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미우리 자이언츠/선수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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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 로스터(2021년 기준)
1.1. 감독 및 코치
1.2. 투수
1.3. 포수
1.4. 내야수
1.5. 외야수
2. OB
2.1. 투수
2.2. 포수
2.3. 내야수
2.4. 외야수
3.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
4. 영구결번
5. 준영구결번
6. 임시결번



1. 현 로스터(2021년 기준)[편집]



1.1. 감독 및 코치[편집]


  • 83. 하라 다쓰노리 : 감독
  • 77. 모토키 다이스케[1] : 1군 수석코치[2]
  • 87. 요시무라 사다아키 : 1군 작전코치
  • 88. 고토 코지 : 1군 야수 치프코치
  • 89. 이시이 타쿠로 : 1군 야수종합코치
  • 75. 무라타 슈이치 : 1군 야수종합코치
  • 81. 미야모토 카즈토모 : 1군 투수 치프코치
  • 73. 구와타 마스미 : 1군 투수 치프코치 보좌
  • 85. 스기우치 토시야 : 1군 투수코치
  • 74. 무라타 요시노리 : 1군 불펜코치
  • 79. 아이카와 료지[3] : 1군 배터리코치
  • 80. 아베 신노스케 : 2군 감독[4]
  • 78. 김기태 : 2군 수석코치
  • 86. 후루키 시게유키 : 2군 야수종합코치
  • 84. 마츠모토 테츠야 : 2군 야수종합코치
  • 71. 야마구치 테츠야 : 2군 투수코치
  • 82. 사네마츠 카즈나리 : 2군 배터리코치
  • 72. 타카하시 노부오 : 2군 불펜코치
  • 76. 니오카 토모히로 : 3군 감독
  • 102. 카타오카 야스유키 : 3군 야수종합코치
  • 103. 킨죠 타츠히코 : 3군 야수종합코치
  • 101 미사와 코우이치 : 3군 투수코치
  • 104. 아오키 타카히로 : 3군 투수코치
  • 104. 후지무라 다이스케 : 3군 내야수비·주루코치
  • 105. 카토 켄 : 3군 배터리코치
  • 106. 아이타 유우시 : 순회 투수코치 겸 트레이닝 코치
  • 100. 야마사키 아키히로 : 순회 타격코치
  • 존 터니 : 1군 트레이닝 코치
  • 이시모리 타카시 : 2군 트레이닝 코치
  • 아나부키 이쿠오 : 3군 트레이닝 코치


1.2. 투수[편집]


  • 12. 루비 데 라 로사 -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마이너리거 출신 외국인으로 주로 마무리를 본다.
  • 13. 토고 쇼세이 - 2020년 6월 23일 고졸 대뷔 2년차의 젊은 나이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를 상대로 6과 2/3이닝 94구의 호투를 펼쳤고 팀이 3:2로 승리하며 첫 개막 선발승과 함께 도쿄돔 첫 선발승을 챙겼다. 그 후 4번의 경기에사 모두 선발승을 챙겼지만 5번째 경기인 주니치 드래곤스와의 원정경기에서 3.2이닝 89구를 던지고 3실점 한 후 강판되어 첫 퀵후크를 기록하게 되었다.관련 기사(일어)
  • 17. 오타케 칸 - FA 먹튀 1 두자릿수 승리는 고사하고(2014년 이적 첫해 9승 및 129이닝 투구), 돈값을 못 하고 있는 왕년의 히로시마 에이스.
  • 18. 스가노 도모유키
  • 19. 다나카 도요키 - 2020년 8월 19일 부상으로 마운드에서 내려간 C,C,메르세데스를 대신해 긴급등판한 투수이다. 그날 경기에서 팀이 8:0으로 대승을 거두며 프로 데뷔 후 5년만에 첫 승을 수확하게 되었다.
  • 20. 앙헬 산체스[5]
  • 23. 노가미 료마 FA 먹튀 2 이적 후 5승, 선발등판은 겨우 10경기밖에 없다.
  • 28. 다구치 카즈토 - 1995년생의 젊은, 불과 170cm인 좌완 투수로 2016년부터 선발 로테이션의 한축을 담당.했으나 2019년은 폭망해서 2군행2020년은 다시 부활해서 개막 2선발로 기용됬다. 그후 5이닝을 소화하면서 개막2차전에서 시즌 첫 승을 챙기게 되었다. 그 후 2선발로써 꾸준히 활약하다가 부상 후 복귀전을 불펜등판으로 진행하였다.
  • 29. 쿠와하라 타쿠야
  • 30. 가기야 요헤이
  • 31. 하타케 세이슈 - 2019년부터 Roselia가 부른육조년과 하룻밤 이야기를 등장곡으로 쓴다[6] 2020년 8월 22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 선발등판 했지만 2.1이닝 동안 5실점을 하여 패전투수가 되었다. 그 후로도 계속 주전 선발에 문제가 있을 경우 대체선발로써 활약하고있다. 그 후 시즌 말미에 정규 선발진에 포함되었고 2020년 11월 1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를 상대로 프로 통산 첫 완봉승도쿄돔에서 기록하였다. 같은 해 11월 25일 진행되는 일본시리즈 4차전에 선발등판이 확정되었다.

  • 35. 사쿠라이 토시키 - 2020년부터 팀의 4선발로 기용된 고베출신 선수이다. 7월 12일 고향에 있는 구장인홋토모토 필드 고베에서 홈등판을 가졌지만 4.2이닝 3실점의 좋지 못한 투구내용을 보여주고 강판되었다.
  • 37. 다하라 세이지
  • 41. 나카가와 코타
  • 42. 크리스토퍼 크리소스토모 메르세데스 - 등록명은 C.C. 메르세데스로 C.C. 사바시아에서 따온 네이밍이라 한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도미니카 공화국 아카데미 출신의 육성형 좌완이지만 지배등록[7] 첫해인 2018년 시즌 도중부터 로테이션의 일각을 맡았다. 여담으로 바나나를 반찬으로 밥을 먹는[8] 특이한 식습관을 갖고 있다.(...) 2020년 오랜 부상 끝에 6월 개막전에 돌아왔지만 8월 19일 다시 갑작스런 부상으로 인해 다나카 도요키로 교체되게 되었다.
  • 45. 이마무라 노부타카
  • 47. 후지오카 타카히로 - 지바롯데의 좌완 에이스로 기대를 모았으나 커리어하이가 6승, 통산 21승밖에 못 했다.
  • 49. 티아고 비에이라 - 브라질 출신의 용병으로 최고구속 167을 찍고 2020년부터 거인군에 합류했다.캠프 첫날부터 151을 기록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관련기사 2020년 6월 3일세이부 라이온스와의 연습경기에서 제구에 난조를 보이면서 2/3이닝 5볼넷 5실점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달성했다.관련기사 하라 감독도 이런건 처음본다고 경악할 정도였다고.... 하지만 그 후로 어느정도 좋아진 투구를 보여주면서 2020년 개막 엔트리에 드는것에 성공했다. 2020년 8월 12일 일본에서 최고구속인 시속 163키로미터의 직구를 던졌다. 그 후에도 계투로 계속 활약했고 주로 연장전으로 돌입한 경기에 많이 등판했다.

  • 50. 토네 치아키
  • 53. 타카나시 유헤이 2020년 7월 14일 라쿠텐 이글스로부터 트레이드 되었다.#상당히 특이한 투구폼으로 공을 던진다. 아래 영상은 라쿠텐 시절 그의 투구를 정면에서 찍은 영상이다.
  • 54. 나오에 다이스케
  • 57. 타카기 쿄스케 - 2016년 야구도박에 연루되어 1년간 자격정지 징계.
  • 58. 미야구니 료스케
  • 62. 요코가와 카이
  • 64. 오오에 류세이
  • 67. 후루카와 유리
  • 95. 호리오카 하야토
  • 96. 나티노 디 플랜 - 2020년8월26일 메이지진구 구장에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를 상대로 선발등판 하게 되었다. 그 경기에서 1이닝 3실점 3피안타 1볼넷 1탈삼진을 기록하고 강판되었다.

1.3. 포수[편집]


  • 22. 고바야시 세이지
  • 24. 오시로 타쿠미 -팀의 간판타자인 사카모토 하야토와 함께 코로나바이러스19 확진판정을 받았지만 재검사에서 음성이 나왔다. 자세한건 사카모토 하야토문서참조. 그 후 6월 24일 복귀 후 첫 선발 출장 경기의 첫 타석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선발 구리 아렌을 상대로 3구승부 만에 3루타를 터뜨렸으며 그날 경기 팀의 첫 득점을 기록하였다. 전화위복이라고 현재는 주전포수이다.그리고 2020년 센트럴리그 베스트 나인에 뽑혔다.
  • 27. 스미타니 긴지로 -2018년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로부터 대려온 포수. 일본 프로야구의 선수협회장을 맡고 있다고 한다.관련기사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를 극복하기 위한 기부를 진행했다고 한다.
  • 38. 키시다 유키노리
  • 69. 다나카 타카야


1.4. 내야수[편집]



  • 0. 마스다 다이키-2020년 8월 6일 한신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8회말 투수로 등판하여 0.2이닝 무실점 1볼넷을 기록하였다.(...)메이저에선 비교적 자주 있지만 일본에서는 매우 드문일관련기사 아래 영상은 실제 투구내용이다.
2020년 9월 17일 도쿄 돔에서 진행된 한신전에서도 9회초 11점차 2사 만루 상황이 되자 불펜에서 몸을 푸는 모습이 포착되었다.다행히 등판은 없었다.

  • 5. 나카지마 히로유키
  • 6. 사카모토 하야토
  • 10. 저스틴 스모크
  • 25. 오카모토 카즈마
  • 29. 요시카와 나오키-등장곡이 가시나(선미)이다.
  • 44. 에릭 테임즈
  • 48. 젤러스 휠러[9]
  • 51. 다나카 슌타 -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주전 유격수 다나카 코스케의 동생. 2020년 9월 16일 오카모토 카즈마의 부상 결장으로인해 1군에 첫 선발출장하여 3루타를 뺀 싸이클링 히트를 완성하였다.
  • 52. 기타무라 타쿠미
  • 60. 와카바야시 아키히로
  • 61. 마스다 리쿠
  • 65. 마츠이 요시야
  • 68. 카츠키 카즈야 - 시즌 중인 9월 7일 롯데로부터 트레이드.
  • 93. 유아사 다이-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으로 인해 입원치료를 받던 사카모토 하야토를 대신해 2020년 6월 연습경기에서 주전 유격수로 상당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9일 리그 개막후 사카모토 하야토가 돌아오면서 주전 자리를 잃고 본래 자리인 백업 유격수로 돌아갔다. 6월 21일 한신과의 3차전에서 2루수로 1군 첫 선발출장하였다.


1.5. 외야수[편집]


  • 2. 양다이강 - 대만 출신 선수이며 등록명은 '요 다이칸'. 2017년 FA계약으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로부터 이적하였다.
  • 8. 마루 요시히로
  • 9. 카메이 요시유키 - 2005년부터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은 원클럽 맨. 2020년 8월 13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9회말 1사 주자 1,3루 3:3동점상황에 대타로 출전해 1타점 적시타를 만들어내 시즌 첫 끝내기안타를 신고하게 되었다.
  • 36. 이시카와 신고
  • 39. 다테오카 소이치로 - 일본판 탈쥐효과. 소프트뱅크에서 트레이드로 이적했는데 리드오프 자리의 구멍을 메우면서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그러나 탈쥐효과라고 하기에는 원 소속팀이 너무나도 잘 나가는 게 함정. 지금도 소프트뱅크에는 다테오카보다 훨씬 기량이 낫다고 평가받는 선수들이 1군에 자리가 없어서 2군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으며, 그렇다고 현재의 1군 선수들이 팀에 민폐를 끼치면서 이들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다테오카의 경우에는 그 선수들보다 더 기량이 어정쩡했던 게 본인의 선수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기현상의 수혜를 받은 격. 현재 소프트뱅크의 1군 선수들은 그 선수들보다 한수 위의 기량으로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다. 1군에서 자리를 잡고 싶으면 경쟁에서 이겨라. 그야말로 팀 내 경쟁의 이상적인 형태. 대체적인 평가는 소프트뱅크에 남아 있었으면 2군에서도 대타, 대수비 요원 밖에 못 했을 것이라는 평이 지배적. 단, 소프트뱅크 시절에는 2군에서 조차 주전자리를 장담 못했는데 새 팀에서 주전으로 자리를 잡은 이 선수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야마나카 히로후미 덕분에 소프트뱅크의 팜은 다른 팀 팬들이 군침을 흘리는 자원의 보고 취급을 받고 있다. 그러나 타테오카도 2019년에는 결국 1군에서 대주자 자리까지 빼앗기며 25경기밖에 못 나왔다. 애초에 2015년을 제외하면 위의 서술처럼 주전으로 잘 나간 해도 없었고... 결국은 한 해 반짝이라고 보는 게 맞다.[10]
  • 43. 시게노부 신노스케
  • 44. 이스라엘 모터 -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 2년차 외국인 선수. 2020년 8월 21일 1군에 콜업되어 그 다음날인 8월 22일 1군에서의 첫 안타를 히로시마 도요 카프소속의 아부타 카즈키를 상대로 친 홈런으로 기록하였다.
  • 59. 마츠바라 세이야
  • 66. 무라카와 카이토
  • 94. 카토 슈헤이
  • 99. 야마시타 코타


2. OB[편집]


괄호안의 숫자는 재적연도


2.1. 투수[편집]


전쟁으로 인해 일찍 산화한, 초기 일본 야구의 신화적인 선수.
러시아계 일본인으로 초기 거인군의 에이스였다.
한국계 일본인으로 1918년 5월 18일,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났다. 1944년, 25살의 나이로 감독직에 올랐는데 이는 일본 프로야구 최연소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기도 했고, 1976년에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선수시절 후지모토 히데오(藤本 英雄)라는 등록명을 사용한 시기가 있는데 퍼펙트 게임은 이 시기에 달성했다. 그래서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퍼펙트 게임 투수라고 하면 보통 후지모토 히데오라고 한다.
본명은 벳쇼 아키라 였지만 요미우리에 입단한 이후 개명하였다. 난카이 호크스의 에이스였으나 요미우리로 이적하는 과정에서 분쟁이 발생했고, 이 벳쇼 빼내기 사건은 일본 프로야구가 양대리그로 분리되는 계기를 제공하면서 일본야구 역사의 중대한 분기점을 남긴 선수. 선수로서도 통산 310승(NPB 역대 5위), 335완투(역대 4위), 4350.2이닝(역대 5위), 평균자책점 2.18의 뛰어난 성적을 남긴 당대의 대투수였다.
역대 요미우리 감독 중에서는 큰 인상은 남기지 못했지만 나가시마와 오 사다하루의 임기 사이에 땜빵 가교 역할을 하면서도 그 사이에 두번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룬 명장. 나가시마가 1980년 해임당하고 나서 같은 해에 은퇴한 오 사다하루가 코치로서 경력을 쌓는 동안[11] 감독 부임 첫 해인 1981년에 일본시리즈[12]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3년 후인 1983년 세이부와의 일본시리즈에서의 패배[13]의 책임을 지는 형식으로 후지타가 자진사임히고 정해진 수순대로 오 사다하루가 감독으로 앉았는데 오 사다하루가 임기 5년동안 기대이하의 성적을 거두자 88년 시즌 후에 자진 사임의 형식으로 오 사다하루를 물러나게 했다. 다음은 첫번째 임기 당시 일본시리즈 우승이라는 과제를 안고 본의 아니게 물러난 나가시마를 다시 감독으로 앉혀 명예회복의 기회를 주는 수순이었으나 나가시마 본인이 아직은 때가 아니라면서 고사하는 바람에 다시 급하게 후지타에게 감독 취임을 요청했고 감독자리에 재취임한 후지타는 부임 첫해인 89년 다시한번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14] 4년동안 요미우리를 지휘한 뒤 1992년 야쿠르트와의 치열한 경쟁 끝에 2위로 시즌을 마감하고 우승 실패를 책임지는 형태로 다시 사임을 했고, 후임에는 FA와 역지명제 도입 등으로 돈질로 선수들을 싹쓸이하는 게 가능해진 때를 기다려온 나가시마가 다시 취임했다.
뛰어난 실력을 지녔지만 심장 질환때문에 선발로 긴 이닝을 던지기 어려워지자 구원 투수로 전업해 활약했다. 동시대의 곤도 마사토시나 이후의 에나츠 유타카 등과 함께 일본프로야구 전업 구원투수의 1세대라 할 수 있으며, '8시 30분의 사나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뛰어난 구원 투수로 활약했지만 혹사의 여파로 짧은 전성기 이후 그대로 선수생활이 끝났다. 이후 세이부 라이온즈와 요미우리 등에서 뛰어난 투수코치로 활약했다.
V9 시절 호리우치의 뒤를 이은 2선발, '왼손의 에이스'로 활약한 좌완투수. 1976년부터 1983년까지는 같은 고라쿠엔 스타디움을 홈으로 쓰는 퍼시픽 리그닛폰햄 파이터즈에서 준수한 선발투수로 선수생활을 이어갔으며 1981년 친정팀 요미우리와의 덕아웃 시리즈로 열린 1981년 일본시리즈에도 1차전과 5차전에 선발등판해 맞대결을 가지기도 했다.
고시엔 2대 괴동. V9 시절을 대표하는 요미우리의 에이스였으나 실력외에도 기행이 하늘을 찌르던 이단아. 감독으로선 팀을 대차게 말아먹었다.
김일융과 동일한 경로(재일 한국인의 외국인 간주로 인한 드래프트 번외 지명)으로 입단해 꽤 큰 기대를 받았지만 끝내 요미우리에서는 포텐을 터트리지 못하고 난카이 호크스로 트레이드된다.
일본명 니우라 히사오. 나가시마 감독하에서 70년대 후반 요미우리의 좌완 에이스로 활약하였다.
요미우리의 에이스였으나 에가와 사건에 얽혀 한신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된 비운의 투수.
70~80년대 초반 거인의 우완 에이스. 우타자 몸쪽으로 날카롭게 꽂히는 슈트가 주 무기였다. 2014년 오프시즌에서 김성근 감독을 따라 한화 이글스 투수코치로 부임했다.
'공백의 1일'로 드래프트를 시끌시끌하게 만들었던 인물. 이후 짧지만 강렬한 전성기를 맞으며 에이스로 군림했다.[15]
80년대 요미우리의 주축 셋업맨이었던 사이드암 투수. 요미우리 생활 이후 세이부 라이온즈로 이적한 뒤에도 뛰어난 구원 투수로 활약해 세이부 왕조 시대를 떠받들었다. 은퇴 이후 여러 차례 요미우리의 투수코치를 맡았다.
2016년 기준 일본 프로야구 최후의 퍼펙트 게임 투수. 사이토, 마키하라, 쿠와타는 거인의 세 기둥으로 불렸다.
'헤이세이의 대 에이스'. 80년대 말-90년대 후반의 사이드암 에이스.
히로시마의 언더핸드 에이스로 활약하고 1976년 카프의 첫 리그 우승 장면의 주인공이기도 했지만, 사고로 인한 기량 저하로 인해 장명부와의 맞트레이드로 난카이 호크스로 이적해 구원 투수로 뛰면서 어느 정도 재기했다. 하지만 요미우리에서는 그다지 좋은 활약을 하지 못했고 이 해를 마지막으로 일본 무대를 떠나 한국프로야구 청보 핀토스에서 뛰게 된다.
키요하라 카즈히로와 함께 'KK 콤비'를 이 뤄 고교 야구를 제압한 스타. 요미우리에서도 에이스로 활약했다.
요미우리에서는 선발과 중간계투, 마무리 등 여러 보직을 오가며 미묘한 활약을 했지만 2006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서 셋업맨으로 활약한 것을 시작으로 메이저리그에서도 준수한 좌완 중간계투로 활약했다.
대형 유망주로 주목받았으나 부상 이후 재기하지 못했다.
심판에게 위협구를 던진 카리브의 괴물. 1999년에는 요미우리 구단 사상 처음으로 외국인 투수로서 개막전 선발을 맡을 정도의 실적을 거두었지만 지랄맞은 성격이 발목을 잡았다.
세이부 라이온즈,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우승청부사. 요미우리에서도 두 번 일본시리즈 정상에 서고 통산 200승 고지도 밟는다.
2000년대 후반에서 2010년대 초반까지 요미우리의 토종 에이스로 활약한 좌완 투수. 오릭스의 지명을 거부하면서까지 요미우리에 입단할 정도로 충성심이 뛰어난 선수였지만 FA영입된 스미타니 긴지로의 보상선수로 풀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로 이적했다. 그의 조부 우츠미 이소오도 요미우리에서 뛰어서 그의 등번호였던 26번을 달고 뛰었다. 한국에서는 이승엽의 요미우리 시절 에이스이자 2009 WBC한일 베이스볼 클래식 4차전에서 이용규에게 빈볼을 던진 것으로도 잘 알려져있다.
일본프로야구 사상 육성선수의 최고 성공사례 중 하나로 꼽히는 좌완 투수. 고교 졸업 후 메이저리그에 도전했지만 4년간 싱글A마저 밟지 못하고 루키리그만 전전하다 요미우리의 입단 테스트에 합격해 육성선수로 일본프로야구에 겨우겨우 입성하는 파란만장한 프로 입문을 겪었다. 하지만 입단 2년차인 2007년 후반기부터 1군 붙박이로 정착하더니, 이후 일본프로야구 육성선수 최초의 신인왕을 차지하는 2008년부터 2016년까지 9시즌 연속 60경기 등판의 일본 기록을 세우고 홀드왕도 두 번 차지하는 등 요미우리의 허리를 책임지는 특급 셋업맨으로 활약했다. 통산 273홀드로 닛폰햄의 미야니시 나오키[16]가 2018년 갱신하기 전까지 일본프로야구 통산 최다 홀드 기록 보유자였다.
현재 요미우리 3군 투수코치이다.
KIA 타이거즈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활약한 뒤 요미우리에 입성해서도 프론트라인 선발로 제 몫을 다했다.
위의 그레이싱어처럼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활약 → 요미우리로 영전 테크를 탄 외국인 투수. 2010년 다승왕.
2011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우승에 공헌한 뒤 2012년 요미우리로 이적했다. 그러나 2년 후 재계약을 포기하고 KIA 타이거즈로 적을 옮긴다.
캐나다인 우완 셋업맨으로 JFK(한신)의 일원이던 호주 좌완 제프 윌리엄스를 제치고 일본프로야구 외국인 선수 통산 홀드기록 보유자(174홀드)가 된 선수. 일본에서만 421경기 등판, ERA 2.46, 174홀드 54세이브를 거두고 홀드왕을 두 번 차지하는 등(2013, 16) 오랫동안 요미우리의 필승 계투로 활약했다. 메이저리그 이외의 리그에서 뛰는 캐나다 선수 중에서는 가장 실력과 실적이 뛰어난 선수 중 하나라서 현역시절 메이저리거가 나갈 수 없는 국가대항전에서 오랫동안 마무리를 전담해 캐나다 야구계의 레전드 중 하나.
DeNA에서 11시즌간 활약 후 2017년에 교진으로 이적했는데, 이적 첫 시즌에 경비원 폭행 사건으로 대형사고를 치기도 했다. 하지만 2019년 다승과 승률, 탈삼진 부문 센트럴리그 1위를 차지하면서 부진했던 스가노를 대신해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하지만 2019년 프리미어12 결승전에서 1회부터 빅똥을 싸질러놔서 쌍욕을 쳐먹었다. 오프시즌에 요미우리 소속 선수로서는 최초로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MLB에 진출했다.
  • 모리후쿠 마사히코 (2017 - 2019) 역동적인 투구폼을 가진 사이드암 좌완 불펜 투수. 하지만 FA 먹튀


2.2. 포수[편집]


V9 시대를 이끌었던 명포수. 감독으로서도 세이부의 80년대 황금기를 이끌었다.
  • 야마쿠라 카즈히로 (1978 - 1990)
  • 나카오 다카요시 (1989 - 1992)
  • 무라타 신이치 (1982 - 2001)
  • 오쿠보 히로모토 (1992 - 1995)
  • 오다 코헤이 (1998 - 2005)
  • 카토 켄[17] (1999 - 2016)
  • 아이카와 료지 (2015 - 2017)
  • 아베 신노스케 (2001 - 2019)


2.3. 내야수[편집]


일본 프로야구 초창기의 명2루수. 감독으로서는 킨테츠 버팔로즈의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18] 하지만 킨테츠에선 감독으로 일본프로야구 사상 유일무이한 한 시즌 100패의 흑역사를 썼다.
붉은 배트의 '타격의 신'. NPB 최초의 2천안타 달성자. 후에 요미우리 감독으로써 요미우리를 센트럴리그- 일본시리즈 V9를 포함한 리그 우승 - 일본시리즈 우승 11회(즉 승률 100%)로 이끌며 지금의 요미우리가 명문구단으로 불리우게 되는 계기가 된 명장.
자이언츠의 명 유격수이자 지략가.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첫 우승과 세이부 라이온즈 전성기의 서막을 이끈 명감독.
'미스터 베이스볼'.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상징이자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대의 스타.
통산 868홈런에 빛나는 전설의 홈런왕. 세계의 오.
히로오카의 후임 유격수로 V9 시대의 주전 유격수를 맡았다.
V9 시대의 주전 2루수이지만, 현대의 야구팬들에게는 오릭스 블루웨이브 감독 시절 2군을 폭격했음에도 특이한 타격폼을 갖고 있던 스즈키 이치로라는 젊은 외야수를 1군에 올리지 않은 꼰대로 더 기억되는 인물.(...) 또한 오릭스 감독 시절 부머 웰즈다구치 소 등 다수의 선수단과 불화가 있었다. 1993 시즌을 끝으로 오릭스 감독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2009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워싱턴 내셔널스 감독이자 요미우리 자이언츠 사상 최초의 외국인 선수.
요미우리 45대 4번 타자 출신 프랜차이즈 스타. 2012~2015년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 감독을 맡았다.
자이언츠 역대 최고의 톱 타자 2루수. 통산 타율 3할의 정교한 타격과 뛰어난 수비력을 자랑했다. 베스트나인 5회, 골든글러브 4회를 차지했는데 1987년에 딴 베스트나인은 2020년 현재까지 요미우리의 마지막 2루수 베스트나인 상이다.
2002 - 2003, 2006 - 2015 요미우리 감독으로 유명하지만 선수시절에도 1980년대~199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프랜차이즈 스타.
만루에 강한 모습을 보인 만루의 사나이. 1989년 일본시리즈 MVP. 또한 요미우리 주전선수 중 유일하게 FA를 선언해[19] 요미우리를 떠난 선수다.
번트 장인. 시노즈카 X 카와이 키스톤 콤비는 80~90년대를 주름잡았다.
키요하라처럼 오사카 출신이지만 골수 요미우리 팬으로, 이쪽은 1989년 드래프트에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1순위 지명을 거부하고 1년 뒤의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에 지명된 바 있다. 쟁쟁한 내야수들이 많았던 팀 사정상 주로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뛰었지만 수려한 외모의 고시엔 스타 출신에, 뛰어난 예능감과 팀에 대한 높은 충성도를 보여줘 나름의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은닉구나 거친 슬라이딩 등 비매너 플레이 때문에 다른 팀 팬들 사이에서 안티가 많았고, 결정적으로 키요하라 카즈히로의 심복으로서 파벌을 조성하고 어린 선수들을 괴롭히는 등의 모습이 부각되며 2005년 시즌 종료 후 키요하라와 함께 정리되었다. 은퇴 후에는 주로 방송인으로 활동했으며 키요하라와의 관계 때문에 현장 복귀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되었지만, 2019년 하라 타츠노리 감독의 복귀와 함께 요미우리의 코치로 선임되었다.
마츠나가 히로미, 코마다 노리히로 등과 함께 일본프로야구 최초의 FA 선언자가 된 인물. 최전성기는 아니었지만 40대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4번타자로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시노즈카가 은퇴한 뒤 90년대~2000년대 초 거인의 2루를 굳건히 지킨 호타준족의 선수.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과 KIA 타이거즈 초창기를 함께했던 그 선수 맞다. 대만리그에서의 뛰어난 활약으로 '대만의 이치로'라는 설레발까지 들으며 요미우리에 입성했지만 부진한 모습만 보였다.
고교시절부터 염원해왔던 거인에 입성해 여전히 야구계 최고의 스타로 활약했지만 잦은 부상, 파벌 조성, 수뇌부와의 불화, 들쑥날쑥한 성적과 마약 복용 등 곡절이 많았던 시절.
장타력을 갖춘 유격수였지만 유난히 도쿄돔을 살짝 넘어가는 홈런이 많다고 '돔런 아티스트'라는 특이한 별명이 있었던 선수. 그러나 불륜 소동과 후배를 괴롭힌 것이 발각되어 결국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로 쫓겨나다시피 트레이드된다. 그러나 은퇴 후 2군 코치로 다시 복귀.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MVP 1루수로 활약하다 요미우리로 이적. 하지만 외야 수비를 보면서 무릎의 상태가 악화되어 선수생명이 꼬이게 된다. 후에 LG 트윈스에서 페타신으로 불렸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프랜차이즈 스타. 요미우리 우타자로서는 최초로 40홈런을 치고 이적 선수로서는 최초로 요미우리 주장 자리를 차지하며 요미우리에서도 꾸준한 활약을 보였다. 이승엽의 전임 4번타자(제69대)이기도 하다.
항목 2번의 선수.
2006년 41홈런을 치며 활약했지만 그 이후에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냈다. 요시 그란도시즌이 이 시기의 일.
에나츠 유타카에 이은 역대 2번째 일본프로야구 양대리그 MVP 수상자.


2.4. 외야수[편집]


일본 프로야구 최초의 타격 3관왕.
통산 1827안타, 296홈런을 기록한 거인 초창기의 강타자로 '야생마'(ジャジャ馬)라는 별명이 있던 강견 강타의 외야수였다.
요미우리 사상 최초의 구단장을 치룬 당사자. 그의 생전 등번호 4번영구결번 이다.
V9 시대 거인의 테이블 세터로 활약하며 도루왕 6회를 수상한 선수. 통산도루 579개는 일본프로야구 통산 3위이자 센트럴리그 최고기록이며, 스위치 히터로써는 일본프로야구 최초이자 센트럴리그 유일의 2000안타 달성자이다. 그러나 리드오프임에도 3할 타율은 1번도 기록한 적이 없었다.
V9 시대의 주전 외야수. 당대 최고의 좌익수 수비로 이름높았다. 외야수3루수 부문에서 골든글러브(NPB)를 수상했는데, 3루수 골글은 외야수에서 컨버전 된 이후에 받았다(...). 장훈이 요미우리로 이적하면서 주전 좌익수 자리를 차지하자 포지션을 옮겨야 했던 사정 때문에 이루어진 컨버전이었는데, 보통 외야수비가 내야보다 난이도가 낮게 여겨진다는 걸 생각해보면 굉장히 특이한 이력. 최악의 3루수에서 준수한 좌익수가 된 라이언 브론과 정확히 반대 테크 은퇴 뒤에는 야구 지도자, 프로야구단 단장 등으로 활약중.
이쪽에서도 10번을 달았었다. 오 사다하루와 함께 'OH포'로 대활약. 일본프로야구 사상 2번째의 양대리그 수위타자가 될 수도 있었지만 히로시마 시절의 김기태(재일교포)와 관련된 모종의 사건으로 주니치의 야자와 켄이치에게 밀려 실패한 에피소드가 있다.
1982, 1983년 2년 연속 도루왕. 이중 1983년엔 센트럴리그 시즌 최고기록인 도루 76개를 기록. 퍼시픽 리그후쿠모토 유타카가 있다면 세리그에는 마츠모토가 있었다고 할 정도. "푸른 번개"(青い稲妻)라는 멋진 별명이 있었다.
1987년 30홈런을 때린 젊은 좌타 거포이자 고라쿠엔 구장 공식전 마지막 홈런, 도쿄 돔 개장 첫 홈런[20]을 때리는 등 요미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강타자로 주목받았던 선수. 그러나 1988년 시즌 도중 좌익수 수비를 보다 중견수와 충돌해 무릎 인대의 3/4가 파열되는 큰 부상을 얻은 뒤 커리어를 제대로 공쳤다. 고된 재활을 거쳐 현역에 복귀할 수는 있었지만 수비력을 상실하고 끊임없이 후유증에 시달렸기에 대타 요원 정도의 활약밖에는 할 수 없었던 비운의 선수. 요미우리 올드 팬들이 이 선수에 대해 갖는 감정은 삼성 팬들이 강동우에 대해 갖는 그것에 비유될 수 있다. 마쓰이 히데키로 유명해진 등번호 55번을 마쓰이 이전에 달았던(다만 현역 생활 도중 7번으로 변경) 선수이기도 했다.
자이언츠 역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이자 가장 많은 인기를 받았던 선수. 만화 돌격 크로마티 고교의 크로마티는 여기에서 따왔다(...)
한큐시절에 30-30클럽을 두번이나 달성했고 특히 1980년에는 30홈런 30도루 30희생타를 달성하는 보기드문 기록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프런트와의 불화로 고향팀인 히로시마로 이적을 요구했으나 결국 요미우리로 옮겼는데 1989년 일본시리즈 4차전때 1번타자로 선발출장하여 약빤 홈주루를 시전하면서 역스윕의 포문을 열어 재켰다. 그리고 5차전에서도 1번타자로 출장해서 결승득점을 올렸다. 6,7차전에서도 1번타자로 출장하면서 고향팀에게 털렸던 1984년 일본시리즈의 한을 풀었다. 1990년 시즌 중반에 은퇴해서 코치로 전업한후 95년까지 역임했다.
고질라.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거포였으며 메이저리그에서도 월드시리즈 MVP를 수상하는 등 강타자의 면모를 뽐냈다.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 거인의 주전 좌익수였던 왼손 중거리 교타자.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했던 대주자 요원으로 일본프로야구 사상 유일한 통산 대주자 100도루 기록을 갖고 있다. 일본 프로야구의 강명구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2016년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전에서 연장 10회말 대주자로 나왔다가 견제아웃을 당하는 바람에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바로 이어진 11회 초 요코하마의 역전극의 빌미를 제공했다. 나이도 많은 베테랑이었는데 결국 이 경기의 실수가 치명타가 되어 팀은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탈락하고 본인은 은퇴를 선언(...)
55홈런을 친 적이 있는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의 거포지만, 요미우리 시절은 안 좋은 추억. 거기에다 요미우리 시절에 가네다 마사이치가 가지고 있던 NPB 최다 퇴장 기록을 갈아치웠다(...)
2009년, 주전 중견수를 맡으며 전년도 신인왕을 차지한 같은 팀의 투수 야마구치 테츠야에 이어 육성선수 출신의 야수로는 최초의 신인왕 타이틀을 차지했던 선수.


3.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편집]


  • 가시와다 다카시 (재적 1990 - 1996, 1998 - 2005, 뉴욕 메츠)
이 듣보잡 선수가 의외로 구단 출신 최초의 메이저리거이다. 일본통을 자처한 바비 발렌타인뉴욕 메츠의 감독으로 있던 덕분에 메이저리그 출장 기회를 잡았고 중간계투로 나가서 승리도 올렸다.
  • 기다 마사오 (재적 1987 - 1997,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21]-시애틀 매리너스)
고졸 2년차인 1990년에 센트럴리그 탈삼진왕에 오르는 등 뛰어난 구위를 지닌 우완 파워피처였지만 고질적인 제구불안을 갖고 있는 투수였다. 메이저리거...라고는 하지만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첫 해인 1999년을 빼면 미국에서의 커리어 대부분을 마이너리그 여러 팀을 전전하던 투수로 일본 야구계를 대표하는 투수 저니맨 중 하나가 되었다. 시애틀을 마지막으로 미국 생활을 청산한 뒤 이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준수한 중간계투 요원으로 활약했고, 그 뒤에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독립리그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 이시카와 등을 거쳐 은퇴했다. 현재는 닛폰햄에서 GM 보좌를 맡아 키요미야 코타로를 추첨하는 자리에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오릭스에서는 마무리투수로 1996년의 일본시리즈 제패에 공헌했고, 요미우리에서는 좌완 중간계투로 그럭저럭 활약하며 메이저리그 진출까지도 했던 선수였지만 은퇴 후 마약사범으로 걸리면서 완폐아로 몰락했다. 키요하라 카즈히로의 각성제 복용에 관해서 언론에 증언하기도 했다.


4. 영구결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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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한 쿠로사와, 사와무라를 빼면 전부 V9 시대에 지도자, 선수로써 활약한 선수들이 영구결번을 받았다.

1. 오 사다하루: 설명이 필요 없는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 '세계의 오' . 통산 868홈런(1위), 2170타점(1위)에 트리플 크라운 2회 달성에 빛나는 성적을 냈다. 다만, 감독으로서는 자이언츠에서 일본시리즈 우승을 거두지 못해 결국 사임. 그 뒤 1995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자리를 옮겨 거기서 감독으로서 레전드가 됐다. WBC 초대 우승을 이끌었다.

3. 나가시마 시게오: 역시 교진군의 전설이자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 '미스터 베이스볼', '미스터 자이언츠'의 별명을 가졌으며, 현재를 통틀어도 가장 인기있는 역대 선수이기도 하다. 감독으로서도 자이언츠를 일본시리즈 2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다만 이건 2기 감독 시절의 일이었고 1기 감독 때는 전설의 V9 시기에 비하면 그닥 좋진 못한 성적을 기록했다.

4. 쿠로사와 토시오: 일본 프로야구 최초의 영구결번 선수. 나고야긴코, 츠바사군 등에서 활약하다 1944년 교진군에 이적하여 구단 최초로 4번을 달고 4번타자로 나서 맹활약을 했다. 하지만 33세의 다소 젊은 나이에 장티푸스로 요절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사와무라 에이지와 함께 영구결번 처리했다.

14. 사와무라 에이지: 일본 프로야구 양대 리그 이전(일본 야구 연맹 시절) 시대의 최고의 투수. 어린 나이에 일본 구계를 호령하는 대투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 27세 나이에 전장에서 산화했다. 이후 구단에서 그의 전설적인 활약을 기리고자 영구결번 처리를 했으며, 후에 그의 이름을 딴 사와무라상을 제정했다.

16. 카와카미 테츠하루: '타격의 신'으로 칭송받는 인물. 또한 교진군의 9년 연속 일본시리즈 제패, 즉 V9(1965~1973)을 이끌었던 명장이기도 하다.

34. 가네다 마사이치: 일본 프로야구 통산 400승(1위), 4490삼진(1위)를 기록한 전설적인 투수. 사실 고쿠테츠 스왈로즈에서 데뷔한 데다가 스왈로즈에서 더 오래 뛰었고 자이언츠에서는 5시즌(1965~1969)밖에 뛰지 않았고 성적도 돋보이지 않았지만 여러 차례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을 하기도 했고 일본 야구계에서 가지는 상징적 의미가 너무나도 커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5. 준영구결번[편집]


8. 하라 다쓰노리: 하라가 은퇴한 이후 직접 니시 토시히사(仁志敏久)에게 넘겨줬고, 니시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이적한 뒤인 2008 시즌부터 2013년까지는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이적해온 다니 요시토모(谷佳知)가 달았다. 2014년에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FA 이적한 도루왕 출신 2루수 카타오카 야스유키가 달게 되었고, 2019년부터는 또다른 대형 FA 이적생인 마루 요시히로가 달게 된다.

18. 에이스 번호: 구단 내에서는 준영구결번으로 처리하지 않지만, 교진군의 18번은 에이스에게만 돌아가는 번호라 워낙 유명하다. 양대 리그 출범 이후 후지타 모토시-호리우치 츠네오-쿠와타 마스미-스기우치 토시야-현재의 스가노 토모유키로 이어진다.


6. 임시결번[편집]


29, 41, 63 : 2015년 도박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켜 무기실격 징계를 받은 후쿠다, 가사하라, 마츠모토의 등번호. 1년간 임시로 결번될 예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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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요하라 가즈히로 파벌의 일원으로 오다 코헤이를 괴롭히다기 05시즌 직후 방출되면서 그대로 은퇴해버렸다. 이들 둘의 빈자리를 매꾼 선수가 33-4의 주역들인 고사카 마코토이승엽.[2] 2020년 9월 16일 경부터 그 임무를 아베 신노스케가 대행하게 되었다.[3] 임창용의 야쿠르트 시절 주전포수.[4] 2020년 9월 16일 부터 1군 수석코치 대행으로 도쿄돔에 출근하고 있다.[5] 2017년 까지 MLB리그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서 활약했고 2018~2019년 까지는 KBO리그 SK 와이번스에서 활약한 투수로 한 미 일 무대를 모두 밟은 투수가 되었다.[6] 생각보다 엄청 유명한 노래가 아닌 이상 서브컬쳐 노래를 등장곡으로 쓰는 야구선수는 일본에도 적다. 그나마 서브컬쳐 노래를 등장곡으로 쓰는 경우도 애니 OST로 시작했지만 전국민이 다 알 정도로 양지까지 올라온 그런 노래가 대부분.[7] 입단 자체는 2017년에 했고 이때는 육성선수라서 2, 3군에서만 나왔다.[8] 정확히는 밥을 그릇에 담고 바나나를 껍질을 벗긴 후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밥 위에 올려 덮밥처럼 먹는다. 그런데 소스나 다른 부재료 없이 바나나만 올린다. 선수 말에 의하면 도미니카 시절부터 이렇게 먹어왔으며 영양소가 풍부해서 여름 보양식으로 제격이라고.[9] 6월 25일 이케다 슌과 맞트레이드. 라쿠텐에서 3루수로 5년간 뛰며 2017년에는 30홈런까지 찍었으나 2018년부터는 연일 하락세를 타다가 2020년에는 아예 개막을 2군에서 맞는 수모를 겪었다. 다만 2019년에도 19홈런을 치면서 완전히 죽진 않은 상태.[10] 2015년에는 규정타석은 미달이었지만 세 자릿수 안타에 타율 3할까지 기록했지만 2016~2017년은 200타수 정도, 2018년부터는 아예 대놓고 백업, 대주자로 추락했다.[11] 오 사다하루가 나가시마의 뒤를 이을 감독이 되는 것은 거의 정해진 수순이었지만 요미우리는 나가시마의 선수 은퇴 직후 V9을 이끈 가와카미 감독이 물러남과 동시에 지도자 경력이 없던 나가시마를 바로 그 자리에 앉혔다가 구단 사상 최초의 최하위(75년)을 기록한 흑역사가 있었다. 그 때문에 선수에서 은퇴한 오 사다하루를 지도자 경력 없이 바로 감독자리에 앉히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이를테면 오 사다하루가 정식 감독으로 취임하기까지 시간 벌기용으로 앉힌 감독인데 그 동안 오 사다하루를 조감독 자리에 앉혀서 감독수업을 받게 했다. 이러한 형태는 나가시마가 두번째 임기 때 하라 타츠노리에게 정권을 이양하는 과정에서 또 한번 나타났다.[12] 이 일본시리즈가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한 덕아웃 시리즈이다. 상대는 당시 고라쿠엔 구장을 홈구장으로 같이 쓰던 닛폰햄 파이터즈 이다.[13] 7차전까지 갔는데 역대 일본시리즈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승부 중에 하나였다.[14] 이 일본시리즈가 그 유명한 기레기들의 찌라시 기사 한 방에 긴테쓰의 3연승 후 역스윕이라는 안습의 신화를 만들어낸 일본시리즈이다.[15] 또 여담이지만 근육맨의 주인공 근육 스구루의 이름의 모티브이다.[16] 초노 히사요시와 함께 도하 참사 일본 대표팀 멤버.[17] 링크 걸지 말 것. 만화 은혼의 등장인물로 연결된다. 이 선수는 쿄진 원클럽맨이었지만 18년간 200경기도 못 나온 만년 백업포수였다.[18] 다만 치바가 킨테츠 감독을 맡을 당시 이름은 단수 형태인 킨테츠 버팔로였다. 치바가 100패 찍고 물러난 1962년부터 복수 형태인 버팔로즈로 개명.[19] 오치아이 히로미츠는 구단에 자유계약을 신청해 퇴단한 거지 FA 선언을 한 것은 아니다.[20] 시범경기 기록이라 비공식이기는 하지만 요미우리 선수의 그것인 만큼 자주 언급된다. 공식전 도쿄돔 첫 홈런 기록은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더그 데신세이라는 선수가 가지고 있다.[21] 디트로이트와 다저스 사이에 일본으로 귀국해서 오릭스 블루웨이브에서 2년간 플레이.[22] 메이저 진출 전 해인 2006년에는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서, 보스턴과 A's 사이에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뛰었고 A's에서의 메이저 도전이 실패한 뒤 다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를 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