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도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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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
요도도노
淀殿


출생
1567년
오미국 아자이군 오다니성
(현 시가현 나가하마시)
사망
1615년 6월 4일 (향년 48세)
셋쓰국 히가시나리군 오사카 오사카성
(현 오사카부 오사카시 주오구 오사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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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차차(茶々) 또는 키쿠코(菊子)
신체
170cm
가족
남편 도요토미 히데요시
외삼촌 오다 노부나가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
아버지 아자이 나가마사
어머니 오이치노카타
동생 죠코인, 스겐인
사돈 도쿠가와 이에야스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노부나가의 혈통을 잇고,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고, 이에야스가 두려워한 여인"

요도도노를 주인공으로 한 <차차 : 천애의 귀비>라는 일본 사극의 카피.[1]


일본 전국시대의 인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이며 도요토미 츠루마츠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생모. 센히메(千姫)는 그녀의 며느리인 동시에 조카이기도 하고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도 조카이다.


2. 생애[편집]


아버지 아자이 나가마사와 어머니 오이치(お市) 사이의 장녀로 소위 '아자이 세 자매'[2] 중 첫째로 이름은 '차차[茶々]' 또는 '키쿠코(菊子)'. 1573년 외숙 오다 노부나가의 공격으로 나가마사의 거성 오다니 성(小谷城)이 함락될 때 어머니와 두 동생과 함께 구출되어 오다 가에서 살게 된다. 하지만 1582년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 노부나가가 사망하고 오이치가 시바타 카츠이에재혼하면서 키타노쇼 성(北ノ庄城)에 살게 되지만 시즈가타케 전투로 키타노쇼 성이 함락되고 카츠이에와 오이치는 자결하면서 두 동생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보호를 받는다. 그 후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는데 다른 두 여동생은 차례차례 시집을 보냈는데 차차만은 20살이 지나도록 혼례를 미루더니 1585년 관백에 취임한 히데요시가 1588년 으로 취한 것이다.[3]

요도도노의 어머니 오이치를 사랑했던 히데요시가 어머니를 가장 닮은 그녀를 측실로 맞은 것이라고 한다. 어머니를 닮은 탓인지 히데요시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츠루마츠(鶴松)를 낳고 요도 성(淀城)을 받았으며 그녀의 호칭 '요도도노'[4]는 여기서 유래한 것. 불행히도 츠루마츠는 3살 때 요절하지만 다시 히로이마루(拾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낳는다. 히데요리의 생모라는 점을 이용해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도 도요토미 가의 실권을 잡았으나 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아들 히데요리와 함께 할복했다. 카이샤쿠는 모리 카츠나가가 맡았으나 유해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존설도 돌았다.


3. 기타[편집]


  • 어머니인 오이치가 전국시대 제일가는 미녀로 유명했는데, 요도도노도 그런 오이치를 닮아서 전국시대 제일가는 미녀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호색가였던 히데요시가 요도도노를 가장 총애한 이유 중에 하나가 미모 때문이었을 정도. 하지만 코다이인과의 관계는 의외로 나쁘지 않았으며 서로 조력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 매우 자존심이 센 여성이었던 모양으로, 다이고의 꽃놀이에서 사촌이자 같은 히데요시의 측실인 마츠노마루와 서열을 다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신앙 깊은 온화한 성품이라고 전해진다.

  • 히데요시 사후와 관련된 일화가 있는데, 히데요시의 정실 코다이인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관에 넣자 이에 질세라 히데요리가 손을 씻은 물을 관에 넣었다고 한다. 그것을 본 코다이인이 아직 앞날이 창창한 히데요리와 관련된 것을 관에 넣다니 불길하다면서 혀를 찼다고.

  • 신장이 165~170cm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일본 여성 평균 신장이 143cm였던 것, 현재 일본 여성 평균 신장이 158cm인 것을 감안하면 현대 기준으로 보면 180cm 이상인 엄청난 장신이었던 셈. 애당초 모두 각각 180cm, 168cm나 되는 장신이었으니 당연한 셈.

  • 이시다 미츠나리, 오노 하루나가[5]와의 불륜설이 유명. 히데요시가 수많은 측실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은 여성이 오직 그녀밖에 없어서 사실 히데요시는 무정자증이고 츠루마츠와 히데요리는 불륜의 결과물이라는 이야기가 거의 정설이 되었을 정도였다. 음모론이라고 치부하기도 뭐한 것이 히데요시가 천하가 알아주는 호색가였고 정실 네네 사이에 자식이 없기도 해서 첩을 15명이나 들였는데 자식을 보지 못했다. 첩이 되기 전 아이를 다섯 명씩이나 낳은 여인도 있었으니 여자쪽은 문제가 없었다. 더군다나 요절한 츠루마츠는 그렇다 쳐도 애를 써서 본 히데요리는 키가 무려 197cm, 현대 기준으로 봐도 정말 대단한 체구를 자랑하는 등 체격이 왜소했던 아버지 히데요시와 닮은 구석이라곤 없었으니 현대 시점에서 봐도 의심이 안 들래야 안 들 수가 없다.[6] 젊은 시절부터 자식이 좀처럼 생기지 않는 체질인 히데요시가 50대라는 현대 기준으로도 늦은 나이에 아들 둘은 가진다는 것은 매우 난망하기 때문이다.

  • 아자이 나가마사의 오다니성, 시바타 카츠이에의 키타노쇼성, 그리고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오사카성 등 낙성(落城)이 세번이나 발생했기 때문에 농담 삼아 '전국 제일의 불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한 전쟁으로 인한 것은 아니나 그녀가 받았던 요도 성은 히데츠구 사건과 연루되어 폐성이 되기도 하였다.

  • 2017년 설문조사한 '가장 좋아하는 전국 시대의 여성 랭킹'에서 4위를 차지했다.[7]#


4. 창작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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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의할 점은 히데요시의 건을 제외하면 모두 과장이란 것이다. 먼저 노부나가의 경우 노부나가의 자식도 아닌 누이의 딸, 즉 조카일 뿐이며, 노부나가의 친자식들이 멀쩡히 있고 대를 이었으니 딱히 돋보일 존재는 아니었다. 노부나가와 혈연인 여러 사람들 중에서 하나. 거기다 히데요시 사후 요도도노는 유일한 패권자인 이에야스에게 농락당하기 일쑤였고, 이에야스가 패권을 기정사실화 한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는 그녀를 두려워할 이유가 더욱 없어진다. 그냥 센코쿠 시대의 3대 영웅들과 크고 작게 연관이 있었던 여인이라는 의미 정도로 이해하면 무난하다.[2] 여동생으로 죠코인(오하츠), 스겐인(오고우)이 있다.[茶々] 뒤의 표기는 동어 반복을 나타내는 기호이기 때문에 '차차(茶茶)'라는게 원래 표기일 듯하다.[3] 따지고 보면 어머니가 자결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인 집안 원수와 결혼한 것이다.[4] '요도 성의 마님'이라는 뜻. 일본에 관심이 있다면 잘 알겠지만 '~도노(どの/殿)'는 일본어에서 명칭/호칭 뒤에 붙여서 남을 높여 부르는 존칭이다. 한국어로 하면 '요도 공' 정도. 마찬가지로 '요도노 카타(淀の方)'라고도 불렸으며 '요도기미(淀君)'라는 호칭으로도 불리는데 '기미(君)'가 유녀의 호칭에 자주 쓰였다는 점에서 그녀를 비하하기 위한 호칭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실제로는 '기미'가 귀부인에게 붙여지는 칭호이기 때문에 유녀를 직접 부를 때 띄워주는 의미에서 불려졌다는게 정답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요도도노'를 '기미'라고 부른 에도 시대에 쓰여진 기록에 음란하고 질투가 많으며 히데요시의 정실 네네권력 다툼을 했다는 험담이어서 '요도기미'는 비하하는 명칭이 분명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에도 시대에 작성된 도쿠가와 가문의 계보인 <도쿠가와 바쿠후 가보(徳川幕府家譜)>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처 아사히히메가 '아사히기미(朝日君)',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정실 스겐인이 '오에요기미(於江与君)'라고 적혀 있는걸 보면 '기미'가 특별히 비하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용법상으로도 '기미'는 귀부인에게 붙여지는 경칭이다.[5] 大野治長. 요도도노의 유모 아들, 즉 젖형제인데 실제로도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6] 다만 불륜이냐 아니냐를 떠나서,히데요리의 거대한 키는 외가쪽 유전자인 것으로 추정된다. 외할아버지(아자이 나가마사: 170후반-180cm 추정이라는 썰이 있다), 외할머니(오이치: 168cm로 추정), 어머니(챠챠: 165-170cm로 추정)의 기골이 당대는 물론 현대 일본인 기준으로도 모두 장대하기 때문이다. 한편 아빠 후보 중 한명으로 손꼽히는 이시다 부교의 신장은 유골 조사 결과 156cm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7] 1위는 네네, 2위는 오이치, 3위는 가라샤, 5위는 이이 나오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