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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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91919><colbgcolor=#00428e><colcolor=#ffffff> 모기업 관련 정보 ||모기업 파일:DeNA 로고.svg ||
|| 일본시리즈 우승
★★ ||1960 · 1998 ||
|| 리그 우승
(2회)
||1960 · 1998 ||
|| 클라이맥스 시리즈 ||2016 · 2017 · 2019 · 2022 · 2023 ||
|| 시즌별 요약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2> 경기장 ||1군 요코하마 스타디움 · 2군 요코스카 스타디움 · 지방 홈구장 HARD OFF ECO 스타디움 니가타 ||
||과거 오사카 구장 · 카와사키 구장 ||
|| 홈 중계 채널 ||파일:tbs채널2 로고.png TBS 테레비2 ||
|| 주요 인물 ||감독 미우라 다이스케 · 선수회장 이마나가 쇼타 · 주장 사노 케이타 · 투수 주장 야마사키 야스아키 ||
|| 구단 상세 정보 ||역사 · 선수단 및 등번호 · 역대 선수 · 응원가 · 유니폼 ||
|| 틀 문서 ||<bgcolor=#00428e> 코칭스태프투수포수내야수외야수육성 선수역대 감독역대 1라운드 지명 선수 ||




파일: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엠블럼.svg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1]
YOKOHAMA DeNA BAYSTARS
横浜(よこはまDeNAベイスターズ
구단 법인명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
(株式会社横浜DeNAベイスターズ)
창단
1949년 11월 22일(74주년)
연고지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연고지 이전
1955년[2]
구단 연고지 변천
야마구치현(1952)[3]
오사카부(1953~1954)
카나가와현 카와사키시(1955~1977)
카나가와현 요코하마시(1978~)
구단명 변천
타이요 훼일즈 (1950~1952)
타이요쇼치쿠 로빈스 (1953)
요쇼 로빈스 (1954)
타이요 훼일즈 (1955~1977)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1978~1992)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1993~2011)
쇼난 시렉스 (2군: 2000~2010)[4]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2012~)
홈 구장
시모노세키 구장 (1950~1952)
오사카 구장 (1953~1954)
카와사키 구장 (1955~1977)
요코하마 스타디움 (1978~)
2군 구장
요코스카 스타디움
모기업
DeNA
감독
81 미우라 다이스케 (三浦大輔)
주장
7 사노 케이타 (佐野恵太)
19 야마사키 야스아키 (山﨑康晃)
킷 스폰서
데상트
마스코트
파일: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마스코트.svg
DB 스타맨 & DB 키라라
구단기
파일: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구단기.svg
역대
한국인 선수

송재박[5] (1983~1987)
송광훈[6] (1985~1988, 1991)
박결[7] (1997~2000)
역대
한국계 선수

윤차랑[8] (1960~1964)
니우라 히사오(김일융, 新浦壽夫)[A] (1987~1991)
킨죠 타츠히코(金城龍彦)[A] (1994~2015)
터멜 슬레지[9] (2010~2011)
모리모토 히초리(이희철, 森本稀哲)[A] (2011~2013)
역대
한국인 코치

송광훈
홈 경기 중계 채널(CS)
파일:tbs채널2 로고.png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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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라인 아이콘.svg
★★
일본시리즈 우승 (2회)
1960, 1998
센트럴리그 우승 (2회)
1960, 1998
클라이맥스 시리즈 우승 (1회)
2017
교류전 우승 (1회)
2023
포스트시즌 진출 (7회)


1. 개요
6. 관중수 추이
7. 인기
8. 팀 특징
8.2. 요코하마 팬의 십계명
9. 이야깃거리
12. 역대 감독
13. 역대 성적
1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프로야구단. 연고지는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센트럴리그를 대표하는 약체 팀 이미지를 갖고 있다. 팀 역사만 보더라도 센트럴 리그 우승 2회, 일본시리즈 우승 2회로 매우 초라한 편이고, 통산 승률도 4할 5푼조차 안되는(.448) 12개 구단 중 최하위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10] 단적으로 롯데 자이언츠가 40년 동안 6할 승률을 거둔 적이 없고 파이널 시리즈 진출이 고작 4회인데[11] 이 구단은 무려 72년 역사에 6할 승률을 거둔 적이 없고 파이널 시리즈 진출이 3번이다. 이뿐만 아니라 2019시즌 전까지 총 69시즌동안 NPB 통산 4966패라는 기록까지 보유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마찬가지로 12개 구단 통틀어서 최다패이다. 결국 2019년 6월 15일 교류전 기간에 만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패배하며 NPB 최초로 5000패를 달성하면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12]

그리고 현존하는 센트럴리그 팀 중 유일하게 홈구장에서 리그 우승을 단 한 번도 결정지은 경험이 없는 팀이다. 이 팀은 그나마 있는 2번의 리그 우승을 전부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결정지었다. 다만 일본시리즈 우승은 98년에 홈구장에서 결정지어서 홈 팬들 앞에서 헹가래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팀명에 쓰는 마스코트는 오랫동안 훼일즈[13], 즉 고래를 써왔었는데 당시 모기업이 고래잡이를 했었기 때문. 하지만 고래잡이가 점점 논란거리가 되어서인지 1993년부터 베이스타즈라는 아주 일본스러운 영어로 바꾸었다. 말 그대로 요코하마 만(Bay)의 별들이라는 뜻이다.[14]

2011년 시즌까지 방송국인 TBS 테레비가 모기업으로서 운영해 왔으나, TBS조차도 꿈도 희망도 없는 요코하마보다 요미우리의 경기 중계에 더 힘을 쏟아왔다. 모기업도 버린 셈. 2010년 시즌 종료 후 구단 매각을 선언하여 유력 후보로 住生活グループ[15]이 거론되었으나, 교섭결렬로 2011년 시즌 까지는 TBS 테레비가 구단을 운영해 왔다[16].

결국 2011년 11월 4일, 모바일 게임 사이트 '모바게(Mobage)'[17]를 운영 중인 DeNA(디엔에이)가 요코하마의 모기업인 TBS 홀딩스와의 매입 협상을 완료하고 구단을 인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회사 재무 구조와 향후 사업계획 등의 실사를 마치고 12월 1일 구단주 회의에서 DeNA의 요코하마 구단 인수를 승인함에 따라 팀 명칭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로 변경되었다. 이에 따라 약호도 요코하마의 横에서 DeNA의 De(혹은 ディ)로 바뀌고 표기도 요코하마 DeNA로 변경되었다. 근데 익숙한 것도 있고, 너무 길기도 해서 일본 언론에서조차 그냥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표기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지역명 빼고 간단히 'DeNA'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2. 구단 역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홈구장 : 요코하마 스타디움[편집]




4. 유니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유니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응원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응원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관중수 추이[편집]


연도별
총관중
일일 평균
2009년
1,246,967명
17,319명
2010년
1,209,618명
16,800명
2011년
1,102,192명
15,308명
2012년
1,165,933명
16,194명
2013년
1,425,728명
19,802명
2014년
1,564,528명
21,730명
2015년
1,813,800명
25,546명
2016년
1,939,146명
26,993명
2017년
1,979,446명
27,880명
2018년
2,027,922명
28,166명
2019년
2,283,524명
31,716명
2020년
467,700명
7,795명
2021년
725,858명
10,223명
2022년
1,778,980명
24,708명
2023년
2,280,927명
32,126명

스스로 강팀이 되려하기보다는 적당적당히 운영비 아껴가면서 요미우리전의 떡고물이나 받아먹으려는 심보로 구단을 운영한 다이요 어업이나 TBS 테레비와는 달리, DeNA는 어떻게든 요코하마와 팀에 애정을 가지고 제대로 구단을 경영해보려는 의지를 보이며 관중수를 눈에 띄게 불리고 있다. 정말로 DeNA가 모기업이 된 것이 천만다행. 요코하마 스타디움 항목에도 DeNA가 새 구단주가 되고나서 프로 구단으로서 자립하기 위한 노력에 대해서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은 결실을 맺어서 2016년 이후로는 마침내 관중도 잡고 성적도 잡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2017년에는 일본시리즈까지 가는 데 성공했다!

다만 2018년 이후 성적 부진과 더불어 유벤투스 스폰서비 상승과 관련된 구단의 투자 비중 감소로 인해 다시 Baysball의 재림이 시작된다는 우려 또한 존재하고 있다. 심지어 관중 상승 추이도 모기업의 부풀리기 의혹이 어느 정도 존재하는 모양이라 논란이 가중되고 있다.

그러나 하위권을 전전하던 시기와 비교하면 요코하마 스타디움의 관중증가는 확실히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이고 2019년 후반기 들어 요미우리, 히로시마와 치열한 3파전을 전개하는 양상이 되자 새로 증축한 관중석까지 관중이 들어차면서 창단 후 처음으로 경기당 평균 3만관중 동원을 바라보고 있을 정도이다. 심지어는 2018년 결산에서 모기업인 DeNA의 다른 사업분야는 적자를 면치 못했는데[18] 유일하게 야구를 중심으로 한 스포츠 사업만이 흑자를 기록하면서 모기업의 이익 감소분을 메웠다는 결과까지 나왔다. 확실히 TBS 시절과 지금은 분위기도 팬들의 호응도도 다른 구단이 되었고 만년 하위팀을 이렇게까지 바꾼 것은 DeNA 구단측의 노력을 평가해야할 부분이라 하겠다.[19][20][21]

7. 인기[편집]


도쿄 인접지역인 요코하마를 연고지로 한다는 점과 전통적인 약체인 팀 특성상 센트럴리그에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 함께 인기가 없는 팀으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DeNA사가 구단을 인수한 뒤로는 적극적인 자세로 구단 경영에 임한 결과 상술했듯이 관중수가 히로시마와 더불어 가장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구단으로 발전하고 있다. 2011년 구단 팬클럽의 회원수가 1만명도 채 되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나간 가을야구인 2016년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서는 도쿄 돔 원정 응원석은 물론 3루측 중립석까지 메워버리는 화력을 보였으며, 팀이 19년 만에 일본시리즈에 진출했던 2017년에는 8만 7천명 대로 크게 늘어나는 등 관중 뿐만이 아니라 팬덤수도 굉장히 많이 늘어났다.

이외에도 홈구장 리모델링을 통해 관중석 증축을 진행하는 등 관중 유치에 상당히 힘을 쏟고 있다. 매년 실시하는 스타나이트 데이, 2018년 실시했던 1998년 유니폼 복각 이벤트 등 다양한 마케팅을 실시하며 노력하고 있다.

의외로 한국에서도 이 팀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어느정도 있는 편이다. 이승엽이 한창 요미우리에서 뛰던 시절 상대팀으로 종종 보이기도 했고 모기업이 게임회사인지라 이쪽 경로로 유입되는 사람들이 있는 듯.

2019년에는 아직 시즌중이지만 6월까지 평균관중이 3만명을 넘어섰다. 양대 리그를 합쳐도 한신, 요미우리, 소프트뱅크 다음가는 관중수다. 관중석 증축효과와 마케팅의 성과가 결실을 맺은 결과. 이제 비인기 구단이라는 오명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22]


8. 팀 특징[편집]



8.1. 팀 이름이 베이스타즈인데 「스타」가 없어!![편집]


그나마 이 팀에서 뛰는 스타급 선수로는 오랫동안 팀 투수진을 떠받쳐온 '반초(대장)' 미우라 다이스케 정도였으나 2016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미우라는 성적으로 보면 충분히 주목받을 만한 선수지만 팀이 그렇지가 못하고 있다.[23] 그 외에 한국 야구팬들에게 알려진 선수는 재일교포 모리모토 히초리가 있었고 한국에서 활약한 카도쿠라 켄이 일본프로야구 커리어의 최전성기를 보낸 곳도 여기였다.

한 때 이 팀을 대표하는 선수로는 2007, 2008년 센트럴리그 홈런왕이자 2008 베이징 올림픽,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국가대표로 참가한 거포 3루수 무라타 슈이치가 있었으나, 2012년 시즌에 FA를 선언하고 요미우리로 이적해버렸다. 그리고 일본 턱돌이로 유명하며 고타율과 2라운드 1/2위 결정전에서 홈런을 쳐내어 우리나라를 울리기도 했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우치카와 세이이치도 이 팀 소속이다.

이러다 보니 결국 팀에서 뛰는 주목받는 스타라고 할 수 있는 선수가 없다. 나카하타 감독 시절에는 담당 기자들도 선수보다는 감독만 졸졸 따라다니면서 오늘은 어록으로 쓰일만한 뭐 한마디 안 나오나 기다리는 게 일이었다. 오죽하면 카네모토 토모아키가 은퇴 경기에서 "DeNA는 나카하타 감독이 가장 눈에 띈다. 선수가 주목받지 않으면 (안 된다.)"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여기에는 요코하마 프런트의 행보도 한몫 거드는데, 툭하면 구단의 레전드로 남을 선수를 제대로 못 지켜서 팬들의 원성이 매우 크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98년 우승의 주역이었던 붙박이 유격수 이시이 타쿠로가 2009년에 히로시마로 이적하여 은퇴 후 히로시마 코치로 정착, 마찬가지로 98년 우승의 주역이었던 외야수 사에키 타카히로가 2011년에 주니치로 이적하여 불과 1년만에 은퇴 후 주니치 코치로 정착, 미우라 다이스케와 함께 요코하마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외야수 긴조 다쓰히코 역시 2015년에 요미우리로 이적하여 불과 1년만에 은퇴 후 요미우리의 코치로 정착하였다. 이 케이스의 공통점은 구단 측에서 빡빡하게 은퇴 권고와 전력외 통지를 날렸고 선수와 구단간의 입장 차이가 첨예하게 대립했다는 것인데, 팬들에게 큰 지지를 받는 인기 선수들을 좀 기다려주지 못하고 그렇게 쉽게 내쳐버리는 선택이 팬 입장에서는 씁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요코하마 팬 입장에서는 이 선수들이 다른 팀 유니폼을 입고 있는 모습이 지금 봐도 어색할 정도다.

이렇다보니 웃픈 일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상대팀 선수의 은퇴 행사를 성대하게 치러준다. 상기된 이시이 타쿠로는 전날 히로시마에서 은퇴 경기 및 은퇴 행사를 진행한 뒤 다음날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의 원정 경기에서 진짜 선수생활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특전 영상, 꽃다발 전달, 경기 후 구장 한 바퀴를 일순하며 팬들과 하이터치 등 마치 홈팀 선수가 은퇴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24]정작 같은 날 은퇴 경기를 치룬 DeNA의 포수 니이누마 신지는 묻혔다. 뭐 물론 둘이 워낙 급이 다르긴 하지만 98년 우승 당시 요코하마의 주전 포수이면서, 주니치의 선수 겸 감독이던 다니시게 모토노부 또한 선수로서 마지막으로 마스크를 쓰고 마지막 타격을 한 것이 요코하마 스타디움. 구장을 일순하며 다이요 시절부터 요코하마를 거쳐 주니치 시절까지 응원가 메들리, 다니시게의 자녀들의 꽃다발 전달식, 헹가래 등 홈구장에서 볼 법한 모습을 보여줬다.

선발 로테이션의 이노 쇼이치야마구치 슌이 주목할만한 활약을 보이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도 다른 팀의 주축 선수보다 개성도 화제성도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게다가 야마구치는 2016년 말 FA로 요미우리로 이적.[25] 그나마 2014년 시즌 들어와서 츠츠고 요시토모가 3할 22홈런으로 토종 4번타자로서 활약을 보이면서 프랜차이즈 스타 후보로 떠오르고 있고, 2015년 입단한 야마사키 야스아키가 마무리로 혜성같이 등장, 엄청난 활약을 보이면서 2010년대 중반 리빌딩 이후 투수진에는 야마사키, 야수진에는 츠츠고가 팀을 대표하는 스타로 거듭났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츠츠고는 2019 시즌 종료 이후 메이저리그 포스팅에 참가할 것을 선언하였고 구단이 수락하여 또 스타선수가 빠지는 상황을 다시 맞이하게 되었다.

츠츠고가 빠져나간 이후로는 첫 시즌부터 3할에 20홈런을 기록한 마키 슈고, 요코하마의 좌완 에이스 이마나가 쇼타, 2020 시즌 이후 타격 센스가 만개한 사노 케이타 등이 스타선수 물망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들 중 야마사키 야스아키는 2022시즌 종료 후 평소 갈망하던 메이저리그 진출의 꿈을 접고 옵트아웃 조항도 없는 6년 장기계약을 체결하면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프랜차이즈 스타로 남는 것이 확정되었다.

2023시즌 종료 후 이마나가가 MLB 포스팅을 신청했는데, 아예 구단차원에서 국내에 남는걸 만류하면서 포스팅을 권유했다고 한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 비슷한 행보인데, 어차피 FA가 되는 순간 선수들을 빼앗기는 것이 당연하기에 특급 자원들은 미국에 팔아서 돈도 벌고 상대 팀의 전력에 도움을 주지 않겠다는 전략이며, MLB 포스팅에 우호적이고 적극적라는 이미지를 심어 특급 유망주를 수급하겠다는 계획으로 보인다.

8.2. 요코하마 팬의 십계명[편집]


아래는 요코하마 팬으로 사는 십계명이라고 한다.[26]KBO의 어느 팀을 보는 듯 하다 그래도 이 팀은 그 팀보다도 우승 횟수는 많다

1. 시합은 원래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관전한다.
2. 경기 도중 단 1군데라도 희망이나 좋은 점을 찾아낸다.
3. 시합에 이기든 지든, 감독의 수수께끼같은 선수기용이나 작전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4. 이긴 날은, 오늘이 야구 뉴스를 즐거운 기분으로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행복하게 본다.
5. 언젠가는, 언젠가는 초 거물 용병선수가 입단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6. 상대팀의 에이스 투수가 선발로 나서는 날은 결코 쓸데없는 희망을 버리고 패배를 확신한다.
7. 팀 내 루키의 성장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삼는다.
8. 도저히,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괴로울 때면 1998 시즌 우승했을 때의 비디오를 몇 번이고 돌려본다.
9. 경기가 없는 매주 월요일은 오늘은 절대 지지 않는 날이라며 마음 편히 하루를 보낸다.
10. 팀이 지고 있을 때면,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연패기록을 보며 마음을 달랜다.

최근 몇 년간 센트럴리그 꼴찌를 도맡아해온 베이스타즈의 상황을 비꼬는 유행어로 베리그가 있다. 매년 다른 팀과 엄청난 차를 벌리면 꼴등으로 가라앉은 채 그대로 시즌이 끝나버리는 거의 독립적인 위치라는 점 때문에 베이스타즈가 사실은 다른 리그였다! 라는 뜻으로 센트럴리그를 줄여서 세리그, 퍼시픽리그를 파리그라고 부르는 것에 빗대어, 베이스타즈에서 「베」를 따 베리그라고 부른다. 기본적으로는 베이스타즈 혼자 소속된 리그이지만 자국리그나 타국 리그에서 헤매는 팀들을 여기로 승격시켜서 순위를 가리곤 하는데, 공교롭게도 파리그의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MLB시애틀 매리너스와 함께 롯데 자이언츠가 여기 단골로 일본에서 유명하다. 결국 매년 수위는 베이스타즈가 차지한다. 물론 패가 많을수록 순위가 높은 베리그 기준이다. 이 뿐만 아니라 일본 현지에서는 'ベイスボール[27]'이라는 표현도 곧잘 쓰이는 모양. 굳이 한국에서 쓰이는 비슷한 표현이라면 '유사야구' 또는 '코구' 정도다.

물론 2016년부터는 십계명이 모두 뒤집혀졌다고 할 수 있다.

1. 시합은 원래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관전한다.
→ 이기는 날이 더 많아졌다.
2. 경기 도중 단 한 군데라도 희망이나 좋은 점을 찾아낸다.
→ 이제는 희망과 좋은 점이 많이 보인다.
3. 시합에 이기든 지든, 감독의 수수께끼같은 선수기용이나 작전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 성적이 오르자 해탈했던 팬들이 다시 일희일비 모드가 되었다.
4. 이긴 날은, 오늘이 야구 뉴스를 즐거운 기분으로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행복하게 본다.
→ 이젠 즐겁게 야구 뉴스를 볼 수 있게 되었다.
5. 언젠가는, 언젠가는 초 거물 용병선수가 입단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 2015년에 입단한 용병 호세 로페즈가 2017년에 세리그 안타-타점 2관왕으로 우뚝 섰다.
6. 상대팀의 에이스 투수가 선발로 나서는 날은 결코 쓸데없는 희망을 버리고 패배를 확신한다.
→ 상대가 그렇게 느끼도록 할 수 있는 에이스들이 등장했고, 타선이 상대 에이스를 박살낼 수 있는 힘이 생겼다.
7. 팀 내 루키의 성장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삼는다.
→과거엔 신인들이 최후의 밧줄이라는 느낌이였다면, 이제는 연이은 루키들의 성장 덕분에 진정한 의미로 즐거워졌다.
8. 도저히,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괴로울 때면 1998 시즌 우승했을 때의 비디오를 몇 번이고 돌려본다.
→ 이제는 2017년 일본시리즈 진출 순간이나 일본시리즈 4차전 영상을 돌려봐도 될 듯 싶다.
9. 경기가 없는 매주 월요일은 오늘은 절대 지지 않는 날이라며 마음 편히 하루를 보낸다.
→ 이제는 이기는 야구를 기대할 수 있다.
10. 팀이 지고 있을 때면,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연패기록을 보며 마음을 달랜다.
2022년, 2023년 요미우리는 중하위권을 전전하다 가을야구에 진출하지 못했다. 그리고 두 시즌 연속으로 요미우리의 시즌을 끝내 버린 팀은 요코하마였다.

2018년 이후로는 옛날 십계명을 찾아 쓰는 상황이 찾아올듯 말듯한 줄타기가 이어졌지만 2020년 들어서는 일부 주축 선수의 이탈[28]과 무관중 경기로 리그를 치뤄야하는 상황이 오면서 이전처럼 되돌아가고 있다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결국 최악의 행보를 이어가며 출발했던 2021년, 6년만에 최하위를 기록하면서 다시 이전의 십계명대로 팀이 귀신같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곧바로 다음 해에 2위로 올라서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부활했다.

9. 이야깃거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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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에 98년 베이스타즈의 우승을 기념하며 국물이 파란색인 베이스타즈 라면을 팔던 칸톤(廣東)이라는 중국음식점이 있었으며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다는 듯. 2014년 현재는 폐점했다.
  • 교류전에 매우 약하다. 2005년 교류전 시작 이래 2017년 종료 시점까지 129승 200패 7무승부, 승률 .392로 교류전 통산 1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무려 2할 넘게 차이가 날 뿐만아니라 바로 위의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도 통산 승수에서 15승 정도 차이가 나는 압도적 꼴찌이다. 교류전 꼴찌도 5번으로 최다. 이러한 체질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2015년 시즌으로 교류전 돌입 전에 승률 5할 + 11승으로 1위를 기록하며 17년만의 우승 설레발까지 나왔지만 교류전에서 3승 14패로 참패하면서 최하위를 기록. 그 전까지 벌어놓은 저금을 다 까먹고 내려 앉아 마침내 시즌 끝날 때는 최하위까지 굴러 떨어졌다. 2018년에는 비로 연기되어 교류전 마지막 경기가 된 치바 롯데전을 패함으로써 기어이 해를 넘기지 않고 교류전 통산 200패를 채우고 말았다. 교류전에서 통산 200패를 기록한 건 12개 구단 최초였다.[29] 그래도 2016년 이후의 교류전 성적을 보면 그런대로 중박은 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4할 승률을 돌파했다. 2023년 교류전에서는 아예 우승까지 차지함과 동시에 교류전 통산 승률 최하위의 자리를 히로시마에 넘겨주고 11위로 올라섰다.

파일:r8AH4af.png
  • 팀의 마스코트로는 남성 캐릭터인 DB 스타맨과 여성 캐릭터인 DB 키라라가 있다. 모기업이 DeNA로 변경되면서 새로 만들어진 마스코트로 이전 마스코트였던 홋시, 홋시나, 홋시조[30]는 졸업하여 예전에 쓰던 마스코트가 되었다. 참고로 얘네 '햄스터'다. 그러니 팬들은 그런거 무시하고 대부분 너구리 취급 하고 있으며[31] 소속팀 포수 토바시라는 얘네를 고양이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DB 스타맨은 인형탈이 인형탈이다보니 다른 구단 마스코트들에게 굴욕도 자주 당한다.예시1(2분부터)팔이 짧아서 슬픈 마스코트예시2

파일:external/www.baystars.co.jp/160205_03_01.jpg
  • 5주년 기념으로 마린 군(マリンくん)을 선보였다. "왜 남의 팀 이름을 자기네 팀 마스코트 이름으로 쓰냐"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데, 이 마스코트는 롯데가 "마린즈"라는 이름을 쓰기 전인 요코하마 다이요 시절[32] 썼던 마스코트다. 롯데의 마린즈보다 뼈대 깊은 마린인 셈이다.
  • 요코하마에서 다른 팀으로 이적해 활약한 선수들이 이적 후에 남긴 코멘트가 있는데 가관이다[38]. 뿐만 아니라 외국인에 구단 OB에 전 감독들까지 여기에 가세하고 있다.
    • 우치카와 세이이치(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 "요코하마에서는 누굴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33], "아무 긴장감도 없는 곳에서 플레이하는 것보다 이런 곳에서 플레이 하는 게 보람이 느껴진다."
    • 무라타 슈이치 - (요코하마 소속이던 당시 WBC 대표로 참가하고 나서) "프로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수비 연습을 했다." "이대로 (요코하마에서) 질질 선수생활을 끝내고 싶진 않다."
    • 테라하라 하야토(요코하마 → 오릭스) - "개개인의 선수가 자신에게 투자하고 단련하는 것이 적은 것 같다고 느꼈다."
    • 사에키 타카히로(요코하마 → 주니치) - "(주니치의 연습에 참가하면서)연습이 꽤 힘들었다고 들었는데 막상 해보니 전혀 다른 연습이었다."
    • 사카모토 야타로(요코하마 → 세이부) - "요코하마는 연습때의 집중력도 낮고 옷차림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이전에 있었던 야쿠르트와도 큰 차이가 난다. 좀 더 프로의식을 높여야한다."
    • 요시미 유지(요코하마 → 치바 롯데) - "(롯데로 이적한 후)오랜만에 야구를 하니 기쁜 감정이 솟아올랐다."
    • 하시모토 타스쿠(치바 롯데 → 요코하마) - "역시 요코하마 이적은 실수였다." "모든 선수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이런 팀이 있나 싶었다." "경기 중 덕아웃에 있는 선수가 적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당연하다는 듯 생겼다."
    • 와타나베 나오토(라쿠텐 → 요코하마) - "(피지컬 트레이닝도 아닌데) 축구하는 건 이상해." "(전 소속팀인)라쿠텐이었다면 뒤지게 맞았을거다." "(이후 축구를 하던 선수를 훈계하러 간 와타나베. 반응을 묻자)순순히 듣고 있었다. 근데 보통 선배가 오면 긴장하거나 자세를 바로 잡지 않나? 요코하마에서는 그 조차도 하지 않더라."
    • 타무라 히토시(요코하마 → 소프트뱅크 → DeNA) - "요코하마 시절에는 제대로 뛰어 본 적이 없었다." "요코하마 시절에는 연습하면 안 된다는 풍조가 있었다."
    • 타네다 히토시(주니치 → 요코하마) - "2번째 구단 인 요코하마는 주니치에 비하면 솔직히 미지근한 분위기의 팀이었다. 야구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 집단이었다. 연습이든 경기든 왠지 그냥 시작해서 그냥 끝난다고 할까?" "주니치는 코치진의 강한 지도력 아래 통제된 훈련을 하고 있었다. 세이부는 코치들이 무슨 말을 하지 않아도 선수들이 자체적으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요코하마는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 요시무라 유키(요코하마 → 소프트뱅크) - "강팀(소프트뱅크)으로 올 수 있어서 좋았다."
    • 후루키 카츠아키(오릭스 버팔로즈 → 미국 독립리그 하와이 스타즈[34]) - "(요코하마에 재적하고 있던 때부터 이적하고 싶어서) 연습이 제대로 안됐다"
    • 츠루오카 카즈나리(요코하마 → 요미우리 → DeNA → 한신 타이거스)[35] - "(자이언츠의 연습을 보며) 1군의 선수가 이렇게 (많이) 연습하는 줄은 몰랐다."
    • 카토 코스케(현 후쿠시마 호프스) - "강한 팀은 강한 이유가 있었네요. 그걸 하루에도 몇차례씩 느끼고, 저도 빨리 그(강한) 팀의 일원이 되고싶습니다."[36]
    • 타카미야 카즈야(요코하마 → 오릭스) - "개막전 1경기만 졌는데도 시즌이 끝난 느낌이었다."
    • 쿠도 키미야스(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 - "요코하마의 선수는 연습안해"
    • 카도쿠라 켄 - "야구소년들이여, 프로가 되고 싶겠지. 챤스는 있어! 하지만 요코하마는 관둬."
    • 니시 토시히사 - "(거인에서 요코하마로 이적 후) 점점 자신이 요코하마에 물들어 가는 기분이 든다. 여기 있으면 나까지 망쳐지는 것 같아."
    • 아롬 발디리스 - "요코하마 시절은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나를 도와주는 코치도 선수도 없었다."[37]
    • 호세 카스티요(피츠버그 → 요코하마 → 치바 롯데) - "시즌 중반쯤 들어가자 다들 이기고자 하는 의욕이 사라졌고 모두 개인 플레이에 급급했다."
    • 터멜 슬레지(닛폰햄 → 요코하마 → 닛폰햄) - "(요코하마 입단 당시)12구단 중 가장 편한 팀으로 알고 있다." "(닛폰햄 복귀 당시)프로의식이 높은 팀으로 돌아갈 수 있어 좋았다."
    • 타카기 유타카(80년대에 주전 2루수로 활약한 구단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OB) - "요코하마의 (동계훈련) 캠프를 가보면 모자도 안쓰고 있고 스파이크도 신고 있지 않은 놈도 있다.
    • 나카하타 키요시(전 감독) - "(감독이 먼저) 인사를 했으면 (너희도) 인사 좀 해라."
  • 고유와 전통을 매우 중시하는 센트럴 리그 특성과는 달리 정말 이것저것 많이 변했다. 웬만해서 센트럴 리그는 연고지, 모기업 주체, 팀명에 큰 변화가 거의 없지만[39] DeNA는 연고지도 시모노세키-교토-카와사키-요코하마[40], 운영 주체도 타이요-타이요쇼치쿠 공동-다시 타이요 단독(=마루하)-TBS-DeNA, 팀명도 웨일즈-로빈스-웨일즈-베이스타즈였으며 마케팅 부분에 있어서도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하는 편이며 팀 분위기도 여타 센트럴 리그 팀에 비하면 자유로운 편이다.
  • 히로시마와 더불어 센트럴 리그 20세기 최후의 일본시리즈 우승팀들 가운데 하나다. 그나마 요코하마가 나은 것은 요코하마는 그래도 마지막 우승이 90년대 후반이라는 점이다[41]. 원래 한신 타이거스도 이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2023년 18년 만의 센트럴 리그 우승, 그리고 마침내 지역 라이벌 오릭스 버팔로스 상대로 7차전까지 가는 승부 끝에 38년 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거머쥐며 탈출하게 되었다. 이웃 퍼시픽리그에는 20세기 우승이 마지막인 팀이 없다.[42][43]
  • 공식 명칭은 베이스타'즈'인데도 불구하고 한국 포털이나 기사 등에서는 왜인지 기본적으로 베이스타'스'로 표기하고 있다. 더 희한한건 그동안 한국에서도 'STARS'의 팀명을 사용했던 농구의 안양 SBS 스타즈나, 여자농구와 남자배구의 KB(손해보험) 스타즈 모두 '즈'를 공식 표기를 사용했었는데, 유독 DeNA만 베이스타'스'라고 표현한다는 점.
  • 구단 공식 유튜브를 운영하고 있으며, 세계 야구단 구독자 수 3위를 달리고 있다. 1위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2위는 두산 베어스. 일본 내에서는 12구단 중 1위를 달리고 있었으나 요미우리에게 내줬다.
  • NPB 최초로 구단 통산 5000패를 달성한 팀이다. 9월 5일 기준 4061승 293무 5024패 승률 .447을 기록 중으로 현존하는 구단들 중 최저승률을 기록중이다.[44] 별로 달갑지 않은 기록인건 맞으나 1950년부터 리그에 참가한 팀이 30년대에 창단한 선배 구단들보다도 빠르게 5000패를 먼저 달성하는 위업을 이루어냈다. 따라서 별명 역시 반만패. 요코하마에 이어 두 번째로 5000패를 달성한 팀은 오릭스 버팔로즈.
  • 위의 2011시즌 단락에도 써 있지만, 21세기 전무후무한 지진 콜드패를 당한 팀이다. 물론 세계로 범위를 넓혀 보면 경기 중은 아니지만 경기 시작 30분 전에 지진으로 경기가 취소된 도 있다.
  • 일본의 유명 베테랑 성우인 코야스 타케히토가 카나가와 출신이라서 야구를 볼 때 이 팀을 응원하는 편이다. 다만 이쪽은 스포츠 매니아와는 거리가 좀 먼 스타일이다.
  • 보드게임 시리즈 모모타로 전철의 원작자인 사쿠마 아키라가 이 팀의 팬이다. 7살때, 즉 다이요 웨일즈부터 팬이었다. 2013년 추계 캠프때에는 베이스타 방송국(ベイスタ放送局)이라는 코너라는 기획을 감수할 정도.
  • 아이돌 마스터 샤이니 컬러즈에서 사이죠 쥬리 역을 맡은 성우 나가이 마리코가 출신지와 가족의 영향으로 열혈 팬이다. 또한, 성우 나카무라 겐타도 열혈 팬인데 이쪽도 출신지가 요코하마시이다.

10. 선수단[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선수단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1. 역대 선수[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역대 선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 역대 감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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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gcolor=#f7f7f7,#191919>
1949년 ~ 현재
||
||<width=20%> 1대
와타나베
파일:일본 국기.svg
(1950) ||<width=20%> 2대
나카지마
파일:일본 국기.svg
(1951) ||<width=20%> 3대
아리마
파일:일본 국기.svg
(1951) ||<width=20%> 4대
고니시
파일:일본 국기.svg
(1952~1953) ||<width=20%> 5대
나가사와
파일:일본 국기.svg
(1954) ||
||<width=20%> 6대
후지이
파일:일본 국기.svg
(1955) ||<width=20%> 7대
사코하타
파일:일본 국기.svg
(1956~1958) ||<width=20%> 8대
S. 모리
파일:일본 국기.svg
(1959) ||<width=20%> 9대
미하라
파일:일본 국기.svg
(1960~1967)
||<width=20%> 10대
벳토
파일:일본 국기.svg
(1968~1972) ||
||<width=20%> 11대
아오타
파일:일본 국기.svg
(1973) ||<width=20%> 12대
미야자키
파일:일본 국기.svg
(1974) ||<width=20%> 13대
아키야마
파일:일본 국기.svg
(1975~1976) ||<width=20%> 14대
벳토
파일:일본 국기.svg
(1977~1979) ||<width=20%> 15대
도이
파일:일본 국기.svg
(1980~1981) ||
||<width=20%> 16대
세키네
파일:일본 국기.svg
(1982~1984) ||<width=20%> 17대
S. 곤도
파일:일본 국기.svg
(1985~1986) ||<width=20%> 18대
고바
파일:일본 국기.svg
(1987~1989) ||<width=20%> 19대
스도
파일:일본 국기.svg
(1990~1992) ||<width=20%> 20대
에지리
파일:일본 국기.svg
(1992) ||
||<width=20%> 21대
A. 곤도
파일:일본 국기.svg
(1993~1995) ||<width=20%> 22대
오야
파일:일본 국기.svg
(1996~1997) ||<width=20%> 23대
H. 곤도
파일:일본 국기.svg
(1998~2000)
||<width=20%> 24대
M. 모리
파일:일본 국기.svg
(2001~2002) ||<width=20%> 25대
야마시타
파일:일본 국기.svg
(2003~2004) ||
||<width=20%> 26대
우시지마
파일:일본 국기.svg
(2005~2006) ||<width=20%> 27대
오야
파일:일본 국기.svg
(2007~2009) ||<width=20%> 28대
오바나
파일:일본 국기.svg
(2010~2011) ||<width=20%> 29대
나카하타
파일:일본 국기.svg
(2012~2015) ||<width=20%> 30대
라미레스
파일:베네수엘라 국기.svg
(2016~2020)
||
||<bgcolor=#e0ffdb,#073300> 31대
미우라
파일:일본 국기.svg
(2021~) ||<width=20%> ||<width=20%> ||<width=20%> ||<width=20%> ||




  • 미하라 오사무 (1960 - 1967) - 팀 첫 번째 우승 당시 감독
  • 벳토 카오루 (1968 - 1972, 1977 - 1979) - 카와사키 구장 시대 타이요 훼일즈의 최후의 감독이자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최초의 감독. 3년 연속 A클래스의 성적을 올리는 등 만년 하위권을 달리던 이 팀에서 몇 안되는 좋은 성적을 거둔 감독이다. 감독직 은퇴 후에도 2년간 타이요에서 구단 대표를 맡기도 했다.
  • 아오타 노보루 (1973)
  • 미야자키 카나메 (1974)
  • 아키야마 노보루 (1975 - 1976)
  • 도이 준 (1980 - 1981)
  • 세키네 준조 (1982 - 1984)
  • 콘도 사다오 (1985 - 1986)
  • 코바 타케시 (1987 - 1989) - 다이요와 B클래스 동지였던 히로시마 도요 카프를 리그 우승 4회, 일본시리즈 우승 3회로 이끈 명장으로 5년 장기계약을 체결했으나, 3년 연속 B클래스를 기록하며 중도해임되었다.
  • 스도 유타카 (1990 - 1992) - 선수로썬 다이마이 오리온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구단에서 우승을 경험했던 인물이었다. 은퇴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 세이부 라이온즈 등에서 오랫동안 지도자를 맡았고 이 구단에선 감독직을 맡기도 했다. 다만 감독 경력은 1992년 시즌 도중 성적부진으로 사임하며 흑역사가 되었다.
  • 콘도 아키히토 (1993 - 1995) -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초대 감독. 선수 시절 첫 해인 1960년 다이요 웨일스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기여했고 신인선수로서 최초로 일본시리즈 MVP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감독으로썬 B클래스만 주야장천 찍고 해임당했고 이후 치바 롯데 마린즈 감독으로 취임해선 1998년 NPB 최고 기록인 18연패(連敗)를 찍는 흑역사를 남기고 그 해 바로 짤렸다.
  • 오오야 아키히코 (1996 - 1997, 2007 - 2009)
선수 시절엔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명포수로 활약한 인물로, 1기 감독으로썬 팀의 비밀번호를 끊어냈지만, 2기 감독으로썬 좋지 못한 성적만 거뒀다. 결국 2기 감독을 맡던 2009년 시즌 도중 해임당했다.
  • 곤도 히로시 (1998 - 2000) - 팀 두 번째 우승 당시 감독. 팀 역사상 넘사벽급의 성적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극단적 자율방임노선으로 인해 선수들과 알력을 일으키며 재계약에 실패한다.
  • 모리 마사아키 (2001 - 2002) - 전 소속팀에서는 팀을 리그 우승 8번, 일본시리즈 우승 6번으로 이끈 명장이었으나 이 팀에서는 첫 해 3위에 이어(그나마도 4위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승률에서 밀리는데 승수 높아서 겨우 억지로 된 순위.) 이듬해 꼴찌로 꼬라박으며 팀의 암흑기를 열어버렸고 결국 그해 시즌 말 도중 해임되었다.
  • 야마시타 다이스케 (2003 - 2004)
  • 우시지마 가즈히코 (2005 - 2006) - 2002~2015년의 암흑기 가운데 유일한 A클래스(2005년)를 기록했던 감독. 그러나 이듬해 최하위로 곤두박질치는 바람에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다만 실제 사임 이유는 성적 향상에 뜻을 두지 않던 구단의 태도에 질려서라는 설이 유력하다.
  • 오바나 다카오 (2010 - 2011) - 소프트뱅크 호크스,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투수코치 역임. 투수코치로는 굉장히 높게 평가받으나 감독으로서는 영 아니였다.
  • 나카하타 키요시 (2012 - 2015)
  • 알렉스 라미레즈 (2016 - 2020)

13. 역대 성적[편집]


­
리그 우승[45]
­
2위
­
3위

B클래스

연도
정규시즌 순위
최종순위
팀이름
경기수



승률
포스트시즌
1950
5위/8팀
5위
다이요 훼일즈
140
69
68
3
.504

1951
6위/7팀
6위
108
40
64
4
.385

1952
4위/7팀
4위
120
58
62
0
.483

연도
정규시즌 순위
최종순위
팀이름
경기수



승률
포스트시즌
1953
5위/6팀
5위
타이요-쇼치쿠
로빈스

130
52
77
1
.403

1954
6위/6팀
6위
130
32
96
2
.250

연도
정규시즌 순위
최종순위
팀이름
경기수



승률
포스트시즌
1955
6위/6팀
6위
다이요 훼일즈
130
31
99[46]
0
.238

1956
6위/6팀
6위
130
43
87
0
.331

1957
6위/6팀
6위
130
52
74
4
.415

1958
6위/6팀
6위
130
51
73
6
.415

1959
6위/6팀
6위
130
49
77
4
.392

1960
1위/6팀
우승
130
70
56
4
.554
일본시리즈 (4-0 vs 다이마이)
1961
6위/6팀
6위
130
50
75
5
.404

1962
2위/6팀
2위
134
71
59
4
.546

1963
5위/6팀
5위
140
59
79
2
.428

1964
2위/6팀
2위
140
80
58
2
.580

1965
4위/6팀
4위
140
68
70
2
.493

1966
5위/6팀
5위
130
52
78
0
.400

1967
4위/6팀
4위
135
59
71
5
.454

1968
5위/6팀
5위
133
59
71
3
.454

1969
3위/6팀
3위
130
61
61
8
.500

1970
3위/6팀
3위
130
69
57
4
.548

1971
3위/6팀
3위
130
61
59
10
.508[47]

1972
5위/6팀
5위
130
57
69
4
.452

1973
5위/6팀
5위
130
60
64
6
.484

1974
5위/6팀
5위
130
55
69
6
.444

1975
5위/6팀
5위
130
51
69
10
.425

1976
6위/6팀
6위
130
45
78
7
.366

1977
6위/6팀
6위
130
51
68
11
.429

연도
정규시즌 순위
최종순위
팀이름
경기수



승률
포스트시즌
1978
4위/6팀
4위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즈

130
64
57
9
.529

1979
2위/6팀
2위
130
59
54
17
.522

1980
4위/6팀
4위
130
59
62
9
.488

1981
6위/6팀
6위
130
42
80
8
.344

1982
5위/6팀
5위
130
53
65
12
.449

1983
3위/6팀
3위
130
61
61
8
.500

1984
6위/6팀
6위
130
46
77
7
.374

1985
4위/6팀
4위
130
57
61
12
.483

1986
4위/6팀
4위
130
56
69
5
.448

1987
5위/6팀
5위
130
56
68
6
.452

1988
4위/6팀
4위
130
59
67
4
.468

1989
6위/6팀
6위
130
47
80
3
.370

1990
3위/6팀
3위
133
64
66
3
.492

1991
5위/6팀
5위
131
64
66
1
.492

1992
5위/6팀
5위
131
61
69
1
.469

연도
정규시즌 순위
최종순위
팀이름
경기수



승률
포스트시즌[48]
1993
5위/6팀
5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130
57
73
0
.438

1994
6위/6팀
6위
130
61
69
0
.469

1995
4위/6팀
4위
130
66
64
0
.508

1996
5위/6팀
5위
130
55
75
0
.423

1997
2위/6팀
2위
135
72
63
0
.533

1998
1위/6팀
우승
136
79
56
1
.585
일본시리즈 (4-2 vs 세이부)
1999
3위/6팀
3위
135
71
64
0
.526

2000
3위/6팀
3위
136
69
66
1
.511

2001
3위/6팀
3위
140
69
67
4
.507[49]

2002
6위/6팀
6위
140
49
86
5
.363

2003
6위/6팀
6위
140
45
94
1
.324

2004
6위/6팀
6위
138
59
76
3
.437

2005
3위/6팀
3위
146
69
70
7
.496

2006
6위/6팀
6위
146
58
84
4
.408

2007
4위/6팀
4위
144
71
72
1
.497

2008
6위/6팀
6위
144
48
94
2
.338

2009
6위/6팀
6위
144
51
93
0
.354

2010
6위/6팀
6위
144
48
95
1
.336

2011
6위/6팀
6위
144
47
86
11
.353

연도
정규시즌 순위
최종순위
팀이름
경기수



승률
포스트시즌
2012
6위/6팀
6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144
46
85
13
0.351

2013
5위/6팀
5위
144
64
79
1
.448

2014
5위/6팀
5위
144
67
75
2
.472

2015
6위/6팀
6위
143
62
80
1
.437

2016
3위/6팀
3위
143
69
71
3
.493
퍼스트 스테이지 (2-1 vs 요미우리)
파이널 스테이지 (1-4 vs 히로시마)
2017
3위/6팀
3위
143
73
65
5
.529
퍼스트 스테이지 (2-1 vs 한신)
파이널 스테이지 (4-2 vs 히로시마)
일본시리즈 (2-4 vs 소프트뱅크)
2018
4위/6팀
4위
143
67
74
2
.475

2019
2위/6팀
2위
143
71
69
3
.507
퍼스트 스테이지 (1-2 vs 한신)
2020
4위/6팀
4위
120
56
58
6
.491

2021
6위/6팀
6위
143
54
73
16
.425

2022
2위/6팀
2위
143
73
68
2
.518
퍼스트 스테이지 (1-2 vs 한신)
NPB 통산 73시즌
리그우승 2회

9800
4249
5234
317
.448
일본시리즈 우승 2회

14. 둘러보기[편집]







[1]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2] 일본프로야구는 보호지역(연고지)을 도도부현 단위로 설정하고, 카와사키랑 요코하마는 같은 카나가와현에 있기 때문에 1955년부터 계속 같은 연고지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연고지 내에서 1군 홈구장만 이동했다고 보는 셈.[3] NPB에 공식적인 연고지 개념이 들어선 것은 1952년으로, 그 이전엔 단일리그 시절인 1948년 잠깐 도시연고제를 도입하려다 구장의 부족으로 유명무실화된 것이 전부.[4] 2000년부터 2010년까지 2군 팀만 이름을 달리해서 쇼난 시렉스(湘南シーレックス, Shonan Searex)라고 했다. 2014년부터 2018년까지의 넥센 히어로즈(1군)와 화성 히어로즈(2군), 2019년부터의 키움 히어로즈(1군, 앞의 넥센 히어로즈와 같은 팀)와 고양 히어로즈(2군, 뒤의 고양 다이노스와는 다른 팀), 또는 2015년부터 2018년까지의 NC 다이노스(1군)과 고양 다이노스(2군)의 관계와 같다.[5] 일본식 이름은 요시모토 히로시(吉本博). 재일교포.[6] 일본식 이름은 타케다 미츠쿠니(竹田光訓). 재일교포. 무려 1라운더 출신으로 우투우타 불펜투수였다. 타이요 퇴단 후 삼성 라이온즈에서 1989~1990년 2시즌 뛰고 방출. 이후 1991년에는 타이요에 복귀하였으나 1군 등판 없이 그 해를 마지막으로 은퇴한다. NPB 통산 1군 3시즌 40경기 60⅔이닝 1승 2패 ERA 4.01, KBO 리그 통산 2시즌 16경기 32⅔이닝 1승 3패 ERA 9.92. 은퇴 후 요코하마 코치를 거쳐 현재도 요코하마 프런트에 재직중이다.[7] 일본식 이름은 아라이 키요시(新井潔). 재일교포.[8] 일본식 이름은 하야마 지로(波山次郎)로 북한 국적의 재일교포. 1941년 4월 5일생 우완 투수로 재일교포는 맞으나 한국 국적을 소유한 적이 없는 북한 국적의 선수라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대한민국 기준으로 봐도) 한국인이라 할 순 없다. 토호쿠 고등학교 재학 시절 야구부를 2년 연속 하계 코시엔 진출로 이끌었고 지역예선에선 2번이나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유망주였지만, 프로에선 5년간 통산 24경기 2승 4패에 그치며 별다른 족적을 남기지 못한 채 1964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은퇴 직후인 1965년 5월 가족들과 함께 북한으로 영주귀국하면서 조선적에서 북한으로 국적을 바꿨고, 북한으로 간 이후엔 평양철도체육단에서 뛰면서 국가대표에도 선출되어 같은 공산국가인 쿠바 야구 국가대표팀과의 친선전에 출장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이후엔 청진시의 철공소에서 일하고 있었으나 1979년 38세의 젊은 나이에 작업 도중 발생한 사고로 사망했고, 근무 중 사고로 죽었기 때문에 사회주의건설애국자 칭호를 추서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으로 간 조선적 프로야구 선수라는 특이한 이력 때문에 일본에서도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져서 '코시엔과 평양의 에이스'라는 제목의 전기도 출판되었다.[A] A B C 재일교포 출신의 한국계 일본인. 출생 당시엔 일본 국적을 가지지 않았으나 이후 귀화.[9] (Turrmel Sledge). 한국계 미국인.[10] 이게 얼마나 막장이냐면 2015년부터 3년 연속 3할대 승률로 시작한 kt wiz보다도 통산 승률이 낮다. 각 리그별 최저 승률 팀은 MLB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464), KBO는 kt wiz(.461). kt는 3년 연속 3할 승률으로 시작했지만 2021년 우승했다. 하다못해 NPB 유일의 단일시즌 100패를 달성하고 일본시리즈 우승을 단 한 번도 하지 못하고 사라졌던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의 통산 승률도 .467이다.[11] 다만 우승과 준우승을 더한 횟수는 5회이다. 1985년 삼성의 전후기 통합우승으로 인해서 한국시리즈 자체가 생략되었기 때문이다.[12] 이 기록이 더욱 놀라운 점은 1930년대에 창단한 팀들을 모조리 제치고 가장 먼저 달성했다는 점. 위의 표에도 나와있지만 이 팀이 창단하고 리그에 참여한 해는 1950년이다. 여담으로 한신과 오릭스도 2019시즌에 요코하마의 뒤를 이어 통산 5000패를 달성했는데 이 두 팀은 그래도 각각 1935년, 1936년에 창단하고, 1936시즌부터 참여했으며, 통산 승률이 5할은 넘는다.[13] 한글로 웨일즈나 웨일스로 표기하기도 한다. 현대 영어의 많은 화자들이 Whales의 wh 부분을 /hw/(정확히는
[
ʍ
]
)로 발음하지 않고 /w/로 발음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
[14] 전형적인 일본식 영어라서 미국 매체들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탬파베이 레이스처럼 지명 자체에 '베이'가 붙고 팀명에도 그걸 사용하는 케이스들처럼 착각해서 요코하마 + 베이스타즈가 아니라 요코하마베이 + 스타즈로 인식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지금은 요코하마 뒤에 DeNA가 붙었으니 오해의 가능성이 줄었다고 볼 수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요코하마 DeNA 베이' + '스타즈'로 오해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런데 실제로 요코하마 베이 + 스타즈라고 지었다가는 치바 롯데 마린즈가 들고 일어났을 것이다. 자신이 흡수한 구단 중 다이에이 유니온즈가 있는데, 그 팀의 예전 이름이 바로 "스타즈"다.[15] 쥬세이카츠 그룹 - 건축 관련 기업의 합동기업.[16] 이 때문에 해당 방송국에서는 이 구단의 정보를 방송하는 프로그램이 있다.[17] 모바일 게임의 일본식 표기인 モバイルゲーム를 줄인 モバゲー를 그대로 로마자로 적어서 Mobage라고 쓴 것이다.[18] 문어발 같은 계열사 운영들과 과다한 IP 팔이로 인해 생긴 일이다.[19] 다만 최근에 일어난 유벤투스&호날두 이슈와 겹쳐 모기업 계열사는 유벤투스에 큰 돈을 쓰면서 모기업 야구단에 대한 투자가 마케팅,경영 부분에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현지에서의 비판은 계속 나오고 있는 중이다.[20] 심지어 관중 동원을 위해 게임사 이벤트를 이용하여 DeNA, Cygames 등의 자회사들과 콜라보를 하여 숫자 자체로는 관중동원력을 늘린 것에 비해 경기가 어느정도 진행되면 관중 수가 훅 감소되는 성향을 보이고 있다. 여담으로 KBO의 NC도 비슷한 성향을 보이고 있다.[21] 추가로 2020년 코로나19 이슈로 인한 무관중경기로 리그를 진행해야하는 상황이 찾아와 여태 한 노력이 헛수고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걱정도 존재했으나, 이건 다른 구단도 똑같은 사정이고 제대로 관중을 다시 모집하기 시작한 2022 시즌 총 관중수는 12개 구단 중에서 6위를 차지했으며 2023년에는 4위를 기록했다.[22] 불과 10년 전인 2009년의 요코하마 평균관중수가 17000명대였다. 이는 당시 평균관중수 전체 1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으며 그 관중없다던 오릭스와 지바 롯데보다도 관중동원력이 형편없었다.[23] 실제로 2015년 시즌 이후로 주니치 드래곤즈의 대대적인 세대교체 움직임으로 팀에 재적했던 수많은 베테랑들이 옷을 벗으면서 2016년 시즌 현역 투수중에서 최연장자가 됐다.[24] 거기다 이시이가 1993년부터 써 왔던 응원가가 히로시마 이적 후에도 계속해서 쓰인 덕분에 양 팀 팬들 모두가 이시이의 응원가를 같이 부르는 광경이 펼쳐졌다. 요코하마 팬들이 반복해서 응원가를 부르면 반대편 히로시마 팬들이 스쿼트 응원으로 이시이의 이름을 연호하는 진풍경이 경기 내내 펼쳐졌고 마지막 타석때는 양 팀 팬들의 응원가 열창에 이시이도 감동을 받았는지 눈물을 삼키는 모습을 보였다.[25] 그리고 이노 쇼이치 마저 카지타니 타카유키와 함께 FA로 요미우리로 이적했다.[26] 출처 리라하우스.[27] 일본어로 '베이스볼'을 본래는 가타카나로 ベースボール이라 표기하는데, 베이스타즈를 조롱할 때의 '베이스볼'은 '베이스타즈(ベイスターズ)'의 ベイス를 따서 ベイスボール이라 적는 것. 영어로 표현하면 Baysball쯤 되는 표현이다. '베이스'와 '볼' 사이에 '베이스타즈'의 별을 집어넣어 'ベイス★ボール'같은 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별은 흰색으로 넣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검은 색인데, 일본 야구 매체에서 보통 승리를 '흰 별'(○, 시로보시), 패배를 '검은 별'(●, 쿠로보시)라 표현하기 때문이다.[28] 츠츠고 요시토모의 메이저리그 진출과 아즈마 카츠키토미존 서저리.[29] 의외로 교류전이 처음 시행된 2005년에는 19승 17패로 선전하였다. 뭐 이때는 A클래스를 찍은 해였다고는 쳐도 꼴찌로 곤두박질친 2006년에도 15승 21패라는 그렇게 막장스러운 성적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교류전 최약체로 전락한 이유는 2007년 14승 1무 9패를 찍은 이후 2008~2013년까지의 교류전 성적이 워낙 개판이었기 때문. 2014년엔 13승 11패로 선전하기도 했다.[30]
파일:external/www.sponichi.co.jp/G20120319002859700_view.jpg
가운데가 홋시, 왼쪽이 홋시나, 오른쪽이 홋시조. 참고로 2004년에 모 예능과 연계하여서 온갖 기행을 일삼는 스페셜 마스코트 '블랙 홋시'가 등장한 적이 있다. 충혈된 눈 위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으며, 이른바 '유성 점프'라는 근본없는 다이빙으로 상대팀 마스코트와 팬들을 약올리는 역할을 했었다.
[31] 물론 스타맨 본인은 너구리라고 부르면 몹시 화낸다.#[32] 당시 롯데의 팀명은 롯데 오리온즈.[33] 우치카와 본인은 그런뜻으로 했던 말은 아니었다고 후에 부정했지만, 그럼 위의 발언은 원래는 뭔뜻이었냐는말에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34] 중간에 격투기 선수로 전향해 경기를 가진 적이 있는 이색 경력의 소유자. 프로 시절에는 장타력은 있는데 선구안과 컨택이 막장인 2군 본즈로도 유명했다. 커리어 하이는 22홈런을 친 2003년인데, 타율은 .208, 37타점에 그쳤다.[35] 현 요코하마 2군 배터리코치. 한신에 있을 땐 오승환의 전담 포수로 나름 한국 팬들에게도 이름을 알린 적이 있었다.[36] 닛폰햄 소속의 고스케 카토와는 다른 선수. 지바 롯데에 이어 두 번째 방출, 한신에 완전히 정착했으나 2015년을 마지막으로 또 방출.[37] 발디리스는 오릭스에서 연봉문제로 재계약이 결렬된 후 요코하마로 옮겼는데 요코하마에서도 반쯤 먹튀였던 상황이었다. 교세라 돔에서 꾸준히 15~18홈런씩 쳐줬으니 타자친화구장인 요코하마로 가면 20홈런은 거뜬히 넘길 줄 알았는데 홈런 갯수는 그대로고 다른 타격스탯과 수비까지 하락. 물론 먹튀였다고 하지만 오릭스 시절에는 별 말 없이 잘 지냈던 걸 보면 암흑기 시절 요코하마는 그 오릭스보다도 팀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38] 오죽했으면 요코하마에서 떠난 선수들의 코멘트 모음도 있을 정도이다. 여기서는 그 중의 아주 일부분만 발췌해서 적는다.[39] 요코하마 외에는 그나마 야쿠르트가 많은 편이긴 한데 어쨌든 이쪽도 도쿄 연고를 유지하고 있고 팀명도 '아톰즈'로 잠깐 바꿨다가 창단 당시의 '스왈로즈'로 돌아갔다.[40] 센트럴 리그 팀 중 유일하게 연고지 이전한 구단이다.[41] 다시 말해 히로시마는 헤이세이 연간 동안에도 우승을 못했다는 얘기다.[42] 퍼시픽 리그 팀 중 일본시리즈 우승한 지 가장 오래된 팀은 사이타마 세이부이며, 2008년이 마지막 우승이다.[43] 퍼시픽리그 유일의 20세기 우승팀이었던 오릭스 버팔로스2022년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해 탈출함으로서 히로시마와 요코하마만이 남게 되었다.[44] 참고로 일본시리즈 우승 없이 역사속으로 사라진 킨테츠의 통산 승률은 .467이다.[45] 볼드체는 일본시리즈 우승.[46] 센트럴리그 겸 구단 사상 시즌 최다패 기록 1위[47] 히로시마와 승률 0.0003 차이로 3위[48] 2006년까지는 리그 플레이오프 없음.[49]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승률에서 4리 차로 밀렸으나, 이해 센트럴리그가 승리수로 순위를 결정지은 관계로 승수가 1승 더 높았던 요코하마가 3위를 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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