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안니스 악수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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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요안니스 2세의 치세
2.1. 초년기
2.2. 젊은 황제의 최측근
2.3. 첫 원정
2.4. 페체네그 전쟁
2.6. 황제와 마지막을 함께하다
3. 마누일 1세의 치세
3.1. 킹메이커가 되다
3.2. 말년
3.3. 최후
4. 여담



1. 개요[편집]


그는 진정 로마인들의 국가를 지탱하는 탑이다.

ㅡ 필리푸폴리의 대주교 미하일 이탈리코스

요안니스 악수흐 (1087 ~ 1150)

요한네스 악수스, 악수크로도 불리는 요안니스 악수흐는 콤니노스 왕조 3대를 모시고 중흥을 이끌었던 명장이자 내무 대신이다. 요안니스 2세의 치세에 황제의 심복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마누일 1세의 시기에 들어서 제위 계승의 킹메이커로 자리매김 하였다. 동시에 그는 '콤니노스 - 튀르크 전향자' 출신 관료 사회의 우두머리였다.


2. 요안니스 2세의 치세[편집]



2.1. 초년기[편집]


요안니스 악수흐는 1087년 룸 술탄국의 지배를 받던 니케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시피 하지만, 확실한 점은 그가 튀르크인 태생이었다는 것이다.[1] 그가 사료에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은 1차 십자군 때부터이다. 십자군은 니케아를 점령한 후 그를 비롯한 수천 명의 튀르크인 포로들을 황제 알렉시오스 1세에게 선물 형식으로 진상했다. 이때 황제는 그의 총명함과 강건함을 알아보고 황실의 가신으로 키우기로 했다.[2] 악수흐는 동년배였던 어린 황자 요안니스 콤니노스와 금방 친해졌고, 그가 장성하자 그의 가신으로써 황자를 보필했다. 과묵하고 검소한 요안니스 황자는 친구가 별로 없었지만, 악수흐만은 막역지우로서 대하며 거리를 두지 않았다고 한다.


2.2. 젊은 황제의 최측근[편집]


1117년 필로밀리온 전투 이후 노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지병인 통풍이 도져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다. 이미 육순을 넘긴 상태의 황제에게 가장 걱정되는 문제는 제위 계승이었다. 그에게는 오래전부터 공동황제로 지명한 장남 요안니스가 있었지만, 그의 누이 장녀 안나 콤니니와 부제의 자리에도 낙점되었던 바가 안나의 부군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는 전임 황제들을 배출했던 두카스 가문를 등에 업고 황위를 노리고 있었고, 알렉시오스의 아내 황후 이리니도 그들을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었다. 이리니는 안나와 결혼할 남편이 공동제위를 가지게 하겠다고 약속한 알렉시오스의 언질이 있었고, 그녀도 포르피로옌니타이므로 충분히 대권을 노릴 자격이 있다고 공공연히 주장하며 알렉시오스를 압박했다.

결국 1118년, 알렉시오스 황제가 붕어하였다. 선황은 유서에 명백하게 요안니스 2세가 적법한 후계자라고 명시했음에도 귀족들과 안나는 선제의 장례식을 틈타 황제를 암살할 계획을 꾸몄다. 그러나 내부자 한명이 요안니스 2세에게 경고한 덕분에 황제는 안전하게 자리에서 피신할 수 있었다.[3] 하지만 그들은 그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실패한 거사가 있고 몇 개월 후, 황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외곽에 있는 여름 별궁 필로파티온으로 행차했다. 안나는 중앙군의 막사와 멀리 떨어져있고, 블라헤르나에 황궁보다 방비가 허술한 필로파티온에 황제가 있는 틈을 타 별궁을 포위하고 제위를 빼앗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막상 거사를 시작하기로 한 시간이 되자, 부군 니키포로스와 그의 부하들이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황제에게 찾아가 쿠테타 음모를 상세히 밝히고 황제의 편을 들고 나선 것이다. 그가 황제에게 부탁한 것은 단지 아내 안나의 목숨뿐이었다.[4]

황제는 그의 충성심을 높이 사, 원래였으면 눈과 코를 베이고 유폐되었을 누이 안나에게 단지 재산 몰수와 근신처분만을 내렸다. 몰수된 재산은 모두 그의 측근 악수흐에게 돌아갔다.[5] 황제는 이로써 불안정했던 황궁 내부의 상황을 안정시키고, 자신이 생각해왔던 고토 수복을 위한 대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첫 번째로 젊은 황제가 내린 명령은 악수흐를 제국의 최고위직중 하나인 제국군 총사령관(Megas Domestikos)에 임명한 것이었다.


2.3. 첫 원정[편집]


황제는 제위 계승 이듬해부터 아나톨리아 수복 전쟁에 돌입했다. 아나톨리아는 니케아 수복 이후 불안정한 상태였다. 니케아와 아탈레이아를 잇는 축선의 남서방부와 북부 폰토스 해안부터 트레비존드는 제국이, 북동부와 내륙은 룸 술탄국이 지배하고 있었지만, 항구 도시 아탈레이아와 니케아를 잇는 중요한 육로 도로들과 요새들이 투르크멘 부족들에게 점령당해 있어 그곳의 로마인들은 숱한 피해를 보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위험한 세력은 라오디키아의 아부 샤라였다. 그들은 비옥한 해안가에 사는 로마계 신민들에게서 영토를 빼앗아 소작을 놓고, 겨울에는 건초와 목초지를 독점하였다. 이 때문에 아나톨리아의 로마인들은 지방관들과 튀르크 토후들에 의해 이중 과세의 부담을 질 수밖에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내륙국인 룸 술탄국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카펫과 양모들을 로마인들에게서 빼앗은 항구를 통해 무역하여 이득을 차지하기도 했다.

황제는 라오디키아 공성에 드는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악수흐와 소수의 분견대를 먼저 진군시켰고, 이들은 중앙군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공성준비를 끝내고 적을 요새 안으로 밀어넣었다. 이미 포위당한 라오디키아의 튀르크멘들과 아부 샤라는 황제가 이끄는 중앙군이 다가오자 수성을 포기하고 탈출했다. 젊은 황제는 쿠테타가 터졌던 수도를 오래 비워둘 수 없었기에 수도로 돌아갔지만, 악수흐와 로마군은 늦가을까지 원정을 지속했다. 악수흐의 지휘하에, 소조폴리스와 마이안데르 강 사이의 도시들과 요새들이 수복되었다. 이로써 튀르크인들은 자신들의 토산품을 수출하기 위해 로마인들과 중계 무역을 할 수밖에 없었고, 아탈레이아부터 마이안데르 강 중류에 이르는 지역이 요새화되어 아나톨리아의 안정을 어느 정도 되찾을 수 있었다.


2.4. 페체네그 전쟁[편집]


1122년, 이번에는 북방에서 적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중앙군이 아나톨리아 원정에 진력하는 틈을 타서 페체네그족이 레부니온 전투의 복수를 위해 남하했던 것이다. 이미 그들은 불가리아 테마를 약탈하고 트라키아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방어병력은 수만의 페체네그족을 막아낼 만큼 많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는 저번 쿠데타의 불안감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수도가 포위되길 원치 않았고, 겨우 500여명의 바랑인 친위대와 트라키아에서 소집한 중앙군을 동원한 8000여명의 군대만을 가지고 거의 4배에 가까운 페체네그족 군영을 향해 기동했다. 악수흐는 황제가 강화 조약을 핑계로 시간을 끄는 틈을 타서 마르마라 해를 건넜다.

이후 베로이아 전투 참조.


2.5. 안티오키아 공국 정벌전[편집]


1137년부터 1138년까지, 안티오키아의 공작 레몽은 킬리키아아르메니아 왕국과 손을 잡고 제국의 남동부 촌락들을 약탈했다. 명목상 로마 황제의 신하였던 안티오키아 공작의 월권 행위를 묵인할 수 없었던 요안니스는 다시금 악수흐와 함께 안티오크를 향한 응징원정을 개시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4만 5천에 달하는 군대를 막아낼 수 없었다. 결국 레몽은 사이자르와 알레포를 새 영지로 얻어주는 대신에 안티오크를 넘기겠다는 약조를 하고 사이자르 공성전에 동참한다.

이후 사이자르 공방전 참조.


2.6. 황제와 마지막을 함께하다[편집]


1139년, 황제는 네 아들과 악수흐를 대동한 대원정을 떠났다. 첫 원정의 목표는 다니슈멘드의 지원을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킨 트레비존드의 둑스 콘스탄티노스 가브라스를 토벌하는 것이다. 폰토스 남동부를 따라 진격한 황제는 금방 가브라스의 반란을 진압했다. 황제는 곧장 남하하여 다니슈멘드의 수도 네오 케사리아를 향해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그러나 그곳의 방어 병력은 모하메드 가지의 지휘 아래 이미 강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로마인들은 포위전동안 큰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1140년 말, 결국 포위를 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는 로마인들의 주력군을 향한 다니슈멘드 튀르크멘들의 강한 역공이 있었다. 이때 황제의 4남 마누일은 적의 돌격대를 분쇄하고 적이 후퇴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전공을 세웠다. 황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보급을 받고 다음해 겨울이 끝나면 다시 네오 케사리아를 포위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행운이 로마의 편이었다. 다니슈멘드의 토후 모하메드 가지가 죽고 다니슈멘드가 계승 전쟁에 휩싸인 것이다. 이미 원정 준비를 마친 황제는 목표를 다니슈멘드가 아닌 시리아의 십자군 영주들로 재설정했다.

1142년, 황제의 출병소식을 듣고 룸 술탄국의 군대가 아탈레이아-라오디키아 축선을 다시 공격해왔지만, 로마군은 쉽게 그들을 격파했다. 그러나 운명은 다른 곳에서 황제를 괴롭혔다. 황제의 첫째 아들이자 공동황제인 알렉시오스 황자가 그 지역에서 급사한 것이다. 황제는 맏이를 유독 사랑했기에 둘째 안드로니코스와 셋째 이사키오스에게 알렉시오스의 시신을 운구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장사지내도록 했다. 그 때, 둘째 안드로니코스마저 형의 시신에서 옮은 병으로 인해 사망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진군을 멈추지 않았다. 황제는 한 달만인 1142년 9월에 에데사의 투르베셀을 기습하고 에데사 백작국의 영주 조슬랭의 딸 이자벨을 볼모로 잡았다. 로마군은 성전 기사단의 성채인 바그라스를 점거하였고, 황제는 라틴 귀족들에게 안티오키아 공국을 반환하라고 명령했다. 공작 레몽은 더 이상 버틸 방법이 없었으므로, 자신의 신민들과 논의해보겠다는 핑계를 대고 시간만 끌 뿐이었다. 하지만 운명은 다시 비극적으로 황제에게 찾아왔다. 1143년 3월, 황제는 킬리키아에서 사냥중 독화살촉에 찔려 패혈증에 걸리고 말았다. 명재경각의 상황에서, 황제는 그해 부활절에 진중의 모든 로마인들을 불러 자신을 수십 년간 따라온 충성스러운 병사들과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그들 중 단연 돋보인 사람은 황제가 평생 친우로 여겨왔던 악수흐였다. 진중의 병사들은 황제의 유언을 증언하겠다고 맹세하였고, 황제는 그들 앞에서 자신의 막내아들 마누일에게 제위를 승계하겠다고 선언한 후 기진하였다. 황제는 사흘을 더 살고 죽었다.


3. 마누일 1세의 치세[편집]



3.1. 킹메이커가 되다[편집]


마누일은 정통 황제로 인정받았지만, 그 자리는 위태로웠다. 성미가 괄괄한 형 이사키오스는 아직 블라헤르나에 황궁에서 이 소식을 모른 채 기거하는 중이었다. 선황의 유지를 받들어 악수흐는 마누일이 무사히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사실 그는 선황의 치세 동안 마누일 1세보다 삼남 이사키오스를 지지하는 행보를 더 많이 보여 왔지만,[6] 그에게는 자신의 호오보다는 벗이자 군주였던 요안니스의 유언이 더 중요했던 것이었다. 마누일도 이를 알고 있었지만, 그의 충성심을 높이 사 그의 과거 행적에도 불구하고 그를 믿기로 했다.

먼저 악수흐는 중앙군을 따라온 모든 상인들에게 엠바고를 유지시킨 채로 소수의 병사들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 부친의 죽음을 몰랐던 이사키오스는 그대로 악수흐를 맞이하다 체포되어 감금되었고, 폰토스의 이라클리아에 있었던 마누일 황제의 삼촌이자 알렉시오스 1세의 아들인 이사키오스도 신병을 확보했다. 이후 악수흐는 마누일의 대관식을 치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후보자들을 만나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 당시 전임 총대주교가 사망했으므로, 악수흐는 총대주교가 될 수 있을 만한 모든 고위 성직자들을 초청하여 새 황제가 그들에게 거금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이 담긴 문서를 증정했다.

악수흐 덕분에 마누일은 당당히 황제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할 수 있었다. 황제는 약속대로 고위 성직자들에게 200파운드의 금을 선물했고, 모든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에게 금화 2전 씩을 선물했다. 여론은 안정적이었지만, 제위 찬탈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노르만인 출신의 전향한 시칠리아 귀족인 요안니스 루지에로는 황제를 시해하고 공주 마리아 콤니니의 부군으로서 제국을 지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조차지의 노르만인들과 결탁한 그는 황제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그의 아내이자 마누일의 누이인 마리아 콤니니가 악수흐에게 음모 사실을 먼저 알린 덕에, 악수흐와 그의 군대는 노르만 찬탈자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 밖으로 쫒아낼 수 있었다.

모든 제위 계승 암투가 끝나고 마누일은 경쟁자인 형 이사키오스와 그의 삼촌 이사키오스, 그의 아들 안드로니코스를 풀어주었다.


3.2. 말년 [편집]


1145년부터 1146년까지, 마누일은 안티오키아와 킬리키아의 반란자 영주들을 진압하는 데 힘썼다. 그와 악수흐가 직접 이끈 원정도 있었지만, 안티오키아 공성전은 대개 요안니스, 안드로니코스 콘토스테파노스 형제와 투르코폴레스 장군 부르수크가 이끄는 지상군, 데메트리오스 브라나스가 이끄는 해군이 양공을 취하는 형식이었다. 그동안 악수흐는 황족들의 집안 싸움에 말려들게 된다. 1146년, 콤니노스 황실원들은 니케아 근방의 메타볼 요새에서 회합을 가졌는데, 마누일 1세의 형 이사키오스와 사촌 안드로니코스, 악수흐는 각각 요안니스 2세마누일 1세중 누구의 전공이 더 뛰어난가를 두고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악수흐와 이사키오스는 선황 요안니스의 전공이 더 뛰어나다고 강하게 주장하였지만, 안드로니코스는 이에 이의를 제기했다. 결국 이 언쟁은 칼부림으로 이어져 이사키오스가 안드로니코스를 칼로 내려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황제의 가신들이 그의 칼을 쳐낸 덕분에 안드로니코스는 죽지 않았지만 악수흐는 두 황족의 말다툼을 비화시킨 죄로 황제를 상징하는 아퀼라 깃발을 들지 못하는 벌을 받았다.[7] 하지만 황제는 공신 악수흐를 계속 신임했다.


3.3. 최후[편집]


코르푸 섬은 1148년부터 거진 1년간 시칠리아 왕국에게 점령되어 있었다. 황제는 바로 코르푸를 탈환하고 싶었지만, 북방에서 쿠만족이 내려오고, 지원을 할 베네치아의 해군은 원수의 죽음으로 늦어지고 말았다. 겨울에라도 진군하고자 했던 마누일이었지만, 마케도니아와 코르푸를 이어주는 핀도스 산맥의 가도가 눈으로 막혀 결국 황제는 마케도니아에서 겨울을 나야 했다. 이듬해, 테살로니카에서 콘라트 3세를 맞이하던 황제는 날씨가 조금 풀리자, 2~3만 가량의 육군을 악수흐에게, 500여척의 갤리선을 메가스 둑스[8] 스테파노스 콘토스테파노스에게 맡겨 코르푸를 수륙 양면으로 포위했다. 하지만 스테파노스는 기나긴 포위공격 도중 전사하고, 결국 해군도 악수흐의 통제를 받았다. 제국 함대는 베네치아에서 온 군대에게 지원을 받았는데, 포위전이 길어지자 베네치아인들은 로마인들과 갈등을 일으켰다. 황제가 그해 봄에 주력군에 합류했을 때, 두 군대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베네치아인들은 결국 악수흐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베네치아 해군은 로마인들의 상선을 불태우고, 제국의 기함을 빼앗아 갑판 위에서 에티오피아 노예에게 황제복을 입히고 대관식을 치르는 등 황실을 능욕했다. 악수흐와 그 근위대는 결국 힘으로 베네치아인들을 제압하고, 황제는 외교를 통해 베네치아와의 관계를 개선했다. 그해 늦여름, 결국 코르푸는 탈환했지만 기나긴 포위전의 여독으로 악수흐는 그 다음해, 혹은 2년 뒤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4. 여담[편집]


그는 콤니노스 왕조 초기 황권 강화를 위해 육성된 로마 - 튀르크 계열 가신들의 우두머리였다. 황제의 개인 재산과 군대, 영지를 관리하면서 이들은 해당 영지들에서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고, 족벌 세습으로 그 권한을 이어갔다. 악수흐 가문의 자제들도 마찬가지로 외교, 군사 분야에서 전방위적인 활동을 계속해왔다. 그러나 마누일 1세의 치세 동안 이러한 로마-튀르크 권신들은 왕권을 위협할 만큼 강해졌고, 위협을 느낀 황제는 이들을 억제하면서 라틴인들을 대거 등용했다. 악수흐의 사후, 아들 알렉시오스 악수흐는 반란을 획책한 혐의로 기소되어 숙청되었고, 튀르크족 출신의 관리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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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가 요안니스 킨나모스는 그를 '페르시아인'이라고 묘사했는데, 당시 로마인들의 사료가 튀르크던, 아랍인이건, 이집트인이건 뭉뚱그려 '사라센', '페르시아인' 등으로 적었기에 튀르크인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타당하다.[2] 당시 보편 제국 사상을 가진 로마인들에게는 민족 개념이 그리 크지 않았다. 튀르크인이든 페체네그인이든 정교회로 개종하고 황제를 모시면 모두 로마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척과 대귀족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황실 가문이 야만족이나 쇠락한 가문 출신의 영재들을 가신으로 키우는 경우 또한 흔했다. 타티키오스가 대표적인 예이다.[3] 아마 제위에 대한 갈등을 놓고 제국이 흔들릴 것을 두려워한 귀족들, 혹은 훗날에도 그를 구하게 되는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다.[4] 안나는 이를 두고 그가 남자답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서술하지만, 일생을 콤니노스 왕조에 충성하며 살아온 니키포로스에게는 두려움 말고도 선황에 대한 충성심과 쿠테타 이후의 불안 등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것이다.[5] 이마저도 나중에 안나에게 반환되었다.[6] 악수흐와 이사키오스는 최소 한 번 서로 만나 공모한 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7] 이는 신임 황제가 조금씩 성장하여 하나의 세도가를 이루던 튀르크족 출신의 귀족집단들을 통제하기 위한 행동이었을 것이다.[8] 둑스(Doux)는 보통 11세기에 여러 절도사(strategos)를 지휘하는 상위관직인 도독을 의미했으나, 당시의 메가스 둑스는 해군 총사령관을 의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