데냐-피에몬테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자신의 사촌동생인 조제프 샤를 폴 보나파르트를 통치가문인 사보이아 왕가의 왕녀 마리아 클로틸데(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장녀)와 혼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그 자손들이 보나파르트 가문을 잇게 되었고, 그러면서 통치가문과 여러 차례 혼인관계를 맺었으니 소원을 반쯤은 이룬 셈이다.[9] 당시 스페인은 이사벨 2세가 군주였는데, 엄청난 혼란기였다.[10] 참고로 프랑스에서 혐오했던 징세청부업자 집안의 아들이였다.[11] 여기서 lorette는 기생이라는 표현에 가깝다.[12] 비록 외제니가 테바 여백작 작위를 상속받은 귀족이긴 했으나, 통치가문은 고사하고 자국의 대귀족도 아닌 그녀가 황후자리에 뒤떨어지는 신분인건 맞았다. 그러나 ‘허튼 계집’이라는 언사 역시 부당한 모욕이였기 때문에 이 말로 외제니 황후의 미움을 산 페르시니는 권력의 중추에서 밀려났다. 그럼에도 어쨌든 개국공신이라 페르시니 본인은 제 2제정이 설립되고 공작 작위를 받았다.[13] 모르니 공작은 나폴레옹 3세의 이부형제이자 귀족 출신이라 민중들이 원하는 신부감을 잘 파악했다.[14] Grandes de España라고 해서 스페인이 민주화 되기 전까지는 어마어마한 특권과 예우를 받고 있었다. 일반 귀족은 아무리 공작이라도 대귀족 남작보다 서열이 아래였고, 의전서열은 왕족(인판타) 바로 다음이었다. 여권도 외교관 여권으로 발급받았다. 상술한 것처럼 호칭은 각하다.[15] 중요한 정책의 경우 전보를 활용해서 남편에게 물어보았다고 한다.[16] 이건 외제니가 기본적으로 조제핀 황후보다는 경제력, 계급 등에서 우세한 귀족 집안 출신이어서 사치를 부려도 자기 내탕금에서 먼저 지출했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말년에 프랑스가 공화정으로 전환되면서 외제니 개인 재산과 프랑스 황실 재산이 뒤섞여 법적인 문제가 있었다.[17] 마리 루이즈나폴레옹 1세조제핀 황후와 이혼한 후 맞아들인 두번째 황후였다. 하지만 그녀는 프랑스의 오랜 적인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프란츠 2세의 딸이자, 프랑스 혁명 때 구 체제의 상징으로 몰려 처형당한 그 마리 앙투아네트의 조카손녀였다. 이로 인해 마리 루이즈는 결혼 초기부터 프랑스 국민들에게 오스트리아 여자라고 비난받으며 황후로서 별로 지지받지 못했고, 나폴레옹 역시 대외적으로 러시아와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몰락이 시작됐기에 마리 루이즈와의 결혼을 정치적 실수로 보기도 한다.[18] 오스만 제국에서 황태후의 호칭.[19] 언니의 후손들은 스페인에서도 부자 귀족으로 유명한 알바 공작 가문이다. 알바 공작가의 재산은 2011년 기준으로 무려 약 7조원이다.[20] 예를 들어 같은 시기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처럼 본인이 직접 왕위를 계승받은 군주였거나, 현대적인 공화정(당시에는 여성 참정권도 없었던 시기여서 불가능했겠지만)의 지도자였을 경우. 참고로 프랑스는 2023년 6월 기준 역사상 여성 국가원수대통령 권한대행이 없으며, 여성 섭정으로서도 이 사람이 마지막이다.[21] 마리 앙투아네트와 마리 루이즈가 프랑스에서 욕먹었던 이유는 결혼으로 처음 프랑스에 와서 친한 사람들끼리만 지내며 프랑스에 잘 적응하지 못해서였지만, 외제니는 스페인 출신 외국인이면서도 8살 때부터 파리에서 살았기 때문에 성장 배경이 완전히 달랐다.[22] 빅토리아 여왕은 남편 앨버트 공과 무려 아홉 명(4남 5녀)의 자녀를 낳았고, 그들이 유럽 각국의 왕실 자제들과 혼인하면서 여러 나라의 왕족들을 손주로 두어 '유럽의 할머니'라는 별명까지 얻었다.[23] 사실 위의 동영상도 알고보면 미대 떨어지고 자살한 사람같은 고증오류가 있는데, 외제니 황후는 어렸을때 이미 프랑스로 이주해서 중간과정이 많이 생략되었다.[24] 가장 크고 유명한 섬은 극동연방대학교 캠퍼스가 있는 루스키 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