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도가와 나가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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淀川長治
1909년 4월 10일 ~ 1998년 11월 11일

1. 개요
2. 일생
3. 주요 영상
4. 기타
5. 패러디


1. 개요[편집]


일본영화 평론가일본의 로저 이버트 같은 존재였다. 오랫동안 테레비 아사히의 영화 프로그램(우리나라의 명화극장 같은...)인 《일요양화극장》(공식 홈페이지)의 해설을 맡아 현재도 그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일본 영화사에 수많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요일은 다르지만 라이벌 프로인 닛폰 테레비의 금요 로드쇼의 해설을 맡은 배우 미즈노 하루오(1931~2008), TBS 월요 로드쇼 해설을 담당한 요리연구가 오기 마사히로(1925~1988)와 같이 언급된다. 우리나라로 치면 정영일, 이용관 중앙대 교수[1] 같은 인물이라 보면 된다.

애칭은 요도초상(ヨドチョーさん), 요도상(ヨドさん) 등. 그에게서 사상적 영향을 받은 평론가로는 주로 마치야마 토모히로가 거론된다.


2. 일생[편집]


1909년에 효고현 고베게이샤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영화관 주주인 친척의 영향으로 영화에 눈을 뜨기 시작, 효고현립 제3고베중학교(현 효고현립 나가타고등학교)를 거쳐 니혼대학 법학부 미학과 예과를 중퇴했다. 특히 학창시절에 자신의 친구들을 데려와 영화감상을 시키기도 하는 등 영화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니혼대학에 입학한 1927년에 도쿄로 상경할 당시 <영화세계>라는 잡지에 투고한 것이 계기가 되어 당시 편집장인 난부 케이노스케가 발탁하여 동 잡지의 편집자로 일하다가 1929년에 고향인 고베로 내려가 수입 미술품점 '랄 에봔타이유'에서 일했다. 이후 1933년에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오사카 지사에서 1936년에 찰리 채플린과 회담에 성공하여 훗날 '채플린 평론 1인자'로 꼽혔다고 한다. 이후 1938년에 모던 타임즈의 일본 개봉과 동시에 선전 강화를 위해 도쿄지사로 이직, 이후 존 포드 감독의 영화 <역마차>를 선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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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초반, 할리우드 체류 시절 모습.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미국과의 적대관계가 심화되자 토호의 선전부로 옮기고 이곳에서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를 만나 친분을 쌓았고, 1945년 종전 이후 미국영화 전문 배급사 센트럴영화사의 교육부로 이직했다가 1947년에 영화잡지사 <영화의 친구(映画の友)>로 옮겨 이듬해부터 1964년까지 편집장, 1965~1966년 폐간 때까지 고문으로 일하며 평론가 겸 해설자로 잡지에 기고하는 활동을 했고[2], 1951년에는 취재차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할리우드로 가면서 비행기 내에서 영화감독 클라렌스 브라운과 만나 대화를 했고, 헐리우드 체류 중인 195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친구 구로사와 아키라가 만든 라쇼몽이 외국어 영화상을 받을 당시 친구인 구로사와를 대신해 초대받기도 했다.

1960년부터 1963년까지 일본교육TV(현 테레비 아사히)에서 방영된 해외 드라마 《래러미 목장》의 해설로 주목을 받았으며, 이후 1966년부터 시작된 TV 아사히 계열 장수 프로그램 '일요양화극장'(당시에는 '토요양화극장')의 해설자로서 프로그램 개시 전부터 죽기 하루 전날까지 32년간 독특한 말투로 팬들을 매료시켰다. 특히 "무섭군요, 무서워요"나 방송 말미의 "그럼 다음주를 기대하세요. 안녕, 안녕, 안녕..."는 요도가와의 명대사로서 이야깃거리가 되어 왔다.

한때 "안녕"의 회수는 회마다 달랐지만 어느날 중학생 소년에게서 직접 전화를 받아 "요도가와 씨가 '안녕'을 몇번 말할지 친구들과 내기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때 요도가와는 소년에게 "내기를 하는 건 좋지 않다"며 타이르고 그때부터 "안녕"은 3번으로 고정되었다.

실은 동성애자이기도 하다. 1996년경에 고백했는데, 부친의 본처가 아이를 가질 수가 없어서 가문의 대를 잇기위해 자신의 조카를 첩으로 추천해서 그를 낳았는데, 후에 이를 알게 된 그는 대를 잇기 위해 이용된 어머니를 불쌍하게 느끼고, 어머니를 이용한 가문에 복수하기 위해 일생 독신으로 지내게된다. 후에 결혼을 하게 되지만, 첫날밤에 신부를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했다. 출처 영화배우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같이 목욕해보는 게 소원이기도 했다고. 좋아하는 배우는 찰스 브론슨. 근육질 몸매를 선호한 듯.

게이다(gaydar)가 발동해서인지 태양은 가득히, 벤허 등 지상파 TV 영화 해설에서 동성애 코드를 읽어내고 언급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1998년 9월 6일에 오랜 친구인 구로사와 아키라가 세상을 뜨자 요도가와는 구로사와의 장례식에서 관 속에 누운 구로사와를 향해 "나도 곧 간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고, 10월경에는 심부전증으로 쓰러졌음에도 영화 평론 및 강연 활동을 멈추지 않고 불철주야 뛰다가 11월 11일 오후 8시 11분에 복부대동맥류 파열로 인한 심부전증으로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3] 향년 89세. 요도가와가 사망하자 신문과 방송은 연일 추모 특집을 내보냈고, 빈소에서는 약 3천여명이 몰려들어 그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그를 사모하는 이들은 '사요나라회'를 만들어 그를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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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도가와 나가하루의 묘역.

1998년 11월 17일 중앙일보 <오영환의 도쿄에세이 - 일본 울린 '사요나라 할아버지'>


3. 주요 영상[편집]




1982년 NHK와의 인터뷰 영상. (4회 중 1화)



1988년 5월 1일에 테레비 아사히 30주년 기념으로 방영된 <일요양화극장 스페셜 - 요도가와 나가하루 내 청춘의 할리우드>


1998년 사망 후 추모방송 및 최후의 영화해설. 영화는 친구인 구로사와 아키라의 명작 《요짐보》의 서부식 리메이크인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라스트맨 스탠딩.(녹화는 죽기 전날인 10일, 방영은 15일.)


4. 기타[편집]




AC 재팬의 첫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4초~16초 구간). 또한 마카로니 웨스턴이라는 말의 창시자.



방송이 끝날 때 나오는 음악. 작곡가와 제목은 콜 포터 작곡의 So in Love[4]. 방송이 끝나면 내일이 월요일임을 깨달아서 "월요일의 테마"라고 하기도 한다.

사망 8년 후, 일요양화극장 방송 40주년 기념으로 그의 영화해설을 담은 요도가와 나가하루의 명화해설이 발매되었고, 2011년에는 일요양화극장 45주년 기념으로 요도가와 나가하루의 명화해설 DX가 발매되기도 했다.


2015년 Hulu 일본 광고에서 CG로 등장했다. 목소리는 본인의 생전 음성 소스들을 이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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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유일한 혈육인 조카 요도가와 미요코는 현재 잡지 편집자로 근무중이며, 동시에 삼촌에 대한 각종 저작권도 관리중이다.

1992년부터 2019년까지 슈에이샤는 외국인 영화제작자에게 그의 이름을 딴 상을 시상했다. 정식 명칭은 '일본 영화비평가상'이다.

우에키 히토시매니저였던 코마츠 마사오가 무명 시절 이 양반 성대모사로 빵 뜨면서 일본 예능계에서 이름을 남겼다고 한다.

영화 장미의 행렬 후반부에 카메오로 깜짝 출연했다.

하스미 시게히코와 절친한 사이였다.

5. 패러디[편집]


동성애자이기 때문인지 종종 이것에 대해 엮인다.

가치무치 팬티레슬링을 말하다. 물론 믿으면 곤란하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사후 인터뷰에서 그의 영화 ""에 대해 말하는것이다.

가치무치 팬티레슬링 해설 역시 믿으면 곤란하다.

괴담 레스토랑 19화에도 요도가와를 패러디한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예고편 보기. 문제의 장면(?)은 1분 21초부터.
2014년 말 개봉한[5] 요괴 워치 극장판에서 위스퍼가 요도가와 나가하루 역으로 분장해 다시금 화제가 되기도 했다.

날아라 호빵맨의 캐릭터 해골맨을 요도가와 나가하루를 본 떠서 만들었으며, 실제 억양을 해골맨의 음색으로 패러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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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EBS 주말의 명화 패널[2] 당시 그의 밑에서 일한 분이 영화평론가 코모리 카즈코(1909~2005)였다.[3] 공교롭게도 그 날이 아버지의 기일이었다.[4] 1999년 3월 28일까지 썼다.[5] 한국에는 2015년 7월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