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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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1]
Johann Heinrich Pestalozzi
파일:페스탈로치_parkpaulus.jpg


출생
1746년 1월 12일
스위스 취리히
사망
1827년 2월 17일 (향년 81세)
스위스 브루크 시 노이호프 농장
국적
[[스위스|

스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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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직업
교사, 교육학자
분야
교육학
1. 개요
2. 생애
3. 영향



1. 개요[편집]


노이호프에서는 빈민의 구원자, 린하르트와 게르트루트에서는 민중의 목자, 슈탄츠에서는 고아의 아버지, 부르크도르프와 뮌헤부흐제에서는 새로운 민중학교의 창설자, 이벨당에서는 인류의 교사, 인간, 그리스도인, 시민.

모든 것을 남을 위해 바치고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이름 위에 축복이 있기를!

페스탈로치 묘지 비문


스위스의 교육학자, 사상가, 교육자. 주로 고아들의 대부로 알려져 있으며 어린이들을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한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편집]


일찍이 루소의 영향을 받아 계몽주의에 심취했고 대학생 때 야학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는 목사였던 할아버지를 따라 신학을 전공했지만, 자유주의 단체인 애국단에서 활동한 게 문제가 되어 체포되기도 했다. 학업을 마친 페스탈로치는 귀농해서 노이호프에 농장 겸 대안학교를 열어서 1778년까지 고아와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노이호프 시절에는 인식 부족[2] 및 재정난 때문에 학교 문도 닫아야 했고 첫아들 야코프와 아내인 안나도 요절하는 등 고생을 많이 했다.

노이호프 학교가 폐교된 뒤에는 교육학을 연구하고 저서를 출판하며 초야에 묻혀 지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유럽 대륙이 혁명에 휘말리면서 고아 문제가 부각되자 페스탈로치도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그는 슈탄츠에서 잠시 고아원장을 맡은 뒤 부르크도르프에 학교를 세웠으며, 기반을 확실히 다진 뒤에는 이베르동으로 옮겨서 1825년까지 근무했다. 부르크도르프 및 이베르동에서 일한 기간이 페스탈로치의 전성기였으며, 유럽 곳곳에서 페스탈로치가 일하는 이베르동으로 자녀를 유학 보내는 학부모도 여럿 있었다.

이후 이베르동 학교가 너무 유명해져서 초심을 잃었다고 판단한 페스탈로치는 이베르동을 나와 따로 학교를 차리기도 했으며, 그 학교가 문을 닫자 노이호프로 귀향한 뒤 1827년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3. 영향[편집]


대학에서 교육학 강의를 수강했다면 그 이름을 한 번쯤 듣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헤르바르트, 몬테소리, 프뢰벨과 더불어 20세기 신교육의 기초를 연 사람이면서도, 나머지 두 사람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이 바로 페스탈로치이기 때문이다.

비문에서도 볼 수 있듯, 그 자신은 거의 일평생을 교육실천가로 살면서 자신이 구상한 교육원리를 실제 교육에 적용했고 지/덕/체의 조화를 강조했다.[3] 그의 교육원리를 수용 및 비판하여 이론적으로 구체화한 이가 바로 오늘날 '교육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르바르트이다.

페스탈로치의 핵심적 교육론 가운데 하나는 "나이에 관계없이 존중을 통한 인격의 대우와 도야"이다. 기원전의 고대 시절부터 중세를 지나 근대까지 "폭력을 통한 복종"을 교육에 대한 독트린으로 삼고있었던 야만적인 교육관에 가장 큰 영향력을 준 인물이다. 물론, 중세 시절부터 폭력을 통한 교육과 훈육을 지양하였던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 에라스뮈스 등이 그러한 예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체계적인 형식을 통하여 아동에 대한 교육론과 훈육방식 등을 체계적인 방식으로 제시한 사람을 말한다면 페스탈로치가 최초의 아동 교육가라고 볼 수 있다.

파일:attachment/스위스 프랑/sfr301.jpg
3차 스위스 20프랑 지폐의 도안으로도 들어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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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탈리아계 스위스인이다. 다만 독일계 스위스인에 동화된 관계로 이름이 독일식이다.[2] 당시까지 교육은 상류층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에, 페스탈로치가 주장한 신분에 상관없는 평등 교육 및 전인 교육은 노이호프 활동 때는 호응을 얻기 힘들었다. 이 상황은 프랑스 혁명 이후에 나아진다.[3] 이를 위해 페스탈로치는 교과서에만 의존하지 않고, 체험학습과 시청각 교재의 중요성도 강조했다.