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다 노리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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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차
연도
우승
준우승
점수
1
1988~89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조훈현
파일:중국 국기.svg 녜웨이핑
3-2
2
1992~93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서봉수
파일:일본 국기.svg 오타케 히데오
3-2
3
1996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유창혁
파일:일본 국기.svg 요다 노리모토
3-1
4
2000~01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이창호
파일:중국 국기.svg 창하오
3-1
5
2004~05
파일:중국 국기.svg 창하오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최철한
3-1
6
2008~09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최철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이창호
3-1
7
2012~13
파일:중국 국기.svg 판팅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박정환
3-1
8
2016
파일:중국 국기.svg 탕웨이싱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박정환
3-2
9
2020~23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신진서
파일:중국 국기.svg 셰커
2-0
* 우승 당시 三단이었으나, 중국기원의 규정에 따라 즉시 九단이 되었다.




요다 노리모토
依田紀基 / Yoda Norimoto

파일:요다_노리모토.jpg
직업
바둑기사
생년월일
1966년 2월 11일 (58세)
국적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소속
일본기원
출신지
홋카이도 이와미자와시
입단
1980년
단급
九단
누적우승경력
36회
한큐바둑 닉네임
tiger
일본기원 요다 노리모토 소개 페이지

파일:attachment/winner12.jpg

1992년 12회 NEC배[1]에서 우승했을 때의 리즈 시절.

파일:attachment/pht_face.jpg

요즘 모습.

1. 개요
2. 경력
3. 여담
4. 주요 기사들과의 상대 전적[2]
4.1. 한국 기사



1. 개요[편집]


일본프로 바둑 기사.


2. 경력[편집]


1980년 14세의 나이로 입단했고 1983년 신인왕전 우승, 1986년 신예 토너먼트전 우승, 1992년 NEC배 우승 등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일본 바둑계의 주목을 받았다. 1993년 NHK배 우승으로 九단으로 승단. 기풍은 유연하고 발 빠르고 사석작전에 탁월하다.[3] 장작 패기로도 유명한데, 바둑돌을 세게 놓는 습관을 묘사한 별명이다.

일본 바둑 기사 중에서 대한민국에 특히 유명한데, 전성기를 달리던 1990년대 이창호의 천적이었기 때문. 국제 기전에서 이창호와 만나기만 하면 한때 상대 전적이 80%를 넘을 정도로 이창호 킬러로 불렸다. 물론 2000년대 이후로는 이창호 바둑만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강동윤 같은 이창호 잡는 기계가 나오기도 했지만, 1990년대 이창호의 적수가 없던 시절에 요다 九단은 이창호의 천적이라 불릴 정도로 이창호에게 유독 강했다. 1998년 이창호가 요다 九단을 보고 "요다는 내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길 수 없을 거 같다."라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저 인터뷰 다음 해 춘란배 16강전에서는 이창호가 요다를 반집 차이로 이겼다.[4] 서로 엎치락 뒤치락 한 결과, 2023년 11월 현재 공식전 기준으로 9승 8패다.[5]

전성기 이창호에게 유독 강했던 이유에 대해 요다가 직접 말하길, "이창호가 출전한 모든 기보를 어떻게든 구해서 몇 번이고 복기했다."라고.(...) 이창호의 대국은 2천국이 넘고, 이걸 다 복기해서 패턴을 숙지했다고 할 정도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참고로, 제 7회 농심신라면배에서 불패를 달리던 이창호에게 첫 패배를 안김과 동시에 이 대회 유일한 일본의 승리를 가져오기도 했다.[6] 이쯤 되면 천적 확정.

반면에 1999년 삼성화재배에서는 안조영에게 완패당해[7] 본선 첫판에서 탈락하기도 했고, 2002년 토요타 덴소배 본선에서는 한국의 여류기사 박지은에게 패하는 등, 비교적 약체로 분류되는 기사들에게 종종 덜미를 잡히기도 했다. 심지어 1997년 제2회 LG배에서는 독일 대표로 나온 한스 피치[8]에게 반집 패를 당한 적도 있었다.[9]

일본 국내 기전에서는 1996년~1998년, 2003년~2005년 기성(碁聖)전 3연패, 1998년~2000년 NHK배 3연패, 2000년~2003년 명인전 4연패 등의 성적을 거두었다.

국제 기전에서는 1993년 제5회 TV 바둑 아시아 선수권대회 우승, 1996년 삼성화재배 우승,[10][11] 1998년 제10회 TV 바둑 아시아 선수권대회, 1999년 제11회 TV 바둑 아시아 선수권대회 2연패(통산 국제 속기전 3회 우승), 후지쯔배응씨배 준우승과 상술했듯이 농심신라면배 일본 우승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국제 기전에서 맥을 못추던 일본 바둑의 구세주 역할을 한 셈.

2014년 3월 바둑 프로그램 Crazystone, Zen과의 4점 접바둑에서 각각 2집반 패, 불계승을 거두었다. 2015년 3월 조치훈이 바둑 프로그램 돌바람, Crazystone과 각각 4점, 3점 접바둑을 뒀을 때 해설을 맡아 조치훈, 바둑 프로그램을 모두 디스했다. 조치훈은 돌바람과의 대국에서 지도대국 같은 느낌으로 두다 포석이 약한 대신 중후반과 사활에 강한 돌바람에게 당해 30집 이상 불리한 상황이었고, 컴퓨터 프로그램은 팻감 활용 등에서 가끔씩 이상한 수를 뒀기 때문이다.

2021년 제22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의 특별 이벤트에 참가하였는데, 고바야시 고이치와 함께 일본 대표로 출전했다. 이 이벤트에서 일본은 1승 7패로 부진했지만, 요다가 이창호를 상대로 승리하며 '이창호 킬러'임을 다시 확인시키고 일말의 자존심은 챙겼다.

2022년 제27회 삼성화재배 월드 바둑 마스터스의 시니어조 일본 예선에서 유키 사토시를 꺾고 본선 진출에 성공했지만 일본기원 내부 사정으로 인해 출전할 수 없게 되었다.[12]

2023년 6월 23일 제4회 신안 월드 바둑 챔피언십 결승에서 위빈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2023 쏘팔코사놀 레전드리그에 KH에너지 4지명으로 선발되어 외국인 선수 자격으로 한국시니어바둑리그에서 활동하게 됐다. 시즌 성적은 5경기 출전해 전승을 했다. 시즌 도중에는 11월 11일과 12일에 유창혁, 이창호와 '한일 20세기 라이벌 매치'라는 제목으로 특별 대국을 가졌다. 11일 열린 유창혁과의 대국에서는 매우 우세한 바둑을 역전패 당해 반집을 졌고, 12일 열린 이창호와의 대국에서는 완승을 거두며 불계승을 거뒀다.

11월 16일 삼성배 32강전에서 한웅규에게 패했다.

12월 3일 2023 쏘팔코사놀 레전드리그 플레이오프 3차전 2국에서 김동엽 九단에 패하며 팀의 챔피언 결정전 진출이 좌절되었다.


3. 여담[편집]


  • 고바야시 고이치, 조치훈 등이 수놓던 1980년대를 이어 1990년대를 대표한 일본 기사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1990년대를 기점으로 쇠퇴하기 시작한 일본 바둑의 최후의 보루라고도 여겨졌던 기사. 요다 노리모토 九단이 나이가 들면서 쇠퇴하자, 일본 바둑은 본격적으로 갈라파고스화되어버렸다. 그러다가 대만 출신 장쉬 九단의 LG배 우승 이후로 일본 바둑은 세계 무대에서 완전히 도태되어버렸다.

  • 그의 부인인 하라 사치코[13]와 아들 요다 오조라 역시 바둑 기사이다.

  • 조훈현트래시 토크에 대응하기 위해 귀마개를 끼고 대국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귀마개가 너무 신경쓰여서 계속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빼버렸다.

  • 과거 농심배에서 목진석과의 대국 때 첫수를 천원에 놓다가 바둑돌을 놓쳐 또르르 굴러간 적이 있다. 그 직후 요다가 "아! 스미마셍."이라 말하고 다시 착점했다.


4. 주요 기사들과의 상대 전적[14][편집]



4.1. 한국 기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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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의 속기 기전. 2012년에 폐지됐다.[2] 2023년 12월 3일 기준.[3] 1994년 월간바둑에서는 요다 九단의 기풍에 대해 '질서정연한 초반, 균형감 있는 중반, 이창호 만큼은 안 되지만 치밀한 후반'으로 평한 바 있다.[4] 요다가 마지막 초읽기에 몰려 끝내기 순서를 틀리는 바람에 한 집 손해 본 것이 컸다.[5] 비공식 대국을 포함한 전체 성적은 요다 기준으로 13승 10패.[6] 전 대회인 6회 대회가 소위 일컬어지는 상하이 대첩임을 생각한다면 충격과 공포...[7] 불과 73수만에 끝났다(...)[8] 독일 출신의 일본기원 소속 프로 바둑 기사. 2003년에 바둑 보급 활동을 위해 방문한 과테말라에서 강도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9] 프로 바둑 세계 대회에서 유럽 출신 기사가 승리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10] 덧붙여 삼성화재배 초대 우승자이자, 이는 현재까지 일본 국적 기사의 유일한 삼성화재배 우승 기록이다. 일본기원 기사로는 2003년 삼성화재배 조치훈 九단의 현재까지 유일무이한 와일드 카드 우승이 있다.[11] 당시 유창혁 九단과 응씨배 결승 5번기, 삼성화재배 결승 3번기로 연달아 맞붙었는데, 유창혁 九단이 응씨배를, 요다 九단이 삼성화재배를 가져갔다. 우승 상금도 각각 40만 달러로 같았다.[12] 그 자리에는 나카무라 스미레 三단이 와일드 카드로 출전했다.[13] 전 부인 요다 마사코[14] 2023년 12월 3일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